[설교모음]/장년설교

베데스다(자비의집)

기쁨조미료25 2008. 11. 21. 15:23

 

베데스다(자비의집) 

  요 5:1-9

 

  예수님은 보통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큰 명절이 있을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명절(오순절로 추측)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1).

  서울에 4대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도 여러 개의 문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성전 북쪽에 있는 양문입니다. 이 문안에서 제물로 쓰일 양들을 매매하였으므로 이곳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2).

  그런데 이 양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연못 밑에서 물이 끓어오르는 현상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 연못이 간헐천이어서 땅에서 뜨거운 물이 솟구쳤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과학적인 상식이 부족했기에 이를 신비하게 생각해서 이러한 현상을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휘젓고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천사가 와서 물을 휘젖을 때 제일 먼저 그 물 속에 들어가면 어떠한 병이든지 완치된다고 믿었습니다.(3-4절에 괄호가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 증거가 있는 사실이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의 소문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소문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져 많은 병자들이 그 곳 연못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모여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생사를 건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의 모순>

 

  그런데 저는 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인생의 딜레마와 모순을 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맹인이겠습니까?

  다리 저는 사람이겠습니까?

  혈기 말라 누워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마도 비교적 젊고 건강한 사람일 것입니다. 쉽게 몸을 움직이고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꼭 필요한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고, 별로 절박하지 않은 사람들,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모순된 장소가 바로 베데스다였습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은혜의 집, 자비의 집)는 치유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좌절의 장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도 나을 것을 믿고 그곳에 왔지만, 그리고 꽤 오랜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 봤지만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고 누구든지 그를 불쌍히 여겨 연못에 제일 먼저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7). 자기보다 훨씬 건강해보이고 기다린지도 오래지 않은 사람이, 굳이 그곳에 들어갈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요?

  차라리 줄을 서거나 번호표를 뽑았다면 이런 절망감을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연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저는 이 베데스다 연못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베데스다의 딜레마는 온 인류의 딜레마입니다. 여러분의 딜레마이고 저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모두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있습니다. 오직 승리자만이 웃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 는 실패자로 내몰리며 절망과 좌절을 맛봅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정작 열매는 다른 사람이 따 먹습니다. 언제나 세치기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누구는 바닥부터 기어 올라가지만 누구는 배경이 좋아 높은데서 낙하산 타고 내려옵니다. 그 사람이 꼭 나보다 실력이나 인품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누구 한사람 나를 대신하여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현장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현장입니다.


  베데스다연못의 현상은 영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묘사합니다. 얼핏 보면 베데스다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절망이요 또 좌절만을 안겨주는 곳인 것처럼 율법도 그러합니다.


  목표는 분명히 있는데 도저히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절망입니다.

  율법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이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주지만 실제는 이룰 수 없는 절망만을 안겨줄 뿐입니다.

  물론 율법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바울은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그것을 이루어야 할 인간은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탄식입니다. 바울도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8-19)하였습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절망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마치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베데스다에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

 

  그런데 이 경쟁과 절망의 장소인 베데스다에 누가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잘못 들어 어떻게 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일부로 찾아  오신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이곳에 올 일이 없습니다. 아니 오기를 꺼려합니다. 혹시나 병이 옮을까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로 시간을 내셔서 의도적으로 그곳까지 찾아 오셨습니다. 그 절망과 좌절의 장소에 친히 찾아오셔서 그중 가장 절망 가운데 있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을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물이 아닌 말씀으로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 기적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영적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베데스다와 같은 이 절망의 세상에 친히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내려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음의 땅, 절망의 땅에서 죄의 종이 되어 노예처럼 살아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38년 된 병자 같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섬겨주시고 풍성한 삶을 주시려고 친히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율법이 아닌 은혜로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물에 먼저 들어가려는 경쟁이 아닙니다. 율법을 다 지키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베데스다와 같은 비극적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만나는 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예수님 만나셔서 참 자유를 얻으시고 사랑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소망을 일깨우시는 예수님>

 

  그리고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그 병이 오래된 줄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물으나 마나 너무도 당연한 질문 아닙니까? 그럼 낫길 원하지 계속 앓아 누워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런 질문을 하신 것일까요? 이는 의도적인 것을 봐야 합니다.


  지금 38년 된 병자의 심리상태를 봐야 합니다. 사람이 38년 정도 병을 앓게 되면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과 경쟁이 되질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는 지금 몸만 베데스다에 와 있지 마음은 이미 소망을 잃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딱히 다른 곳에 갈 곳이 없어 그냥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냥 ‘이러다 죽지’하는 마음으로 있는 것입니다.

 

  예>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니까 감옥 안에 있는 주인공의 흑인 죄수 친구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처음에는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다 번번히 실패하여 수감 기간이 30년 40년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이젠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아예 탈출할 생각도 안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석방될까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석방심의 과정에서도 질문을 받으면 멋대로 대답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일정한 희망의 기간을 넘겨버리면 나중에는 절망한다는 것입니다. 자포자기해 버리고 무감각한 인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수 백 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출애굽했습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여전히 노예근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서 “내가 종이었을 때가 훨씬 나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노예근성을 극복하고 소망 가운데 구원의 열망이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네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과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서 구원의 열망, 부흥의 열망을 온전히 회복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정적인 의식을 내버리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리고 두 번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명령하셨습니다. 말씀으로 명령하시니 그가 곧 힘을 얻고 온 몸이 회복되어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왜 “자리를 들라”고 하셨을까요? 다시는 그 자리로 돌아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죄의 자리, 노예의 자리로 되돌아오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유를 누리며 살라는 의미입니다.


  은혜 받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세상 가운데, 죄 가운데 사로잡혀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고 염려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벧후2:20-22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비정한 베데스다와 같은 이 세상에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주의 구원의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구원의 기적을 체험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결코 과거의 죄의 자리, 절망의 자리로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며 온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온 사도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열세 번째 사도로서 그 사명을 능히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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