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가나의 기적
(요 2:1-2)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시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1-2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잔치집에 초청을 받게 되셨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어머니도 계셨습니다. 아마 친인척간이거나 잘 아는 집안이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잔치집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천국은 잔치집에 비유된 점을 고려할 때 단순한 예수님의 행적이라기 보다 내면적으로 천국을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마 22: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눅 13:29)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요 2:3-4)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3 잔치집에 포도주가 모자라게 된 것을 주인이나 연회장에게 의뢰하지 않고 마리아는 예수께 부족한 것을 아뢰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행동이 결단코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뒤 이어지는 내용으로 살펴보아도 무엇이든 믿음으로 예수께 의지한다는 신념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는 무엇이든 부족함을 채우시는 능력의 주라는 것을 믿고 있는 바이며 일상적인 일인 것을 주께 의뢰하였다는 것은 신앙인의 온전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마리아처럼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의뢰 할 수 있었을까요?
4 그 때 예수께서는 의외의 말씀으로 마리아에게 답하셨습니다.
'여자여'(헬,구나이, ), 이 호칭은 당시 귀부인에게 쓰는 호칭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라고 부르시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동양적 혹은 인륜적 인격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이겠지만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셔서 혈육관계로 단순힌 보자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천주교에서 부각시킨 마리아 은총 중재설이라든가 하는 인본주의적 이해는 옳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특별히 성자를 낳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거룩한 은총에 속하긴 하지만 결단코 마리아가 원죄가 없다든가 무슨 특혜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녀도 구원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잉태하였을 때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한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눅 1:47-48)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가 무죄하거나 평범한 사람같지 않았다면{?) 비천한 곙집종이라 말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은 결단토 겸손하므로 이른 말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양심으로 아뢰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겸손하게 이르신다고 비천한 존재라든가 하는 표현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씀은 그녀의 의뢰 자체에 대한 꾸짖음이 아니라 포도주가 부족한 것을 어찌 내게 아뢰느냐는 뜻으로 그녀의 믿음을 더욱 확실한 고백으로 이끄시는 유도적 표현입니다.
'내 때(힐, 호라, , 싯점, 적절한 시기)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의 경륜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께 포도주가 부족하므로 아뢸 때 좀더 종용히 아뢰며 주의 뜻을 겸허히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구할 수는 있으나 아버지의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함께 기도의 의지에 포함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 2:5)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이렇게 되는 대화를 볼 때 우리는 마리아가 처음에 차라리 하인들에게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예수께 말씀을 드려 보라든가 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 모릅니다.
본 절에서 그녀의 대화는 갑자기 하인들에게로 돌아갔으며 주의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이 이행된다는 바른 신앙적 표현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육친의 어머니라고 그냥 그리스도의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입장도 당장에 보이고자 한 아주 작은 인본적 사고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어이없는 주님의 답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도 능력을 행하심에 성부께서 주시는 때를 따라 이루신다는 점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어머니라고 말대로 당장 시행될 것처럼 의뢰하였던 자신의 의지가 감추어지고 당장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하는 약간 당혹한 언변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요 2:6-8)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6 한 통은 약 반 말 정도 담는 그릇인데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는 한 말 반 정도 되는 항아리, 6 항아리에 물을 채웠으면 많은 량입니다.
7,8 예수께서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명하셨을 때 하인들은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명하셨을 때 그들의 상식적인 생각을 앞세웠다면 결코 이행 할 수 없었을 것이나 그들은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순종입니다. 요즘같이 똑똑한 세상 사람으로서 과연 그렇게 순종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어려운 상황이 아닐까 합니다.
(요 2:9-11)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9 연회장은 잔치의 음식을 주관하는 자로서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는 것을 보아 음식에 책임을 진 사람입니다. 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거나 또는 예수님의 명하시는 말씀을 들을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맛좋은 이 포도주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인들 만이 이 상황을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하인은 신약에 주목된 헬라어의 둘로스( , 종, 그리스도의 종의 개념)가 아닌 교회 직분자를 가리킬 때 사용된 직분자, 협력자로 쓰이는 디아코노스( )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께 봉사하는 자가 맡게 되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높은 자가 아닌 하인의 자리에서 순종하는 자가 얻게 되는 기적입니다.
10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이 포도주에 대한 출처를 묻고 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대부분 술은 처음에 좋은 것으로 대접하고 취한 후에는 보다 못한 술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 행위인데 어찌 더 좋은 술을 내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의 힘은 과거보다 미래가 더 아름답고 풍족한 성격을 뜻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결국이 작고 부패하고 실패로 끝나지만 천국은 나날이 더욱 풍족해지는 것을 말해줍니다.
11 에수께서 처음 행하신 기적으로 이 가나안 잔치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앙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에 비유되어 주께서 초청하시는 복음의 내용이며 또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은 부족한 인간의 삶에 풍족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물같은 가치의 존재가 포도주같은 귀한 존재의 변화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 2:12-17)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3 '유월절', 유대인 큰 명절로서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탈출하게 된 일을 기념하는 날로서 정치적으로 해석할 내용은 아니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민족적 명절입니다. 이 날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14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본래 성전에서 장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월절기에는 가족(4-5인)당 양 한 마리씩 자기 집에서 기르던 것을 끌고 와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유대인들의 신앙은 변질되어 형식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아예 사고 파는 일이 당연시 되는 때에 누구 하나 이 일에 대해 반문하는 자가 없었던 것같습니다.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짐승들을 먼저 내어 쫓으시고 장사꾼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들을 엎으셨습니다. 예수께서 화 내신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화내신 것을 보고 어떤 이는 사랑이 많으신 분의 행위로는 부당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동시 갖추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또한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실수가 되는 것입니다.
(마 10:28)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벧전 2:17)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성전의 성격을 청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화내신 모습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하나님의 일은 정결하게 행하는 것이며 주의 뜻은 말씀대로 이행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형식은 무가치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심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소는 소위 교회의 개혁입니다. 사상적 개혁이며 복음의 순수성을 위한 개혁입니다.
중세기의 루터가 일으킨 교회의 개혁은 바로 하나님의 영적 성전을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륜적이며 부패한 중세기의 교회 갱신이었습니다.
16 노끈으로 사람들을 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장사하는 사람들은 타일러 물건들을 가지고 성전에서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죄는 미워하시나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태도를 엿보게 됩니다.
17 이 행위를 본 제자들은 구약 성경을 기억하면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자의 행위에 대한 감동을 얻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 중에 하나님을 지극히 사모함으로 행하는 어떤 성도의 모습을 볼 때마다 주의 말씀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시 69:9)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요 2:18-22)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8 유대인들은 예수의 행하신 태도에 놀라며 무슨 권세와 자격으로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가를 시험하여 주께 표적을 즉, 증거를 표적으로 대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외형적인 것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님의 여러 가지 기적을 보고도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주의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고 사람의 경험이 그러합니다.
(고전 1: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19 예수님의 답변은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신다는 것인데, 이는 유대인들에게 의외의 내용이었습니다.
20 그 때 성전이 46년만에 지으진 것이라면 에수께서 공생애가 30세부터 시작하신 것으로 보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짓고 있던 성전입니다.
엄청난 세월과 일꾼들이 동원된 그 성전을 헐면 3일만에 다시 일으키신다고 하였으니 유대인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21 '성전된 자기 육체', 예수께서 이르신 성전은 46년간 지어진 그 성전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일컫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성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로서 우리의 몸마져 성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고전 6: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2 '성경과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께서 죽은신 후 3일 후에 다시 사시므로 제자들은 이 말씀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약 성경을 알고 있었으며 또는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던 구약의 예언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 2:23-25)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신 상세한 내용은 없지만 성전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아시는 전지하신 분으로서 그들이 믿는다고 해도 그들에게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놓지 아니하셨습니다. 인간의 유한되고 간사함을 잘 아시므로 그들에게 자신을 다 내놓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증거를 받으시기 위해 자신을 맡기지 않으시고 단지 필요하실 때 능력을 얼마든지 행하실 뿐이었습니다. 인간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신뢰도를 얻기 위해 자신의 심정을 다 내어 놓을 상대가 아닐 때 우리는 서로에게 감추는 부분을 갖게 됩니다. 그와 같은 정도에서 주의 의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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