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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콜윈의 무슬림 C5/내부자 운동 지지자들에게 드리는 정중한 질문 10 가

기쁨조미료25 2008. 1. 13. 00:55

게리콜윈의 무슬림 C5/내부자 운동 지지자들에게 드리는 정중한 질문 10 가지

게리 콜윈


. . .  소개의 글: 게리 콜윈


오랫동안 ISFM(International Society for Frontier Missiology: 국제전방개척선교학회)에 참여하고 오랫동안 IJFM의 독자이면서 이따금 기고도 하였던 사람으로서, 나는 하나님께 대단히 감사하고 또한 이 두 기관의 리더들이 내부자 운동에 관심을 기울인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21세기 이 땅에 남은 미전도 종족들 가운데 제자를 삼기 위하여 전진해 나아갈 때 이보다 더 적절하고 중요한 주제는 없다.  

나는 우리가 여기 애틀랜타에서 나누었던 대화와 같은 일들이 속히 일어나기를 지금까지 수년 동안 기도해오고 있었다. 이 일이 EMQ와 IJFM 두 간행물의 지면을 통해 제한적으로 발표되었지만 얼굴을 맞대고 모여서 폭 넒은 대표자들의 견해들을 함께 나누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의견교환과는 비교할 수 없다. 또한 C5/IM(내부자 운동) 지지자들이 서로 의견교환을 위해서 또는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세계를 다니고 있는 반면, 더 큰 선교 공동체 안의 동료들과 필요한 만큼 폭넓게 함께하고 있지 않는 것이 염려되었었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지난 몇 년간 매우 다행스럽게 무슬림들 안에서 C5/내부자 운동을 이끌어가는 두 명의 지지자들과 각각 몇 시간씩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지지나 반대 모두 이해를 깊이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이 만남들을 통해 더 깊이 있고 온전하며 폭 넓은 논의가 필요함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었다.



2005년 9월에 MF(Mission Frontiers)가 방대한 수의 그 독자들에게 “내부자 운동을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제를 실었을 때, 현재 더욱 공개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는 여러 면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계속된 논의와 관심 사항들이 2006년 1월 MF에서 이어졌고 이러한 것들은 2006년 초 EMQ의 사설과, “성 프란시스 지(St. Francis Magazine)”의 온라인 기사와도 관련되었다.1)

최근에 출판된 2006년 6월/9월 본 IJFM와, 이슬람 상황에서 C5/내부자 운동에 대한 티머씨 테넌트(Timothy Tennent) 교수의 구체적 비평도 같은 맥락에 있다.2)  나는 필 파샬(Phil Parshall)이 말한 것처럼 테넌트 교수의 글에 대해 “온전하고, 사려 깊고, 정중한”3)  접근이라는 칭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점 외에도, 그의 논문은 어쩌면 나로서 다루기 어려웠을 작업을 훨씬 쉽게 만들어주었다. 핵심적인 성경 구절들,4)  C5/IM 관련한 신학적이고5)  윤리적인 이슈들을6)  그가 그렇게 예리하게 다루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잘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문도 들고 지금 이과 같은 시도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테넌트 교수의 글을 불필요하게 반복하기보다는 보충하기 위한 시도로써 내가 선택한 것은 C5/IM 지지자들에게 논리적이고 역사적인 고찰들로부터 근원적으로 제기되는 10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지자들이 고려해야 할 열 가지 질문들:

. . .  게리 콜윈(Gary Corwin)

1  이슬람의 탄생 이래로 거의 1400년 동안 세계 교회의 어느 일각에서도 당신들이 현재 하는 것처럼 무슬림들에게 다가가서 제자 삼는 것과 같은 접근을 시도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는가?7)


릭 브라운(Rick Brown)
내부자 운동에 대해 처음 정보를 접한 것은 아프리카에서 1985년에 있었던 선교단체 세미나와 1987년의 글로벌 컨퍼런스, 또한 그 뒤의 후속 컨퍼런스에 참석했던 사람들로부터였고, 따라서 거기서는 논의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진행사항들이 발표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꾼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사소통도 중요하지만 공개하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다.

이 컨퍼런스들에서 관점에는 차이들이 있었으나 누구도 내부자 운동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이, 내부자 운동이 받아들이기에 쉬운 개념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부 무슬림들 가운데 새로운 방법으로 일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전통적인 입장에서 벗어난 이 방법에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다.
(Isaiah 43:19(NIV):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그러나 그 도전은 나에게 있어서 편견을 회개하게 하는 것이었고, 무슬림 문화들과 그 구성원들의 긍정적이고 받아들일 만한 관습들을 인정하도록 배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도에서 지속할 수 있는 관습들이었다: 정중함, 맑은 정신, 순결, 친절, 관대함, 청결함,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에 대한 잦은 언급, 범사에 감사, 쉬지 않는 기도, 엎드려 경배함, 성경암송등.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예비 신자라고도 볼 수 있다.



죤 트라비스(John Travis)
내가 말할 수 있는 바로는,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오늘날 무슬림 민족들에게 다가가시는 새로운 방법(그러나 유일한 방법은 아닌)이라는 것이다. 세계화, 대중매체와 포스트모던주의가 세상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또한 예수를 통한 구원에 대한 단순한 메시지가 온 세상에 지속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일부 무슬림, 유대인, 힌두교인,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이 기존의 기독교를 통하지 않은 채, 자발적으로 예수를 따를 것을 선택하고 있다. 무슬림들이 예전에 단지 예언자로만 알았던 예수를 만나고, 유대인들이 예수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음에 따라, 법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종교적으로는 여전히 그들이 출생했던 종교 공동체에 남아 있으면서 이사(예수) 나 예수아(예수)등의 새로운 신앙 표현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이유들(사회 종교적인 것들, 정서적인 것들, 신학적인 것들)로 인해 염려를 주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 일들은 일어나고 있고 또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창조주와 구세주와 직접 상호 교통할 수 있는 신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다른 문화적 관점들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성경을 다르게 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사람들도 우리의 사랑하는 예수님이 찾아가서 양육하시고 있다는 것을 즐거워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똑같은 기회를 주시는 구원자”이시다.


케빈 히긴스(Kevin Higgins)
이 기준이 모든 새로운 발전이나 아이디어에 우리가 적용하고자 기대해야 할 바로 그것인지 모르겠다. DAWN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과연 “모든 민족”을 복음화하기 위한 어떤 전략이 있었던가? 과연 질문이 정말 사실인가? 내가 보기에는 역사 가운데 “내부자”를 따라 일해왔던 꽤 많은 선교사들의 예가 있다. 데 노빌리, 리치, 썬다 씽 등이 떠오른다. 그들은 무슬림 사역의 예는 아니지만, 내부자 라인을 따라 사역을 하는 것에 있어서 다양한 모델을 시도하였다.


. . .  게리 콜윈ii)
미주 7: 나는 그들의 삶의 문제들을 정리하거나 이웃을 전도할 목적으로 당분간 모스크에 다니거나 이슬람 의식에 공개적으로 참여하는 MBB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일들을 계속 하고 있는 C5/내부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유숲 형제
일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거나 상상할 지도 모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형제들에게 그들이 모스크에 가야 한다거나 또는 가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고 두 가지 중 어느 상황도 영구적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그들의 관습이고 또한 기도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에 모스크에 간다. 다른 이들은 모스크에 가는 것이 그곳에 있는 그들의 친구들에게 주 예수에 대해 말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간다.

. . .  게리 콜윈
우리 하나님께서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실제로 하실 수도 있지만,8)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크게 조심하고 겸손하게 끌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신참 선교사”들을 당신의 관점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세미나에서 주장하는 것보다는 순수한 동료들의 연구를 통해 검토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유숲 형제
이 질문은 내부자들 보다는 외부자들에 대한 것이다. 내부자 운동의 지지나 비판은 늘 그러던 것처럼 논쟁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필요는 열린 마음을 가진 선교학자들이 내부자 운동의 리더들을 방문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실제로 하시고 있는 일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논의를 하려면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

죤 트라비스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모든 민족들을 당신에게 이끄시기 위해 일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알려져 있는 것들이 분명히 많지 않고, 조금은 망설임이나 숙고하는 것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의 영이 교회와 무슬림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분별하기 위해 겸손하게 기도하며,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게리가 제시한 것처럼 동료들과의 대화와 그들의 검토가 필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내부자 접근 방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교회사를 연구하고 동역자들 특히 무슬림 사역 경험이 있는 자들과 교류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는 사람들이다. 게리가 선택한 “신참 선교사 동원”이라는 단어가 좀 마음에 걸린다. 이는 마치 내부자 운동 지지자들이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아직 미숙한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는 듯하게 들린다. 우리들 대부분은 매일 무슬림들과 함께 살고 있고 세미나에 다닐 시간도 없는데 도대체 게리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동료들 그리고 선임 선교사들과 함께 보낸다.


이 내부자 현상은 아마도 어떤 이들이 원하는 만큼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게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많이 진행되어 왔다. 문제는 내부의 제자들이 여전히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위험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루는 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오늘날은 문서화가 되면 도처에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세미나가 열려도 폭넓게 발표되지 않는다. 이 모든 점들을 고려할 때, 내부자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조심성과 겸손한 접근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새부대”의 출현은, 바울의 사역(유대교를 떠났던 초기 기독교 신앙 표현)으로부터 루터(가톨릭에서 나와서 형성한 신앙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당시 거친 반대와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실제로 몇몇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이신칭의를 가르치거나 또는 성경을 지역 언어로 번역한 것 때문에 교회 옆의 말뚝에서 화형을 당했다. 이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은 내부자 운동의 지지자들에게 주의와 기도가 필요한 만큼 동일하게 그 반대자들도 주의와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가진 일부 기독교인들마저도 내부자 운동을 반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역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레베카 루이스(Lebecca Lewis)
초기 내부자 운동은 누군가가 엄청난 선교학적 아이디어를 가지고 “내부자 운동을 시작하자” 라고 말했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 아니다. 늘 그렇듯이, 이론은 현상을 관찰한 후 만들어진다.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확산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길로 움직이시고 계시며 우리는 현상을 분석하며 이를 따라 잡고 있다.  

. . .  게리 콜윈

2  여러분들은 메시아적 유대인 교회와 여러분이 지지하는 메시아적 이슬람(Messianic Islam)9)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했는가? 내게 있어서 메시아적 유대인 교회는 교회와 일차적으로 동일하다.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는 성경적인 계시를 통해 만들어진 예식들은 우리들과 대화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연결되게 해준다. 반면에 메시아적 이슬람은 그들의 정체성을 교회보다는 이슬람에서 찾으며 성경적 계시보다는 꾸란과 하디쓰(Hadith)에 근원을 둔 종교 예식 속에서 찾는다.  


유숲 형제
메시아적 이슬람이라는 것은 없다.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나는 어디에 메시아적 모스크가 있는지 모를 뿐 아니라 그 개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모스크는 단순히 예배처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배처소에서 기도하는 것이 잘못인가? 그곳은 조용하고 경건한 장소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특히 늦은 오후에는 가장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가 좋다. 가장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공동체에게 다가가는 열쇠이다.

나는‘메시아적 무슬림’이라는 말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은 내부자들이 공동체 안의 사람들과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메시아적(Messianic)’이라는 말은 ‘기독교인’이라는 말과 똑같다.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기독교 무슬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다른 종족 공동체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넌센스다. 사실, 우리는 아무런 호칭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스크를 방문할 때, 우리는 단지 그 문화의 내부자처럼, 사실 우리가 내부자이므로, 말하고 행동하며 그렇게 다른 무슬림들은 우리를 받아들인다. 몇 번의 방문 후, 우리가 몇 사람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메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자마아트(가정 교회)가 있는데 그곳은 사람들이 기도, 예배, 성경 공부와 논의를 위해 만나는 곳이다. 사람들은 자주, 때로는 매일 참석한다. 성찬식이 매달 또는 두 달에 한번씩 행해진다. 신자들은 침례를 받는다. 이러한 행사들은 성경에 근거한다.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정체성은 먼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그 다음으로는 무슬림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릭 브라운
진정한 차이는 유대인과 무슬림 내에서의 내부자 운동의 실제와 외부자들이 내부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사이에 있다. 몇 가지 현실들을 살펴보자: 메시아적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 그러나 종교 문화라는 면에서 그들은 유대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유대 회당에서 만나며 유대 종교 예식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 종교예식들은 성경적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대전통에 의해 만들어졌다. 메시아적 무슬림(또는 이사위(Isawi) 무슬림)도 하나님 나라에 마찬가지로 속해 있으며, 종교 문화라는 면에서 그들은 무슬림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메시아적 유대인들과는 달리, 일부 필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메시아적 모스크”에서 만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집이나 다른 장소들에서 대개 예수를 따르는 친구들, 친척들과 자연스러운 모임으로 만난다.(원한다면“Create International”에서 구할 수 있을“상황화 예배” 비디오에서 소개하는 것과 같은 일부 가정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그들은 모일 때 신약성경에 예시된 행동 양식들을 따른다. 기도하는 중에 꼭 성경 안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릎을 꿇거나 절을 할 수도 있고 손을 들어 올릴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매트에 앉기도 하는데, 이것은 예수 당시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경건하고 주의 깊게 성경 구절을 다루고, 매우 정숙하게 옷을 입으며, 관계가 없는 남녀들 사이에 품위 있는 거리를 유지할 수도 있는데, 대부분의 메시아적 유대인들도 그와 동일하게 행동했다. 단지 일부 메시아적 유대인들이 회당에 참석하고 유대식 예배에 참여하는 것처럼 일부 메시아적 무슬림도 모스크를 방문하고 거기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기도한다.

물론, 전통적인 선교 방법은 무슬림 신자들이 그들의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요구해왔다. 이는 그들의 사회를 거부하고 예수를 믿기도 전에 이미 그곳을 떠나간 일부 “성난 신세대”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나온 많은 무슬림(그리고 유대인)에게 있어서 포기는 그들 자신의 문화적 유산과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들은 또한 우드베리(Woodberry)가 지적한 것처럼 배교는 “종교, 언어, 문화, 정치, 국적, 종족, 그리고 가족”에 대한 부인으로써, 이는 사회적 배신과 용서할 수 없는 죄로 간주된다는 것을 안다. 무슬림들은 또한 배교가 그들의 가족에게도 치욕을 주고 배척 당하게 하며, 가족과 공동체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변절자를 추방할 의무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가족과 공동체가 이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방책들을 쓴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재앙의 원인이 성경을 읽거나 외국인들을 방문한 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다른 어느 누구도 이제 다시는 이런 영향을 받지 않도록 확실하게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배교자로 인해서 이런 아픔을 겪고 나면 복음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닫히게 된다. 이에 반하여 내부자들은 종종 복음을 연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경건하며 긍휼함이 풍성한 사람으로 존경 받는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다른 대안이 없다는 가정 하에, 이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의 충격이 된다. 나도 내부자 운동에 반대자였고 하나님께서 내부자 운동을 축복하시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것은 마치 불필요한 전통을 포기하는 단절과 고통을 겪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되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를 포기하는 듯하여서 내게 위협적이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방어기전은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가정과 충돌하는 주장을 거절하고 이런 주장이 헛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여러 나라에서 신실한 믿는 무슬림들과 함께 일해오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고 계시며 축복하고 계시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리고 나는 성경을 살펴보면서 다양성과 상황화에 대한 정당성을 발견하였다.


내부자들과 함께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그것을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이 운동을 보호해왔다. 그러나 현재, 이 운동은 공개적으로 공격 당하고 있고 특히, 외국인 기부자들이 내부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보면서 지역 교회 사람들이 공격하고 있다. 이 운동은 잡지에서도 비판당하고 있는데, 내가 읽었던 비평은 참여관찰을 통해 얻어진 정보도 아니고 내부자 운동의 리더와의 인터뷰를 통해 얻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슈는 중요하고, 방어적인 반대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살펴보고 의논해 볼 가치가 있다. 게리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겸손함을 가지고 이 이슈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많은 방법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고, 그 후에는 그들을 전적으로 기꺼이 도와야 할 필요가 있다.


* 다양한 형태의 상황화 예배에 관심이 있어서 VCD나 DVD를 구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http://www.createinter national.com/store”에서 ‘training’을 클릭하면 된다.



케빈 히긴스
몇 가지 의견이 있다. 시편은 비유대적인 형식과 개념들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여호와화”한다. 이렇게 성경 자체가 이런 과정의 모델이 되어준다. 신약성경의 몇 저자들은 정경외의 종교적인 글들을 인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권위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진리의 도구로써 정경을 유일하며 최고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정경”을 넘어서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도록 독려해 준다. 성서공회의 헬라어 신약성경 미주에 따르면 바울은 사도행전 17:28에서 아라투스(Aratus)와 클레안테스(Cleanthes)를, 디도서 1:12에서는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를, 그리고 고린도전서 15:33에서는 메난데르(Menander)를 인용한다. 유다는 14-15절에서 에녹전서를 인용하며 9절에서는 모세의 승천 이야기를 참조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 37절에서 이사야의 승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비슷하게, 하나님은 꾸란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를 향한 회개와 그 안에서의 믿음으로 가는 길을 사람들에게 놓으실 수 있고 그렇게 해 오셨다.  





. . .  게리 콜윈

3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가 문화적 상황화와 종교적 상황화를 동시에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즉, 종교적 상황화를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문화적 상황화를 확실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유대주의자들의 은혜를 부인하는 교리가 확실하게 보이는 반면 그 구절의 초점은 문화의 전달이든지 수용이든지 복음에 더해져서는 안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테넌트가 이것을 상당히 다루었으므로10)  더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나, 이 구절에 관련하여 생각해 볼 또 다른 질문을 던질 것이다.


유숲 형제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의 생활과 예배 형태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결정되었다. 그들은 성전이나 회당을 방문하고 금식에 참여하거나 여러 가지 희생제사를 드리고 할례를 받는 것조차도 요구 받지 않는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그들 자신의 방법대로 경배하였다. 이는 마치 일종의 종교적인 상황화와 같다. 어떻게 사도들이 모세의 법을 그렇게 유보할 수 있는가 궁금해 할 것이다. 답은 물론 예수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거나 그들이 하는 것처럼 경배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수를 받아들인 어느 누구도 그들의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주 예수의 사역 때문이다. 유사하게 우리는 형제들에게, 진정으로 예수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그들이 C5, C4, 또는 C3 교회에 나가든 아니든 간에 사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것을 희망한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정하였다. 그렇게 한 것은 먹는 것이 우상 숭배의 한 형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여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오직 그분께만 경배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라고 가르친다.



릭 브라운
사도행전 15:16 에서 인용되어 해석된 암 9:12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고 메시아 왕국(다윗의 장막)에 속한 “이방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대목의 위대한 점은, 개종을 하기 보다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있으면서도 이 축복 받는 위치에 그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종이 필수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메시아적 이방인”, 또는 헬라어로는 크리스티아노이(Christianoi)로서 받아들여졌다. 유대인 제자들의 예배관습을 따르는 것과는 전혀 달리 이들 메시아적 이방인은 전통적인 그레코-로만식 예배방법으로 사제나 비슷한 사람들에 의해 집행되는“예배의식(lietourgia)”을 수용하였다: 즉, 그들은 안식일 대신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의 축제들을 무시하며 그리스도의 탄생 축하 예식으로 그들의 동지축제를 진행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 메시아적 그레코-로만 관행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종교적인 획일성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적 이방인이 선지자들과 주 예수께서 가르치신 신조와 가치를 담은 성경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리라 기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혼합주의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IJFM: 23/3”에서“혼합주의 없는 상황화”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룬바 있다 (사도행전 15장의 더 깊은 분석을 위해서는 이 이슈에 관련한 우드베리와 히긴스의 글을 보기 바란다.)



. . .  게리 콜윈

4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와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이야기가 새로운 상황에 복음이 소개될 때마다 그와 비슷하게 따르도록 하기 위한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모형을 보여주기 보다는, 혹시 옛 언약과 요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새 언약이 모든 사람과 민족들, 유대와 이방인들을 위해 맺어졌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했던 초대 교회가 마지막으로 열었던 단회성의 세미나였다고 이해할 수 있지는 않은가?  



물론 그것은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모든 무슬림과 힌두교 종족들을 포함한다. 사도행전 15장 이해의 핵심 요소는 간단하게 말해서, 어느 누구도 구원 받기 위해 옛 언약을 준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을 수용한다는 것이 우상숭배나 음란에 빠져도 되며, 복음 안에서의 연합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의 기록이 더 일반적인 방법으로 따라야 할 모델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이전 지식에 대치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복한 것이나, 행 15장에서 어렵고 분리가 일어날 수 있었던 문제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이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고 의사 결정을 해나가고 있었던 것은 여전히 우리가 본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 지역의 사회-종교적인 상황은 차치하고 새로운 언어 인종적인 상황마다 행 15장의 사건이나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아니다.



유숲 형제
당신은 우리가 성경에서 이 두 부분을 아예 지우거나 그냥 무시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구절들이 폐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케빈 히긴스
콜윈의 이 질문은 사실 더 많은 질문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는 사도행전 15장이 한 번의 사건일 것이라고 추정하며 그의 모든 비평을 증명되지 않은 그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애틀랜타 모임에서, 테넌트 교수는 그 자신이 게리 콜윈에게 모든 성경이 교육과 훈계를 위해 주어졌으므로 사도행전 15장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고 새로운 상황에서 일하는 우리들에게 모델로 제시된 것이라고 말했었고 나도 동의한다.
사도행전 15장은 그 자체로는 확실히 “내부자 방법론”의 전적인 근거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아니며, 우리가 토대로 하는 철학 전부도 아니다.

레베카 루이스
사도행전 15장의 가장 유익한 면들 중 하나는 그들의 결론이 아니라 그들이 진행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던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또한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사도행전 15:8)”라고 사실을 존중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사례를 주의 깊게 들었다(12절).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을 베푸실 것을 가르친 것에 주목하였다(19절). 우리도 그들이 보여준 주의 깊은 과정을 똑같이 따를 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원칙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바리새파 신자들이었다(5절).




. . .  게리 콜윈

5  중심의 헌신이 중요한 기독교나 유대교와는 다르게 이슬람은 외적인 복종과 사회적 순응을 훨씬 많이 요구하는 종교라고 하는 사실이 암시하는 것을 생각해보았는가?


릭 브라운
그 말이 진실로 사실인가? 전통적인 무슬림 문화에서는 신이 사람의 믿음과 경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이 의지적이고 진실할 때에만 가능하고(니야(niyya)라고 부름), 사람이 실제로 신을 보지 못하지만 마치 신 앞에 서있는 것처럼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를, 이흐산(ihsan)이라고 부른다). 필 파샬의 책 “십자가와 초승달”은 많은 무슬림들이 신을 향한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고 그를 간절히 알기 원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만일 복음이 순수하고 이해될 수 있도록 제시되고 성령에 의해 확증된다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복음에 상당히 열려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율법주의, 형식주의, 외형주의에 대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 .  게리 콜윈
쌀랏(의식을 갖춘 기도)이라는 동작을 통하여 주기도문을 외우든, 샤하다(신앙고백)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의 선지자라고 선포하면서 “선지자”라는 말에 대한 많은 의미들을 합리화하든,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주변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그들이 이슬람의 교리를 신봉하고 있다는 선언이다.11)  단어의 다양한 의미에 기초한 복잡한 설명 또는 오직 알라만이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하는 신학적인 단련으로 친절하지 않은 정부 재판장들 앞에서 그 자신을 지켜야 할 때에 적절히 승리할 수도 있다.12)  그러나 그들이 궁극적으로 속이는 자로 보여지지 않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13)  수 세기 동안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사기꾼이라고 정죄했고 기껏해야 기독교는 문제가 많은 종교라고 생각했다.




유숲 형제
실제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샤하다 신앙고백이 신자로 하여금 예수를 증거하는 데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청중을 얻는다. 이는 또한 우리의 구원자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의 우상들을 파괴하는 위대한 일을 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오직 그분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로 인도하였기에 위대한 선지자였다.          

무함마드에 대해 사람들이 믿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함마드를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수니파 이슬람에는 4개의 주된 학파가 있고, 다양한 시아파들이 있다. 이들은 각각 다른 다양한 전통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 무함마드를 인정한다고 해서 이들 중 어떤 것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도 대부분의 명목상 무슬림들이 그렇듯이 샤하다를 고백할 수 있다.

릭 브라운
이슬람의 시작으로부터(꾸란 49:14 참조) 무슬림 신학자들은 관행을 따라 하기만 하는 무슬림들과 진실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mu’min”이라고 불림)로 구별을 했다. 무슬림들은 대체로 진실한 신자들의 수는 적다고 생각 한다. 일부 메시아적 무슬림은 샤하다를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 모두가 그것 때문에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명목상의 무슬림들도 샤하다를 고백하지만 그들도 참된 신자가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가장을 하고 있다. 즉, 내부의 생각과 의도를 은폐한다. 그것은 속이는 것과 다른 것으로서, 단지 사회적 순응이나 자기 방어라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고 이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속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가장하는 것이 단정적으로 잘못인가 아니면 마지막 수단으로써 사용될 수 있는가? 실제로 누군가가 새로운 지도자를 지명하여 기름을 붇기 위해서 왔으면서 소를 잡으려고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누군가가 권력자에게 죽임 당하는 것을 피하려고 미친 체 한다면 그것은 가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사람들이 죽이려고 그를 찾고 있는 가운데 명절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한 뒤 후에 비밀히 그곳에 갔다면 그것은 가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들에서(삼상16:1-3, 시34장과 삼상21:12-15; 요7:1-10) 가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게리의 질문들은 ‘이슬람’과 ‘무슬림’이라는 말 사이에서 어느 정도 혼란을 보여준다. 유숲 형제가 말한 것처럼, “메시아적 이슬람”이나 C5 교회를 “이슬람적”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에 어떤 것이 “이슬람적”이라면 그것은 규범적인 이슬람의 가르침에 순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이슬람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나 “이슬람적 가정교회”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규범적인 이슬람의 틀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세계관과 실제 종교적 관행이 얼마나 이슬람적이며 다양하냐에 관계 없이 전체 문화와 그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최근에 한 무슬림 심리학자 와파 술탄(Wafa Sultan)은 텔레비전을 통해 무슬림 사회가 더 관대하고 현대화 되어야 할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녀는 자신이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 “세속적인 사람”이지만 지속적으로 자신을 “무슬림”으로 소개했고 “무슬림” 공동체의 구성원이라고 했다.



이것은 서구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은 종교를 삶의 다른 부분과는 구별하며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종교적 믿음과 가치의 어떤 통합체로 본다(예를 들어 세계관).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구원 받은 사람뿐 아니라) 사람을 묘사하는데 사용한다. 그들은 ‘무슬림’이라는 말도 이와 같은 의미로 가정하고, 무슬림에게 구원 받고 싶다면 무슬림이 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유대인이 되는 것을 그만두거나 스페인사람이 되는 것을 그만두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반면에, 무슬림들은 기독교가 모든 상황에 대한 법과 관습을 가지고 있는 완전한 문화라고 잘못 가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종종 무슬림 문화를 버려야 하고 기독교 문화 안에서 기독교 관습의 본체를 따르는 기독교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가정하고는 한다. 복음주의 라디오 방송을 들어왔었던 한 무슬림이 있었다. 한 선교사가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런 후 그가 화장실을 가다가 멈추어서 질문했다. “이제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 뭐라고 해야죠?” 그는 기독교가 삶의 모든 구체적인 관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하나의 성경적 믿음과 다양한 세상 문화들의 차이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둘 다 가치 있게 여긴다.



케빈 히긴스
나는 콜윈의 선한 의도를 최대한 인정한다고 하여도 여기서는 그 의도에 대해서 강한 냉소적 논조와 부정적인 태도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동작을 통하여”, “합리화”, “신학적인 단련” 등의 냉소적 단어를 사용하면서 콜윈 자신이 원했던 열린 대화나 상호존중의 토론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무슬림들을 향한 그의 태도도 분명하다. 그는 무슬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마음은 없고 종교적 위선과 외적인 복종만이 있는 모습으로 이해한다. 서구에 대해서 이와 같은 묘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옳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 . .  게리 콜윈

6  여러분은 C5 접근만이 많은 수의(일반적 현상으로14) ) 무슬림들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라는 인상을 확언 혹은 주지하게 될 때, 그와 동시에 내부자가 회심하지 않은 무슬림들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내부자 운동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고 주장과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 C5 사역을 하고 있는 두 주요 종족들의 현장에서 얻은 믿을 만한 보고와 최근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숫자에 대해서 정말 의구심을 일으킨다. 논쟁의 여지가 덜 있는 C4 사역이 더 많은 열매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C5 사역이 있는 일부 지역에서는 실제로 많은 수의 개종자들이 옛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거나 혹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싶어서 C1 공동체로 합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실용주의적인 태도의 모호함에도 숫자로서 성공을 주장하면서 정확한 숫자를 말할 수 없고 더구나 숫자에 대한 다른 보고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역을 칭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숲 형제
죤 트라비스는 C1-C5 분류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전략적 단계를 묘사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C5를 유일한 전략이라고 보지 않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주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다. 우리 중의 어떤 사람들은 샤하다를 말하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모스크에서 기도하지만 일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선택이다. 바깥에서 그들을 C4 또는 C5로 분류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구별을 짓지 않는다. 우리를 연합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주 예수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다. 우리를 우리 공동체에서 몰아내고자 하거나 적어도 우리를 이단자로 낙인 찍어서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키려 하는 호전적인 무슬림들이 있고 또한 호전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격리를 도와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곳인 공동체 안에 남아 있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 공동체들 안에서 진정한 제자와 이름뿐인 기독교인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나, 내부자 운동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제자들은 평범한 무슬림인 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 예수에 대해 증거하는 자로, 또 자마아트(믿음의 공동체)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말씀을 공부하는 자로 드러난다. 그들은 침례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들이 하는 기도가 응답 받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 부탁을 하기 위해 이들을 찾아온다. 바로 이들이 질투심이 가득한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다.


숫자 때문에 기뻐하기는 해도, 나는 내부자 운동이 숫자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수긍한다. 내부자 운동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주와 구주 되심을 믿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열매 안에서 보존하고 자라도록 은혜를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일부 마을에서의 예수 운동에 대해 듣고 확인하려고 그곳에 갈 때, 내가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들 사이에 이적을 행하셨는지를 묻는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진정 예수 운동을 그 마을에서 시작하신 것이라는 신호로 여긴다.


릭 브라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이끄신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다양한 성향과 경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믿음의 표현들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일부 무슬림들은 C5에 이끌리고 일부는 C4에 또는 C3에 이끌린다. C5로 오는 많은 사람들이 C4로 또는 C3로 옮길 수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일부 C3로부터 C5로 간 성숙한 MBB(무슬림 배경의 신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 그들의 정체성과 선교에 편안함을 느낀다. 따라서 이 모든 믿음의 표현들은 옳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며 계속해서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집단으로 하여금 표현이 변하도록 이끄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부자 운동이 단지 몇 군데에서만 관심을 받아왔지만 메시아적 무슬림은 전세계에 존재한다. C5와 C4신자들 사이의 구별이 유동적인 것처럼 C6과 C5신자들을 구별하는 것도 유동적이다. 이 범주들은 티머씨 테넌트의 글에서iii)  표현된 것처럼 분명하게 분리되거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드베리가 주목한 것처럼 그들은 유동적인 스펙트럼 안에 있고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표현된다.
















메시아적 무슬림이 되는 것의 조건은 많은 무슬림들이 기꺼이 그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선택사항으로 안다면 많은 무슬림들이 성경을 읽고 믿는 자들과 연합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자 할 것이다.  무슬림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이 자신들의 문화를 포기하고 가족과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개종자”들이 된다거나 추방당할 것이 두려워서 복음서를 읽는 것이나 듣는 것을 거부하게 될 것이며, 혹은 자신들이 말씀을 믿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성경읽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다. 메시아적 무슬림들의 선택은 이러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열린 마음과 가슴으로 복음서를 듣고자 문을 여는 것이다.  


나는 C5가 유일한 접근법이라거나 심지어 이상적인 접근이 아니라는 게리의 말에 동의한다. 어떤 가족이나 무슬림 공동체에서는 C4나 C3 상태에 대하여 인내를 보이기 한다. 그래서 그것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일 수 있다. 많은 이란인들에게 메시아적인 무슬림은 매력적인 것이 아닌데, 이유는 그들은 무슬림 정체성에 관심이 없고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아주 피상적인 무슬림들이 많은 아(亞)사하라국가에서 무슬림 정체성은 희박하다. 결과적으로 개종에 관련해서 많은 자유와 용인이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무슬림들이 매년 C3 형태의 그리스도인 정체성으로 개종을 한다고 한다.iv)  어떤 공동체에서는 융화될 수 있는 성숙한 공동체가 없다면 C4와 C5가 너무 복잡해서 다루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중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v)  그러나 무슬림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죽음이나 추방으로 이어지는 공동체에서는 C4나 C3도 어떻게 하든 확고한 교회개척운동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개혁신학을 믿는 나에게 “무슬림 전도에서 어떤 것이 효과적이고 그렇지 않은가?”라든가 “이것이 교회역사에서 적절한 전례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들은 중요한 것이 못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공동체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와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에 동참하고 있는가, 아니면 저항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일 것이다. 우리가 모든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전통적인 접근 대신에 우리 자신과 각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우리의 주된 관심사로 만든다면 좀 더 잘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자의 한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공동체의 계획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전통적인 교회의 모델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보다는 교회론적 전통의 우상을 따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라고 기록된 바와 같으시며,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마 16:18), 그것을 하시도록 하고, 그의 왕국 안에 있는 모든 교회에 대하여 홀로 주가 되시도록 하자.  

죤 트라비스
내부자 운동의 주창자들이 이것이 무슬림들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하는 인상을 주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슬림들은 C1-C6 스펙트럼에 걸쳐서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 안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게리가 언급한대로, MF에 개제된 논문에서 내가 지적한 바 있다). 게리의 질문 두 번째 부분에 관련하여 먼저 우리가 그들의 믿지 않는 가족과 이웃들과 대조적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발하는 예수를 따르는 내부 무슬림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많은 무슬림들이 예수를 따르는지를 계산하기 위해서 “조사연구원”들이 무슬림 공동체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매우 어렵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무슬림이 무슬림 공동체를 떠나서 멤버십 통계를 기록하는 크리스천 조직체나 국가교회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러한 계산을 하는 것이 보다 쉽거나 덜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내부자 운동은 무슬림 자신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기 때문에 통계가 어렵고 새로운 신자들에게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내부 신자들의 숫자를 “계산”하는 시도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것으로 비치게 되고, 얼마간 조사하고 숫자를 세고, 우리가 그것을 판단 할 권리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케빈 히긴스
이 글에서 어떤 주창자를 언급하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결코 내부자 운동이 상대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주장한 적도 없고, “C5”가 유일한 희망이라든지, 다른 생동적인 대안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는지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내 입장이 아니다.

레베카 루이스
모든 무슬림 종족그룹이 동일한 범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주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랍 문화와 이슬람에서 분리되어 있는 상당한 무슬림 종족집단들이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향한 교회개척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알제리계의 베르베르족은 아랍과 이슬람의 통제를 거부하고 있고 아랍을 거부하며 자신들의 상용어로 프랑스어를 채택하고 있다. 북 이라크의 쿠르드족, 이란인, 그리고 중앙아시아 종족들 역시 아랍 이슬람통제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한 문화가운데서 C5 종족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역의 무슬림 배경의 신자들은 종종 강력한 C5 운동을 거부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신자가 되기 전부터 소수이거나 자신들의 문화로부터 거리를 둔 사람들이다).





. . .  게리 콜윈

7  당신은 C4 접근의 성경적인 지지들이 C5에서 제시하는 것과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C5가 C1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것 같아 보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여기 이 질문은 정말 되풀이하는 것이지만 되풀이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필 퍄샬이 이 중요한 점을 가장 잘 요약했다고 본다. 내가 느끼는 좌절감 중 하나는 내부자 운동이 C4가 하는 것과 같이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동일한 논거를 사용하면서 그것이 자신들에게서 원래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데에 있다. C4 선교사인 우리는 30년 동안 항상 무슬림 배경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문화, 직업, 가족과 사회 범주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주장했었다. 우리의 강력한 입장은 우리 생각에 신학적이거나 혹은 윤리적인 타협이라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이 타협하게 하는 지에 관해서 다른 쪽으로 나와야 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15)

죤 트라비스는 최근 위에 언급된 편집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매우 유익한 제안을 한바 있다: “정의에 따르면 C3와 C4 예수중심 공동체는 자신의 출생공동체 내에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시도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부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는 “문화적 내부자(C3나 C4를 위해서)”나 C5를 묘사하기 위해서 ‘종교적이고’ 혹은 ‘사회-종교적인’ 내부자와 같은 보다 나은 용어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이든 ‘외부자’가 부정적이고 뭔가 분리된 듯한 감으로 들리고, 많은 경우 자신의 공동체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 배경의 크리스천의 현실은 반영하지 않기에 우리가 새로운 용어들을 찾는 시간이 된 것 같다.16)

유숲 형제
이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이슈가 되지 않는다.  

케빈 히긴스
여기서 콜윈이 누구를 언급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이것은 공허한 메아리 논법처럼 점점 들리는 것 같다.  

릭 브라운
성경적인 논쟁은 C4나 C5 그 둘의 요점들을 지지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비판가들이 C4에 관한 논쟁은 따르면서 왜 C5는 그렇게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많은 무슬림들을 인해서 기뻐한다면 왜 그들은 같이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만 현실은 예수의 제자들이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C4’나 ‘C5’ 용어는 단순히 스펙트럼의 준거점을 표현하는 것이고, 스펙트럼 자체가 일직선의 개념보다는 다차원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구분하는 것은 다른 종족들을 취급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왜곡하는 것이다. 나는 C3나 C2 크리스천과 신앙과 행동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으면서 자신들을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이라고 주장하는 메시아적 무슬림들을 만났었다. 그들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용어는 그들이 속해있거나 존경하지 않는 전통적인 종족그룹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C5 신자들인가? 또한 자신들을 무슬림이라고 인식하고 문화적으로 종교적인 무슬림과 같이 행동하고, 그렇지만 샤하다(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메시아적인 무슬림들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들을 C4로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내가 수년 동안 알아온 사람들인데 샤하다를 하는지 않는지를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챠트 어디에 있는 사람들인가? 샤하다를 말하는 사람에 관하여는 샤하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폭넓은 견해가 있는데 이것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결코 물어보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고 성경이나 꾸란을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많은 무슬림들에게 그들이 메시아적이든 세속적이든 샤하다를 말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소속을 확증하는 사회적인 의식이다. 축배를 들 때 영국에서 “하나님께서 여왕을 구원하신다”라는 말을 하나님과 구원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혹은 기도의 효과를 믿든 믿지 않든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가 메시아적 무슬림 공동체의 일원을 바라 본다고 할 때에, 대가족과 같이 다양한 입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나에게는 무슬림 종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묘사하기 위한 “메시아적인 무슬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선호한다.  



비판가들은 힌두종족들 가운데 “교회 없는 기독교”와 무슬림 가운데 일어나는 C5 운동을 혼돈하고 있다.  신앙의 공동체와 한 부분을 이루고 있지 않은 메시아적인 무슬림들은 C5에 가깝다기 보다는 C6에 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무슬림들은 가족과 공동체 중심이다. 그 결과로 메시아적인 무슬림들은 신앙의 가족과 믿음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교회(그들의 용어로 하면, 움마)와 한 부분이 되기를 또한 원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크리스천이 메시아적인 무슬림들을 “이단자”나 “위선자”로 거부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일치를 위배하고 불신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다.  

. . .  게리 콜윈

8  성경과 교회의 역사가 그 기록과 가르침에 있어서 신자들의 정체성과 야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희석되지 않는다는 것을 관철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열왕기하 5:18, 19절의 나아만 사례는 종종 C5를 지지하는 것으로 인용되는데, 오랫동안 C4 진영에서 형성된 원리를 위한 논쟁으로 더 강력한 사례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국가적 사회적 상황에서 어떤 타협이나 아주 힘든 결과를 직면해야 할 지도 모르는 새로운 신자들의 고난에 대해 연민의 정이 없으신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더 놀라운 것은 야훼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예배나 충성을 그것이 바알이건 금송아지건 산당 및 호세아가 영적인 간음으로 생각하는 것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혐오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일관된 구약의 주제에 대해 C5 문헌은 참조구절이 전체적으로 약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신약의 기록과 교회역사는 신앙에서 성숙한 이들은 시저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시요 삼위 하나님께서만 홀로 우리 경배의 대상이라는 메시지에 어두움을 드리우는 간증을 택하기 보다는 죽음을 기꺼이 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17)





유숲 형제
나는 전통적인 교회와 무슬림 신자들의 가정교회 모두에서 살고 사역도 해왔다. 내가 관찰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평균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무슬림”이라고 하는 그 단어는 하나님께 복종을 의미하고,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표현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이나 교인들 가운데 우리가 발견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기관이나 프로그램, 전통적인 관습, 교리에 더 헌신적이다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께 향한 헌신은 덜 명확해 보인다.  



릭 브라운
나는 유수프 형제가 본인 앞에서 이 질문을 읽었을 때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관대하게도 바알 숭배자, 영적인 간음자, 시저 앞에 무릎을 꿇는 비겁자들과 동일하게 취급될 때에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최소한의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메시아적 무슬림들은 전통적인 크리스천들보다 주 예수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을 연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전통적인 교인이나 선교사들은 종종 성경을 공부해서 그들의 교리적 선교학적 논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슬림 신자들은 성경을 공부해서 하나님의 길을 알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의 예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전통적인 크리스천 사역자들 역시 맘몬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신들에게 선교자금이 확보되어야 선교지에 나가곤 했다. 내부자 사역자들에게는 어차피 내부자를 위한 선교지원이 부족하여서 그러한 거치는 돌을 제거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무슬림들이 성경적인 진리를 이해할 때는 대개 교리를 알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인도되는 말씀에 의해서 깨달아지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교리에 도달하는 데에는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교단의 교리적 동의라기 보다는 참된 신앙이 되는 것이다. 한 선교회의 사역자들이 내부자 운동의 리더들에게 전 교회적인 교리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칼세돈 신조에 대한 작업은 인상적인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하여 씨름하는 지적인 신자들을 돕는데 큰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기만 하면 많은 메시아적인 무슬림 리더들은 많은 선교사들보다 기독론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케빈 히긴스
콜윈이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간음을 비난하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예배를 위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견해가 일관되고 강력하게 지지되는 주제라고 지적한 것은 옳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콜윈은 성경에서 정죄하는 우상숭배와 C5 신자들의 예배와 실천에 대하여 너무나 분명한 입장에 있는듯하다. 그러나,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또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왜 느끼는 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한가지 이상의 질문을 야기하고 있다.

첫째,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우상숭배는 최소한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한가지는 “존재론적인 우상숭배”라고 부르는 것인데, 참된 신이나 참된 신적 존재가 아닌 신과 존재를 숭배하는 것을 말한다(그래서 존재론적이라는 용어를 쓴다). 다른 것은 “기능적인 우상숭배”로서, 삶에 실제로 등장하는 주제, 목표, 대상, 소망 등이 “신”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중요한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그래서 바울은 엡 5:5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로 본 것이다).  

물론 우상숭배의 두 번째 형태(기능적)는 어떤 인간이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유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영적 차원에서 이러한 성경적인 단어를 듣고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정결하게 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C5 신자들이 존재론적인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하는 콜윈의 염려는 두 번째 질문을 일으킨다. C5 무슬림은 우상숭배를 범하고 있는가(여기에서 본인은 본인의 상황에 대하여 충실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예를 들어 C5 무슬림들은 다른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가?  

콜윈의 가정은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그는 우상숭배의 성경적인 금지를 고려하라고, 그리고 참된 하나님을 전적으로 경배하라고 촉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잘 알거나 직접 개입되어 있는 C5 운동들은 예수가 주님이시고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도 하나님이시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여기서 콜윈의 논점을 비껴가고 있는 것인가?  그가 염려하는 것은 C5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인가(그는, 두 번이나 야훼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내가 게리를 아는 한에서 그것이 그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고 본다. “알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우상숭배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이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나는 그가 수백 년 동안 아랍언어권 크리스천과 아랍어 성경은 알라를 하나님을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단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그가 C5나 “내부자” 패러다임이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다른 신에 대한 경배를 조장하고 있다는 데에 염려가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내가 알고 있거나 개입되어 있는 내부자 운동들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 . .  게리 콜윈

9  대부분의 C5/내부자 운동의 주창자들은 외부자들로 보이며, 무슬림 배경의 신자와 이슬람에 아주 친밀한 신자들이 C5/내부자 운동의 개념을 최종 목표로써 삼는 것은 가장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의심할 바 없이 이에 대한 증거는 기껏해야 겨우 논의되는 것 정도이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적어도 주의를 줄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이 주제에서 다른 이의 경험을 아는 것은 가장 유익한 것 같다. 의심의 여지없이 C5 원리를 판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성숙한 무슬림 신자들은 이 운동역사의 일천함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 개념 자체가 혐오적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이나 무슬림들은 틀림없이 C 척도의 낮은 데에 속한 사람들이다. 혹은 이슬람에 관해서는 역사적 상흔이 있는 교회의 크리스천 배경의 신자들이다.18)  의심할 바 없이 첫 요점에 진리가 있지만, 두 번째 요점에 관련한 비판자들이 C 척도 낮은 곳에서 왔다고는 보기 어렵다. 무슬림에게 다가 가려고 진정한 열정을 가진 이슬람상황의 크리스천 배경 신자들은 적어도 외부의 서구선교사들이 말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고 본다.  


유숲 형제
대부분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제자들이 내부자 운동을 반대하고 소수의 선교사들만이 지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와는 다른 문화에 있는 친구들에 관한 것인데, 그들은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목격했고, 다른 선교사의 비판과 격렬한 교인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죤 트라비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갖게 된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버리고 그들의 공식적인 종교 정체성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화적인 크리스천 사이에 오랫동안 보편적인 것이 되어왔다. 그 결과로 이슬람을 버리고 고난을 받았던 이들은 이러한 결단이 구원을 위한 것이고, 크리스천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조건이 되는 것이라고 가정을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무슬림 배경의 신자들(MBBs)은 많은 현지인이나 선교사들 중 기독교배경의 신자들(CBBs)과 같이 내부자 운동(C5 신앙공동체)에 대한 유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많은 수의 무슬림 배경의 신자나 기독교 배경의 신자들이 내부자 운동을 선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의 몇몇 정도만이 선교 컨퍼런스에 참여하거나, 영어로 선교학에 대하여 토의하거나 영어 아티클을 쓸 수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선교사가 그렇게 강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느꼈기 때문에 내부자 접근을 지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를 믿을 때에 그들의 공식적인 종교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알았다면 그 방향으로 갔을 것이라고 말하는 신자들을 많이 만나왔다. 이런 많은 MBB 신자들은 현재 있는 C5 공동체를 지지하고 있거나 새로운 C5 공동체가 태동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과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고, 이러한 접근법의 주창자가 되고 있다. 그들은 진실하게 예수를 따르는 다른 이들과 같이 그리스도 몸의 한 부분이라고 느끼고, 다른 내부자 신자들과 교제하면서 무슬림 공동체 내에서 그들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반면 C3나 C4의 접근법을 선호하는 MBB들이나 CBB들도 많이 있다. 그들을 C5 방향으로 몰아갈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여러 해 동안 우리는 신자들이 대안을 생각해보도록 격려했고, 또한 지도자의 지지를 받으며 그들이 느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사역의 현장을 발견하도록 격려해왔다. C5 사역에 부르심이 있는 사람들은 C5가 아닌 사역에 부르심이 있는 사람들의 간섭 없이 자신들의 사역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C5가 아닌 사역에 부르심이 있는 사람들은 C5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존경과 지지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을 슬프게도 듣지 못한 세상의 수백만의 무슬림들을 위하여 아직도 다양한 사역의 접근과 운동에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으로 C1-C6 스펙트럼이 만들어 진 것이다. 현재 무슬림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신앙표현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촉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무슬림 세계의 고위 현지 교회지도자들과 나누었던 개인적인 교제 속에서, 나는 무슬림들이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만나고, 스스로 말씀을 연구하고 전통적인 크리스천이나 교회에 속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모이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나 역시 그들이 회심할 때에 다른 내부자 신자를 만나고 그것이 대안일 수 있었던 것을 알았더라면 내부자로 남아 있을 수 있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몇몇 무슬림 배경의 신자(MBB)들을 만난 적이 있다.  



케빈 히긴스
이 질문에는 “무슬림 배경의 신자들이나 이슬람에 친밀한 신자들은 내부자 모델에 반대되는 것이다”라는 가정이 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것을 선호하는 많은 사람을 안다는 것이다.  

레베카 루이스
나는 “내부자 운동”이라는 용어가 신자들이 그들 본래의 종교적인 환경에 머무는 종족들에게 제한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 사회, 종교 내에 머물고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이러한 그리스도를 향한 운동을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를 향한 운동이 사람들을 기존 네트워크에서 빼내서 새로운 네트워크(상황화가 얼마나 되었든지 관계 없이. 예: 메시아적인 모스크)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 네트워크 내에 머문다면 그것은 “내부자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가 됨으로써 한 정체성에서 다른 네트워크로 변화되어야 하는 그 어떤 상황도 그것이 얼마나 “상황화”되었든지 그것은 내부자 운동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릭 브라운
내 생각으로는 내부자 운동은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출발되는 운동이다. 하나님의 말씀 연구와 성령의 자극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적어도 본인이 아는 한 사례는 내부자 운동이 예수의 환상으로 시작되었다 (KJFM 이번 호에 실린 본인의 글 ‘내부자 운동의 사례’를 참조하기 바란다). 외부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것은 무슬림들에게 내부자 운동은 그들이 개종자나 심지어는 배신자 될 필요가 없는 선택 가능한 사항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 일 것이다.  


최근에 나는 22개 선교단체의 대표들과 몇몇 단체를 대변한 사람들이 참석한 컨퍼런스에 간적이 있다. 나는 72세의 메시아적 무슬림을 손님으로 초청했었다. 그는 40년 동안 아랍의 대부분 나라에서 신앙을 나누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연단에서 말을 했는데, 모스크에서 무슬림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셨는 지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어떻게 성령께서 사람들의 죄를 확증하시고 그들을 일깨워 주셨고 어떻게 점진적으로 정통신학(orthodoxy)과 신앙실천(orthopraxy)으로 인도하셨는지를 묘사했다.  연단 아래 청중을 향한 그의 간청은 “ 우리를 위한다면 당신 선교사들이 성령이 되는 것을 그만 둘 수 있는가?”였다. 참여자들로부터 끊임없는 격려가 쏟아졌다.  

예수께서 무슬림을 구원하시고 그의 은혜를 무슬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을 공동체로 모으실 수 있다면 그들을 인도하시고 모든 진리로 이끄시지 않으시겠는가?  내부자 운동은 시저나 교황,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리나 맘몬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이다.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엔드류 웰즈가 최근에 말한 바와 같이 “ 선교는 복음을 상황화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복음의 진리를 삶과 생각의 새로운 방법으로 배우는 것이다”(크리스천 투데이 51/2(2007년 2월) p. 89).  





. . .  게리 콜윈

10  이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 서구 선교학자들이 자신의 문화적인 상황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성공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인 성향과 그것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것이 우리 속에 깊이 내재되어 있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어떤 수고에도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공식(formula)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순히 그러한 공식을 발견하고 그러한 구성요소를 실행한다. 내가 C5 주창자들이 다른 사역자들 보다 그러한 경향이 더 있다거나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실용주의적인 해결책을 찾고 있다고 결코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멕가브란 이후 이러한 방향으로 몰아갔던 과도한 교회성장운동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열거한 설명과 관계없이 성경의 계시보다 경험을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먼저 성경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들의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성령께서 행하고 계신 일에 관하여 사도들의 증언 듣기를 원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자신의 사역에 동일한 특권을 주장하는 것과 그러한 결과가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사도(예수님의 사도)가 아니며 단지 모든 증거(성경적이고 경험적인)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부인할 권리가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바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고 가정할 권리도 없다.





케빈 히긴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애틀란타 컨퍼런스는 정확하게 성경적인 이슈를 발표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몇 개의 탁월한 논문들이 내부자 운동들을 위한 확고한 성경적인 논의를 제공하고 있다. 다른 논문들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그러한 식으로 몰아 부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가슴을 들으려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이들에게 올바른 일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교회성장에 관한 “대화”를 별로 듣지 못했다. 실상 우리들 대부분이 교회성장운동에 대해서 회의적이거나 냉소적이라고 본다.  

내부자 운동 패러다임, 혹은 내부자 운동을 주도하는 생각들이 교회성장 운동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재적으로 성경적 주제들, 즉 성육신, 바울의 타문화권 사역, 성경에서 나타난 다양한 종족(ethne)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도”와 같은 것들에 대한 사역적 의미를 깊이 생각한 그 열매일 것이다.  또한 “내부자 운동”과 “교회개척 운동(CPMs)”을 구분하는 이분법은 없다. 내부자 운동은 지도자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그 원리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믿는 자들 가운데 교제의 형태를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성경 자체로서 “교회”에 대한 이슈들을 충분히 드러낼 것이다). 교회개척 운동과 내부자 운동 주창자들은 어떤 경우에 대해서는 서로 겹치거나 이미 받아들이고 있다. 서로가 배울 수 있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 . .  게리 콜윈
결론적으로 간단하게 나는 내부자 운동과 관련된 이슈들과 질문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사려 깊은 기도에서 우러나온 생각을 가지고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사역, 그리스도 교회의 건강과 확장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은 그토록 위대한 것들이다.  


나는 종종 다양한 강의현장에서, “어쨌든 그것은 누구의 교회입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한다. 항상 내가 듣고 싶은 답은 먼저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그 다음으로 지역신자들의 교회라는 것이다. 타문화권 사역자들은 선교지에서 그저 벽돌 만드는 것을 돕는 것으로써, 그것은 총 건축대장이신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하실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지도하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말씀과 기도로 보여주고, 말씀을 어떻게 잘 다루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모든 이들과 영광에 순종하는 것을 삶의 본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결단코 기도에서 물러서서는 안될 것이다.  




죤 트라비스
게리의 이렇게 통찰력이 있는 마지막 진술은 사실 C5/내부자 패러다임과 함께 하는 많은 것들이 그렇다.  그리고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러한 관점과 기대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의 지역 공동체(ekklesia)는 신자들 자신에게나 교황에게, 혹은 타문화권 사역자나 교단의 대표 어디에도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마 16:18; 골 1:18; 엡 1:22-23). 둘째로 외부 타문화권 사역자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사람들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동일한 마음과 가슴을 가진 그리스도인들(고전 3:5-9)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경건하고,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바울과 같이 우리는 이상적으로 그들이 초기부터 자신을 주님께 드리도록 해야 하고, 우리를 내려놓고 게리가 말한 것과 같이 내부자 운동을 재난으로 이끌 두 가지, 즉 주도하거나 명령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 때 우리는 코치가 될 수도 있고 “벽돌”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그들을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요 16:13).  





. . .  주석

1. “Mission Frontiers(FM: January-February 2006, vol 28:1)”에 있는 “내부자 운동에 대한 확대된 대화(An Extended Conversation About “Insider Movements”) 아래 있는 논문들을 보라.  “Evangelical Missions Quarterly(EMQ), vol 42:1(January 2006) 10-11”의 편집글 “내부자운동과 외부자 선교학”과 “EMQ, vol. 42:2(April 2006)”의 “포스트모던 점들의 연결짓기”; “St. Francis Magazine, Nr 4(March 2006)” 빌 니키데스,  “내부자운동의 평가: C5(메시아적 무슬림)”을 참조하라.
 

2.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vol 23:3 (July-September 2006), 티머씨 테넌트의 “이슬람 모스크의 예수(이사)를 따르는 이들: C-5 ‘높은 스펙트럼’의 상황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

3. IJFM, vol 23:3 (July-September 2006) 125: 필 파샬의 “티머씨 테넌트에 대한 네 가지 반응”중 “두 가지 반응”.


4. 특히 사도행전 15장과 예루살렘 공의회

5. 특히 성경에 선포된 바와 같이 사도적 선포를 거짓증거로 삼지 않는 개인적인 경험을 위한 필요.


6. 특별히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정체성의 요구가 이슬람의 정체성과 분리되는 것에 관하여

7. 모스크에 계속 남기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복음적인 이유를 위해서 한 동안 공적인 이슬람의식을 수행하기로 선택한 무슬림 배경의 신자를 내가 언급하는 것이 아님을 제발 주의하라.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영원한 상태가 되어야 된다고 기대하거나 주장하는 C5/IM의 생각을 언급하는 것이다.




8. EMQ, vol 35:2 (April 1999). 성경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것들”의 광범위한 검토를 위해서 죠수아 머씨의 “그의 방법들은 우리의 방법과 다르다”를 보라.  그러나 또한 114 페이지에 있는 티머씨 테넌트의 글도 보라.  C5 상황의 적용에 관련하여 침묵으로는 논쟁의 적절한 증거로 제시될 수 없다. 4세기에 부상한 새로운 아리안주의를 지지하기 위해서 그러한 논리들이 사용되어져 왔다.



9. 메시아적 유대인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존재하는 것으로 자기정체성은 크리스천이었다)은 메시아적인 유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현대 유대주의는 예수를 메시아로서 거부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종교적인 모순어법이다).


10. 테넌트, 105-107.

11. 역사적 크리스천 교리와 역사적 이슬람 교리는 모든 주요한 영역에서 많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 인간의 속성, 죄, 대속, 계시 등과 같은 교리가 그에 속한다. 나의 좋은 친구이고 중동지역 선교의 베테랑인 MK는 최근에 서신에서 우리가 강력한 C5 운동의 주창자인 형제와 나누었던 긴 대화를 상기시켜주었다. 그의 관찰은 다음의 점들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나는 종종 C5 주창자들은 우리 신앙의 역사적인 이해의 대부분을 버리거나 그것을 정통 이슬람 이해으로 격하시킬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나는 한 형제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존재한 이전에 대한 대화를 기억한다. 그는 역사적 크리스천의 이해를 다시 검토할 용의가 있어 보였다).  무슬림이 교리에 관한 기독교의 입장들을 취할 때 이슬람에 따르면 그들은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좋지 않지만 사실이 그렇다.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샤하다를 암송하는 것은 위선적인 C5 신자나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에 대한 광범위한 재 정의를 의미할 수도 있다. 제자도에 대한 의미는 난해한 것이기도 하다.




12. IJFM, vol 23:3 (July-September 2006), 132. “혼합주의 없는 상황화”에서 릭 브라운은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할 법적 승리의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13. 이 논문을 위에서 언급한 내 친구인 MK와 아랍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거짓으로 보일’뿐 아니라” 우리가 이슬람을 아는 한 그것은 거짓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표현하는 아랍단어는 무나픽낀(munaafiquun), 즉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들의 신앙이 기독교보다는 이슬람에 더 가깝지 않다면 그들의 외적인 행위들은 내면의 신앙을 숨기는 것이 됩니다.  나는 C5가 우리를 이슬람신학의 과오로 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14. 내가 아는 최근의 발간물은 “MF(January-February 2006, vol 28:1), 22”에 개재된 죤과 애나 트라비스의 “성경을 극대화하는 것: 우리 상황에서의 이해들”이 있다.  그는 “흥미롭게도 지금 세계의 무슬림 가운데 일어나는 가장 큰 그리스도를 향한 운동은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성격상 C5 운동이다”라고 말했다.  고맙게도 이 주제에 대한 일반적이고 정확한 논의가 “MF(January-February 2006, vol 28:5), 7”에서 편집자에게 보낸 죤의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체를 읽는 것이 가치가 있지만 여기 짧은 인용문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내 동료 중 한 사람은 C3 운동 상담가인데, 그는 보고 하기를 이 민족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향한 운동을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C3와 C4 그룹들이 매년 8-12%로 놀라운 수적 성장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논의에서 더 직접적으로 “적어도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 C5 방법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있고, 또한 세상의 다른 지역에서는 많은 다른 운동(성격상 C3나 C4)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15. 퍄샬, 125.

16. 트라비스, 7.

17. MF(January-February 2006), 11. “내부자 운동과 외부자 선교학”을 보라.  또한 기독교역사의 다른 자료를 참조하라.


18. CBB는 기독교배경의 신자의 약자이다.  다수가 이슬람인 상황에서 문화적으로 소수인 기독교 공동체가운데서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을 언급하는 데에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콥틱 공동체).









i. 게리 콜윈은 EMQ의 부편집인으로 그리고 SIM 소속으로서“아랍세계사역(Arab World Ministries)”에 파견된 주 선교 학자로 섬기고 있다.

ii. 다음의 내용은 아래 제시하는 게리 콜윈의 7번 미주에 대한 유숲 형제의 의견으로서 여기에 곧 바로 싣는다.

iii. “이슬람의 모스크에서 예수(Isa)를 따르는 자들”, IJFM, 23(3), p. 102.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면 동 호 “혼합주의 없는 상황화”라는 릭 브라운의 아티클을 참조하기 바란다.

iv. 알 자지라 방송의 인터뷰에서 시크 아흐메드 알 카다니가 제시한 숫자이다.  좀 과장된 것 같아 보인다. http://www.aljazeera.net/programs/shareea/articles/2000/ 12/12-12-6.htm 영어 번역은 http://www.former muslims.com/forum/viewtopic.php=972에서 볼 수 있다.

v. 이분법적 사상가들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통합된 이슈들로 본다.  그래서 역시 다음과같이 이분법적 대조로 평가한다: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전부 아니면 무.  그와 같은 사람들은 모든 국면에서 무슬림이든 아니면 그렇지 않은 식의 선택을 생각한다.  이분법적 부인은 역시 다양성을 거부하도록 하는데, 그것은 이분법적인 사상가들이 한 길/한 교회/한 종족/한 문화/한 견해만이 옳다고 보고 다른 것들은 틀렸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신앙과 예배의 다른 표현들을 거부하도록 할 뿐 아니라 한 성경번역은 “완벽”하고 다른 것은 “틀렸거나” 심지어 “악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성경번역에 있어서의 다양성도 거부한다.  반면 복합적인 사상가들은 복잡한 이슈들을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 부분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이분법적인 용어보다는 척도를 따라 평가를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 문화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인식하고 서로를 비교하면서 평가한다. 세계관의 다른 요소를 인식하고 성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 기준으로 하나하나를 평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