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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의 십자가 / 제시 펜 루이스 지음

기쁨조미료25 2009. 10. 28. 12:32
갈보리의 십자가 / 제시 펜 루이스 지음

 

갈보리의 십자가 / 제시 펜 루이스 지음

CLC / 2008년 1월 / 182쪽 / 7,000원

 

▣ 저자 제시 펜 루이스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는 ‘십자가의 도’에 관한 사경회를 열어 1990년 초 영국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웨일즈 영적 대각성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가정 주부였지만 1927년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영국 전역과 유럽 각국을 돌며 십자가의 도를 전했고, 영국의 케직 사경회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녀는 1861년 영국 웨일즈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9세에 공무원윌리엄 펜 루이스와 결혼하였으며, YWCA 간사로 일하며 청년부를 지도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십자가의 도』(두란노)가 있다.

 

 

▣ Short Summary

1900년대 초 영국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웨일즈 영적 대각성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저자 제시 펜 루이스는 이 책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복음주의적인 입장에서 심도 있게 증거 한다. 구약에서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이르기까지 십자가의 구절을 차근차근 해석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무심코 잊고 있던 십자가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불러일으킨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처음 구원을 얻었을 때 가졌던 그 첫사랑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성경에 나오갈보리의 십자가의 의미를 보다 확고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필수적이었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모세가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 우리라.”,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해야 하고 그들을 아버지께 인도해야만 한다.”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께서 자신 앞에 있는 길을 제시하기 시작했을 때도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분의 첫 부름을 듣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믿었다. 그들은 마음 깊이 주님의 영생의 말씀을 목격했으며, 그분의 은총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십자가라니! 고난과 죽음이라니! 제자들은 이런 것들을 생각조차도 못했다. 비록 한동안 주님이 행하신 일들에 경탄했었지만 말이다.

 

▣ 차례

제1장 갈보리와 예언된 십자가

제2장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해석된 십자가

제3장 십자가의 두 가지 모습의 메시지

제4장 십자가와 율법

제5장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히는 것

제6장 십자가와 살아계신 그리스도

제7장 십자가와 성령

 

제8장 십자가와 삶

제9장 세상에 대해서 못박힘

제10장 십자가와 어둠의 세력

제11장 십자가와 그 연속성

제12장 십자가로의 부르심

제13장 십자가에 대한 선포

제14장 보좌 중앙에 있는 어린양

 

 

 

갈보리와 예언된 십자가

 

그 시간이 마침내 다가왔다! 세상의 창조 시부터 죽임당하도록 예정된 어린양은 이제 세상이 보는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그리고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일을 행하려고”(행 4:27-28) 함께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해골(갈보리)이라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전에 수세기 동안 예언자들의 목소리와 전해져오는 교훈 속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런 끔찍한 시간을 예언했고, 그 사건 이후로 거의 2천 년 동안이나 이 세상을 십자가로 되돌려 놓고 있다. 갈보리는 이 세상의 중심축이다. 모든 앞선 역사는 이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으며, 이어지는 모든 것들도 이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다가올 미래도 바로 이 십자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하늘로 구원받은 자들도 보좌의 중심에서 죽임당할 것처럼 서 있는 어린양을 보았을 때에 바로 그곳에서 천국의 중심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갈보리라고 불리는 그곳으로 끌려가기 7백 년 전에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 이사야는 그 십자가를 예언했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에 대해서 그림을 보여주듯 묘사했다. 하나님의 영은 이사야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과 속죄하는 어린양의 희생 제사 그리고 십자가의 열매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게 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왔을 때에 -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셨을 때 - 마음의 눈이 가려진 심령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언의 성경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영광의 주를 못박았을 때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누구에게 주의 팔이 드러났느뇨?”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외치고 있으나, 그의 메시지는 모든 인간의 사상을 초월하며, 더욱이 모든 인간 사상과 대조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이 계시가 누구를 말함인지 의아해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라난 그리스도를 “연한 순,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라고 묘사한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가지에서 나온 연한 순은 하나님께 대단히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된 이스라엘의 포도나무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실망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소중한 포도원은 마른 터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이스라엘의 가지로부터 나온 순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모양도 풍채도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 연한 순인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것이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를 거부하고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간고와 질고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그 의로운 종은 하나님께는 매우 높임을 받을 것이나, 사람에게는 그 놀라움으로 인해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으려 하는 사람처럼 될 것이다(사 52:14). 그의 얼굴과 형체가 “사람의 아들들” 이상으로 손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분의 얼굴이 가시 면류관 때문에 얼마나 많이 손상되었을 것인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은 병사들의 채찍으로 얼마나 많이 손상되었을 것인가!

 

성령은 그리스도의 고통의 원인과 목적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손상된 형체를 가지신 바로 그분이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처는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이사야는 이 말씀을 외칠 때에 자신이 전 인류를 위한 대언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누가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는가? 우리가 아닌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바로 죄의 본질이 된다. 모든 인간들이 제 길로 간 것은 결국 허물과 사악으로 귀결된다.

 

이사야는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모습을 털 깎는 자의 손안에 있는 양으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한 마리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신약의 복음서는 이사야의 이 예언이 어떻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는가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그 인자에 대해 이미 선지자들이 자세히 묘사해 놓은 성경을 곰곰이 생각이나 해보았겠는가? 그러나 고통 받는 인자는 그 모든 것을 알았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나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어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가 그를 팔아 넘겼을 때에도, 그의 제자들이 그를 버렸을 때에도 “씌어진 대로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에 대해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에 씌어진 모든 것이 성취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했던 말씀을 상기시켰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장사 방법도 예언했었는데, 이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여러 측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준비된 양’으로서의 측면이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날마다 드려왔던 희생제사의 모형, 즉 속죄제의 모형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에게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사야는 때가 차서 드러날 하나님에 의해 준비어린양을 예언했다. 예배자들이 희생물을 가지고 나와야 했으나 하나님이 어린양을 직접 준비하시고 그에게 모든 죄악을 담당시키셨다. 이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갈보리에서 그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1). 이 말씀에서 십자가의 또 다른 측면이 언급되었다. 갈보리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어 보인다. 즉 ‘열매를 위한 희생의 법’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간 존재와의 교제를 원하시는 창조주의 소원은 그의 마음과 성품의 계시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신비 중 하나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인간 외에는 그의 마음에 합할 그 이상의 존재가 없었다. 첫 번째 창조물의 타락으로 근심하고 있던 하나님은 새로운 족속의 탄생을 위해서 갈보리에서 그의 생명을 주신다. 이는 이탈하여 각자 제 갈 길로 돌아선 사람들의 재창조를 의미한다. 죽음으로 인간의 죄악을 짊어지심으로써 많은 의로운 사람들을 세우신 그는 고통의 열매를 보고 만족하신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 53:12). 여기서 우리는 갈보리의 또 다른 측면 ‘십자가의 승리’를 보게 된다. 여기서 전쟁과 싸움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나누는 것을 암시했던 이사야는 그 밖에 다른 곳에서 “강포자의 빼앗은 것”과 “포로 된 자”를 구원하시는 전능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전리품은 “고난의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왜냐하면 죽음으로 그의 영혼을 쏟아 부었고 죄인과 함께 되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적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적과의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다윗도 계시 속에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높은 곳, 곧 “갇힌 자들”을 성소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영감 받은 저자는 “죽음을 통해서 악마를 파멸시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생 동안 노예 상태에 종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구원해 낸다고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완벽한 순종으로 그는 고통과 죽음의 잔을 수락하고 받아 마셨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을 우리가 어찌 측량하리요? 갈보리는 우리에게 사악한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원인을 한 가지 알게 한다. 사탄은 “가장 높은 자”로 추앙되기를 바란다. 그러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낮추어 가장 낮은 곳에 처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다. 또한 이 땅에서 가장 심각한 수치였던 갈보리가 하늘에서 높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 짧은 문장에서 우리는 베일에 가려 있는 갈보리의 승리에 대한 천상의 모습을 잠깐 볼 수 있다. 또한 주님이 하나님 앞에서, 그가 위해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로 나아가자. 이사야의 예언 속에서 던져진 십자가의 빛으로 나아가 보자.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 그 멸시의 십자가를 참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때가 차매 이 세상에 오시어 “이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라고 외치시는 신인(God-Man)이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그는 구원의 역사를 마치신 후에 머리를 숙이셨고, 아버지의 손에 그의 영혼을 맡기셨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의 예비된 양이요 죄인을 위한 속죄 제물임을 안다. 어느 인간들보다 더욱더 상처의 흔적을 가지신 주님은 우리의 죄악을 위해 친히 상처입고 고통당하셨다. 우리는 그의 매 맞음으로 인해 나음을 입은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후, 오순절 날이 막 지난 후에 한 권세 있는 내시가 사막에서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을 읽고 있었다. 그가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한 마리 양과 같았다”, “그의 생명이 취해졌다”라고 씌어 있는 말씀에 다다랐을 때에, 빌립이라고 하는 주의 제자 중 한 명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성령의 명하심에 따라 내시 옆에 앉은 빌립은 이사야의 그 예언이 예수를 말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면서 성령께서 준 메시지를 내시의 마음에 전했다.(행 8:26-35) 즉 성령께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말씀을 친히 증거한 것이다.

 

십자가와 율법

 

갈보리의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화해의 장소이며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되는 장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사람은 죄의 속박에서뿐 아니라 “율법”의 속박으로부터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무기력한 죄인에게 도달할 수 없는 순종을 요구하고 그를 죽음의 무기력 속으로 더욱 깊이 데리고 간다. 하나님은 오직 죄와 죄의 가증함을 드러내시려고 죄가 넘치는 곳에 율법을 주셨다.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넘치는 것이 보여지도록 먼저 죄가 가련한 죄인들을 지배한 것이다.

 

죽음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죄인을 그 쇠사슬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천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디어 죽음의 판결과 함께 그 벌은 대표되는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시행되었다. 동시에, 죄의 통치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모든 믿는 사람들 속에서 끝났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죽음의 관문을 통해서 다른 영역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곳은 율법이 따라올 수 없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한 노예와 같은 의무적 복종이 아니라 새로운 기쁨의 순종의 영을 가지고,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직 기쁜 소식(복음)으로 다가온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때에 싸웠던 영혼의 내적인 쓰린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보려는 인간 욕구의 활동성으로 야기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강력한 모습이다. 그러나 율법은 영혼을 죽음의 장소로 데려온다. 여기서 죽음이란 갈등의 정지말하는 것으로, 더 이상 싸움이 없을 때에 영혼이 도착하는 지점이다. 처절한 절망감에 “그러면 누가 나를 구원하리요?”라고 외치게 되는 지점인 것이다.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이 모습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우리가 탐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 순간, 우리는 즉시 탐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너희는 탐욕하지 말지니라”라는 말이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반하는 타락한 본성 속의 모든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육체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반목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길로 가게 하고, 그들 육체와 정신의 욕구를 채우게 해 보라. 거기에는 어떤 적대감이나 투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직면케 하고 그것을 순종케 해보라. 그때는 죄는 깨어나서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모든 일들을 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인간 안에 있는 적대감을 인간 스스로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살 때는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직면하게 되자 내 안에 어떤 것이 깨어나서는 하나님의 율법과 싸우게 되었다. 잠자고 있던 죄가 되살아났다. 나는 그 율법을 도저히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발견했다. 나는 두 인간이 되는 것 같다. 나의 의지로는 옳은 것을 행하려고 하지만 전적으로 선한 것을 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나쁜 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죄이다. 죄가 나를 속였다! 그 결과가 사망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의 유혹에 순복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죄는 나를 죽인 것이다.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구원의 필요성을 인간이 더욱 알도록 하기 위해 창조주에 의해서 고안된 그 계획은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의 계명은 나에게 더 좋은 삶을 살도록 이끌었으나 동시에 그것은 나를 희망 없는 좌절과 죽음의 무기력 상태의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게 했다. 죄는 우리가 그것을 미워하기 전에 이미 ‘과다한 죄’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타락의 깊이는 구원의 높이와 깊이, 넓이와 길이가 이해되기 전에 알아야 한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상태를 알도록 이끄신다.

 

그 투쟁은 얼마나 쓰라린 것인지! 인간의 교만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드는지! 그러나 내가 죄를 미워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나의 눈이 하나님 뜻의 아름다움과 선함에 열려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영혼이 구원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에 구원이 있다. “곤고한 사람”은 도움을 위해 부르짖는다. 그의 외침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사람의 교만은 깨어진다. 당신 “곤고한 사람”은 갈보리로 나아간다. 당신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다. 바로 그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당신을 자유케 한다. 당신 대신 죽으시기 위해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보내진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당신 안에서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제 당신은 성령의 것들을 생각하면서 성령 안에서 한 걸음씩 걷고 있다는 것을 알라. 당신은 당신의 의가 아니라, 당신 안에 거하시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유념하라. 이제부터 당신은 살 것이고, 나날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노예적인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고,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로의 부르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서 주님은 외치셨다. 그러나 죽음을 지나 무덤 너머의 생명으로 나아가시고, 높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시기까지는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선택하신 그릇인 사도 바울을 통해서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또한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모든 이에게 십자가를 요구하신다. 바울은 너희의 십자가를 지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라고 선포한다. 그 십자가는 이미 승리를 거둔 십자가이고 신자를 주님의 승리에 초대하는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를 견뎌냈던 주님의 입에서 나온 십자가로의 부름은 구원받은 사람들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어린양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현 세상의 유일한 길을 예시하는 것이다. 복음서에 다섯 번 정도 십자가에 대한 주님의 부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말씀은 주님의 부름을 순종하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 십자가의 각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첫째, 십자가의 필수성.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십자가의 길은 그리스도께 필수적이었다.

 

어린양과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은 같다. “해야만 한다”는 명령은 주님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해당된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인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배우려는 사람은 그분의 십자가를 반드시 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 배울 없는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오직 한 길을 어린양이 걸으셨기 때문에 어린양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하늘의 보좌는 오직 죽임당한 어린양에게만 주어진다.

 

둘째, 십자가의 의미.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인간에 대한 갈보리 십자가의 중대한 의미는 “그 자신”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드러내 주는 십자가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으로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그리한다면 그는 악의 능력에서뿐만 아니라 죄의 속박, 율법의 공포, 세상의 영으로부터도 구원받을 것이다. 복스러운 갈보리의 죽음이여! 모든 괴로움, 모반, 이기심, 자만심과 죄의 중심인 “그 자신”에 대하여 이 얼마나 순수하고 심오하고 효과적이며 현명한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자.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고요히, 조용히 십자가의 길을 가라. 그러면 갈보리의 어린양을 따를 뿐만 아니라 하늘 중앙의 어린양의 보좌도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셋째, 십자가의 깊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마 16:24-25). 주님은 이번에는 썩기 위해 땅에 떨어지는 밀알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스런 말씀을 하신다. 우리는 죄를 끊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에 만족해 왔다. 그러나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의 생명은 우리의 죽어야 할 운명의 육체 속에 예수의 생명이 확고해지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교하고 미워해야 할 생명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받은 생명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늘로부터의 생명과 구별하기 위해서 육적인 생명이라고 부른다. 하늘로부터의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연합하게 한다.

 

다른 곳에서 주님은 이 육적인 생명을 인간의 “본연의 생명”이라고 설명하셨는데, 이것은 인간 자신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생명을 사랑한다. 이 육적인 생명은 감각이나 인식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이 땅의 것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므로 우리 또한 이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초기 신앙 생활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정한 생명과 감정에 근거한 생명이 함께 뒤섞이게 된다. 명확한 불순종이나 죄에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기분의 변화무쌍한 동요 그리고 상승과 하강을 계속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성령 안에 살고, 성령과 함께 동행하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만을 의지할 때에 성령은 우리를 감각적인 즐거운 감정과 이 땅의 변동적인 기쁨을 뛰어넘는, 변함없는 평화의 영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있는 진리의 영을 육적인 모든 것에서 분리시켜준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내주할 때 이러한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육적인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미워하며, 십자가에 이런 육적인 생명을 굴복시킬 때 그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양을 따르고 우리 안에 그의 생명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원하며, 인간들 속에서 주님의 걸음으로 진실하게 걷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십자가의 깊이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죽음의 이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모두 부정하고 끊고 미워해야 한다.

 

얼마나 광범위하게 그리고 얼마만큼 깊게 부인하는지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게 아느냐에 달려 있다.

 

주님과 함께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 죄를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부인하고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한다. 나 자신을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지상의 모든 생명력을 분출케 만드는 육적인 생명을 부인해야 한다. 예수의 생명을 덧입기 위해 예수의 죽음을 항상 짊어져야 한다. 그렇한다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어야 할 육신에 더욱 뚜렷이 나타나고, 우리를 통해서 주변 사람들이 생기를 띠게 될 것이다.

 

넷째, 십자가 그리고 지상의 연대. “아비나 어미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마 10:37-39). 하나님께서 하시는 예리한 검의 사역은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육신과 영혼으로 나누는 것이다. 어린양을 따르는 데 있어서 못박힌 어린양과 사람의 유대 관계 사이에 언젠가는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인간의 적은 바로 자신의 가족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질하는 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생명으로 연결된 주님을 따르고, 모든 것을 주님 발 앞에 내려놓을 때 하늘의 기쁨으로 모든 것이 변형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섯 째,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고백. “십자가를 지라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6). 육적인 생명은 인기를 사랑하고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집중되어 있다. 육적인 생명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나온 진리와 주님을 반대하는 죄많은 이 세대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게 만든다. 그러나 주님은 복음을 위해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이것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나 자신과 육적인 생명을 부인하고 세상에서 자신을 단절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만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인간의 영광을 사랑하는 육적인 생명을 버려야 한다.

 

여섯 째,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 사도 바울이 “예수의 죽으심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고 말했던 것처럼, 주님도 “날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실제적으로 부활의 능력을 더욱더 명백히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계속적인 본받음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바울에게 드러난 복음을 보면, 주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갈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을 명심하고, 못박힌 예수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해야 한다. 날마다 육적인 생명을 잃는 것을 고려해야 하며 날마다 육적인 생명을 주님의 생명과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결코 우리 자신을 위한 십자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기꺼이 온전하게 따르고 “십자가의 길”에 굴복해야 한다. 날마다! 날마다! 주님은 곤핍한 이 세상에서 당신의 못박힌 대사가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십자가로 부르신다.

 

일곱 째, 십자가의 요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무조건적인 양도는 창조자이며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구이기도 하다.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존재한다. 주님은 구원받은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신다. 신자는 그 생명이 주님께 귀속되기 때문에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나서도, 십자가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이 지닌 십자가를 감당해야 한다. 모든 길에서 십자가 도상의 주님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본인에게 아무런 어떤 능력과 자원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대적하는 끔찍한 적을 만났을 때에 우리로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게 한다. 십자가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장소로 이끈다.

 

결국 십자가의 종합적인 요구는 한마디로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귀중한 피로 구원받은 이를 샀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는 자만이 “금생에서는 백배나 받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받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우리를 인도한 주님을 배반하게 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밝히 드러난 십자가의 예수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가 지닌 십자가는 주 안에서 사라지고, 우리는 기쁨에 넘쳐서 현 세상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로의 부름은 주님의 명령이다. 십자가의 요구는 절대적이다. 십자가의 영광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문 : http://cafe.daum.net/doulos12/9Bpb/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