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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토미 테니 지음

기쁨조미료25 2009. 6. 21. 13:03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토미 테니 지음/윤종석 옮김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

토미 테니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2년 10월/195쪽/7,000원

▣ 저 자 토미 테니

성령의 불을 품은 사람 토미 테니, 하나님은 그에게 임재의 능력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을 좇는 사람’으로 만드셨다. 이후 부흥의 불을 지피고 타오르게 하는 일을 맡기셨다. 3대에 걸친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난 토미 테니는 16세 때 설교를 시작해 약 10년간 목회 사역을 했고, 이후 20여 년 동안 미국 전역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순회 사역을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GodChasers.network (www.godchaser.com)를 설립하여 매체와 저술을 통해 하나님을 좇는 일에 더욱 매진하고 있다. 현재 아내 지니, 세 딸 티파니, 나타샤, 안드리아와 함께 루이지애나에 살고 있다. 그는 요크셔테리어종 작은 개 로미오도 식구에서 빼놓지 않는다.

▣ 역 자 윤종석

전문 번역가, 서강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상담학(M.A), 골든게이트 신학대학원에서 교육학(M.A)을 공부했다. 역서로는 『묵상하는 삶』, 『빌리그레이엄 자서전』, 『영적 리더십』,『놀라운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의 모략』등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하나님을 좇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그들은 누구나 아는 무미건조한 진리에 진 칠 마음이 없다. 그들은 전능자의 신선한 임재를 추구한다. 당신이 진정 하나님을 좇는 자라면 단순히 하나님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우리를 준비시킨다. 회개가 있기에 그분의 임재를 추구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고백한 것이 언제인가? 사탄의 책략은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없도록 우리를 잡동사니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고, 오랜 세월 그 작전은 특효를 발해 왔다. 우리를 영적 세계에서는 거지 수준을 면치 못하게 하면서 이 땅의 형통함을 먹고 살도록 철저히 길들인 것이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배은망덕한 자식처럼 굴면서 용돈과 축복만을 조른다. 하나님의 손만 구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만을 원합니다.”라고 부르짖는 일과는 담을 쌓았다. 우리가 그분 영광의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계시 앞에 기념비나 세우려 한다면 그 분은 극구 막으실 것이다. 특히 우리가 깨어진 죽음과 기도로 그 계시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신이 죽을수록 그분은 가까이 오실 수 있다. 부흥의 공식은 지금도 똑같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회개의 제단에서 죽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단지 부흥이나 순간적 강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 차 례

서문 하나님은 잡힐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1장 얼굴을 갈망하라

2장 천국 빵을 얻으라

3장 가까이 나아가라

4장 육체를 버리라

5장 임재로 들어가라

6장 영광을 구하라

7장 땅을 회복하라

8장 영향을 미치라

9장 자신을 깨뜨리라

10장 간절히 기도하라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

토미 테니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2년 10월/195쪽/7,000원

서문 하나님은 잡힐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을 좇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그들은 누구나 아는 무미건조한 진리에 진 칠 마음이 없다. 그들은 전능자의 신선한 임재를 추구한다. 당신이 진정 하나님을 좇는 자라면 단순히 하나님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 분의 임재가 느껴질 때까지 따라갈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계시’의 차이는 아주 단순하다. 진리는 하나님이 계셨던 곳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불행히도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이 지나신 경로와 그곳을 지나실 때의 무게, 심지어 그분의 성별까지 따지느라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진정 하나님을 좇는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하찮은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 ‘계시’의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 진리의 경로를 바짝 좇아 달리기 원한다. 나는 하나님을 좇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만난 다른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당신도 하나님을 좇는 사람들의 무리에 끼지 않겠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1장 얼굴을 갈망하라

우리는 하나님이 살고 계신 곳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더 확실히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 당신과 나 같은 이들에게 다시금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묻지 않으마.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너는 정말 나를 아느냐? 너는 정말 나를 원하느냐?”

나는 내가 그런 줄 알았다. 내가 사역을 아주 성공적으로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미국에서 크다고 꼽히는 교회들에서 말씀을 전했고, 국제 전도 사역도 했다. 러시아에 방문해 많은 교회의 개척을 거들기도 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가을의 일요일 아침에 있었던 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내 사역의 모든 업적과 공로는 그 사건으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것은 내 오랜 친구의 전화에서 시작되었다. 텍사스 휴스턴에서 목회하고 있던 그는 자기 교회에 와 설교해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왠지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하나님이 주실 그 뭔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집안은 성령 충만한 집안으로 4대째 기독교를 믿어 왔고 3대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교회에 신물이 났었다! 나는 우리가 그토록 매주 예배에 끌어들이려 하는 대다수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오지 않는 것도 교회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람이 교회에 진절머리가 났을지라도, 그들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

뭔가가 더 필요했다. 나는 하나님을 아주 아주 가깝게 만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 주일 아침에 나는 텍사스의 친구 교회에서 설교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주 수요일, 친구 목사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토미, 자네와 나는 오래된 친구일세, 그리고 여태까지 한 사람 두 주 연달아 주일 설교에 초청한 적은 없네. 하지만 자네가 이번 주일에도 여기 와 줄 수 있겠나?” 나는 수락했다. 하나님이 뭔가 하시려 한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둘째 주일은 더 뜨거웠다. 일요일 저녁 예배가 끝났는데 아무도 교회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월요일 저녁 기도회에 400명이 참석했다. 우리가 한 일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뿐이었다. 분명 뭔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 수요일 목사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토미, 이번 주 일요일에 다시 와 줄 수 있겠나?” 그의 말 너머로 성령의 소리가 들렸다. 그의 진짜 관심은 ‘내’가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 내가 함께 원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좇는 동료였고 우리는 뜨겁게 그분을 추구하고 있었다.

3주째 갔을 때였다. 호텔에 혼자 있는데 뭔가 묵직한 기름부음이 느껴졌다. 성령의 감싸심이었다. 나는 온몸을 떨며 울었다. 이튿날 아침 8시 30분 주일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갔다. 예배실로 들어가 맨 앞줄에 앉는데, 숨막힐 듯한 공기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이미 빽빽이 들어차 있음이 느껴졌다.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다. 음악 팀이 찬양 인도를 계속하느라 애먹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들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렬하게 머물자 마침내 그들은 노래도 연주도 더 할 수 없었다.

그 분위기는 내게 이사야 6장 말씀을 생각나게 했다. 말씀에 보면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다. 건물에 이미 성령이 충만할 대로 충만했고 하나님의 임재는 글자 그대로 실내에 꽉꽉 메워져 있었다. 실내는 여기저기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뿐이었다. 친구 목사가 예배를 이어받을 것을 말했지만 나는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고귀한 임재를 방해하여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인간들은 어느 정도까지만 성령께 통제권을 내드린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래왔던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상황이 내 안전지대와 통제를 조금만 벗어나면 당장 끼어 들어 칼을 휘두른다.

“역대하 7장 14절 말씀을 읽어야 할 것 같네. 주님이 주신 말씀이야.” 친구 목사는 말했다. 나는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목사는 연단 중앙에 있는 투명 강대상 앞에 서서 성경을 펴고 역대하 7장 14절의 준엄한 말씀을 차분하게 읽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그 순간 건물 안에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목사는 글자 그대로 위로 들어올려졌다가 3미터쯤 뒤로 쿵 나가떨어졌다. 목사가 뒤로 나자빠지는 사이 강대상은 앞으로 넘어졌다. 바닥에 닿는 순간 강대상은 이미 두 조각이 나 있었다. 나는 즉시 마이크 앞으로 나가 말했다.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 들어오셨습니다. 목사님은 괜찮습니다. 곧 괜찮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2시간 반이 지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고, 그때도 안내자들이 그를 들쳐업어야 했다. 살아 있다는 증거로 손만 가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폭탄처럼 그곳에 내리쳤다. 사람들은 울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분의 삶이 잘못됐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을 때입니다.”라고 말했다. 11시 예배 시간이 됐는데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엎드려 있었고, 음악 연주도 거의 없는데도 예배의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더해 갔다. 남자들이 발레를 추었고 어린아이들도 회개하며 울부짖었다. 모두 그분의 임재 안에 있었다.

그날 그곳에는 설교도 없었고 이렇다 할 찬송도 없었다. 그저 성령뿐이었다. 그들은 세례를 간절히 원했다.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한 데 대한 물리적 증표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세례가 몇 시간이고 계속됐다. 끝없는 ‘주일 아침 예배’는 월요일 새벽 1시까지 계속됐다. 월요일 저녁 집회는 광고할 필요도 없었다. 다들 이미 알고 있었다. 솔직히, 광고를 하든 안 하든 집회는 열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잠시 눈을 붙이거나 꼭 해야 할 일을 처리하러 집에 갔다가 ‘뭔가를 더 얻고 싶어서’ 돌아왔다. 그것은 사람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였다.

하나님은 교회의 음악이나 첨탑, 멋있는 건물 따위에 개의치 않으신다. 그분은 교회의 카펫에 감동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별로 문제삼지 않으신다. 그분이 문제삼으시는 것은 오직 하나, 다음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다. “너는 나를 원하느냐?” 교회에 와서 “우리는 주님만을 바랍니다.”하고 고백해 본 적이 언제인가? 혹 임하시지 않을까 두려워 하나님 바라는 것을 겁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들을 누리지 못한 채 나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유를 알고 싶은가? 우리에게 임하셔서 능력 주실 하나님을 바라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는 내 힘으로 너무 많은 것을 하려 든다. 그것에 대해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다수 그리스도인과 지도자가 진정 선한 뜻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이 훨씬 많이 있다.

이후 연속 4-5주 동안 매일 밤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예배하고 기다리고 기도했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 다시 벌어졌다. 그때 퍼뜩 깨달은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이렇게 하고 싶으시다.” 수개월간 그분의 명백한 임재가 그곳에 머물렀다.

내가 아는 한 그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배고파하지 않는 곳, 굶주림이 없는 곳에 그분은 성령을 부으시지 않는다. 그분은 갈급한 자들을 찾으신다. 갈급함이란 기존 상태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한 것은 무엇인가? 회개다! 회개는 우리의 마음을 닦고 곧게 한다. 회개는 우리 삶과 교회, 가정의 모든 낮은 곳을 높이고 모든 높은 곳을 깎는다.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우리를 준비시킨다. 회개가 있기에 그분의 임재를 추구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고백한 것이 언제인가? 당신의 마음을 차지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개의 길로 달려가 하나님을 구한 것이 도대체 언제인가? 나는 설교 잘하는 것,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추구했었다.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나는 부서졌다. 이제 나는 하나님을 좇는 자다. 그 밖의 다른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2장 천국 빵을 얻으라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최우선적임을 잊었다. 문을 열었으되 빵이 없는 빵집과 같다. 게다가 우리는 빵을 파는 데 관심도 없다. 싸늘한 오븐과 텅 빈 진열장 주변에서 잡담이나 즐기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그 행렬에 분통을 터트린 까닭은 그것이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자신들의 종교 의식에 방해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만남의 기회를 놓쳤다. 그분이 동네에 오셨건만 그들은 몰랐다. 안에서 메시아가 오기를 기도하고 있는 사이, 메시아는 문 앞을 지나가셨다. 문제는, 메시아가 그들이 고대하던 방식대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방 교회 특히 미국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각종 프로그램을 전 세계에 수출했지만, 더 이상 그 프로그램들이 발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의 임재다. 그것이 어디서 오든, 어떤 대가가 따르든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분은 오기 원한다.

나오미와 그 남편과 두 아들이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한 것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 ‘빵집’이란 뜻이다. 그들이 빵집을 떠난 이유는 빵집에 빵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사람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빵이 없기 때문이다. 성소에 진설병은 ‘보여주는 빵’ 또는 히브리어 의미 그대로 ‘얼굴 빵’이라 해석하는 것이 맞으므로 하나님 자신의 신성한 상징이었다.

우리는 우리 교회에 빵이 있다고 허위 광고하며 떠벌렸다. 그러나 정작 배고픈 자들이 와서 한 일이라곤 어제 있었던 부흥의 부스러기 몇 조각을 찾아 바닥을 살피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의 텅 빈 내면을 드러내시기 위해 우리 육체의 휘장도 ‘찢어야’ 하실 지 모른다. 문제는 교만이다. 우리는 분명히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은 외면한 채 그분이 계셨던 곳만 으스대며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직접 체험이 있는 사람은 말로만 주장하는 사람한테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병 고침 받은 이의 고백을 보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9:25)

우리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 안으로 이끌 수만 있다면 거짓된 신학적 탁상공론들은 모두 무너질 것이다. 전능하신 그분은 이제 우리의 삶과 예배에 ‘두렵고 명백한 임재 의식’을 회복시키려 하신다.

베들레헴을 떠나 잔인한 땅 모압에 거한 나오미에게 남은 것은 안 지 10년밖에 안 되는 두 며느리뿐이었다. 어둡고 암담한 미래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나오미는 ‘여호와가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고(룻1:6) 두 며느리에게 말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그분은 오늘도 임재의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와서 먹으라.”고 교회를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외면한 채 말라비틀어진 어제의 빵 조각만 뜯고 있다. 그 사이 교회 밖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자기 개발과 자기 향상 프로그램에 체해 넌덜머리를 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에 굶주려 있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이 몸에 부적을 품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과 자신의 서글픈 실존을 넘어 초월적인 존재와 통해 보고 싶은 것이다. 깨달음과 내적 평정에 관한 번지르르한 세미나라면 누구나 다 우르르 몰려든다. 그들은 다른 세계의 최신 계시인 양 전달되는,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를 순진하게 날름날름 받아 삼키고 있다. 오직 돈이 목적인 장사치들의 녹음된 대답을 영적 통찰로 받아들일 만큼 그들은 굶주려 있다. 세상은 영적으로 갈급할 대로 갈급해 있다. 사울 왕은 하나님과 단절돼 애타게 방황하는 자의 좋은 예다.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게 되자 즉 그분을 잡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말했다. “무당을 찾아라. 아무나 좋다! 변장하고 뒷문으로 들어갈지언정 한마디 물어야 살겠다. 영적 세계와 통해야 살겠다.”(삼상 28:7참조)

하나님이 우려하시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예수님이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할 때 밝히신 점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우리 자신이 들어가지 않는 것도 나쁘다. 그런데 문을 막아서서 다른 사람들마저 못 들어가게 하니, 하나님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집에 다시 빵이 생겼다는 소문이 어렴풋이 돌고 있다. 룻(교회에 다니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대표)처럼 이 세대도 나오미(탕자의 대표)에게 살며시 다가와 말할 태세다. “그쪽에 정말 빵이 있답디까? 그럼 나도 같이 가겠소.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나도 가겠소. 당신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당신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오.”(룻 1:16 참조) 베들레헴(빵집)의 평판이 어찌나 나빴던지 오르바는 가지 않았다. 교회의 오랜 허위광고에 진이 빠져 오르바처럼 ‘가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따라올 마음이 없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부흥은 사실상 구원받은 자들의 ‘재활용’ 즉 그들의 열기가 식지 않게 하려는 교회의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의 참된 부흥의 물결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 평생 교회 문턱을 밟아 보지 않은 사람들을 구름 떼처럼 빵집으로 불러모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음악으로 만족한다. 지금의 부흥회로 만족한다. 그러나 이제 ‘거룩한 불만’을 품어야 할 때다. 일부 사람들이 평생의 부흥이라 부를 만한 사건에 나 역시 동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이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알기 때문이다.

사탄의 책략은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없도록 우리를 잡동사니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고, 오랜 세월 그 작전은 특효를 발해 왔다. 우리를 영적 세계에서는 거지 수준을 면치 못하게 하면서 이 땅의 형통함을 먹고 살도록 철저히 길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부스러기만으로 금방 만족한다. 우리 교회는 대부분 식후에 집회를 갖는다. 그래서 교회 강단에 빵 덩이를 올려놓아도 별 감흥이 없다.

성경은 “침략하는 자들이 [천국을] 차지하게 되어 있다”(마11:12 참조)고 말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갈급함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매너를 잊어버릴 정도로 절박해야 한다. 그것은 절박함에서 나온 무례함을 말하는 것이다. 불치의 혈우병에 걸렸던 여자는 어떤가?(마9:20-22) 그녀는 군중을 악착같이 밀치고 들어가 끝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다. 주제넘은 가나안 여자는 어떤가? 그녀는 귀신들린 딸을 구해 달라고 예수님께 끈질기게 매달렸다(마15:22-28).

진정한 부흥을 향한 첫걸음은 자신의 퇴보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다. 형통을 부르짖는 우리 문화에서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탄이 미국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기 위해 동원하는 최대 술수는 ‘형통의 사탕’이었다. 나는 형통을 반대하지 않는다. 당신이 마음껏 형통하기 바란다. 하지만 형통 대신 하나님을 추구하라. 알다시피 처음에는 하나님을 좇다가 종래에는 딴 것을 좇게 되곤 한다. 나는 기도한다. “아버지, 영적 침략의 정신이 우리 심령을 사로잡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예배의 전사로 바꿔 주소서. 하늘에 침투할 때까지, 천상에 균열이 생길 때까지, 천국이 열릴 때까지 멈추지 않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 우리가 사는 지역과 나라에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이제 부스러기를 찾아 바닥을 긁는 데 지쳤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의 따끈따끈한 빵을 보내 주소서. 주님 임재의 만나를 보내 주소서.”

3장 가까이 나아가라

나는 여태껏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후에 ‘타락해’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사울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에게도 ‘다메섹 도상의 체험’이 필요하다. 무소부재는 그분이 어디에나 항상 계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디에나 항상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존재가 특정한 때와 장소에 집중적으로 임하시는 경우가 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라 부른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록된 말씀 내지 예언적 말씀만으로 인도받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 상태를 넘어서길 원하신다. 그분을 향해 마음이 한결 민감하고 성숙해져 그분께 ‘눈빛으로 인도받는’(시32:8-9) 데까지 이르길 원하신다. 그분이 눈빛으로 인도하며 마음의 죄를 깨우쳐 주실 수 있을 만큼 당신의 마음은 민감한가?

하나님이 어떤 장소나 사람들 가운데 찾아오시면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야곱과 그 가족들이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을 향해 떠나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 35:5) 여기 ‘두려워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엎드리다, 무력이나 혼란이나 무서움 때문에 고꾸라지다’는 뜻의 어근에서 온 것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이 세상에서 회복되기 원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의 장소인 벧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는 사람이 없는 곳에도 머무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임하신 어느 교회의 한 사역자가 주중 어느 날 강단 화분의 물을 갈아주러 예배실의 강단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나오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어두컴컴한 예배실 안에서 넘어져 엎드러져 있는 채 발견되었다.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에 걸려 넘어졌던 것이다. 그 목사에게 무신론을 전파하는 처남이 있었다. 목사는 자신의 집에 방문한 처남을 교회로 인도했다. 그런데, 처남의 한 발이 문턱 저편인 교회 바닥에 닿는 순간, 그는 푹 고꾸라졌고 울며 부르짖기 시작했다. 곧 그는 목사를 붙잡고 말했다. “지금 당장 구원받는 길을 알려주십시오!” 시종 그는 바닥에서 몸부림치며 걷잡을 수 없이 울었다. 무신론자인 처남이 하나님의 영광의 잔재 혹은 남아 있는 임재를 만났던 것이다. 이러한 임재의 위력이 교회 건물이라는 국한된 곳을 벗어나 도시나 지역으로 확산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름부음의 목적은 인간들 마음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 마음에 들기 위해서다.” 에스더는 몰약 기름과 향품에 계속 몸을 적시며 규례대로 1년간 몸을 정결케 했다. 그녀는 왕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1년을 준비한 것이다. “설교 좋았습니다!”라든지 “노래 실력 정말 대단하군요!” 따위의 말로 인간에게 영광과 시선을 돌릴 때 또는 인간의 영광과 시선을 구할 때, 우리는 그분의 기름부음에 불륜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기쁘게 하려는 행위다. 기름부음의 참 목적은 왕의 방에서 그 분의 총애를 얻는 것이다. 성소의 모든 물품 안팎에는 글자 그대로 거룩한 기름을 바르도록 돼 있었다. 제사장의 옷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름부음의 최종 목표가 휘장을 지나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도록 준비시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기름부음’에 머물고자 하는 한 가지 이유는, 육신이 기분 좋기 때문이다. 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육신은 그다지 편하지 않다. 야곱의 둔부처럼 하나님이 우리 삶에 경건한 변화를 주시고자 때로 우리 몸의 작은 부위에 ‘죽음’을 주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영광에 접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는 뭔가가 죽는다. 더 많이 죽을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진다. 우리는 기름부음을 넘어서 하나님의 분명한 영광으로 들어오라고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혜택만 구하는 자들에게는 오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에게 오신다. 구약시대에는 자기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은 고의로 상대를 피한다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언성 높여 가르치는 일에 지치셨다. 그분은 눈빛으로 우리는 인도하기 원하신다. 그러려면 그분의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이 가야 한다. 그분의 얼굴을 구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눈물과 회개로 그분의 자리를 준비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잠깐 방문을 평생 거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사실 부흥을 모른다. 참 부흥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없다. 유창한 설교자와 훌륭한 음악, 교회 등록을 결단하는 몇몇 사람들만 있으면 우리는 부흥인 줄 안다. 하지만 아니다. 참 부흥이란,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상점가를 걷던 사람들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친구들에게 “내 문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정립해야 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참 부흥이란, 가장 전도하기 어렵고 가장 안 믿을 것 같던 사람이 모든 조건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오는 것이다. 우리는 실력이 우리와 같거나 우리보다 뛰어난 부분에서 세상과 경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한 세상은 우리의 경쟁상대가 못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말만 들리면 사람들은 즉시 몰려올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 임재의 명백한 능력을 재발견해야 할 때다.

4장 육체를 버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17-18,20).

모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자신을 보면 죽게 된다고 경고하셨다. 새로운 언약 안에서도 이 말씀은 진리다. 오직 죽은 자들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대체로 우리는 엉뚱한 것에 시선이 멎는다. 우리는 그분의 영적 선물인 ‘은사’를 원한다. 은사란 그리스도의 몸을 준비시켜 세우라는 뜻을 주신 것인데 우리는 “아버지, 저를 만져 주시고 복 주소서.”라고 말한다. 우리는 용케도 지역 교회들을 ‘축복 클럽’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제단은 ‘축복의 장소’가 아니다. 제단 앞에 붙들려 온 어린양에게 물어보라. 제단은 죽음의 장소다.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죽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휘장 안에 들어갈 때 당신이 할 말은 이것이다. “나는 이제 산 사람이 아니다. 걸어 다니는 죽은 사람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다른 제사장들이 자기 발목에 줄을 묶는 동안 지성소를 갈라놓은 두꺼운 휘장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처지가 ‘사형수 입장’임을 알았다. 그가 그 방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였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면 우리는 다 죽는다. 사도 바울은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9)고 말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육체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죽은 육체라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멀리하심은 자비 때문이다. 그분은 경고를 발하신다. “조심해라. 조심해라. 더 이상 가까이 오려거든 모든 것이 죽었는지 확인해라. 정말 나를 알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죽어야 한다.” 언제나 그분의 최종 목표는 자신의 최고 피조물인 인류와의 재회요 친밀한 연합이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것은 죽음의 사건이 되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육체 옆에 다가오실 수 없다. 세상의 악취가 풍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가 회개와 상한 심령(죽음에 상응하는 신약성경의 개념)을 통해 그토록 가까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회개를 피하려 한다. 가죽과 털이 타는 지독한 악취를 맡아 본 사람이라면, 왜 그 냄새를 싫어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매력 없고 싫은 냄새라 해도 하나님의 마음은 강하게 끌린다. 죽음이야말로 그분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가까이 오실 수 있는 신호인 까닭이다. 하나님은 왜 죽음을 좋아하신 것일까? 죽음의 냄새가 많이 날 수록 하나님은 그만큼 가까이 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우리는 육체와 영혼간의 끝없는 씨름에 갇혀 있기 쉽다. 우리는 돌파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깨고 나가지 않는 한 돌파구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다. 돌파구란 자신의 야망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자들에게만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늘 불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하지만 제단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의 교회에 불이 내리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제단 위로 기어올라가 이렇게 말하라. “하나님, 어떤 대가가 따라도 좋습니다. 제단 위에 저를 올려놓습니다. 주님, 주님의 불로 저를 불사르소서.” 그럴 때 우리는 존 웨슬리의 뒤를 이을 수 있다. 그는 제1차 대각성 기간 중 그토록 엄청난 군중이 모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불에 올라가면 사람들은 내가 타는 것을 보려고 모인다.”

5장 임재로 들어가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3-6).

이것은 구약 속에 담긴 신약의 언어다. 새로운 차원의 친밀함으로 도약할 수 있는 선택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벧전2:9참조).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세상에서 끌어 내셨다. 그분은 우리로 한 백성을 이루기 시작하셨다. 그것이 광야 여행의 취지였다. 하나님은 ‘백성이 아닌’자들로 백성을 만들고 계셨다. 베드로는 말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더라.”(벧전 2:10) 하나님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자존감도 낮던 노예들과 비천한 종들을 취하여 그들 안에 당신 자신의 성품을 심으시고 그들 위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다. 그분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 “내가 너희로 한 백성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셨다. 글자 그대로 그분은 신부를 가꾸시는 중이었다.

그분은 그들을 당시 지구상 어느 민족에게도 부여되지 않은 창조주와의 친밀함의 자리, 언약의 자리로 부르셨다.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출19:11) 그러나 그들은 번개를 보고 천둥 소리를 듣고는 두려워 뒷걸음질쳤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20:19) 그들은 ‘친밀한 관계’보다 ‘거리를 둔 공경’을 선호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거리를 두며 모세에게 중재를 요구했다. 역대 교회도 똑같은 문제로 고생해 왔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끼기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친밀함에 대해 지옥에서 비롯된 육신적 두려움이 있다. 이 두려움의 뿌리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친근한 교제를 원하셨건만 아담과 하와는 부끄럽고 두려워 숨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다가서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려는 모든 것을 받기 원하신다. 우리는 다음 둘 중 하나를 하게 될 것이다. 첫째, 어떤 대가가 따를지라도 그분과의 관계에서 점점 자라간다. 둘째, 왔던 곳으로 돌이킨다. ‘선한 사람들’이 할 만한 모든 ‘선한’일을 하면서 조직과 부서에 소속되어 프로그램과 집회 위주의 교인이 된다. 그럼으로써 언젠가 이 시기를 애틋하게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자가 된다.

우리의 고백이 “감사합니다. 주님, 하지만 나머지는 어디 있습니까? 뭔가가 더 있어야 합니다! 제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소서!”가 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전환기가 왔다. 그 시기를 맞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좋다. 이제 자랄 때다. 지금부터 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서의 너희들 전체와 직접 말하고 싶다. 더는 중재자를 두고 싶지 않다. 나는 모세를 사랑한다. 하지만 반드시 모세를 통해 너희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 내 나라, 내 백성으로서 너희를 직접 상대하고 싶다.” 해답은 중재자 없이 직접 하나님을 애타게 갈급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신약성경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하게 그분과 대화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날마다 새로 찍히고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20:19)라고 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에 부합되게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되는 것들만이 그분의 임재 앞에 서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다. 서글픈 현실이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임재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지저분한 삶을 깨끗케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난잡한 삶을 정리하려는 이들 중 다수는 율법주의의 덫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순결을 요한다. 하나님은 기름부음에 중독되고 축복받는 기분을 즐기는 애인이 아니라 순결하고 헌신된 신부를 찾고 계신다. ‘부흥’이라는 아기는 신랑에 대한 ‘신부의 헌신’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역사적인 부흥 사건이 미국 땅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우리의 낮아진 헌신도와 함께 망가진 도덕성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하찮은 것으로 일축했거나 잊어버렸다.

‘우리는 죽어야 한다’. 모세에게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지성소로 가기 전에 제사와 죄 사함의 제단을 거치는 것을 잊지 말라. 지금은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매달고, 우리의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의 계획을 버려야 할 때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은 곧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간다.”는 말이다.(고전 15:31) 달아나지 말고 들어가라!

6장 영광을 구하라

내가 본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가 처음 올 때는 아무 경고 없이 갑자기 온다. 그러나 이후에 임하실 때는 초청을 받아야만 즉 우리의 갈급함이 표출돼야만 오신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는 사람이 되는 대가를 기꺼이 치를 용의가 있는가? A.W.토저는 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하는 것을 깊이 우려했다. 토저는 신령한 삶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세상의 세속주의에 밀려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 환경에서는 부흥이 나올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올바로 경외하고 취급하고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좋은 것’은 순식간에 ‘최선의 것’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최선을 원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좋고 무난한 것을 희생해야 한다.

언약궤를 잃고 20년이 지나도록 사울 왕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본처에 회복되는 것을 보고 싶은 열망에 불탔다. 역대하 13장에 보면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되어 블레셋을 친 후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로 결정한다. 명백한 하나님의 임재의 증표가 임시 거처를 떠나 ‘그분의 영광이 속한 곳’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이사’였다. 하나님이 당신의 진짜 거처로 이사해 들어오기 원하신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교회의 모형과 그림자로 그려지곤 한다. 사도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교회를 비유한 말이다(갈 4:26참조). 이것은 영적 도성 내지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이다. 하나님은 온 세계가 볼 수 있도록 교회 안에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원하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나와 같은 자리에 있을지 모른다. 나는 궤없는 교회 예배에 너무 많이 참석했다. 내 딴에는 아는 대로 최선을 다했겠지만 기껏해야 그분의 희미한 냄새를 쥐어짜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무엘하 6:3-10에 보면 다윗과 그 일행은 하나님이 거룩한 임재와 영광을 인간의 손으로 다루려 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다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인간적 방법을 하나님이 그냥 두시는 것은 잠깐일 뿐이다. 다윗 행렬이 타작마당에서 길 위의 걸림돌에 부딪쳤다. 길에 걸림돌을 두신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일 것이다. 그분은 지금도 인간 논리의 고속도로 한복판에 과속 방지턱을 설치하시는 습관이 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고 “이것이 옳은 일인가?” 묻게 된다. 다윗의 문제는 일행이 하나님의 과속 방지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려 했을 때 터졌다. 소들이 뛰자 웃사는 궤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잡았다. 웃사(Uzzah)의 이름은 ‘힘, 담력, 위엄, 안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육체가 죽음을 맛보지 않은 채 당신의 임재 안에서 기뻐하는 것도 절대 허락지 않으신다. ‘나곤’(Nacon)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엉뚱하게도 ‘준비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준비돼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상자를 떨치고 나와 인간의 계획을 수포로 돌리셨다.

우리도 타작마당의 진동지점에 이른 셈이다. 이제 자문할 때다. “우리가 진정 이 일을 할 자인가? 값을 치를 각오가 돼 있는가?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를 대하는 법을 새로 배울 각오가 돼 있는가?” 하나님을 구태의연한 상자 안에 가두거나 인간이 만들어 낸 프로그램에 묶어 두는 것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야할 것이다.

3개월간 하나님이 오벧에돔 집에 복주신다는 소식을 계속 들려오자 다윗은 언약궤에 대한 공식 입장을 재고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초라한 농부 집에 그런 복을 가져다 주었다면, 한나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어떤 것이겠는가? 두 번째 시도 때에야 다윗은 비로소 레위인들과 아론의 후손 제사장들의 참 목적과 기능을 재발견했다. 그리고 언약궤 양쪽에 달린 고리에 나무 막대기를 끼도록 돼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는 거룩한 세계와 하나님의 영광을 바로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다윗 왕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거룩한 것을 평범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웃사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마구잡이로 손대게 된다. 자비의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우선 그분의 영광과 거룩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 존중의 마음을 우리에게 회복시키신다.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육체에 미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위력을 새삼 깊이 깨닫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자리로 옮기려는 다윗의 두 번째 시도에서 주목해야할 것이 더 있다. 다윗이 레위인들과 아론 자손들을 제사장 직무로 다시 불러 언약궤의 수종을 맡기면서 한 엄숙한 경고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 나라의 모든 대제사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너희는 레위 사람의 족장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케 하고 내가 예비한 곳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역대상 15:12-13).

7장 땅을 회복하라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바꾸시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바꾸시지 않는 한 세상을 바꾸시지 않는다. 도시나 지역에 뿌리내린 목사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 받은 ‘법적 권리’가 있다. 왕 되신 그분을 위해 사방에 ‘말뚝을 박고’ 그 도시를 내 것으로 주장할 권리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집회실과 교회 건물의 벽 안에 신앙을 가둬 두는 것에 만족해 왔다. 이제 하나님은 신앙의 반경을 도시와 국가의 경계선까지 넓히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우리는 해당도시에 ‘한 교회’ 의식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실제로 나무 말뚝을 만들었다. 말뚝 사면에는 성경구절과 함께 ‘갱신, 부흥, 화해’라는 단어를 써 넣었다. 또 선언문이 있는데 이런 선포가 적혀있다. “성경을 근거로 나는 이 도시의 지도자들을 대신하고 도시 내 모든 목사들을 대표하여 다음 세 가지, 즉 회개하고 간구하고 대적하는 일을 행한다.” 우리의 행위는 변명이나 망설임이 없는 노골적이고 대담한 공격 행위다. 사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너한테 통고한다. ‘이 도시는 우리가 접수한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이 종들을 시켜 우물들을 다시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우물들은 본래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오래 전에 그랄 계곡에 파 두었던 것들이다. 오늘 하나님은 부흥의 옛 우물들을 다시 열고 계신다. 고여있는 물웅덩이처럼 그분의 영광이 머물고 있는 곳들이다. 새 우물들을 터뜨리시기 전 하나님은 옛 우물들을 다시 파실 것이다. 간단히 말해, 상점가에 참 부흥이 터지기 전에 먼저 우리들의 교회 강단에서 터져야 하고 다음 교회 뒷좌석에서 터져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은 문지방 밑으로 스며 나와 거리거리로 흐를 수 있다. 에스겔 47장의 예언을 성취하면서 말이다. 에스겔은 물이 자기 키보다 깊어 바닥이 닿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속수무책’의 부흥을 보고 싶다. 강물의 가장 얕은 지점이 교회 건물이 돼야 한다.

하나님은 그 우물들을 다시 파라고 그 도시들의 목사들과 성도들을 부르고 계신다. 지하수 우물의 경우 사람이 물 옆으로 갈 필요가 없다. 물이 내게로 온다! 물이란 언제나 낮은 지면과 마찰이 적은 길로 흐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11:5)고 말씀하신 까닭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인생의 빈자리를 채우려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새로운 물결 내지 새로운 차원은 ‘내면이 깊이 굴착된’ 하나님의 임재의 사람들한테서만 올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힘차게 펑펑 솟아날 것이다.

8장 영향을 미치라

우리는 각종 전도 프로그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또 별로 실천하지 않는 전도 형태다. 나는 그것을 ‘임재전도(presence evangelism)'라 한다. 사람들이 눈으로 보면서 ’저들은 예수와 함께 있다.“(행4:13 참조)라고 말하게 되는 전도다. 즉 우리에게 머무는 하나님의 잔영과 명백한 임재가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있던 귀신 들린 사람이 갑자기, 난생 처음, 귀신들의 숨막히는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 그 사람의 정신과 신체 기능을 악귀의 손아귀에서 떼어 낸 것은 무엇인가? 그 날 있었던 일은 이것이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신 것! 우리는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성경구절을 외쳐 대거나 귀신의 요새를 애써 허물어 내릴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 목적은, 누가복음 4장 18절 말씀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때 그분은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불신자들의 굴레를 깨뜨리면 그들은 제단으로 달려오게 돼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올 수 없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통한 회개와 구원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 우리는 고통 없는 값싼 은혜와 손해 없는 부흥을 통해 하나님께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길을 닦아주려 했다. 주님도 그것을 아신다. 그러나 결국 우리한테 남은 거라곤 일주일도 채 못 가는 얄팍한 싸구려 구원이었다. 왜 그럴까?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와의 만남이건만, 우리가 그들에게 준 것은 고작 인간과의 감정적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의 ‘개점 휴업, 시간제 영업’과 같은 사고방식에 문제를 느낀다. 왜 교회는 매일 만남으로 열려 있지 않은가? 우리는 굶주린 자들에게 생명의 빵을 공급해야 할 자들이 아닌가?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이 세대의 갈급함에 있지 않다. 굶주린 사람들이 교회 문을 두드리지 않는 이유는 빵집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점잔빼는 교회들의 높은 연단에서 전해지는 통속적 설교를 듣는 데 지쳤다. 우리 자신의 문제가 뻔한데 무슨 권리로 우리가 다른 사람한테 회개를 명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위선이 득세한 적이 한번도 없으나, ‘우리의 교회’에서는 위선이 주요 매력이 되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정직하게 나아와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문제가 있다. 그래, 나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 죄를 회개한다. 나와 함께 회개할 사람 있는가?” 회개하는 교회의 모습을 본다면 사회 구석구석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할 것이고 우리는 거기서 깜짝 놀랄 것이다.

9장 자신을 깨뜨리라

우리는 예배 때마다 배은망덕한 자식처럼 굴면서 용돈과 축복만을 조른다. 하나님의 손만 구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만을 원합니다.”라고 부르짖는 일과는 담을 쌓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저 그분을 보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분께 기분을 털어놓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하지만 그분은 정말 우리의 가장 친밀한 흠모와 예배를 받고자 기다리고 계신다. 말이나 표면적 행동을 초월하는 ‘중심의 예배’를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 당신이 그 부르심에 담대히 응한다면 그분은 자신의 새로운 부분을 보여 주실 것이다. 천국의 깊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을 가까이 이끄실 것이다. 다윗이 말한 ‘은밀한 곳’에 이르려면 모든 방해거리를 내던지고 심신과 영을 하나님께 모으는 ‘집중예배’의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시91:1참조). 당신은 그 만남에서 영영 ‘회복될’ 수 없다. 야곱이 다리를 절게 된 것처럼 당신의 심령도 영원한 사랑으로 불구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한테서 ‘뭔가 얻으려고’ 교회에 갈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우리는 언제나 들을 것인가? “그냥 나를 사랑할 사람 없는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기름 부었던 ‘죄 많은’ 여인에 대해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생각해 보라. 제자들은 “왜 그렇게 낭비하는가?”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낭비가 아니라 예배”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개입하신 것은 마리아의 재능이나 미모나 종교적 공로 때문이 아니다. 그분이 두둔하신 것은 그녀의 예배다. 하나님이 얼굴을 보려거든 마리아를 따라 예수님의 발치로 가라. 소중한 찬양과 예배의 옥합을 꺼내라. 당신은 보물을 너무 오래 아껴왔다. 여기 그 모든 것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 있다. 조금도 아끼지 말라! 마리아가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는 데는 겸손이 필요했다. 성경에 의하면 머리털은 여자의 ‘영광’이었다.(고전11:15) 마리아는 자신의 영광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셈이다. 영광을 버린 셈이다. 손님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집안에서 가장 비천한 종의 몫이었다. 이제 이해가 되는가? 마리아가 보여 준 행동이 얼마나 겸손한 예배의 모습인지. 교회는 너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오시라’고 청해 놓고는 그분을 높은 자리에 모시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진정 원한 것이 그분의 ‘손재주’였다는 뜻이다.

마리아의 옥합을 하나님이 깨뜨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마리아가 깨뜨려야 했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과 만나기 원한다면 자신을 ‘깨뜨려야’ 한다. 가장 높은 차원의 예배는 깨어진 마음에서 온다. 정상에 오르는 지름길이나 공식은 없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던 걸음을 멈추실 것이다.

부흥이 있는 교회들이 있다. 허다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데 유독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들이 있다. 이유를 알고 싶은가? 답은 그들이 깨어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심령이 깨어질 때 하나님의 귀와 시선이 우리에게 향한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능가할 때 그 일은 시작된다. 체면 차리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는 없다. 영광을 버리라. 우리 영광의 ‘끝’이 곧 하나님 영광의 ‘시작’이다.

10장 간절히 기도하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데 있어서 모세는 끈질겼다. 그는 하나님을 좇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 아님을, 그분을 위한 일임을 알았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큰 열망이요 기쁨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원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자 송축이다. 다만 모세는 그분을 구해야만 했고 그것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성막을 비롯해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 이면에 더 위대한 뜻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그분의 영원한 뜻이 성취되는 것을 봐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임을 모세는 알았다. “저는 주님의 영광을 봐야 합니다. 완성품을 봐야 합니다.” 모세의 갈급한 심령은 시공과 영원의 한계를 가로지르는 기도와 끈기를 낳았다. 이 얘기의 결론은 구약에 나오지 않는다. 모세의 삶에 시작된 갈급함의 결말을 보려면 15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새 시대, 새 언약으로 가야한다. 하나님이 모세의 심령에 심어 주신 그 기도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영원한 기도였다. 그 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말기에 찾아왔다. 변화산에서 예수는 육체의 옷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던 것을 벗기셨다. 오늘 우리는 그 산을 ‘변화산’이라 부른다. 모세가 드디어 하나님의 드러난 영광을 본다.

그 기도가 응답되는 데 1500년이 걸렸다. 졸린 세 제자는 모세의 잊혀지지 않았던 기도 덕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졸고 있는 교회를 위협하는 것과 동일한 덫에 빠졌다. 모세는 그 날 그 산에 내려와 하나님의 드러난 영광을 보았다. 그가 떠날 때에야 제자들은 잠에서 깼다. 영광이 다 사라지고 예수가 작별하고 계실 때였다. 그러나 세 제자는 사라지는 영광의 찰나적 모습만으로도 너무 황홀해 그곳에 세 기념비를 세우고 눌러 앉으려 했다. 그 때 성부 하나님이 하늘에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눅9:34-35)

우리가 그분 영광의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계시 앞에 기념비나 세우려 한다면 그 분은 극구 막으실 것이다. 특히 우리가 깨어진 죽음과 기도로 그 계시에 대한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았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현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닿는 지름길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고통 없는 소득을 원한다. 모세의 하나님은 오늘 당신에게도 자신을 보여 주실 뜻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값싼’ 축복이 될 수 없다. 당신이 누워 죽어야 한다. 당신이 죽을수록 그분은 가까이 오실 수 있다. 부흥의 공식은 지금도 똑같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회개의 제단에서 죽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단지 부흥이나 순간적 강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출처 :행복†충전소 원문보기 글쓴이 : DMpas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