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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신만의 영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며, 우리 속에서 영성의 깊은 샘이 고갈되지 않게 해준다. 오랜 세월 교회는 교인들에게 기도의 방법도 하나, 예배의 방법도 하나, 성경 공부의 방법도 하나라고 말해 왔다. 구원의 길이야 당연히 하나 - 예수 그리스도 - 지만 우리의 복된 구주를 예배하고 사모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 자체에 있을까 아니면 기도의 시간과 방법에 있을까? 내가 믿기로 우리 하늘 아버지는 그 자녀들을 기뻐하시며 그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즐거워하신다. 하나님은 하늘 아버지께 가까이 가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는 자녀들을 찾고 계신다. 당신이 그 방향으로 나가는 데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기도한다. 영성에의 길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똑같은 영적 처방을 내릴 때가 많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까? 30분 내지 60분간 QT 습관만 들이고 주일 아침마다 교회에만 나오면 됩니다.” 대개는 표준화된 QT에 약간의 변화를 가한 것이다. 왜 그럴까? 간단하고 일괄적이며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심어주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것만으로 안 된다. 나는 내 안에 표준화된 QT로는 절대 만져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QT훈련은 유익했지만(지금도 유익하다)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내 영적 존재의 다른 부분들은 잠자고 있었다. 아울러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동일한 좌절을 맛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도대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오와의 농부한테나 워싱턴 D.C의 변호사한테나 똑같은 유형의 영성을 처방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 고전을 읽고 내 여정을 남들과 나누면서 나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질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을 발견했다. 그 길들은 서로 다른 영성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적 활력을 일깨워 주었고, 그리하여 그들 내면에 여태 한번도 만져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만짐을 입었다. 이런 발견을 계기로 나는 사람마다 다른 하나님 사랑의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영적 기질’의 탐색에 나섰다. 영적 기질이란 성격 기질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영적 기질의 초점은 각자 하나님과 관계 맺는 가장 좋은 길을 이해하여 그분과 가까워지는 새로운 길들을 개발하도록 돕는 데 있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동일한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한 하나님을 예배한 방식은 가지각색이었다. 아브라함은 종교적 성향이 있어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다.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 악의 세력들과의 다양한 대결이나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 행동주의 영성의 색채가 풍긴다. 다윗은 열정적 예배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뻐했는가 하면 그 아들 솔로몬은 무수한 제사를 드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영적 기질들에 이름을 붙이고자 내가 두 번째로 연구한 분야는 역사상 교회의 분리였다. 기독교 역사의 여러 논쟁을 살펴보면서 나는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방식의 차이가 그 중 많은 논쟁의 배후가 된 것을 발견했다. 네 주자 - 로마 카톨릭, 루터교, 칼빈주의, 재침례파 - 모두 하나님을 사랑했으나 사랑의 표현 방식이 독특했다. 근본적으로 신학의 차이도 많았지만 예배의 기호와 관련된 부분들도 있었다. 예배의 기호가 갈릴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배우기보다는 분리를 택해 새 교회를 시작할 때가 많았다. 안타깝게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별 흥미를 못 느끼면 모든 체험의 정당성을 문제삼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향이 기도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향의 사용을 무조건 이상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두 그리스도인은 교리상 중립적인 예배의 기호를 가지고 신학 문제화 할 것 없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성격과 기질을 주셨다. 이 차이가 예배에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칼 융은 인성을 묘사하고자 네 가지 특성 기준을 개발했다. 그 기준을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즈(Isabel Briggs Myers)가 체계화한 것이 유명한 마이어즈 브릭스 성격 검사다. (외향적-내성적, 감각적-직관적, 사고형-감정형, 판단형-지각형) 영적 기질과 성격 기질이 다르기는 하지만 브릭스의 ‘유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양한 성향과 소양을 지닌 존재로 지으셨다. 성경 인물들과 교회의 역사적 운동들과 다양한 성격 기질을 사용해 우리는 아홉 가지 영적 기질을 찾아볼 수 있다. 1. 자연주의 영성 : 야외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자연주의자들은 아무리 아름답고 단출한 건물일지라도 일단 건물 밖으로 나가 강가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들을 대할 때는 책을 덮어라. 시범도 보일 필요 없다. 그저 숲 속이나 산이나 너른 들판을 걷게만 해주면 된다. 그들의 마음은 야외로 나갈 때 한껏 치솟아 하나님을 예배한다. 2. 감각주의 영성 : 오감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감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아름다움과 광휘에 푹 잠기기 원한다. 그들은 예배 의식과 엄숙하고 장엄한 것에 특히 끌린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드릴 때 시각적 장치와 소리와 냄새에 가득 젖어들기 원한다. 향, 정교한 건축, 고전 음악, 격식 있는 언어가 그들의 마음을 상승시킨다. 오감이야 말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침투하시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3. 전통주의 영성 : 의식과 상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전통주의자들은 흔히 신앙의 역사적 차원에 속하는 것들, 즉 의식, 상징, 성례, 제사 등에서 양분을 얻는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훈련된 신앙 생활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대개 이들은 규칙적 예배 참석, 십일조, 주일 성수 등을 좋아한다. 4. 금욕주의 영성 : 고독과 단순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금욕주의자들은 혼자 남아 기도하는 것밖에 바라는 것이 없다. 그들을 대할 때는 의식이나 종교의 부속물, 바깥 세상의 소음을 모두 거둬라. 주의를 산만하게 할 만한 것을 모두 치우고 - 그림도 없고 시끄러운 음악도 없이 - 혼자 단순성 속에 기도하게 하라. 5. 행동주의 영성 : 참여와 대결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행동주의자들은 정의의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기사일 때가 많다. 그들이 정의하는 예배란 악에 맞서 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교회를 다시 세상에 나가 불의와 일전을 벌이기 위한 재충전의 장소로 본다. 6. 박애주의 영성 :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박애주의자들은 남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은 가난하고 초라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다고 고백하곤 한다. 그들은 남들과의 관계 위에 쌓아 올려진다. 보통 사람들은 남을 돌보는 일이 피곤할 수 있지만 박애주의자에게는 오히려 재충전이 된다. 7. 열정주의 영성 : 신비와 축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열정주의자들의 영적 혈액은 예배의 흥분과 신비이다. 감각주의자들이 아름다움에 에워싸이기 원하고 지성주의자들이 개념을 붙들고 씨름하기 원하듯 열정주의자들은 즐거운 축제에 감격한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응원단장들이다. 8. 묵상주의 영성 :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묵상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연인으로 지칭한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신랑의 이미지가 그들의 하나님관을 주도한다. ‘거룩한 낭만’으로 들어서는 아가서야말로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 본문일 수 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깊고 가장 밝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한다. 9. 지성주의 영성 :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지성주의자는 회의론자일 수도 있고 헌신된 신자일 수도 있으나 어느 경우든 칼빈주의, 유아 세례, 여성 안수, 예정설 따위의 교리를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신앙’이란 체험 못지 않게 이해의 대상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때 그분이 가장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이상적‘ 그리스도인은 전부는 아니라도 다수의 영적 기질을 보여줄 수 있다. 앞으로 기질별로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는 과정에서 알게 되겠지만 나는 모든 기질의 모본으로 예수님을 꼽았다.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당신은 자신의 영적 기질(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공통 분모가 마가복음 12장 30절에 나와 있다. 예수님에 따르면 신앙의 모든 참된 표현에는 네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흠모)을 다하고 목숨(의지)을 다하고 뜻(신념)을 다하고 힘(몸)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에게는 흠모, 신념, 헌신, 봉사가 나타나야 한다. 책을 전체 다 읽음으로서 당신은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온,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훨씬 더 포괄적 시작을 얻게 될 것이다.우리는 어떻게 삶의 계절 속에서 하루하루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인가? 어떻게 그 사랑을 늘 새롭게 간직할 것인가?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이해에 어떻게 자라갈 것인가? 그것은 그 분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 가능하다. 그 관계를 가꿔온 그리스도인들의 수많은 방식을 일단 이해하면, 그분 곁에 더 바짝 더 꾸준히 걸을 수 있는 길들이 우리 앞에 더 많아질 것이다.
영성의 아홉 가지 색깔 1. 자연주의 영성 : 야외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우리 예배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연주의자들은 의례적 건물과 푹신한 회중석을 떠나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전혀 새로운 ‘성전’, 즉 야외로 나가고 싶어한다. 야외로 나가면 글자 그대로 메마른 심령에 단비가 내리고 딱딱한 영혼이 녹을 수 있다는 것을 자연주의자들은 보아 왔다. 대다수 회중이 꾸준히 야외에서 모이는 것은 아무래도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지만 개인이나 소그룹 예배자들은 조용한 곳에 나가 야외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큰 유익을 누릴 수 있다. 현대 문명의 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가려진 진리이긴 했지만 분명 성경은 야외에서 읽도록 된 책이다. 구약과 복음서의 많은 예화와 비유는 자연에 바탕을 둔 것이며, 따라서 자연 속에서 그 의미와 힘이 되살아난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현현’, 즉 그분이 임하신 사건은 대부분이 광야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은 사막에서 하갈을, 산에서 아브라함을, 강나루에서 야곱을,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 주셨다. 예수님도 피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찾으셨다. 사역 초기에 그분은 나사렛을 떠나 호숫가의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 하나님이 첫 남자와 여자를 위해 낙원을 지으셨을 때 그것은 휴양시설이었던가? 하나님은 나무가 울창하고 강이 넷으로 갈라져 흐르는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니는 쪽을 택하셨다. 야외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날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전혀 새로운 캐스팅으로 우리 마을을 찾아온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공책에 ‘자연의 언어와 교훈’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길 만큼 자연의 비유를 좋아했다.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현세의 단맛에 쓴맛도 섞여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파리를 잡아먹는 거미는 마귀와 유혹을 나타내 주며, 바다로 흐르는 강물은 만물이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가 듣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피조 세계를 통해 말씀하실 것이다.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당신의 시간이 고인 물처럼 정체돼 보이거든 코트와 지팡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라. 거기 닫지 않는 학교가 있다. 하나님은 종종 야외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를 만나 주신다. 개혁교단의 <벨기에 고백서> 제2조는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와 보전과 통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신다. 우주는 가장 기품 있는 책으로 우리 눈앞에 있다.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들이 그 책의 수많은 등장인물이 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밝히 보여 준다.”고 말한다. 존 밀턴은 명시 ‘실낙원’에 이렇게 썼다. “피조물을 묵상하며 우리는 한 걸음씩 하나님께 올라간다.” 피조 세계를 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라.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도 생각하라. 한편, 우리에게 늘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쉼이 필요할 때도 있다. 몸과 영을 쉬기에 야외보다 좋은 곳은 없다. 예수님은 분주한 사역 일정 중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며 힘을 얻곤 하셨다. 제자들한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셨다. 우리를 돌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추운 마음을 덮어주시는 따뜻한 이불일 수 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다. 야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나는 진정 하나님을 보려면 우선 조용히 시간을 내어 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거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우선 믿어야 하고 다음으로 지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끝으로 받아야 한다. 첫 번째 단계로, 자연을 감상적으로 대하거나 우상으로 삼지 않으려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으로의 온전한 회심이 필요하다. 루터는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마스크’라 표현했다. 마스크란 일부 가려주기도 하지만 그 안에 뭔가가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께 깨어나는 두 번째 단계는 죽어버린 지각의 요소를 다시 살리는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시스의 제자 성 보나벤처는 야외에서 하나님을 구하기 위한 ‘훈련’ 지침을 제시했다. 첫째, 산과 하늘과 바다 등 피조 세계의 광대함을 생각한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과 지혜와 선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음, 피조물의 무수한 종류에 주목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동시에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끝으로, 피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살펴본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한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그것은 너무 광대무변해 온 세상을 경이로 가득 채울 수 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시간을 드리지 않는 한 - 그리고 대화의 주도권을 그분께 맡기지 않는 한 - 우리는 받을 수 없다. 내 의제와 하나님의 의제가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분이 내 영적 산책을 주도하셔야 한다. 그분은 내가 들어야 할 말을 아신다. 숲에 가거든 받으러 가라. 걱정일랑 집에 두고 가라. ▽ 자연주의 영성의 유혹 ㆍ개인주의 - 예수님은 야외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셨으나 다시 세상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로 그리하셨다. 우리는 자연을 구실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을 피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ㆍ영적 미혹 - 심리학자들은 성지를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성경 인물이나 심지어 예수님으로 생각할 정도로 감격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통찰을 아주 세심히 검증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의 산책 중에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권위를 둘 것이 아니라 검증 대상의 조언으로만 생각해야 한다. 확실한 기준은 성경뿐이다. ㆍ자연의 우상화 - 어떤 자연주의자들은 범신론, 즉 자연 숭배의 우상에 쉽게 빠질 수 있다. 모든 자연 속에 하나님이 있다든지 자연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 피조 세계에 둘러싸일 때마다 하나님의 존재를 보는 것은 사실이다. 성령이 없다면 우리도 우상 숭배의 선을 넘어 범신론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르치는 건전한 교리와 우리를 지도하시는 성령이 있기에 우리는 범신론의 이단에 빠지지 않고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자연의 메시지를 음미할 수 있다. 자연주의 영성에의 초청 이 장을 읽고 짐작했겠지만 나는 신앙이 깊어지면서 자연주의 영성이 되었다. 스케줄 때문에 마음대로 자주 밖에 나갈 수는 없지만 내게 있어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기에 자연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음을 나는 배웠다. 하지만 밖에 나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것을 통해 나는 영적 체험의 욕구도 식욕, 물욕, 성욕처럼 탐욕으로 화할 수 있음을 배웠다. 우리는 영적 절정에 대한 갈망을 절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들이 개발될 수 있다. 지금부터 여덟 가지 영적 기질을 더 살펴볼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너무도 광대하다. 우리는 날로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는 새롭고 깊은 길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2. 감각주의 영성 : 오감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와 성품에 대한 깊은 이해로 끌어들이는 예술의 힘은 일부 기독교 진영에서 다분히 무시되어 왔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연구하면서 나는 그 무엇보다 감각적 예배 체험에 더 마음이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말하는 감각이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오감을 가리킨다. 감각을 사용할 때 전혀 새로운 예배의 장이 우리 앞에 열린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주 요란하고 화려하게 임하실 때가 많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천국 영광에 대한 성경 기사들은 아주 수려할 뿐 아니라 최소한 조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 예로 에스겔이 기록한 체험을 생각해 보라. 그는 폭풍을 느낀다.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치는 것이 보인다. 신기한 형상과 웅장하고 휘황한 사파이어 보좌도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요한계시록의 경험도 매우 감각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영광의 모습은 요즘 흔히 축하 카드에 많이 나오는 얌전하고 조용한 예수님 그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침묵만이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천국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안에는, 우리 각자 안에는, 미의 존재 앞에 감탄하는 뭔가가 있다. 나는 그것이 초월적 천국에 대한 우리 갈망의 찰나적 단면이라 믿는다. 금세기 초에 활동한 본 오그던 보그트(Von Ogden Vogt) 목사는 미와의 만남과 하나님과의 만남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미는 겸손을 유발한다. 예컨대 오페라를 보러 가면 우리 입에서 “나는 천년을 산다 해도 저런 오페라는 못 쓸 거야.”라는 말이 나온다. 보그트에 따르면 둘째 단계는 우리를 굴욕에서 존엄으로 데려간다. 그런 오페라는 쓸 수 없을지 몰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 이 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셋째 단계는 다른 세계관을 낳는다. ‘가치 없는 것은 사라지고 참되고 선한 것이 나타나 자라난다.“ 마지막 넷째 단계는,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낳는다. 물론 이 비교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을 만나면 도덕성이 높아지며 적어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미에는 그런 결과가 없다. 그러나 미의 네 단계에는 회개, 정결케 됨, 깨우침, 헌신으로 이어진 이사야의 소명이 반영되어 있다. 진리, 즉 생각은 기독교의 필수 요소다. 그러나 감정도 중요하다. 보그트는 진리 표현의 그릇인 상징, 성례, 의식 없이는 사람들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거기가 미가 끼어드는 자리다. 오감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우리는 오감을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예배에 감각이 사용된 방식을 몇 가지 살펴보자. ㆍ청각 - 시편 96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시편 147편, 149편, 150편은 신자들에게 악기를 연주해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권고한다. 아주 현실적인 의미에서, 회중은 설교 때보다 특별 음악 순서 때 더 ‘살아 있을’ 수 있다. 위대한 작곡가 헨델은 특정 코드를 사용해 다양한 느낌을 살려냈다. 루터는 성경이 본래 읽기보다는 듣도록 된 책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루터의 통찰의 타당성이 과학으로 입증되고 있다. 성경을 그냥 읽기보다는 읽혀지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은 더 활성화된다. ㆍ후각 - 냄새는 기억을 굳혀줄 수 있다. 지금도 존슨즈 베이비 샴푸 냄새를 맡으면 나는 우리 아이를 목욕시키던 일이 떠오른다. 구약 시대에 향이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냄새의 바로 그런 특성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예배 후 남아있는 향기는 신자에게 예배의 경험을 되살려 준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면 신자는 냄새에 조건화되어 하나님의 임재에 의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시편 141편 2절에는 향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성경에 분향의 부정적 사례도 등장하지만 그것은 우상 숭배와 연관된 경우이거나 타락한 신앙 속에 드려진 경우다. 그러나 향의 사용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돕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ㆍ 촉각 - 언젠가 나는 고난주간에 주머니에 못을 하나 넣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못이 고난주간 내내 회개와 중보기도를 일깨워 주었다. 촉각은 커뮤니케이션 통로다. 감각주의 영성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그렇다. 정교회 예배에는 입맞춤이 자주 있다. 그들은 십자가, 제단, 거룩한 기명 등에 입맞춘다. 입술을 대는 것은 대상의 소중함을 인정하는 길이다. 그것은 밖으로는 물론 안으로도 강력한 고백이 된다. ㆍ시각 - 시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클 것이다. 연구진들은 시각의 활용으로 의지에 영향을 입힐 수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의지는 믿음대로 살려는 우리의 헌신과 직결된다. 기독교 예배와 기도에 시각이 사용된 것은 성육신에서 기원한다. 물론 시각은 구약시대에도 예배의 필수 요소였다. 본 오그덴 목사는 건물을 지나치게 편안하게 또는 지나치게 냉랭하고 단조롭게 꾸며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예배당들은 우리를 예배로 부르기 위해 지어졌다. 안에 들어서는 순간 생각이 하나로 향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예배실 외에도 그림이나 성상의 형태로 시각을 사용해온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어른들의 경우 하늘을 보면서 예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시편을 외우면 방해되기는커녕 오히려 말의 진실성이 더해질 수 있다. 시각의 영향은 막대한 것인 만큼 예배에 통합하는 것이 절대 바람직하다. ㆍ미각 - 우리는 성찬의 감각적 측면 때문에 자칫 성찬이 요구하는 헌신을 도외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맛은 건강한 성찬 체험을 강화시켜줄 수 있다. 서둘러 치르지 않고 시간적 여유를 갖는다면 특히 그렇다. 미각은 기도에도 사용될 수 있다. 단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연상시킬 수 있고, 쓴 것은 응답없는 듯한 기도를 꾸준히 지속하게 해줄 수 있다. 맛과 예배가 연결되도록 우리 자신을 조건화한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예배를 떠올릴 수 있다. ▽ 감각주의 영성의 유혹 ㆍ알맹이 없는 예배 - 감각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음악을 통해 감정이 고조될 때 특히 그렇다. 나는 깊다 못해 두렵기까지한 헌신의 노래들을 아무 생각 없이 부르는 내 모습에 놀랄 때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음악은 우리로 하여금 있지도 않은 헌신을 가장하게 할 수 있다. 냉담하고 불성실한 신자가 되게 할 수 있다. ㆍ미의 우상화 -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일개 천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성숙한 선지자들조차 그들을 예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들은 참되고 순결한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한 유일한 분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빼앗아갈 수 있다. ㆍ예배를 예배함 - 불행히도 우리는 오감을 사용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오감을 사용해 예배를 예배하는 자리로 자칫 빗나갈 수 있다. 감각적 예배가 미숙한 것이라는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감각이 우리를 쉬이 오도할 수 있다는 것만은 믿는다. 감각적 자극과 의지의 참된 헌신을 혼동할 때 특히 그렇다. 다만 감각적 보조 도구들이 신앙에 정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예배로의 초청 시각과 청각과 미각과 촉각과 후각은 사탄의 유혹이기 전에 하나님의 선물이다. 몸을 사용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편이, 예배 때 몸의 역할을 무시하다가 돌아서서는 죄에 이르는 일들에 몸을 사용하는 편보다 훨씬 낫다. 내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은 그분의 지혜와 진리를 향하고 내 손은 그분을 받들어 섬기고 내 눈은 그분의 아름다움을 향하며 내 전 존재는 그분의 임재에 드려지도록 애쓰며 살았으면 좋겠다.
3. 전통주의 영성 : 의식과 상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의식 중심의 예배 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에 익숙해지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 혜택은 침례교도로 자라난 사람한테까지도 엄청날 수 있다. 때로 자신의 전통을 벗어나 보는 것만으로도 신앙의 익숙했던 부분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종교 행위란 인간이 영적 진리를 구체화하는 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거룩한 종교 행위’의 전통이 즐비하다. 아브라함은 단을 쌓음으로 믿음을 표현했다. 그렇게 함으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앙에 틀을 입히려 했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정형화하기 시작하실 무렵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배격하시고 대신 모세에게 흙으로 번제단을 만들 것을 명하셨다. 신약에도 종교 의식을 준수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은 규례대로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셨다. 베드로와 요한은 규칙적으로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정한 종교 행위로 양분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친히 모본을 통해 밝혔다. 전통주의 영성의 세 가지 요소 ㆍ의식 - 의식의 힘은 간단히 말해 강화된 행동의 힘이다. 어떤 의식들이 가장 적절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개신교, 천주교, 동방정교 그리스도인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식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의식은 성례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서게 하는, 그러면서도 인간이 체험하기에는 너무나 큰 힘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길이 된다. 교회사에서 한때 부활절은 40일 축일이었다. 40일은 바쁜 문화에 너무 과해 우리는 그것을 4일로 줄였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꼭 그럴 필요가 없다. 절기 준수는 그 나름의 자리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생기 없는 의식이 될 수도 있고 삶을 바꿔 놓는 만남이 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특별하게 지내려 각별하게 애쓰는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기독교 예배의 모본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정 일요일과 축일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엄청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묵상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공급원이지만 전통주의 영성에 특히 그렇다. 성경과 관련된 특정 의식들은 낡은 관습에 실제로 새로운 의미를 더해줄 수 있다. 성경을 큰 소리로 낭독한다. 시편을 활용한다. 똑같은 성경 본문을 마음에 외워질 때까지 계속 되풀이해 읽으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이 30대에 날마다 읽던 시편의 한 장을 80세에도 읽는다면 그 위력이 얼마나 크겠는지 상상해보라. 하루를 성경으로 시작한다. 교회력을 기념하라. 기독교의 기초는 물리적 세계 속에 침투해 들어오신 하나님께 있다. 교회력을 기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기념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내가 담당해야 할 몫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의 경우, 기도의 ‘형식’ 내지 ‘습관’을 정해두는 것이 기도에 틀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런 틀이 기도를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형식이 있어 오히려 기도의 훈련과 진실성이 더 향상되는 사람들도 있다. 잡념 때문에 고생하거나 기도가 아직 초보인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형식을 따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 보면 1세기 기독교인들은 대개 주기도문으로 하루 세 차례 기도하는 것이 상례였다. 3세기 초의 기독교 지도자 터툴리안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처럼 3시, 6시, 9시에 기도할 것을 권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강하게 느끼려면 오히려 짧더라도 잦은 기도가 도움이 될 수 있다. ㆍ상징 - 상징은 바른 삶에 필수 불가결한 이 ‘도덕적 기억’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상징의 사용을 인정하셨다. 상징이란 구원받는 것과 하등 무관하다. 오히려 그 구원의 효력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실현시켜 주는 것이 상징이다. 예컨대 운전 중 믿음대로 살기가 어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백미러 위에 상징 - 십자가나 물고기 - 을 달아 혹 성질이 끓어오를 때 그것을 보고 자제할 수 있다. 성령은 물론 흔히 비둘기나 불로 상징된다. 삼위일체는 역사적으로 삼각형이나 겹쳐진 세 원으로 상징되어 왔다. 십자가는 흔히 기독교의 주된 상징 중 하나이지만 이 상징에도 많은 변형이 있다. 그러나 상징은 신앙의 중심이(신앙을 일깨우는 장치가 아니라) 될 때 위험해진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왜곡될 수 있다. 하지만 왜곡된 것은 상징을 사용하는 방법이지 상징 자체가 아니다. ㆍ희생 - 수많은 전통주의자들이 사순절을 지키는 이유의 핵심도 바로 희생의 개념이다.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을 지킬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을 만도 하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다. 그러나 희생을 바친다는 개념은 하나님이 우리의 종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종임을 일깨워준다. 오늘날 ‘신앙’이란 하나님한테서 뭔가 특별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도구로 통할 때가 많다. 역사적으로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뭔가 소중한 것을 기꺼이 드리려 했던 이들이다. 전통주의 영성에서 일상 생활에 희생의 개념을 통합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 요소에 대한 좋은 귀감이자 보전이다. 그렇다면 전통주의자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전통주의 영성의 세 요소를 자신의 일상 생활에 통합함으로 그리할 수 있다. 우선 세 범주 중 하나 - 예컨대 상징 - 을 골라 그것을 서서히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이 좋다. 상징이 예배 속에 통합되거든 이제 다른 범주로 넓혀갈 차례다. 한 해에 한 가지 의식을 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크리스마스 아침을 여는 특정한 방식, 주일의 특별한 기도, 새로운 형식의 성경 읽기 등 얼마든지 많이 있다. ▽ 전통주의 영성의 유혹 ㆍ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섬김 - 사무엘이 이 위험의 좋은 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다. 마음과 생각과 뜻의 의미 있는 표현이 깊고 영속적인 신앙과 결합되지 않을 때 그것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ㆍ사회적 본분의 무시 - 다른 몇몇 영적 기질과 마찬가지로 전통주의자들은 신앙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신앙의 사회적 본분을 망각할 수 있다. 거룩함을 가꾸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도 속 빈 강정 같은 종교를 경고하셨다. 알맹이 없는 종교는 위선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ㆍ남을 판단함 - 신성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전통주의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종교 의식이란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분명히 밝힌다. 종교는 개인의 신앙을 강력하게 세워줄 수 있으나 비판, 판단, 분리에 사용되면 오히려 공동체의 신앙을 허물 수도 있다. ㆍ기계적 반복 - 의식의 반복에 생생한 신앙이 배어들면 선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마음이 실리지 않은 의식은 공허한 몸놀림이 되어 우리 영혼을 위선으로 덮을 수 있다. 한 의식이 생기를 잃었거든 다른 의식으로 바꾸는 것도 좋다. ㆍ의식의 신격화 - 사람들은 단지 늘 그랬다는 이유만으로 뭔가를 사실상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왜 시행되고 있는지 더 이상 이유를 모를 때조차도. 어떤 상징과 의식도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은 없다. 본래의 의미가 상실되면 상징은 만료된 상품권처럼 더 이상 가치가 없다. 전통주의 영성의 발견 기독교 신앙은 역사와 공동체에 기초한 신앙이다. 전 신앙 역사는 의식, 상징, 성례, 희생으로 점철되어 있다. 거의 모든 상징과 의식과 행위가 한번쯤은 오히려 장애물로 변질되었거나 조금이라도 곁길로 빗나갔거나 힘을 잃은 채 기계적 반복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상징과 의식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임을 깨달았다. 청년 시절에는 나 자신이 많은 종교적 의무에서 ‘해방된’ 줄만 알았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오히려 영적 성장의 잠재적 통로였다. 의식과 상징과 희생은 나를 힘있게 받쳐주고 진리로 먹여 주었다. 그것을 실천하며 나는 강해졌다. 당신도 그럴 수 있다.
4. 금욕주의 영성 : 고독과 단순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외로움과 소외가 만연되다시피 한 문화에서 고독이 우리에게 낯설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청빈이라는 말에는 도덕적 엄격함, 수수함, 엄숙함, 담백함, 단순함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금욕주의 영성도 이런 의미가 다 해당된다. 고독한 금욕주의자 하면 당장 세례 요한이 떠오르지만 예수님도 그런 성향이 있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은 고독과 금식으로 40일을 보내셨다. 그분은 기도란 은밀한 곳에서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언젠가는 제자들이 금식할 것을 전제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려운 순간마다 다시 고독을 찾으셨다. 또한 구약에도 금욕주의 영성의 특징이 여러 군데 나온다. 비단 나실인의 경우만 아니라 신자들에게 애통을 명하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 축제를 즐기는 열정주의자들은 시편에서 값진 말씀들을 만날 수 있지만 금욕주의자들은 예레미야애가, 다니엘, 요엘에서 귀한 말씀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예배에는 분명 청빈과 고독이 들어설 때와 장소가 있다. 그러나 이 특정한 영성을 지닌 이들에게는 그 두 특성이야말로 예배의 가장 소중한 형태일 것이다. 금욕주의 영성의 세 가지 세계 ㆍ고독 - 금욕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내면의 실존을 산다. 그런 면에서 고독은 필수다. 역사적으로, 초기 금욕주의의 특징이었던 고독한 삶의 강조는 점차 사회 속에서 초연한 삶을 배우는 쪽으로 바뀌었다. 제롬은 특히 ‘내적 금욕주의’를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독신 생활, 도시를 떠나는 것, 청빈은 금욕주의의 출발점이지 목표가 아니다. 후에 또 다른 금욕주의자는 이 내적 초연함을 한 걸음 더 발전시켜 “분주한 도시 속에서 수도사들의 사막을 찾자.”고 말했다. 우리는 신앙의 표현을 위해 굳이 사막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내적 초연함이 있다면 가장 북적이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외로운 사막을 찾을 수 있다. ㆍ청빈 - 감각주의자들은 오감을 통해 하나님께 끌리지만 금욕주의자들은 오감에 오히려 방해받을 때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을 차단하려 한다. 수도사들은 기도와 금식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감각의 자극이 낮은 환경을 고르곤 했다. ㆍ엄격함 - 우리는 흔히 금욕과 엄격함을 로맨스와 한 편으로 보지 않지만 그들은 한 편이다. 금욕주의자들이 ‘엄격한’ 것은 오로지 삶의 대부분을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 추구를 위해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참된 금욕은 고난이자 자기 부인을 목표로 구하지 않고 수단으로, 즉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을 사랑하는 길로 구한다. 금욕주의 영성의 엄격성은 그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더해 주었다. 금욕주의자들은 말에 앞서 행동을 강조했다. 아이러니지만 자신에 대한 이런 엄격함에는 타인을 향한 너그러움이 수반되었다. 참된 금욕주의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타인을 대할 때는 초자연적 너그러움으로 대한다. 금욕주의 영성의 행위 ㆍ심야기도, 새벽기도 - 20세기의 수사 M. 바질 페닝턴은 잠을 놓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보통 잠들어 있는 시간에 깨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들이 잘 때 금욕주의자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금욕주의자들은 자신의 예배형태에 심야기도, 새벽기도를 통합하는 것을 꼭 생각해봐야 한다. ㆍ침묵 - 우리의 불필요한 잡담은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생각을 어지럽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할 때가 많다. 단 한두 시간만이라도 침묵을 시도해 보면 우리 삶이 얼마나 산만한지 알게 된다. ㆍ금식 - 침묵처럼 금식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생각이 덧없는 일에 소모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금식의 대상은 음식 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TV, 라디오, 영화, 특정 부류의 음식, 디저트, 고기 따위에 모두 금식이 가능하다. ㆍ순종 - 일반 신자들은 수도원 시대에 행해진 스승, 제자 관계의 엄격한 순종에 들어설 기회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부 당국과 직장 상사에 순종함으로 순종의 축복을 배울 수 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배울 수 있다. 단순히 ‘복종하여’ 타인의 리더십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 밑에서 일하며 복종하려면 커다란 겸손이 필요할 수 있지만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명하는 바다.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금욕주의자들이 순종을 실천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ㆍ일 -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는 삶을 기뻐 받으신다. 마음가짐만 바르다면 일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예배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싱크대 밑에서 파이프를 고치는 배관공, 건설 현장에서 중장비를 운전하는 인부,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는 모두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일 수 있다. 금욕주의자들에게 일은 힘들수록 좋다. ㆍ기도원 - 짧은 기도원 나들이야말로 금욕주의 영성의 근간이 될 것이다. 현대의 금욕주의자들은 완전한 고독 속에 살지는 못할지라도 시간을 조정해 한번에 몇 시간, 하루, 일주일씩 한적한 곳을 찾을 필요가 있다. 금욕주의자들은 사회에서 분리될 때 집중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ㆍ단순한 삶 - 금욕주의자들은 삶의 환경을 단순하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옷차림과 생활방식의 단순성도 중요하다. 금욕주의자들은 빡빡한 스케줄을 피하며 기도하는 방에 작은 입상들을 늘어놓지 않는다. ㆍ고난을 견딤 - 엄격한 훈련에는 고난이 전제된다.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싶은 열망에, 금욕주의자들은 고난과 싸우기보다는 고난을 끌어안는다. 병이 나면 우리가 견뎌야 할 고난이 오히려 우리를 강건케 해줄 수 있다. 병이나 더위나 추위나 배고픔이나 피곤함이 올 때 우리는 무조건 벗어나고 보자는 태도로 영적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고 그것을 끌어안고 배움으로 신앙이 자랄 수도 있다. ▽ 금욕주의 영성의 유혹 예수님은 고독 속에 장시간 기도하셨지만 그것은 공적 사역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방식 - 사역에 뒤따른 고독과 안식 - 을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영적 회복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우리 본분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건강한 금욕주의자들은 금욕이 목표가 아니라 수단임을 분명히 한다. 금욕이 목표 자체가 될 때마다 예로부터 검증되어 온 값진 기독교 행위가 무참히 왜곡되는 것이다. 한편 금욕주의자들이 실천하는 ‘영웅적’ 신앙 행위는 자칫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내려는 시도가 될 수 있다. 금식하고 단순한 삶을 산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커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그분의 용서는 우리가 행하는 영적 체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에 기초한 것이다. 금욕주의 영성에의 초청 금욕주의자들은 더 높은 삶, 영혼의 삶을 증거한다. 독일의 위대한 순교자요,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 안에 금욕주의자의 요소가 없다면 그리스도를 따르기 어렵다고 말했다. 금욕적 행위들은 우리를 곁길로 빠지지 않게 지켜 준다. 내 두드러진 기질이 무엇이든 금욕의 실천은 우리 여정의 진보에 도움을 준다.
5. 행동주의 영성 : 참여와 대결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행동주의자들을 모방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멸시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많다. 사실 성경에도 행동주의자가 많이 나온다. 엘리야와 모세 같은 지도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행동주의 영성을 찾아볼 수 있다. 행동주의자들은 영광과 오명을 안고 성경의 신앙 역사에 뛰어든다. 모세는 시작부터 행동주의자였다.(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이스라엘 동포를 옹호하다 이집트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그후 얼마 안 되어 행동주의자 모세는 과격한 목자들한테 당하는 아가씨들을 구해준다. 모세의 예는 내게 큰 위로가 된다. 모든 행동주의자는 충성된 순종이 언제나 즉각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인내 끝에 모세는 결국 이스라엘의 해방을 보았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는 ‘일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콤플렉스에 빠져 선한 일로 탈진을 자초하기 시작했다. 엘리야는 아합과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놀라운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도 교만이 드러난다. 엘리야는 참 선지자가 자기밖에 남지 않았고 진정한 열정을 보이는 사람도 자기뿐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도 행동주의자였으나 후에 이스라엘 왕이 될 하사엘과의 대결에서 놀라운 성숙을 보여 준다. 하박국은 행동주의자들에게 주는 좋은 경고이다. 행동주의자들은 ‘믿음으로 살라’는 하박국서의 메시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 행동주의자들은 교회만 무반응이 아니라 하나님마저 침묵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보다 더 커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칭 메시아의 착각에 빠진 것이다. 행동주의자들이 행동과 대결을 통해 영의 양식을 얻는 것은 사실상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기질의 아이러니도 보았다. 행동과 대결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양식이 되지만 동시에 우리를 고갈시킬 수도 있다. 제자들이 사탄의 세력과 대결하고 온 후 예수님은 기어이 그들을 쉬게 하셨다. 쉼이 없다면 행동주의자들은 사랑과 긍휼 대신 증오와 분노라는 자멸적 동기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을 지향하는 행동은 묵상주의 영성의 기도 못지 않게 하나님께 열납된다. 그러나 그것이 대결을 위한 대결을 지향할 때 우리는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분열의 영을 부추기는 것이다. 행동주의자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형태는 많다. 19세기에 찰스 디킨스는 런던 고아들을 위해 탄원했는가 하면 톨스토이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열정으로 그려냈다. 찰스 피니는 아직도 노예 제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례 주기를 거부했고, 윌리엄 윌버포스는 자기 조국 영국에서 노예 제도와 싸웠다. 프랭크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에 마음을 여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교육, 이데올로기, 선거과정, 국책사업, 시위, 대중매체, 교회의 독선, 가정 강화 등의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동주의 영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ㆍ현장을 걷는 기도 - 많은 행동주의자들이 ‘현장을 걷는 기도’로 특별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전도자는 도시의 한 블록을 빙 돌면서 조용히 중보기도를 올릴 수 있다. 중보기도자는 정부 청사를 돌면서 정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ㆍ행진 -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수님을 축하하며 행진하는 ‘예수행진’이 예기치 않게 되살아나고 있다. ‘되살아난다’고 말한 것은 아득히 바로크시대(대략 1550~1750)로 거슬러 올라가도 선조들의 그런 행진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ㆍ중보기도 - 날마다 악과 불의에 맞서 대결하는 것이 행동주의자의 천성인 만큼 그들은 초점을 잃거나 악에 오염되지 않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기도하지 않는 행동주의자는 머잖아 냉담해지며 주변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을 멀리할 수 있다. ▽ 행동주의 영성의 유혹 ㆍ판단적 태도 - 대다수의 영성 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믿음이 성숙할수록 우리는 자기 삶의 죄를 더욱 버리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죄인들을 더욱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거룩한 증오뿐 아니라 우리의 사랑도 자라야 한다. 자기 의와 비판적 태도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닮은 모습이 아니다. 역사와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되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배운다. ㆍ야망과 섹스 - 많은 일을 성취했으나 성적 부도덕에 빠진 형제 그리스도인들의 사연은 너무나 많아 굳이 다시 꺼낼 필요가 없다. 야심이 많은 그리스도인은 타인에게 책임 감시를 부탁할 필요가 있다. 야망과 은밀한 힘이 만나면 성적 범죄의 옥토가 된다. 행동주의 영성은 이 점에 있어 다른 많은 기질보다 유혹이 많을 수 있다. ㆍ엘리트 의식과 적의 - 사무엘상 30장에서 좋은 경고를 만날 수 있다. 전투 중 많은 병사들이 맹추격으로 피곤해지자 다윗은 보급품을 지키도록 그들을 남겨두고 다른 병사들과 함께 나가 전쟁을 마무리한다. 추격을 계속했던 승리의 개선 용사들 사이에 엘리트 의식이 생겨났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라.”고 그들은 말했다. 다행히 다윗이 끼어들었다. 다윗은 이것을 율례와 규례로 삼아 향후에도 싸운 병사나 보급품을 지킨 병사나 똑같이 보상을 받도록 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다양한 영적 은사와 소명을 존중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과도 통한다. ㆍ활동과 통계수치에 집착함 - 진실성과 노력은 든든한 두 다리다. 그러나 의자에 안정성을 주려면 두 다리만으로 부족하다. 행동주의자들에게는 진실성과 노력 외에도 신중한 기도가 필요하다.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은 낮이면 열심히 일하고 밤이면 열심히 기도한 사람의 완전한 표본이다. 베드로는 행동에 빨랐다가 나중에 후회할 일이 많았던 사람의 표본이다. ㆍ개인적 성화에 소홀함 - 예수님은 이웃의 눈에서 티를 빼내기 전 먼저 우리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셨다. 사회 참여는 절대 개인적 성화를 대치할 수 없다. 사실 개인의 성화 없는 사회 참여는 득 못지 않게 해가 될 수 있다. ㆍ고귀한 소명 - 교회는 행동주의자들, 선지자들과의 사이가 불편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행동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해야 한다. 행동주의 영성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귀한 소명이다. 우리가 행동에 나서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해 드리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로 무장할 때 성공적인 사역(개인적인 업적이 아니라)은 곧 뒤따를 것이다.
6. 박애주의 영성 :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자, 병든 자, 궁핍한 자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이렇게 말하면 상담 분야 사람들은 ‘의존증세’를 잔뜩 우려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가장 뜻깊은 길 중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다. 박애주의자들에게 있어 남을 돌보는 일은 잡일이 아니라 일종의 예배다. 박애주의자들은 자신의 소명과 기질을 이해하려 함에 있어 특히 두 사람 - 모르드개와 예수님 - 을 살펴볼 수 있다. 모르드개의 첫 번째 그림은 에스더 2장 7절에 나온다. 거기서 우리는 부모의 강제 이주로 인해 고아가 된 에스더를 거두는 모르드개를 볼 수 있다. 에스더를 위한 모르드개의 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왕궁에 들어간 후에도 그는 늘 에스더가 잘 지내는지 깊은 관심으로 지켜보았다. 모르드개의 두 번째 그림은 2장 후반부에 나온다. 이번에 모르드개가 챙긴 사람은 왕이었다. 모르드개는 들은 내용을 고하여 왕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구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사람에 영합하는 자가 아니었다. 3장에 보면 모르드개는 하만 앞에 절하기를 거부하여 하만의 분노를 산다. 모르드개는 남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때는 남을 섬겼으나 그 둘이 서로 충돌할 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유사 이래 진정 온전한 인간은 오직 예수님뿐이었다. 그래서 그분께는 이 책에 나오는 영적 기질이 모두 보인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긍휼의 완전한 표상이었다. 예수님은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잃어버린 영혼을 돌보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고, 친히 무리를 보시며 몹시 측은해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를 다른 사람들의 필요보다 밑에 두셨다. 이 땅을 살다간 그 누구보다도 그분께는 꼭 이뤄야 할 더 중요한 사명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분은 시간을 쪼개 병든 자와 배고픈 자와 제멋대로 구는 무리를 돌봐 주셨다. 소위 ‘영적인 일’도 우리 손에 때를 묻히지 않을 구실은 될 수 없다. 긍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이웃을 돌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도전은 무수히 많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신약성경을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비유 중 하나일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가르침을 통해 긍휼을 강조하셨다. 그러니 신약 성경 저자인 그 제자들이 우리에게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라고 말했다. 바울도 요한과 한 목소리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돌볼 것을 권한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베드로는 우리에게 서로 대접할 것과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해 서로 섬길 것을 권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부작위의 죄(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작위의 죄와 똑같이 중하게 여긴다.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얼마든지 많으며, 박애주의 영성은 그것을 잘 통합한다. 생각해 볼 만한 활동들을 몇 가지 꼽아본다면, 죄수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 개인적 위기를 만난 친구를 도와 주는 것, 돈을 빌려주는 것, 약물 중독과 싸우는 사람을 거드는 것, 구조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것, 문맹에게 글을 깨쳐주는 것, 매 맞는 여성 보호 시설에서 시간을 헌신하는 것, 시각 장애자를 위해 녹음해 주는 것, 피곤한 부모들의 자녀를 봐주는 것 등이 있다. 성령께서 감화하고 인도하실 때, 남을 도우려는 자들에게 펼쳐진 기회의 수는 제한이 없다. 전도의 도입으로 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봉사로 하든 그것은 행동화된 복음의 강력한 그림이다. 남을 돌보는 것은 선지자적 행위이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 동물이라 남에게 관심을 품는다는 것은 비본성적 반응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손길에 대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긍휼을 베푸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인 문화와 때로는 이기적인 교회에 예언자로서 말하는 셈이다. 이렇듯 ‘선지자적’ 긍휼은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 즉 하나님이 나를 한없이 사랑하심을 알기에 남들을 돌보는 것이라야 한다. ▽ 박애주의 영성의 유혹 ㆍ판단 - 우리는 자칫 ‘묵상주의자들은 너무 거룩해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발 앞에 앉아 경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마르다에게 아주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도록 부름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본분을 다하는 길은 각기 다를 수 있다. 타인의 예배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다. ㆍ이기적 동기로 남을 섬김 -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봉사 욕구를 느낄 수 있다. 질환으로서의 긍휼은 사실상 탈취 행위다. 그것은 기만 행위다. 상대를 사랑하되, 보상으로 자신을 사랑하거나 의존하게 만들려고 그리하기 때문이다. ㆍ편협한 정의 - 행동주의 영성과 박애주의 영성에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다. 박애주의자들은 행동주의자의 동기를 판단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둘은 함께 일할 수 있다. 긍휼의 정의가 편협해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 돌봄과 문제 경감을 위한 단기적 돌봄의 구분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 나라 사역에는 양쪽 다 필요하다. ㆍ측근 사람들을 무시함 -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내 욕구를 채우려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족들부터 즐거이 돌봐야 한다. 아이들 돌보는 것을 자기 예배의 중심부로 여길진대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주부의 시각은 일대 변혁을 일으킬 것이다.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박애주의 영성의 소명 긍휼은 모든 신자의 본분이지만 이런 형태의 봉사에 특별한 은사와 소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박애주의자들은 조용히 앉아 기도할 때보다는 성인 환자의 기저귀를 갈아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더 선명히 들릴 수 있다. 이것은 고결하고 거룩한 소명이다. 군중 앞에 설교하는 것만큼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특히 귀한 것이라 믿는다.
7. 열정주의 영성 : 신비와 축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활강 스키어들을 보면 열정주의자들이 생각난다. 열정주의자들은 많은 초자연적 형태의 신앙과 아울러 축제 형태의 예배를 즐긴다. 그래서 열정주의 영성은 가장 논란이 많은 영적 기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을 정직히 들여다보면 신비, 축제, 초자연적 사건을 풍성히 체험한 신앙인들이 분명히 등장한다. 열정주의 영성을 정의하려면 먼저 신비와 축제라는 두 단어를 명심해야 한다. 신비와 축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ㆍ신비 - 기독교에 ‘신비’의 측면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가 예배하고 섬기는 하나님은 초자연적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초자연적 하나님이다. 이러한 체험은 열정주의 영성을 지닌 자들에게 특별히 양분이 된다. 하나님과 기독교에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그들은 이해한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데는 장점도 있지만 위험 요소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성을 주셨고 건전한 성경의 계시를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것 보다 절대 열등하지 않다. 신비와 이성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 사울 왕의 실패가 좋은 교훈을 준다. 사울은 명백한 계시에 불순종한 채 ‘부득이하여’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림으로 큰 문제를 자초했다. 우리가 지성을 무시할 때 그분은 분노하신다. 부득이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따져보지도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아니다. 상충된 내용의 기록된 계시가 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신비’는 세 가지 모양 - 꿈의 사용, 기대감, 기도 - 으로 신앙의 일부가 되어 왔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잘 입증되어 있다. 하나님은 야곱, 요셉, 솔로몬, 다니엘에게 꿈을 통해 말씀하셨다. 신약에는 환상도 여러 번 나온다. 환상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받는다는 점에서 꿈과 다르다. 바울, 아나니아, 고넬료, 베드로는 다 환상을 받았다. 꿈은 하나님이 ‘깨치고 들어와’ 낮 동안에 우리 마음이 열려 있지 않아 듣지 못하던 것을 들려주실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존 웨슬리는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나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꿈속에서 보거나 심안을 통해 확실히 보면서 크게 변화된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고 적었다. 그러나 2O년 후 웨슬리는 많은 사람들이 꿈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을 인정했고 사탄이 정당한 꿈을 ‘흉내낼’ 수도 있음도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는 꿈의 자리를 믿었다. 여기서 꿈과 관련된 몇 가지 안전 지침을 살펴보자. 첫째는 경청의 중요성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방법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경청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경고나 가르침의 말씀을 놓칠 수 있다. 둘째는 기록의 중요성으로, 대부분의 꿈은 기록해 두지 않으면 몇 분 안에 잊혀진다. 기록은 우리가 하나님께 인도 받는 일을 소중히 여긴다는 표시이며, 들었던 내용을 뒤돌아보고 분별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셋째는 의미의 중요성으로,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이 담겨 있는 꿈들은 그 ‘해석’이 분명하다. 깰 때부터 이해가 된다. 이것은 성경의 전례가 보여주는 중요한 사항이다. 깨는 순간 해석이 분명치 않다면 어떤 통찰이든 일단 보류하고 추가 확증을 기다려야 한다. 넷째로는 공동체의 중요성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분리된 영성은 위험하다. 다섯째는 관점의 중요성으로, 매일 밤 꿈을 통해 들으려는 행위는 자칫 아주 위험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분명히 꿈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마다 일어나 ‘간밤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일까?’를 따지는 차원으로 우리 신앙을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제일 먼저 성경으로 가야 한다. 아울러 꿈은 우리를 ‘신비한’ 신앙 생활의 다른 측면으로 이어줄 수 있는데, 바로 기대감의 중요성이다. 열정주의자들의 신앙에는 기대감이 필요하다. 마땅히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의 여지가 없이 꽉 짜여진 프로그램이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이 숨막혀 보인다. 기대감의 신비를 가꾸려면 열정주의자들은 아침에 일어나 그날 자기가 섬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좋다. 이런 기대감은 열정주의자들의 신앙을 활기차게 한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시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한 열정주의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 기도의 주머니를 만들어야 하며,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많은 열정주의자들이 때로 반발하는 신비의 요소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신비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재미 들릴 만한 응답으로 만족스런 결과를 주실 때면 열정주의자들은 좋아한다. 그러나 신비가 우리를 침묵하고 무반응하며 잔혹하기까지 한 하나님을 믿도록 이끌어갈 때면 흥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성숙의 필요성 때문에 열정주의자는 거의 누구나 이런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어 있다. 이것이 거룩함의 목표에 이르는 필연적 경로이며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ㆍ 축제 - 신비와 더불어 축제 또한 열정주의자들이 양분을 얻는 통로이다. 축제는 성경에 폭넓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등 최소 세 번의 주요 절기와 기타 종교 축일이 규정되어 있다. 예수님도 축하 형태의 예배를 장려하셨다.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셨을 뿐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큰 소리로 축하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자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말씀하셨다. 축제의 행위는 감사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하나님은 크게 찬양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다. 우리의 최선은 그분께 합당한 분량에 언제나 턱없이 모자라다. 그러나 축제는 의무 이상으로 특권이다. 축제의 예배는 기쁨을 가져다주며, 기쁨은 영혼에 힘을 주는 기본 덕목이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삶에 희망과 전망과 기쁨이 있던 때를 기억하며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길이다. 자녀가 다 컸거든 옛날 사진첩을 꺼내 놓고 그간 하나님이 해 오신 일에 감탄을 느껴 보는 것도 좋다. 아기가 자라 건장한 성인이 됐다는 현실을 보며 다시 한 번 삶의 본질, 영원한 것으로 돌아가라. 또한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은 창조 작업을 한다. 창조는 우리 하나님의 본성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에 우리도 창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다. 창조를 예배행위로 볼 때, 자신이 비교적 잘하는 일이나 적어도 소질이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좌절은 꽤 능숙하게 경배를 가로막는다. 완벽주의에 빠지지 말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뭔가 빛나는 것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머리와 손과 힘과 기술을 주셨다. 뭔가를 만들어 그 머리와 힘과 기술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라. 열정주의자들은 특히 건전하고 견실한 성경 교육에 뿌리를 두도록 유의해야 한다. 기쁜 소식은, 이블린 언더힐에 따르면 예배의 영에는 감정, 상상, 이성적 사고의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열정주의자들은 그 중 감정과 상상에 이미 두각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감정과 상상의 도움으로 열정주의자들은 셋째 영역인 이성적 사고를 쌓을 수 있다. 성 존 유즈는 자기 제자들에게, 복음서를 공부할 때 우선 사건을 재구성하고(상상), 의미를 파악하고(지성), 경배나 회개나 기타 적절한 감정으로 반응하고(마음), 확실한 헌신으로 마무리하라고(의지) 가르쳤다. ▽ 열정주의 영성의 유혹 ㆍ체험을 위해 체험을 구하는 것 - 열정주의자들은 새로운 체험을 구하기 보다 하나님을 구하고 사랑하는 데 머물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영적 체험’ 자체를 위해 그것을 구할 때 그런 체험은 실제 악해질 수 있고 악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ㆍ독립 성향 - 어떤 다른 기질보다도 열정주의 영성이야말로 신자 개개인의 책임을 감시해줄 수 있는 든든한 교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교회의 감시가 없는 초자연적 체험은 재난의 확실한 전조다. ㆍ ‘좋은 기분’과 ‘좋은 예배’를 동등시하는 것 - 감정이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다. 열정주의자들이 감정을 즐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감정에 의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열정주의 영성의 메시지 냉소와 우울의 세상에서 열정주의자들은 “이제야말로 하나님이 정말 역사하실 때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가 기대하거나 바라는 대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폴리애나 식의 낙관론이 현실 생활에 안 맞는 것만큼이나 절망과 냉소도 참된 신앙을 흐려 놓는다. 나는 열정주의자들이 귀한 은사와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다. 가장 어두운 밤에도 그들의 축제와 믿음이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8. 묵상주의 영성 :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묵상주의자들이 첫째로 하고 싶어하는 일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늘의 배우자로 알고 묘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사랑으로 응시하며, 그분을 연인으로 체험하는 환희에 붙들리려 한다. 묵상주의 영성의 역할에 대한 최고의 설명 중 하나를 베냐민 지파에 대한 모세의 예언 겸 묘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새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하나님의 어깨 사이에 처하는 것’이야말로 묵상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누리기 원하며, 갈수록 더 깊은 방식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원한다. 안타깝게도 신앙의 역사를 보면 선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라는 소명과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신앙을 ‘하라, 하지 마라’의 윤리 목록으로 전환시키곤 했다. 사모하는 마음 없는 이런 기계적 순종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신앙이 아니다. 한 여자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붓자 일부 제자들은 격렬히 반대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를 열납될 사랑의 제사로 변호해 주신다. 전통주의 영성은 묵상주의 영성을 얄팍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성주의자에게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신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소중하고 값진 것이며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 예수님은 영적 생활이란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가장 큰 계명은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묵상을 ‘손을 마주잡은 기도’의 형태로 묘사하고 싶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상태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쉰다. 토마스 머턴은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그 사랑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유익과 행복을 사실상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묵상주의자들은 이 사랑을 위해 산다. 그들은 천상의 연인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분께 자신을 송두리째 드릴 수 있는 프라이버시와 고요한 심령밖에 바라는 것이 없다. 묵상주의 영성의 행위 일반 묵상 기도 외에도 묵상주의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도와 활동은 여러 형태가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ㆍ예수님 기도 - 역사적으로 묵상주의자들은 ‘예수님 기도’를 애용했다. 예수님 기도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아주 간단한 기도다. 예수님 기도의 취지는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데 있으며 그 유용성은 역사를 통해 입증되어 왔다. 예수님 기도는 예수께서 주님이시고 나는 죄인이며 따라서 그분의 자비가 필요함을 일깨워주는 장치다. ㆍ은밀한 헌신의 행위 - 은밀한 헌신의 행위란 혜택을 입은 당사자를 포함해 아무에게도 내 정체를 알리지 않고 몰래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은밀함은 내 행위에 오직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외에 다른 동기가 없다는 증거다. 은밀한 헌신의 행위를 몇 가지 예로 든다면, 내 가장 중요한 필요들이 하나님 안에서 채워진다는 표시로 뭔가를 영구적으로, 또는 일정기간 동안 포기하기로 서원하는 일, 하나님께 대한 상징물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목걸이로 걸거나 반지로 끼고 다니는 것, 목사나 친구에게 익명으로 격려의 쪽지를 보내는 일, 창조주 하나님을 기리며 화단에 나무를 심거나 꽃씨를 뿌리는 것 등이 있다. ㆍ춤추는 기도 - 춤추는 기도란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기도다. 가장 요긴한 기도 제목을 우리가 안다는 가정은 실은 교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드리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그분의 리드에 따라 우리 기도는 회개, 축제, 중보, 내적 성찰 등으로 이어질 수 있고 여러 가지가 혼합될 수도 있다. 춤추는 기도의 중요한 요소는,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이 앞서가실 수 있도록 훌륭한 댄서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다. 자리에 앉아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이미지를 떠올려라. 그리고 기도의 리드를 성령께 맡겨라. ㆍ집중 기도 - 일반적으로 집중 기도의 원리는 이렇다. 우선 묵상 기도의 초점으로 삼을 단어(예컨대 예수님, 아버지)를 택한다. 정해진 시간 동안(예컨대 20분) 속으로 조용히 그 단어를 반복한다. 마음속에 그 단어가 저절로, 즉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무의식중에 되풀이될 때까지 그렇게 한다. 마음에 예수님, 아버지, 기타 해당 주제(사랑, 기쁨, 평안 등)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면 외부의 산만한 것들이 차단된다. 집중 기도의 취지는 감정을 유발하거나 ‘영적 체험’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복된 임재를 누리며 그 안에 쉬는 데 있다. 가장 깊은 차원의 사랑은 종종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말이나 행동 없이 상대의 존재 앞에 쉴 수 있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그것을 누리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ㆍ마음의 기도 - 생각을 활용해 마음에 집중하게 해주는 것이 마음의 기도다.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설 때 내 기분은 어떤가? 내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께 중심을 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에 중심을 둔 것인가? 마음의 기도란 집중 기도처럼 ‘행위’의 기도가 아니라 ‘존재’의 기도다. 목표는 하나님의 응답을 얻거나 그분께 필요를 아뢰거나 그분의 통찰을 받거나 심지어 그분께 헌신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기도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그분께 대한 정서적 애착에 집중하는 것이다.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시도록 우리 마음을 넓히는 것이다. ㆍ십자가 길의 14처소 -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둘러싼 여러 사건을 더듬으며 기도하는 것이다. 각 지점마다 잠시 멈춰 마음속에 성경의 진리를 그려 보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희생과 순종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각 처소별로 정해진 기도문이 없으므로 기도를 성령의 인도에 맡기면 된다. 골고다 길을 더듬으며 기도하노라면 자연스런 통찰과 간구를 잃지 않으면서도 묵상 기도에 구체적 틀이 생긴다. ㆍ묵상기도 -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을 통해 묵상 기도의 대중화에 일조했다. 이냐시오는 성경 본문을 놓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 특정 주제를 놓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 어떤 물체를 기도에 활용하는 것, 물체의 실제적 교훈을 묵상하는 것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번 기도는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를 굴복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진정한 인격적 만남을 갖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 묵상주의 영성의 유혹 ㆍ균형 상실 - 묵상주의자들은 간혹 성․속의 이분법에 빠지는 우를 범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 - 사람이든 물체든 - 과 함께 있는 즐거움이 배제되는 것이다. 건강한 묵상주의자들은 고독 속의 친밀한 기도 못지 않게 풍성한 인간관계도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길임을 이해한다. ㆍ자아의 흡수 - 그저 자신을 ‘비워’ 진공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묵상을 조심하라.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것은 속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갔으나 그 속이 비어 있어 다시 더 많은 귀신이 들어와 사태가 처음보다 악화됐다고 말씀하셨다. ㆍ덕을 잊음 - 묵상주의자들은 미숙한 심취 상태를 벗어나 자기 훈련과 절제를 통합하는 쪽으로 자라야 한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반한 상태를 벗어나 자기 희생에 기초한 헌신으로 깊어져야 하는 것처럼 묵상주의자들도 단순한 묵상을 벗어나 우리 뜻을 조정해 그리스도께 맞춰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ㆍ영적 체험에 중독되는 것 - 고대인들은 묵상을 천국의 기쁨의 맛보기로 알았다. 어거스틴은 그것을 ‘거룩한 술 취함’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묵상주의자들은 이 땅에서는 몸에 한계가 있듯이 영혼과 감정에도 한계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누리는 영적 기쁨에 감사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일시적 특성도 용납해야 한다. 하나님 대신 감정을 구하는 ‘영적 탐식’도 조심해야 한다. 묵상주의 영성의 메시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하나님께 자신의 사랑과 애정을 드리는 것이다. 묵상주의자들은 우리에게 그 놀라운 사실을 일깨워준다. 묵상주의자들과 신비가들은 의혹의 곁눈질을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은밀한 사랑을 하나님은 참으로 귀히 여기신다.
9. 지성주의 영성 :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묵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몇 시간이고 머물 수 있는 것처럼 지성주의자들은 도전적인 구절이나 개념에 골똘하여 몇 달도 보낼 수 있다. 지성주의자들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귀한 소명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사랑을 말할 때 늘 부각되는 것은 마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생각(뜻)도 우리가 하나님 사랑에 사용할 수 있는 핵심 요소 중 하나임을 강조한다. 잠언은 우리에게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라”고 말한다. 예수님도 친히 지적 성향을 보여주셨다. 열두 살 때 그분은 성전에서 율법을 논하고 있었다. 가르침은 그분의 사역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특히 지성주의자들은 정신 신학 교육에서 큰 유익을 얻는다. 좋은 학교는 졸업 후에도 계속 혼자서 공부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준다. 이 일은 갈수록 더 쉬워지고 있다. 2~3년의 시간이 여의치 않거든 한 해만 직장을 쉬고 1년 과정 학위를 얻는 길을 생각해 보라. 여름학기 과목도 생각할 수 있다. 시간과 비용 때문에 실제로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면 언제나 라디오나 비디오를 통한 개방 강좌를 고려할 수 있다. 또한 신학 훈련의 기초 분야를 배워 자신의 신앙을 넓히려 애써야 한다. 기초 분야에는 교회사, 성경 연구, 조직신학, 윤리학, 변증학이 포함된다. 2권으로 된 라투레트의 『기독교 역사(History of Christianity)』는 다년간 많은 신학교와 성경 대학에서 표준 교과서로 쓰여 왔다. 『두 나라: 교회와 문화의 역사(Two Kingdoms: The Church and Culture Through the Ages)』라는 책도 내용에 걸맞게 주목을 끈다. 『기독교 역사 핸드북(Eerdman's Handbook of to the History of Christianity)』은 읽기 쉬운 책이다. 이런 입문서를 벗어나, 교회사의 특정 시대를 다룬 책들도 많이 있다. 나는 신앙 생활의 어려움의 90%는 우리가 성경을 충분히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믿는다. 넓게 말해 성경 연구는 세 가지 요소로 구분될 수 있다. 성경을 통독하는 것, 성경의 일부를 꼼꼼히 공부하는 것,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는 것이다. 당신의 영적 기질이 지성주의 영성이라 생각된다면 여기가 출발점이다. 날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라. 지성주의 영성이 아닐지라도 매일의 성경 읽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한편 조직신학은 구원, 세례, 교회 질서 등 기독교 교리를 공부하는 분야이다. 우선 시작할 두 권의 탁월한 책으로 J. I. 패커의 『간추린 신학(Concise Theology)』과 R. C. 스프롤의 『기독교 핵심 진리 102가지(Essential Truths of the Christian Faith)』가 있다. 조직신학에는 하나님, 인간, 예수님, 성령, 교회, 종말론, 계시 등 7가지 기본 주제가 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지만 아울러 행동의 종교이기도 하다. 기독교 윤리학 공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범사에 기도하며 결정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윤리학 공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필요성과 실체를 일깨워 준다. 구원이란 지옥을 피하는 문제 이상이다. 구원이란 여기 이 땅에서 변화되어 새 사람을 입는 문제다. 지성의 이런 측면을 개발하려면 존 제퍼슨 데이비스의 입문서 『복음주의 윤리학(Evangelical Ethics)』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존 머레이의 『행동원리(Principles of Conduct)』나 C. S. 루이스의 고전 『인간의 폐기(The Abolition of Man)』도 읽어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말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호시탐탐 허점을 노리는 무리 앞에 선다는 것은 도전이다. 이런 토론이 흔히 말하는 변증이다. 변증학은 오늘날 불신의 한복판에서 신앙을 설명하고 변호하는 방법을 다룬다. 아울러 이단은 - 특히 기독교 혹은 비기독교 집단에서 나오는 - 앞에서 기독교의 참된 교리를 변호하는 일도 변증학에 들어간다. 변증학 분야의 두 권의 현대 고전은 폴 리틀의 『이래서 믿는다(Know Why You Believe)』와 조쉬 맥도웰의 『판결을 요하는 증거(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이다. 신조란 신앙 고백의 말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가시적 교회 전체용으로 작성, 통용되는 ‘초교파’ 신조도 있고 예컨대 장로교나 천주교 등 특정 교회 분파용으로 작성된 ‘내부’ 신조도 있다. 지성주의자들은 설사 자기가 속한 전통의 신조가 아닐지라도 주요 신조들을 두루 숙지하고 싶을 수도 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오스 신조, 아우구스부르크 고백, 웨스트민스터 고백 등은 모두 좋은 출발점이 된다. 지성주의 영성의 개발 영적 기질 테스트에서 지성주의 영성에 높은 점수가 나왔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 지성을 개발하기 원한다면, 우선 가장 흥미롭게 다가오는 분야를 선택하라. 이것은 평생의 사명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 생명을 주시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점차 조금씩 자신의 지성을 넘겨 드려야 한다. ▽ 지성주의 영성의 유혹 ㆍ변론을 좋아함 - 바울은 분열 조장을 아주 대단히 심각한 죄로 보았다. “이단에 속한(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교만한 지식 자랑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다. ㆍ행동 없는 지식 - 잠언서에 따르면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하여 깨달은 의의 길을 열심히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바른 생각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필수지만 바른 행동도 똑같이 필수다. ㆍ교만 - 교만은 뛰어난 지성인들의 공통된 약점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남달리 뛰어난 은사를 주셨거든, 교회를 섬기라고 맡겨준 것임을 잊지 말라. 고귀한 소명 지성주의자들은 성인 소그룹 모임, 신문 논설, 친구들이나 가족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전 세계 도처의 많은 단체에 진리를 증거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내 경우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뭔가를 배울 때마다 그것을 통해 그분과 더 가까워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확신컨대 이것은 지성을 넓힘으로 간절히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간증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나의 영성을 찾아 신앙이란 심기만 하면 되지 가꿀 필요가 없다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180센티미터의 키로 자라는 것처럼 저절로 되거나 아예 안 되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것은 신앙 고전을 기록한 사람들의 견해도 아니고 경륜이 있는 많은 목사들과 교사들의 견해도 아니다. 성경의 견해는 물론 아니다. 이제 9가지 영성을 모두 살펴보았으니 자신의 영적 성품을 분별할 준비가 된 셈이다. 두드러진 기질이 둘 이상일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 또 영성은 시간이 가면서 발전할 수 있다. 2장부터 10장까지의 평가를 종합하면 당신이 현재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떤 활동들이 오늘 당신의 영적 성장에 가장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다. 그 다음, 다른 기질들을 통합하여 배우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 경우 위 테스트에서 최고점이 나온 것은 자연주의 영성이고 다음은 지성주의 영성이다. 세 번째로 강한 것은 금욕주의 영성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영적으로 건강하려면 나는 첫째, 야외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 둘째, 내 사고에 도전을 주는 활동들에 가담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훈련과 고독의 강한 필요성을 당연히 확신할 수 있다. 내 영혼이 바라는 것만 양식으로 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일단 나를 거룩한 세계로 이끌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했으면 이제 새로운 양분의 영역들로 탐험에 나설 수 있다. 자신의 정원을 가꾼다면 우리는 남들까지 먹일 만큼 풍성한 소출을 얻게 된다. 어쩌다 한번씩만 정원을 돌본다면 그저 나 먹을 만큼만 거둘 것이다. 정원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너무 배고파 남의 것을 먹고사는 ‘소비자’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자신의 영성을 발견하는 것은 바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한 방편이다. 한편 우리는 단순히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신앙 표현을 무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지나치게 높다는 생각도 든다. 자기 나름의 신앙, 기도, 예배 생활을 개발해 그것으로 교회 생활을 살찌우는 것이 훨씬 건강한 접근이다. 영적 성장의 처방전은 한 가지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감히 우리의 제한된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보다 크다. 훨씬, 훨씬 더 크다. 지금 내 정원 상태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다.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은 천지를 두루 살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다. 당신이 하나님과 누릴 수 있는 관계는 그분이 어느 누구와도 맺지 않으실 독특한 관계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그 관계가 시작되기를 간절히 뜨겁게 원하신다. 신앙의 선배들 - 모세와 다윗과 마리아 - 은 시간을 들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꾸고 키워갔다. 당신도 오늘 이 초청에 응하지 않겠는가?
▣ 저 자 게리 토마스 작가이자 성경과 교회사와 기독교 고전을 통합하는 사역을 하는 복음주의 영성센터(Center for Evangelical Spirituality)의 설립자 및 대표이다. 그는 웨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영성 훈련 과정을 강의하고 있으며, 「Spiritual Formation Bible」의 기고자 중 하나이다. 저서로 『Authentic Faith, Sacred Marriage(사랑과 행복, 그 이상의 결혼 이야기)』『The Glorious Pursuit, Seeking the Face of God』등이 있다. 저자의 홈페이지 주소는 www.garythomas.com이다. ▣ 역 자 윤종석 서강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미국 Golden Gate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학(MA)을,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상담학(MA)을 공부하였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예수님처럼』『하나님의 모략』『전능자의 그늘』 등 다수의 책을 번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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