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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도전

기쁨조미료25 2008. 4. 2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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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제목 복음의 도전
ㆍ이름
박바울 선교사 / 서울대 의대 졸(M.D.), 2002 아프가니스탄 긴급난민구호 의료팀장, 국내선교동원가 작성일 : 2008-04-09 15:05:31  hit : 192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주저 없이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은 나 바울은” 이라는 문구를 늘 사용하였다. 그의 정체성은 복음 그 자체였다. 그 자신의 삶과 사역은 복음으로만 설명될 수 있고, 하나님의 택하심은 이 복음의 진보를 위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 복음에 모든 것을 걸었다. 많은 지식을 쌓았던 그는, 복잡하고 현학적인 교리적 문제들을 집어던져 버리고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배설물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왜일까? 그는 무엇인가를 강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 나아가 역사는 복음으로 끝난다고 우리 주님은 선언하셨다.(마 24:14) 왜일까? 주의 말씀이기에, 늘 우리 공동체에서 부르짖어왔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 내에서 늘 의심 없이 회자되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인간 역사의 복잡성을 고찰하고 현실의 문제들에 직면하면 할수록 이것은 쉽지 않은 선언임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을 결정하는 듯 보이는 많은 요소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복음’ 하나로 역사의 종결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치와 경제, 문화, 사회적 구조들의 변동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이 역사를 종결시킬 키워드임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님은 왜 이것을 역사의 중심에 두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역사를 관통해 온 핵심에 대해, 복음이 근본적인 도전을 가하기 때문이다.

1. 역사의 핵심 : 죄의 문제를 건드린다!
  복음(Good News)의 핵심에는 죄의 문제를 폭로하는 것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죄의 문제를 폭로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 된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 죄의 문제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를 주관하실 때에는 죄의 문제를 그 중심에 두고 계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죄의 문제는 인간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거나 그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대체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역사가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변질된 목적을 구성해 왔기 때문이며, 그 변질된 목적이 그것의 성취를 위해 사람들의 편법을 가속화시켰기 때문이다.
  첫째, 사람들은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은 본래 노동의 대가이고, 그 대가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매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세계 역사는 이 돈을 통해서만 인간의 모든 권한들이 표현되고 행사되도록 발전해 왔다. 따라서 생존의 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돈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했지만, 어떤 경우에는 여유 있는 돈을 가져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돈의 축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통제할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돈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오늘날 돈은 노동으로만 확보되지 않는다. 노동에 비견될 수 있는 모든 ‘가치’(예컨대, 자본 그 자체, 여성이 가진 성적 가치,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정보력 등)의 투자에 대한 대가로 돈은 얻어질 수 있다. 인간은 이 돈을 재생산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다. 돈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면 돈 자체는 더 이상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역사의 목적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이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고,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알려주셨다. 돈이 목적이 되는 순간, 혹은 그것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사단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처음부터 돈을 목적으로 설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별다른 목적이 자신을 이끌 수 없음을 인지하고 눈을 가리고 자신과 그 가족을 위해 그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만이 그의 삶에 남게 된다. 또한 어떤 일부의 사람들은 거대한 자본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역시 그 자본이 확보되면서 저질렀던 수많은 불법과 횡포―대부분의 경우는 정당한 사회적 권한이라 포장되어 있는―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뿐 아니라 확보된 자본 자체는 그를 계속된 불법 속으로 몰아넣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선택과 과정, 결과를 역겨워 하신다. 사단은 마치 이러한 과정이 아니라면 우리가 망하게 될 것처럼 두려움을 심어주었고, 인간의 역사는 이것에 종노릇해 왔다.
  둘째, 사람들은 정치적 권력을 추구해 왔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단순히 좁은 의미의 국가권력을 추구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모종의 강제력을 통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권한을 확보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임의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작용을 포괄하는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가 형성되어 있고 그 구조는 곧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 얽혀있는 수많은 관계의 얼개 속에서 인간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 권력관계이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회적, 권력적 속성으로 인해 역사 속에는 많은 피가 흘렀다. 국가를 두고 벌이는 권력투쟁에서부터 작은 일상사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정치적 권력을 추구해왔고 권력관계의 경쟁자들의 피를 보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피가 흘려지는 순간, 인간은 극도로 무자비하였다. 왜냐하면 정치적 권력은 우리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확보된 크고 작은 권력들은 그 권력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임의대로 조종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의로운 지도자들은 찾기 힘들다. 수단을 정당화하는 올무에 걸리거나, 임의대로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였다. 하나님은 필요한 정치적 권력과 사회질서를 중시하셨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의나 부당한 권력적 통제를 용인하신 적은 없다. 정치권력은 인간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셋째,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해 온 것은 종교성이었다. 종교란, 영적 진실에 근거하지 않고 신의 힘을 땅에 풀어놓으려는 모든 시도를 일컫는다. 그것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이름으로 행하여진다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온갖 종교적 시도로 점철되어져 왔다. 역사를 지배해 왔던 거대 종교문명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 신앙 내에서도 수많은 샤머니즘적인 신앙행태와 기법들이 우리를 병들게 하였다. 하나님은 의롭지 않은 제사를 역겨워하신 분이다. 사람들은 역사 속에 넘쳐났던 죄악들을 다른 기법들로 간과해 보려고 노력하였고 하나님을 속여 종교적 제사로 태워보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 종교 진영 내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 종교적 기대에 연명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속여 그들의 영혼을 담보로 잡기도 하였다.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자처하는 곳곳에서도 이러한 혼미케 하는 제사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종교적 과정에서는 죄의 문제보다는 능력이라는 결과를 중시하여 신의 힘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우리들이 원했던 거짓 신의 힘은 위에서 언급한 다른 목적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우상은 바로 이런 속성을 가진 것이었다.
  복음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죄악들의 본질을 들추고 그것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다루는 데에 있다. 위에서 나열한 역사를 지배하는 인간의 목적들은 죄악의 물꼬가 터지는 일종의 ‘방향성’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추구를 통해 2차, 3차로 우리의 죄악은 그 물꼬를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서 1-3장에서 수없이 나열되고 있는 우리들의 죄악들을 보라! 그것들은 결코 인간 역사의 구석에서 은밀히 행해진 것들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는 하나님이 가장 고귀하게 여기시는 인간, 즉 당신의 자녀들의 피를 땅에 흘리게 하였고, 그들의 고통에 철저히 무자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의 동료들을 이용하기를 즐겨하였고, 고귀한 사람들을 성적인 도구로 전락시켜 그들의 영혼을 사고 파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를 보지 않는다.

2. 복음의 해법
  문제는 해법이다. 하나님의 해법은 인간으로 오신 당신의 십자가이다. 나무에서 흘리신 그의 피는 역사를 옭아매고 있던 견고한 고리들을 끊어버린다.

(1) 경제 권력에 도전하는 복음
  십자가의 용서는 돈에 대한 의존을 끊어버린다. 돈은 생존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한다. 끊어졌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버지로 회복되는 순간, 우리는 이분으로부터 오는 안전과 보호를 보장받게 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26-30)

  이 분이 제공하는 보호가 유효할 수 있는 것은 자녀와 아비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순간 우리는 그분의 통치, 곧 그분의 나라(Kingdom)를 땅에 소망하게 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죄의 짐을 벗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자, 그의 다스리심을 소원하는 자, 그래서 그분이 제공하는 안전과 보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 그는 돈에 대한 의존을 끊어버릴 수 있다. 부자는 천국에 가기 어려운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돈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돈을 가지고 생존할 수밖에 없도록 그 인생이 구조지어져 있다. 우리가 그분의 용서하심으로부터 오는 보호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분이 보호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아버지시다. 그분은 돈에 얽매여 있는 거대한 역사적 고리에 대해, 이 돈에 대한 의존에서 자유로운 자들을 통해 새로운 천국혁명을 하시는 것이다. 복음은 경제 권력을 초월한다.

(2)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복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마 20:25-26)

  예수의 이 발언은 세상의 정치적 본능을 역행한다. 인류역사의 정치적 속성은 자기 수하에 있는 자들을 임의로 주관하는 것이다. 세상은 권력관계로 작동된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나 복음으로 그의 제자, 그의 가족으로 편입되는 순간 우리는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막 10:45)……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요 15:20)”

  종은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 그런데 그 주인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이다. 복음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그분의 행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분보다 크지 못하다. 그가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의 친구, 그의 가족, 그의 제자는 목숨을 버리는 삶보다 더 고상한 삶을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진영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 룰이다. 이것은 역사를 지배해 온 정치권력에 대한 혁명적 도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권력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싸움을 전개한다. 우리의 주인이 그런 방식을 택하셨고, 그 방식으로 우리의 죄악이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무방비 상태로 복음은, 정치적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죄악의 고리를 깨뜨린다.

(3) 종교권력에 도전하는 복음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마 23:23)

  이것이 예수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비난하신 내용의 핵심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종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것’을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35-40)

  그리고 진정한 예배는 상한 심령으로부터 시작하여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6-17)

  땅의 종교문명은 이러한 죄의 문제를 회피한 채, 종교적 제식들에 그들의 운명을 건다. 종교권력을 대항한 복음의 도전은, 상한 심령으로부터 시작된 죄사함의 예배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고 먹이는 데에 있다. 복음은 심령이 상한 자에게 부어지는 죄사함의 기쁨이며, 동시에 빚진 자로서 다른 약한 자를 멸시하지 않는 긍휼함이다. 복음은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는 모든 종교적 허례허식과 능력을 빌어 세속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종교의 영을 분쇄시킨다.

3. 마지막 시대 세계구조와 복음의 도전
  21세기는 물질문명과 종교문명이 동시에 전 지구를 장악하는 시대이다. 이것은 포스트모던의 특징이면서 9·11사태 이후에 가속화된 세계구조의 특징이다. 그리고 물질문명과 종교문명은 정치권력의 속성을 가지고 국가들과 네트워크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역사를 관통하며 인류공동체의 죄악을 촉발시켰던 경제, 정치, 종교 영역에서의 영적인 전쟁은, 이제 21세기에 세계정치, 경제의 최전선에 등장해 있다. 물질문명, 즉 서구적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인 확장은 더욱 광범위하고 한 사회의 구석까지―심지어 인간의 영혼 그 자체까지―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는 한편, 세계적 자본주의의 그 근간은 매우 불안정하게 지탱되고 있다. 종교문명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기점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이라는 지구적 이슈를 등장시키며 그 세력을 집결시켜 나갔고, 9·11사태를 지나면서 전 지구적 이슬람과 그로 말미암는 종교분쟁으로 세계구조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종교의 영은 예루살렘을 그 본거지로 하여 전 세계를 종교적 노예로 호령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그리고 우리 주님 오실 때까지 힘차게 지속될 복음의 도전은, 자본주의의 세계적 구조에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종교주의적 영향력 하에서 종교인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진정한 제자들이 복음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때 가속화될 수 있다. 복음은 과연 역사를 관통하여 그 역사의 중심에 있는 죄악의 근본을 도전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역사는 이 복음으로 끝날 것이다.
  복음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