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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테러에 회의를 느끼는 이라크 청년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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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결과
전쟁으로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후세인 당시 눌려 있던 시아파가 갑작스럽게 대중화가 되었는데, 이는 종교교육의 혜택을 받았던 신앙심 깊은 이라크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그리고 민병대들이 코란 수업을 제공하면서 종교적 직함들도 흔해지게 되었다. 마흐무드의 이웃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던 정육점 주인이 모스크의 지도자가 되었다.
온건 시아파 성직자인 쉐익 카심(Sheik Qasim)은 이전에 자신이 가르쳤던, 평균 이상의 성적은 받아본 적이 없는 평범했던 한 학생을 보고 놀랐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그 학생이 바그다드 중부에서 SUV(스포츠형 차량)를 타고 차량들의 긴 행렬 속에 끼어, 꺼진 신호등을 지나쳐 질주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학생은 과거에 이미 종교 지도자의 신분이 되었었다. 그래서 카심은 말하기를 "나는 차에서 내려 그를 붙잡고 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은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직함과 지위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
바그다드 주재 교육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한 시아파 교구민은 최근 부쩍 눈에 띄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우리가 최신 유행의 멋진 의상을 입기 원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하였다.
호리호리하게 큰 키에 진지한 표정을 가진 19세의 자네 모함마드(Zane Mohammed)는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중, 어떤 남자가 어느 종파인지 알 수 없는 한 대학 교수에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남자는 그의 이웃인 그 대학교수에게 세 발의 총격을 가했고, '마치 식료품점을 떠나듯이' 유유히 그의 차로 다시 걸어갔다고 한다. 모함마드는 "아무도 생각을 하려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그저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는데 사용할 뿐이다. 이런 현실이 나를 무척 슬프게 한다“고 덧붙였다.
유혈참사에 지쳐가는 사람들
2006년이 되자 심지어 폭력행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던 사람들까지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하이다(Haidar)는 2004년 여름에만 해도 미국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 시아파 성직자 따라다니는 것을 가족들에게 말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2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이 그저 폭력배 무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이다는 3년 동안 다섯 번의 살해현장을 목격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이 수니파였으며, 차를 탈취하기 위해 직접 수니파 택시기사를 쏜 일도 있었다. 어린 민병대원들은 마약을 남용하고 있고 모터 달린 자전거를 선물로 바라던 아이들은 이제 총기류를 선물로 받는다.
일부 이라크 인들은 신앙에 근거한 정치가 믿음 자체보다는 정체성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에 대해 논쟁한다. 2005년 시아파 다수가 종교성을 띄는 정당에 투표한 것은 세속인에 대한 종교의 승리라기보다는 시아파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사드르의 한 젊은 시아파 기자는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우리가 포용하고자 했던 것은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였다."라고 말했다.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시아파와 수니파의 젊은이들은 이 전쟁에 보다 광범위하게 연루되게 되었다. 테러범들은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작년 11월 이라크 내 미국 감옥에 수용된 이라크 십대의 수가 전년도 4월에 비해 7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젊은 청년들을 수용하기 위한 바그다드의 주요 감옥에는 전쟁 전보다 3배 이상이나 많은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다.
동기의 변화
그러나 폭력행위에 있어서는 젊은이들이 보다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반면, 그들의 동기는 종교적인 이유로 저항하는 어른들과 조금 다르다. 미군에 따르면, 11월에 미국 감옥에 수감되어있는 900명의 청소년 구류자 중 성전(Holy War)을 위해 싸운다는 사람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른들 중 약 3분의 1은 자신이 성전을 위해 투쟁한다고 생각한다. 이라크 내 미국 감옥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는 성인 수감자 중 약 3분의 1만이 기도를 드리며, 이들은 거의 대다수가 수니파라고 전했다. 이 수용소의 장으로 일하는 더글라스 스톤(Maj. Gen. Douglas Stone)은 "그룹으로서의 그들은 종교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지하드(성전)를 위해 이런 일을 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싸늘한 시선에 움푹 패인 얼굴의 비쩍 마른 19세 수니파 소년 무아트(Muath)는 그것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다섯 형제들이 빚지며 살게 하지 않기 위해 전화카드와 조화를 팔며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바그다드 서부의 반란군 보충병이었던 한 30대 손님이 반란군 가입을 조건으로 그에게 현금을 건넸을 때, 그의 가입 동기는 돈과 종파가 혼합되게 되었다.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무아트는 반란군의 제안을 수락하였고 그의 가족들은 갑자기 고기를 다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무아트가 체포되었을 때 경찰은 두 명의 시아파 인질을 발견했다. 사진을 통해 본 그들은 심한 구타로 온 몸이 멍이 든 채 겁에 질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듯 적어도 바그다드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종교적 폭력행위들은 돈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많다. 무아트가 수감된 카디미야 감옥의 교도관은 “CD가게 등에서 총을 쏘아 사람을 살해한 경험보다는 참수형을 한 경험이 많을 때 훨씬 더 높은 값을 부를 수 있으며, 이것이 심지어 종교가 없는 납치범들조차도 인질을 참수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원치 않는 감옥 내 노동자 오마르(Omar)는 "테러범들은 돈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돈은 엄청난 마력이 있다. 내가 만 달러를 그에게 주면서 어떤 일을 해달라고 하면 그가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되물었다.
미국에 대항하는 폭력적인 전투는 멀리서 지켜보기에 낭만적으로 그려지기가 쉽다.
24세의 한 이라크인 대학생은 "나는 오사마 빈 라덴을 좋아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2003년 3월 그녀의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2001년 9월 11일에 행해진 미국 패권에 대한 테러집단의 공격은 만족스러웠고 많은 이들의 죽음은 추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학교는 보안검사를 위해 분리되었고, 군인들은 그녀에게 신체를 드러내는 치마를 입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안전을 위해 그녀의 머리를 천으로 덮어야만 했다. 바그다드 중부에서 만난 그녀는 "지금 나는 이슬람을 증오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알카에다와 마흐디 민병대가 이러한 증오를 더욱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해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