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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티벳 독립시위를 바라보며

기쁨조미료25 2008. 4. 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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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티벳 독립시위를 바라보며

2008년 3월 14일 중국 티벳자치구의 중심도시 라싸에서 독립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는 무력시위를 넘어 방화 및 건물 파괴 등의 폭동으로까지 번지게 되었으며 한편 이에 대한 중국정부의 대응은 강압적 진압의 수위를 넘어 계엄령에 가까운 상황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라싸지역은 14일부터 18일 새벽을 지나면서 공황상태를 방불케 했으며, 시위는 사천성의 아바 자치지역의 엉아와 및 감숙성의 샤허지역까지 유혈시위로 번지게 됐다. 그러나 18일 오전 이후 라싸는 점차 안정적인 상태로 변화되고 있으며 도시의 시위 잔재들도 청소되면서 조금씩 활기를 띄는 상황이다. 현재 중국정부는 이번 시위를 주동했다고 여겨지는 인도에서 온 티벳인 색출 작업을 하고 있다.

1. 티벳의 독립에 대한 중국정부의 입장

중국은 당나라 때 티벳으로 시집온 문성공주를 통해 장족과 한족의 어머니가 같아졌으므로 티벳민족과 한족은 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려는 모습들은 현재 티벳 라싸지역에 가면 충분히 볼 수 있다. 포탈라 궁과 조캉 사원 및 티벳 박물관 등에서 이러한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현재의 중국이 원나라와 청나라를 계승한 국가이고, 당시에 티벳 역시 중국의 일부였으므로 티벳은 중국의 한 부분인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지역은 역사 속에서 확대되면서 하나의 다민족 통일 대국을 이루었으며 당, 송 이래로 중국 각 민족대가정의 구성원 가운데 정식으로 장족이 포함되었다는 논리이다. 또한 '중국', '중국인', '중화민족' 등의 말도 분석하여, 그것이 "처음부터 많은 민족을 의미하였으며, 절대로 일개 한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것이 중화민족 다원일체 구조'라고 하였다. 또 '서장'이라는 말은 '중국인'이라는 말의 일부분, '장족'은 '중화민족'이라는 말의 일부분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몽골인과 만주인이 세운 몽원과 만청을 '정통적 중국 왕조'로 규정하는 큰 근거는 이 두 국가가 중국식 국가 제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에서 방영되는 사극 등을 보면 언제나 현재 중국은 원나라는 몽골을 대표하는 적군으로 표현하며 명나라가 한족을 대표하는 아군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예로 중국의 유명한 무협작가 김용(사량용)이 쓴 '의천도룡기'를 들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원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데 한족이 힘을 합쳐 원나라에 대적하는 내용으로 이러한 내용들은 다른 중국 사극 중에도 많이 있다.

셋째로는 중국이 티벳 주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반대의견이 공개적으로 제출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김한규의 저서󰡐�티벳과 중국󰡑�을 보면 중국은 <… 각국 정부도 승인하지 않았다. …… 미국 국무원도 1977년에 '서장이 중국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가설에 기초를 둔 정책과 행동은 전혀 없으며, 어떤 방면에서든 미국은 달라이 라마를 서장 정부로 간주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는 것을 인용하면서 중국의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2. 티벳의 독립에 대한 인도티벳망명정부의 입장

첫째로 문성공주가 티벳에 시집을 온 이유는 토번(티벳)이 당나라와 전쟁을 했을 때 당나라가 열세에 밀려 자국 공주를 우호조약에 의한 볼모로 토번왕국으로 시집을 보낸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티벳은 원나라와 청나라를 몽골제국과 만주제국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학자인 최한우는 중국역사 속에서는 한족과 몽골족, 만주족을 분리해서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티벳과 몽고 및 만주는 모두 중국이 아니라는 티벳 측 주장을 보면 '몽골'과 '중국', '티벳'을 병렬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1987년 <티벳의 지위(The Status of Tibet: History, Rights, and Prospects in International Law)>를 저술한 네덜란드 국제법 학자 반프라그(Michael C. van Walt van Praag)는 중국과 티벳의 관계에 대해 "1279년에 쿠빌라이 칸이 송대에 거둔 승리는 독립적 중국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89년 동안, 중국은 몽골과 티벳, 한국의 일부, 시베리아, 북부 미얀마 등으로 구성된 동몽골제국의 일부였다 … "고 하고 있다. 결국 원나라의 티벳 지배는 중국의 지배가 아닌 몽골제국의 지배라는 것이다. 또 몽골이 명나라와 동등한 국력을 갖진 못했지만 한족이 세운 명나라와는 구별되는 것이며, 중국역사에 원나라가 있지만 원나라는 한족이 지배했던 중국사와는 구별 된다는 것이다. 또 티벳은 중국이 원으로부터 독립을 얻기 훨씬 전에 이미 실질적 독립을 회복하였으며, 청나라 지배 당시에도 1913년 청나라의 군대를 몰아냄으로써 중국보다 먼저 독립을 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많은 인권단체들이 티벳인들의 인권보호와 독립을 계속적으로 외치고 있으나, 국가적으로 반론이 제시되지 않은 것은 중국의 주장이 타당해서라기보다 중국과의 대외관계에서 자국이 손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외교적 마찰을 피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 몇 년 전부터 한국불교계와 인권단체가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려 했으나 한국정부가 수락하지 않아 계속적으로 무산되었는데 이는 중국정부의 압력이 있어서였다.

반프라그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955년에 영국은 티벳이 자치를 향유한다는 이해 위에 티벳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한다고 되풀이 했으며, 미국은 중국의 티벳에 대한 난폭한 탄압, 그리고 '합법적인 티벳정부'를 해체시키고 그 대신 '직접적인 군사 통치'를 확립한 것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1959년 9월 11일 미국 국무성이 '미국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제출된 티벳에 대한 주권 주장을 인정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달라이 라마가 다른 나라들을 방문할 때마다 중국정부가 그 나라 정부에 항의를 해왔다고 한다.

3. 역사 속에서의 티벳과 중국과의 관계

티벳 설화에 의하면 체탕(티벳도시 명칭)의 강포 리에 살던 신모(Sinmo, 괴물)와 하늘에서 내려온 원숭이 형상을 한 아킬로키테스와라(첸레지)가 결혼하여 탄생한 6명의 자식들이 주요 6부족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티벳인들은 스스로를 '푀바'라고 부른다. 티벳어로 '푀'는 티벳이란 뜻이며, '바'는 사람을 뜻한다. 또한 국가를 푄종(티벳족의 나라)이라 불렀으며 중국인들은 이들을 토번(吐蕃)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이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되면서 '티벳(Tibet)'이 된 것이다.

B.C 127년 중국의 한나라 초의 시대 티벳에서는 넬치 첸포에 의해 얄룽왕국이라는 최초의 국가가 건설되었다. 이후 A.D 618년 33대 왕인 송첸깜포왕에 의해 티벳 전 지역이 통일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송첸깜포왕 때 티벳은 통일 왕국으로서 전성기를 이루어 당의 문성공주와 네팔의 브리쿠티공주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제국을 보다 안정시켰다. 이 사실은 중국 측 주장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명히 송첸깜포왕 때의 티벳이 중국의 '당'과 대등한 혹은 그 위의 국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후 712년에 당나라의 금성공주가 토번 왕 티데주첸에게 시집을 왔으나 736년 당나라가 결혼맹약을 어기고 티벳을 침략하였고 이후 740년 당 현종 때 고구려유민이었던 고선지장군이 티벳(토번)을 안서서진에서 격퇴시켰다.

761년 티송데첸 때 불교가 국교화되었다. 그런데 티송데첸의 후계자들이 삶 전체를 불교화 할 것을 강요하면서 왕족 내부에서 반란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암살과 반란이 계속되면서 토번 통일왕조는 쇠퇴해져 갔다. 842년에는 티 랄파첸왕이 암살당하고 그의 형 랑다르마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불교 탄압정책을 고수하다 승려에게 암살당한다. 이후 티벳은 분열국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된다. 토번왕국의 중요 붕괴요인은 <유목민족제국사>에서 몽골의 쇠퇴의 원인을 불교에서 찾듯이 동일하게 불교가 국교화되어지면서, 정치권력 보다 종교가 강화되면서 세속적인 국가의 힘의 핵심인 정부의 정치권력이 약화된데 있다고 볼 수 있다.

13세기 몽골이 유라시아 일대를 통일하면서 티벳도 몽골제국의 관할권 아래 들어갔지만 자치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여러 불교교파들 또한 몽골의 권력을 등에 업고 티벳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마지막으로 겔룩파에게 그 권력의 힘이 들어가게 된다. 1573년 4대 제자 소남갸쵸는 몽골황제 알탄 칸에 의해 달라이 라마란 칭호 받았고 소남갸초가 죽으면서 알탄 칸의 조카아들 욘덴 갸초가 소남갸초의 환생자로 달라이 라마가 되면서 몽골인과 티벳종교가 연결되는 계기가 된다. 

1651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수립되면서 티벳은 청나라 황제 순치제(세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국가적인 독립성과 동질성 유지를 보장 받았다. 또한 청은 세계의 영적 지도자이며 진리의 수호자로 달라이 라마를 떠받들었고, 달라이 라마도 청나라를 만주와 중국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해주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국(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설립되면서 1949년 중국의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이 농노해방이란 명분으로 티벳을 침략하게 된다. 14대 달라이 라마가 국제 연맹에 제소하지만 인정받지 못한다.

1950년 1월 31일 중국 공산당의 주덕장군은 티벳에서의 제국주의세력 척결을 명분으로 티벳을 침략하고 15살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를 등극시킨다. 원래 달라이 라마는 18살이 된 후에야 정신적, 세속적 지도자로 등극시키는 것이 전통인데 이에 대해 인도정부는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하였으며 국제연합에 호소했으나 거부당한 채로 11월에 중국에 의한 서장티벳족자치구인민정부가 수립 된다. 1950년 영국과 미국은 UN에 티벳문제를 상정할 계획이 있었으나 당시 냉전체제에 있어서 동북지역의 교두보역할을 하는 한국전쟁문제가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티벳문제를 UN에 상정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티벳문제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분명히 중국측의 입장에 서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티벳을 독립국가로 보았다는 증거이다. 1959년 3월 10일 티벳인들이 포탈라궁 앞에 집결하여 티벳의 독립을 놓고 시위를 벌이자 중국군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달라이 라마는 7만5천명을 난민을 이끌고 인도로 망명하였으며 이때 8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이후 중국은 티벳정부의 모든 권한을 백지화하고 말았다.


 


 

4. 인도티벳망명정부의 'FREE TIBET'활동

인도로 망명한 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티벳망명정부를 세우고 인도에서 티벳의 자유를 위한 활동을 계속해왔다. 한편 중국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티벳독립운동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받는 여러 가지 압력으로 인해 달라이 라마의 티벳 귀국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해왔다. 인도티벳망명정부의 진상조사단이 티벳에 들어오도록 허용하기도 하였으며, 1984년에는 티벳 내 종교의 자유를 허용, 사원의 복구 등을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티벳과 서부티벳의 일부를 서구세계에 개방하였다. 그러나 1987년 라싸 세라사원의 승려들에 의해 1959년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봉기하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군경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티벳과 중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후 1989년에도 라싸에 13개월간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인도티벳망명정부는 달라이 라마를 위시하여 평화적인 독립시위를 계속적으로 진행하였다. 달라이 라마의 티벳독립을 위한 노력은 그가 1989년 12월 10일 받은 노벨평화상으로 대신하여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불러주는 모든 곳을 다니며 독립의 의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998년에는 인도 뉴델리에서 티벳청년당 단식투쟁이 있었으며, 달라이 라마는 11월 10일 미국을 방문하여 클린턴과 티벳문제를 논의하면서 티벳의 독립의지를 강력히 전달했다.

중국은 티벳봉건사회를 타파하고 티벳민중을 해방하기 위해 티벳을 점령했다고 주장하지만 티벳은 중국의 '평화해방론'에 대해 반대 입장이다. 중국 공산당 점령한 이후, 120만 명 이상의 티벳인들이 사망하였으며, 티벳문화를 대표하는 사원이 6000개 이상 파괴되었으며, 수천 명의 티벳인들이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실제 본인도 티벳에 있을 때 정치적 문제로 감옥을 다녀온 몇 명의 티벳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정신이상자가 된 친구를 만났는데 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티벳인들 중에는 1980년대 계엄령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원래 티벳영토였던 절반 이상의 지역을 청해성, 사천성, 운남성, 감숙성으로 흡수 시키고 나머지만 서장자치구로 선포한 후, 티벳을 중국에 동화시키기 위해 한족 이주정책을 실시하여 티벳 내에 한족 도시가 생겨나 티벳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조차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더불어 중국은 경제 개혁이란 명목 하에 티벳의 자원을 무차별 개발하였으며 더군다나 그 이익은 대부분 한족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표방하지만 국가의 공공기관의 사무는 모두 북경표준어(중국어)를 사용하게 되어있어 티벳인이 티벳어를 배울 기회조차 박탈되고 있다.

달라이 라마를 위시한 많은 티벳인이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1962년에 티벳망명정부를 세웠으며, 이후 인도티벳망명정부는 계속적으로 티벳의 자유를 외치며, 또한 한쪽으로는 티벳의 자연 및 문화 보호를 외치며 독립을 위한 다양한 일을 추진해왔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간디의 영향을 받아 평화적인 티벳의 국가로의 독립을 요구해왔다. 그로 인해 달라이 라마는 평화적인 티벳독립운동으로 1989년 12월 10일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달라이 라마의 전략은 국가의 독립이 아닌 홍콩, 마카오처럼 고도의 자치를 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티벳의 자치조차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2004년 5월 25일 <신화통신>을 통해 분명하게 밝혔다.

5. 2008년 3월 14일 라싸 티벳독립시위

중국정부는 중국 내 모든 민족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주민족과 소수민족과의 차이가 없냐는 것이다. 두 민족 간에 갈등이 존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말 소수민족이기에 많은 특혜가 주어지고 있는가. 어떤 면에서 특혜가 주어지는 부분도 있다. 자녀출생에 있어서 한족은 1명밖에 나지 못하는데 소수민족은 2명까지 낳게 하는 부분은 특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 분위기는 결국 한족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거의 대부분의 소수민족자치주에 한족이 대거 이주해왔으며, 서남·동북공정과 서부 대개발정책 역시 조선족 등을 포함한 중국 내 많은 소수민족지역을 한족화하고자 하는 목적 중 하나인 것이다. 또한 중국정부가 공안(경찰)시스템 및 군사력을 동원하여 소수민족의 분리주의운동을 원천봉쇄하려는 움직임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티벳인들과 한족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소극적으로는 한족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거나 적극적으로는 독립의지까지 가지고 있다. 티벳인들이 한족여인을 '갸모(티벳어)'라고 부를 때 그 뉘앙스는 존칭적인 것이 아닌 경멸적 어조가 섞여 있다.

티벳인들의 불만은 중국 정보통신의 현대화를 통해 더욱 커져가고 있는지 모른다. 현재는 티벳도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터넷이 가능하다. 정보통신수단의 발달은 전 세계의 뉴스 및 다양한 가치관들을 접하게 만든다. 현재 티벳은 승려들이 인도티벳망명정부의 모든 인터넷사이트를 티벳자치구 안에서 접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연히 현재 인도티벳망명정부의 움직임을 중국 안의 티벳인들도 보고 듣고 반응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설법 중에 티벳인의 관습 중 일부를 바꿀 것에 대해 권면하면 이것이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어 티벳 지식인들부터 시작해서 교육을 받지 못한 계층에까지 모두 받아들여지고 지켜지고 있다. 한 예로 달라이 라마가 사원에서 없애길 원했던 불상들을 제거하는 일이 간덴사원에서 있었으며 중국정부는 이에 대해 유산을 파괴하는 나쁜 짓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티벳전통복장에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 붙였던 족제비털에 대해서도 동물들에 대한 살생의 부당성을 주장했던 달라이 라마의 설법이 티벳인들에게 반영되어 지켜지고 있으며 족제비털을 불태워버리는 일들도 있었다.

결국 달라이 라마는 중국에 있지 않지만 정신적․종교적 지도자로서 중국 내 티벳인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오히려 달라이 라마의 파급효과는 이전에 비해 날로 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작년 10월 19일 미국 시의회에서 황금메달을 탈 때에도 이 소식을 접한 티벳인들이 라싸 제붕사원에서 축하 플랜카드를 내걸다가 경찰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외 청해성 지역에서도 민족 간의 마찰이 있었다. 결국 정보체계의 발달이 인도티벳망명정부와 중국 안의 티벳이 심리적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라싸의 도시화와 함께 지방에서 도시로 많은 이들이 이주해오면서 이로 인한 도시구성원들간의 갈등도 있다. 한족의 생존 및 부를 위한 이주, 감숙성과 청해성 등에서 생존을 위해 밀려들어오는 이슬람 민족들의 이주, 서장자치구 여러 지방과 사천 등 타 지방에서 밀려오는 티벳인들 등 도시구성원의 다양한 변화로 인하여 한족지역, 이슬람종족지역, 라싸티벳인지역, 타지방티벳인지역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들 간 제한된 시장에 대한 경쟁이 일어나면서 갈등이 형성되고 있다. 특히 티벳인들이 설 자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한족어를 못하는 티벳인들은 생존조차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라싸티벳인과 타지방티벳인과도 마찰이 있으며 캄바지역에서 온 티벳인들로 인해 긴장이 더 해지고 있다. 캄바티벳인들은 예전 티벳 변방의 무사출신들이며 유목민이라 성격이 다혈질적이고 행동이 앞선다. 그래서 종종 다툼 가운데서도 칼부림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또한 티벳지역은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특수한 지역으로 정치안정을 위한 군사체제 및 공안(경찰)체제의 긴장이 크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군인 및 경찰들은 과도한 충성심을 보이기도 한다. 1988년 티벳에서 일종의 반군이 일어나면서 해당 당서기가 진압에 실패하자 지리적으로 가깝고 마침 군사령관까지 겸하고 있던 후진타오가 다시 티벳 당서기로 배치되어 진압에 나서 1년 만에 반란군을 사실상 소멸하게 만들 정도로 과충성을 보였으며 이로 인해 현재의 주석자리까지 오르게 됐다는 설이 있다. 또한 티벳민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티벳불교로 생각하기 때문에 중국정부의 사상교육으로 인한 압박감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인도 티벳정부로서는 독립국가를 주장하던 달라이 라마의 고령화와 중국이 세계에서 강대국으로 계속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국가적 지위가 높아짐으로 인해 독립국가에서 자치국가로 양보한 상태에서도 중국정부와 대화의 물고조차 얻지 못한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작년 중국의 종교법의 개정으로 중국에서 라마제가 인정되기는 했지만 중국정부의 인준을 요건으로 함에 따라 라마가 완전히 중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면서 달라이 라마제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더욱이 달라이 라마가 죽으면 서방 세계의 후원조차 끊길 것이 우려되면서 티벳독립운동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게 되었다.

2007년 여름, 미국에 있는 티벳독립운동단체의 몇 명이 티벳독립과 베이징올림픽보이콧을 내걸고 에베르트산에서 시위를 했으며 이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전해졌다. 그 후 2008년 초반에 인도티벳망명정부는 티벳독립과 소수민족들의 인권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중국이 베이징올림픽을 열수 없다는 보이콧을 주장하며 시위가 시작되게 된다. 인도티벳망명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새로운 대안을 발견한 것이다. 중국은 총체적인 힘을 다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이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이 보다 강한 강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인도티벳망명정부는 인도에서 중국 티벳지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위를 감행했다. 이것은 인도정부에 의해 저지되었으나 세계의 이목을 끌어 여론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런 인도티벳망명정부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라싸에서도 시위가 시작되었다. 인도에서 온 인도티벳망명정부인이 주도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티벳인 가운데 한족 및 중국에 대한 불만을 품은 자, 또한 인터넷 등으로 인도티벳망명정부의 움직임을 본 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움직임들에 대한 소문이 라싸 전지역에 퍼지면서 시위가 촉발되었을 것이다.

3월 14일의 약 3주 전부터 이런 조짐은 이미 소규모 시위 등으로 구체화되고 있었다고 한다. 3월 14일 사건이 나고 중국은 CCTV를 통해 이 시위를 티벳인들의 폭동으로 규명하고 진압 및 색출작업에 들어갔다. 라싸 시위가 있었을 때 티벳인들의 군중 심리로 많은 인파가 같이 있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티벳지역의 중국정부 측 진압자들은 과도한 충성심의 발동으로 티벳인들을 격화시키는 행동을 했을 것이며 그것이 티벳현지인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했는지 모른다. 시위에 참가한 티벳인들 중 많은 수는 타 도시에서 이주 해온 캄바인들 이었는데 이러한 중국정부 측 진압자들의 과잉대응이 사고보다 행동이 앞서는 캄바인들을 더욱 자극하여 방화, 폭행 등 과격한 반응을 촉발시킨 것이다.

만약 당시 시위자들이 라싸의 상황을 잘 아는 토박이 라싸티벳인들만으로 구성되었다면 그렇게 과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싸인들은 라싸거리의 많은 곳에 CCTV나 카메라가 작동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충동․과격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중국방송에서 CCTV로 잡은 장면들을 자세히 보면 폭도들의 대부분이 라싸인이 아닌 캄바인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걷잡을 수 없는 충동으로 돌을 던지거나 가게를 부수고 방화를 저질렀다. 현재 라싸에는 링골루, 바콜, 라모체 까마꾸상 등에서 이런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시위가 시작되었다면 처음에는 크지 않았을 확률이 높으며 우발적인 상황 속에 군중심리가 작용하면서 사태가 확대된 것이라 추측된다. 시위가 라싸에서 확산되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줄어들어가는 것이 그 것을 반증한다. 특히 중국정부의 통제된 시스템 속에서 TV를 통한 엄포와 수색, 체포작업은 사태를 약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중국의 '17일 자정까지 자수'라는 선전포고와 함께 18일이 되면서 라싸 사태는 마무리 되는 듯 했다. 중국은 끝까지 이들을 시위를 시위로 보지 않고 폭동으로 취급하고 있다. 물론 캄바인들에 의한 우발적인 방화나 폭력적 행동들이 있기는 했지만 티벳인들 가운데 한족 및 중국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와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6. 이 사태의 파급효과 및 양측의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

그렇다면 이번 시위가 앞으로 티벳과 중국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에 대해 그리고 양측의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은 있는지,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정리해보자.

라싸의 사태는 이후 중국의 감숙성과 사천성으로 확장되었다. 18일에는 베이징에서 북경중앙민족학원의 티벳인 대학생 십여명의 평화시위가 진행되었다. 또한 인도에서의 시위에 휘발력을 주었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도 티벳을 위한 시위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이에 대해 반응하게 되었다. 미국 및 여러 나라에서 이번 시위로 인한 중국의 무력진압에 대해 우려하며 비판하는 입장들을 밝혔다. 또한 타이완에서는 대통령선거에서도 '티벳사태'가 이슈화되기도 했다. 한편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를 비롯한 국제여론이 잠시 티벳문제와 올림픽보이콧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정리해가자 중국정부는 무력강경진압에 대한 긍정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후 중국정부의 대응이 보다 강경해질 것이라 예상된다. 또한 이번 라싸 시위 때 일부 티벳인의 폭력적인 모습을 방영하며 평화주의를 주장하던 달라이 라마에 대해 이번 시위를 주도한 것은 달라이 라마이며 그의 평화주의는 위선이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티벳망명정부의 달라이 라마는 이에 대해 만약 자신이 이번 폭력사태를 주도했다면 본인은 인도티벳망명정부 최고지도자에서 물러나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티벳연구가로 <중국 개혁 개방 후 장족전통문화의 변천과 연구 - 천장과 장극을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논문을 쓴 심혁주는 오늘날 티벳문제의 열쇠는 티벳(달라이 라마)과 중국정부의 두 축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실질적인 주도권은 중국정부의 지도부가 가지고 있으며, 인도티벳망명정부는 달라이 라마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달라이 라마 사후에는 세계 각지의 티벳에 대한 지지와 경제보조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 공산당 내부에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첫째로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는 10년 이상 할 수 없다는 새로운 조항이 삽입됐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국가지도부의 인적 구성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이공계 중심이었는데 점차 인문, 사화과학계 출신으로 지도부가 구성되면서 경영, 관리체제도 바뀌어가고 있다. 2007년 중국의 고위 지도자들이 북경대학에서 '중국의 미래 5년'을 결정할 정책방향과 차기 핵심 인사배치를 놓고 비공식회담을 개최했는데 이 회의를 통해 많은 중진들이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 즉 제5세대 지도자들이 배치되었다. 이 새로운 세대는 1990년대 서구에서 공부한 엘리트 유학파들이다. 또한 후진타오 주석의 '과학적 발전관'을 통한 조화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청사진이 제시되고 있다. 중국 지도부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 중앙 당교의 자오후지(趙虎吉) 교수는 "중국의 국가관이 노동자 중심의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 경제국가건설로 바뀐 뒤 급속 성장의 부작용 등에 대한 관리․조정형 엘리트가 필요해진 데 따른 변화"라고 설명한다.

7. 결론

중국에는 수많은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 내 소수민족들을 큰 그룹으로 묶으면 무려 55개의 민족이 존재한다. 티벳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른 민족들에 의해서도 동일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기에 중국은 현재까지 독립, 자치문제에 대해 철저히 'NO'라는 의사를 밝혀 왔다. 다만 독립 및 자치를 포기한 상태에서 달라이 라마가 중국 내 티벳으로 복귀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 현 중국의 입장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중국정부에서 소수민족을 위한 강경책 및 회유책의 여러 가지 정책을 썼지만 소수민족 문제는 아직도 큰 고민거리이다. 크게 티벳족과 위구르족, 몽골족 등은 중국정부와의 갈등이 크게 드러나는 민족들이다. 아직도 신장 위구르지역에서는 무력항쟁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티벳 또한 달라이 라마를 위시한 인도티벳망명정부에 의해서 티벳독립문제, 고도의 자치문제, 티벳문화 보호의 문제, 환경문제 등등을 통해 세계 각국 및 민간단체, 불교권에 호소하며 중국정부와 대립 상태에 있다.

현재 중국의 경제는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기에 정치적으로도 민주화 시스템을 도입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된다. 이 민주화 시스템은 서구식이 아닌 '중국식'정치민주화가 될 것이며 티벳문제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다. 티벳문제는 21세기가 풀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이것은 티벳 그 자체만의 문제가 아닌 국가 안의 주도권을 가진 주 종족에 의해 여러 가지 아픔을 가지게 된 제4세계, 즉 국가 안에 있는 피지배 민족 혹은 종족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우리와 한 민족인 '조선족'이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있기에 이런 점에서도 티벳과 중국과의 자치권에 관한 해결방향은 귀추가 주목된다.

조은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