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묵상·말씀자료]/칼럼

"새롭고 산 길

기쁨조미료25 2008. 1. 28. 02:26
"새롭고 산 길"(히 10:20)이란 무엇인가?
 


16세기의 종교 개혁이 그 출발에 있어 신학의 개혁을 목적으로 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개혁의 필연성은 의미를 상실한 미사에서부터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교회가 존재하는 일차적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음을 인정할 때 자연적으로 예배란 교회 기능의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목적이 바뀌어지거나 희미해질 때 언제나 교회는 문제를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채찍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질서가 무너지고 "패역(悖逆)한 세대"로 전락된 중세의 교회와 사회의 어두움은 새로운 세계의 출현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았다. 무엇 때문에 그 시대는 이토록 어두움 속에 방황하게 되었던가 하는 근본적 원인들이 여러 각도에서 분석되어지고 있으며 그 평가 또한 매우 다양하다. 그 가운데 먼저 신학의 부재(不在)를 말하고 교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위인 예배의 현장이 그 의미를 잃고 하나님과의 만남의 역사가 발생되지 못한데서 이런 결과가 파생되었음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언어 속에 진행된 미사는 자연히 하나의 구경의 대상으로 전락되었고, 맹목적인 헌신과 신비의 강조는 예배자들을 지극히 피동적인 존재들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미사의 집례 행위는 사제들의 독점적인 무대로 차차 변질되어 갔는데, 그 속에서 사제들의 절대권이 지나칠 정도로 숭상을 받게 되었고, 이것은 더 나아가 그들의 탈선과 직결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특별히 미사의 절정을 이루는 성만찬의 순서는 성물(聖物))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한다고 하여 신비한 극적 장면의 연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구경거리를 만들어 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현장과 단절된 채 독백적으로 읽혀지거나 또는 생략해 버리는 잘못이 편만해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중세의 교회를 힘없는 교회로 전락시켜갔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 않던 그 세계의 신앙과 윤리 질서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부재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무리들이 시들어져 갈때 주의 몸된 교회는 병들고 인간의 심성은 부패해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뼈아프게 경험하는 시간을 맞은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유명한 예배 신학자인 윌리암 맥스웰(William Maxwell)은 그의 명저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종교 개혁과 예배의 상관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16세기 초의 서방 교회에서 집례된 성만찬은 하나의 연극적인 장면이었다.
그것은 성찬으로서 보다는 화체(化體)의 기적으로 절정을 이루었고 순수치 못한 미신적 경배 속에 행하여졌다.
미사는 알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청취를 불능케 했고...설교는 무덤 속으로 퇴락되었으며 대부분의 교구 신부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 무식하였다. 성경 말씀이 봉독되어져야 할 부분은 성자들의 생활담과 전설로 채워졌고, 성경은 예배자들의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사의 헌금과 면죄부의 구입은 성직 매매와 착취의 근원이 되었다. 그러기에 종교 개혁은 시급하고도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문제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그 본 궤도로 돌아가도록 하는데, 하나의 촉진제적 역활을 담당했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지적되어야 했던 예배의 무질서는 종교 개혁의 필연적 발생을 서둘게 하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 바꿀 수 없다
나는 이사야 40장 18-26절의 예(例)가 영이신 하나님의 본성(本性)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18절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本性)을 잘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게 된다면, 그 형상은 어떤 모양을 하게 될 것인가"라는 뜻이다.
19-24절은 다음과 같다.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같도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권세있는 사람도 하나님과 비교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25-26절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이 구절의 요점은 이것이다. 당신의 마음의 눈이나 또는 신학적인 용어나 성경의 용어로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할 때에도 그분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한정될 수 없다
예레미야 23장 23-2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지역에 한정되는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시간에 한정될 수 없다. 예배에 있어서 이 사실이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시간에만 그 곳에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배 처소로 나갈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언제 어디에나 계신다.

-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요한복음 4장 20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어디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혼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21절에서 그녀에게 대답해 주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에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1절의 진리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예수께서는 "여자여, 너는 이제 곧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될 것이다. 이 교제로 말미암아 너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가 아니라, 바로 너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일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가 오나니 어쨌든 그 산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예루살렘이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내가 이제 곧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구속(救贖) 사역을 이루려고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옳든지 그릇되든지 간에 옛 언약에 관계된 것들은 모두 폐하여 질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말씀 후에 23 상반절에서 예수께서는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예수께서는 "내가 지금 전환점에 서 있는데 한 손에는 옛 언약을, 다른 한 손에는 새 언약을 붙들고 있다. 이 땅에 옛 언약이 지나가고 새 언약이 임할 때가 오나니 벌써 임했다(주님께서 벌써 임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예배를 드릴 특별한 처소도, 예루살렘도 필요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하여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A. D. 70년에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리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으로서의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져야 하며, 또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나 계시는 분으로서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 그 어떤 장소에 한정되어 질 수는 없다.

"새롭고 산 길"(히 10:20)이란 무엇인가?


나는 예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의 여인과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서 유대의 모든 예배 의식 제도, 즉 옛 언약이 끝날 것을 예언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21, 23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일어난 놀라운 사건에서 극적으로 입증되는데,

그 사건이란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찢어져서 지성소가 드러나게 된 사건이다(마 27:51). 이 사건은 모든 의식 제도가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로 돌아가심으로 유대의 제사 제도가 끝났고, 새로운 예배가 우리에게 제시되었다고 가르친다.

10장 4절에서는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모든 제사 제도로는 죄를 없이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11-12절에는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한다. 주님이 앉으셨다는 말은 그분의 사역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14-22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희생 제사 제도가 종결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죽은 동물로 말미암은 옛 길, 즉 의식적 희생 제사의 옛 길이 아니라)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으로 우리가 예배하는 자들이 되어진 것이다. 제사 제도의 옛 길은 지나갔고,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산 길이 되어 주신다.


이와 같이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이지,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 같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어 있는 대상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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