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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과 환상 사이에서

기쁨조미료25 2008. 1. 13. 00:51
현상과 환상 사이에서
이성렬
경희대학교 환경응용화학대학 교수
 

1.
몇 년 전, 어느 작가의 흔적을 찾아 일본 중부 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온천으로 유명한 소도시에는 마침 작가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있었는데, 건물 이층 한구석에 그가 살았음직한 방의 모형이 실물 크기로 전시되어 있었다. 화로, 담뱃대, 가정상비약…… 등등의 고풍스런 일용잡화들이 전시된 그 방 앞에서 나는 작가의 생생한 숨결을 느끼며 잠시 그가 쓴 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런데 잠시 후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 보니, 그 방은 작가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 지방의 전형적인 중세 가옥을 재현한 것이었다. 불과 몇 분 동안 내 안에 ‘존재’했던 감동, 그러나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감각의 그림자. 그것은 내 안에 실재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하나의 ‘환상’으로 치부해버릴 순간적인 감각의 왜곡이었을까? 그 기억은 내게 오랫동안 세계의 실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게 하였고,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어떤 사물, 또는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떤 대상을 이성을 통하여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감각을 통해 다가갈 것인가? 대상은 필연적으로 다면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을 것인 바, 그 대상의 어떤 특질을 파고들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물론 철학자의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후 면면히 이어져왔고, 그 작업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찾는 과정에서 단지 희미한 그림자를 볼 수 있을 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 세계는 아직도 미스터리라는 것. 그리고 사물의 한 꺼풀이라도 이해하자면 관찰자도 몇 겹의 도수가 다른 렌즈와 각양각색의 필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뿐.


2.
여기 도자기가 하나 있다. 이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이것을 남에게 묘사, 기술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연과학자들의 방식대로, 질량, 부피, 형태, 성분 등등의 특질로서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도자기의 제법, 내력, 소유주 등등을 말할 것인가? 도자기 표면의 까끌까끌한 느낌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도자기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저 도자기에 대한 몇몇 사실만을 말할 수 있을 뿐, 그러나 그것도 확실하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확실’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계속하자면 아마도 나는 지독한 회의주의자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생활에서는 이러한 의문들이 크게 대두되지는 않으니, 나는 그 도자기를 방 한구석에 놓고 가끔씩 바라보며 짧은 몽상에 잠길 뿐이다.

사물을 기술할 때 자연과학적 방법이 매우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어떤 사물의 중요한 몇 가지 성질을 취하여 그들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는 식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17세기에 돌턴(J. Dalton), 아보가드로(Avogadro), 게이뤼삭(J. L. Gay-Lussac)과 같은 사람들은 기체의 부피, 질량(몰수), 압력, 온도를 취하여 그 변수들 사이의 관계를 실험으로 구명하였다. 이러한 거시적인 성질들이 과연 기체의 특성을 잘 나타낼 수 있을까? 그 후 19세기에 볼츠만(L. Boltzmann)은 기체의 거시적 성질들을 수많은 기체분자들의 운동으로 나타내어, 기체의 구조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기체를 구성하는 개개 분자들에 대해 완벽하게 안다고 해서, 우리가 기체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그 기체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누군가 질문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는 그 기체가 우주의 어느 성운(nebula)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지 물을 수도 있다.


3.
사물에 대한 과학적 기술이 사물을 이해하기에는 불완전함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자연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유용하다’는 것은 꼭 그 지식을 실용화하여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과학의 본질적 성격과 관련된다. 흔히, ‘과학’은 ‘기술’과 친자매처럼 붙어 다니는 바, 정부기관으로는 과학기술부가 있고, 그곳에서 입안하는 정책은 과학기술 정책이다. 언론기관을 보면, 심지어는 과학은 경제와 관련되어 경제과학부에서 취급된다.

그러나 과학의 기원을 보면 실용성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의문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무시무시한 질문이 떠오르는 바, 그 첫째 질문은 이러하다: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둘째 질문은: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이 두 가지 제일의적(第一義的) 의문에 대해 철학자들은 많은 사유를 했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나름대로 고심했지만, 연구방법론이 적당하지 않아 신통한 답을 얻지는 못하였다. 16세기 이후의 경험론적 철학이 실험, 관찰에 의한 연구방법을 낳아, 오늘날에는 이 의문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학설을 얻었다.

그렇다면 나는 과학의 기원이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 단지, 과거에는 철학이 모든 학문을 포함했으나, 16세기 이후로 자연에 대한 탐구가 전문화되면서 철학의 영역 밖으로 독립했을 뿐이다. 물체의 운동법칙에 대한 뉴턴(I. Newton)의 위대한 저서 제목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인 것은, 당시에 과학이 ‘자연철학’이라고 불리었음을 말한다. ‘과학’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 이전이었던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19세기 말까지 교류가 거의 없었으며, 소통이 시작된 것은 과학이 고도화되는 과정에서 실제적인(공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음이 입증된 20세기의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의 우두머리는 누구이고, ‘학문’의 우두머리는 누구”라는 어느 인문학자의 발언은 망발인 것이다. 이 나라의 인문 사회과학자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과학을 학문으로 여기는 것조차 극히 꺼리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이 나라의 불행한 역사(16세기 이후 성리학의 공리공론이 어떻게 이 나라를 망쳤는지 보라)에서 비롯된 그들의 편견에 기인한 것으로, 서양사회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가장 위대한 영국인이 누구였는지 물었을 적에, 영국인들은 주저 않고 뉴턴을 꼽았다. 셰익스피어가 아닌 것이다.


4.
과학이 제일의적 질문들을 탐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철학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과학이 그 질문들에 대해 어떠한 답을 제시했는지를 살펴보면 간단할 것이다.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의문을 푸는 결정적인 실마리는 우주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에서 나왔다. 갈릴레이(G. Galilei)가 당시 개발되기 시작한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았을 때, 완벽한 천체라고 믿었던 달의 표면은 온통 우툴두툴한 자국으로 덮여 있었으며, 목성 주위로는 위성들이 돌고 있었다. 갈릴레이가 이 사실을 말했을 때, 어떤 학자들은 아예 망원경 들여다보기를 거부했다.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라고 말한 이후, 갈릴레이가 심한 박해를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천문학(astronomy)은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모든 성간분자(interstellar molecules)들의 방출스펙트럼(emission spectrum)이 장파장 쪽으로 이동하는 현상(Red Shift)으로부터 결국 빅뱅이론(Big Bang Theory)이 출현하였다. 약 150억 년 전에 한 점으로부터 대폭발이 일어나 우주가 형성된 이후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이 이론은 철학자들의 ‘사유’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천문학자들의 끈질기고도 주도면밀한 ‘관찰’에 의해 추론된 것이다.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인간의 기원은 생물학이 발전되기 전에는 미궁에 빠져 있었다. 인간의 유래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을 제시한 사람은 생물학자인 다윈(C. Darwin)이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지구 곳곳의 생물계를 관찰한 후, 한 권의 책으로 생물의 기원에 대한 학설을 펴냈는데, 그것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다. 생물의 진화에 대한 다윈의 학설은 즉시 심한 공격을 받았는데, 다윈은 효과적인 반론을 제시할 수 없었던 바, 이는 취득된 생물의 형질(phenotype)이 어떻게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지, 즉 유전에 대한 지식이 당시에는 전무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사장될 뻔했던 멘델(G. Mendel)의 유전법칙이 발굴된 후, 유전학(genetics)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다윈의 궁한 답변을 대신하게 되었다. 물론, 진화론이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생명현상 자체는 인간의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미스터리일지 모르겠다. 왜 심장이 쉬지 않고 뛰는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의 영혼과 정신세계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무지하지만, 이 학설이 인간의 물리적, 생물학적 측면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인류학 또는 사회학에 진화론이 큰 기여를 하고 있음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5.
과학은 세계에 만재(만연?)해 있는 미신을 타파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렇다면 과학은 만능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선,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들을 살펴보자. 히틀러 치하의 독일은 우생학(eugenics)적 이론을 차용하여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찬양하였으며, 그 결과 수많은 집시족과 유태인들이 가스실에서 사라져갔다. 제2차세계대전 중 개발된 핵무기는 전 인류를 순식간에 기화(vaporize)시킬 수 있는 가공할 무력을 낳았다. 화석연료의 무제한 사용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증가시켜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에 따른 파국을 예고하고 있으며, 최근 상용화된 휴대전화에서 발생되는 전자파는 꿀벌들의 방향 기능을 무력화시켜 식물의 수분(pollination)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보고가 있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며, 과학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므로 인간의 양심이 문제라는 전통적인 논리는,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지구가 멸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정책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의도 정도 크기의 운석(meteorite)이 한반도를 향하여 돌진하면 적어도 아시아 대륙 전체가 치명상을 입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정말로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 우리는 누구에게 해결책을 물을 것인가?

또한 과학은 영혼과 관련된 문제에서 거의 무능하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물질 숭상이 심해질수록 종교가 성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과학은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과학자들은 대부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칠 것이다. 과학은 물질계의 현상을 탐구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술가들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려는 바, 이들에 의해 태어난 환상의 세계 또한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멋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문제는 비록 그것을 다루는 분야(특히 종교)가 객관적인 증거에 근거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 반드시 다가가야 할 것이다. 삶은 다면적이고, 다층적이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지식 외에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종교 등등의 정신문화 또한 긴요한 것이다.



C. P. 스노(C. P. Snow)는 이미 1959년 강연에서 ‘두 문화(Two cultures)’를 언급했는데, 그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소통이 심히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을 염려한 것이었다. 그의 우려는 어느 한쪽의 문화만으로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이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없다는 논지에 근거한 것인 바, 그것은 서양사회에 대한 우려였다. 이 나라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소통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유교문화가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뿌리를 깊이 내린 이 나라에서, 남극과 북극보다 더 먼 두 문화 사이의 소통은 인간 및 세계의 이해라는 철학적 목적뿐 아니라, 과학의 실용적 추구를 통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도 몹시 요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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