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장년설교

[스크랩] 수리 끝 눅11:24-26

기쁨조미료25 2007. 12. 1. 09:07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마귀도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잘 받고도 금방 까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장기간 금식을 하고 나서도 뭔가 때문에 받은 은혜를 전부 다 까먹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어제까지 부흥회를 은혜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참으로 좋은 집회였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시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하는 부흥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늘 부흥회를 하고 나면 느끼는 것이 부흥회가 끝나고 나면 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곤 합니다.

  뭔가 텅 비어 있는 느낌도 들고 그렇습니다.

  바로 은혜 받은 징조인 줄 믿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꼭 마음이 빈 집과 같습니다.

  

  이제까지 했던 부흥회 중에 가장 많은 눈물을 많이 흘리고, 은혜를 받은 집회였던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하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회개하고, 교회 생활을 생각하며, 성도간의 관계도, 가정생활을 생각하며, 하여간에 이번에는 속에 있는 많은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그동안의 잘 못된 생활들을 주님 앞에 토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속이 허전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자백할 때 귀신도 나갑니다.

  질병도 도망갑니다.

  문제도 떠나갑니다.

  그러다보니 속이 허전한 것입니다.

  마치 귀신이 나간 빈집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많은 때에 느낍니다.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하고나면 더욱더 느낄 수가 있습니다.

  금요철야가 끝나고 나면 집으로 가라고 해도 금방 나가려고 하질 않습니다.

  “집에 가서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잘 오질 않습니다.”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이 청소되어서 그렇습니다.

  수리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수리 되고, 청소 된 영혼을 그냥 비워 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들어 하신 말씀이신데 어떤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 하나가 나갔습니다.


귀신은 더러운 존재입니다.

  그 귀신은 물 없는 광야를 이리저리 방황을 합니다.

  그러나 쉴 곳을 도무지 찾지 못합니다.

  그 귀신은 “전에 살던 집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다시 한 번 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깨끗하게 수리가 끝나고 문을 닫아 놓았습니다.

  “누가 있는가?”하고 들여다보니 아무도 사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귀신은 밖으로 나가서 자기 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빈집으로 다시 돌아와 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그 귀신 다시 돌아 왔을 때는 전에 그 귀신이 나가기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바로 사람의 마음도 수리를 해야 하며

  수리를 했으면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 그 수리 된 집을 가꾸며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주시는 교훈입니다.


  첫째로 사람의 마음도 집을 수리 하듯이 수리를 해야 합니다.

  마15장 19절을 보면 “사람의 마음은 추한 것들이 있는데 곧 악한 생각,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거와 훼방 등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또 엡2:2-5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를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들 속에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마귀가 역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원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이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이 되고 만 겁니다.

  그래서 이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야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있으면 내놔 봐라.

  --그러니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다.

  --너는 항상 너를 믿고 살아야 한다.

  --내일이 어디 있느냐? 사람은 살다가 다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그런데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뭐가 있느냐?

    영원이 어디 있느냐?

  계속해서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말을 들려줍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세속주의로 살도록 세상 것들을 보여 줍니다.

  음란 한 것들을 보여줍니다.

  보기 좋은 것들을 보여줍니다.

  먹고 싶은 것들을 보여줍니다.

  방탕한 것들을 보여줍니다.

  나아가서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하게 합니다.

  미신을 믿고, 우상을 섬기고, 우상에게 절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를 가자고 하면 오지 않는 사람들도 돼지대가리 놓고 절을 하라면 생각도 없이 수표를 척 척 꺼내 놓고 절을 꾸벅 꾸벅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라는 마귀의 지시인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자랑합니다.

  도둑질하고도 자랑합니다.

  * 어린 애들이 문방구에서 칼을 하나 훔쳐가지고 나와서 “야 봐라”하고 자랑합니다.

  도둑질 하게 하는 귀신이 그러는 것입니다.

  * 자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간음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자랑삼아 얘기를 합니다.

  음란귀신이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 놀음을 해서 남의 돈을 따먹고는 자랑을 합니다.

  놀음 귀신의 짓거리 입니다.

  * 부정한 돈을 먹고도 자랑을 합니다.

  * 남을 죽이고도 죄인 줄을 모르고 삽니다.

  *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나게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삽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의 마음의 집에는 누가 삽니까?

  마귀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2천 년 전에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을 마귀의 종살이에서 구하시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범한 죄 값을 대신하여 피 흘리신 것입니다.

  죄 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사실을 믿고 주께로 나아가 그동안의 모든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만하면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그 순간에 나가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 마귀는 절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마귀의 집은 죄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뭔가가 생기지 않습니까?

  가슴이 덜덜 떨린다든지, 꽁하고 맺힌다든지 그렇습니다.

  마귀는 죄를 지으면서 떨리면서, 꽁하면서 맺히는 그곳에 집을 트는 것입니다.

  마치 한 여름에 몸에 상처가 나면 거기에 파리가 끼어듭니다. 그래서 시를 깔기고 그럽니다.  마치 그런 현상입니다.

  죄를 지으면 항상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마귀는 공중을 배회하다가 그 상처에 앉아서 시를 깔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마귀를 몰아내려면 어떻게 합니까?

  상처를 없애야 하는 겁니다.

  후시딘 연고를 바르든지, 우트라란 연고를 발라야 합니다.

  그 연고를 마음에 어떻게 바릅니까?

  그렇습니다.

  죄를 지으며 생긴 마음의 상처에는 연고를 바를 수가 없고 하나님이 제조 해 주신,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흘려주신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바르는 순간 상처가 싹 없어지고, 상처가 없어지면 마귀는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으니까 나가는 겁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가 오늘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집을 수리하고도 다시 허물어 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악한 귀신을 내 쫓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빈 집은 소제를 해야 합니다.


  이사한 집을 가면 어떻습니까?

  지저분하지요.

  이제 그 지저분한 집을 청소를 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소제를 해야 합니다.  

  장식도 해야 합니다.

  가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새 주인을 모시어야 합니다.

  귀신이 이사한 새 집에 새 주인을 모시지 않으면 귀신은 다시 들어옵니다.

  언제 들어옵니까?

  이 집에 새로운 주인이 없을 때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언제나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귀신을 몰아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집을 가꾸어야 합니다.

  가꾸지 않으면 금방 허물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교회를 나오기는 했는데 금방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이 예수 믿어도 소용없대...”이러고요.

  

  왜 그러냐면 가꾸지를 않아서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새 주인을 모셔야 합니다.


  자 잘 보십시오.

  악한 생각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니 문제입니다.

  선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노래를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가 나와야 하는 겁니다.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경건한 언어가 나오고, 기도가 나오고, 전도가 나와야 하는 겁니다.


  음란한 잡지를 보지 않고, 세속적인 책을 보지 않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죄와 유혹에 빠트리는 오락실을 피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뜨거운 찬양집회를 참석해야 하는 겁니다.


  세상 친구를 멀리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미래의 꿈을 나누고 서로 인생의 도움이 되는 믿음의 친구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시편 1장을 봅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 자로다.”로 끝납니다.

  

  이런 생활이 잘 안되고, 빈 집에 새 주인을 모시지 않는다든지, 또한 우리는 많은 경우에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죄와 허물로 마음에는 또다시 상 채기가 납니다.

  상처가 나면 누가 들어옵니까?

  크고 작은 귀신들이 또 그 상처에 집을 틀고 들어옵니다.

  죄란 놈은 악랄합니다.

  아주 작은 틈만 있으면 들어옵니다.

  그래서 뱀에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 나갔던 귀신이  물 없는 곳을 방황하다가 거할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전에 살던 집이 생각이 나는 겁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그 때가 재미있었는데...”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옛날에 살던 그 집을 다시 찾아오는 겁니다.

  와서 들여다보니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또다시 성처투 성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빈집을 가 보셨습니까?

  빈집은 위험합니다.

  속담에도 빈집에는 도둑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집을 오래 비워 놓으면 도둑이 듭니다.

  동네 양아치들도 제 집인 양 들어와서 밥을 해 먹고 먹었으니 싸고, 그래서 빈집을 가보면 이 쪽 저 쪽에 열매 없는 참외나 수박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 빈집은 이상하게 전기도 고장 나고, 수도도 고장이 납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쥐새끼들도 들어오고, 뱀도 들어옵니다.

  벌레들도 우글거리고, 먼지가 쌓이고, 집 구석구석에 곰팡이가 슬고, 나무가 썩습니다.

  그러다가 그 집은 폐허가 되고 맙니다.

  

  우리의 마음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을 몰아냈으면 빨리 새 주인을 모셔와야지 그렇게 않으면 나갔던 귀신이 다시 든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귀신이 자기 혼자 들어오지 않는 답니다.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사귄 친구들을 자기 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다시 들어온답니다.

    

  한 번 나갔던 귀신이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면 이제 그 귀신을 쫓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던 사람이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덟 귀신이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주에 부흥회를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상처를 치료 했습니다.

  이제 이 안에 있던 더러운 귀신들이 다 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허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빈집을 그냥 비워 놓으면 안 됩니다.

  수리해야 합니다.

  도배도 다시 하고, 충남페인트에서 페인트 사다가 페인트도 칠하고, 가구도 들여 놓고,  나무도 심고 새롭게 단장을 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의 집은 근본적으로 헐어 버리고 새로 지은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수리했습니다.

  보수했습니다.

  수리된 집은 언제나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극히 일부분만 손을 대었기 때문입니다.

  기둥이 부러졌으면 부러진 기둥에다가 다른 보조나무를 대고 못질을 합니다.

  천정이 고장 났으면 일부분만 합판을 대고 우선 비만 새지 않게 한 것입니다.

  벽이 금이 가고 허물었으면 그 곳만 보수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합니다.

  그러나 근본은 약하 디 약한 수리 된 집입니다.

  자동차도 수리 된 차는 사려고 하지 않습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집들입니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집입니다.

  게다가 방금 나간 마귀가 물 없는 곳을 방황하다가 거할 곳을 찾지 못하자 그러고 있습니다.

  “내가 나온 그 집을 다시 찾아 가리라.”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귀신이 우리의 집을 보고 누구의 집이라고 합니까?

  “내 집”이랍니다.

  등기 권리를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귀신은 권리를 포기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이번에 들어오면 큰일이 납니다.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까?


  저는 사실 이 생각을 하다가 결심을 했습니다.

  올해는 제가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계속 부흥회를 다니기 시작을 했고 해서 이번 가을에는 대심방과 해마다 하던 특별새벽기도회를 하지 않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고 아무리 바빠도 해야 되겠다고 다시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러분!

  빈집은 빨리 새 주인을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가꾸어야 합니다.

  다듬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찬양으로, 성령충만으로, 그래야 나간 귀신이 근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도하십니까? 2003. 7. 27 부흥회 마지막

                             행2:43~47

  세상에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배우는 목적이 있습니다.

  일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있습니다.

  건물을 짓는 목적이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부흥회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부흥회를 통하여 치유를 받기를 원합니다.

  응답을 받기를 원합니다.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타내신 표적의 목적은 무엇인가?(요2:11)

  주님께서 공생에 때에 첫 표적으로 가나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나자 주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니까 “제자들이 보고 믿으니라.”입니다.

  믿게 하는 데 표적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 마9장에 보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친구들이 침상에 메어 주님에게 와서 치료를 받은 시가가 나옵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무리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야이로의 죽은 딸이 살아났습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지니라.”


  * 주님이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마14:33절에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그 사건을 통하여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였습니다.


  결국 주님의 행하신 수많은 이적과 기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보고 믿으니라!”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표적으로 보고 너희도 믿고 일어나라!”

  “소경이 눈을 뜨는 모습을 보고 너희도 눈을 떠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표적을 보고 너희도 살아나라!”

  그래서 성경을 보면 곳곳에서 “이적을 보고 믿으니라!”

  “기적을 보고 믿으니라!”

  “표적을 보고 믿으니라!”

  주님께서 표적을 주시는 목적이십니다.

  “보고 믿으라”입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행2:1~3)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입니다.

  성령 받은 제자들의 모습이 어떻게 습니까?

  4절입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으니 각 나라 말로 말을 시작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에 대한 말입니다.

  성령에 대한 말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결국 그 말을 들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41절입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성령이 오신 결국이 무엇입니까?

  예수 증거입니다.

  성령 증거입니다.

  전도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부흥이었습니다.


  불을 주신 목적?

  바람으로 역사하신 목적?

  은사주신 목적?

  방언 주신 목적?

  예언케 하신 목적?

  성령의 새 술에 취하게 하신 목적?

  모두가 영혼구령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고 능력을 행하며 이적과 기적을 행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 13장 11절에 보면 바울이 바보에 이르러 거짓선지자 바 예수를 소경이 되게 합니다.

  결국이 무엇입니까? 

  12절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 14장 8~10절에서도 바울이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이적을 행합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허매다 허매” “신이다 신”하며 신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바울이 무어라고 합니까?

  15절입니다.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할렐루야!


  이렇게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는 결과 무엇입니까?

  보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보고 믿으니라.”입니다.

  

  주님은 교회에게 여러 가지 사명을 주셨는데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으로 갑니다. (42~47)

  42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교회의 첫째 사명은 교육입니다.

  가르침입니다.

  마28장에서도 “너희는 세상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교육입니다.

  가르침입니다.


  둘째는 교제하는 일입니다.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그리고 봉사와 구제입니다.

  내 있는 시간과 은사와 물질을 가지고 이웃을 돌보고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하고 충성하는 일입니다.(44)

  주님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남을 섬기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당신의 가진 모든 것으로 남을 섬기시고 봉사하셨습니다.

  

  교회의 사명이 또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전도는 교회가 있는 첫 번째 목적입니다.

  전도가 되어 교회가 부흥이 되어야 교육도 합니다.

  교제도 합니다.

  구제도 봉사도 언제 합니까?

  전도가 되어 사람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전도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바라심입니다.

  하나님의 부탁이요.

  명령이요.

  당부이십니다. 

  성도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는 왜 하라고 하셨습니까?

  1)  “성령님 오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라.”였습니다.(눅24:49 행1:4)

  성령이 오시면 무엇 합니까?

  “그분이 오시면 권능을 주시리라!”(행1:8)

  

  이 권능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입니다.

  건강도 권능입니다.

  물질도 권능입니다.

  지혜도 권능입니다.

  

  권능을 받아 무엇입니까?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결국 기도는 왜 하라고 하셨습니까?

  “성령 받아 그분이 주시는 권능으로 내 증인이 되리라!”


  2) 요14:13절에 보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

  응답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합니까?

  그 영광을 보고 주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응답의 목적이 전도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전도해서 무엇 합니까?

  교회를 부흥케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영혼구원과 교회 부흥이 목적이 될 때 기도가 응답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영광 영광 할렐루야

  혹시 “나는 전도 못 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전도자는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누가?)

  세상에서 가장 전도를 잘한 사람을 들라면 아마도 베드로를 들것입니다.

  하루에 3, 4천 명씩을 전도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들이 대단한 자격을 갖추었습니까?

  행4:13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그렇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던 어부였습니다.

  기초교육도 받지 않은 사람으로 봅니다.

  논리학이나, 웅변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니 얼마나 논리가 정연하고 힘이 있었던 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아니 저들이 언제 공부를 했어?”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는 학력이 문제가 아니고, 생활수준이 문제가 아니고, 배경이 문제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이나 교회일은 가진 것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7: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아는 것 때문에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것 때문에 쓰시는 것입니다.

  가진 것 때문에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전합니까?

 1) 오직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행4:20절,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주님의 부탁도 이것이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전해라.”

  눅24:44~48

  본대로, 들은 대로, 느끼고 체험한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전도였습니다.

  바울의 전한 것이 이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것도 이것입니다.

  스데반이 전한 것도 이 사실입니다.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새벽마다, 밤마다, 주일마다 수없이 들은 사실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내가 들은 만큼입니다.

  내가 아는 만큼입니다.

  내가 본 만큼입니다.


  2) 내가 아는 예수, 내가 만난 예수, 오직 예수님만 전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을 보십시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오직 예수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입니다.

  예수!

  오직 예수!

  예수님을 믿어야 삽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방언도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치료도 받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기쁨도 얻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새 술에 취한 것 같습니다.


  언제 전도합니까?

  

 1) 하기 싫어도 해야합니다.

  때로는 전도해야 하는데도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 요나가 그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셔서 보내신 곳이 니느웨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를 가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원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왜 원수들이 회개하고 살아야 합니까?

  그들은 망해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랍니다.

  결국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다가 풍랑을 만나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환경이 나빠도 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지금은 전도할 때가 아니야. 환경이 아니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예를 들어보십시오.

  그는 어떠한 환경이라도 전도의 환경으로 보았습니다.

  감옥에 가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병들어 병원에 가면 혼자들을 전도했습니다.

  망해서 이사 가면 달동네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물징의 복 받아 부자동네로 이사하면 부자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표류하여 섬에 도착을 하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해를 받아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손해를 보고, 내게 해가 오더라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때로는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쫓겨 나기도하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러나 해야합니다.


  * 왕상에 나오는  미가야선지자를 보십시오.

  미가야는 엘리야와 같은 담대함을 지닌 선지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렇게도 악한 아합 왕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에 그는 아합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그대로를 전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합을 기쁘게 하는 말만 전하라고 합니다.(왕상22:13)

  그러나 미가야는 뭐라고 합니까?

  14절에,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심판하는 원수들 앞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바울도, 스데반도 이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결국 미가야는 왕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왕상 22:8)

  뺨을 맞으며 조롱을 당하였습니다.(왕상22:24)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왕상22:27)

  

  그러나 미가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고(왕상 22:14)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고 말았습니다.(왕상 22:38)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맞추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내게 맞추어 믿으려고 합니다.

  내 기분 따라, 내 상황 따라, 내 환경 따라, 내 일정 따라가 아닙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나한테 맞추려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나한테 맞추지 마십시오.

  내 구미에 맞추고, 내 취미에 맞추고, 내 입맛에 맞나보고,  내 취향에 예수님을 맞추려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일이나 말씀을 순종함은  하기 싫어도 하고  가기 싫어도 하고,  죽기 싫어도 죽고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한마디로 내 것을 포기하는 것  말입니다.

  "나를 따라 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끝까지 해야합니다.

  전도자의 결론입니다.

  왜 열매가 없습니까?

  끝까지 가야합니다.

  봄에 씨앗을 뿌렸으면 여름 지나, 장마 지나, 무더위 지나 가을이 되어서야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두 번 해보다가 말면 열매가 없습니다.

  

  * 엄호섭집사

  “백번을 무릎 꿇고 천번을 찾아가라!”


  * 김기동집사

  “찌르고 또 찌르면 안 될 사람 없다.”


  * 진돗개 전도 왕

  “한번 물었으면 물고 늘어지라는 말입니다.”

출처 : 주님소리-설교나라
글쓴이 : 주님소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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