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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렘29:1-14절),

기쁨조미료25 2007. 11. 25. 13:49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렘 29:1-14절, 93.204.219장.

주전 597년경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남왕국 유다 백성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의 일부입니다. 선민이라는 자부심과 궁지를 언제 어디에서도 굳게 간직하였던 그들이 이방인의 포로가 되어 먼 이국 땅에 끌려갔을 때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요?

예측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굴욕감과 극도의 절망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을 잃고 자포자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포로된 백성들에게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권고하며 그들이 회복되어 본토로 귀환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10절).

이같이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귀한 소망이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의 왕국 백성으로 인도하시며 우리의 눈물을 영원히 씻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계21:4). 그러므로 이 같은 소망을 품고 있을 때 우리는 절망의 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1.항상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12-13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 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고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시91:15; 사58:9).

그리고 살전5: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구한다면 그 기도에 대한 확실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마7:7-8; 요일5:14-15).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지 않았습니까?(신6:21-23)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권세와 은혜를 우리 삶의 현장 속으로 직접 실어 나르는 길이 됩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한 채,

모든 어려움에 홀로 맞서려 하다가 실패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전심으로 당신을 찾고, 찾으며, 부르짖으라 명하셨습니다. 렘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괴로움이 닥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모든 문제마다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으며 응답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낙심할 수밖에 없으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피곤치 않을 것입니다.(사40:31).

2.정상적인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조국을 패망시킨 바벨론에 강제로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도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무력으로 바벨론에 항거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 이러한 시도는 예루살렘 함락 직전에 유다 왕족 중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이 바벨론 총독으로 세움 받은 "그다랴"를 암살한 데에서 나타납니다.(렘41장).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도 저 유명한 맛사다 항전을 주도한 "하시딤"이나 테러와 게릴라전을 펼친 헤롯당(눅6:15)들은 모두 무력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자 꿈꿨던 것입니다.(행5:37).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 같은 시도를 하지 말 것을 본문에서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도리어 바벨론 도성(都城)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7절). 즉 바벨론의 법(法)과 치리(治理)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상시와 동일한 가정 생활 및 결혼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5-6절).

당면한 현실적 정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라는 이 권고는 언뜻 보면 지극히 매국노적인 발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당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안정이 유다 포로들이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벨론 포로 기간이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처럼, 그리 짧게 끝나지 않을 것이므로 그곳에 정착해서 생활하는 것이 필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인간은 고난과 징계에 직면해서 현실 생활을 포기하는 등의 극단적 행동으로 치닫기 쉽습니다.(골2:8-10). 그러나 이는 바울의 지적처럼 그릇된 신앙의 소치일 뿐입니다.(살전 5:1-11).

참 성도는 어떠한 악조건 하에서도 그것을 감내하며 인내로써 이겨 가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만이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3.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 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며(요1:27), 우리가 감당치 못할 하나님의 기쁨이요 사랑입니다.(습3:17).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선하고 은혜로우신 뜻을 알지 못하고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므로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과 시험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 겸손히 맡겨 드리기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실한 보호자가 되시며 우리의 삶을 지극히 선하게 이끄실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님(엡1:3-14)께 우리의 일생을 의탁하고 그가 이끄시는 대로 걸음을 옮길 때, 우리 앞에

나타나는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산 결과 지극히 만족스러운 생을 영위하였던 여러 신앙 인들의 모습을 그려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히11:38). 우리는 그들보다 연약한 자이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다면 그들과 같이 선하고 복된 기쁨으로 인생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후13:3-4절에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나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약함은 육체적 나약함이나 정신력의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는 약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살리시는 생명을 지닌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낼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는 그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생명을 갖게 되었으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종이요 대언자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불신자들에게 성도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4.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에게 사로잡혀 간 땅에서 오래 정착하여 살 수 있는 준비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한 것과 같이 바벨론 포로 생활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을,

뜻하는 말인 동시에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있으나 엄연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고전 5:10). 오히려 성도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온갖 악한 행위들을 보기도 하고,

또 그러한 악인들과 교제해야 될 경우도 맞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무작정 도피하고 분리되어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작은 것부터라도 성실하게 실천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생활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어여삐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때에 우리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온갖 고난도 넉넉히 이겨내는 인생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5.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면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알기를 원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새 지식을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할 때에 사람의 이성으로만 노력한다면 그것은 암중모색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써는 그 영원 불변하시고,

무한대 하신 절대자를 다 알아내기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욥11:7절에서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리라" 한 것 같아서 인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써는 하나님을 다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아니면 도저히 하나님을 다 알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는 자연계를 통해서도 보여집니다.

롬1:19-20절에서는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 속에 보이셨느니라 창세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한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였습니다.

결과가 있으니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논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인데 이같은 것을 일반 계시 또는 자연 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관찰하면 서신의 존재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는 너무나도 불충분한 것입니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인간은 죄의 용서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죄에서 사람을 구하여 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을 알게 해 주시려고 특별히 계시를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자연 계시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신·구약 성서요, 그 안에 있는 말씀과 사건들인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예수를 통해서 알 수 있도록 그의 인격과 신성을 통하여, 그의 교훈과 그의 생애와 그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성서는 이 일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를 알려 주시는 것이 곧 복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6.신앙에 전력하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인들이 힘써야 할 일은 신앙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옛날처럼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더 이상 현혹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8-9절). 또한 거짓 선지자에게 좋은 일만을 예언하라고 강요하는 등의 부패한 종교심을 가져서도 안 되었습니다.

오직 그들이 할 바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12절; 시145:19; 단9:3)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13절; 신4:29; 대하22:9)이었습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권면은 고난 곧 포로 생활을 통해서 지난 날의 과오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실로 고난의 환경 속에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자기 발견과 신앙의 연단을 성취할 수 있으며, 이것이 수반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옮기실 것입니다.(약1:4; 계2:2). 한편 이러한 예레미야의

권고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인들의 지금까지의 그릇된 신앙을 불식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적지(敵地)인 바벨론의 땅에서도 정상적인 신앙 생활이 가능하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성경을 보면 실제 이스라엘인들은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며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한 것으로 나타납니다.(시137:1). 사실 회당도 이들의 종교 생활의 결과를 나타난 것입니다. 가정이 어려워질수록 신앙 생활에 더욱 더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자는 가정이 어려워지면 신앙 생활을 단념하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자는 직장의 생활로 신앙 생활을 멀리 하려고 합니다. 직장이 바쁘고 힘들 때일수록 더욱 신앙 생활에 전념해야 합니다. 직장일이 바쁘다고, 가정이 어렵다고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 앞에서 평가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7.소망을 가지고 찾으라는 것입니다. 70년이나 되는 포로 생활을 지탱시켜 준 것은 회복에 의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징계의 기간을 통과하기만 한다면 본토로 들어갈 수 있다는 소망이 쉽게 좌절하며 공포에 빠질 수 있는 환경에서 그들을 지탱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수년 안에 본토 회복이 가능하다는 약속을 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되었습니다.(렘28:6-11). 도리어 먼 장래의 일처럼 보이나 반드시 성취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 중에 신뢰해야 했습니다. 11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현재 당하는 고난이 궁극적으로는 평안과 소망을 주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장래에의 희망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곤궁한 처지에 있었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소망의 약속과 진배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증시키기 위해서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말을 거듭 약속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렘 9:11-14). 소망 없는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죽음의 형국 가운데서도 말씀을 붙잡음으로써 소망을 가지며 필경 그것으로 인해서 회복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시17:15; 잠14:32).

8.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종종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인들이 처했던 정황과 비슷한 환경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믿음 없는 자처럼 현실의 한계 상황 앞에 절망하거나 이탈된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현실에 충실하면서 어둠의 때가 자나가기를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더욱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요건들이 충실히 이행되기만 한다면 뼈를 녹이는 징계의 날(시6:2; 겔24:10)조차도 단축될 것이며, 회복의 날에 우리의 신앙은 견고한 터 위에서 빛나는 정금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렘29:10-13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동일하게 지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수 있는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세상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바로 전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전도인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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