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대한 칼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칫, 그릇된 신앙관을 지니게 하는 내용이기에~
설령, 다른 오해나 세상적 해석을 하지 말기를 권면합니다..
비록, 충실치 못한 내용일지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더욱더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를
간절히~ 준행함에 그 근본 취지를 두고 있사오니..
전체적으로 내용이 충실치 않더라도 믿는 맘으로~~
섬기는 마음에서 은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
욥기 8장 7절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이 말씀은 원래 사업 잘 되라고 축복하는 말씀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사업장에 가면 의례껏 달려 있는 성구가 있다. 바로 사업 잘 되길 바라서 걸어 놓은 위의 구절이다. 사업 초창기 때에는 누구나 다 그 시작이 미약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사업이 번창하면 그 나중은 점점 더 창대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을 처음 시작한 신실한 교인들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큰 격려와 소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매우 아쉽게도 이 말씀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런데도 크리스챤들의 사업장 마다 문 열고 들어가면 이 구절이 아주 잘 보이는 곳에 멋지게 걸려 있다.
그 원래의 뜻을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뭐... 까짓 거. 아무렴 어떠랴. 원래 그런 뜻이 아닐지라도 내게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면서 ‘나는 내 필요한 대로, 내 방식대로 한다’ 라는 입장이라면 유구무언일 수 밖에 없다.
기독교 미신화에 앞장서는 크리스챤 사업장들
그런데 성경의 구절들을 이런 식으로 오용하는 것은 속히 타파되어야 할 반지성적이며 비성서적인 기독교의 미신화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의 본래 의미를 사람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마음대로 오용하거나 의미를 멋대로 바꿔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말씀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순종이 아니던가? 만일 이런 식이라면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분명히 시편 14:1에 ‘하나님은 없다’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0:4, 시53:1 참조)’에서 앞뒤를 끊어내고 가운데 토막인 ‘하나님은 없다’는 표현만 남긴 것임을 대번에 알게 된다. 그래서, 원래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점을 바로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수아사람 빌닷이 느닷없이 욥에게 사업관련 축복의 말을 했을 리 없다. 욥8:7도 마찬가지이다.
이 구절을 1절부터 연이어 읽게 되면 시10:4절 시14:1및 시53:1에서 가운데 토막인 ‘하나님은 없다’는 표현만 남기고 앞뒤를 다 끊어낸 것과 마찬가지로 앞절과 뒷절을 끊어내듯 생략해 버리고 7절만 남긴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이 들어 있는 욥8장은 수아사람 빌닷이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고통당하고 있다”며 하나님께 항변하는 욥을 향해 윽박지르듯이 “회개해야 한다”고 ‘회개’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한 말이다. 따라서, 이런 와중에 느닷없이 사업 잘 되라고 축복하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 쯤은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를 어떻게 보야 하는가?
(1)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8:2) 인과응보이다.
수아 사람 빌닷이 보기에 지금 욥은 대단히 교만한 자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6장,7장을 통해 이런 저주를 받을 죄를 저지른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욥은 6:24에서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하면서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에 대해 수아 사람 빌닷은 8:2~3에서 “그러면, 공의의 하나님께서 네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이런 끔찍한 벌을 주신다는 뜻이냐?”면서 네 자식들이 그렇게 비명에 간 것도 다 그 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공의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라고 말한다(8:3) 철저한 인과응보적 견해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고 욥을 몰아 부치는 것이 빌닷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철저한 인과응보의 입장에 서서 욥을 꾸짖는 수아사람 빌닷이 사업 잘 되길 바란다는 축복의 말을 했을 리가 없다.
(2) 하나님께 철저히 자복하여 용서를 구하고 깨끗하게 살아라(8:5~6a)
한편, 빌닷은 욥에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깨끗해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역시 이 견해도 인과응보에 의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노력으로 잘 살아 왔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에서 받게 된 짧은 번성이었을 뿐(8:16~17) 하나님께서 보증하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의 고통이라는 것이다(8:11~15) 그러므로, 하나님께 철저히 자복하고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청결하고 정직하게 살고자 하면 하나님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8:20a) 그에 상응하는 복을 받게 하신다(8:21)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관점에 입각한 [회개-용서-회복]의 메세지 그러므로, 빌닷에 따르면 욥의 지금 처지는 죄의 댓가에 상응하는 징벌이므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지만 돌이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청결한 의인의 집이 되면(8:5~6a) 하나님께서도 그를 돌아보시므로 형통하게 하셔서(8:6) 예전처럼 심히 창대해지게 될 것(8:7)이라는 [회개-용서-회복] 의미이다.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눅15:11이하 참조)’ 결국, 이 구절은 죄인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를 받으셔서 아무 것도 없이 다 부서진 그를 심히 창대해지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로서 ‘회개’와 ‘용서’의 구조 속에서 읽어야 하는 [회복]의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를 연상시키는 말씀이기 때문에 결코, 사업 잘되라고 축복하는 말씀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말씀이 처음 계시되었던 때의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고자 할 때 기독교 미신화가 방지된다!
출처 : 글/박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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