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성경탐구40

[스크랩] 감옥에 대한 오해

기쁨조미료25 2007. 9. 28. 07:42

베드로 전서 3:19에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한 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옥에 있는 자들은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기 전에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동안 그를 비웃었던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육신은 죽임을 당했지만 영은 살아있어서 바로 이 옥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헬라어 ‘퓔라케’(phulake)라는 단어를 ‘옥’(pris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모든 성경이 일괄적으로 감옥이라고 번역한 이 단어의 원래 뜻은 ‘감시’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경계하고 감시하는 뜻을 지닌 퓔라케라는 명사는 동사 ‘퓔랏소’(phulasso)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표현하면 watch라고 적을 수 있습니다. 즉 관찰하고 살피고 경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옥은 사람을 가두어두고 경계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은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두어져 있는 사람들은 어떤 공통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인데, 성경은 그들이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은 3일간 죽어있을 동안 육신으로는 죽어 행동할 수 없었지만 영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어딘가에 있는 이 퓔라케를 방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옥에 있는 영들”(엔 퓔라케 프뉴마신; en phulake pneumasin)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망해서 육신을 벗어난 자들이 모여 있는 그 곳에 주님도 영으로 갔습니다. 영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성경에 ‘천국’ ‘낙원’ ‘지옥’ ‘음부’ ‘옥’ 등이 있습니다. 낙원과 음부는 같은 곳인데 그 속에 있는 영의 성격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원 받은 자들과 구원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최종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해당하는 천국이 있고, 그에 반대되는 지옥이 있습니다. 이곳은 종말의 완결이라는 점 때문에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원과 음부는 종말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베드로가 지적한 내용인데, 이 감옥에 갇혀 있는 영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즉 노아의 방주 사건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로 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율법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입니다.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 이외에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음부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하데스’(hades)인데, 이 단어는 ‘에이돈’(eidon)이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에이돈은 ‘보다’라는 뜻을 지닌 ‘호라오’(horao)라는 동사에 근거한 단어입니다. 하데스가 원래 ‘보다’ ‘살피다’라는 의미로부터 출발했다고 볼 때, 이는 살피고 경계하는 ‘퓔랏소’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부나 감옥이나 실상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음부를 베드로가 말한 그 옥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같은 성격이지만 위치가 다르고 그 속에 있는 영들의 세대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수 사건 이후에 불순종한 사람들은 아마도 음부에 갇혀 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전혀 직접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성격을 가진 음부와 감옥은 세대적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며, 음부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도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처럼 그런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마도 그런 기회가 올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아 이후의 세대들은 그 전 세대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 사건을 치른 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노아의 식구들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노아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한 가르침을 받고 자란 세대들이라는 점에서 노아의 전 세대들과는 다릅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자란 세대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공개적으로 선포되었으며, 부정할 수 없는 홍수 사건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모세로부터 율법이 주어진 후에는 모든 사람이 율법의 판단 아래 놓여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듣던 못 듣던 상관이 없습니다. 선포되면 모든 사람은 그 지배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지금은 복음 아래 있는 시대입니다. 듣던 못 듣던 상관이 없습니다.

홍수, 율법, 복음 이렇게 판단의 기준이 변화했고, 이 기준에 따라서 순종하지 않은 자들은 감옥과 음부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자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었기에 한 번의 회복하는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하고 다른 세대들은 그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톨릭에서 오랫동안 전해오고 있는 ‘연옥설’은 복음을 약화시키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단 한 번이라는 단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 한 번 주를 시인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며 단 한 번 부인함으로써 사망에 이릅니다(히 9:27).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음으로써 구원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에서를 예를 들어서 다시 구원 받을 기회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지만 후에 그 사실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되찾고자 했지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예로 가롯 사람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한 번 죽고 나면 그 다음은 오직 심판만이 존재합니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연옥에서 다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는 가톨릭의 주장은 모순입니다. 이는 교회가 오랫동안 감옥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인위적으로 확대했던 것입니다. 감옥은 존재했지만 음부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복음의 세대에는 불신자들이 가는 곳이 음부입니다. 그곳에는 판결을 기다릴 뿐입니다. 이 사실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보스톤의 오코넬(O'connell) 추기경은 “작은 과실 혹은 죄로 인한 세속적인 형벌이 속죄 받는 장소로서 연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다는 것은 신뢰할 만한 것이다”라고 그의 책 『성경의 진실한 교회인 가톨릭 교회』( p.178)에서 주장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에 맞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죄와 함께 모든 형벌을 사면하신다거나, 회개한 사람의 죄 용서는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속죄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에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파문시켜라”(트렌트 공의회 14차 회의 교회법규 12)고 모든 성직자들에게 교서를 내렸습니다.

가톨릭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외곡시켰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서 믿음과 영성이 부족한 지도자들이 나타나면서 무지한 회중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곡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은 개신교도 500년이 지나면서 상당한 부분에서 말씀에서 벗어나고 있는 점에서도 증명되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시로 점검하고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장봉운-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케노시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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