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성경탐구40

[스크랩] 알지 못하고 하는 예언

기쁨조미료25 2007. 9. 28. 07:44

예언은 크게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자신이 지금 예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는 예언이 있습니다. 이 예언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거나 보여주시는 것을 보면서 예언하는 것과 계획되고 의도된 상태에서 예언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자는 예언자 또는 선견자가 예언하는 것이고 후자는 예언적으로 상담하는 사람이 하는 예언입니다. 이런 예언은 많은 훈련이 필요하고 예언자로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즉 예언의 은사를 받는 것이 선결조건입니다. 이런 사람은 흔하지 않고 그 능력에 따라서 차이도 많습니다. 단순한 예언자가 있고, 복잡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누구나 예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자신이 지금 예언을 하고 있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예언적인 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때로는 예언의 영에 의해서 무언가 말을 하지만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변에서 듣는 사람들도 역시 알아차리지 못하지요. 이런 경우 지나가는 말처럼, 또는 자기 말처럼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에 예언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입을 통해서 또는 생각을 통해서 대언하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지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나 말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영에 의해서 작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성경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라고 고백했을 때 그 말은 베드로 자신으로부터 우러난 생각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것이지요. 가롯 사람 유다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할 때 이 역시 그의 생각이 아니라 사단이 그 마음속에 사단의 생각을 넣어주었기 때문입니다.(요 13:2)

예수가 잡혀 와서 대제사장의 뜰에 있을 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라고 말한 것 역시 그 스스로 한 말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요 11:51). 이런 형태의 예언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젊은 가수 차 중락 씨는 그의 노래대로 낙엽 따라 가 버렸고, ‘쨍하고 볕들 날’을 부른 송 대관 씨는 쨍하고 볕이 들어 가수로 성공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는 그는 무명인이었습니다. ‘호랑나비’를 부르면서 갈팡질팡하는 춤을 춘 김 흥국 씨는 지금도 갈팡질팡하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이 한 말이 그대로 적중해서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 아픈 일이 벌어져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지금 사회의 중심이 되는 저와 같은 50대 이후의 세대들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코를 풀어주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흥해라!”였습니다. 그 말대로 우리 세대는 70~80년대 경제의 주역의 역할을 하면서 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주체 역할을 했습니다.

부모님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흥해라!”라고 한 말대로 우리 세대는 흥하게 하는 주역이 되었고, 가난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의미 있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 배후에 어떤 영이 작용하여 그런 말을 선포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를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때는 반드시 그 종에게 알리고 나서 하게 됩니다. 이 때 종이라는 개념은 어떤 언약 관계에 있거나 지명하여 부른 소명 관계에 있는 특수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느브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윗이나 이사야처럼 그런 부르심을 받은 종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브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종으로써 이스라엘을 벌주는 과정에 쓰임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 즉 주종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느냐 못하는냐 하는 문제는 예언의 선포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당나귀를 그 도구로 사용합니다. 이 경우에 당나귀와 하나님 사이에는 주종 관계가 있지만 당나귀에게는 그 사실이 아무런 의미를 부여해주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의 도구로 선악간에 사용되지만 때로는 알 수 있고, 때로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든 알지 못하든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어떤 구속력도 없습니다. 그 관계로 이미 하나님은 그 종에게 우선 계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관계 속에 진입하여 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일정 부분은 우리의 책임이 있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예민하지 못하거나 이런 부분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그런 말을 할 당시 그의 영적 수준은 너무도 한심했습니다. 완전히 육신에 속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난 후에 크게 영적으로 각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자신의 입으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글을 쓴 바울도 자신이 지금 성령의 감동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안부가 궁금해서 또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영적 지도를 글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기에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있는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위로를 해 줍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이야기가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너무도 감동을 받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그냥 하는 말인데, 듣는 사람은 오랜 세월동안 가슴에 맺혀 풀리지 않고 있던 의문점이 다 풀어지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듯이 기뻐하면서 크게 위로를 받는지 말하고 있는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너무도 즐거워합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준비된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회중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 목사가 내 말을 하는구만! 나에게 대놓고 하는 말이야!”라고 흥분합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은 감동하여 회개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시험에 듭니다. 이런 회중의 반응을 목사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이런 유형의 예언은 누구나 언제든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전혀 알지 못하고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일단 선포된 말씀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이르면 현실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말씀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간섭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폭이 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긴장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면서 늘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입을 통해서 언제든지 예언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하는 말 속에 때로는 마귀의 말이 들어있을 수도 있기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타인을 향해서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롬 12:14). 서로를 위로하고 축복함으로써 우리는 선한 의도로 사람들에게 예언하게 될 것입니다. 정죄나 판단을 앞세우기 보다는 위로와 권면을 할 때 그 속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예언이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함부로 말하고 그 후에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단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잠깐 멈추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이 혹시 예언이 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를 말입니다.

-장봉운-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케노시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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