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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J. 홀[William J. Hall,가락(賀樂)] 가족 묘

기쁨조미료25 2010. 3. 20. 12:12

(마포)윌리엄 J. 홀[William J. Hall,가락(賀樂)] 가족 묘 총.묘(塚.墓)

2010/03/12 00:10

 

(마포)윌리엄 J. 홀[William J. Hall,가락(賀樂)] 가족 묘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8(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C-19)

  양화진에 안장된 홀 가족의 삶은 숭고함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준다. 캐나다 벽촌 가난한 집안 출신의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은 자수성가하여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면서 만난 의사 로제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와 약혼을 하였다. 약혼녀보다 1년 늦은 1891년 한국에 온 윌리엄은 서울에서 로제타와 결혼한다. 이들 부부는 1년 후 평양 선교 개척의 중책을 맡고 아직 채 한 살이 안 된 아들과 함께 평양으로 간다. 그리고 온갖 핍박 속에서도 의료 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윌리엄 홀은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의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전염병에 걸리게 된다. 뒤늦게 서울로 와서 아내의 돌봄을 받았지만 1894년 11월 24일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때 그의 아내는 겨우 29세로 임신 7개월 째였다.

  로제타 홀은 남편의 사후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7년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우고 직접 부인과장으로 일하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 에디스가 이질로 죽고 만다. 그녀는 김점동이라는, 나중에 박에스더라고 불린 한 여성을 미국에까지 데리고 가서 의학교육을 시켰다.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도 개발하였고, 평양에 최초의 맹아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녀는 서울로 와서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남편과 딸을 잃으면서도 그녀의 헌신은 45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홀 부부의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의사이던 아내 메리언과 함께 한국에 와서 15년 동안 의료 선교사로 일하였다. 그는 특히 폐결핵을 치료하는 전문가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셔우드 홀은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해서 폐결핵에 대한 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는 1940년 간첩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겨우 풀려나 한국을 떠나게 된다. 한국을 떠나기 바로 직전 미국 선교본부가 인도에 의료선교사로 가라고 명하자 그의 가족들은 지체 않고 일본으로 가서 인도로 가는 배를 탔다.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에서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홀 선교사 가족의 묘역에는 윌리엄-로제타 부부, 셔우드-메리안 부부, 에디스, 프랭크 셔우드가 묻혀있다.

 

[(좌)셔우드 홀 선생 공적비, (우)윌리엄 제임스 홀 묘비]

  ☞셔우드 홀 선생 공적비 좌측에 있는 아름다운 묘비석은 졸리(Joly, Henry Bencraft)의 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