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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Child문화인류학 ‘화해의 아이’를 읽고서

기쁨조미료25 2010. 4. 7. 18:54

Peace Child문화인류학 ‘화해의 아이’를 읽고서

화 인류학을 수업을 들으면서 과제로 ‘화해의 아이’를 접하게 되었다.

‘선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엔 너무도 부족함이 많은 나 자신이지만, 그동안 선교사로써의 삶을 살기 위한 결심과 다짐은 했었지만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새삼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조국교회의 암담한 현실과 한국교회가 현대적 세상의 비춰지는 이미지로 ‘선교사’란 것은 하나의 방편으로써 가령 언어연수를 빌미로 또는 그간 꿈으로 꿔왔던 막연한 외국생활의 동경으로 선택되어져 많은 신대원 졸업생들이 목회보다 선교를 택하는 이 시대에 있어서 진정한 ‘선교’와 ‘선교사’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깨우쳐 준다.

‘화해의 아이’는 저자의 기행과 관점, 사위인들의 모습과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총 3부로 나누어진 제목가운데 사위족이란 뉴기니아에 거주하는 부족 (지금은 웨스트 이리안 혹은 이리안 자야 라고 불리는 뉴기니아 서반부에 생활하는 약 400개로 추산되는 부족들 가운데 한 종족) 의 선교사가 오기전의 세계관, 문화, 전설들을 설명한다.

1부 : 사위족의 세계

1. 해남 마을에 파견된 사신

2. 우정으로 살찌움

3. 뚜안족의 그림자

4. 뚜안족이 오다

5. 전설의 창조자

처음 책을 펴게 되면 만나는 ‘사위족의 세계’에서는 문명을 접할 기회가 없이 그들만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살아갔던 과거의 모습들이 잘 나타난다.

한 예로 처음에 등장하는 야에가 겪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배반’을 이상으로 숭앙하는 풍습이 있는 그 땅에 야에와 카우탑이라는 사위족 가정이 등장한다. 그는 마우로 마을의 일원으로써 해남에 있는 그의 친척 카우완과 캉개씨족 등 그간 대적관계였던 것을 대화로 풀어 나가려고 한다.

이는 야에 본인 자신을 중재자로써의 입장과 향후 지도자로써 발돋움할 입지를 다져가는, 또 사망한 둘째부인을 대신할 그의 이상인 부인 다섯 명을 만들기 위한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들의 교류가 7개월을 이어가고 따뜻한 환대와 서로간의 초청이 있었을 때에 해남인들은 비로써 그간 친구로만 여기던 야에를 살해하고 그의 인육을 나누어 먹는다.

이는 ‘투위 아소나이 마카에린 : 우리는 너를 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우정으로 살찌운 것이다!’라고 하는 사위부족 고유의 표현으로써 배반의 이상화를 세 단어로 압축한 간결하나 무시무시한 말의 표현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뚜안족(백인)이라는 것이 새로운 화젯거리가 되었다.

사실상 그들에게 있어서 사냥범위를 넓히는 것과 복수관계에 있어서 자신들의 지역을 늘리고 확보하는 것이 늘 화제였겠지만, 그래서 뚜안족들의 무력이나 침략에 대해서라기보단,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힘 그리고 이상한 능력들 (불을 뿜는다거나, 생김새)로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사실상 정글에서의 삶은 남자에게 있어서 채취와 수렵 그리고 사냥, 종족을 지키는 전사로써의 모습을, 여자에게 있어서는 양육과 가사를 담당하게 될 때에 사위족은 늘 원한과 음모 보복으로 숨 막히고 탱탱한 긴장감만이 감도는 것을 바탕으로 삶을 영위해 나간다.

2부 : 두 세계가 서로 만날 때

1. 사역의 시작

2. 경질목 장막을 뚫고

3. 한 시대의 종말

4.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

5. 카누 안의 운명

6. 생소함의 세례

7. 툼두 지류의 족장

8. 우리 집 문 앞에서 벌어진 전투

9. 뚜안이 사람의 골을 먹는다.

10. 남자들의 집에서의 만남

16. 크론켈 강변의 위기

17. 내일은 찬물이

둘째 단원에서는 이제 ‘화해의 아이’의 저자이자 사위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부름과 사역의 전반을 소개한다. 이는 저자의 관점에서 소명과 사역의 시작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사위족의 관점으로써는 문명의 충돌이요, 두렵고도 호기심 많은 일들이 되었다.

저자는 20세 때에 프레리 성경학교에서 오지선교연합회의 ‘바인’ 총무가 주도하는 강연을 듣고 ‘네덜란드령 뉴기니아’를 알게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계심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동안 구태 의연하고 진부하고 케케묵은 것처럼 보였던 성경말씀들이 그에게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며 그의 삶의 목적을 그리스도를 섬김으로써 삶이 영원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음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에 대한 지식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1962년 4월 13일 네덜란드령 뉴기니아의 북쪽해변에 있는 센타니 공항에 도착함으로 저자와 저자의 부인 캐롤은 사실상 선교사로써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이미 뉴기니아에 정착하여 여러 종류의 (가령 항공, 의료 등의) 사역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과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사위족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으며 사위족이 거주하고 있는 내지로 비행기와 보트를 통하여 이동한다.

일행은 보트 ‘에벤에셀’을 타고 사위부족이 사는 크로켈 강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 3일째 될 때에 키다리라는 지역에서 사위족을 직접 만나게 된다. 서로가 긴장되고 떨리는 상태에서 선교사 일행이 ‘코나하리오’라는 사위종족 인사를 하게 될 때에 뚜안족(백인)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던 사위족의 전사들은 ‘코나하리오’로 화답하게 되고 긴장을 풀게 된다.

이것은 고립시대의 종막과 현대문명시대와의 상호교류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써 양측에게는 서로에게 있어서 모험을 하는 것이었다. 한 측은 새로운 선교지를 확보하고 복음화를 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었고, 또 다른 한 측은 보다 나은 문명의 혜택 (가령 도끼나, 톱, 칼 등)을 누릴 수 있는데 목적을 두었다.

저자인 선교사와 그에 가족 (아내 캐롤, 아들 스티븐)이 사위족의 마을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산다고 하였을 때에 사위족의 세 전사 (하토, 키고, 누무)는 하하프 카만 이라고 불리는 가슴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강한 외침으로 환영하였다.

하지만 선교사 가정이 정착한 지역은 세 부족이 한마을로 연합된 지역 즉, 카무르인과 해남인, 그리고 요휘인이 함께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연합은 너무나 쉽게 피를 보고, 유혈참극으로 벌어질 수 있다. 결국 정착 후 일주일이 지나자 전쟁은 벌어졌고, 저자의 용기와 하토와 하디의 중재로 말미암아 전쟁은 멈췄다.

언어를 습득하고 문화를 체험하면서 저자는 ‘남자들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에 초대된다. 일반적으로 부족사회 및 씨족사회에서 모든 권력은 남자들에게 집중되고, 사냥, 전쟁 등의 일은 남자들만의 특권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남자들의 집’에 초대된 것은 그만큼 낯선 뚜안족인 선교사 자신을 인정하고 그들만의 문화권 안으로 초대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남자들의 집’에서 하나님을 ‘미아오 코돈’ (최대의 영- Greatest Spirits)이라 창안하여 그 가치관을 말하게 된다. 이에 사위족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영의 개념에 있어서 너무도 새로운 것을 접하게 된 것이다.

선교사의 가르침이 계속 되는 중 ‘유다’의 내용이 나왔을 때 선교사는 ‘배반’이 최고의 우선으로 여기는 사위족의 문화를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투위 아소나이 만’ (돼지를 잡는다 …을 행하기 위해서) 즉, 예기치 않게 잡아먹기 위해 한 인간을 우정으로 살찌우는 행위를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속인(俗人)이 갖는 살인의 개념을 넘어서서, 배반이 미덕이요 삶의 목표로 이상화되는 극단적인 삶의 방식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선교사에게 깊은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단순히 복음을 암송하고 전하는 것으로 선교를 생각해왔던 삶에서 이러한 현실은 복음과 적대적인 세계관과의 맞부딪힘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예수님 자신의 경우를 생각해 볼 때 같은 모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문화 안에서 메시아를 가리키는 수십 가지 구속의 유비들을 배양하심으로써 수천 년 전부터 준비하셨다. 허나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로고스의 개념을 다르게 생각했고 그들만의 메시야를 생각하여 진정으로 오신 예수님을 결국 살해하는 결과까지 오게 되었다.

그들이 정착한지 5개월째 크로켈 강변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늘 부상자가 속출하여 선교사와 부인 캐롤은 더 이상의 사상자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각 부족 족장들에게 더 이상의 화해가 없다면 떠날 것을 알린다. 마을은 그로인해 술렁이게 되고 ‘남자들의 집’에서는 오랜 회의가 벌어진다.

결국 각 부족의 족장들은 화해를 결정하게 되고 평화의 축제가 벌어진다.

허나 선교사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갖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서로 화해의 결과로써 양 부족에서 태어난 아이를 서로 맞교환하는 것이었다. ‘화해의 아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투위 아소나이 만’ 과 ‘와네스 줄’ 의 무시무시한 상황속에서조차 신실성을 증명하고 평화를 세우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만일 누가 실제로 그의 아들을 적에게 준다면 그 사람만큼은 신뢰할 수가 있고 또한 적이 준 아들에게 손을 얹은 자는 누구나 그 아들을 준 적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되며 동시에 그들을 죽이기 위해 와네스 줄을 사용해서는 안됨“을 의미했다.

3부 : 변화된 세계

1. 남자들의 집의 정적

2. 악어들 속에 빠짐

3. 나의 간장까지 떨렸소

4. 살아 있는 죽은 자

5. 아우마마이의 힘

6. 눈이 빠지게 기다림

7. 기나긴 여행

8. 조상의 구습을 깨고

선교사와 그의 가정, 그리고 세 부족이 모인 이 마을은 ‘화해의 아이’로 인해 3개월간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렇게 사위족은 식인과 살인의 풍습이 있는가. 반면에, 이러한 평화의 협정 ‘타로프’ 풍습이 함께 공존하였다.

선교사는 해남-요위 마을의 ‘남자들의 집’에 올라가 ‘미야오 코돈’(GOD)이 보낸 완전한 화해의 아이 즉, ’예수스'(JESUS)의 개념을 설명하게 된다. 그간 배반의 이상화에 가장 영웅적 이미지로 나타났던 ‘유다’의 모습은 그들이 지키는 타로프를 배신한 자로 악당이 되어버렸고 모든 사위족의 남자들은 선교사의 말을 경청하면서, ‘미야오 코돈’과 인간 사이의 평화의 서약인 화해의 아이 ‘예수스’를 영접하기로 한다.

허나 이러한 부분에서도 선교사에겐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사위족들이 복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듣긴 하지만 귀신과 정령의 세계로부터 불리한 재난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직접적으로 ‘미야오 코돈’을 믿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크로켈 강변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함께 연합한 마을 밖의 다른 소수 부족들이 여전히 인육을 먹는 풍습과 살인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런 불똥이 언제 연합된 마을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선교사의 가정이 둘째 아이 출산을 위해 잠시 중앙고지에 위치한 카루바가에서 머물고 한 달 후 다시 연합된 마을로 돌아올 때에 사위족 청년인 마보가 운전한 카누가 크로켈 강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벌어진다. 이로 인해서 두 아들과 아내 캐롤을 잃을 뻔 하였지만 다행스럽게도 모두 구조되었다. 허나 사위족에게 있어선 카누가 전복되면 사람의 생명은 아니라도 귀중한 도끼와 큰 칼과 나이프등을 잃는 수가 많기 때문에 중대한 ‘범죄’로 간주되어서 카누를 운전한 마보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그를 선교사는 성난 사위족 사람들과 하토로부터 야단치지 않도록 구해주며, 더불어 용서해주었다.

이러한 용서는 직접적으로 사위족의 추장인 하토에게 다가왔다. 바로 하토가 ‘하나님’의 ‘화해의 아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선교사의 두 아들이 거의 익사 할뻔 했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타로프’가 선교사에게 평화를 줄 수 있었던 것을 보고 하토는 선교사의 말하는 모든 것이 진실임을 결정짓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토와 그의 친구들이 ‘미야오 코돈’의 ‘타로프’를 믿게됨으로 벌어질 정령과 귀신의 보복을 두려워 하였다. 그 가운데 와라하이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고 선교사와 해남 마을 무당과의 한바탕 시위가 벌어진다. 이는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한 선교사와 ‘아우마마이’ 상태(확실한 생존 상태, 때론 죽은 사람의 영혼이 떠난 상태에도 당분간 시신이 기능을 발휘하는 것)에 있다고 말하는 무당과의 접전이었다. 선교사와 그의 아내는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

와라하이는 기적적으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되고 이로 인해 ‘미야오 코돈’을 신뢰하고 그간 거짓에 속아왔음을 고백하며 진정으로 영접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런 가운데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고 여전히 무당과 정령을 섬기는 자들이 있었다.

와라하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11일째 되는 날 다시 무의식속에 빠져들면서 14일째 되는 날 죽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는 그 죽음으로 인해 사위족에게 비밀리 행해졌던 ‘게팜 아손’이라는 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게팜 아손’이란 부패한 시신을 가지고 그의 부활과 중생을 의미하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그것은 마치 애벌레가 새로운 몸을 입기 위해 고치를 벗고 나와 나방으로 변화되어서 죽음을 피할 때 일어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가령 도마뱀이나 뱀이 옛 허물을 벗음으로써 죽음에서 피하는 방법을 묘사하는 것과 같다.

선교사는 사위족들에게 이 악습을 고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레몬’에 대입하여 설명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행위나 풍습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되어진 중생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위족들은 이미 그동안 자신들이 기다려왔던 ‘레몬’ (중생)의 문제가 이미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었음을 듣게 되며 그들의 ‘게팜 아손’의 풍습을 없애며 진실로 성탄절을 맞이하며 연합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느낀 점 및 적용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1절/ 3:16절)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고, 헬라인들에게 있어서는 로고스였다. 그러나 사위인들에게 있어서 그분은 타로트 팀 코돈, 즉 ‘화해의 아이’였다.” (본문 264쪽에서)

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모든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는 기초와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서 나오는 바벨탑 사건과 더불어 하나님과 더불어 원수 맺으려는 모습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말미암아 따로 떨어져 살게 되면서 각자의 문화와 세계관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두려움으로 인한 숭배와 치유 그리고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그들만의 해석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 돈 리챠드슨은 그러한 점에서 구속의 유비를 사위족과의 삶을 통하여 발견하였고 올바른 적용으로 말미암아 사위족 마을을 복음화 시켰다. 이러한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간혹 혹자는 “이젠 식인종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모든 나라와 민족이 글로벌(Global)화 되어서 각종 종교와 문화의 범람이 되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것은 너무도 잘못된 것이다. 2000년 전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민족들과 유대민족에게 자신의 아들 ‘예수’를 사람의 몸으로써 태어나게 하시고 또한 그 탄생이 있기 전부터 구약을 통하여 그 약속에 대한 명시를 하셨지만, 우리 인간의 생각은 그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잣대와 틀로써만 오실 메시야를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침략자인 로마의 그늘 안에서 오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용맹스런 장군과도 같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오신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너무도 상반된 이미지였던 것이다. 이에 젊은 혁명가였던 유다는 너무도 실망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주의자였던 그에게 있어서 너무도 먼 나라였던 것이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을 그는 옆에서 바로 듣던 제자였으나, 그의 현실은 이상을 허락지 않았고 결국 배신의 관계로 돌이키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이러한 사실을 일반적 기독교의 복음과 다른 문화와 가치관속에서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 유다처럼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상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현실의 문제에 있어서 이상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만을 꿈꿀 것인가?

우리는 올바른 전도와 선교의 문제에 있어서 현재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곳을 되짚어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의 문화와 가치를 인정하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것에 있다.

최근의 한국의 기독교는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가? 목사직의 세습과 교회의 타락,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선교로 인한 부정적 이미지, 헌금과 십일조를 강요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빈민구제나 사회복지에 쓰는 것보다 교회를 세우고 건물을 짓는 것에 열의를 두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진 않은가?

이러한 현실가운데, 우리는 어쩌면 저자인 선교사가 파푸아 뉴기니아의 식인족 부락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과 처해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시대개혁적인 방향성으로 올바른 진리안에서 투쟁해야하며 동시에 사명인 ‘전도’를 행해나가야 한다.

화해의 아이를 읽고서, 지금 현재도 선교지에서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와 또 그곳의 악한 영과 대항하여 분투노력하는 선교사들의 심정이 가슴에 와 닿을 때에 마냥 모국에서 편히 먹고 마시며, 공부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부끄러워지며 동시에 선교사후보생이라는 타이틀만을 가지고 안주하였던 것을 회개하며 나아간다.

원본 : http://cafe.daum.net/bs-think/O9yv/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