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역사] 괴짜 선교사 칼 귀츨라프
칼 귀츨라프(Carl August Friedrich Gutzlaff, 郭实猎, 1803-1851)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근대 중국선교 초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선교사이다. 그는 목사이자 의사로서 성경번역은 물론 잡지 발행을 통해 서양의 과학문명과 정치제도 등을 중국사회에 소개하였다. 역사가들은 그를 “성자이며 괴짜이고, 몽상가요 성실한 개척자, 그리고 하나의 열광자”라고 다양하게 평론하고 있다. 그만큼 그가 근대 중국사회에 미친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32년 동인도회사의 통역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40일 동안 성경을 전하기도 하고, 감자를 전해주어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도 공헌한 바가 컸다. 이번 호에는 괴짜 선교사 귀츨라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귀츨라프의 생애
그는 1803년 독일 포메라니아(Pormerania)의 피리츠(Pyritz)에서 폴란드계 유대인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의 중국 이름은 궈스리에(郭实猎)이며 호(号)는 애한자(愛汉者) 혹은 선덕(善德), 선덕자(善德者) 등으로 불리 운다. 소년시절에는 경제사정이 어려워 아버지가 경영하는 마구상에서 심부름을 하며 성장하였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프러시아 왕에게 시를 읊어 올린 것이 인연이 되어 17세기 독일 경건파 운동의 중심지였던 할례(Halle)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826년 중국선교의 개척자 모리슨(Robbert Morrison)의 영향을 받아 중국선교의 꿈을 키우게 된다. 그 이듬해 네델란드선교회(The Netherland Missionary Society)의 파송을 받아 본격적으로 중국선교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 중국의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기에 네델란드 식민지 지역인 인도네시아의 자바(Java), 바타비아(Batavia)와 스마트라(Smatra) 등지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중국 화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중국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1929년에는 중국에 좀 더 가까이 가기위하여 태국의 방콕(Bangkok)으로 선교지를 옮겼다. 이시기에 화교들에게 중국어를 배워 실력이 수준급에 이른 그는 태국어 신약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방콕에서 아내와 사별한 후 중국으로 선교지를 옮기려 했으나 네덜란드선교회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부득이 영국선교회로 이적하여 선교지를 중국 마카오(澳门)로 옮겨 중국선교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귀츨라프는 언어에 능통하여 근대중국선교의 개척자 모리슨과 구약성경 번역 및 수정에 참여했다. 게다가 난파한 일본 선박의 한 선원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귀츨라프는 그 선원과 협력하여 1836년 일본어 요한복음을 번역 간행하였다.
귀츨라프의 문서 선교
당시 중국의 출판활동은 대부분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동남아 지역에서 최초로 발행된 중문 잡지는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런던선교회의 모리슨과 미린(William Milne, 米怜)에 의해서 발행되었다. 미린은 1815년 말레시아의 마육갑(马六甲)에 인쇄소를 설치하고 <찰세속매월통기전(察世俗每月统记传)>을 발행하였다.
물론 이 잡지를 발행한 중요한 목적은 복음을 좀 더 광범위하게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밖에도 <특선촬요(特选撮要)>와 <천하신문(天下新闻>이 있었는데 모두 동남아지역에서 발행된 것이다. 19세기 30년대에 귀츨라프는 중국 전통문화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광저우(广州)에 중국익지회(中国益智会)를 설립하여 중국어 잡지와 문서 출판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서방의 과학문명, 정치제도, 세계의 역사와 지리 등을 소개하고자 하였다. 중국익지회의 활동의 일환으로 귀츨라프는 1833년 8월 1일 광저우에서 <동서양고매월통기전(东西洋考每月统记传)>(이하 <동서양고>)을 발행하였다. 이는 중국본토에서 발행한 최초의 중국어 정기간행물이었다. 이 외에 <대영국통지(大英国统志)>, <고금만국강감(古今万国纲鉴)>, <만국지리전집(万国地理全集)> 등의 서적들을 계속 번역 출판하였다.
후에 아편문제로 중?영관계가 점차 긴장되면서, 귀츨라프는 출판무대를 싱가포르로 옮겨 20여 권의 선교 책자를 출판하여, 그는 당시 중국어 출판물을 가장 많이 출판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중국어 서적을 출판할 뿐만 아니라, 중국 연해안 지역을 빈번히 방문하여 서적들을 무료로 배포하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19세기 30년대 중국교회는 완전히 귀츨라프에 의해 이끌어 졌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1837년 <동서양고>도 싱가포르로 옮겨서 발행하다. 일 년 후 정간(停刊)하였다. <동서양고>의 창간호에 귀츨라프는 아래와 같이 이 잡지의 창간 목적을 기술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장기간 중국인들과 왕래하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세계제일의 민족임을 자처하고 그 밖의 민족을 오랑캐(蛮夷)로 보고 있다. 이러한 맹목적인 자부심은 광저우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이익은 물론 외국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의 왕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간행물은 마카오와 광저우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기위해 창간하였다. 이러한 간행물을 통해서 중국인들이 서방의 공예 기술, 과학과 도덕관념 등을 올바로 인식하여, 그들의 오만과 배외적인 관념을 종식시키고자 한다. 이 잡지에는 정치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또 어떠한 저급한 언어로 중국인들을 자극시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한다. 이 잡지를 통해 서양인들이 오랑캐가 아니라는 것을 표명하고, 중국인들로 하여금 서양인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확신시키고자 한다. 편집자는 외국인과 지방의 저명인사들과 우의를 돈독히 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으로 열매 맺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상의 문장에서 귀츨라프는 당시의 중국인들의 문제점을 깊이 관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이 잡지를 발행하는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기위한 것이었는데, 귀츨라프는 특이하게도 선교사의 신분이었지만, <동서양고>를 발행하는 목적이 복음의 전파보다는 서양문명을 소개하여 중국인들의 안목을 넓히고 나아가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이익을 옹호하려고 시도한 것은 일반 선교사들과는 매우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괴짜 선교사로 불리었는지도 모르겠다. 1830년대에 모리슨의 제자이고, 중국 최초의 목사인 양발(梁发)이 중서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예를 들면 첩에 관한 문화를 보면 중국에서는 후손이 없는 것도 큰 불효 중의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후손을 위해 첩을 맞지만, 서방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중혼(重婚)이나, 음란의 죄로 보았다. 그러므로 서방인이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러한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귀츨라프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동서양고>를 통해 서방의 새로운 과학문명과 민주정치를 계속하여 소개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중국에 문화가 있다면, 서방에도 문화가 있고, 그 문화가 중국보다 더 앞섰다고 강조하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온 천주교 신부 마테오리치는 세계지도를 그릴 때, 중국을 지도 중심에 그려서 중국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러나 귀츨라프는 자오선(经线)을 영국 런던을 통과하게 하여 영국이 세계의 중앙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마테오리치와 매우 다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귀츨라프는 중국의 당면한 문제가 정치에 있다고 보아서 영국의 민주정치 제도에 관해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1835년 6월의 <동서양고>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영국의 국회는 자주적인 이성으로 모든 정치적 장애를 제거하였다. 비록 귀족계층의 반발이 있었지만, 국가가 흥왕하려면 반드시 자주적인 이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이 무력하고, 모든 공장과 사농공상(士农工商)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에 반드시 자주적인 이성을 견지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자주적인 이성”이란 “자유”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국가가 흥왕하기 위해서는 국회와 자유(자주)가 헌정(宪政)의 절대적인 기본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1937년 7월호에는 미국의 정치제도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각 주(州)에서 자주적으로 민중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공회를 조직 운영한다. 그 대표들의 임기는 4년이고, 임기가 만료 되면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이 좋아한다면 재임을 할 수 있다. 백성들은 모두 평등하여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그는 여기에서도 자주적인 이성(자유)을 고수해야 국가가 흥할 수 있다고 재삼 강조하고 있었다.
1938년 4월호부터는 연속 4기에 걸쳐 영국의 의회정치제도의 기원과 운영 등에 관해서 상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문장들을 종합해 보면, 1)백성들의 자유(자주)는 헌정과 현대국가의 건설에 기초가 되어야 한다. 2)법치주의는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3)국회는 헌정제도를 이끌어가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4)정부의 영도자는 선거에 의해 선출해야 하고, 또 국민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5)언론의 자유는 헌정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조건이다. 6)헌정은 국가 흥왕과 발전의 기초이고, 또 관원은 민중의 감독 하에 있기 때문에 민중이 진정한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20년 후에 청나라 학자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国图志)>와 서계여의 <영환지략(瀛寰志略)>에서 유럽과 미국의 민주정치제도에 대하여 대거 인용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귀츨라프와 복한회(福汉会, The Chinese Union)
중국이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홍콩은 영국으로 할양되었고 귀츨라프도 홍콩으로 이주하여 영국인의 통역관 역할을 하였지만,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활용해 성경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10명도 채 안되었지만, 점점 인원이 증가하였다. 귀츨라프는 그 중에서 어느 정도 훈련이 된 사역자들을 중국 내지로 파견하고 성경을 배포하여 장래 중국 내륙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귀츨라프는 복음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 복한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이 복음을 받아드려 복을 누리기를 바라며 복한회라 명명하였다. 그가 복한회를 생각한 것은 1840년경이었지만, 전시상황으로 인해 미루어 오다가 1844년에 복한회를 홍콩에 설립하게 된 것이다. 복한회는 일반 선교단체와 달리 중국인들을 전도사로 훈련시켜 그들이 직접 중국 내지에 들어가 성경과 전도책자를 배포하면서 전도활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복한회는 이렇게 훈련 받고 파송된 중국인사역자들의 전도활동을 전적으로 신임하여 선교회의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전도하도록 하였다.
복한회 설립 당시의 인원은 21명이었다. 귀츨라프와 야곱(Robertson, Issachar Jacob,1802-1871, 罗孝全)목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중국인 장 씨와 문 씨가 복한회의 주석이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운영권은 서기인 귀츨라프에 의해 운영되었다. 복한회 초기에는 어느 선교단체의 지지나 후원을 받지 않고 완전히 귀츨라프의 개인 소득인 봉급으로 운영하다가, 후에 독일인 기독교인 바터(Bater, 巴特)의 후원을 받았다. 복한회의 규모와 활동은 신속히 발전해갔다. 1845년에 210명, 1847년에는 900명, 1849년에는 1,800명으로 급속적인 증가를 보였고 그 활동범위도 신속하게 확장되어, 광둥(广東), 광시(广西), 장시(江西)와 푸젠(福建)성 등 남부의 각성에 널리 분포되어 활발히 복음을 전하였다. 복한회의 사역이 계속 확장되자, 스위스의 파색회(巴色会)는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복한회의 사역을 협조하였다. 그러나 1851년 귀츨라프의 사망과 그 뒤를 이은 후계자 뉴만(Rev. Robert Neuman, 那文)목사가 1855년 본국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복한회의 활동은 멈추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복한회에 그가 젊었을 때 베를린의 재니크신학원(Janicke Mission Schule)에서 배웠던 모라비안(The Moravians)형제회의 신앙과 선교정신을 충분히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예배드리는 장소인 교회는 십자가, 강대상 혹은 초상화들을 장식하지 않고 최소한으로 간단히 설계하였고, 귀츨라프는 중국의 경전을 깊이 이해하여 이를 복음을 전하는데 충분히 이용하였다. 그는 고대 중국에서 숭배했던 신이 바로 기독교가 숭배하는 유일신이라고 보아, 조상숭배나 제사에 대해 관용의 자세를 갖고 금지하지 않았다.
이토록 그의 신앙과 전도방법이 일반 선교단체와 달라서 다른 교파나 선교단체들로부터 괴짜라는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복한회는 광둥과 광시 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객가(客家)지역은 물론 광시에서 발생한 태평천국(太平天国)에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역사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귀츨라프와 한국 기독교
1831년 6월, 귀츨라프는 중국 연안 도시들을 항해하는 한 상선의 중국어 통역관이 되어 제 1차 중국 연안전도를 시도하게 되는데, 약 6개월이나 소요되는 장기간의 전도 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832년 2월, 귀츨라프는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 호에서 통역 및 의사, 선목(船牧)의 자격으로 활동하였다. 암허스트 호는 선장 린제이(Lindsay)가 중국 동해안 연안을 순방하면서 상로(商路)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둥을 거쳐, 1832년 7월 17일 바람이 유난히 격하게 불어치는 날 백령도(白翎岛)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침통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한국인을 만나 성서를 주면서 이 가나한 나라가 복음과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부(富)해지기”를 빌었다. 귀츨라프는 백령도에서 다시 남하(南下)하여 7월 21일에는 군산만 창선도(昌善岛)에 도착했고, 7월 25일에는 홍주만(洪州弯), 고대도(古代岛) 등을 순방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한문 성경을 조선 사람들에게 전했고, 때로는 의약품 등을 나누어 주면서 주민들의 병을 치료하 기도 했다. 홍주(洪州) 목사 이민회(李敏会)와 수군우후(水军虞候) 김영수(金茔绥)를 통해 당시 조선의 국왕인 순조(纯祖)에게 통상 청원의 문서와 함께 성경을 전달했다. 어학에 재능이 많았던 그는 홍주 목사의 서생(书生) 양씨(梁氏)의 도움을 받아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기는 하나 우리말 성경 번역의 효시였다고 볼 수 있다.
또 그는 주민들에게 감자 씨를 주며 재배하는 법을 가르쳤고 책과 물품 등을 주고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하지감자’가 들어온 것은 기록상 이것이 처음이었다. 곳곳에서 성경을 전해 주고 복음을 전파하던 그는 40일 간의 순방 여정을 마치고 조선을 떠나는 아침에, 그의 앞에 묵묵히 석별의 눈물을 흘리고 서 있던 조선인에게 성경을 주고 믿음을 권면하면서 작별의 기도를 했다.
그 후 귀츨라프는 중국에 가서 선교사 모리슨의 후임으로 영국대사관의 통역과 상무관의 일을 담당했다. 그는 48세가 되는 1851년 8월 9일에 별세했다.
결론
귀츨라프가 중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는 중국은 시기적으로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다. 중국인들의 자기 문화에 대한 오만한 태도가 극에 달했고, 또 동서간의 무역과 경제적인 갈등으로 긴장된 상태가 1840년 아편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토록 혼란하고 복잡한 시기에 선교사, 의사, 그리고 통역관 등 다양한 신분과 역할을 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귀츨라프는 특이한 방법으로 선교사역에 임해야 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괴짜 선교사”라는 평가는 이러한 특수적인 시대적 유물이라고 본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아편전쟁 전후로 중국에 대한 그의 태도와 선교의 방법이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쟁 전에는 각종 문서활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인들을 계몽시키는데 주력했지만, 전쟁 후에는 복한회를 세우고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선교 방법은 변화되었을지 몰라도 그가 중국과 중국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을 시종일관 변함이 없음을 잘 알 수 있겠다.
귀츨라프가 상로를 탐색하기위해 한국을 방문했지만, 개신교 선교사로 제일 처음 한국을 찾았다는데 의의가 크다고 보며, 또한 그가 40일 동안 한국을 방문하면서 뿌린 복음의 씨가 후의 한국 기독교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지만, 장래 한국에 복음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을 예고하는 아름다운 발자취였던 것은 이후의 역사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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