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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의 행적

기쁨조미료25 2010. 1. 22. 19:40

한국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의 행적
                                                     신호철 장로(양화진선교회장)

  2009년 7월 17일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가 내한한지  177주년이 되는 날이다. 7월 27일은 주기도문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기념일이다. 그리고  7월 30일은 서양에서 감자를 처음 들여와 백성들의 구황(救荒)식품으로 배고픔의 고통을 덜어준 계기를 마련한 날이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우리나라에 33일간 머물면서 참으로 위대한 과업을 이룩하였다. 이번 호는 귀츨라프의 발자취를 따라 업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귀츨라프 선교사의 초기 행적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17일 황해도 몽금포에 첫 발을 디디고 낚시하고 있던 김대백과 조천의 두 어부를  만나 성서와 복음을 전하므로 한국 선교를 시작되었다. 다음날 그는 통상 교역을 청원하고자 내륙으로 진입하였으나 침략자로 간주되어 추포별장(장치주) 등 군인과 주민 수백 명의 제지로 황해도를 떠나야 했다.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7월 21일에는 충청해안의 외연열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는 산 중턱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망원경으로 바라보았다.  7월 22일 녹도에 정박하여 어부들과 한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으나 말(筆談)이 통하지 않아 본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때 바다표범 한 마리를 사냥하기도 했다.  7월 23일 불모도에 이동하였다가, 7월 24일에는 고대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는 충청수영의 토착군관(텡노)의 방문을 받고 포도주를 함께 마시며 필담을 통한 대화가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배가 정박하기에 대단히 위험하고, 고관들을 만나려면 개갱으로 이동하여야 한다는 권고를 받고 다음날부터  원산도에서 머물며 본격적인 선교 기반을 구축하였다.

2.귀츨라프의 본격적인 선교 행적  
  1832년 7월 25일 원산도 개갱에 도착한 귀츨라프 일행은  8월 11일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선교 기반을 확충하였다. 이 기간 중 주요 행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충청수영 관리들과 우호적  만남으로 많은 정보를 교류하였다.
7월 25일 수군우후(김형수)의 만남을 시작으로, 26일에는 홍주목사(이민회)를 만났으며   7월 30일에는 충청수사(이재형)의 만남이 있었다. 이들과 우호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성서를 전달하고 군.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정보를 교류하였다.  원산도는 1425년(세종 7)부터 국영 말 목장으로 운영되다가, 1669년(현종 10)에 해운과 해상 방어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수군우후가 주둔한 관가가 설치되어 있어 관리와 접촉이 용이하였다.    
둘째, 통상교역 청원서와 선물이 공식적으로 전달되었다.
수군우후와 홍주목사의 만남을 통하여 통상교역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7월 26일 무역 청원 절차를 공식적으로 수행하였다.  이 같은 근거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어 손을 올리고 제일 높은 고관 앞으로 걸어가 청원서를 그의 손에 전달하였다.”는 린제이 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수군우후는 통상 청원서를 접수하고 귀츨라프 일행 67명 전원을 만찬에 초대하였다. 그러나 음식이 외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아 먹지 못했다.  
셋째, 주기도문이 최초로 한글로 번역되었다.
  1832년 7월 27일에는 주기도문(Lord's Prayer)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우리들은 오랜 설득 끝에 서기관(Yang-yih)으로 하여금 한글 자모 일체를  쓰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귀츨라프는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주고, 서기관은 이것을 읽으면서 토를 달아 한글로 번역하였다.”는 린제이 보고서에서 살펴볼 수 있다.
주기도문의 한글 번역은 단편적이지만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귀츨라프는 “한글은 완전한 표음문자이며 글자의 짜임새가 매우 간단하면서도 착상이 교묘하다.”고 칭찬하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넷째, 모든 기회와 장소를 이용하여 성서를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했다.
귀츨라프는 모든 장소와 기회를 이용하여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근거는 .
“다른 어떤 외국인들도 우리처럼 이 나라에 자유롭게 접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행한 이 사역이 이 나라의 집권자로 하여금 앞으로의 정책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자극을 주었으면 한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로 자비로운 방문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진리를 전파하도록 서둘러야 한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친 대로 비록 처음은 보잘 것 없는 시작이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 나라에 어둠이 가고 새벽이 속히 와서 밝은 날이 오기를 우리 모두 희망으로 기대한다.”라는 귀츨라프 일기에 나타나 있다.
다섯째, 감자 씨를 전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주었다.  
  7월 30일 감자를 처음 심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 주어 배고픔을 덜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에 대하여 린제이 보고서에는 “우리 일행은 감자를 심기 위해 상륙하였다. 귀츨라프는 감자 재배 방법을 자세히 기술한 내용을 미리 적어 왔다.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땅을 선정하여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었다. 수백 명의 주민들이 둘러서서 놀라운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선의 토양과 기후는 감자 재배에 매우 적합해 보였다.”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귀츨라프는 “오늘(7월 30) 우리는 해안에 감자를 심으러 갔으며, 성공적인 감자 재배 방법에 대하여 필요한 내용을 글로 써 주고 파종하였다. 이 같은 유익한 활동마저도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되었다. 이 나라 국법에 어떤 외국 농작물의 수입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부 행위에 개의치 아니하고 ‘혁신이 있어야 수익이 있다’고 그들이 수긍할 때 까지 열심 으로 설명하자 말없이 승복하였다.”라는 일기가 있다.  
여섯째, 천수만 간월도와 본토에 상륙하여 성서를 나누어 주었다.
  8월 7일에는 북서 방향으로 이동하여 천수만(淺水灣) 일대의 간월도와 본토에 상륙하여 주민들에게 성서를 전해주었다.    

3.귀츨라프 선교사의 마지막 행적
귀츨라프 일행은 8월 11일 조정에서 파견된 특사(오계순)로부터 청원된 통상교역에 대하여 조정의 결의로 불가하다는 통고를 받았다. 교역을 계속 추진하였으나 성과가 없어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들의 마지막 행적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동안 우호적 관계를 맺었던 관리들과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때 충청수사는 “그대들은 아주 먼 곳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우리는 가당치 않은 태도로 그대들을 대우하였다. 유감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귀츨라프는 “이제까지 만난 고관 중에서 충청수사 만큼 예의바르고 분별 있게 행동한 사람은 없었다. 항상 신중하였으며 질문에도 요령이 있고 통찰력도 정확하였다.” 라고 하였다.  
다음, 한국 서해안에 머물면서 작성한 해도를 마무리 하였다. 이에 대하여 “리스 선장이 작성한 해도는 탐사 결과가 잘 나타나 있다. 장차 이곳 해안을 접근하는 항해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자체 평가 하였다.
마지막으로, 만약 서해안에서 외국선박이 표류하여 재난을 당하면 구조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인도적으로 대하고 식량도 공급해 달라고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 후 귀츨라프 일행은 한국의 마지막 여정으로 8월 17일 제주 가파도에 도착하였다. 이때  귀츨라프는 이곳은  한국,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양 무역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선교기지의 입지 조건을 잘 구비하고 있다고 하면서 희망적인 기록을 남기고 우리나라를 떠나갔다.  

4. 감자 전래에 얽힌 이야기  
  감자와 고구마를 감저(甘藷)라고 호칭하여 혼동하는 사례가 있다. 그러나 감자와 고구마는 다르다.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처음 들어온 것은 1764년이며, 감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귀츨라프에 의하여 1832년이 확실한 근거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마와 감자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마 : ‘고구마’라는 말은 일본에서 사용한 ‘고귀마(古貴麻)’의 어원에서 비롯되었다.  
. 1763년(영조 39) 9월 9일 예조참의 조엄이 일본 통신정사(通信正使)로 파견 되어 고구마를 들여왔다. 이 같은 근거는 “지난해 대마도(佐須奈浦)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감저를 보고 몇 말을 구하여 부산진으로 보내어 종자를 삼게 하였는데, 귀로의 지금에 또 이것을 구하여 장차 동래의 교리들에게 줄 예정이다. 일행 중에서도 감저를 얻은 자가 있으니 이것들을 자라서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된다면 문익점(文益漸)이 목화를 퍼뜨린 것처럼 우리 백성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조엄의 일기(1764.7.16)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고구마는 흉년에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벋어 나도록하는 구황(救荒) 식품으로 널리 권장되었으며  장수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감자 : 감자는 1832년 귀츨라프에 의하여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미 설명 한바 있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미 페루이며,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하여 유럽에 알려졌다. 유럽에서 식용작물로 처음 재배한 나라는 아일랜드이다. 영국의 크롬웰이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아일랜드 인을 황무지로 내 몰았을 때(1640-1660) 감자가 없었다면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독일(프로이젠)에서는 굶주림에서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을 감자의 나라로 바꾸어 놓았다. 프랑스에서는 감자 꽃을 장식으로 치장하다가 루이16세 때 감자 먹기를 장려하여 대기근에서 구제하였다.  미국에 감자가 빠른 속도로 보편화 된 것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프랑스 대사로 있을 때 감자요리를 맛본 이후 그가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 손님들에게 감자 요리를 선보이면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감자가 최초로 전래된 것은 1824-1825년 사이에 두만강을 건너 들어왔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그러나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가 처음 들여왔다는 기록은 확실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1847)에 “1832년 불모도에 들어 왔다”는 기록이 있고, 원저보(1862)에도 “1832년 귀츨라프가 씨감자를 민중에게 나누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알렌(1904)의 저서(‘Korea: Fact and Fancy)에도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가 감자를 심어주고 재배법을 주민들에게 설명해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감자가 처음 들어온 역사는 “1832년 7월 30일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로 들어왔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귀츨라프는 복음을 전해주고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감자를 전해준 고마운 선교사로 기억되기를 기대한다.      

원문 : http://www.yanghwajin.co.kr/zboard/view.php?id=forum&no=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