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선교및역사자료]/한국선교역사·자료

감자를 가져온 구츨라프 선교사

기쁨조미료25 2010. 1. 22. 19:44
감자를 가져온 구츨라프 선교사
 

 

1. 첫 번째 파종자 구츨라프

 

서론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이 땅에 "빛이 있으라"(창 1:3)는 하늘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시간은 있었으나 역사는 없었고, 사람은 있었으나 삶이 없었던 어둠의 사천 년이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은자(隱者)의 강산이었던 이 땅에도 하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이 있었기에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게 된 것이다.

순조 32년(壬辰 1832) 6월 20일과 고종 2년(乙丑 1865) 9월 13일, 귀츨라프와 토마스를 통해 주님은 이 땅에 복음의 빛을 하늘 끝에서부터 비추기 시작하셨다. 그들은 이 땅을 위하여 땀과 정열과 피를 흘리며 고귀한 희생을 바쳤으나, 미쳐 준비되지 못한 밭에 뿌려진 씨였기에 쉽게 공중의 새들에게 먹혀 버리고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았다. 길가와 같은 곳에 씨를 뿌리기 위해 헌신한 이들의 수고는 한 조각의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광야의 메아리가 있었던 때로부터 160년이 지난 지금, 역사를 돌아보며 만나게 되는 경이로운 사실은 피어나지 못한 개신교 선교사의 두 번의 "노크"가 모두 황해도라는 특수지역을 통해 들려왔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복음을 받은 의주 사람도 황해도로 내려와 역사적인 민족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아닐는지?

그리고 이 고장의 생긴 모양과 황해도민의 특성도 이런 사명을 수행함에 합당하게 예비하신 것 같다. 서해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장산곶은 창조 때부터 복음의 현관으로 예비하심인 것 같고, 석전경우(石田耕牛)라는 끈기와 인내, 그리고 근면성을 가진 황해도민의 성품은 돌밭과 같이 수천 년 동안 다져진 이 백성의 마음 밭을 진리의 보습으로 갈아엎는데 적합한 성품이 아닐까?

이런 예정이 역사적 현실로 부상하는 사건은 귀츨라프의 전도에서부터 시작한다.

 

1. 첫 번째 파종자 귀츨라프

 

以黃海籃司 金蘭淳狀啓

異樣船之歷過長山, 不卽檢察. 揆以邊情, 極爲疎忍, 不可以事屬過境 <以下略>

이상은 순조(純祖) 31년 (1832년) 8월 11일에 황해 감사가 장산곶 앞을 통과하는 이양선사건을 보고한 장계의 내용이다. 이 외에도 이 배가 황해도를 지나면서 활동한 사실에 대한 기록은 한국정사 도처에 수록되어 있다. 이 일에 대하여 오윤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純祖實錄, 日省錄, 備邊司謄錄, 同反彙考, 通文銘志, 燕事哀直指, 東華金錄 等 記錄을 綜合하여 보면 大略 다음과 같이 要約할 수 있다.

純祖 32年<壬辰> 6月 21日 英國 商船 로-드 암헬스트號가 黃海道 長淵縣 助泥 夢金浦 앞 바다에 와서 머물렀다.

그 배는 英國 東印度會社 마카오 駐在上席管貨人 휴 하밀튼 린드제이(H. H. Lindsay)와 宣敎師 챨스 후레드릭 구츨라프(Rev.Charles Gutzlaff 1803-1851)等이 漁人輩들과 생선과 書冊을 서로 交換한 後 그 鎭의 吏校와 筆札로서 서로 問答하고 가 버렸다. 그들은 南下하여 公忠道 洪州牧 不毛島에 닻을 내리고 碇泊하였다. 28日에 邊吏들이 이들을 古代島 安港에 옮겨 놓았다."

백낙준 박사도 귀츨라프의 도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다.

"山東海岸을 歷訪한 후 배는 한국 땅으로 方向을 돌렸다. 첫 번으로 碇泊한 곳이 黃海道 西海岸 長山串 近海의 白翎群島의 하나였다."

귀츨라프의 황해도 서해안 방문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 것들도 있다.

"그는 많은 성경을 배에 적재하고 가면서 배가 기항할 때마다 전도하였다. 그 배는 산동 지방에서 용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향하였는데 도착한 곳이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長山串) 근해인 몽금포이거나 백령도 중의 한 곳이었다."

"과연 그가 말한 대로 구출라프는 外國宣敎師로서는 우리 나라에 세 번째 들어온 사람이었다.

1594年 壬辰倭亂時 小西行長의 招請으로 熊川 日本軍人 陣營에 왔던 西班牙 사람 세스베데스(Fr. Gregory De Cespedes, 1551-1611)神父가 최초로 이 땅을 밟은 외국 선교사였으며,

둘째로는 1795년 우리 나라 가톨릭 신자들의 招請으로 入國한 周文謨 神父가 둘째번 宣敎師였고,

세 번째로는 1832年 6月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던 구츨라프 宣敎師였으며 그는 우리 나라 基督敎史上 세 번째로 들어온 基督敎人인 同時에 新敎宣敎師로서는 제일 처음으로 韓國 땅을 밟은 牧師였다.

 

1) 출생과 소명

이 땅에 개신교 선교사로 처음 발을 들여놓은 그는 칼 프레드릭 어거스트 귀츨라프(Karl Friedrick August Gutzlaff 1803-1851)라는 굉장히 긴 이름과 호(號)를 가지고 있으며, 이 외에도 매우 다양하게 불려지는 인물이다. 중국명은 郭實獵이고, 號는 愛漢者, 혹은 善德, 善德者이다. 별명은 Keele. 영어 이름은 Charles Gutzlaff.이며, <조선와조실록>에는 甲利로 기재되었다.

그는 1803년 6월 8일 독일 포메라니아(Pomerania)에서 태어난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소년시절은 가세가 어려워 아버지의 마구상에서 심부름을 하며 자랐으나, 프러시아 왕에게 시를 읊어 올린 것이 인연이 되어 17세기 독일 경건파운동의 중심지였던 할례(Halle)대학에서 수학(修學)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1826년 중국 개척선교사 모리슨(Robbert Morrison)에게 감화를 받고 중국선교를 지망하게 되나, 그가 본격적으로 선교에 헌신하게 되나, 그가 본격적으로 선교에 헌신하게 된 것은 1827년 네델란드 선교회에서 네델란드령 자바(Java)의 바타비아(Batavia)와 스마트라(Smatra)에 파견되면서부터이다. 이 때 그는 중국어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1929년에는 본래 목적하였던 중국으로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하여 태국(Siam)의 방콕(Bangkok)으로 선교지를 옮긴다. 이 곳에 있는 동안 태국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중국어 학습에 힘을 쏟는다.

방콕에서 아내와 사별한 후 중국으로 선교지를 옮기려 했으나 네덜란드 선교회가 이를 허락지 아니하므로, 부득이 영국 선교회로 이적함과 동시에 중국 마카오(澳門)로 부임하여 중국 선교의 꿈을 실현시킨다. 그 후 이역 땅 홍콩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20년간을 오로지 중국선교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2) 한국 서해안 전도

1831년 6월, 귀츨라프는 중국 연안 도시들을 항해하는 한 상선의 중국어 통역관이 되어 제 1차 중국 연안 전도를 시도하게 되는데, 약 6개월이나 소요되는 장기간의 전도 여행이었지만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832년 2월 26일에는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중국 연안에 새 시장을 개척하기 위하여 파송한 상선 [암허스트]호(Ship Lord Amherst) 선장 린제이(Lindsay)의 호의로 의사 겸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하게 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서해안을 지나며 전도하게 된다. 그의 두 번째 전도 여행이었다. 그는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근해와 백령군도의 어느 한 섬에 정박하였고, 지방관헌을 통하여 정부 당국과 접촉을 시도하였다고 하나, 그가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역사는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다만 1832년 7월 17일, 충남 장항 앞 창선도에 도착한 이 후 기록한 일기가 남아 있어 그의 활동을 잠시 엿볼 수 있을 뿐이며, 이 일에 비추어 황해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으리라고 추리하는 것 외에는 별로 큰 진전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3) 그의 일기

귀츨라프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832년 7월 17일 거센 바람은 한국이 보이는 곳까지 우리를 몰고 갔다"

이제 그가 한국 해안에 머물면서 활동한 면모를 일기를 통하여 잠시 엿보기로 한다.

"7월 17일, 고깃배를 타고 있는 남루한 차림의 두 어부를 만났고, 그중 한 노인에게 성경과 사자표 단추를 주었더니 매우 좋아하였다."

"7월 25일, 한국 관원의 요청으로 고대도 안항으로 옮겨 정박하였으며, 섬사람들은 신기한 서양배와 서양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는데,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주었다"

때마침 섬 주민들이 유행성 감기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지참한 의약품으로 치료해 주었으며, 섬사람들을 설득하여 감자 재배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영육간 필요한 모든 것을 전해 주는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수행하였다. 그는 섬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편, 국왕 순조에게 통상을 요청하는 서신과 복음서 2종·유리그릇·천리경·시계·단추·서양포 등과 선장 린제이의 요청에 의하여 성경 한 질을 선사하였으나 이 물품들은 곧 반환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 물품들을 재인수하는 것을 완강히 거절하였으니" 당시 홍주 목사는 이것들을 관청 창고에 방치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의 한국 방문 최후의 기록은 8월 17일의 것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천만 가지의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 여러 섬들을 지나갔다.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북위32。 51' 동경126。 234'>는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다."

그가 한국에 머물러 있던 기간은 1개월이 넘는다. 황해도 연안과 고대도에서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며 전도를 하는 한편 국왕에게는 통상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씁쓸한 심정으로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이 땅에 떨어진 개신교 복음의 첫 씨앗은 온기도 없는 어느 관청 창고에 묻혀 버리고 만 것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원문 :  http://cafe.daum.net/IN-CHUN/Bmp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