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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선교열전 - 홀 家

기쁨조미료25 2010. 5. 19. 10:49

이 땅의 선교열전 - 홀 家


윌리엄 홀은 캐나다 벽촌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로 의대를 졸업, 의사가 되었다.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던 중,

같은 병원에서 의사 인턴과정에 있던 로제타를 만난다.


홀을 만나기 전, 로제타는 조선에 의료선교를 위해 실습 중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었던 윌리엄은

중국에 의료선교사로 파송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둘은 약혼식을 올리고, 로제타가 먼저 태평양을 건넌다.

조선에 들어온 로제타는 광혜원에서 일하였고,

윌리엄 홀은 선교지를 중국에서 조선으로 변경하느라

약혼녀 보다 1년 늦은 1891년 조선에 왔다.

이 두 사람의 결혼은 이 땅에서 서양식 혼인 제1호였다.


1893. 11. 11일 아들 셔우드 홀을 낳았다.

이들 부부는 1년 후 평양 선교 개척의 중책을 맡고

아직 채 한 살이 안된 아들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데,

온갖 핍박 속에서도 이들 부부는 의료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다.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으로

선교사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내려올 때

윌리엄 홀은 부상자,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혼자 평양으로 갔다.

불철주야 노력하던 윌리엄은 자신도 전염병에 걸리게 된다.

 

뒤늦게 서울로 와서 아내의 돌봄을 받았지만

1894년 11월 24일 조선 땅을 밟은 지 3년 만에

그리고 아들의 첫돌이 지난 지 십여 일만에 

아내의 품에서 세상을 뜨고 만다.

윌리엄 홀은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존 헤론에 이어 두 번째로 안장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 로제타는 임신 7개월 째였다.


이때, 시모(윌리엄 홀의 어머니)로부터

임신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미국으로 건너오라는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29살의 나이로 남편을 잃고, 미국으로 돌아가 딸 에디스을 낳는다.


로제타는 두 자녀를 데리고,

난생 처음 남편이 출석했던 캐나다의 작은 시골교회를 방문한다.

이때 그 교회는 로제타 방문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환영회를 벌인다.


<조선 선교사로 파송한 우리 형제 윌리엄 홀이

조선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도중 전염병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부인이 아들과 딸과 함께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작은 시골마을,

교회출석을 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여 이들을 환영했다.

어떤 이는 '나는 윌리엄과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참 좋은 친구였어요,'

'우리는 윌리엄 때문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게 됐어요.

우리는 조선을 품고,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120여 년 전,

이 땅을 가슴에 품고

지구 반대편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회가 있었다.

이국땅에 묻힌 사랑하는 아들을 자신의 가슴에 묻고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위해 분에 넘친 선교비를 헌금해 주었다.


이 분들의 사랑과 위로에 감동한 로제타는

사랑하는 남편이 묻힌 땅, 조선을 향해

또 다시 태평양을 건너기로 결심하고

두 자녀를 데리고 1897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우고

직접 부인과장으로 일했다.

또 한 번의 시련이 왔다.

세 살 박이 사랑하는 딸 에디스가 이질에 걸려 죽는다.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헌신은 계속됐다.


그녀는 김점동(나중에 박에스더라고 불림)이라는 한 여성을

미국에까지 데리고 가서 의학교육을 시켰다.

박에스더는 의학공부를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도 개발하여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으며,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병원의 전신이 로제타에 의해 세워졌다.

이 땅에 많은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일에 

남편과 딸을 잃어가면서도 그녀의 헌신은 4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들의 아들,

셔우드 홀은 이모처럼 따랐던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숨지자

이 땅에서 결핵을 퇴치하겠다는 일념으로 캐나다로 돌아갔다.

어렵게 고학으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의사이던 메리언과 결혼하여

함께 한국에 와서 16년 동안 의료 선교를 하였다.

그는 특히 폐결핵을 치료하는 전문가로서

셔우드 홀은 해주에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웠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가정과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는데

셔우드가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이다.

또한 그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환자들을 돕기도 했다.


그는 1940년 크리스마스 씰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등

일제가 꾸민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겨우 풀려나 한국을 떠나게 된다.

한국을 떠나기 바로 직전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인도에 의료선교사로 가라는 서신을 받았고,

그의 가족들은 지체 않고 일본으로 가서 인도로 가는 배를 바로 탔다.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에서 1963년까지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아래에 두 분의 사진과 크리스마스 씰의 사진들을 올렸다.


이분들이 아흔을 훌쩍 넘겨 캐나다에서 은퇴생활하고 있을 때,

한국결핵협회는 이분들을 초청했다.

셔우드 홀은 아버지 윌리엄 홀이 설립한 광성고등학교 채플시간에 강사로 간증했다.

간증을 마치며 말했다.

내가 태어난 곳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힌 땅

내 동생 로제타가 묻힌 땅

내 조국을 단 한 번도 잊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내 조국, 한국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나도 내 조국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의 부부가 캐나다에서 영면했을 때

그분의 유지를 따라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지난주일, 예배를 마치고 이 분들의 기념비 앞에 섰다. 

한국인들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사람들...

유복녀로 엄마 뱃속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미국 땅에서 출생하여 아버지 고향 캐나다를 방문하고,

두 살 나이에 태평양 파도에 배 멀미를 한 달 이상하면서 대양을 건넜으니

이 땅 여명기에 어린 에디스에게까지도 나는 빚진 자로다.


남편의 묘지 옆에 어린 딸을 묻었던 로제타를 떠올려 본다...

<로제타 여사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홀 선생님, 다음에 당신이 계신 나라에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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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http://cafe.daum.net/bluesea5/3AFB/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