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문제제기
일 년에 한번, 칠월 십일에 있는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성막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된 날이다. 이날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께 용서받는 날이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다섯 마리의 희생제물을 준비해야한다. 아론 자신과 그 집안을 위한 한 마리의 속죄제물 숫송아지와 한 마리의 번제용 숫양, 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두 마리의 숫염소와 한 마리의 번제용 숫양이다. 이렇게 준비된 제물로 아론은 먼저 자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숫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속죄소(법궤 위 뚜껑) 동편에 뿌리고,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림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속죄하기 위해 두 마리의 숫염소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잡아 피를 받고, 다른 한 마리는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의 아사셀에게로 보내진다. 나머지 한 마리의 숫양은 대제사장이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 무인지경으로 보내고, 회막으로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두고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번제를 드릴 때 제물로 사용된다.
본 논문은 대속죄일에 드려진 ‘여호와를 위한 숫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숫염소’ 을 본문해석의 방법으로 연구하고,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선배들의 “레위기 강해서”와 성막, 그리고 기타자료와 논문 등을 바탕으로 ‘대속죄일’과 ‘아사셀’의 난해구절을 구속사적 방법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특히 연구자는 타입폴로지(typology)의 관점에서 히브리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실제적인 희생제물과 구속의 완성을 연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무엇인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대속죄일의 두 마리 염소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7-8절)
대속죄일 핵심은 두 마리의 염소1)와 관련된다. 하나는 여호와를 위해 드려졌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것이다. 그 선택은 제비뽑기로 결정된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나가기 전 먼저 자신과 그의 가족을 위하여 숫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성막으로 들어간다. 대제사장은 휘장 안 속죄소로 들어갈 때, 향로에 불과 향을 채워서 속죄소가 보이지 않게 가리어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죽지 않게 해야 한다. 이 때 대제사장은 속죄소 동편에 피를 뿌리고, 속죄소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리리다. 그리고 다시 백성을 위한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똑같은 방법으로 피를 뿌려야 한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면, 대제사장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어 백성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염소에게 죄를 전가시킨다.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보내진다.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은 자신과 회중을 위하여 번제를 드림으로 대속죄일의 의식이 끝이 난다.
1) 여호와를 위한 염소
대제사장이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를 단 귀퉁이 뿔에 바르므로 속죄효과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장소도 깨끗하게 하였다.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2) 그러니까. 지성소와 회막, 번제단을 위해서도 속죄하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오염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소에 거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이 성소에 임재하시기 위해서 장소도 정결케 하는 것이다.3) 그러므로 첫 번째 숫염소는 택한 백성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재하시도록 하기위한 제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아사셀을 위한 염소
두 번째 숫염소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이다. 대제사장은 염소를 놓고서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뽑는다. 제비를 뽑을 때는 우림(Unim)과 둠밈(Thummim)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4) 노트(M.Noth)는 여호와나 아사셀을 위한 이름이나 기호를 표시한 두 돌을 통속에 넣어 추첨한 것으로 기술한다.5) 많은 사람들이 제비뽑아 나누어진 두 마리 염소의 연관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용도 때문에 두 의식의 관련성에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를 펴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아사셀을 들을 수 있는 염소의 우상으로 타락한 천사들 가운데 한 천사의 이름으로 마귀, 마신을 뜻한다.6) 이러한 우상에게 제물을 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두 염소의 연관성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카우프만(Y. Kaufmann)은 “모든 정화예식 가운데서 가장 이방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사셀 염소예식이다”라고 말했고, 아사셀 염소예식은 유대주의 바깥에서 빌려온 것이기 때문에 규범적인 레위기 신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학자들은 아사셀 염소는 레위기적 의미에서의 제물이 아니라고 본다. 즉 아사셀 염소는 죄의 운반자기 때문에 여호와께 대한 제물로는 적합하지 않으며, 그것은 이미 오염되었기 때문에 제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7)
물론 아사셀 염소가 여호와께 드려지는 제물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 할 수 있다. 그러나 레위기 16:5에는 분명히 속죄제물로서 두 마리의 염소를 말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 드려지는 염소와 아사셀에게 보내는 염소는 함께 하나의 속죄제제물을 이룬다. 이것은 아사셀 염소예식이 레위기4장의 속죄제와 별도의 예식이 아니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키우치(N. Kiuchi)는 아사셀 염소예식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제거”한다는 점에서 레위기 4장에서 죄의 제거를 위하여 “태우는 속죄제”의 한 형태로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주장한다.8)
3) 아사셀의 의미
① 악령으로써 아사셀
아사셀(Azazel)은 '쫓겨난 악령', ‘마귀’, '귀신'이란 뜻의 히브리어 '아자젤'이 유음화(流音化)된 것으로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 곧 '사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아사셀을 위하여'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을 참소하던 악한 사단을 향하여 모든 죄짐을 진 염소를 죄의 장본인인 아사셀이 사는 광야로 다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속죄소에서 뿌려진 피는 하나님이 수락 하셨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속죄함을 받았고, 아사셀은 이스라엘백성이 사함 받은 죄를 지니고 보냄은 받은 살아있는 염소가 속죄의 피로 인하여 악령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권세가 사라졌음을 상징적으로 악령에게 선포함을 의미한다.9) 또 다른 의미의 아사셀은 악령을 위해 준비된 제물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을 가지고 죽음을 요구하며 정죄하던 사단을 만족시키기 위한 제물을 의미한다.10)
이러한 해석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애초에 흠정역 번역자들은 아사셀을 ‘인도되어 나가는 염소’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염소가 마귀나 그의 수하격인 악령을 위한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도입된 주장들은 설득력이 없다. 유대 후기의 신학에 있어서, 묵시문학에 속하는 에녹서는 타락한 천사들 가운데 한 천사의 이름으로 아사셀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런 이름을 지닌 악령이 모세의 시대에 존재했는가에 대한 증거는 없다. 에녹의 정교한 귀신론은 후대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며(주전200년 경), 이들 이름은 종종 후기 아람어 형태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들 모두는 성경 기록 이후의 고안된 것이 분명하다.11) 이처럼 아사셀이 악령을 위한 제물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다. 많은 학자들은 두 번째 염소는 도살된 대속물을 근거로 하여, 용서받아 죄가 없어졌음을 상징하는 제거의 의미로 해석한다.
② 제거(除去)로써 아사셀
히브리어 '아자젤'은 '제거하다', '없애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헬라의 번역자들은 아사셀을 고유한 이름으로 간주하지 않고, 구약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은 동사인 아잘(azal)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 단어에 ‘내보내다’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경우 이 히브리 표현의 완전한 의미는 ‘내보내기 위하여’가 된다. 그래서 가장 적절한 설명은 아사셀이라는 용어를 두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인 아즈(az)는 ‘염소’를 의미하고, 두 번째 부분인 아젤(azal)은 ‘떠나다’를 의미한다.12)
대제사장이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정화의식을 수행할 때 성소의 오염은 제게 되고, 안수를 통하여 아사셀에게 전이된다.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13) 이러한 제거의 전이는 ‘여호와 염소’의 연속성에서 ‘아사셀의 염소’를 이해할 수 있다. 성소의 오염과 이스라엘의 죄를 아사셀에게 전이하므로 아사셀은 전이된 죄를 양도받아 제거의 역할을 수행 하는 것이다.14) 여기서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내는 것은 악령에게 바치는 선물이나 제물이 아니다.
그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광야로 운반하는 기능만 담당할 뿐이다. 오히려 이 염소도 피를 제공하는 염소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드리는 정화제물이다. 아사셀은 진으로부터 광야로 보내져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한 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그 의미는 대속죄일에 백성들이 모든 죄가 완전히 제거되어 죄의 힘이 영원히 종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표상이었다고 본다. 이것은 죄가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서 주기적으로 제거되어져야만 한다는 인식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었다.15)
③ 황무지로써 아사셀
또 다른 견해는 아사셀을 광야의 어떤 장소 즉,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황무지’로 보는 견해이다. 아사셀이란 이름은 어떤 활동적이며 인격적인 영적 존재를 가리킨다고 보기 보다는 라이트(D. P. Wright)가 지적한 것처럼 어떤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 비활동적인 “지역 점유자” (place-holder)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레위기 저자가 아사셀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피함으로써, 아사셀이 어떤 숭배나 관심을 둘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16)
④ 이름으로써 아사셀
아사셀은 히브리어로 “보냄이 된 염소”란 뜻을 가지고 있다.17) 아사셀이란 이름 자체가 가지는 의미 즉 보냄이 되었다는 뜻이 아사셀 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름으로써 아사셀은 유대 의식의 전통적인 명칭으로 자유롭게 내어 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18) 이처럼 아사셀은 악령에게 보내는 뜻으로 불리 우고, 죄의 제거로써, 황무지에 버림받은 것으로 불리 우지만, 이름 자체가 아사셀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2. 두 마리 염소의 해석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9-10절)
본문의 해석에 많은 논쟁이 있는 구절은 10절의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찌니라.” 라는 해석이 다양하게 나온다. 감리교 신학대학교 왕대일 교수는 국민일보에 발표한 “아사셀 염소는 속죄의 도구”라는 학술논문에서 구약학자 밀그롬(Milgrom)의 말을 인용해 ‘그것으로 속죄하고’를 대체나 보상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즉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도살되어 죄를 씻거나 정화시키는 제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부정과 죄를 광야나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으로 내다버리는 운반도구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론이 염소를 내보내기 전에 그의 두 손을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얹고 이스라엘의 죄를 염소에게로 떠넘기는 절차를 갖는다고 보았다.19)
계명대학교 구약학 교수인 정중호는 그의 논문 “대속죄일과 아사셀”「구약논단」에서 유대 주석가들과 밀그롬(Milgrom)의 주장을 받아 들여 10절을 속죄제의 마무리 단계의 준비로 본다. 전통적인 유대 주석가들과 일부 현대 학자들에 의하여 대표되는 견해로서 10절의“그것”을 아사셀 염소로 본다. 이러한 주장은 곧 이어서 반복되는 목적어 염소가 아사셀 염소인 점에 근거해서 나온 것이다. 밀그롬(Milgrom)은 사람이 아닌 경우의 염소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것에 대해 정화 예식을 행하기 위하여”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아사셀 염소 자체를 정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서 전체 속죄예식이 마무리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20)
그 밖에 르빈(B.A. Levine)은 “10절은 직접적으로 아사셀 염소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속죄제물로서 황소와 다른 염소를 도살 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는 아사셀 염소는 제사장이 속죄예식에 사용하기 위하여 희생제사의 피의 일부를 취하는 동안 단지 제단 부근에 두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 해석은 10절이 아사셀 염소예식에 대해서만 말하는 점에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21)
그리고 카일과 델리취(C. F. Keil and F. Deltzsch)는 염소를 키페르의 목적어로 해석한다. 그러나 동물은 일반적으로 속죄의 도구이지 목적물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이 구를 서기관의 실수나 개찬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키우치(N. Kiuchi)는 10절과 21-22절을 비교 분석하여 주어의 변화를 통해 전치사의 목적어가 아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속죄일 전체의 예식을 집전하는 제사장은 아론이며 두 염소는 이 예식의 도구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예식을 주도하는 자가 키페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더구나 아사셀 염소가 키페르의 주어가 될 수는 없다.22)
3. 타입폴로지(typology)의 관점에서 본 대속죄일과 아사셀
‘타입폴로지’는 신약이 구약의 완성이고 구약은 신약의 ‘예표’라는 이해를 전재로 삼는다. 구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구속과 심판은 예수그리스도 사건을 가리키는 예표에 해당되는 것이다. 모형론은 구약의 본문이 전하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삼는 것을 추적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앞선 자취를 파악하는 것이다.23) 이러한 모형론을 바탕으로 본문의 모형을 신약의 실제적 속죄사건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루셨는지 알아보자.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속죄일은 일 년에 한 번 드리는데, 성막과 뜰의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속죄소가 있는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가 피를 뿌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특히 ‘두 마리의 염소’는 속죄제사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그 중요성은 신약의 사건으로 입증된다. 매년 일 년에 한차례씩 반복되는 정화의식을 예수그리스도는 단번에 이루셨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24) 제물의 불완전성이 반복되는 제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어 영원한 속죄은혜를 우리에게 주었다.
1) 대속죄일
대속죄일 제사는 두 가지 제사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제사는 속죄제사이고 두 번째 제사는 번제다 이 두 가지 제사를 다 드려야만 죄가 완전하게 해결되며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정결해 질 수 있다. 그런데 대속죄일 제사를 드리는 과정을 살펴보면 두 가지 제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첫째는 대제사장 자신을 위한 속죄 제사가 있고, 둘째는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사와 번제가 있다.
대제사장 자신을 위하여 제사를 먼저 드리는 이유는 대제사장 역시 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죄인의 신분으로 정화의식을 실행할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을 위한 제사를 드려 정결케 된 후 백성들을 위한 제사를 드려야 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병행하거나 짝을 이루기보다는 서로 대조적이거나 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25) 이러한 모형론을 바탕으로 모형적 속죄제사와 실제적 속죄제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대속일의 ‘두 마리의 염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알아본다. 대속죄일의 제사는 필수적으로 준비 되어할 할 조건이 있다. 첫째는 속죄제물이고, 둘째는 대제사장이고, 셋째는 뜰과 회막이다.
① 여호와를 위한 염소, 아사셀을 위한 염소
대속죄일의 속죄제사에는 속죄제물이 숫염소 두 마리였으나 신약시대의 실제적 속죄제사의 제물은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26) 예수그리스도는 흠 없는 속죄제물이 되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7)
대속죄일의 속죄제물은 숫염소가 두 마리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실제적 속죄제에서 속죄제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일인이역 즉 두 마리 숫염소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은 십자가에서 능욕을 받으며 참으신 것이 산체로 광야의 무인지경에 내어버린 것과 같은 것이고,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로는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 중에 하신 말씀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8) 라고 절규하시면서 버림당하실 때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을 감당하셨고, 옆구리를 창에 찔려 피를 흘리시며 죽으실 때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29)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느니라.”30) 이처럼 예수그리스도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과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을 동시에 감당 하셨다.
② 세 가지 견해
첫째, 아사셀은 악령세계의 최고 통치자 사단으로 아사셀은 사단을 위한 속죄 제물로써 율법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제물이다. 이러한 해석은 오리겐의 속상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지옥에 들어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이시고 산체로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심으로 지옥 형벌을 받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31)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도들이 받아야 할 저주의 지옥 형벌을 면제받게 해 주셨다는 뜻이다. 즉 사단은 율법의 요구대로 죄인에게 사망을 요구하는데 예수님이 정죄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버림 당하므로 죄의 대가를 지불 했다는 뜻이다.32) 예수님이 사단을 위해 죽었다는 이러한 주장에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도 여호와를 위한 염소와 동일한 속죄 제물이기 때문이다.
둘째,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의 완전한 구속이 되신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비록 속죄제였지마는 살아있으므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났느니라.”33)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회중 앞에서 사죄함 받은 죄를 담당하고 끌리어 나갔던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것이다.34) 이러한 죽음과 부활론은 여호와를 위한 염소와 아사셀의 염소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을 모형이라는 것이다.
셋째,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짊어지었고 여호와의 임재하신 곳에서 제거함을 나타낸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옮기셨으며”35) 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겨 버리셨다는 뜻으로 아사셀을 위한 염소에게 안수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제거함을 모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36)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도 아니 하시고 멀리 내쫓아 버리셨다는 뜻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역할을 십자가상에서 담당하셨다는 주장으로 이것은 죄의 제거를 의미한다.
③ 언약과 피의 관계
피는 새 언약의 표이다. ‘언약의 피’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이다. 이 언약은 피의 언약으로써 구약시대 죄인들을 대신하여 소, 염소, 양과 같은 짐승이 흘리는 피가 언약이었으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언약이 되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37) 고대에는 한 언약의 표시로 피를 흘리는 일을 행하였다.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다.38)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할례를 행하게 하여 피를 흘리게 하였다.
새로운 언약도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골고다 언덕에서 피 흘리신 예수의 피가 새 언약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표가 된다. 이러한 피 흘림을 우리는 성례전에서 늘 기념하고 있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39) 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피는 성도들의 영혼을 살찌우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적은 자양분이 된다. 이것은 약속으로 이루어진 영원불변한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징표이다. 또한 피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약속의 표이다.
④ 피와 죄 사함의 관계
대속죄일의 정화의식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과 죄를 위하여 속죄소 동편에 피를 한번 뿌리고 속죄소 앞에 피를 일곱 번 뿌렸다. 왜 하나님을 위한 속죄제물은 피로써 드려야 하는가? 성경은 죄 사함을 받으려면 피 흘림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40) 구약의 모형에서 나타났듯이 예수님도 실제적 사건에서 동일하게 피뿌림의 정화의식을 행하셨고, 우리에게 죄 용서함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41) 이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고 의롭게 만드는 보배로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42) 이처럼 정화의식에서 피는 죄와 부정을 깨끗이 씻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를 의미한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피 뿌림의 제사를 드렸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림은 성전의 휘장을 찢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43)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힘입어 무슨 죄든지 하나님 앞에 가지고나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대제사장
대제사장 자신도 죄인이므로 대제사장으로써 정화의식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대속죄일의 속죄제사에서 대제사장은 먼저 자기를 위하여 속죄하는 제사를 드렸다.44) 신약의 실제적 사건에서 예수님은 의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나타난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고, 선지자들을 통해 에언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다.45)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 하도다.”46) 이처럼 예수님은 아론의 불완전함을 쫒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쫒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야만 된다는 것은 ‘새로운 언약’의를 성취하시기 위해서다.
3) 성막의 속죄소에 피 뿌린 속죄의 은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과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셨는데, 이 두 가지 사명을 동시에 감당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성막은 천국의 모형으로, 모형적 속죄제사에서 대제사장이 성막을 들어가 성소의 속죄소에 피를 뿌린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사 천국의 속죄소에 들어가 피를 뿌리심으로 속죄의 은혜를 완성해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때는 속죄제물로서의 사명만 수행하신 것이고, 성막의 속죄소에 피를 뿌려야 할 대제사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속죄일의 속죄제를 드릴 때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성막의 속죄소로 들어간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피 묻은 몸을 가지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즉 속죄소에 들어가신 것을 의미한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레위인들과 장로들에 의해 준비된 속죄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뿌린 것 처럼, 실제적사건에서는 그릇에 담아서 천국으로 가지고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언약 피의 증표를 가지고 부활 된 몸으로 승천하신 것이다. 그리고 대속죄일의 속죄제사를 드릴 때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성막으로 들어가서 피를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없게 하였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천국의 속죄소 즉 하나님의 보좌에 피를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없게 하신 것에 대한 모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피를 뿌린 다음에 성막에서 세마포의 의관을 벗고 나옴으로 속죄제사를 드리는 과정이 끝난다. 이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피를 뿌려 준비하신 죄 사함의 은혜를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공급하시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강림하신 사건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Ⅲ. 마치는 말
고금을 통하여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죄의 문제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인간의 죄나 혹은 육체적 부정으로 인하여 성소가 오염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제사장은 희생동물의 피를 성소와 성물에 뿌리거나 바름으로써 성소를 정화시켜 하나님의 거처가 정결한 거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대속죄일의 속죄제 예식의 의미도 동일하다. 특별히 이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고의적인 죄로 인하여 오염된 지성소를 정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대속죄일에 지성소, 회막, 그리고 제단이 정화되었고, 제사장들과 모든 이스라엘 공통체가 속죄되고,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제거된다.
아사셀 염소가 악령의 이름으로 알려진 아사셀에 바치는 제물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께 드리는 속죄제물로 간주된다. 아사셀 악령으로 인정받거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인지경인 광야를 의미하는 비인격적이며 비활동적인 상징적 존재로 나타날 뿐이다. 또한 아사셀 염소 예식에서 염소가 담당하는 역할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아사셀 염소가 이러한 기능을 담당함으로서 대속죄일 정화의식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속죄일의 정화의식은 예수님께서 신약의 실제적 사건으로 그대로 이루어 영원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다.
영원한 대 제사장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부활의 예수님은 승천하신고 우리에게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연약한 우리를 도우신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감동, 감화하시어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갈 수 있도록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해 주신다. 필자는 본 논문을 준비하면서 속죄제물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었고, 실제적사건에서 속죄제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다시한번 감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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