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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1의 직분

기쁨조미료25 2009. 10. 21. 21:17

에베소서 4:11의 직분

 

에베소서 4장11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직분에 관한 어의적 용법
(헬라어가 깨진상태이오니 해량바랍니다)
이하에서 살펴보는 것은 사도시절의 용법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의 목사를 보통 포이멘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이덕휴목사 識 -

- ajpovstolo(652, 아포스톨로스, 사도 apostol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아포스톨로스(Lysias, Demosth.)는 처음에는 동사적 형용사로 사용되었으나 후에 명사로 사용되었다.

(a)  아포스톨로스(ajpovstolo", 652)는 '보내다'를 뜻하는 동사 아포스텔로(ajpostevllw, 649: 보내다)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기본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b)  아포스톨로스는 고전 헬라어에서 처음에 해양 언어로 발견되는데, 화물선이나 보낸 선단, 후에는 원정 함대의 함장이나 해외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나 원정대, 또는 일단의 식민 개척자들을 의미하였다.

(c)  아포스톨로스는 헤로도투스의 두 구절에서만 한 인격으로써 '사절, 대사, 특사'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그는 Alyattes가 Miletus에게 보낸 사자와 같은 메시지의 전달자를 말한다(1.21).

(d)  아포스톨로스는 파피루스에서 나일강의 배로 운반되는 정부의 곡물 창고로부터 알렉산드리아로 보내는 곡식의 선적량을 지시하는 공식 서류인 나타내는 전문 용어이다. 아포스톨로스는 여권, 안전 통행증, 또는 심부름꾼이 떠나려 할 경우의 출국 허가서(P.Oxy. 1271; 참조: Strabo 2.3.5), 수출 면허장을 말한다. '여권 없이 승선한(알렉산드리아에서) 사람에 대한 법적 조치가 장관의 관할 하에서 취해진다'는 규정이 있었다(Gnomon of the Idios Logos 162).

2. 70인역본 및 구약 등의 용법.

(a)  아포스톨로스는 70인역본에서 왕상 14:6에 한번 샬라흐의 역어로 나오며,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신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아히야의 임무를 서술하는데 사용되었다.
대하 17:7-9에 의하면 이 보냄을 받은 자들은 단순한 사절이 아니라 책임있는 직무, 즉 어떤 사람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를 말한다. 그의 행위는 "보낸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점에서 당사자(보낸 사람)과 그 대리인은 동일하다: "어떤 사람의 샬리아흐는 그 사람 자신과 같다. 그러므로 사자는 자신에게 사명을 준 사람의 대리인이 된다(참조: 삼상 25:40 이하; 삼하 10:4, 6). 사자나 그에게 사명을 준 사람의 인격에는 관계 없이 그리고 심지어 임무에도 관계 없이 샬리아흐라는 말은 '전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한다(참조: W. Schmithals). 이 규칙이 종교적인 영역에까지 적용된다. 샬리아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할 때 그것은 아브라함,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Midr. Ps. 78 5; 173b)에서처럼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는(b. B. Mes. 86b) 것과 같다. 랍비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들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행하는" 하나님의 샬리아흐로 생각했으며(b. b. Qidd. 23b; 참조: Rengstorf), 속죄의 날에 그들은 대제사장을 "하나님 앞에 있는 백성들의 대표자"로 불렀다(m. Yoma 1. 5; m. Git. 3.6). 회당 기도회의 인도자는 공동체의 샬리아흐였다. 랍비들은 고국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을 시찰하고 결집시키는 산헤드린의 대리자로 보냄을 받았다. 다른 한편 미쉬나와 탈무드에서 샬리아흐는 공동체를 대표하여(m. Ros, Has, 4.9), 그의 선거인들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약성경의 사도의 의미에 영향을 주었다.

(b)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사명을 받고 파송된 사절단에 대하여 사용하였다(로마에 보낸 유대인들).

(c)  아포스톨로스는 아마도 후대 영지주의적 계통에서 신적 계시의 중재자로서의 '사자'라는 동방적인 개념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들의 학설에서 그 단수로는 '천상의 구세주'를, 복수로는 '수많은 구원자들' 즉 '영적인 사람들'을 표현하는데 사용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포스톨로스는 신약성경에서 80여회 나타난다.

(a)  신약성경에서는 고전 헬라어의 경우와는 달리,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이 오직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무엇보다 하나의 특정한 직무 즉 원(原) 사도직에 대한 확고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눅 6:12-눅 6:13,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고, 그의 삶을 함께 나누고, 그에게 속한 제자들 중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그를 대표하고, 그와 보다 더 친밀하게 교제하고, 그럼으로써 특별한 권한을 가지게 될 열 두명을 선발하셨다. 그 당시에는 단지 샬리아흐라는 단어 자체가 그들이 합당한 권세를 지닌 사절이나 대리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 그들의 역할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 역할에 대해서는 막 6:7에서 잠시 동안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전도를 위해 보내실 때에 말씀하신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그들)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참조: 마 10:1-마 10:2). 사도들은 그들이 배치될 때에 예수님의 엑수시아(권세)와 함께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준비되었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의 본질적인 특성을 보게 된다.

(b)  사도는 경건한 사람이며 예수님에 의해 다른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어 부름받은 자이다; 이것은 사도는 예수님의 처지를 공유하고 그의 재산과 그의 직업과 그의 가족을 포기하며, 그의 잔을 마시고(마 20:23) 이와 함께 주님께서 받으시는 세례(침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막 10:39)을 포함한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셨다"(행 1:2; 참조: 요 15:16; 요 15:19)고 주장한다. 바울은 항상 대리자로서의 그의 권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즉 소명에 의한 사도(롬 1:1)이다.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문구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고전 1:1; 고후 1:1; 골 1:1; 엡 1:1)이다. 속격 크리스투(벧전 1:1)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명백히 설명되고 하나님의 뜻(델레마)으로 보강된, 소유와 기원에 대한 속격(참조, 롬 1:5)이다. 사도의 사명의 합당함을 위해 더 이상 확실한 근거는 있을 수 없다: 그 위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갈 1:1) 것이다. 이러한 위임은 공적이며 영속적이다.

(c)  사도는 본래 어떤 누군가에 의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어진 사람이다. 그 목적은 다소 세속적일 수 있다; 대리자나 대표로서 '아포스톨로스는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요 1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요 13:20). 한 사람이 살리아흐를 대하는 태도는 실제로 보낸 사람을 향한 것이다. 사도의 사명은 우선 첫째로 전도하는 것이지만 또한 교회들을 세우고(고전 9:2), 죄를 용서하며(요 20:23), 성령을 전하고(행 8:18), 집사를 안수하고(행 6:6), 장로들을 세우는 것(딛 1:5)이다. 만약 필요하다면 다른 청중도 열거된다: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보내어지고(갈 2:7),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진다(롬 11:13; 참조, 고후 10:13-고후 10:16).

(d)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의 이러한 역할을 위해서는 사도에게 능력과 권위가 부여될 필요가 있다(눅 24:49; 살전 1:5).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과 마귀를 억제하는 엑수시아(권세)를 주셨다. 그리스도의 후계자 또는 대리자로서 사도들은 순회하는 전도자로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닌 공동체의 우두머리로서 살아간다: "사도들로 인하여, 보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고후 6:7)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행 2:43; 행4:33; 행 4:37; 행 5:12).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만 전하였기 때문에(살전 2:13-"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것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약속들이 매우 신뢰할 만한 것임을 증명한다 (벧후 3:2; 유 17). 그들은 이것을 깨닫고 있었으며(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의 능력의 증거"가 함께 했다[고전 2:4-고전 2:5;참조, 행 4:7-행 4:33]), 비록 그들이 만물의 페립세마("찌꺼기")로 여겨진다 할지라도(고전 4:13) 그들 스스로 지도자에 어울리게 처신한다. 그들은 특별한 특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이다(요 13:12-요 13:17; 눅 22:25-눅 22:27).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최고의 계급이다. "거룩한 사도들은"(엡 3:5; 계 18:20)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진 자들이므로 아포스톨로스는 영예로운 칭호이다("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9];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살전 2:6]).

(e)  신약성경에는 높은 사도들이 있고 두 번째 가는 지위의 사도들이 있다.
① 누가는 열 두 제자들을 사도로 알고 있다: 눅 6:13("열 둘"). 마 10:2은 열 두 사도를 열거한다. 막 3:13-막 3:19에서 셈족의 어투로 된 '에포이센 도데카'(문자적으로 '열 둘을 만드셨다')는 참으로 예수님 자신께서 새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기 위해 열 두명의 성직자회(college)를 세우셨다는 것을 확증한다. 이들은 그가 소유하신 능력을 부여받은 대리자, 대표, 전권 대사들이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참조: 눅 10:16; 마 10:14). 교회를 다스릴 때에(참조, 마 19:28; 눅22:28-눅 22:30), 쿰란(Qumran) 공동체를 다스리던 "열 두 사람과 세 명의 제사장"보다 나은 이 사도들은 "기둥들"(갈 2:9), "유명한 자들"(갈 2:2; 갈 2:6)이며 영원히 지속되도록 세워진, 그리스도와 연합한 정통 신앙의 재판관이자 보증인이다. 그들은 "어린 양의 십 이 사도"들이다(계 21:14).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사도직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골 1: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디모데는" 하며, 그의 서신을 시작한다. 여기서 바울은 그 말의 가장 높은 의미, 곧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주장을 공포한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던 12제자들의 반열에 선 사도로 간주한다.
바울은 최초의 12 사도에 속하는 사도가 아니다. 사도직의 자격 중 하나는 예수님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도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었다(고전 9:1; 고전 15:8-고전 15:9).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사도직을 입증할 기적적인 능력을 주셨다(고후 12:12; 히 2:3-히 2:4). 그가 세운 교회들은 그의 사도직에 대한 봉인이 되었다(고전 9:2). 그리고 그의 몸에는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은(고전 15:10), 표적인 예수님의 흔적이 있었다(갈 6:7).
제자들의 특별한 경험과 비교할 때 바울도 복음 전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직접 개인적으로 보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행 26:15-행 26:19; 갈 1:11-갈 1:17).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서 축복하고 다스리심의 인격적 경험이 입증하는 특권에 그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에 대한 선택된 증인들인 원 사도들과 동등함을 주장한다.
바울의 전(全)기독교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실제로 나타났었던 그 경험과 확신 위에 세워졌다. 다메섹 도상에서 본 그 환상은 그의 생애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의 주님을 보고 주님의 입술로부터 그의 임무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그의 사도직과 그 권위에 대한 주장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 관한 묘사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묘사하는 반면 디모데를 "형제"라고 묘사한다(참조: 롬 16:23; 고전 1:1; 고전 16:12). 이것은 일반적 의미로 디모데가 사도이지만(참조: 살전 2:6), 그러나 바울과 동일한 사도가 아님을 나타낸다(참조: H. M. Carson).

바울은 그의 서신의 서언에서 항상 그의 사도적 권위를 말하지 않았다. 그의 최초기 서신, 곧 데살로니가에 보낸 서신들에는 이러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즐거운 서신에서 그는 그의 권위를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아무도 그것을 전에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레몬에게 보낸 개인 서신에서 우정은 최상이며, 그가 말한 것과 같이 매우 대담하게 명령할 수 있을지라도, 그는 도리어 간청하며 사도로서 명령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자로서 호소한다.
그는 그의 다른 서신들에서 그의 사도권에 관한 언급을 골로새서처럼 전면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할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사도권과 그 토대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한 것임을 매우 강하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다른 어떤 곳에서 반대를 받은 것보다 더 반항적인 반대를 받았던 것이다.
한편 골로새서의 경우 그가 자신의 권위를 그렇게 강력히 주장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하는 말이 주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위를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초대 교회 당시에 활동하였던 한 위대한 선교사 개인의 견해 이상의 권위를 갖게 된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그리스도의 대변자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러한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 그 말씀을 단순한 인간 바울의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사도 바울의 말,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는 선포에 포함된 사상은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에, 사도로서 너희에 말한다. 나는 나의 결정(의지)이나 나의 공로로 말미암은 사도가 아니다 나는 사도라 칭함을 받을 가치도 없다. 너희들과 같이 초라한 죄인이며, 하나님은 순전한 자비와 사랑의 이적으로 이 입에 그의 말씀을 두셨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전하는 말씀은 나의 것도 아니고 어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숨결이 음악을 만드는 깨진 파이프에 신경을 쓰지 말고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메시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권위에 대한 단호한 주장은 깊은 겸손과 연합되어 있었다. 소수의 기독교 교사들은 바울 처럼 강직한 성격을 가지거나 계속적으로 두드러진 경험을 가진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말씀에 수반되기를 기대하는 영향력은 전적으로, 자기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있는 것이다.

② 다음으로 아포스톨로스는 '보냄 받은 자' 곧 '사자'(使者)라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된 실례는 적지 않다. 고전 15:5-고전 15:8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은 열 둘(제자)에게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시고 맨 나중에 나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열 두 제자들 다음에 언급한 이들 아포스톨로이(사도들)는 신적으로 사역자로 임명될 수 있으며 교회의 공적인 성직자들 중에서 첫 번째로 명기된 카리스마를 지닌 자들인데(고전 12:28-고전 12:31; 엡 4:11), 성직과 은사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익명으로 한 것은 행 15:4; 행 15:6; 행 15:22; 행 15:23; 행 16:4에서 막연한 교회와 관계가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의 경우와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울의 협력자인 바나바(행 14:4; 행 14:14; 고후 12:7)와 에바브로디도(빌 2:25). 디모데와 실루아노(살전 2:6), 디도(고후 8:23)와 사도들 중에서 유명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같은 특별히 열심있는 전도자들을 알고 있다.

③ 항상 불충성한 청지기가 있는 것처럼 편견으로 굳어진 유대인 그리스도교 전도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사도의 칭호를 자랑하고 그들의 명성을 선전하였으니, "지극히 큰 사도로" 여긴 것이다(고후 12:11). 이들 "지극히 큰 사도들"(고후 11:5)은 "거짓 사도들"이다(고후 11:13). 에베소 교회는 그들의 정체를 밝힘으로 칭찬받는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2:2).

(f)  히 3:1에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고 말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아포스톨로스라고 묘사한 유일한 구절이다(before Justin, 1 Apol. 1.12). 아마도 여호와의 천사, 사자, 광야를 지날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한 안내자(출 14:19; 23:20, 23; 32:34; 33:2; 민 20:16), 그의 백성을 위하여 사람의 형상을 입으신 하나님의 돕는 자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 그들 가운데서 선택받았으나, 아들처럼 하늘에서 오신 자가 아닌 모세와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리스도가 최초의 으뜸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은 받으신" 분이라는 요한복음의 전통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요 17:3; 요 17:18; 요 20:21; 요일 4:10).
요 9:7의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를 주목하라. 그 복음서 기자는 운하 또는 물을 "보내는"을 의미하는 명사 살르아흐(실로암)를 수동 분사로 표현하여 그것을 고유의 이름으로 간주하고(참조, 사 8:6이하; 창 49:10, 히브리어 실로; 창세기에서 메시아에 대한 해석으로 주어짐. Rab. 98.13; 99.10; Tg. onq.), 그 이름을 "보내신 이", 즉 예수님에 대해 환칭으로 사용한다(요 3:17; 요 3:34; 요 5:36; 요 7:29). 더욱이 히 3:1에서의 사도와 대제사장과의 결합은 예수님의 신성한 사명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표하고 믿는 자들에게 변호를 위임받은 자, 변호자(요일 2:1), 샬리아흐가 되며 하늘의 지성소에서 그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중보하는 것이다(요 14:13-요 14:14). 그의 "사도직"은 그의 영속하는 제사장직이다.
(참조: C. SpicQ, TLNT; C. Brown; K. H. Rengstorf).


- profhvth"(4396, 프로페테스, 선지자, 예언자 prophet, 선포자 proclaime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로페테스(Pind., Hdt. 이래)는 항상 종교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는 어간 페(말하다, 선포하다)와 시간의 부사로서 '앞에, 미리, 사전에, 앞당겨'를 뜻하는 접두어 '프로'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것은 예언하는 사람, 미리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헬라 사상에서 예언자는 요약하면 신탁에 의하여 고용된 사람이며, 직접적인 영감으로 또는 소리나 징조를 해석함으로, 조언을 구하는 자에게 신들의 뜻을 선포하는 자이다.
신탁 예언자들의 실례로 텔피 신전의 프로페테스 집단이 있다. 델피의 무녀(Pythia)는 땅 위에 나 있는 구멍 위 삼각 제단 위에 앉아 있었다. 이곳으로부터 연기의 형태를 띤 "신탁의 영(프뉴마 만티콘)이 올라오며 그녀에게 영감을 준다. 이것은 월계수 잎(아폴로의 나무)을 씹음으로서 더욱 고조된다. 예언적 광란 상태로 흥분되고 다음에 신이 그를 통해 말하는 프로페테스(여자 예언자)가 된다. 그래서 그녀는 글롯솔랄리아와 유사한 수수께끼 같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터뜨리게 된다.
프로페테스는 난해하게 언급된 말들의 해석자로서 역할을 담당한다. 프로페테스는 델피의 무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흥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판별력을 행사한다. 델피의 무녀는 아마 암호들로 말할 것이지만 프로페테스는 이 암호들의 형태를 제시하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전달한다. 신탁의 신 아폴로는 제우스의 참된 만티스(선견자)이며, 대변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디오스 프로페테스라고 부른다. 시인들, 애굽의 상류 계급의 사람들, '질문을 유도하는 자들, 철학을 가르치는 자들, 과학의 전문가들' 등이 프로페테스라는 명칭을 지니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프로페테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이상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나비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나비는 '대변인, 말하는 자, 선지자(예언자)'를 뜻한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기능에 대하여 학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은 계시들을 말하는 것(무아경 상태에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강조점은 나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의사 소통의 받아들임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로페테스는 신약성경에 약 14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의 프로페테스의 의미.
신약성경은 선지자를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메시지의 성경적 선포자로 이해한다. 벧후 2:16에서 발람을 선지자로 언급하며(참조: 민 22:18; 민 24:1), 단 한번 이방인 그레데의 시인 에피메니데스는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 선지자로 불리운 것이다(딛 1:12). 성경의 선지자는 성령이 그에게 전달한 계시 때문에 미래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할 수 있고(행 11:28), 사람의 과거를 알 수 있으며(요 4:19), 그가 만나는 자들의 마음을 통찰할 수 있다(눅 7:39).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술사나 점장이가 아니다.
선지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이다.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책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프로페테스는 선지자들의 기록을 의미하기도 한다(눅 24:27; 눅 24:44; 행 8:28; 행 12:15; 행 24:14; 행 28:23; 행 7:42; 요 6:45; 행 13:40). 혹은 그들의 책에 진술된 가르침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마 5:17; 마 7:12; 마 22:40; 눅 16:29; 눅 16:31; 행 26:27).

(b)  구약성경의 선지자들.
① 구약 선지자들이 신약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마 3:3; 마 4:14; 마 8:17; 마 12:17; 마 13:14; 마 15:7; 막 1:2; 막 7:6; 눅 3:4; 눅 4:17; 요 1:23; 요 12:38; 행 8:28, 행 8:30; 행 28:25), 또한 사무엘(행 13:20), 다윗(행 2:30), 에녹(유 14절), 엘리사(눅 4:27), 예레미야(마 2:17), 다니엘(마 24:15), 요엘(행 2:16), 요나(마 12:39), 호세아(마 2:15), 아모스(행 7:42; 행 15:15), 미가(마 2:5), 하박국(행 13:40), 스가랴(마 21:4)에 관한 구절들 및 벧후 2:16의 발람 등이다.
② 구약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에서처럼("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입'으로 묘사되었다(행 3:18; 행 3:21; 렘 15:19). 마태는 이 공식 문구로 이를 표현한다: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마 1:22; 마 2:15). 하나님이 마 2:17; 마 2:23 등에서도 수동적인 구문 뒤에 계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자이시며,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롬 1:1이하). 혹자는 베드로전서에서 하나님과 하나인 선재하시는 주님을 가리키기 위해, 선지자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언급한 벧전 1:11을 지적한다(참조: A.T.Hanson).
히 1:1에 의하면 하나님은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선지자들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방편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베(be)에서 유추하여 엔(en)이 사용되었으며, 선지자가 하나님의 하나의 방편으로서, 공개적 선포자로 묘사되어 있다.
벧후 1:21에서 선지자들은 성령의 도구들이다. 벧전 1:11에서 선재하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마 13:35은 아마 동일한 결과에 관한 것이며, 또한 요 12:38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사 53:1의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하여 불만을 표현하셨다.
③ 구약 선지자들은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앞서 선포한 자들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모든 예언은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요 1:45; 행 3:24), 그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신다(고후 1:20).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출생(마 1:23), 애굽에서의 귀환(마 2:15), 침례 요한의 사역(막 1:2), 부활의 이면(눅 18:3이하), 오순절(행 2:16), 재림(벧후 3:2), 심판(유 14 - 유 15절) 및 새로운 질서(행 3:21)를 예언한다. 이스라엘에 의한 배척도 역시 예언된다(막 7:6). 수난과 부활이 그들의 메시지의 핵심이다(마 26:56; 눅 24:44이하). 단지 하나님 혹은 성령만이 예언적 약속을 사도적 복음이 되게 하는(롬 1:1-롬 1:2) 예언의 참된 이해를 제공한다. 바울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만을 말한다(행 26:22-행 26:23). 예언적 말씀들은 그들 자신들의 시대와 관련된 것이지만(참조: 마 2:15; 호 11:1; 호 2:17-호 2:18과 렘 31:15; 막 7:6과 사 29:13), 신약은 성취의 조명을 받아 그 묘사에서 예언을 바라본다.
④ 구약 선지자들은 신약을 위하여 미래 사건들을 예언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의 진리를 지지하는 권위자들이다(참조: 막 11:17; 요 6:45). 선지자들의 말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자들이었고(행 7:42),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거한다(행 7:48).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용서를 선포한다(행 10:43). 그들은 이방인들의 교회 영입을 정당화 시킨다(행 15:15). 안디옥에서 바울은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유대인들에게 경고했다(행 13:40).
⑤ 신약성경은 종종 선지자들이 박해와 처형 당함에 대해 언급한다(마 23:31; 마 23:37의 격언, 병행구, 눅 13:34). 행 7:52에는 선지자들의 살해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에까지 윤곽을 그려놓았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순교가 선지자의 개념에 절대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마 23:35). 예수님은 배척받은 선지자들의 선에 서 있는 자로서 자기 자신을 내 놓으셨다. 이들에 대한 배척은 바로 악의 최고조를 기록한 것이었으며,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이끌어 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의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를 중에서 정점에 이른 인물이었다(마 23:35; 눅 11:51). 아벨(창 4장)이 그 첫 번째 인물이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구약성경 정경의 마지막 책 끝 가까이에 나온다(대하 24:20이하). 이 스가랴는 베레갸의 아들인 스가랴와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슥 1:1). 제자들은 이 점에서 선지자들의 후예들이다(마 5:12; 참조: 약 5:10).

(c)  세례(침례) 요한.
요한은 신약성경에서 줄곧 선지자라 불리운다(막 11:32; 마 11:9; 눅 1:76; 요 1:25). 이것은 그가 심판과 회개에 관한 보다 과격한 예언적 설교를 주도하여 나갔다는 사실에 의하여 정당화된다(암 9:7이하; 미 3:12; 렘 7:3이하; 렘 26:1이하). 그의 설교는 도덕적인 개선과 유태인들의 종교적인 자만을 겨냥하여 행해졌다. 그의 세례(침례)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개종자의 세례(침례)도, 혹은 쿰란 공동체에서 행하여지던 세례(침례)도 아니었으며, 개심의 증거이며 구원의 인(印)이라 할, 종말론적인 회개의 성례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요한이, 구원의 시대를 가지고 올 것으로 기대되었던 종말론적인 선지자로 여겨졌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그릇된) 견해를 막으면서, 그를 종말론적인 선구자(참조: 마 3:1이하; 마 11:11이하; 마 14:2이하; 마 16:14; 마 17:13; 막 6:25; 막 8:28; 눅 7:20; 눅 7:33; 눅 9:19), 혹은 예수님의 "증인"(요 1:6이하)으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의 세례에서 기독교의 세례를 지적한다(O.Cullmann; J.Jeremias; C.H.H.Scobie; W.Wink). 예수님은 요한이 선지자 이상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마 11:9).

(d)  예수 그리스도.
신약성경에서는 이따금씩 예수님을 선지자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은 백성이거나(막 6:15; 마 21:11등), 혹은 사마리아 여인(요 4:19)과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요 9:17)과 같은 개인들이다. 제자들은 예수 안에서 선지자의 모습을 본다(눅 24:19; 행 3:22).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선지자로 묘사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명한 것이라 할 눅 13:33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 할만 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아마 속담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들보다 더욱 위대하다(마 12:41). 왜냐하면 그는 구원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져왔기 때문이다(벧전 1:10이하; 눅 10:24). 그리스도는 신 18:15의 의미에서의 그 선지자로서 소개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참조: 행 3:22이하; 행 7:37이하; 마 2:1 - 마 2:23; 마 4:1 - 마 4:11; 마 5:1이하; 요 6:14; 요 7:40).

(e)  사도 시대에 그리스도인들 중에 나타난 선지자들, 마 10:41; 마 23:34; 행 15:32; 고전 14:29; 고전 14:37; 계 22:6; 계 22:9.
그들이 사도들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눅 11:49; 고전 12:28, 고전 12:29; 엡 2:20; 엡 3:4; 엡 4:11; 계 18:20.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위한 최선의 것을 분별하고 행하였다. 행 13:1 이하.
그들은 어떤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였다, 행 11:27이하; 행 21:10 이하.
예언하는 자의 영은 예언자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에 성령의 자극이 그들의 자아통제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고전 14:32.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서 성령에 갑자기 붙잡혀서 성령이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들과 청중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책망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고무시키는 힘을 가진 그러한 것들을, 황홀 상태에서도 지성적인 언어로 발설한다, 고전 14:3; 고전 14:24.
(참조: Walter Bauer; J.H Thayer; C.Brown; G.Friedrich).


- eujaggelisthv"(2099, 유앙겔리스테스, 복음 전도자0

1. 헬라어 용법.

명사 유앙겔리스테스는 유앙겔리조(eujaggelivzw, 2097: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복음 전도자,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유앙겔리스테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복음 전도자'를 의미한다.

(a)  행 4:11에서 빌립에 대해 사용되었다.

(b)  딤후 4:5에서 디모데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c)  엡 4:11에서 한 무리의 복음 전도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복음 전도자들은 헬라인들의 경우처럼, 신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참조: 롬 10:15). 이 용어는 사도들도 행한 한 기능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든 복음 전도자들이 사도인 것은 아니며, 이 기능은 세 가지의 모든 언급 가운데 사도들의 기능보다 낮은 것이다. 이 용어는 선교적 선포 뿐만 아니라 회중적 선포도 나타낸다(참조: 딤후 4:5). 초대 교회에서 복음 전도자들은 사도들의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이 단어는 또한 복음서의 저자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Friedrich).


- poimhvn(4166, 포이멘,목자 shepher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명사 포이멘은 인도- 유럽어(참조, 리투아니아어, 피에무오[piemuo])로, '목자'를 의미하며, '통치자, 지휘자' 등 비유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된 것이다(Homer, Plato). 이 단어는 또한 '율법 수여자'란 뜻의 노메우스(nomeus) 대신 쓰이기도 한다(E. Beyreuther).
또한 신들도 목자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아문(Amun)은 그의 가축을 보호하는 강력한 몰이자이다.

(b)  플라톤(Plato)이 도시국가의 통치자를 양떼를 돌보는 목자에 비유한 것은 이 단어의 종교적인 용법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인간인 목자는 신(神)인 목자와 율법수여자의 부본(copy)이기 때문이다.

(c)  고대 동방에서 초기의 목자들은 신들이나 통치자에게 적용한 영예의 호칭이 되었다. 이러한 관용법은 수마리아 왕의 명부와 바벨론 궁정 칭호, 그리고 피라밋 원문들(죽은 자에 대한 책들)에서 상투적인 문구로 발견된다. 이 관습은 고대를 통해 계속 지켜졌다. 그것에 대등한 특성은 이방의 가나안에는 나타나있지 않다. 목자상에 대한 용례의 일면은 테오크리투스(Theocritus)의 이딜스(Idylls : B. C. 3세기)에서 전형적인 예를 보였듯이 시(詩)에 나타난다. 목가적인 용어들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매우 유행하고 있었다(E.Beyreuther).

2. 70인역본의 용법

포이멘은 70인역본에서 약 75회 나오며, 라아(풀을 뜯기다, 돌보다, 지키다)의 역어로 사용되어, 주로 '목자'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실제적인 목자, 그리고 비유적으로 하나님, 다스리는 자들, 메시야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포이멘은 신약성경에서 18회, 공관복음에 9회, 요한복음에 6회,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 에베소서에 각각 1회 나타난다.

(a)  실제적인 목자에 대한 언급은 눅 2:8-20에 있는 탄생기사에만 나타난다.

(b)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약속된 구세주 목자이시며, 이를 세가지 방법으로 주장한다.
① 예수님은 목자없는 무리를 돌아보심으로 그의 사명을 시작하신다(마 9:36; 막 6:34; 참조: 겔 34:5).
② 예수님은 그의 양떼를 위해 먼저 죽어야 하고(마 26:31; 병행구, 막 14:27), 다시 살아나야 한다(참조: 마 26:32; 막 14:28). 여기서 예수님은 슥 13:7에 나오는 말들을 인용하여, 자신이 구약에서 고대하던 약속된 목자, 즉 그의 대신 죽음으로 인해 구원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목자라고 주장한다(참조: 사 53장).
③ 하나님의 백성인 양떼가 선한 목자 아래 모이는 구원의 시대는 심판의 날에 그 절정에 이른다. 모든 민족이 그의 영광의 보좌 주위에 모여들 때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분별하실 것이다. 그는 심판의 자리에 앉으실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선교 사명의 시대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래 그의 양떼들이 열방으로부터 불러모아질 것이다(마 25:32).

(c)  요 10:1-요 10:30(요 10:2; 요 10:11; 요 10:12; 요 10:14; 요 10:16)에서 선한 목자는 한편으로는 도둑과 비교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과 비교된다.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며, 그의 양은 그의 음성을 알고 기꺼이 그를 따른다. 전형적인 요한의 방식대로 이 목자와 그의 양떼 사이의 독특한 관계가 설명되고 있다. 이 독특한 관계는 목자가 스스로 그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삯군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삯군은 위험한 때에는 달아난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요 10:11-요 10:12).
목자가 그들의 주님(퀴리오스)을 나타내듯이 가축떼(포임네, 요 10:16) 또는 그의 모든 양떼(프로바타)는 그의 백성을 나타낸다.

(d)  ① 벧전 2:25에서 예수님은 목자, 영혼의 감독자이시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25은 다시 목자와 그의 양떼의 이미지를 돌아보고 있다: 예수님은 목자시며, 영혼의 감독이시다.
② 히 13:30에서 그리스도는 그 편지의 주제에 따라 모세를 포함한 모든 원형을 능가한 단 한분의 큰 목자(포이멘 메가스)이시다.
③ 엡 4:11에 나오는 직책의 목록에서 포이멘은 '목회자'를 나타내는 듯 하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여기에 포이메네스 카이 디다스콜로이, 즉 "목사와 교사"는 문법상 두가지 직책이 아니라 한 직책이다. 목회자인 교사, 그러면 '목사'라는 번역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칭호는 당시에 공식 칭호가 아니다. 왜냐하면 벧전 5:1과 행 20:17에서 지방의 기독교 단체의 지도자들은 프레스뷔테로이(장로)라고 불리웠으며, 행 20:28에서는 에피스코포이(감독)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할은 벧전 5:2-벧전 5:4과 행 20:28; 요 21:17(양떼들의 영적 행복에 대한 관심) 등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마 18:12-14과 마 12:30(눅 11:23; 길잃은 양을 찾아다님) 역시 관계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이 그들의 양떼에게 값진 모범이 됨을 보여야 한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E.Beyreuther; J.Jeremias ).


- didavskalo"(1320, 디다스칼로스, 교사 teache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명사 디다스칼로스(Homer 이래)는 디다스코(didavskw, 1321: 가르치다)로부터 유래한 작위명사(nomen agentis)로서, '교사, 가정교사'라는 의미로 헬라어 문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예: Homer,Hymnus ad Mercurium 554이하; Aesch., pv llO 이하; plato, Prt. 326 c; Epictetus, Enciridion l7).
이 단어는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교사, 철학자, 그리고 공연을 위해 시가를 연습시켜야 하는 합창단 지휘자를 칭할 때 사용되었다. 시인은 그의 활동이 합창하는 시(詩)든 비극이든 자신에 대해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처음부터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요소가 강하였다. 여기에 기술의 가르침과 소질 계발도 특별히 포함된다. 이 단어는 지식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일에 정식으로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두루 지칭한다. 보기로 필로는 이 단어를 율법을 전해준 모세와 나병에 관해 가르치는 제사장 뿐만 아니라(Gig.54)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Rer.Div. Her. 1O2 등등) '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두 경우에 그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b)  디다스칼로스의 특성이 그 용법에 끼친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교사의 활동이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디다스칼로스라는 단어는 자주 그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에 따라 더욱 엄밀하게 정의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왜 소크라테스가 이 단어를 거부하고, 에픽테투스가 이 단어를 받아들이고, 70인 역본이 대부분의 경우에 이 단어를 기피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 플라톤의 변증(Apologia, 33ab)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진술들이 구속력 있는 체계로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는 지적인 것을 경멸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을 이것을 초월하여 도덕적 행동에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모든 사람을 위해 행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학파 형성을 거부하였다.
- 반대로 에픽테투스는 디다스칼로스로 일컬어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학계의 교사로서 자기의 추종자들이 완전해지도록 돕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완성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선생이라고 실제로 자처하였다(Dissertationes 1. 9. 12).

2. 70인역본의 용법.

7O인역본에서 디다스칼로스는 단지 2회 나온다. 에 6:1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읽는 자'(reader)이고, 넓은 의미에서 아마도 내시들의 교육을 맡은 시신(slave)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카베오이서 l:10에서 이 단어는 이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여기에서 마카베오 공동체는 대제사장 가문들 중의 한 가문에 속하고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수령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게 글을 쓰고 있는데, 그를 프톨레미 필로메터 왕(King Ptolemy Philometor)의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 그 칭호는 그 왕이 수여한 것이 아니고 아리스토불루스가 그 왕에게 모세오경 주석을 헌정한 일에서 그것을 해석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부여한 것이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그 왕에게 율법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왕의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율법 교사를 의미하는 용법은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해 왔던 이 단어의 여러가지 의미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이나 필로의 용법(디다스칼로스를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 또는 가정교사로 의미하는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및 히브리어 동사 라마드에 기초하고 있다. 이 라마드는 '배우다, 가르치다'를 뜻하며, 그 목적으로 '실천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70인역본에 이 단어가 드물게 사용된 이유는, 히브리어 성서의 번역자가 헬라적 칭호인 디다스칼로스는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만이 아닌 것같다. 디다스칼로스에 상당하는 히브리어 모레(1475)도 역시 드물게 사용된데다가 그나마 단 한번 잠 5:13에서 분사 디다스코(가르치는)로 번역되었다. 그밖의 다른 구절에서 이 히브리어 단어는 플라논테스(유혹자, 사 30:20에서 2회), 플라사스(조각가, 합 2:l8), 브로마다(음식, 욜 2:23) 따위의 다른 단어로 번역되었다. 구약성경에 이질적인 것은 '교사' (teacher)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 개념이다. 그 까닭은 구약성경이 지식의 전달보다는 율법에의 복종을 더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유대교에서 랍(rab) 또는 랍비(rabbi)는 토라를 해설하며  율법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을 과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탈미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제자들은 스승의 성경 해석과 판단을 공부하며 스승을 존경하고 그에게 복종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보통 자기 선생을 랍비(나의 선생님)라고 불렀으며 접미어가 붙은 이 어형이 바로 주후 1세기에 오직 공식적으로 임명된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만 사용되었다(참조: K. H. Rengstorf; K. Wegenast).

3. 신약성경의 용법.

1. 디다스칼로스의 용법.
(a)  명사 디다스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58회 나온다. 그 중 48회는 복음서에서 나온다(요 8:4을 계산하지 않는 경우).
①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에 대해 41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29회에서 예수님을 직접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엇다.
② 그리고 7회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 눅 3:12에서 백성들이 요단 강변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침례) 요한을 "선생"이라고 부른다.
요 3:10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신다. 눅 2:46에서는 "선생들 중에 앉으사"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 소년 예수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끝으로 마 10:24 이하와 눅 6:40에는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선언이 언급되어 있다.
③ 복음서의 용례와 그밖의 모든 용례에서 그 용법은 서로 일치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기 기독 공동체에서 주도적인 집단인 디다스칼로이에 관한 언급들이다(행 13:1; 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
딤전 2:7; 딤후 1:11에서 기자는 자신을 디다스칼로스 에드논 혹은 단순히 디다스칼로스라고 부른다.
다른 세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본문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롬 2:20; 딤후 4:3; 히 5:12).

(b)  신약성경에서 디다스칼로스의 용법을 통해 드러나는 첫째 요점은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로 지칭될 때 이 용어가 퀴리오스(kuvrio", 2962)와는 달리 어떤 위엄의 속성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다스칼로스가 요한에게(눅 3;12), 혹은 성전에 앉아 있는 디다스칼로이에게(눅 2:46), 혹은 심지어 거짓 교사들의 무리에게(딤후 4:3) 적용된 것은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었을 때조차도 분명한 한 사실만을 나타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하여 한편으로 요한을 지칭하고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지칭할 때 누가가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결코 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임은 복음서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아주 쉽게 알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가장 잘 알 수 있다.
예수님 자신(마 10:24 이하와 병행구)이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선생)를 대조하신다. 전자는 그의 목적과 한계 양자 모두를 후자와의 비교를 통하여 배워야 한다. 이것으로 예수님께서 랍비의 생도와 그 스승과의 관계를 묘사하며, 자기와 자기의 추종자 사이에 실재하는 관계에 적용한다. 요 3:10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셨을 때 문맥은 특별한 철학적 능력을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사람들이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탁월한 해석자로서 그를 존경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그를 예우하시는 것이다.
눅 3:12에서 세리들이 세례(침례)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마음이 움직여 세례(침례)를 받고자 할 때 요한에게 이렇게 묻는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그 호칭과 질문 양자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요한의 지식에 근거하여 요한이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가장 모호한 언급은 눅 2:46의 다디스칼로이이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그러나 여기서 디다스칼로이도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볼 때 율법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들에 답하는 일을 하는 서기관들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복음서의 네 다섯 구절에서는 용법의 일관성을 가진다. 이 단어는 그 의미의 내용이 림메드(가르치는)에서 파생한 70인역본과 신약성경의 디다스케인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환언하면 디다스칼로스는 '토라로부터 하나님의 길을 지시하는 자'이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이 디다스칼로스로 묘사될 때 동일한 용법이 어디까지 적용하는지 고찰해야 하고,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용어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이 복음서에서와 같은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2. 디다스칼로스로서의 예수님.
(a)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의 디다스칼로이의 모습과 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디다스코(didavskw, 1321)의 용법에서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기본적으로 그의 가르침의 형태와 내용 두 면에서 서기관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때때로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디다스칼로스가 되는 것은 디다스칼로스 주변에 모이는 제자들이 있다는 특징을 요구한다.
예수님과 요한의 경우에(요 1:35 이하)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감동을 받아서 스스로를 생도와 제자들의 위치에 두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 디다스칼로스로서의 결정적인 조건이 외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으며, 그들을 디다스칼레라고 불렀으며, 그들을 백성들의 교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다스칼레라는 호칭이 실제로 이러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요 1:38에서 입증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이 구절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랍비로 부르는데, 이 형태의 호칭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디다스칼레로 번역하였다(참조: 랍부니, 요 20:16).
예수님은 또한 마 26:25, 막 9:5, 막 11:21, 요 4:31, 요 9:2, 요 11:8에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요 3:2에서 니고데모에 의해, 요 1:49에서 요한의 제자들에 의해, 요 6:25에서 열광적인 군중에 의해, 마 26:49, 막 14:45에서 체포 당하실 때 유다에 의해 랍비로 불리운다. 하지만 디다스칼레가 교사를 가리켜 모호하지 않게 사용되는 반면에 랍비는 어떤 지위가 높거나 고귀한 인물에게 적용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 용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복음서는 매번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랍비의 생도들과 교사들(masters)의 관계에 일치하며 군중들이 예수님을 교사들에게 상응하는 존경으로 대했음을 분명히 한다. 제자들을 마데타이(히, 탈미딤)로 묘사하고 아콜루데오(ajkolouqevw, 190: 따르다)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애착(attachment)에 대해 사용한 것은 후기 유대교의 어법을 따른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그를 섬기는 방식은 당시의 관습과 일치한다. 생도는 랍비의 신발을 가져오고(T. Neg. 8, 2), 필요할 때 그를 도우며(bJeb., 42b), 그 앞에서 길을 준비하고(bket., 63a), 그의 나귀를 몬다(T. Chag., 2.1). 더 후기의 언급에서는(bkeb., 96a; R. Joshua b. Levi, c. 250A.D.) 신발을 벗기는 것 외에도 종이 주인에게 행하는 모든 일들을 생도가 그의 주인인 교사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발을 씻기는 것도 포함되는지는 특별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제자들이 서로에게 행해야 할 일들 가운데 포함된다고 하셨으며, 위대한 랍비들이 유사한 경우를 당했을 때와 같이(예: 12:30에 대한 S. Dt., 38) 그들로부터 동일한 종류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요 13:8) 친히 본을 보여 주었다(요 13:1 이하).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젓는 일을 하였으며(막 4:35 이하 및 병행구), 또 무리를 먹일 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막 5:37 이하 및 병행구; 막 8:6과 병행구). 그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당나귀를 얻어왔으며(막 11:1 이하) 유월절을 위해 준비하였는데(마 26:17 이하), 이 일에는 종종 노예들에게 맡겨진 어린양을 잡는 일도 포함되었다(참조: Pes., 8, 2). 이 모든 것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위치가 진실로 당시의 디다스칼로스, 생도들 가운데서 랍비의 위치와 같았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이와 같이 대접한 것은 비단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 군중들도 이런 식으로 그를 영예롭게 하였다.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교사를 심지어 부모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둔다. 교사는 자기 아버지보다 앞에 설 뿐만 아니라(BM, 2, 11), 만약 교사가 아버지라면 아들 앞에 선다(bQid., 33b). 아키바(Akiba)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 학교에서 왔을 때 장인과 아내가 그의 발에 존경의 입맞춤을 하였다고 한다(bket, 63a). 또 이스마엘(R. Ishmael)의 어머니는(d. c. 135) 그의 아들이 회합을 마치고 와서 그녀가 사용한 물을 마시고자 했을 때 아들의 발을 씻기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제 5 계명에 근거하여 이것을 금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것을 금하는 것은 사실상의 위반으로, 이 행위에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그녀 자신이 영화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jPea, 15c, 41 이하).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 받은 후 예수님께 행한 봉사(마 8:15)와, 물질로 예수님을 섬기고 따른 여자들(눅 8:3; 참조: 마 27:55와 병행구)이나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눅 10:40)가 예수님께 행한 봉사는 위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이것은 식탁에서 섬기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으나, 그것이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영예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되며 위대한 랍비들의 경우에서 유사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노선에 따라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예수님 당시의 관습에 일치하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게 적용된 디다스칼로스는 후기 유대교의 랍비와 명백히 연관된다.
요세푸스는 디다스칼로스를 초보 교사에 대해 사용하지만, 또한 율법을 연구하는,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연구하도록 이끌고 그것으로부터 행동의 규칙을 취하는 자들에게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Vit., 274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의 사자들은 그들이 단순히 그의 동료 시민들이지만 그의 디다스칼로이라고 자랑한다.

(b)  예수님에게 적용된 호칭 디다스칼로스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에서도 디다스칼로스, 랍비로서의 새로운 비범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백성들의 귀와 눈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과 그 구속력있는 능력을 향해 열게 했을 때 취하신 방법은 평범한 방법이었다.
예수님은 또한 인정을 받으셨다. 심지어 서기관 무리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참되시며(ajlhqhv", 227)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지적해 내셨다는 인정을 받았다(마 22:16과 병행구; 참조: 막 12:32; 요 3:2). 만약 교사로서의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어떤 반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의 집단으로부터 규정된 교수 과정 내지는 인정된 권위를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요 7:15; 마 13:35과 병행구).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는 그의 죽음을 초래한 갈등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힐렐과 샴마이 같은 학파를 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토론 방식을 통하여 서기관들과 함께 그의 차이점에 대해 토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노선에 따라 그의 견해를 확립하려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어떤 걸림돌을 제공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럭저럭 견디어 인정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을 취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위임하신 대의(cause)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예수님은 힐렐과 샴마이의 견해와 맞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인간의 대의(cause)로 삼았다.
예수님은 논의할 수도 없었고 논의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고 그에 대해 듣고 그를 만난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감동을 준 절대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통적인 형식과 선포를 넘어서서 새로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노선을 다시 취한 그 점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는 선지자 이상이신 분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시의 보수적인 종교와 인간 중심적인 도덕률에 반대하여, 선지자들의 아마르 예호와(여호와의 말씀), 네움 예호와(여호와의 말씀)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내가 오직 너희에게 말한다"(에고 데 레고 휘민)고 하시며, 이것은 일개 대변자로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이신 그의 뜻의 책임있는 담지자로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음을 청중들에게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노모스(movno", 3441: 율법)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처음으로 친히 성취하시는 자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밝히시고 또 그것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제공하기까지 하신다(마 5:17; 마 5:20). 왜냐하면 그는 아들(The Son)이시기 때문이며, 요한의 말대로 그의 가르침은 그람마테이스와 기타의 가르침과 다르기 때문이다. 형태와 내용상 유사한 것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까지 있었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c)  따라서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될 때, 그의 인격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 받게 된다. 우리는 감히 이 단어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인상지운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모세는 율법을 국가적 한계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 양자 모두를 나타내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을 위해 필요한 방을 구할 때 디다스칼로스가 누구인지 지적해주는 자세한 지칭 없이 호 디다스칼로스 레게이라는 문구로 충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마 26:18과 병행구). 또 예수님의 죽음 이후 디다스칼로스라는 명칭을 제자들이 전유하지 못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도들과 같이 성경 연구를 직업으로 한 그러한 유대교 집단의 새 지도자가 랍비/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이상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 용어는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도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나중에 폴리캅이 종교적인 의미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했다면(Mart. Pol., 12, 2; 16, 2; 19:1), 그의 시대의 교사들과 첫 시대의 교사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후자에게는 마 23:8의 완전한 규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과 나란히 혹은 예수님 아래 어떤 종교적 권위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만이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께로부터 알려지게 되었을 때 "모세의 제자"라는 것 조차도 잘못이다(요 9:28). 예수님은 완전한 디다스칼로스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모세가 그 안에서 자신이 성취되었다고 보는 그 분이시다(요 5:45 이하). 따라서 구원을 찾는 인간에게 유일한 가능성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게 귀기울이는 것이요 그의 마데테스가 되는 것이다.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선포에서 이 칭호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말씀(어록)의 집합체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독교 메시지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과 조화를 이룬다. 단지 기독교의 지성화의 발전과 더불어 비로소 다시금 디다스칼로스인 예수님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제 이 용어는 처음의 제자들에게 지녔던 랍비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고 철학적인 학파의 창설자라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비록 여전히 절대성에 대한 주장의 개념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후기 사도 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Barn. 2, 6에서 예수님은 카이노스 노모스를 가져오셨다고 하며, 2Cl. 3.1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중보자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디다스칼로스라는 용어는 Ign. Eph. 15, 1에서만 발견된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는 변증가들에서만이 디다스칼로스의 자리를 부여받는다(참조: Just. Apol., I, 4, 7; 12, 9; 13, 3 등).


3.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이

우리가 사도행전(행 13:1)과 서신들에서(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 그리스도인 디다스칼로이를 읽을 때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교 및 후기 유대교 용법을 벗어나거나 헬라 세계로부터 조명을 구할 필요가 없다.

(a)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이 구절에서 만일 이 서신이 초기의 것이거나 랍비 유대교의 범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상황은 가장 분명하다. 그 경우 이 단어는 분명히 율법의 올바른 이행을 가능케하는 율법 해석자를 나타낼 것이다. 문제는 그 가정(assumptions)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서신에서 헬라 용법을 제안할 만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소피아는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실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분명 헬라적 성격을 가진다기보다 랍비적이기 때문이다.
히 5:12에는 이미 "교사"가 된지 오래이지만 아직도 믿음의 초보를 배울 필요가 있는 기독교인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딤후 4:3에서 이 단어는 이단자들에게 풍자적으로 적용된 듯하다.

(b)  고전 12:28에서 디다스칼로이는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자들의 목록에서 아포스톨로이(사도들)와 프로페타이(선지자들)를 뒤이어 세번째의 카리스마적 직책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직책을 맡은 사람들의 과업은 기독교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주고 구약성경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참조: K. Wegenast).
엡 4:11의 유사한 목록에서는 아포스톨로이, 프로페타이와 유앙겔리스타이 뒤에 나오며, 포이메네스(문자적으로 '목자들')와 함께 분류된다.
행 13:1에서 그들("교사들")은 프로페타이("선지자들")와 함께 언급된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유대교 출신이며, 따라서 율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선지자는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메시지의 성경적 선포자로 더욱 영적인 자들을 가리킨다(참조: 고전 14:29 이하; 행 11:28). 디다스칼로이는 그들의 보다 더 분명한 해석으로 회중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서신들의 디다스케인에서 역시 그러하듯이 동일한 유대교 및 초기 기독교 용법이 적용된다.
엡 4:11에서 공통 관사가 디다스칼로이와 포이메네스를 동일한 것으로 분명히 가리킨다면 이것은 격의 성격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포이멘은 공동체의 생활에 책임을 지는 자들이며, 따라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 디다스케인은 그의 직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전 12:28 이하와 엡 4:11의 목록에는 계급의 서열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디다스칼로스의 활동은 아포스톨로스와 프로페테스의 활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망과 양식을 세우기 위한 토대를 놓을 때에 필요하다. 최초의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스는 이와 같이 후기 유대교의 하캄(현명한) 혹은 소포스(지혜로운, 현명한)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의 일은 공동체 영역 내에 놓여 있다. 따라서 엡 4:11에서 아포스톨로이와 최초의 세대 전체가 교회의 삶으로부터 사라지기 시작할 때에 포이메네스와 디다스칼로이가 선교의 책임을 새로이 맡은 유앙겔리스타이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상황은 최초의 복음서에서와 아주 흡사하다. 여기서 예수님은 믿음을 일깨우는 유앙겔리스테스로 처음으로 나타나고(마 4:12 이하, 마 4:23 이하) 그 다음으로 비로소 디다스칼로스로 나타난다(마 5:1 이하). 그것은 초대 교회, 그리고 특히 바울의 통찰력의 표시이다. 교화의 문제에서 그들은 이 점에서 예수님의 본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일단 고전 12장과 엡 4장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딤전 2:7과 딤후 1:11은 분명히 이해된다. 케뤽스("전파하는 자")가 유앙겔리스테스(복음 전도자)를 대신하고, 디다스칼로스로 아포스톨로스의 이중 역할을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에 대한 높은 감각을 보며, 또한 똑같이 바울의 전형적인 사역에 대한 강한 인식을 본다.
한 면에서 다스림에 대한 랍비적 주장이나 다른 면에서 지식에 대한 헬라의 주장에 대해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기자가 딤후 2:7에서 자신을 "이방인의 스승"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그의 사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c)  초기 교회의 용법은 사람들과 관련된 초기 기독교의 용법과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Did의 본문 구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디다스칼로스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이집트 교회에서의 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는 고전 12:28 이하의 교사와 매우 다르다. 교회는 지금 알렉산드리아의 지혜의 침범을 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필로에서와 같이 이 지혜를 표현하고 가르치는 자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할 것을 채택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최초의 기독교 교사의 활동의 연속이 아니라 헬라 제도를 기독교화된 형태로 교회 속에 도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초기 변증가들과 교사들의 임무는 기독교를 조리있게 소개하고 변호하는 것이었다. 이 교사들 중에서 행한 기독교의 지성화와 신앙은 예수님과 바울 및 초기 교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위해 전력을 하여 반대한 바로 그것을 재소개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불행한 일이다.
(참조: K. H. R. Rengstore; K. Wegenast).

 원문 : http://cafe.daum.net/fgbc/6QHZ/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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