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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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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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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C. H. Spurgeon의 생애 Ⅲ. 스펄전의 신학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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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출생과 성장 1. 기도관 ?
? 2. 회심과 최초의 설교 2. 성경관 ?
? 3. 그의 목회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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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스펄전의 사상 결 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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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상적 배경 ?
? 2. 청교도의 사상 참 고 문 헌 ?
? 3. 청교도의 설교와 스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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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으라. 그리고 성경에 더하여 읽고다 한다면 위대한 사도, 챨스 스펄전의 책을 읽도록 하라”고 로버트슨 니콜(W. Robertson Nicoll)은 말하였다. 스펄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았으며 또 항상 그것을 되풀이 하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분명히 하시고자 했던 것은 어떤 것이든지 모두 스펄전의 과제였다.
스펄전의 성공적인 이야기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불과 16세때부터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고 교회 역사상 어느 설교가보다도 많은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이러한 스펄전의 생애와 그의 신학사상등을 본 소논문을 통하여 연구해 봄으로 스펄전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Ⅰ. C . H . Spurgeon의 생애
1. 출생과 성장
C. H. Spurgeon은 1834년 6월 19일 영국의 에섹스(Essex) 지방 캘비던(Kelvedon)의 작고 초라한 회중교회 목사관에서 홀란드계 혈통의 아버지인 존 스펄젼 목사와 어머니 엘리자(Elize) 사이에서 1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지 10개월도 못되어 그의 부모가 콜체스터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불편한 환경때문에 18개월이 못되어 생애의 아주 귀한 성장시기(1-6세)를 스텐버런(Stambourne) 독립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할아버지 제임스 스펄젼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모든일에 엄격하시면서도 교인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부드럽고 신중했다. 그는 항상 긴 시간의 명상을 하면서 설교를 구상하였고, 많은 시간을 서재에서 보내면서 각 방면의 수 많은 책을 참고하여 설교를 준비하였다 이를 스펄전은 어려서부터 조부 곁에서 지켜보았다.
조부의 어두운 서재에는 수많은 청교도 서적들, 순교자들의 전기, 경건 서적들이 많이 있었는데 스펄젼은 마치 금광에 들어가는 광부처럼 서재에 들어가 감추인 보화를 찾아 읽기 시작하였다. 그가 가장 심취한 책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었는데 그때의 감격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천로역정을 백번이상 읽었다.
일곱살 때 그는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의 정신 연령은 나이에 비해 훨씬 앞서 있었다. 그후 스펄전은 청교도 서적들을 닥치는데로 읽었다. 그의 성장기에 영향을 준 책들은 Baxter의 “비회심자에 대한 부르심”, 제임스의 “갈급한 탐구자”, Fox의 “순교자의 책”, Doddridge의 “심령 속에서의 종교 발달 및 발달과정”, Alleine의 “죄인들을 위한 종소리” 그리고 천로역정은 물론이고 로빈슨 크로소의 저서 등이었다. 그는 7세때부터 15세까지 줄곧 콜체스터에 있는 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2. 회심과 최초의 설교
그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마음에 평안을 얻고 그 영혼이 굴복한 날은 폭설과 폭풍이 몰아치는 주일 아침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권면해 준 콜케스터 교회를 찾아가던 중 거센 폭설로 말미암아 근처의 가까운 교회로 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때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이 교인 15명 정도의 작은 감리교회였다. 눈보라는 목사의 도착을 방해했고 그 예배는 평교인중 한 사람이 인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평교인은 성경 이사야 45장 22절을 펴고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란 말씀을 읽었다. 그 서툴은 설교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그 설교자는 강단 밑에서 많이 비어있는 좌석 중에 외로운 모습으로 앉아 있는 젊은 스펄젼을 발견하자 실마리를 찾았다는 듯 젊은이! 당신은 몹시도 불안해 보이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영원히 불행할 것이요.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오”라고 외쳤다.
스펄전은 그 순간 예수를 바라보았다.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았다. 젊은 스펄전은 아주 극적으로 결정적 회심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스펄전은 믿는다는 것과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매우 논리적으로 어렵게만 생각해 왔으나 그 순간 그저 예수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암흑에서 광명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의 즉각적인 이전이었다. 그 회심 자체가 기적이었고 또한 16세 소년에 대한 기적들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그 경험은 스펄젼의 성격과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고 그의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스펄전은 16살 되던 1950년 영국의 캠브리지 근처 테버샵에 있는 한 농가에서 그의 첫 설교를 하였다. 그는 청중들을 웅변의 힘으로 깜짝 놀라게 했으며, 예배가 끝난후 그의 나이를 묻는 사람에게 한 그의 대답은 유명하다. “저의 나이보다는 제가 전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더 신경을 쓰십시오”
3. 그의 목회활동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스펄전은 16세에 그의 첫 설교를 하였다. 그는 18세에 캠브리지의 위터비치에 있는 침례교 회중교회의 목사로 초청 받았고 2년 후에 런던에서 그의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내에 이전까지만 해도 텅비었던 그의 예배당인 “뉴파크 스트리트 교회”(New Park Street Church)는 꽉차 넘치게 되었다. 청중을 사로잡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이 젊은 천재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군중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건물인 “메트로폴리탄 성전”(Metropoli-
tan Tabernacle)을 지어야 했다. 이 성전은 6천개의 좌석을 갖추고 완성되던 1856년부터 1892년 스펄젼이 죽을 때까지 줄곧 가득 채워졌다. 이 성전이 건축중이었을 때는 “서레이 가든즈 뮤직 홀”(Surrey Gardens Music Hall)에서 1만명의 청중들에게 설교하였으며 1857년 10월 27년, 그의 나이 겨우 23세때 “크리스탈 플러스”(Crystal Palace)에서 2만4천명의대회중에게설교했다. 그는 34년의 목회 기간 중에 천만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펄전은 회중집회에 심혈을 기울인 한편 여러 종류의 목회도 수행해 냈다. 그는 후에 유명하게 된 목회자 대학인 ‘스펄전 대학’을 설립하여 수많은 복음주의 사역자들을 훈련하는 책임을 수행해 냈다. 그는 가난한 소년 소녀들의 보호와 교육을 위한 스톡웰 고아원을 세웠다. 그는 종교서적 장려협회를 만들어서 저속한 문학서적으로 감염된 나라의 독서 수준을 향상시켰다. 그는 교회사상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인쇄된 설교집을 집필하였다.
확고한 칼빈주의자였던 그는 침례회 연맹이 교리적 측면에 있어서 몇몇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침례교 연맹이 자유주의 노선으로 기울어져 가는 현상을 공격하였고 이로인해 교단 분열을 예상하게 된 스펄젼은 오랬동안 몸 담았던 교단을 떠났고, 이어 유아 침례문제로 성공회와 논쟁하였다. 그의 강한 개성은 확신 넘치는 일 앞에서 결코 침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계속되는 회중 설교, 독서와 출판 그리고 벅찬 논쟁들로 인해 드디어 50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루 18시간을 활동하던 스펄젼은 심한 중풍으로 인한 프랑스 전지 요양 중 58세 되던 1892년 1월 31일 저녁 11시 5분 휴양지 멘톤(Mentone)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심히 일했고 그의 활동은 열매를 거두었으며, 그가 미친 세계적 영향력과 명성은 언제까지나 그의 이름과 함께 기억될 것이다.
Ⅱ. 스펄전의 사상
1. 사상적 배경
스펄전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시대적 배경은 무엇보다도 청교도 운동이었음을 그의 조상들과 경건서적들을 통하여 찾아 볼 수 있다. 청교도 운동의 기원은 훨씬 전이기는 하지만 예배방식 통일법령(The Act of Uniformity)이 있었던 1559년 경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1662년 “예배방식 통일법령”에 뒤따른 수난과 영국 교회로부터 대추방을 당하게 되었으나 더욱 발전하였고, 1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영국의 청교도 운동이 일단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영국의 종교개혁은 유럽대륙과는 달리 국왕이 주도하면서 정치운동으로 시작하여 종교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18세기까지 종교적, 문화적 규범으로써 비국교주의, 경건주의, 합리주의 등으로 명목을 유지하였고, 그 결과 19세기까지 이르러 청교도 서적들에 심취해 있던 C. H. Spurgeon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2. 청교도의 사상
16세기의 청교도 사상은 너무 많고 다양한 인물들과 사상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한 복잡성을 띠게 되므로 이것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사상으로 부를 수 있는가가 의문시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rauer교수의 청교도들에게 일반적으로 공통되는 4가지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그것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의 종교개혁에 대한 견해와 로마 카톨릭의 신앙해석에 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
2) 이러한 불만은 개인의 깊고 철저한 신앙체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3) 이같은 개인적 체험을 근거로한 불만이 일상생활의 모든 방면에 대한 교회(Ecclesiastical Vestments)의 사용에 있어서 개혁의 열정을 나타나게 했다는 점.
4) 그들의 체험을 체계화하고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계약신학 (Covenant Theology)을 사용하였다는 점 등이다.
Brauer교수는 이상과 같이 청교도의 특징을 논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관계, 즉 개인체험 문제의 중요성을 청교도 사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와같은 청교도 사상을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관계에 선행되는 사상으로 제시할 때, 여기에는 몇가지의 부수되는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진정한 교리와 바른 생활의 유일한 근거로써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충성이다. 이것은 청교도에게 있어서 종교적 신경(Creed)이 아니고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자의 전인격을 조정하는 생활철학이었다. 그들은 과학이나 논리, 철학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경건훈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학문적 탐구의 영역에서 영화롭게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과 과학의 조화가운데 있는 것으로 믿었다.
한편 그들은 Francis A. Schaeffer가 말한대로 “신앙과 이성은 서로 일치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리는 오히려 믿지않는 자에게 비이성적이라고 보았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필요에 대한 유일하고 이성적인 응답으로 믿었던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능력 강조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담안에서 타락함으로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어 구세주가 필요한데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씻고 죄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자기의 죄없는 피를 흘리셨다고 믿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구원은 모두 전적인하나님의은혜로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되어진다는 것이다.
세째, 영적인 면의 강조이다. 1951년 J. I. Paker 교수는 “Practical Writings of the English Puritans”란 제목의 강의에서 영국의 청교도 주의의 5가지 특징을 언급했는데, 그 중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이 바로 영적이라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자기들이 설교자이기 전에 먼저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것을 믿었고, 그들 자신들의 영혼에 있어서도 깊은 은혜의 경험을 필요로 했으며 또한 그들은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을 실감하면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는 것과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통해 생활가운데 나타나기를 원했다.
한편 그들은 다음 3가지에 중점을 두고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개인 경건생활의 신약 성경적인 형식 엄수, 성경적인 건전한 신학교리 형성, 신앙과 생활이 일치된 질서있는 교회생활 등이었다.
3. 청교도의 설교와 스펄전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국교의 경우보다도 더욱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회심 경험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를 위해 기록되었거나 전파된 하나님의 말씀에 큰 비중을 두었다.
청교도들의 설교의 중요 목적은 사람들의 영혼 구원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청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하기 위해 꾸밈없는 위트와 유우머를 사용하였으며 모든 수단을 적용하여 일화와 우화, 또는 은유와 직유를 써서 청중들의 주의를 끌고 그들이 주님을 향해 마음과 삶을 바치도록 돕기 위하여 설교에 주력하였다.
청교도들에게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한가지 사실은 그들의 성서에 대한 관심과 성서적 설교에 대한 노력이다. 그들은 성서를 진리의 원천으로 사랑했으며, 성경의 구석구석에서 마치 각 단어의 황금의 알곡인양 언어와 본문의 상징적 의미를 캐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유일한 보고요 책이었으며 그들은 매일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설교하였다.
스펄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곧 의식하게 되는 한가지 사실은 그가 자기보다 앞선 시대에 살던 가장 위대한 설교자 및 종교 저작자들과 대단히 긴밀한 친분성을 가지고 완전히 그들을 통달했다는 것이다. 당시 스펄전은 청교도 문서에 관해 배우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
결론적으로 다음의 그의 말을 통해서 그의 청교도적인 신앙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다. “ 나는 세계 제일의 웅변가가 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영혼을 건져내는 구원의 손길이 되길 원한다.”
Ⅲ. 스펄전의 신학사상
1. 기도관
“Praying is important than prayer”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기도하는 것이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스펄젼은 누구보다도 기도의 위력을 믿는 사람으로 기도만큼 힘을 주는 무기는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그의 배후에는 항상 기도하는 지원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스펄젼에 있어서 기도는 자신의 영혼의 본능이었고, 삶의 정취였으며, 생명의 원천을 이룬 호흡이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일부였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빨아들리고, 내뿜곤 했는데 그의 기도의 위대함은 점점 더 가치를 더했고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루어 독수리의 날개를 탄듯 하나님의 나라를 치솟아 올랐다고 Dr. John Cairns는 말한다.
스펄젼은 완벽한 영적 세계속에 살았으므로 늘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도중에 흘러나온 말씀들은 가끔 설교 중에 하신 말씀보다 더 깊이가 있고 아름다웠다. 특히 그의 해박한 성경지식은 기도를 더욱 신선하고 품위있게 했는데, 이것이 가장 위대한 설교사역의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성경관
스펄젼의 설교 준비는 토요일 오후 6시가 될 때까지 전국에서 찾아 온 방문객들을 만나고 6시부터 설교 준비를 위한 가족예배를 드린후에 서재에 들어가 모세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와 같이 혼자서 설교의 주제와 본문이 떠오를 때까지 열심으로 매달렸는데 이것을 한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성경을 순수한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애독했기 때문에 그의 설교 가운데에는 뚜렷하게 명시되지 않은 성경구절들이 여러번 들어가곤 했다. 이것은 스펄젼이 설교 준비에서도 성경을 귀하게 여기면서 그 말씀에 근거해서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겨의 영감을 확증하였고 그는 신학적인 과실을 “거룩한 성경의 신성한 영감에 대한 올바를 신앙의 결핍”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성경을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권위적이고 절대적인 규범으로 간주하는 자는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진리로부터 심각하게 이탈하는 법이 결코 없다고 했다. 스펄전은 성경에 대한 완전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을때 그릇된 과실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스펄젼에게 있어서 성경은 유일한 보고요, 책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매일 읽고,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여 철저히 준비된 말씀을 선포했다.
결 론
기독교대백과사전에 보면 스펄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스펄전의 모습은 혼합적인 모습이었다. 회심할때는 감리교도였으며 고백한 신앙으로는 침례교도인 그는 혈통적으로는 근본적으로 칼빈주의적이었고 그는 종종 「최후의 청교도」로 일컬어 지기도 한다. 그는 교회들 사이의 불일치의 정도에 이를 만큼 외고집이었다. 그는 4세례적 중생교리를 반대했다. 그의 설교의 복사본들은 30만부나 팔렸으며 대답으로 쓰여진 많은 팜플랫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침례교도인 B.W.노얼의 『Evangelical Clergy Defended』(1864)인데 그 저서에서 스펄전은 비슷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쓸모없는 분열을 끌어들인다는 이유로 혹평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복음주의 연맹으로부터 탈퇴하였다. 그의 견해로는 침례교 연맹을 설득시킬 수 없었던 그는 1887년에 은퇴하여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독자적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철저한 침례교도였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스펄전에 대해서 연구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있다. 여러 사람의 논문과 서적들을 읽으면서 그의 삶에 대해 강한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자를 사용하시며 또 준비된 자를 통하여 크신 일을 이루시는 분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설교의 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스펄전이 침례교 목회자라는 사실과 그의 신학적 배경이 칼빈주의라는 것에 큰 기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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