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님의 5가지 별명
아기 예수님의 5가지 별명
작성 설경욱, 2002년 12/17(화) - 12/19(나무)
* 이사야 9장 6-7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아기 예수님의 5가지 별명
1) 서론 ; 당신의 별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혹시 별명을 가지고 계십니까? 별명이라는 것은 대부분 그 사람의 약점이나 우스운 면을 꼬집어서 만들어 내기 때문에 당사자로부터는 좋지 않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별명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별명도 있지요. 저도 좋은 별명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생긴 별명이고, 지금도 간혹 듣는데 ‘어린왕자’입니다. 어린왕자.. 얼마나 좋습니까? 요즘 해리포터 2탄 ‘비밀의 방’이 나왔는데, 작년 2001년 12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전국에 한창 유행일 때 제 별명이 해리포터였습니다.
요즘 개그콘서트에 ‘갈갈이 3형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3명의 남자들이 나와서 웃음을 선사하는데 그 중 유독 이가 튼튼하여서 무 같은 것을 이로 잘라내면서 웃기기 때문에 그런 닉네임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1월 말 12월이 되면 TV에서 조금 뜬다 싶은 연예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크리스마스 음반을 내고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얼마 전 TV를 보니 갈갈이 3형제들도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마스 음반을 내고 산타 복장을 하고 나와서 노래를 하더라고요. 크리스마스 시즌을 통해서 한몫 잡겠다는 거겠지요. 요즘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이 빠진 하나의 행사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 한편으로는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사실상 크리스마스가 이제는 전 세계적인 하나의 (연인들의, 혹은 가족들의)연말 행사로 전락해 버린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회복시켜야 할 사명이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9장 7, 8절 말씀을 가지고 아기예수님의 5가지 별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오실 아기 예수님의 별명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실 별명이라기보다는 그분의 실제적인 사역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이름 같은 것일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로 부르지 않습니까? 여호와 샬롬(평강의 하나님), 엘샤다이(전능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 엘 엘리온(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올람(영원하신 하나님) 등 이외에도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사건들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께 붙여진 별명, 또 다른 이름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주님의 속성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하시는 일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탄주간을 맞아서 아기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5가지 별명을 살펴보면서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지금 우리 삶에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모셔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 아기 예수님의 5가지 별명
첫 번째 별명, 기묘자(Wonderful)
이사야는 주전 740년에서 701년 정도까지 활동을 했던 선지자 입니다. 특별히 이사야서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아주 중요한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6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날것인데 그 아기는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어께에 정사를 메었다는 말은 그 아기 예수께서 우리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12월 19일에 있었지 않습니까? 이번에 제 16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5년 임기 동안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그것을 끝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십니다. 그분의 통치 영역은 온 열방이고 영원 끝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 후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 아기의 5가지 이름을 예언하는데 그 첫 번째가 ‘기묘자’입니다. 기묘자라... 정말 기묘한 이름입니다. 우리성경이 번역된 것이 사실은 조금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현대인의 성경’이나 ‘쉬운 성경’등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어렵고 난해해서 이해하기 힘든 본문들이 있다면 참조해서 성경을 읽으시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기묘자라, 모사라’를 합해서 ‘위대한 스승’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 되십니다.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랍비(스승, 선생)의 존재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얼마 전 탈무드를 읽어보니 랍비의 중요성에 대해서, 랍비의 말의 권위를 알 수 있는 예화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유태 민족을 지배할 당시 유태인을 멸절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유태 학교를 폐쇄하거나 예배를 금지시키고, 책을 불태워 버리며, 유태인의 여러 축제일을 금지하고, 랍비를 양성하지 못하게 했다.
랍비가 교육을 마치면 랍비 임명식을 하는데 로마는 이 임명식에 참석한 유태인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런 일이 있는 도시나 마을까지도 멸절시켜 버리겠다고 포고령을 내렸다.
이것이 당시 로마가 취한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그만큼 잔혹한 것이었다. 랍비는 마을이 파괴되는 데 따른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랍비가 없으면 유태 사회의 기능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랍비는 정신적인 지도자이며 변호사이고 의사였음을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랍비가 로마인들의 계략을 간파하고는 5명의 제자와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만약 발각될 경우 마을이 함께 파괴되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랍비는 5명의 제자를 새로운 랍비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제자들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이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이만큼 살았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대들은 랍비의 역할을 지속시켜야만 한다. 그러니 어서 피하거라.” 결국 5명의 제자는 피해지만 나이 든 랍비는 체포되어 칼에 난자당한 채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유태 사회에서 랍비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상징적으로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탈무드, 인디북, p.271-278 참조)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한 스승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을 따랐고, 온 세상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의 모든 삶과 발자취와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아기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정말 ‘위대한 스승’으로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진실 되고 영원한 랍비’로서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기묘자, 모사를 합쳐서 ‘위대한 스승’이라고 번역한 것을 통해 그 의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묘자’라는 그 뜻은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영어성경을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쉽더군요. “Wonderful”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놀랍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분의 모든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분의 존재와 탄생, 이 지상에서의 사역과 기적과 이사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 그리고 승천하신 것 등, 모든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부인하던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 하실 때 사람들은 놀라서 벌벌 떨겠지요.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그분의 놀라운 공중 재림을 보고 기쁨과 감사와 환희에 놀라겠지요.
성경 기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성경 기사를 잘 주목해서 보십시오.
“고향으로 돌아가서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태복음 13:54)
“저희(바리새인들을 말한다.)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태복음 22:2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마태복음 7:28-29, 산상수훈을 마치셨을 때 무리들의 반응)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마가복음 1:2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마가복음 7:37)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누가복음 5:26,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서 보인 사람들의 반응)
주님께서는 예언대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이름대로 놀라운 사역을 하셨습니다. 저는 날마다 하루하루의 삶이 주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서도 주님의 그 손길과 인도하심을 느낄 때면 참으로 ‘기묘’합니다. 그 사랑에 놀라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두 번째 별명, 모사(Counselor)
두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아기 예수님의 별명은 ‘모사’입니다. 모사라는 말은 어감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모사라는 말이 어떤 정치적으로 수를 꽤할 때 사용하는 사기성 짙은 냄새가 나서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의 번역을 보면 ‘모사’라는 말이 참으로 좋은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카운셀러(counselor)'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담자’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몇 십 년 전만해도 상담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상담’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사회적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많이 발달하다보니 골치를 썩는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많이 하게 되었지요. 단지 법률상담이 아니라 삶의 제반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도 상담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상담에 대한 인식도도 높아지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말 못하는 고민을 가진 상담자들이 ‘상담 전화’를 통해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 문제, 폭력, 성, 낙태, 이혼 문제, 가정 상담 등 수 없이 많은 상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상담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상담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친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면서 우리들의 모든 병든 삶과, 몸과, 마음과, 관계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상담 자체가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단지 어떤 방향성만을 제시해 줄 뿐입니다. 상담을 한다는 자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상담의 효과가 그리 크지 못하다는 것도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상담가 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은 상담가 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내려놓고 상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을 치료하시겠다고, 대신 짊어지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너의 모든 염려를 내게 맡기라고 말입니다.
세 번째 별명, 전능의 하나님(Mighty God)
이사야 선지자는 아기 예수님의 세 번째 별명을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좀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별명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삼위일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들의 하시는 사역은 다를지 모르지만 세분은 동일본질이십니다. 신학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그 아기가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이 예언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도 깊게 연관지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한 위대한 사람이 신격화(神格化)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첼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간도 우리의 모든 삶을 다 드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그분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십니다. 그분께서 계획하신 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분이라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 별명,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
네 번째 별명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남성’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분은 어머니의 속성도 있고 아버지의 속성도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웨런위어스비 목사님께서는 ‘영원의 아버지’라는 번역이 더 낫다고 합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아버지’란 단어는 ‘창시자’나 ‘원천’이란 뜻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8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을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지칭하셨는데 아비라는 것은 ‘창시자’를 말합니다.
우리 삶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하지만 세상의 많은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따스함을 느끼기 보다는 권위적이고, 무뚝뚝하고, 무서우신 분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이라(요일 4:16)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실 때, 우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었던 부요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내 아버지로 모셨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지만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특권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섯 번째 별명, 평강의 왕(Prince of Peace)
마지막으로 살펴볼 아기 예수님의 별명은 ‘평강의 왕’입니다. 요즘 북한 핵 문제로 다시금 온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대권 후보들도 이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가 다들 자신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만큼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관심은 이 나라를 넘어서 세계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많은 유혈사태(流血事態)를 빚는 전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분쟁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 내부에 있는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으로 인한 평화의 위협은 계속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정치적 군사적인 힘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정치적으로 로마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킬 혁명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검으로 선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며 친히 그분의 삶으로 ‘평화’를 전하는 사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무력이 아니라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참된 평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의 잠시의 아픔과 고통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평강’을 누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함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계절입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분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가슴 속에 되살아 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거리에서는 캐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캐롤을 단지 흥으로 부를 뿐 아기 예수의 오심을 진정한 마음으로 축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마음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잊고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에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찬송한 말씀이 누가복음 2장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렇습니다. 참된 평화는 흘러나오는 캐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 평강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평강을, 평강의 주님을 중심으로 맞이하기를 원합니다.
3) 결론 ; 구원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미 예언한 내용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의 5가지 별명’이라는 제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 9장 7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구원 사역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모든 일을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계획과 인간의 노력과 무관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하기에 참으로 복된 소식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도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마땅치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이 모든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주님을 섬기는 우리도 더욱 열심을 내어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 기간, 매년 연말, 12월 즈음에만 예수님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 삶의 모든 중심으로 정성을 다하여 매일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지금도 돕고 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
아기 예수님의 5가지 별명
작성 설경욱, 2002년 12/17(화) - 12/19(나무)
* 이사야 9장 6-7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 아기 예수님의 5가지 별명
1) 서론 ; 당신의 별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혹시 별명을 가지고 계십니까? 별명이라는 것은 대부분 그 사람의 약점이나 우스운 면을 꼬집어서 만들어 내기 때문에 당사자로부터는 좋지 않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별명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별명도 있지요. 저도 좋은 별명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생긴 별명이고, 지금도 간혹 듣는데 ‘어린왕자’입니다. 어린왕자.. 얼마나 좋습니까? 요즘 해리포터 2탄 ‘비밀의 방’이 나왔는데, 작년 2001년 12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전국에 한창 유행일 때 제 별명이 해리포터였습니다.
요즘 개그콘서트에 ‘갈갈이 3형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3명의 남자들이 나와서 웃음을 선사하는데 그 중 유독 이가 튼튼하여서 무 같은 것을 이로 잘라내면서 웃기기 때문에 그런 닉네임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1월 말 12월이 되면 TV에서 조금 뜬다 싶은 연예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크리스마스 음반을 내고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얼마 전 TV를 보니 갈갈이 3형제들도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마스 음반을 내고 산타 복장을 하고 나와서 노래를 하더라고요. 크리스마스 시즌을 통해서 한몫 잡겠다는 거겠지요. 요즘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이 빠진 하나의 행사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 한편으로는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사실상 크리스마스가 이제는 전 세계적인 하나의 (연인들의, 혹은 가족들의)연말 행사로 전락해 버린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회복시켜야 할 사명이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9장 7, 8절 말씀을 가지고 아기예수님의 5가지 별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오실 아기 예수님의 별명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실 별명이라기보다는 그분의 실제적인 사역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이름 같은 것일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로 부르지 않습니까? 여호와 샬롬(평강의 하나님), 엘샤다이(전능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 엘 엘리온(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올람(영원하신 하나님) 등 이외에도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사건들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께 붙여진 별명, 또 다른 이름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주님의 속성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하시는 일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탄주간을 맞아서 아기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5가지 별명을 살펴보면서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지금 우리 삶에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모셔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 아기 예수님의 5가지 별명
첫 번째 별명, 기묘자(Wonderful)
이사야는 주전 740년에서 701년 정도까지 활동을 했던 선지자 입니다. 특별히 이사야서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아주 중요한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6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날것인데 그 아기는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어께에 정사를 메었다는 말은 그 아기 예수께서 우리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12월 19일에 있었지 않습니까? 이번에 제 16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5년 임기 동안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그것을 끝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십니다. 그분의 통치 영역은 온 열방이고 영원 끝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 후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 아기의 5가지 이름을 예언하는데 그 첫 번째가 ‘기묘자’입니다. 기묘자라... 정말 기묘한 이름입니다. 우리성경이 번역된 것이 사실은 조금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현대인의 성경’이나 ‘쉬운 성경’등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어렵고 난해해서 이해하기 힘든 본문들이 있다면 참조해서 성경을 읽으시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기묘자라, 모사라’를 합해서 ‘위대한 스승’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 되십니다.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랍비(스승, 선생)의 존재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얼마 전 탈무드를 읽어보니 랍비의 중요성에 대해서, 랍비의 말의 권위를 알 수 있는 예화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유태 민족을 지배할 당시 유태인을 멸절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유태 학교를 폐쇄하거나 예배를 금지시키고, 책을 불태워 버리며, 유태인의 여러 축제일을 금지하고, 랍비를 양성하지 못하게 했다.
랍비가 교육을 마치면 랍비 임명식을 하는데 로마는 이 임명식에 참석한 유태인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런 일이 있는 도시나 마을까지도 멸절시켜 버리겠다고 포고령을 내렸다.
이것이 당시 로마가 취한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그만큼 잔혹한 것이었다. 랍비는 마을이 파괴되는 데 따른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랍비가 없으면 유태 사회의 기능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랍비는 정신적인 지도자이며 변호사이고 의사였음을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랍비가 로마인들의 계략을 간파하고는 5명의 제자와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만약 발각될 경우 마을이 함께 파괴되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랍비는 5명의 제자를 새로운 랍비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제자들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이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이만큼 살았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대들은 랍비의 역할을 지속시켜야만 한다. 그러니 어서 피하거라.” 결국 5명의 제자는 피해지만 나이 든 랍비는 체포되어 칼에 난자당한 채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유태 사회에서 랍비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상징적으로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탈무드, 인디북, p.271-278 참조)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한 스승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을 따랐고, 온 세상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의 모든 삶과 발자취와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아기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정말 ‘위대한 스승’으로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진실 되고 영원한 랍비’로서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기묘자, 모사를 합쳐서 ‘위대한 스승’이라고 번역한 것을 통해 그 의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묘자’라는 그 뜻은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영어성경을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쉽더군요. “Wonderful”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놀랍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분의 모든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분의 존재와 탄생, 이 지상에서의 사역과 기적과 이사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 그리고 승천하신 것 등, 모든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부인하던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 하실 때 사람들은 놀라서 벌벌 떨겠지요.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그분의 놀라운 공중 재림을 보고 기쁨과 감사와 환희에 놀라겠지요.
성경 기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성경 기사를 잘 주목해서 보십시오.
“고향으로 돌아가서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태복음 13:54)
“저희(바리새인들을 말한다.)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태복음 22:2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마태복음 7:28-29, 산상수훈을 마치셨을 때 무리들의 반응)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마가복음 1:2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마가복음 7:37)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누가복음 5:26,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서 보인 사람들의 반응)
주님께서는 예언대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이름대로 놀라운 사역을 하셨습니다. 저는 날마다 하루하루의 삶이 주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서도 주님의 그 손길과 인도하심을 느낄 때면 참으로 ‘기묘’합니다. 그 사랑에 놀라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두 번째 별명, 모사(Counselor)
두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아기 예수님의 별명은 ‘모사’입니다. 모사라는 말은 어감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모사라는 말이 어떤 정치적으로 수를 꽤할 때 사용하는 사기성 짙은 냄새가 나서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의 번역을 보면 ‘모사’라는 말이 참으로 좋은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카운셀러(counselor)'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담자’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몇 십 년 전만해도 상담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상담’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사회적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많이 발달하다보니 골치를 썩는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많이 하게 되었지요. 단지 법률상담이 아니라 삶의 제반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도 상담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상담에 대한 인식도도 높아지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말 못하는 고민을 가진 상담자들이 ‘상담 전화’를 통해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 문제, 폭력, 성, 낙태, 이혼 문제, 가정 상담 등 수 없이 많은 상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상담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상담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친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면서 우리들의 모든 병든 삶과, 몸과, 마음과, 관계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상담 자체가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단지 어떤 방향성만을 제시해 줄 뿐입니다. 상담을 한다는 자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상담의 효과가 그리 크지 못하다는 것도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상담가 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은 상담가 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내려놓고 상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을 치료하시겠다고, 대신 짊어지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너의 모든 염려를 내게 맡기라고 말입니다.
세 번째 별명, 전능의 하나님(Mighty God)
이사야 선지자는 아기 예수님의 세 번째 별명을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좀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별명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삼위일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들의 하시는 사역은 다를지 모르지만 세분은 동일본질이십니다. 신학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그 아기가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이 예언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도 깊게 연관지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한 위대한 사람이 신격화(神格化)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첼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간도 우리의 모든 삶을 다 드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그분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십니다. 그분께서 계획하신 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분이라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 별명,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
네 번째 별명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남성’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분은 어머니의 속성도 있고 아버지의 속성도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웨런위어스비 목사님께서는 ‘영원의 아버지’라는 번역이 더 낫다고 합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아버지’란 단어는 ‘창시자’나 ‘원천’이란 뜻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8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을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지칭하셨는데 아비라는 것은 ‘창시자’를 말합니다.
우리 삶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하지만 세상의 많은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따스함을 느끼기 보다는 권위적이고, 무뚝뚝하고, 무서우신 분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이라(요일 4:16)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실 때, 우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었던 부요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내 아버지로 모셨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지만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특권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섯 번째 별명, 평강의 왕(Prince of Peace)
마지막으로 살펴볼 아기 예수님의 별명은 ‘평강의 왕’입니다. 요즘 북한 핵 문제로 다시금 온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대권 후보들도 이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가 다들 자신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만큼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관심은 이 나라를 넘어서 세계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많은 유혈사태(流血事態)를 빚는 전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분쟁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 내부에 있는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으로 인한 평화의 위협은 계속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정치적 군사적인 힘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정치적으로 로마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킬 혁명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검으로 선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며 친히 그분의 삶으로 ‘평화’를 전하는 사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무력이 아니라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참된 평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의 잠시의 아픔과 고통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평강’을 누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함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계절입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분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가슴 속에 되살아 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거리에서는 캐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캐롤을 단지 흥으로 부를 뿐 아기 예수의 오심을 진정한 마음으로 축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마음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잊고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에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찬송한 말씀이 누가복음 2장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렇습니다. 참된 평화는 흘러나오는 캐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 평강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평강을, 평강의 주님을 중심으로 맞이하기를 원합니다.
3) 결론 ; 구원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미 예언한 내용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의 5가지 별명’이라는 제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 9장 7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구원 사역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모든 일을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계획과 인간의 노력과 무관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하기에 참으로 복된 소식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도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마땅치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이 모든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주님을 섬기는 우리도 더욱 열심을 내어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 기간, 매년 연말, 12월 즈음에만 예수님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 삶의 모든 중심으로 정성을 다하여 매일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지금도 돕고 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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