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승리
고후 4:7∼11
사람은 누구나 다 약한 존재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들면 자기 존재가 얼마나 약한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성공한 사람도 사소한 일에 낙심하는 것을 볼 때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나온 날을 회상하면서 '과거에 우리의 생애 자체가 연약한 중에도 살아왔다는 것이 기적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존재의 연약함을 질그릇으로 표현했습니다. 질그릇이라는 것은 진흙으로 빚어진 하나의 값싼 그릇을 의미합니다. 자기 존재를 생각할 때 비천한 존재로 보는 의미에서 질그릇으로 생각했습니다. 죄짓고 타락한 존재, 하나님을 반역한 존재,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질그릇 같은 존재인가 하는 의식을 가졌고, 또 하나인간은 누구나 다 부서지면 깨지고, 상처나고, 부딪히면 깨지는 이런 연약한 존재적 의미에서 자기 존재를 질그릇이라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부딪히면 상처나고, 깨지고, 넘어지면 부서지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간의 연약성에 대하여 상한 갈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바람이 불면 꺽어지고 연약한 갈대, 또 바람이 불면 그 심지에 타던 불이 꺼져버리는 이 연약한 존재적 의미에서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 역사를 움직이는 엄청난 힘이 그 속에 솟아나고 지난날 많은 업적과 찬란한 성공을 이루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큰 일들을 성취해갔던 것입니다.
첫째, 질그릇 속에 담은 보화
그 비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으니..." 보배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는 질그릇 같은 존재지만 이 질그릇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하늘의 보화가 자기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하면 우리 속에 하늘의 신비한 능력, 하늘의 신비한 보화, 하늘의 놀라운 생명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부활의 능력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비한 힘, 이것을 사도 바울은 보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보화는 지금 현재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가난하다, 아무것도 없다, 나는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 나는 이 세상에서 천대받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내 존재는 비천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열등의식과 좌절감이 쌓일 때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선포해줍니다.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으니..."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질그릇 속에, 나같은 비천한 존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는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답답한 환경 속에 살아가면서 실망할 때가 있고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배를 우리 질그릇 속에 가지게 될 때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삶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을 별장으로 만들어 살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었고, 눈물을 찬란한 하늘가는 진주빛 나는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가난을 하늘의 부요로 바꾸어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어두운 감방에 있으면서도 찬란한 하늘의 빛을 받으면서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속에 보화가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 능력과 그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사도 바울보다 더 좋은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사도 바울보다 부요합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같이 찬송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보화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자산, 엄청난 능력, 이 엄청난 보화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아무것도 갖지 못한 가난뱅이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그리스도의 보화가 우리 속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보화 때문에 그는 삶을 승리로 이끌어 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그의 삶의 모든 비밀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어떤 때는 예수를 안믿는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큰 힘을 줍니다. 돈을 가진 사람은 돈의 힘을 믿기 때문에 든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의 힘 때문에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배운 사람은 그 실력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든든히 서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보다 더 큰 힘과, 권력과, 보화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도 바울과 같은 그런 담대한 능력과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둘째, 우뚝 솟는 삶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고백에 대하여 네 가지로 구별해서 확신있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첫째, 질그릇 속에 보화를 가졌기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 둘째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 셋째,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 네 번째는 거꾸러 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난과 핍박 속에서 고백한 승리하는 삶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거나, 버림을 당하거나,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핍박받지 않는 삶 속에서, 이런 승리가 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과 환난이 우겨싸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죽음의 세력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여러분은 삶 속에서 어떤 환경과 어떤 환난이 둘러싸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죄악의 유혹 속에 둘러싸일 수 있습니다. 가난이 우겨싸고, 모든 질병과 환난이 우겨싸고, 시련이 우겨싸서 도저히 자기 자신이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을 스스로 느끼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향해서 기도할 수 있는, 예수 이름의 보화가 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방으로 우겨쌀지라도 싸이지 않는 하나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기도의 관계는 아무도 꺽을 수 없습니다. 누가 그 관계를 끊어낼 수 있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칼이랴 아무것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믿음 위에서 사도 바울은 승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쇠사슬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감방의 벽이 둘러쌌습니다. 결박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찬송을 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는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어떤 환경이 우겨쌌습니까 환경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런 믿음 위에 설 때 이 세상을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승리자들의 고백은 바로 그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영어로 'overc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복한다'는 뜻입니다. 'over'(위에서), 'come'(오다) 해서 '위로부터 온다'는 말인데 위에서 오는 것, 이것이 바로 정복인데 위로부터 오는 힘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정복할 수가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날개를 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적군이 포위할 때 헬리콥터가 와서 그 포위된 사람을 이끌어 위로 끌어가버리면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우겨쌀지라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위로부터 와서 나에게 힘을 줄 때 우리는 어떤 환경이든지 능히 이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셋째, 낙심하지 않는 삶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곤고한 때가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했는데도 전혀 하나님의 응답이 없고 내가 기도했는데도 전혀 기도에 하나님의 들으심에 대한 흔적이 내게 나타나지 않을 때 답답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앞길이 콱 막힌 것처럼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 같은 환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속에서 그리스도가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셔서 나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주여, 내게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고칠 수 없는 것과 고칠 수 있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고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날씨는 내가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날씨가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우리는 답답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떤 분들은 결혼식 하는 날 비가 오니까 '아, 내 인생의 가는 길에 �은 비가 내리려나' 그렇게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가 오면 '아, 나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리시는구나! 내 가는 인생에 항상 하나님의 축복의 단비가 있으리이다.' 얼마나 좋습니까 햇빛이 뜨면 '아 햇빛이 있어서 좋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 좋다' 그래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자기 생에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면 됩니다. 과거를 우리는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조상과 우리 부모와의 관계를 고칠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됩니다. 제 생긴 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생긴대로 '아, 잘 생겼다.' 그러면 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전무후무한 존재니까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쓸데없이 답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이것은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기도하고 능력받아 고치십시오.
남북전쟁 때 이름없는 한 병사가 쓴 시가 있습니다.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노라
부자가 되어 행복하기를 원했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되어 오히려 믿음으로 부요하게 되었노라
나는 세력을 얻어 만인의 찬사를 받기를 원했으나
나는 세력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노라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으나
내가 간구하지 않던 더 좋은 것으로 받아서 나는 행복하게 살았노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후에 보니까 그것이 별게 아니고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축복으로 되돌아오고, 내가 병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병들어서 인생의 깊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고, 어떤 때는 이 길이 막혀서 나는 이제 끝장났는가 생각했더니 다른 길을 여셔서 더 좋은 길로 가게 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마지막 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다 나쁘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의 행로를 바르게 눈을 뜨고 본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답답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관계를 그리스도의 관계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낙심한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여유있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넷째, 버림받지 않는 삶
여기 사도 바울이 또 하나 자기 질그릇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의 보화를 갖게 되었을 때 세 번째의 고백은 "나는 핍박을 받으나 버린바 되지 않는다"입니다. 핍박은 사람들이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옥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직장에서 내쫓아버립니다. 가정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옛날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정에서 남편으로부터 예수 믿는다고 버림을 당했습니다. 또 부모로부터 쫓김을 당했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저들은 당시 사회적인 종교환경 속에서 사회법을 어겼다고 해서 감옥에 버려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 버림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림을 당하나 하나님께로부터는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업이 잘 될 때는 "선생님 어서 오시죠." 그럽니다. 그래서 어디 가면 대환영합니다. 그런데 사업에 실패하고 부도나면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아니하고 환영을 않습니다. 그러면 곧잘 하는 말이 "아, 부모 형제도 소용이 없어. 옛날 같지가 않아 옛날에 내가 돈 잘 벌고 당당할 때는 부모님도 나를 기쁘게 맞이해주더니 내가 사업에 부도나고 실패하고 직장에서 물러나니까 형제들도 옛날 같지가 않아 형제들 믿을게 없어" 하고 아주 극단적인 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인생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언제 부모 믿고 살았나 형제 믿고 살았나 나 믿고 살아야지" 그래서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버리지 않는 친구 예수가 있습니다.
다섯째, 망하지 않는 삶
그런데 여기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거꾸러뜨림을 당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죽이려고 끊임없이 거꾸러뜨리고, 두들겨 패고, 핍박을 해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 내 질그릇은 감옥에 넣고 곤장을 때리고 핍박을 하고 나를 고문해서 죽일지라도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생에 이른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승리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knock down' 될지언정 'knock out'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down'은 될지언정 'KO'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병으로 쓰러지고, 사업으로 쓰러지나 한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단코 망한다는 말은 함부로 쓰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버림당한 것만 망한 것이지 그 여타의 것은 망한 것이 아닙니다. 사업에 망한 것이 아니라 실패한 것입니다.
사업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경제적인 사업은 인생 전 분야에서 지극히 적은 분야입니다. 우리는 사업이 주의 사업도 있고, 자녀 교육 사업도 있고, 여러 가지 사업이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업 하나 실패해가지고 망했다는 말을 쓰면 안됩니다. 사업은 인생 전 분야에서 지극히 적은 분야입니다. 실패해가지고 망했다는 말을 썼으면 이 시간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비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망했다는 말을 써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아 죽어도 다시 하늘나라 영광에 이릅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사업에 실패라는 말은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했다는 말을 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망하나 우리는 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은 멸망받으나 우리는 영영 왕성하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왕성하리라'
그런데 이러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이런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을 한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으니"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져야 되는데 이 보배를 어떻게 가지고 살아야 하느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절)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졌다고 하는 것은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내 몸으로 현재 체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예수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이것이 곧 별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짐은' 이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가 핍박과 환난 속에서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을 당할 때 환난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환난은 예수의 죽으심의 연합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버림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버림 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죽음에 처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함께 처하고 사방으로 원수가 우겨쌀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고백 속에 자기가 들어갈 때 예수의 생명의 부활의 보화가 내 속에서 강하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의 연합만이 모든 고난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토굴 속에서 신앙생활을 은밀한 가운데 했는데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황제 앞에 서서 최후의 심문을 받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포기하라 그대의 인격과 그대의 인간됨을 보아서 내가 너에게 용서하기를 원하노라" 할 때 그는 "저는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나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황제는 이렇게 외칩니다. "저자를 극악무도한 죄인들의 감방속에 처넣어라" 옆에서 그를 다스리고 있는 한 형제가 말합니다. "폐하여, 저 자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더 좋아하옵니다." "왜 그러는가" "극악무도한 강도와 함께 감옥에 들어갈 때 그들을 전도해서 회개시켜 그리스도인 만드는 것을 하늘의 상을 받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 자를 굶겨라" "폐하여, 저자들은 굶기면 금식기도에 들어간다고 삼층천 신비한 환상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저들은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목을 쳐라" "폐하여, 저자들은 순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목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목을 치면 스데반과 같이 된다고 말하고 목을 치면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열렸다고 웃으면서 찬송하면서 천당에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저들은 손댈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건드리면 건드리는대로 치면 치는대로 하늘의 상을 받는다고 기뻐하옵니다." 그때 황제가 묻습니다. "어찌해서 그렇단 말이냐?" "폐하여, 우리가 볼 수 없는 보화를 저들은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 연약한 그릇 속에 보화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 보화가 뭐냐?"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아, 놀라운 일이로다."
우리 속에 이런 보화를 가지고 버림을 당할 때도 버리지 않는다는 신앙으로 우리가 어떤 환경속에 우겨쌀지라도 싸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세계를 보며, 거꾸러뜨림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이 세상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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