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장년설교

한가지 질문

기쁨조미료25 2007. 10. 15. 14:39
마틴로이드 존스
1947년 9월 21일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한 설교

서론
핵심적인 문제를 선정해내는 능력

본론
1.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2.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랴
(1)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
(2) 직면할 때를 알 수 없는 문제
(3) 우리의 삶이 달려 있는 문제
3.잘못된 답변들 몇 가지

결론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시는 의


   대부분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렇지만, 인생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능력이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어떤 연구를 하든지 간에, 그 주제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고 주의를 모을 수 있는 능력만큼 중요한 능력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수한 학생과 열등한 학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우수한 학생은 주변적인 문제와 핵심적인 문제를 구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반면에 열등한 학생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어떤 영역에서든지 연구와 이해를 발전시키는 요령은. 나무를 보느라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피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요점이고 중요한 것인지, 어떤 문제가 두드러지는 문제이며 핵심적인 문제인지를 선정해내는 능력입니다.
예컨대 사건을 맡은 변호사의 업무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변호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은, 맡은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여러 사실들과 요소들을 분명히 알고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의 목표는 오직 배심원들과 판사들의 주의를 그 사건의 중요한 대목에 집중시키는 것뿐입니다. 결국 성공하는 변호사란, 사건 개요서를 읽고 즉시 어떤 본능 같은 것에 이끌려서 무엇이 핵심적이고 중요한 문제인지를 추출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는 의사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의사의 업무가 변호사의 업무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수많은 증세들을 발견해내고 엄청나게 다양한 세부사항들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외 업무는 증상들을 선별하고 무엇이 중요한 증상인지를 밝혀내어, 그 중요한 증상들만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주제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든간에,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훌륭한 강사란 핵심적인 원리들을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들어본 강의 중에서 최악의 강의를 한 사람은,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이러한 면에서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해서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세부사항들도 크고 중심되는 원리와 같은 정도로 강조하는 무능한 강사였습니다. 강의의 요체는 이 크고 중심되는 원리들. 가장 핵심적인 원리들을 끌어내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잘 전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떤 국면에 마주치든지 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질문을 제기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지위에 다가가고 있을 때나 법률적인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상담실에서 환자를 마주 대하고 있을 때, 또 어떤 주제에 대해서 강의를 하면서 그 주제를 다른 이들에게 평이하게 전달해야 할 때, 바로 이러한 때에 여러분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관련된 사항은 무엇인가 등등을 질문함으로써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능력이란 결국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과 삶에 대한 모든 질문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질문으로 가득 차 있으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능력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어떤 문제를 물어야하는지, 어떤 문제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오늘날 특히 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실은 우리를 당혹케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입증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세계가 오늘날보다 더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습니다. 모든 방면에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신문과 책과 잡지에서 여러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극심한 동요 가운데 처한 현상태에서 거의 전세계적으로 끝도 없이 많은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이 중 중요한 질문과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분간해내고 차별화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1.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오늘 밤, 삶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로 문제가 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오늘밤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하려 한다고 해봅시다. 나를 둘러싼 세계, 내주변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 모든 문제들과 어려움들과 시련들을 살펴보고자 한다고 해봅시다. 이 일들을 하기 위해서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세상일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이 모든 복잡한 질문들을 뚫고 나가서 ‘이것이 바로 최우선적인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집중해야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입니다.
이 시간, 정말 이렇게 궁극적인 질문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 복음 선포의 사역, 그리고 우리가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 책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역이란 결국 우리들의 주의를 최우선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집중시키는 일 외에 다름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의 책무는 다른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에 대해서 교회 자신의 의견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경제에 대한 질문들,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질문들, 전쟁과 평화, 그리고 수천 가지의 다른 문제들에 관한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수히 많은 질문들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교회의 책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그러한 일들이 교회의 모든 책무와 모든 메시지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성경과 교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제일가는 책무는 하나의 특정한 질문을 제기하고 그 질문에 가장 적합한 답변을 제시해주는 일입니다.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세계와 자신의 삶을 온통 혼란과 소용들이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교회의 책무는, 이 혼란 속에서 잊혀지고 매몰되어가는 것들에게로 사람들의 주의를 모으는 일입니다.
이 문제를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오늘날 인류는 인류의 곤경 그 자체보다는 소위 ′곤경의 증세들′ 에만 주의를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책과 잡지, 그리고 라디오의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서 여러분은 위대한 과학자들과 많은 학자들이 인생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토론하는 내용을 접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그들 모두는 병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병의 특정 징후와 특정 증세에만 집중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멈추어 서서 병 그 자체까지는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사실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에 그 사실의 원인은 망각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위태로운 형편인 것입니다. 성경 자체, 복음 자체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 정말로 질병 자체에 대해서 말해주고 그 원인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우리를 최고의 원리까지 올바르게 인도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인 문제들에 직면하여 그것들과 대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인생의 모든 다른 문제들과 어려움들은 궁극적으로 이 근본적인 원리에 달려 있으며 이 원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어떤 질문이 최우선적으로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인지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아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오늘밤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있는 이 말씀, 곧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fi′는 말씀 속에 주어져 있습니다.

2.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이제 저는 더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이 질문, 곧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는 이 질문이야말로 역사의 여명이 밝았을 때 제기되었던 질문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와 우리가 속한 세대에 너무나 얽매여 있습니다. 우리는 20세기와 같은 세상은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는 주장에 모두다 너무나 완벽하게 설득당한 상태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오늘날처럼 위대한 업적을 세운 적은 결코 없었다는, 그러므로 현대인은 독립적이고 독특한 사람들이라는 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퍼져 있기 때문에. 여러 세기 전에 욥이라는 사람이 제기했던 바로 그 질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차라리 경악하고 충격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욥의 질문은 어떤 질문이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참되게 내놓을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말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해야 계속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께 도달할 수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사귀고 교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이 스스로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현대에 우리의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질문들과 문제들 중에서, 이것이 바로 첫째가는 질문이요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현대인들에게 지금 알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당분간 옆으로 밀어놓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문제와 씨름하고 이 문제를 처리하여 궁극적이고 영속적인 답변을 얻기 전까지는 다른 어떤 문제도 생각해볼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중요성에 대한 많은 반대 의견들도 함께 생각해야겠지요. 우선, 이런 말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당신에게는 이 질문이 가장 우선적인 질문이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온 세상이 어떤 지경인지 모르십니까? 국가들이 전쟁을 위해 군비를 확장하고 서로를 위협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현대 세계는 온통 어려움들과 미심쩍은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십니까? 정말 그것을 몰라서,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라는 등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말하는 문제는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는 문제가 아닙니까?”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에 대해 너무 이기적인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허황된 것입니다. 불행한 일들이 너무나 많고 고통과 불안이 가득 찬 이토록 험난한 세계에서, 인간의 운명이 허공에 달려 있는 이때에, 당신이 말하는 개인적인 구원 문제, 그것도 죽어서 장사된 후 영원 가운데서나 누리는 구원의 문제에 주의를 돌린다는 것은 허황된 일입니다.” 그분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오래된 복음이 어째서 그렇게 자기중심적이고, 어째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것인지 말씀드리지요. 지금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태도로 인해 인간 삶의 수많은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로서 당신들은 정치적인 문제, 국제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 시대의 큰 문제들과 씨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시민으로서 우리들도 단순히 인간과 영혼,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외 실제적인 문제들에도 관여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태도는 말할수 없이 이기적입니다!” 이것이 흔히 재기되는 반대 의견 중 하나입니다.
또한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 문제라고 믿으며 우리들의 주장을 미워하고 일축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노동계의 상황을 보십시오. 공업계와 상업계를 보십시오.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가족 문제를 보십시오. 법적인 문제들을 보십시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인간 자신과 인류의 문제가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우리 보고 자신만을 살피서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이 구원을 얻을까?’라고 말하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들은 중요한 주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공동체′라든가 ′사회′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사회 속의 인간, 공동체적인 환경 속의 인간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교보다는 이러한 문제에 최우선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렇게 엄청난 원자폭탄의 위협 아래 놓여 있는 이때에 자신의 작은 영혼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하는 우리의 요구가 과연 옮은 것인지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저 별들과 이 엄청난 우주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주와 무한 공간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지금, 당신들은 인간과 인간의 영혼이라는 협소한 영역으로 질문을 축소시키고 있어요. 이런 것들이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떤 답변을 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인생이 어찌하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우선적으로 집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담변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1)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
저는 우선 그 답변의 일부를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의 답변은, ‘이 문제는 어느 때인가는 부딪쳐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확하고 훌륭한 답변입니다.
저는 세계에 이런저런 많은 문제들과 어려움들이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보잘 것 없는 문제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님을 인정합니다. 이 문제들은 그것들 나름대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마주칠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질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그 단 하나의 질문이란 바로 욥이 제기했던 질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게는 원자탄의 위협을 받은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원자탄이 세상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저 자신에게 긴박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원자탄의 위험이란 발생할 수도 있고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위험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위험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시간차는 있어도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마주칠 수밖에 없는 문제거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이곳에 태어나겠노라고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갈 뿐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이 세상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날들은 하나님의 장중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좋든 싫든, 믿든 믿지 않든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며 다른 세상으로 사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욥이 제기한 이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질문, 이 유구한 질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에 대한 나의 관계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주제를 세련되고도 극적으로 표현해낸 시편들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중 몇 편은,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나려고 하지만 어김없이 이 결론, 곧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결론으로 돌아오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시는 ‘나는 밤낮으로 그분에게서 도망쳤다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를 회피하려고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하늘의 끝이나 바다의 밑까지 가더라도, 서쪽 끝에서 동쪽 끝,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다녀도 언젠가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돌아온 그곳에는 하나님과 자신밖에 없을 것이고 그곳에서 인간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는 욥의 질문이 가장 우선적인 질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구들이여, 묻노니 이 질문을 최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설정한 것이 옮지 않습니까?
(2)직면할 때를 알 수 없는 문제
만약 이 질문이 절대적으로 확정적인 질문이고 내가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나는 이 질문을 마주 대해야 하며 마주 대하되 가장 우선적으로 마주 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원리에 첨가되는, 그리고 더더욱 피할 수 없는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내가 이 질문 앞에 마주서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언제가 될는지 내가 결코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분명 첫 번째 문제보다도 더욱 시급한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했습니다. 저는 앞서. 원자탄으로 인한 미래 세계에서의 분쟁 가능성 및 그 위험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밤 여기 모이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은 그러한 위험에 처하실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10년이나 15년 내에 끔찍한 전쟁이 발발할 것이고, 그때는 이 원자탄들이 사용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지만 10년 혹은 15년 후 여러분은 이 자리에 계시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들은 발생할 수도 있고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확실한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언제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될지를 모릅니다.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이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제가 20년이나 30년을 더 살 것 이라고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이 문제를 좀 더 나중 문제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저나 다른 누구도 자기가 언제까지 설지 결코 알지 못하는것입니다. 삶의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죽음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지만 내일은 삶을 마감하고 떠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네 인생이 무엇이냐?’ 성경은 묻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욥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인생이여! 인생은 너무나 불확실하며 저도 어느 순간엔가는 이 질문에 직면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질문을 가장 먼저, 가장 우선적인 질문으로 상정해놓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렇게 불확실하므로 이 질문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삶이 달려 있는 문제
이제 이 질문을 생각해야만 하는 마지막 이유를 제시하겠습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는 질문은 최우선적이고 가장 핵심적이며 가장 시급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것이 이 질문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느냐 못 찾느냐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려 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현재의 세계,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의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이 질문에 대해 올바른 답을찾느냐 못 찾느냐는 문제에 달려 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저의 일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일들은 언젠가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질병, 노쇠, 절망, 그리고 어쩌면 기아에 가까운 빈곤을 가져올 경기침체, 전쟁 등입니다. 이런 일들 중 일부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내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가능성들, 이러한 사태들에 대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저는 성경 가운데서 발견되고 모든 성인들의 경험 가운데 확증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생의 부침(浮沈)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한 욥의 질문에 대해서 답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가 곤경과 시련과 고뇌에 둘러싸였을 때 무어라고 말했는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환난의 한가운데서 바울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 던져진 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겪어도 그의 평온함과 기쁨은 여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가 욥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려운 일들이 우리에게 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세계를 볼 때, 인생의 곤경에 대한 유일한 해결점은 먼저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오늘날의 인간이,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질병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슬픔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재정적인 손실이나 그밖에 삶을 격동케 하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신문에서 사람들에 관한 기사들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더라도 하나님 없는 삶을 산다면 성공적인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생을 참되게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현재 생의 관점에서뿐만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도 이 질문의 중요성을 이해하신다면, 여러분은 이질문의 중요성을 한층 더 명료하게 파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 책이 옳다면, 그리고 이 책의 메시지가 사실이라면, 인간의모든 운명 그 영원한운명은 욥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 그가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확정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과 마주설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분의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의 영원한 운명은 하나님께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종아, 네 주인의 기쁨에 참예하라’고 말씀하시도록 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 나타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저는 ‘내게서 물러가라’는 말씀을 듣겠지요. 이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문제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 있을수 있습니까? 삶 전체가 바로 이 문제에 달려있습니다. 죽음, 영원, 영원한 삶이 이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경의 말씀과 메시지의 권위에 의거하여 호소합니다. 모든 다른 질문들은 물리치십시오. 다른 모든 문제들은 잊어버리고 이 질문과만 마주 서십시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을것인가?’라는 이 한 질문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어느 순간에, 눈깜짝할 순간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서게 된다면 그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까? 이것이 최우선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3. 잘못된 답변들 몇 가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종종 제시되어 왔으며 지금도 제시되고 있는 잘못된 답변들에 대해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아요, 나는 당신에게 동의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는가?′ 이것은 큰 문제지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선한 삶을 살고 최선을 다해야지요. 할 수 있는 한 선행을 많이 해야지요. 기도도 해야되고 선량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지요.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종교적인 인간이 되어야지요. 종교단체에도 참여하고 교회에도 가야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런 사람이라면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무언가를 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시하는 답변은 주로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누구와라도 함께 대화하면서 욥의 질문을 화제로 삼아보십시오. 아마도 여러분의 대화 상대자들도 위와 같은 답변을 제시할것입니다.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십시오. “네가 죽은 후 영원한 세계로 가서 하나님과 마주 대하게 되면 너는 무엇에 의지할것인가? 하나님께서 너를 보시며 너의 생을 사용해서 무엇을 했느냐, 네 영혼으로 무엇을했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어라고 말씀드릴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너 자신을 어떻게 의롭게 나타낼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들에게서 여러분이 어떤 대답을 들으실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대답이겠지요. “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일이 없다네. 언제나 할 수 있는 한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정말로 남을 도우려고 했지. 다른 사람들보다는 훌륭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이 모든 답변들은 잘못된 답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성경의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욥이 이러한 답변에 대해서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모든 답변들은 완전히 잘못되고 틀린 답변이라고 말합니다. 20절에서 욥이 무어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우리들 자신의 양심이 우리를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론적이고 지적인 주장을 펼칠 때면 제 안에 한 목소리가 있어 저를 정죄합니다. 살아 숨쉬는 모든 인간에게는 이 내적인 감시자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를 정죄하며 너는 진실 되지 못하다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궁극적으로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완벽하게 성실할지라도 자신이 결코 충분히 선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논쟁의 와중에서 여러분의 논지를 보다 명료하게 주장하고 논증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인간이란 홀로 남겨질 때면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은 완벽하다고 주장하려고 할지라도 저 자신의 입이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무한히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 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욥9:32).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완전히 비극적인 실패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들보다 조금 더 훌륭하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단지 일정량의 선을 행하고, 종교적인 인간이 되고, 선량한 인간이 되었나를 가리는 그런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영원한 기준입니다. 인간이 직면해 있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느냐,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욥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여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욥23:3). 저는 그분께 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제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십니다. 그분은 너무나 큰 위엄과 주권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고 저는 너무나 약합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전능과 능력과 위엄뿐 아니라 그분의 거룩함과도 마주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빛과 어두움사이에는 조화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는 타협이란 것이 있을수 없습니다. 이 대극들 사이에는 중재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존경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분께 나아갑시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날,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스며들어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너무나 비극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그 성품을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의 손을 입에 대고 말을 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앞에서 말입니다!
욥은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욥9:30) 깨끗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제가 자신을 정화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해 여생 전부를 바친다고 해도, 그러한 노력이 죄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과 생각,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전혀 표현을 하지 않아도 그분은 우리 속에 있는 욕망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음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는 것이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깊은 곳을 통찰하십니다. 단순히 행동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욥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때때로 제시하곤 하는 이 모든 대답들은 완전히 잘못된 것들이고 완전히 부적절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대답만이 가능합니다. 저는 오늘 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대답을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인생이 어찌하면 하나님 앞에 의로울까?’ 그 내리쬐는 빛 앞에 설 때 내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무한히 투사하는 엑스레이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눈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 앞에서 있겠습니까? 그분의 면전에 설 때 제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한가지 답변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의 답변입니다. 여기에서 욥은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9:33) 라고 부르짖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시는 의
오, 그러나 이 문제를 맡아줄 누군가가, 낭떠러지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누군가가 있습니다! 오, 제게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입을 의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복만을 보실 뿐 그 안의 비열하고 더러운 모습은 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스러운 복음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인 나사렛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결코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없기에 그분이 와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과 저의 죄악을 짊어지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실패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이 문제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이 소용돌이 속에 빠져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패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스스로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처리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 대하기 전에 하나님의 성품과 같은 성품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서기 전에 이 더러움, 이 죄책감, 모든 죄의 성질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저에게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제 손을 잡아주시고 저를 영광의 하나님 앞에 넘치는 기쁨으로, 흠없는 모습으로 세워주시겠다고까지 약속하십니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어찌하면 의로울 수 있는가?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롬5:15-17).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일한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께 이 질문을 남겨드리려고 합니다. ‘인생이 어찌하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고 하십니까? 보다 직접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밤 하나님 앞에 서게 되신다면 여러분은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아직도 여러분의 업적을 제시하며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아직도 여러분 자신의 노력과 의를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확실히 호소할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내가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있을 때 당신께서 나를 위해 피흘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고 “예수 나의 구세주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할 때에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용납하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20세기의 대표적인 설교자이다. 본래 의사였으나 1926년 말 의료계를 떠나 1927년 초 아벨라 본 샌드필즈에 있는 베들레헴 전진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