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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나의 기도 (삼상1:1-3)

기쁨조미료25 2007. 9. 29. 00:56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며 엘리후의 손자이며 도후의 증손이며 숩의 현손입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였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지만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삼상1:1-3)


한남자에게 두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의 1장 첫 머리글에 시작이 매우 우울하게 진행이 됩니다. 처음 시작부터가 불안합니다.

에브라임 산지라는 지명이 의미하듯이 지금 배경이 이스라엘땅입니다. 에브라임은 야곱의 아니죠.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들이 조상인 민족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편애할만큼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이자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많이 사랑받았던 인물 “요셉”의 아들이름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있다가 ‘총리’가 되어 기근으로 죽을뻔하던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가나안땅에 있던 이스라엘을 구해낸

역사적인 인물이며 이스라엘사람이라면 반드시 존경해야할 조상이기도 합니다.


그의 인생여정이 그 아비 야곱만큼이나 산전수전을 겪었고 기적적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인생이었습니다. 그가 이방나라에서 총리가 되고 그곳출신의 여자에게 장가들어서 낳은 아들이“에브라임”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함으로 큰 민족을 이룬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할 민족입니다. 에브라임 산지는 더 생각할 것도 없는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을 조상으로 기억하는 땅이었습니다.


그 에브라임 산지에 엘가나라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에게 한명도 아닌 두명의 아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문의 내용을 따라가보니 한나라는 부인에게 자식이 없었다는걸 보면 대를 있기위한 첩을 엘가나가 두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얻기위한 것은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나 별로 다를게 없나봅니다. 이당시에는 한 남자에게 첩이 있는것이 보통이었나 봅니다. 별로 흉이 아니고 당연하다는 풍토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이런 풍습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첫사람을 지으실때 아담과 하와만 창조하셨거든요. 아담의 범죄와 타락이 가져온 불행이며 어떻게 보면 저주의 일환입니다. 한남자와 한여자가 정상적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혼잡하거나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다양함과 조화를 원하시고 연합을 원하시지 석이거나 혼합하는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대대로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길을 향했던것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부분만을 기억한 것같아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아름답거나 좋은것을 기억하기보다는 범죄하고 어두운 모습만을 상기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역사와 고통의 역사가 지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적이거나 전투적인것을 선호하는 내면에는 우리의 악한 본성이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오래도록 자식이 없어서 어떻게 했지요? 그 아내 사라의 권유로 몸종인 애굽여자 하갈을 첩으로 취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변명할 수 있겠지요.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사라의 집요한 설득으로 마지 못해서 하갈을 받아들였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사라가 남편에게 몸종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으라는 말이 과연 진심이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할 정도였다면 그녀의 심적인 괴로움이 얼마나 중했겠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괜찮다고 합니다만 정작 당사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책감에 잠못이룹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서 갈바를 알지 못한채 먼길을 떠난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기의 모든 유리한 조건을 버리고 기약없는 땅을 향하여 보이지않는 신의 부름에 모든것을 맡긴 사람입니다. 그 길에 앞장서서 따라온 부인이 사라입니다.오직 남편 아브라함만을 믿고 먼길을 불평없이 쫒아온 아내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동역자로서 그만한 파트너가 없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사랑하며 살아 왔고 많은 재산을 이룩했습니다.

애굽에서 바로왕에게 사라를 빼앗기고 죽을뻔 했었습니다. 그때에도 아브라함의 소원대로 ‘누이동생’이라고 거짓까지 감수하며 아브라함을 섬긴 여자가 사라였습니다.


그러한 모든일에 함께하신 하나님을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채험했고 경험했던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나이가 늦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모든것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것을 잘아는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것 아닐까요? 아무리 사라가 진정으로 자기몸종을 통해서라도 후사를 있자라고 했어도 그는 그러면 안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몰라도 아브라함은 그러면 안되는 위치에 있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분명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사라를 안심시키고 함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죽어라고 싸우고 있잖아요? 중동이 최고의 화약고요 뜨거운 감자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랍국은 일촉측발이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에브라임에 살고 있는 엘가나역시 어떤 출신이며 신분입니까?

요셉을 조상으로둔 족속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경험에 있어서 어느 지파에 결코 뒤지지 않는 지파입니다. 그런 엘가나에게 사랑하는 아네 한나가 있었는데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나는 착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심성이 사라처럼 착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자식이 없자 결심을 한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후사가 안생기니까 브닌나를 통해 대를 있기를 권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마음처럼 한나역시 사랑하는 남편에게 자식을 낳아주지 못하는 그 절박함이 결국은 그런 결정을 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과연 편했을까요?

어쨌든지 브닌나를 통해서 후사를 두었습니다. 아들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부닌나가 계속해서 한나의 심기를 불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엘가나가 계속해서 한나를 더 사랑한 것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질투가 분쟁을 낳게 되었는데 그것만은 엘가나역시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한나를 살피고 위해주면 할 수록 보이지않는 곳에서 부닌나의 한나를 향한 질투는 더해간 것입니다. 매년 해마다 제사하러 갈때 역시 상처는 곪고 있었습니다.


“엘가나는 제사드리는 날이 올 때마다 자기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아들딸들에게 제물로 드릴 고기를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배를 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한나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한나에게 자녀를 주시지 않았으므로 브닌나는 계속해서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런 일이 해마다 계속됐습니다.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한나는 울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고있는데 그 내면에는 말못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고통스럽습니다. 현실은 즐겁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대적의 간교함과 조롱은 더해간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바로 그런 상황에 직면해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분명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도 현실에서는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억울한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도 없는 복잡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자들이 당황하는 문제아닙니까? 왜라고 하는 의문과 하나님의 침묵을 당하면서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자녀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복음송을 아무리 불러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럴때 과연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오늘 한나를 통해서 우리의 형편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그녀가 당하는 상대적인 상실감이나 갈증들이 꼭 자식문제만 아닙니다.


여러가지로 복잡한 현실속에서 우리 신자들은 마치 폭풍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우왕좌왕 해맬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린 늘 이런 일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과거에 예수를 몰랐던 세상에 속한 신분이 아니기때문인  것입니다.

어둠에 있었던 죄가운데 종노릇하던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런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신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문제앞에서 이제는 내 힘으로 난관을 뚫고 승리하리라 가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여러분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듯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바로 그런 자리에 자신이 붙들려 왔다는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모든 현실의 문제를 들고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시고 난 뒤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엘리 제사장이 여호와의 성전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 울고 또 울면서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기본적으로 이 문제를 사람앞에 들고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너무 흔해빠진 도덕적인 설교라고요? 그러나 바로 이 자리가 복된자리라는걸 아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실때 한나는 그 자리를 뒤로한채 하나님앞으로 달려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위기의 때를 만나면 어디로 달려 가십니까? 절대로 사람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최선이고 기본입니다. 우리에게 문제를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기본을 가르치시려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사실을 확인하시고 문제를 피하려고 하지 마세요.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나아가십시오. 주님 이 문제를 어떻게 멋지게 해결하실 지 보여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부른다면 곧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움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걸 기대하고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단 우리의 원함에 하나님의 뜻을 가두지는 마세요. 아버지의 뜻에 맡기는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한나의 기도의 자리를 통해서 그것을 확인합시다.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by작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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