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별활동자료]/교회학교·교사·교육자료

초신자를 위한 기초성경공부 (8 단계)

기쁨조미료25 2010. 3. 10. 19:25

초신자를 위한 기초성경공부 (8 단계)

 

초신자를 위한 기초성경공부 (8 단계)
 
 


 

초신자를 위한 기초성경공부 (8 단계)


김 용 일

* 본 교재는 각 단계별로 성경공부교재와 성경공부주제에 해당하는
강의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차 례


제1단계 존재와 목적‥‥‥‥‥‥‥‥‥‥‥‥‥‥‥‥‥‥‥‥‥ 3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1-2:3)‥‥‥‥‥‥‥‥‥‥‥‥‥‥‥ 4


제2단계 행복과 비결‥‥‥‥‥‥‥‥‥‥‥‥‥‥‥‥‥‥‥‥‥ 17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창세기2:4-25)‥‥‥‥‥‥‥‥‥‥18


제3단계 불행의 기원‥‥‥‥‥‥‥‥‥‥‥‥‥‥‥‥‥‥‥‥‥ 28
구속의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 (창세기3:1-24)‥‥‥‥‥‥‥‥‥ 29


제4단계 중생의 비밀‥‥‥‥‥‥‥‥‥‥‥‥‥‥‥‥‥‥‥‥‥ 38
니고데모를 가르치신 예수님 (요한복음3:1-15)‥‥‥‥‥‥‥‥ 39


제5단계 영혼의 만족‥‥‥‥‥‥‥‥‥‥‥‥‥‥‥‥‥‥‥‥‥46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주신 예수님 (요한복음4:1-26)‥‥‥‥48


제6단계 죽음에 이르는 병‥‥‥‥‥‥‥‥‥‥‥‥‥‥‥‥‥‥‥55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요한복음5:1-15)‥‥‥‥‥‥‥‥ 56


제7단계 참 자유 ‥‥‥‥‥‥‥‥‥‥‥‥‥‥‥‥‥‥‥‥‥‥‥63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요한복음8:1-12)‥‥‥‥‥‥‥‥‥‥‥64


제8단계 사명 ‥‥‥‥‥‥‥‥‥‥‥‥‥‥‥‥‥‥‥‥‥‥‥‥7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21:1-25)‥‥‥‥‥‥‥‥‥‥‥72





제1단계
존재와 목적

말씀 : 창세기 1:1-2:3 요절 : 창세기1:31


Ⅰ. 천지 만물의 존재와 질서 (1:.1-25)

1. 1절을 암송해 보시오. 천지가 언제 어떻제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1)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참조, 출3:14, 계1:8)

2. 태초에 창조된 땅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2상) 이때 하나님의 신은 무슨 역사를
하고 있었습니까? (2하)

3. 하나님께서 첫째날에 무엇을 만드셨습니까? (3-5) 여섯째날까지 창조하신 것을
날짜에 따라 적어보시오. 거기서 어떤 질서와 조직이 있는가 생각해 보고 도표로
작성해 보시오.

4. 하나님께서 각 피조물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3, 6, 9, 11, 14, 20, 22, 24, 26,
28, 29,) (참조 히11:3) 여기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말해보시오.

5.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것을 보신 소감이 어떠했습니까? (4, 10, 12, 18, 21, 25,)
여기서 피조물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오.(참조, 시10:1)

6. 하나님께서 각기 종류데로 창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11, 12, 21, 24, 25,)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7. 이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필연적인 뜻 가운데
창조된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Ⅱ. 인간의 존재와 목적 (1:26-2:3)

1.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실때 어떤 특별한 뜻을 두셨습니까? (26) (참조, 시8:4-8)

2.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떤 모양으로 창조 하셨습니까? (26, 27) 여기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참조 엡4:15. 24 , 롬8:29)

3.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28) 이 사명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뜻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오

4. 하나님께서 인간과 짐승의 먹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셨습니까? (29, 30)

5.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는 기쁨이 어떠 합니까? (31) 여기서 인간의
존재가치, 존재목적, 인간이 가져야 할 가치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6.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다 지으신 후 일곱째 날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2:1-3)
안식일은 어떤 날 입니까? (참조, 출20:9-11)

※. 이상에서 하나님 인간 만물 사이에 어떤 창조 질서가 있는가 생각해 보시오.
창조주 하나님과 당신과의 관계를 말해보시오.


제1강
<강의안> 창조주 하나님

말씀 : 창세기 1:1-2: 요절 : 창세기 1:31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녘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

유구한 역사를 두고 인간들은 누가 세상을 창조하였는가? 이 세상에 시는 인간의 존재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습니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이세상을 물이나 불 바람에서 생겨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를 읽어보면 이 세상은 신들의 장난으로 생겨 났다고 합니다. 또 인간의 존재 원인에 대해서도 진화론자는 아메바에서 진화하여 원숭이가 되고, 원숭이가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일까요? 실존주의자들은 이런 본질적인 문제는 덮어두고, 던져진 존재이니 사는 날까지성실하게 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은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시들어 버리고, 결국은 허무주의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1절을 보십시요. 이 말씀은 우리 인생들이 추구해 온 모든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줍니다. 특히 1: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 말씀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자연을 포함한 인간의 존재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 주는 말씀입니다.

본 강의를 통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인간의 존재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Ⅰ. 창세기 1장을 공부하는 입장

창세기 1장은 어떤 입장에서 이해되어져야 하겠습니까?

1. 계시된 말씀에 따라서

천지창조의 기록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천지창조의 사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가장 나중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입장에서 증명될 수 없습니다. 천지창조는 과학적인 지식의 기록도 아닙니다. 인간이 공교하게 꾸며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어떤 학지들은 창세기 1장을 신화론적 입장에서, 마치 단군신화나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같이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신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많은 신화가 있습니가. 거의 모든 신화가 창조에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앗스르, 갈대아, 바벨론, 인도, 페르샤, 이집트 등의 신화들은 이미 세상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모든 신화는 민족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 범신론적이고 유치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 기록에는 전혀 민족적인 성격, 곧 히브리적인 성격이 없습니다. 세계적입니다. 이것을 볼 때 모든 신화는 이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파생되어 나간 것이요, 자기 민족 중심으로 변형시켜버린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천지창조 기록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계시해 주셨을 것입니다. 이 계시된 말씀들이 그 후손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모세를 통하여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화론적 입장에서 계시된 말씀 그대로 믿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참고,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신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2. 계시의 목적에 따라서

천지창조의 기록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 되어졌겠습니까? 모세 당시 사람들은 이 기록을 읽고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것을 기록 할 때 모세의 지식과 당시 용어와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바탕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과 현대적인 의식구조와 용어로서 천지창조의 기록이 옳으이, 거르니 변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입장에서 보지않고 당시의 과학적 입장에서 단순하게 이해 되어져야 합니다. 또한 창조 기록의 목적은 인간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신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창조 하셨으며, 창조와 관련된 깊은 신앙적인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천지창조의 기록이 과학적 지식 전달의 목적으로 쓰여졌다면 지금쯤 돌아볼 일고의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 기록은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그 권위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세기 1장 말씀은 모든 인간의 지식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심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Ⅱ.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1:1-25)

1. 원초적인 창조 (1:1, 2)

1절을 보십시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씀은 창세기 뿐 아니라 성경 66권의 대 전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주권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모든 우주 만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진리의 말씀 입니다. 또 우리가 이 하나님의 창조주권을 인정함으로서 비로소 신앙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여기에서 태초란 "맨 처음에"라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 활동을 시작하신 그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태초 이전 태초에(in the beginning)존재 하셨습니다. (요1:1, 2)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뜻은 히브리 말로"ELOHIM" 곧 "전능자"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복수형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뜻이 있으며,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기리킬 때 "우리" 라는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창1:26) 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 하셨습니다.(출3:14) 또 이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 이십니다.(계1:8) 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천지"란(The heavens and the earth) 지구를 포함한 우주 전체를 의미합니다. 하늘이란 공간(space)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땅이란 물질(질료:matter)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태초란 시간(time)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만물 창조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창조입니다. 이 세 요소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창조(creation)라는 말은 유에서 무를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1장에는 "창조하시니라" 말씀 외에 "지으셨다"(1:31, 2:1) "만드셨다"(7, 16, 25, 2:3)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들은 있는 물질을 근거로 모양과 질서를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짓고 만드는 것은 우리 인간도 흉내 낼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는 전능하신 하나님(ELOHIM)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 내시며, 죽은자를 살리시는 "ELOHIM"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는 창조라는 말이 세차례에 걸쳐서 사용됩니다.

첫째, 물질의 창조입니다.
이것은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창조는 무생물 곧 물질, 그 자체의 창조입니다. 무(無)에서 최초의 유(有)가 창조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 이것은 최초에 창조된 유(有)의 모습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창조 되었지만 아직도 카오스(chaos)의 상태입니다. 질서도 없고 혼돈합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빛도 없습니다. 아직 시간이 다스려지지 않은 무의미한 흐름속에 있습니다.(14) 그러나 어쨋든 무에서 유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카오스의 세계가 어떻게 유지되도록 하셨습니까? 2절 하반절을 보십시요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했습니다 운행했다는 말은 "떨다", "진동하다" 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물질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에너지를 공급하심으로서 그최초의 피조물을 보존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원초적인 창조를 하셨고. 이 원초적인 창조를 바탕으로 6일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둘째, 생명의 창조입니다.
21절을 보십시요.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뭍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저자들은 코로 호흡하는 동물과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체의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역시 최초로 창조된 물질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최초로 생명이 창조된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외식을 가진 존재를 기르킵니다.

세째, 인간의 창조입니다.
27절을 보십시요."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말에는 "창조"라는 말이 두번 나오지만 영어로 보면 세번 나옵니다. 물론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창조된 흙과 생명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s)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무생물도 아니요, 동물도 아니요, 생령이 되었습니다. (2:7) 또 이때 하나님께서 모든 영적인 세계도 창조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무생물의 세계, 생명의 신비로운 세계, 그리고 오묘한 인간의 세계, 영적인 세계가 어떻게 하여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저절로 생겼습니까? 아닙니다. 전능하신 ELOHIM 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기원과 생명의 기원,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두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습니다. 곧 진화론과 창조론 입니다. 진화론이란 무신론적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원시시대에 있던 탄소, 산소 등, 오늘날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원소들이 합성되어 아미노산이 되고, 아미노산이 모여 단백질을 형성한 후, 생명체가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세포에서 오늘날과 같은 각종 동식물로 진화 발전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에 바탕을 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견해를 받아 들이고자 할 때 어떤 의문이 생깁니까?
첫째, 탄소, 수소, 산소등 기본요소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곧 철학에서 말하는 제1원리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어떻게 우연이 무기물에서 생명체가 생겨날 수 있습니까?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자연과학의 첨단 기술로서도 무기물에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다만 생명체의 현상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을 뿐 입니다. 특히 오늘날 과학기술로서도 생명체가 태어날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없는데 우연히 원소들이 합성되고, 아미노산이 모여 우연히 단백질을 형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더더구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생명을 복사해 낼수 있는 DNA 합성이 우연히 이루어 진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 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단백질과 DNA 가 우연히 결합하여 고등동물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하신 지혜로만이 생명이 창조 될 수 있습니다. 또 그 하나님만이 생명이 유지 될 수 있는 자연환경을 창조하실수 있습니다.

셋째, 인격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짐승에서 진화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파스칼은 말한대로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요" 칸트가 말한대로" 인간은 자유와 양심을 가진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또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희노애락의 존재요,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닌 신비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무기물이나 아메바에서 진화해서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백보 양보해서 진화론을 받아 들인다면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우연히 던져진 존재로 운명과 허무주의의 존재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얼마나 멀고 끝도 없는 이론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어리석은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했습니다.(시14: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여 당신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존재의미는 무엇입니까? 또 오랜 세상이 지나면 당신은 어떤 괴물로 진화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은 창조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믿습니다.

2. 6일 창조(3-25)

2절을 보십시요. 태초에 창조된 땅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위에 있었습니다. 이 카오스의 세계를 어떻게 오늘날과 같이 이름답고 영광스러은 코스모스의 세계로 만드셨습니까?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빛이란 어두움을 밝혀 줍니다. 혼돈은 드러내 줍니다. 또 공허한 곳에 생명을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세상을 지으시고 제일 먼저 빛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칭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밤을 있게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밤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여 하나님나라에 가게 되면 밤이 없습니다.(계21:25) 그러나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반드시 밤이 있어야 하고, 휴식이 있어야 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

둘째날 하나님께서 물가운데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셨습니다. 궁창이란 공간(space)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구를 둘러쌀 공간을 만드시고, 그를 하늘이라 칭하셨습니다. 이 궁창은 오늘날 대기권을 의미 합니다. 이 대기권은 태양에서 오는 직사광선을 막고 온도를 조절함으로서 보호막 역할을 합니다. 우주만물의 많은 천체들이 있지만 지구와 같은 대기권을 가진 행성은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세째날은 궁창 아래의 물을 한곳으로 모으시고 물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9)
하나님은 땅과 바다의 한계를 그으시고 바닷물이 땅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명령 하셨습니다. 또한 땅은 각종 풀과 씨맺는 채소와 과목으로 아름답게 단장 하셨습니다. 대지는 만물을 품에 안은 어머니와 같이 각종 식물을 탄생케 했습니다.

넷째날은 하능의 궁창에 두 큰 광명을 만드사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무수한 별들을 만들어 땅에 비치게 했습니다. 곧 우주의 모든 천체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천체를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사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 하나님께서는 해 달 별들의 질서와 조화를 통해서 의미없이 지속되는 시간을 정리하시고,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밤과 낮, 사시사철의 변화 징조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 사람들은 모든 미신과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있었습니다. 찬란한 고대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 사람들은 당시 태양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왕의 이름은 바로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민족은 달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큰 고목나무 밑에서 빌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를 통해서 태양은 단지 하나의 발광체일 뿐이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다섯째날에는 하늘의 궁창의 새를 창조하시고, 바다의 물 속에는 고기들이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축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22) 이것은 끊임없는 재생산, 곧 번식의 능력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째날에는 땅위에 사는 가축, 곤충, 짐승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며는 하나님의 창조역사 가운데 어떤 질서와 조직이 있습니까?


첫째, 완전한 생태계(a circle of ecology)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첫째날 빛은 네째날의 해, 달, 별들의 기본 요소가 됩니다. 또 둘째날의 궁창과 물은 다섯째날의 새와 물고기의 서식처가 됩니다. 또 세째날의 땅과 식물, 채소는 여섯째날에 창조된 동물과 인간의 먹이가 됩니다. 해는 궁창에 돌며, 식물은 태양의 빛을 받아 탄소동화 작용을 합니다. 동물은 이 식물을 먹으며 삽니다. 그리고 물은 먹고난 후 배설을 합니다. 동물이나 인간의 똥 오줌은 다시 식물의 가장 좋은 거름이 됩니다. 또 인간은 산소로 호흡하고, 탄산가스를 내놓습니다. 그러나 식물은 탄산가스를 받아들이고 산소를 내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자연을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또다시 사철의 변화에따라 싹이나고, 낙엽이 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또 우주의 모든 질서와 조화를 볼 때도 하나님의 완전 무결한 창조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사물 속에도 완전한 질서와 조화가 있습니다. 분자, 원자, 전자의 세계도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를 파괴하였기 때문에 온갖 질병과 대기 오염으로 인간들이 병들고 죽으가고 있습니다. 멕시코에 일어난 지진도 그 땅아래 있는 물을 너무나 많이 뽑아 올려서 지반이 꺼지면서 일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둘째, 천지만물 창조는 인간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때 인간창조를 위해서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하나씩 하나씩 정확히 만들어 가셨습니다. 낮과 밤을 만드신 것이나, 땅에 채소가 나게 하신 것이나,육축을 만드신 것이나 모두 인간에게 그 창조의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 창조를 맨 나중에 하셨습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만드시고 그 후에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클라이막스는 인간창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볼 때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말씀의 권능자 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권능자 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생명을,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그 권능을 나타내셨습니까? 3, 6, 9, 11, 14, 20, 24절을 보십시요."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또 이와함께 "그대로 되니라" 는 말은 꼬리처럼 붙어 다닙니다.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 "물이 한곳에 모이라" "뭍이 드러나라" "땅은 식물을 내라" "광명이 있으라" 등으로 명하시니 명하신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권능의 말씀으로 칠흑같은 어둠을 몰아내고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또 공허한땅에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적인 권능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천지만물을 권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히1:3) 뿐만 아닙니다, 권능의 말씀으로타락한 인생들을 재창조 하셨습니다. 벧전1:23-25절을 보십시요. 우리가 거듭난 것은 섞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재창조(recreation)하실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고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사람되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타락한 본성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 합니다.(간증 삽입)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창조 되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1:2절의 말씀과 같이 항상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가득찬 비참한 생을 마칠수 밖에 없습니다. 일생동안 어둠 속에서 의미없이 살아갈 저와 여러분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의 권능으로 새사람 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둘째, 만유의 주권자 이십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라는 말이 30회나 나옵니다. 각 절마다 반복하여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저자가 그만큼 하나님이 천지만물 하나하나를 창조하셨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낯이라, 밤이라, 하늘이라, 궁창이라 칭하셨습니다. 칭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의 주관자 이심을 나타내어 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씀대로 되었다는 만족과 확인의 뜻입니다. 동시에 천지만물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시19:1). 그렇습니다. 천지만물은 만유의 주 하하님의 영광을 나타낼 존재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가운데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롬1:20).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라내지 못하게 될 때 피조물은 탄식합니다(롬 8:20, 21). 뿐만아니라 우리 인간은 물질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데 써야 합니다.
이상을 볼 때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섭리, 계획 가운데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식물을 창조하실 때도 각기 종류대로, 어류, 조류, 곤충, 짐승 등 모두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11, 12, 13). 이처럼 하나님은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사나운 짐승에서부터 땅에서부터 땅에 기는 개미 새끼 한마리까지도 다 그 선하신 뜻과 섭리 가운데 지으셨습니다. 하물며 인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할 때 우리는 우연적인 존재에서 필연적인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필연적인 뜻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운명적인 슬픔과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참 진리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번 창세기 말씀 공부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창조 신앙을 소유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1:26-2:3)

하나님께서는 닷새동안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여섯째날 육축과 짐승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어떤 뜻을 두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특별히 구별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시8:4-8).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요, 위대하고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27)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그의 내면적인 속성(attrioutes)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본받아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영이십니다(요2:24). 우리 인간도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 십니다(요일4:8). 그래서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 인간에게는 동물과 달리 하나님을 아는 참지식이 있습니다(엡4:24). 또 하나님은 거룩합니다(벧전1:16). 그래서 죄와 불의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처음 지음받은 인간도 거룩함을 사모하는 존재였습니다. 또 인간은 원래 흙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한 뜻을 두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혀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긍휼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은혜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학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4-8)".
그러나 아담이 타락함으로 인간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고귀한 것은 이 하나님의 형상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할 때 인간은 인간으로 가치를 상실하고 동물의 위치로 전략하고 맙니다. 인간은 여섯째날에 짐승과 함께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본능에 의한 동물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점점 짐승과 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사랑도, 거룩한 성품도 잃어 버리고 인간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생명을 귀히 여기셨습니다(9:6). 그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덧입혀 주셨습니다(엡4:24).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게 되었고, 참 하나님을 알고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생동안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살게 되었습니다(롬8:29).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덧입지 못한다면 짐승과 같은 존재로 전락할 것이며, 짐승보다 더욱 비참한 멸망과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계21:8).

2. 사명을 주신 하나님(28)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특별한 뜻을 두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26)". 곧 인간을 창조하시기전에 하나님은 사명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신 말씀이 바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복이라고 하면 "5복"을 생각합니다. 오래살고(장수), 부자가 되고(물질), 몸 건강하고(건강), 평안하고(안식), 덕을 지키고(도덕), 죽을 때 잘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적으로 볼때 축복이란 잘먹고, 잘살고, 오래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를 많이 낳으라"는 뜻 입니다. 곧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덧 입도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인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 처럼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인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주있는 복음의 능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정복하라"는 말은 '자연을 개척하고, 경작하라'는 뜻입니다. '다스리라'는 말은 '청지기로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대로 잘 관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때 '놀고 먹는 존재'로 지으시지 않았습니다. '사명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힘과 지혜를 다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상실 할때 인간은 불행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없는 자는 인간으로서 존재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없은 자는 인간으로서 존재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사명이 있을 때 의미가 있고, 꿈이 있고, 생명이 약동하는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약소민족의 갈릴리 촌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서 주신 세계선교 사명(행1:8)을 영접하고, 이 사명을 쫓아 살았을 때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위대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학문이나 정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행20:24)". 바울은 세계 선교 사명을 자기 생명 보다 귀히 여겼습니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의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고, 그의 존재의미와 참된 행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신 후 식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가라사대 내가 온자아(자기)를 형성해 나갈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보다 키가 좀 작다고 일생동안 20센치정도 키 작은 문제 때문에 자학하고, 운명의 사슬에 얽매어 신음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셨습니다. 키작은 사람은 작은대로 독특한 개성이 있습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얼굴이 애띠게 생긴 것 때문에 예쁜 옷을 입지않고, 항상 어둡고 틱틱한 옷만을 입고 다닙니다. 일부러 나이 들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 랍니다. 예쁜 옷을 입으면 더욱 어려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얼굴이 애띠게 생긴 분은 그것이 그의 개성입니다. 그 개성을 살려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멋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존재의미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존재임을 확신하고 모든 상대주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겠습니다.

첫째, 인생의 근본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다는 사실은 인생의 근본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인생은 근본목적은 나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사43: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 요리문답 제 1문에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면 마음 속에서는 반발심이 생깁니다. 자신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살아야 행복한 것 처럼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지혜있다'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나 어떤 다른 인간을 올려놓으면 결국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게 됩니다(롬1:22). 결국 물질이나 육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 인생목적을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 인생의 참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공부를 하든지, 직장을 다니든지, 장사를 하든지, 양을 치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때 뜻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또 보람이 있습니다. 영혼의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빌1:2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 그 인생의 위대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의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둘째, 절대적인 가치관
그러면 인간이 가져야 할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존재로서 하나님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식물이 되리라(29)".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인간의 먹는 물질을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명인으로 살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그러나 30절을 보십시오. 일하지 않는 짐승에게도 푸른 풀을 식물로 주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인간을 먹이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사명인으로 살면서 염려가 많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나님은 사명인들의 먹는 문제를 친히 해결해주시는 분이십니다.

3.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31)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섯째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후의 소감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 하나님께서는 첫째날부터 각 날에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신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창조됨으로서 완전한 조화가 이루어 지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 식물, 어류, 조류, 짐승, 사시사철의 변화, 우주질서와 조화,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중심으로, 질서정연 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은 인간이 창조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그 가치와 존재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없는 자연이란 별의미가 없습니다. 이만큼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존재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겼든, 키가 크든, 작든,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생겼든, 좀 조화가 없이 생겼든, 뚱뚱하든 날씬하든, 그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생겼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절대적인 존재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가치를 깨닫지 못하면 항상 남과 비교하는 열등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열등의식과 교만에 사로잡혀서 심령이 병들게 됩니다. 또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매여서 울고 불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의 근거 앞에서보다 사람 앞에서 눈치를 보여 살기 쉽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면 진리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하신 것도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만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창12:1). 우리는 부모님 보시기에 또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내가 보기에 어떤 인생을 살것인가에 신경을 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신경을 쓰고 투쟁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자의식에 시달리며 괴로와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보는데서는 착하고 외로운 척 합니다. 충성스럽게 일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눈가림식으로 일합니다. 은밀한 곳에서는 온갖 죄를 다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은 사람이 보나 안보나 충성스럽게 일합니다. 은밀한 곳에서 죄짓기를 두려워합니다. 왜나하면 하나님의 눈초리를 의식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위대한 사람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디발 여사가 그를 유혹 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기를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창39:10).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때 심령에 참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4. 안식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2:1-3)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일곱째날이 이르자 안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구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시고, 뜻있는 날로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하나님께나 인간에게 있어서 특별하고 중요한 날입니다. 우리가 안식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엿새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활동을 열심히 하신 것과 같이 힘써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날에는 세상에서 하던 모든 일을 쉬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한 성도의 거룩한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안식이란 육신적으로 쉬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기분전환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만족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게는 결코 참 안식이 없습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권능의 하나님이시요. 만유의 주권자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그리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이번 창세기 공부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빗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단계
행복의 비결

말씀 : 창세기 2:4-25 요절 : 창세기2:16, 17

Ⅰ. 인간의 본질(4-7)

1. 2:4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여호와 : 스스로 있는자<출3:14>)

2.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들과 밭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5, 6)

3. 하나님께서 사람을 무엇으로 지었습니까?(7상) 또 사람이 어떻게 생령이 되었습
니까? (7하) 여기서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며 사람은 어떤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까?

Ⅱ . 행복의 비결 (8-17)

1.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8) 에덴동산에는
어떤 나무들이 나게 하셨습니까? (9)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신 뜻이
무엇일까요?

2. 에덴동산에서 흘러 내리는 강물은 어떻게 흐르고 있습니까? (10-14) 주위 환경은
어떠 했습니까? 에덴은 어떤 점에서 부족함이 없는 낙원이라고 생각합니까?

3.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에 두시고 맡기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15)

4.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가 어떠합니까? (16)

5.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명령과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17) 여기에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시고 계명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각해 보시오.

Ⅲ. 행복한 가정 (18-25)

1.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18) 아담이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19, 20) 이것을 볼때 여자의 사명은 무엇인것 같습니까?

2. 하나님께서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21, 22) 하나님께서 여자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신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시오.

3.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아담의 사랑고백이 어떠합니까? (23)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4. 성경이 말하는 바 결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24) 여기서"연합"이라는 말이
주는 뜻이 무엇입니까? 성서적인 결혼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마19:5, 6)

5. 하나님께서 이루신 가정의 행복한 모습이 어떠합니까? (25)

※. 이상에서 볼때 인간의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오. 에덴동산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제2강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2:4-25
요절 : 창세기 2:16,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지난 1강을 통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창조된 필연적인 존재요,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신 창조의 꽃봉오리와 같은 존재임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제 2강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에게 동역자를 주신 사건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Ⅰ.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4-7)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저자는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중심으로 천지 창조의 대사역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는 인간창조에 촛점을 맞추어 다시 한번 창조의 대략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특히 1:27, 28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말씀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2장에서 특기할 사항을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Jehovah)란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에서 나온 이름으로(출 3:14)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뜻 입니다(계1:8). 그래서 2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격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2장 말씀을 공부할 때 창조의 순서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 전 땅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 경작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 올라와 온지면을 적셨더라"(4,5)
여기에서 초목이 아직 없었다는 말과 채소가 나지 않았다는 말은 창조되지 않았나는 말입니다. 사람이 경작해야 할 들판과 밭에 사람이 가꾸지 않고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 하셨다는 말씀은 오늘날 창조과학회 학자들의 연구로 증명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노아 홍수 전에는 비가 내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궁창위에 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물이 필타역할을 해서 뜨거운 태양을 걸러서 식물이 잘 자라도록 온도조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안개와 밤이 되면 지면을 촉촉히 적셔서 식물이 자라기에 합당한 수분을 공급했다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수목이 자라고, 채소를 가꿀 수있는 모든 환경이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경작할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들과 밭은 황량할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역사창조의 주인공인 인간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자연의 모습니다. 인간이 없을 때 자연은 언제까지나 거칠고 메마를 뿐입니다. 여기에 인간창조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토기쟁이가 아름다운 토기를 만들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정성과 사랑을 쏟으셔서 손수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생기(breath of life)란 생명의 기운을 말합니다. 흙이 물질적 요소라면 생기란 비물질적인 요소, 곧 정신적인 요소입니다. 이런 요소는 짐승에게도 있습니다(7:22).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란 "human being" 또한 "a living soul" 곧 살아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세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란 히브리말로(ADAM)아담입니다. 아담이란 '흙'(ADAMAH)이란 아람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인간을 흙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사도 바울도 첫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고전15:47). 또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전3:20). 마치 토기그릇이 그 수명이 다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아십니다. 그래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진토와 같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시103:113, 14). 그리고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역하16:9상). 사도 바울은 자기의 육체의 약함을 깨달았을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렸다고 고백합니다(고후12:9). 그리고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빌4:13).

둘째, 사람은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인간은 흙으로만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살아있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혼을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지적, 영적인 속성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과 영,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삼분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통적인 학설로서는 이분설(육체와 영혼)입니다. 그러나 공통적 사실은 인간은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칼빈은 영혼을 불멸의 본질이요, 인간의 고귀한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육체는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전3:20).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전12:7).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실 때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또 영혼을 인간의 고귀한 인격과 양심과 재능과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 자리잡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란 나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둘 다 건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육체가 병들면 육체적인 고통이 오기 때문에 빨리 치료를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병은 아프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병들고, 썩어 문드러져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할 때 소생합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깨어지면 우리의 영혼은 시들고 결국은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했습니다(고후7:1). 우리 주님께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4:4). 왜냐하면 우리는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인입니다. 빼어난 음악가요, 위대한 장군이요,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짓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시86:4)"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 병든 저와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원해주셨습니다(벧전1:9).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우리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가 되셨습니다(벧전2:25).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혼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히13:17). 그러므로 우리는 병든영혼을 진리의 말씀으로 치료하고, 이들을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게성을 맺도록 도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에 영혼의 만족이 없습니다. 또 영혼이 죄로 인하여 깊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하나님이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조차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육신적으로 편하고, 만족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술과 미팅, 고팅을 즐깁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그 영혼은 목 마르고, 곤핍하여질 뿐입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 '가와바다야스나리'씨는 '설국'을 쓰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후 그는 자살했습니다. 그는 그 영혼의 공허함을 메꿀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도 육신의 만족을 위하여 여섯 남편을 가졌었지만 행복이 없었고, 그 영혼은 더욱 갈급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는 영원이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마셨습니다(요4:14). 다같이 요한복음 7:37, 38 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셋째, 생명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된 것이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존재가 결코 박테리아나 아메바에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이 살아 있는 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운이 내 코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욥33:4). 오늘이라도 하나님께서 내 코에 생기를 거두어 가시고, 내 영혼을 찾아 가시면 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2:16-21에 보면 재미있는 예수님의 예화가 나옵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의 비유입니다. 그는 열심히 지어 곡간에 곡식을 잔뜩 쌓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하였습니다. 그 곡간을 헐고 더 큰 곡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곡물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이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를 위해서 쓸 것을 쌓아 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일회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이 고귀한 생명을 무엇을 위하여 써야 하겠습니까?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써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육신의 쾌락을 위해 써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써야 겠습니까? 아닙니다. 썩지않는 양식을 위해서, 불멸의 가치를 위해 써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야 합니다. 생명은 내것도 아니고, 내 부모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다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찾으실 때 하나님께로 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도로 찾으실 때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 몸으로 행한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고후5:10) 그러므로 생명을 학대하거나 함부로 죄 짖는데 써서는 안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서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하여 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계2:10)


Ⅱ.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8-17)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위해서 에덴에 동산을 창조하셨고, 거룩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1. 에덴동상을 창설하신 하나님(8-15)

8절을 보십시요.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Eden)이란 낙원(Paradise) 곧 최대의 즐거움과 행복이 있는 곳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 하셨습니다. 인간의 최대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동산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산에는 각종 아름다은 나무들이 피어 났습니다. 벌, 나비들이 춤을 추며 이꽃 저꽃 사이로 날아 다닙니다. 또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따 먹을수 있는 아름다운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도 나게 하셨습니다. 또 보시기에 좋은 이름다운 나무들이 나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가꾸신 동산이니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 하겠습니까? 이곳은 최고의 예술이 있고, 빈곤이 없는 곳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영혼에 만족을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만드신 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아담에게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약속하신 언약의 징표로 주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아담의 마음속에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 알게 해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하는 지식을 갖게하는 나무였습니다. 이 두 나무는 아담의 영적생활에 지침이 되는 영혼의 양식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볼 때 낙원이란 진정한 영혼의 만족이 있는 곳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10-14절을 보시면 그곳의 자연환경이 얼마나 기름지고 아름다운 곳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 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습니다. 첫째강은 비손입니다. 둘째강은 기혼입니다. 세째강은 힛데겔 곧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는 티그리스강 입니다. 네째강은 유브라데스강 입니다. 그리고 그 강주위의 환경도 아름답습니다. 하윌라 온땅을 둘러 흘러가는 강가에는 황금과 온갖 보석들이 가득했습니다. 강이란 고데 사회에서 인류의 생명의 젖줄과 같이 중요합니다. 특히 땅속에서 샘물이 솟아난 에덴동산을 넉넉히 적시고, 그후 네강의 근원이 되어 흘러 갔습니다. 이를 볼 때 에덴 동산이 사시사철 얼마나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모든 것들이 풍족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하나님은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무엇이든지 다 공짜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까와 하시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것을 내어 주시는 어머니와 같이 아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온갖 좋은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일4:8)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롬8:32)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인류를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낙원을 예비하셨습니다.

다같이 계시록 22:1-5절을 보십시오.

에덴에 강이 흘러 동산을 적시고. 온 세상에 흘러 나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 길가로 흐릅니다. 길가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사시사철 주렁주렁 열매가 열리며 만백성을 소생시켜 줍니다. 또 그곳에는 온갖 아름다운 보석들로 단장되어 있습니다.(계21:19) 그리고 그곳에는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없고 영원한 즐거움과 찬양이 있는 곳입니다.(계21:4) 비천한 죄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영원한 낙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2. 거룩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16, 17)

하나님은 낙원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낙원에 들어 오면서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무한한 축복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축복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영적 비밀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계명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담스 바이블(Adam s Bible)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17절에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그 명령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부사구 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이 지켜도 좋고, 안지켜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명령을 지킬 때 아담은 영원히 살고, 이 명령을 어길 때 아담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을 만드시고, 절대적인 명령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영적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 크신 권능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인간을 자기 형상데로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인간을 위해서 그 모든 축복을 다 주셨습니다. 16절 상반절에 있는대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따 먹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바나나 먹고 싶으면 바나나 먹고, 파인애플 먹고 싶으면 마음껏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열매를 인간에게 주기가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무한한 자유와 축복에 빠져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명령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분명한 영적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요, 아무리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여도 피조물이라는 테두리를 근본적으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이 질서를 파괴할 때 이미 모든 행복은 사라지고 맙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할 때 어떻게 되니까?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롬1:21-23)
이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릴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고기가 자유를 남용하여, 기고만장하게 땅으로 올라 온다면 스스로 파멸을 초래 할 뿐입니다. 자유란 자기 분수를 알고, 분명한 질서 속에서 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그렇게 된것 처럼 교만하여 지고 창조주 하나남을 부인하게 된다면 인간은 물에서 나온 물고기와 같이 죽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방종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계명의 말씀을 순종할 때 계속적으로 에덴동산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릴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산 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아담이 눈만 뜨면 그 나무를 볼 때 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도록 도와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동물을 식물로 주시면서 한가지 피를 먹는 것을 금 하셨습니다.(9:3-5) 피가 아까와서가 아닙니다. 피는 생명이요,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금하신 것은 영적인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질서를 지킬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주일 중에 안식일을 특별하신 것도 일주일이 다 인간에게 주어 졌지만 그 하루는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심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의 첫자리에 모시도록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를 마음으로 순종하고 지킬 때 우리는 기쁨으로 신앙 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를 파괴 할때 이미 마음의 질서가 파괴되고, 영적인 기쁨과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은 사라지고 맙니다. 한 가정이 유지되려면 질서가 필요 합니다. 이 질서는 한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인격적인 순종을 원하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여기서 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악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선이요, 어기는 것이 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 나무는 선악의 절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선악과를 먹을 경우 어떤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먹지않을 때 어떤 축복이 주어질 것인가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 위험을 경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심으로서 악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경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아담은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악에 빠지게 되면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나무를 두시고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먹지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음을 인정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자유의지와 인격을 존중히 여기시며, 그 마음에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율적이고 인격적인 순종을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 이십니다. 그래서 인간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 하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란, 하나님께 순종할 자유가 있고, 불순종할 자유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시부터 이 가능성ㅇ르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을 동물과 같이 만드실 수도 없습니다. 또 기계와 같이 만드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겨도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섬기지 않고, 마음으로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동이 되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빠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하사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네가 나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 하셨습니다.(요21:15-17)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한 것도 자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분은 자율적인 순종을 원하신다고 하면 안일하게 적당하게 섬겨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시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외아들을 피흘려 죽게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리라 믿습니다.

이 시간으로 부터는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창조질서를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기를 기드 드립니다.

Ⅲ . 돕는 배필을 주신 하나님(18-25)

하나님은 아담에게 낙원을 주시고 신령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돕는 배필이란 아담의 성품과 신분이 같은 존재로서 아담의 일을 거들어 줄 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때 아담은 돕는 배필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제 동역자를 주셨습니까?
19,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들짐승과 각종 새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갔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열심히 각 생물들의 특징을 찾아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때 돕는 배필이 없었으므로 아담에게 동역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열심히 사명을 감당할 때 배필을 허락 하셨습니다. 또한 동역자를 주신 목적이 아담으로 하여금 더욱더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두 사람의 힘과 지혜를 다 합하여 사명을 완수 하도록 하셨습니다. 남자들은 큰 소리를 잘 치지만 섬세하지 못합니다. 용감하지만 자상하지 못합니다. 또 여성들은 연약한듯 보이지만 강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약점을 감싸주고, 서로의 장점을 살려서 합심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대개 형제들은 자매들이 어떻게 동역해 주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을 수가 있고,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남성이지만 남자를 정복하는 것은 여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여성들은 연약한것 같지만 남성들에 대해서는 강합니다. 이것을 총각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불신자 아가씨와 결혼해서 변화시키면 되지않느냐 합니다. 이것은 교만에서 나온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러므로 남성들은 믿음있는 여성을 돕는 배필로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사역도 믿음있는 동역자가 있는 교회가 꾸준히 성장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고, 형제들의 사랑이나 받으려 하는 자가 있는 교회는 성장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동역자가 되려면 남자보자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동역자를 만들어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여자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고백 했습니다.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칭하리라"

아담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여자를 아내로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그 심령에서 사랑이 솟아났으며, 가장 깊은 사랑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아담의 이 사랑고백은 단순히 연애 감정에서 나온 사랑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여 여자를 아내로 영접하였을 때 나오는 사랑 입니다. 이 사랑은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머리뼈나 발가락 뼈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교만하지도, 무시당하지도 않는 일생의 동반자로 만드시기 위해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또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인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힘써 일하는 남자의 동역자,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남지보다 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잘못된 길로 갈때 붙잡아 주고, 힘이없어 연약할 때 힘과 용기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자립적인 신앙을 가져야 아담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최초의 결혼은 연애결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여 가정을 이루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연애결혼은 창세기 6장에서야 나옵니다. 인간들이 타락한 후에 남자들이 자기들의 보기에 좋은 여자를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6:1-2) 그러나 성서적으로 볼 때 가장 모범적 인 결혼은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이삭의 결혼 입니다. 이삭의 결혼은 아담의 결혼과 비슷합니다. 이삭은 결혼 문제를 믿음의 종 아브라함과 충성스러운 종 엘리에셀에게 완전히 맡겼습니다. 그리고 리브가를 데리고 왔을 때 순종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창26:67) 결혼을 하고 사랑을 했습니다. 그는 일부다처주의의 시대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리브가를 사랑하며 평생동안 한 아내만 사랑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두 여자를 창조하셨더면 임부더처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한남자와 한여자가 결혼을 해야 합니다.(말2:15) 또한 믿음의 결혼이란 상대방의 인간조건을 보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울 믿고,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순종하여 결혼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하는 골라잡기식의 결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온전히 맡기고 순종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니다"

이 말씀은 성서적 결혼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첫째, 남자의 자립입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자립하여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둘이 연합하는 것입니다. 연합이란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의 개성괴 능력과 지혜와 모든 것을 그대로 살리면서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연합은 두사람의 신앙, 삶의 방향, 소망, 사명등이 같을 때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육체적인 결합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사명을 갖게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게서는 창세기 2장 24절 말씀을 인용하여 성서적인 결혼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선포 하셨습니다.(마19:5, 6) 결혼이란 하나님의 절대주권 행사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가 두사람이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결혼한 아담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결론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다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 동역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계명의 말씀에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3단계

불행의기원

말씀:창세기 3:1-24 요절:창세기 3:15

Ⅰ.불행의기원 (1-6)

1.뱀의 특성이 무엇입니까(1)? 뱀은 무엇을 상징합니까(계12:9)?

2. 사단이 여자에게 던진 질문이 무엇입니가(1하)?
이 질문을 던진 의도가 무엇일까요?

3. 여자의 대답이 어떠합니까(2,3)?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어떻게 다릅니까(2:16,17)

4. 뱀은 이런 여자에게 어떤 거짓확신과 교만과 불신을 심습니까(4,5)?
사단이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5. 교만과 불신에 사로잡힌 여자는 선악과를 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6)? 선 악과를 따 먹은 후 여자는 무엇을 했습니가? 아담의 신앙문제가 무엇입니까(17)?


Ⅱ.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7-10)?

1.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겼읍니까(7)?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 그들은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왜 숨었읍니가(8)?
이들이 왜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을까요?

3. 하나님은 아담을 어떻게 부르셨습니까(9)?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참조. 눅15:20)

4.아담의 대답이 어떠합니까(10)? 그가 왜 죄를 회개하지 못하였을까요?

Ⅲ. 징계와 사랑(11-24)

1. 하나님은 회계치 않은 인간을 어떻게 문책하셨읍니까(11,13)?
이들은 어떻게 변명합니까(12,14)?

2. 하나님은 뱀을 어떻게 저주하셨읍니까(14,15)? "여자의 후손"은 누구를
가리키며(마1:23,갈4:4), 그의 할일과 당할 고통이 무엇입니까?

3. 여자는 어떤 벌을 받게 되었읍니까(16)? 하나님은 아담을 어떻게 벌하셨읍니까 (17-19)? 이상에서 죄의 결국은 얼마나 무서운가 생각해 보시오.

4.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무엇이라 지었읍니까(20)?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5. 하나님은 인간을 벌하시면서도 자기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읍니까(21)?

6.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22,23)? 영생에 대 한 소망을 어떻게 남겨 두셨읍니까(24)?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이상에서 불행의 원인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제3강

"구속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말씀:창세기 3:1-24
요절: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하시고"

지난 2강에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읍니다.특히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거룩한 계명의 말씀을 주셨읍니다. 아담은 이 계명을 지킴으로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면 아담과 이브는 사단의 꼬임에 빠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맙니다. 극결과로 낙원에서 추방되고 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을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하는 사단의 정체가 무엇이며, 죄지은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배울수 있읍니다. 특히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유혹자 사단 (1-6)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였읍니다. '간교하다'는 말은 지혜롭고, 영특하다는 말입니다. 뱀이 사단의 도구로 쓰임받기 전에는 지혜롭고 영리하여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것 같읍니다. 그런데 사단이 바로 이점을 이용하여 사람을 유혹하는 도구로 삼았읍니다. 어느날 이 뱀이 여자를 찾아왔읍니다. 이뱀이 여자에게 무슨 질문을 했읍니까? 1절 하반절릉 보십시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질문은 아주 간교한 사단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던진 의도가 무엇이겠읍니까? 하나님과 그 말씀에대한 의심을 심기 위한 질문이었읍니다. 2:16,17을 보십시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룩한 계명을 주셨읍니다. 그러나 뱀은 여자에게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엘로힘(Elohim)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읍니다.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이간질 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읍니다. 또한'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질문함으로서 하나의 금지사항을 과장하여 전체 모든 나무의 실과를 다 금지하신 것처럼 생각하도록 유도 질문을 했읍니다. 또 '참으로'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진실을 가장하여 여자의 마음속에 말씀에대한 불신을 심고자 했읍니다.
이런 사단의 질문에 진실하게 대답하려 하면 사단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질문을 부정하고, 예수님과 같이 즉시 진리의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마4:1-11). 그러나 여자는 사단이 공격해 왔을때 어떻게 대답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 여자의 대답을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말씀과 유심히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를 마음대로 먹으라고 무한한 축복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고 대답했읍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받고도 감사치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이것이 타락의 첫단계입니다(롬1:21). 또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라고 분명히 지적 하셨는데도 여자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였읍니다.
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말라'고 했는데 여자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더라고 자기 생각을 덧붙여 말했읍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을 과장해서 불평쪼로 말했읍니다. 선악과를 두시고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영적인 축복은 생각지 않고, 울법적으로 생각하여 부담스러워 하게 되었읍니다. 여자는 점차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뜯어 고치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고 경고하셨읍니다. 그러나 여자는 '죽을까 하노라'고 대답함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홀히 여기게 되었읍니다. '죽을 수도 있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여자는 사단의 간교한 질문 공세를 받고 의심병에 걸렸읍니다.
절대적인 계명의 말씀을 의심하게 되었읍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열매는 하나는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공동번역)?" 이 질문이 얼마나 간교한 질문입니까? 오늘날도 사단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부모님이나 친구의 일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하며 접근해 오고 있읍니다. 사실 우리가 바치는 시간과 물질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특히 양들을 일주일에 기초공부 한번만 하면 됩니다.
그 시간은 약 2시간도 안 걸립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마음속에 일주일 모든 시간을 성경공부 하는데 다 바치는 것처럼 과장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어서 이번주는 공부를 못하겠다고 합니다. 다음주에는 미안해서 아예 말도 안하고 펑크를 내 버립니다.
여자가 말씀에 대한 절대성을 잃고 '죽을까 하노라'는 말을 하자 사단을 재 빨리 기회를 포착하였읍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4)". 사단은 여자의 흔들리는 마음 속에 거짓된 확신을 심어 주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단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정반대 되는 말을 진리인 것처럼 말했읍니다. "선악과를 따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 학생들은 신앙생활에 회의가 생기면 교수님을 찾아 갑니다. 교수님들은 아주 인간적인 말로 학생을 위로하며, 아주 학생을 위하는 것처럼 온갖 비진리를 말하며 하나님을 떠나도록 합니다. "예수 안믿는다고 지옥 가겠느나 착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가?"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신앙을 우선으로 하면 되겠느나?" 이런 말을 듣고 미련없이 떠난 분들도 많
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사단은 이제 적극적으로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합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진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부추기면서 여자의 호기심과 교만심을 충동질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못따먹도록 한것은 너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시기 하기 때문이야." 결국 사단은 여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의심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단은 온갖 달콤한 말로 여자를 유혹하여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과 따먹도록 밀어 부쳤읍니다.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여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을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헤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과실을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찬눈으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바라보니 안목의 정욕과 지식에 대한 욕망, 온갖 탐심이 일어났읍니다. 선악과를 두신 하나님의 참 뜻은 첫째, 영적인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나무를 볼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입니다.축복에 빠져서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읍니다. 둘째는 자율적인 순종을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인격적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아담과 여자의 영적생활의 걸잡이가 되었읍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계속하여 낙원을 누릴수 있는 믿음의 비밀이 담겨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자의 눈에는 이런 영적인 의미와 축복의 말씀은 의미가 없어졌읍니다. 너무 고리타분하게 여겨졌 읍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과실을 두고 안먹다니, 내가 빠져도 너무 빠졌지, 결국 여자는 마음에 물밀듯이 밀려 오는 유혹의 물결을 뿌리치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읍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읍니다. 결국 이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따먹고하나님께 불순중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읍니다.
이상에서 볼 때 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유혹자입니다. 계시록 12:9을 보십시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렇습니다. 뱀의 정체는 유혹자 사단입니다. '사단' 이란 말은 '대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또 마귀라는 말은 '중상하는 자', '훼방하는자'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온 천하 만민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고 중상하는 원수입니다. 그러면 이 사단은 어떤 조재입니까? 유다서 6절을 보면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라고 했읍니다. 또 베드로 후서 2:4 에서는 '범죄한 천사' 라고 했읍니다. 곧 사단은 타락한 천사의 무리입니다. 원래 천사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골1:16). 특히 사단은 빛의 천사들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사명을 받았읍니다(사14:12-17, 에스겔 28:11-15). 그러나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읍니다. 여기에서 사단(대적자)이라는 말이 유래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천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들의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생각과 마을을 움직일 수 있는 힘과 지혜을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천사장 미카엘도 감히 사단을 꾸짖을 수 없을 만큼 사단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읍니다(유다서 9).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바로 이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양을 치고, 많은 수고를 한다고 해도 사단의 훼방거리가 되면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과감하게 사단을 대적하여 싸워야 합니다(엡6:1-18). 사단은 예수님의 이름권세를 가장 무서워 합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능력 앞에 무력해집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말씀으로 사단의 궤계를 파하고 대적하 때 사단은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읍니다. 사단은 온갖 아름다운말로 찾아오지마는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본성을 분명히 아셨읍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진라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못하고, 거짓말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됨이라(요8:44)". 사단은 욕심장이요, 거짓말장이요, 비진리를 말하는 자이요, 살인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달콤한 말로 유혹해도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또 한가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사단의 공격 목표는 아담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아담을 공격 목표로 삼고 먼저 여자를 유혹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가장 신뢰하는 아내를 통해서 아담을 쓰러 뜨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을 어겼음을 지적하셨읍니다(17상). 이처럼 사단은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을 때 사단이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베드로를 통해서 가로막았읍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지라도 말씀에 어긋나는 말을 할 때는 단호히 거절하고, 책망을 할 수 있어야 겠읍니다. 사단은 어린 양들을 통해서 목자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이런 사단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되겠읍니다. 양들이 어려워져도 목자만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으면 양들은 다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양이 어려워 졌다고 목자가 어려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말씀을 경홀히 여기면 둘 다 망하게 됩니다. 이번 가을학기에는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 (7-13)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되었읍니까? 첫째, 육신의 눈이 밝아졌읍니다. 7절을 보십시요.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의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읍니다. 사단은 그들의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읍니다(5).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 심한 수치심에 사로 잡히게 되었읍니다, 축복으로 주신 생식기관이 육신의 쾌락을 좇는 도구로 전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인간들은 정욕의 노예가 되었읍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짐승과 같이 되어버렸읍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영적인 눈이 어두어져 버렸읍니다. 사단은 요즈음 경험주의라는 말을 쓰고 지성인들을 많이 유혹하는 것 같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겐 모든 것을 경험해 보아야 한다고 유혹합니다. 선도 경험해보고 악도 경험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악을 경험하게 되면 악의 세계에 눈이 밝아집니다. 십계명 중 제7계명이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간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간음을 경험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간음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후부터는 더욱 정욕적인 생각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만큼 육신의 눈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또 그 만큼 유혹을 많이 받게 됩니다. 결국 한번 두번 정욕적인 죄를 짓다가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악을 경험해서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그 길이 가장 지혜로운 길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우리 영혼이 깨끗하게 되며, 영적인 눈이 밝아지게 됩니다(벧전1:22)

둘째,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읍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날이 서늘할때에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읍니다. 그러자 아담과 그 아내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어버렸읍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미가 상실된 것을 의미합니다. 인가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기뻐하시는 대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자로 지음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버렸으니 존재목적이 상실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읍니다. 또한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에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잃게 되었읍니다. 방황하게 되었읍니다.

세째, 두려움에 사로 잡혔읍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읍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데서 오는 죄의식에서 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단은 여자라를 꼬일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 커녕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되었읍니다. 뿐만아니라 두려움은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려는 데서 생깁니다. 죄지은 인간은 어찌하든지 그 수치를 가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긴장하고,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숨깁니다. 빛 가운데 나오기를 싫어합니다(요3:19,20)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하게 될 경우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짐승과 같이 되어 버렸읍니다. 또한 허무주의와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었읍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으로 부각이 되어 버렸읍니다. 빛되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두려워서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죄의식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아담을 어떻게 도와 주셨읍니까?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숨어 있는지 몰라서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왜 숨어 있는가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잃은 양을 찾도록 찾아다니시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음성은 집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과 같습니다(눅15:20).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였다고 그냥 버리시지 않았읍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변함없이 사랑하셨읍니다. 다만 변해버린 것은 아담의 마음입니다. 수치심, 존재의미 상실, 죄의식, 두려움, 불신, 교만, 의심, 이 모든것은 아담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을 멀리하였읍니다. 자기 불의에 빠져서 숨어 있었읍니다. 그러나 아담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애타게 찾으셨읍니다. 하나님은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하나가 회계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것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눅15:7).
그러나 아담은 어떻게 대답했읍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보다 벌거벗은 것에 대한 수치심에 사로잡혀 있었읍니다. 그는 죄의 결과에 대한 수치심과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깨닫지 못했읍니다. 회계할 수가 없었읍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에게 죄를 지적하셨읍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누가 너희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명한 그나무의 실과를 내가 먹었느냐?"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게 된 것은 수치심과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먹지말라고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주권을 멸시한 행위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만의 죄악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어떻게 대답했읍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자기의 근본 불순종의 죄악을 깊이 회개하지 않았읍니다. 자기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했읍니다. 부부사이에 사랑의 질서가 파괴 되고 말았읍니다. 서로 원망하고 불화가 생겼읍니다.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깨어지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도 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 했읍니다. "뱀이 나를 꽤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상에서 볼때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담이 불순종의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안타깝게 기다리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8).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무조건 용서해 주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범죄하기 전이나 후에나 변함이 없읍니다. 범죄한 후에는 그사랑이 더욱 강열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만과 불신으로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범죄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안타깝게 기다리십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와 같이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않고, 어디 있느냐?" 이 하나님의 음성을 매순간 듣고 세상을 향하는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겠읍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분들이 많이 오지 않았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는 이 하나님의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잃은 양을 찾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겠읍니다.
또한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담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심으로 회개하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사랑하시나 죄는 미워하십니다. "누가 너희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의 죄를 책망하심으로 회개하도록 도우셨읍니다. 이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많은 사건을 만들었읍니다. 그러나 마침내 형들이 회개하게 되었읍니다. 이 사랑이 가장 고귀한 사랑이요 영혼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읍니다(눅5:32). 대개 범죄한 사람들은 교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 변명합니다. 이들을 끝까지 참고 회개시키기는 쉽지 않읍니다. 교만하여 대적하는 분들을 겸손히 섬기려면 속이 다 내려 앉읍니다. 그러나 계속 도전하여 진리의 말씀을 심고 회개하도록 도울때 진정으로 영적인 사랑의 과계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죄를 눈감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Ⅲ. 구속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14-24)

14-24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고, 여자와 아담을 벌하시며 낙원에서 쫓아내시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을 내리시는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읍니다.
(1) 구속의 씨를 약속하신 하나님(14,15)
14절을 보십시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 뱀은 처음 창조될때는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 지혜롭고 고등동물로 지어졌읍니다. 그래서 인간과 가장 가까이 지내며, 사랑을 독차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속에 묻혀서 살게 되었읍니다. 뱀은 잠시 사단의 도구로 쓰임받고 가장 비참한 저주를 받게 되었읍니다.
뿐만 아닙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뱀을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셨읍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말꿈치를 상하게 할것이니라". 이 말씀은 뱀에게 주는 심판의 말도 되지만 그뒤에 숨어 있는 원수 마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보내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릴 것을 약속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권세아래 있는 모든 인생들을 죄 가운데서 구속하실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 탄생에 대한 최초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원시복음(protevangel)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게 하셨읍니다(마1:23,갈4:4). 그리고 아담이후 모든 인류의 죄를 그 몸에 담당시키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하셨읍니다. 그리고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온전히 구속하셨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원수가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외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구속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2)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16-21)
하나님께서는 뱀의 유혹에 먼저 넘어간 여자를 어떻게 하셨읍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셨읍니다. 원래 여자가 생명을 탄생하는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읍니다(창1:22). 그러나 이제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졌읍니다. 해산의 고통을 이처럼 크게 더하신 것은 자식을 낳을때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던 죄악을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하려 함이었읍니다. 또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벌을 주셨읍니다. 그래서 남편을 동역하는 동역자의 특권과 자유를 상실하고 종속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읍니다. 남편을 신앙적으로 돕지 못하고 오히려 범죄케한 이브는 그 모든 특권과 자유를 잃게 되었읍니다. 역사적으로 문화권속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종속적인 관계였읍니다.심지어 어떤 문화권속에는 남편이 아내의 생명을 좌우할수 있을 정도였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영적질서를 회복한 가정에서는 다시 평등과 자유,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어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을 섬길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어떻게 벌하셨읍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옥토가 박토로 바뀌었고,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읍니다. 18절에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읍니다. 사람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되었읍니다(19상).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땀을 흘려 일해야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읍니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고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며, 탄식하고 있다고 했읍니다(롬8:20-22). 뿐만 아닙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인간에게 죽음이 선고 되었읍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이 말씀은 온 인류에 내려진 사형선고였읍니다. 성서적으로 볼때 죽음이란 세가지가 있읍니다. 첫째,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갑니다. 세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영원한 유황불속에 던져지는 것이요, 곧 영벌을 말합니다. 이것을 계시록에는 둘째사망이라고 부릅니다(계21:8). 이때는 죽을 수도 없으며 세세토록 괴로움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하신것은 죄의 댓가는 죽음이기 때문이요(롬6:23).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선고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들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셨읍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후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지었읍니다. 하와라는 말은 생명샘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은 원시복음을 영접하고,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을 소망하게 된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아담과 이브를 위하여 짐승의 피를 흘려 희생하심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읍니다. 그들의 허물과 수치를 감싸주셨읍니다. 이것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 사건은 희생을 드리는 제사제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장차 올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인간이 죄를 가리우심 받을 수 있다는 복음진리를 암시해줍니다.
(3) 영생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23-24)
선악을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인간에게 내린 최후의 벌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하나님은 인간이 죄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게 되면 인간은 영영히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일시적으로 중노동과 죽음의 고통을 맛보더라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문제를 완전히 해결받은 후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셨읍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을 떠나기 싫어 하였던것 같습니다. 또 죽음을 선고받은 후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쫓이내시고,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없애지 않고, 지키게 한 것은 아담에게 영생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죄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제 4 단계
중생의 비밀
요절 : 요한복음 3 : 3
말씀 : 요한복음 3 : 1 - 15

Ⅰ. 거듭남의 필요성과 의미 ( 1 - 8 )

1.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 ? ( 1, 10 ) 그가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

2.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 ( 2상 )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 2하 ) 그가 예수님께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

3.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근본문제가 무엇이라고 지적 하셨습니까 ? ( 3하 )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 니고데모의 마음에는 왜 하나님
나라가 없었을까요 ?

4.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 거듭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

5.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 ( 4 )

6.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거듭날수 있다고 하십니까 ?
( 5 ) ( 참고 : 디도서 3 :5 )

7. 사람이 왜 성령으로만 거듭날 수 있습니까 ? (6) 성령의 역사는 무엇과
같습니까 ? (7, 8)

Ⅱ. 거듭남의 비밀 ( 9 - 15 )

1.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 (9)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책망했습니까 ? ( 10 )

2. 예수님의 증거는 어떤 점에서 확실합니까 ? ( 11상 ) 예수님의 증거들을
알아 듣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 ( 11하, 12 )

3. 예수님은 왜 하늘 일들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 ( 13 ) 하늘 일들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

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을 살펴 보시오. (민수기 21:4-9) 이 사건이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가 무엇입니까 ?

5. 이사건을 기초로 예수님 자신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까 ? (14하)
이렇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 (15)

※. 이상에서 당신이 왜 거듭나야 하며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시오.

제 4 강 ( 거듭남의 비밀 )

니고데모를 가르치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3 : 1 - 15
요절 : 요한복음 3 : 3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최고 지성인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사건입니다. 니고데모는 겉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좋은 인간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는 중생을 체험해야 할 타락한 인간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왜 반드시 거듭나야 하며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하는 근본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중생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1 - 8 )

1절을 보십시요.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 그는 종교적으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교의 세 개의 종파 중에 하나입니다. 바리새파는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생겨난 종파입니다. 당시 세계는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의 헬라문화정책을 힘입어 헬라화 물결 속에 휩쓸렸습니다. 특히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총독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지 못하게 했고 성전에 이방신상을 세우고 돼지머리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고 헬라신들을 숭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런 유대교 말살정책이 진행되는 가운데 유대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생겨난 종파가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페르샤' 라는 말에서 왔는데 열정적인 사람들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특히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지키는 길만이 유대교의 순수신앙을 지키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오경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지침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미쉬나' 입니다. 그리고 이 미쉬나를 쉽게 해설해 놓은책이 요즈음 많이 나오는 '탈무드' 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율법을 엄격히 지켜야만이 구원을 받을 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이들의 순수한 열정은 식어 갔고, 예수님 당시에 와서는 율법과 전통, 종교적 형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 Pharisee ) 라는 말은 '위선자' 라는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 정식으로 등록된 바리새인들은 약육천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으로서 유대의 공회원이 된 것을 볼 때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관원이란 산헤드린의 회원을 가르킵니다. 원래는 "원로원" 이라고 불리웠는데 헤롯 대왕 때부터 "공해" 아 불렀습니다. 이 공회는 70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제사장들과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중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공회는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 이스라엘의 최고의 권력기관으로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공회를 "대심판소" 라고 불렀습니다. 이 공회원이 되려면 첫째, 귀족 출신이어야 합니다. 둘째, 학문적으로 뛰어나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요.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당시 최고 학문이었던 천문학이나 수사학, 의학, 철학, 역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무엇보다도 모세오경과 성경에 대해서는 정통한 성서학자였음에 틀림 없음니다. 또 19 : 39 을 보십시요.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이나 가지고 온 것을 볼 때 엄청난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바리새인이요, 사회적으로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부러워하는 모든 인간조건을 다 갖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 라는 이름은 '백성들위에 군림하는 승리자'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a 절을 보십시요. 그가 왜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족이었고, 공회원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 청년이었으며 성전에 들어와 소란을 피운 상당히 위험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당시 성전에서 장사군들과 결탁했던 제사장들은 상당히 격분했을 것입니다.그래서 그들의 눈을 피해서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찾아 오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밤을 택하여 찾아온 것을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 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특히 낮에는 예수님이 항상 많은 무리들 속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1 : 1 의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잘 없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을 택하여 예수님을 은밀히 만나서 그의 신앙문제와 시국문제등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니고데모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을 까요? 2b 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 라고 불렀습니다. 이 칭호는 상당히 높은 칭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시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표적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왜 찾아 왔는가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으로 본 것을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요ㅡ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속히 로마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도 백성의 지도자로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그리스도로서 기대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니고데모는 2절에서 '우리가' 라는 대명사를 써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마는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야 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을 아시고 거듭나야 함을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말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 인간이 누리개 되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니고대모의 마음속에는 행복이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시람들이 볼 때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춘 사람같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적으로 정상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학문적으로 성겅한 대 학자요,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다 소유한 자요, 또 종교적으로 바리새인으로서 그는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심령을 통치하실 수 없었습니다. ( 롬 10 : 2, 3 ) 이들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엄격히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 빌 3 : 5, 6 ) 그러나 그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없으며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 롬 3 : 28 ) 니고데모 역시 율법의 행위로 의로와 지려고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고 더욱 더 죄악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적인 신앙생활에 지쳐 깊은 절망과 탄식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 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니고데모의 근본문제는 거듭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아무리 인간조건이 좋고, 종교적인 열심이 있어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행복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에 쪼들린 사람은 좋은 직장만 얻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또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예쁜 아내나, 핸섬한 남편을 만나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부서별활동자료] > 교회학교·교사·교육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0) 2010.05.19
가상칠언  (0) 2010.04.01
주기도문 원어분해  (0) 2010.02.20
예수님의 시간순 사역표  (0) 2010.01.10
누가복음 도표로요약공부  (0) 2010.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