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기본 사상
저자: H. 헨리 미터(Meeter, H. Henry :1886-1963)
“H. 헨리 미터”는 1886년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는 칼빈 대학교와 칼빈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사를 취득하였다. 프리스톤에서 수학하는 동안 그는 B.B.워필드(B.B. Warfield)와 윌리엄 파크 암스트롱(William Park Armstrong)그리고 존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의 영양을 크게 받았다. 더 많은 학문적 연구를 위하여 그는 화란으로 건너가 자유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16년 그는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자유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졸업논문은「그리스도의 천상의 대제사장직: 주경적이고 교의학적인 연구」(The Heavenly High Priesthood of Christ: An Exegetico-Dogmatic Study)였다.
졸업후 미국으로 돌아온 미터는 기독교 개혁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고 1917년부터 1926년까지 느랜드 가의 기독교 개혁교회에서 사역하였다. 목회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칼빈대학과 칼빈 신학교의 이사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1926년에 미터는 칼빈 대학의 성경학과 교수 겸 학과장으로 취임하여 성경연구, 개혁주의, 교리 교회사 그리고 칼빈주의 등을 가르쳤다. 그곳에서 미터는 그의 역작인 「칼빈주의 기본원리」(The Fundamental Principle of Calvinism:1930)와「칼빈주의: 그 기본사상의 해석」(Calvinism: An Interpretation of Its Basic Ideas.1939)이라는 책들을 저술하였다. 이 책들은 셋째 판이 나온후에「칼빈주의 기본사상」(The Basic Ideas of Calvinism. 1956)라는 책으로 바뀌어졌다. 이 책에서 미터는 칼빈주의란 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분야에 대한 견해를 포함하는 전포괄적인 사상체계라고 하였다. 영국의 기독교 잡지인 “복음주의 계간지”(Evangelical Quarterly)는 이 책을 가리켜 “칼빈주의에 대한 좁은 시각에서 세계적 으로 확대하여 칼빈주의의 원리들이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얼마나 신앙적이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이고 혹은 국제적인가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라고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아울러 미터는 1927년부터 1956년까지 칼빈 대학의 성경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존칼빈(John Calvin)과 칼빈주의에 관한 중요한 책들이나 관계 서적 목록들을 수집하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수집 활동은 칼빈 대학의 도서관 사서인 레스트 드코스터(Lester DeKoster)의 광범위한 작업을 통해서 확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칼빈 대학 학장을 역임한 월리엄 J. 스풀호프(William J. Spoelhof)에 의해서 1951년부터 1976년까지 전폭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수집작업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훗날 “H. 헨리 미터 칼빈 연구원”(H. Henry Meeter Center for Carvin Studies)이 탄생되었다 현재 수많은 희귀 자료들, 저서들, 논문들 그리고 관계서적 목록들을 소장하고 칼빈 연구원 은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수집 물들을 보유하고 있는 연구원들 중의 하나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있다.
제 1 장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
칼빈주의란 요한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 체계를 가리킨다 그가 비록 이 체계에서 취급된 모든 사상들을 창작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 체계의 중요한 해설 가 이다. 칼빈의 신학적 교의들은 종교 개혁에 이바지한 다른 위대한 지도자 들의 교의와 함께 어거스틴교의의 부흥이고 그 의 교의 그보다 몇 세기전 사도바울 교리의 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교의들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또한 특수하게 적용하여 현대를 수해 제시한 사람이 바로 칼빈 이다 이때부터 이 사상 체계를 칼빈주의라고 부른다. 칼빈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상체계이다곧 하나님 중심 사상이 칼빈주의 운동 전체의 초기150 년 간의 특집이 되어 있었어 그 세대의 칼빈주의자들은 항상 하나님을 저희들의 사상 중심에 두었다. 중심사상은 그 하나님 사상이다. 칼빈주의자는 항상 하나님 사상에 치중한다. 칼빈주의자는 만물 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에 있으리로다. 이란 성경 말씀의 진리를 생활 원리로 삼고 실현하려고 한다.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는 실상 이런 세계관 적인 구성적 원리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주권 그 것이니 자연 영역과 도덕 영역에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란 말이다. 질서는 하나님나라 법칙의 제일 조항이다. 자연 영역과 마찬가지로 진리, 사랑, 도덕, 과학 등의 영역에도 모두 법칙의 질서에 속하여 있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또한 섭리하시는 우주 가운데서 법칙과 질서와 조화의 아름다운 체계를 발견하다. 누구든지 서슴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또 자기의 사상과 심정과 의지에 있어서 나 자기 생활의 활동 전부 곧 지적 도덕적 영적 활동에 있어서나 개인적 사화적 종교적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필경 다 주장하시는 분임을 믿는 자는 가장 엄밀한 논리의 힘과 필연성에 의하여 칼빈주의자라고 지적된다.
제 2 장 칼빈주의 체계에서의 성경의 위치
실제로 하나님이 자기에 대한 두 가지 계시 곧 두 책을 주셨으니 하나는 자연 에 관한 책이요 다른 하나는 성경이다. 자연 영역에서도 전체적인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성한 법정이 된다. 오늘날 우리에겐 성경 곧 특별 계시인 둘 째 책이 있을 필요가 생겼다. 그 책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고 틀림없이 사람에게 만물에 대하여 계시하고 또 사람의 어두운 마음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밝힘으로 이 성경 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하신다. 성경의 안경을 쓰고 자연을 보아야 한다. 성경이 신자의 인생관 전체의 궁극적 기초가 된다. 이 책은 우리에게 구원받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 이외에 또 우리의 사색적 도덕적 삶의 전체를 주장하는 원리도 제공하여 준다. 성경은 구원을 얻는 법에 대한 진리와 동시에 신앙과 생활의 원리들을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준다. 성경은 이 원리에 따라서 역사를 취급하여 우리도 이 원리를 따라서 생활하여야 할 것을 가르친다. 곧 그가 믿어야 할 것과 행하여야 될 것을 그에게 일러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주의자는 성경 기자들의 배후에 있는 실수 없는 하나님의 손을 본다.
제 3 장 칼빈주의 체계에서 신앙의 위치
칼빈 주의자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다. 이 하나님은 자연계뿐만 아니라 특별히 초자연적 행동 곧 계시와 영감으로도 자기를 계시하신다. 자연계에도 인격적인 하나님의 지혜롭고 목적이 있는 통솔력이 있어서 인생의 생활과 만물을 지도하나니 이는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라 지혜로운 선한 하늘 아버지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으니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알기 위하여 믿으며 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가치가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믿는다. 곧 모든 성경 계시 는 하나님이 주실 때에 종종 이적과 기사와 같이 주셨다. 곧 성령이 필연코 계셨음을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확신이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영혼에 심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교 신앙은 직관적으로 영혼에 직접 생겨서 확신으로 압도하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을 안 믿을 수 없게 된다. 성령이 신자로 하여금 어디서든지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성경 자체의 신적인 권위를 자유로이 또는 자발적으로 승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 신적 권위가 그 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복종하도록 만든다. 초자연 주의자들은 신앙은 지식보다 앞선다 라는 금언을 채용하였으니 곧 오리겐 이 먼저 그 금언을 선포하고 어거스틴은 그것을 반복하였고 안셀묵스는 그 것을 해설하여 확립시켰다.
제 4 장 칼빈주의 체계의 균형
칼빈 주의자가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우주의 주권자라고 하는 진리를 신학의 중심으로 삼을 때에는 모든 다른 교리들은 정당한 곳에 놓여지고 또 적당히 강조될 것이다. 사람은 종교 생활에 있어서 지적으로 치우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서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사람들은 칼빈주의 운동에 최선의 찬사를 다음과 같이 돌렸다. 곧 어떤 이들은 칼빈주의를 주지주의자라고 불렀고 또 다른 이들은 신비주의자라고 불렸고 아직도 다른 이들은 주지주의자 혹은 종교에서 의지를 하는 자들이라는 평을 듣는다,
제 5 장 칼빈주의 신학의 요점
종교는 인간을 축복하는 것일지라도 인간을 위하여 있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자연계나 인생 생활에서 생기는 모든 발생사가 만대를 통한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이라고 주장한다 죄도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죄를 그의 의지로 허용하고 죄 자체의 본래의성격에 의하여 발생하되 그것을 관할하야 결국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 되도록 한다 우주의 일반적 사역을 통하여 역사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장하는 둘째 방법은 이적 특별 계시 영감 기사 성육신 육체 부활 중생 성화 등이다. 인간의 구원과 또는 인생의 모든 행할 바 본분에 관한 계획과 목적을 알려 주신다. 인간 연구 의 문제에서도 역시 칼빈주의 신학을 착색 하는 위대한 하나님 사상을 보게 된다 로마 교회가 교회를 두는 위치에 칼빈주의는 성령 하나님을 둔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밝히시므로 중생한 사람 자신의 성경연구를 통하여 구원 방법을 알 수 있게끔 된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기인하다는 것이고 그계약에 합당한질서가 있는 생활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요 구원이니 하나님에게서만 오고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힘에 의하여 생활의 일체를 하나님을 위하여 바칠 때에 그 이상 더 고귀한 종교적 비전은 생각할 수 없다.
제 6 장 일반 은총
아무리 맹수라 하더라도 죄악만큼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사나운 것은 없겠고 아무리 빠르고 급하게 흐르는 강이 있다. 고 하더라도 죄악만큼 광분하여 제방을 넘는 것은 없다. 자연인이 타락하였을지라도 아직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소유하였고 또 아직도 양심이 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호의의 태도 이 말은 종종 사람이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상을포함함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마음속에 믿음과 회심이 생기게 하는 호의 하나님의 호의나 혹은 은혜 때문에 우리가 가지게 된 모든 좋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신비로운섭리 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반대한 비방에 답변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곧 택함받지 못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이 호의 혹은 은혜를 보이셨다. 그들이 일반 은총을 감사할줄 모르고 회개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7 장 칼빈주의 문화관
지금까지 말한것에 의하여 결론지을 것 같으면 죄가 주장하고 있는 곳에는 창조세계에 대한 조화로운 문화 개발이 결코 쉬울 수 없다. 죄가 항상 파괴하려 하기에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문화적으로 발전시키기 어렵다. 언제나 죄가 과학과 예술과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주장하고 있는 한 죄는 항상 혼돈을 가져오며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또한 인간의 이상을 왜곡하게 한다. 오늘날 서구 유럽의 문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념이나 능력이나 은혜나 계명에서 떠나면서 부패하여 몰락하여 간다 칼빈주의자로서 우리는 어떤 점에서 변호하기에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성경적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스나 로마나 기타 불신자 사회의 어디서든지 문화가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그 문화 유산의 발전이 백성들의 죄악성을 극복하고 항거하도록 하나님이 육성기킨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완전히 성취되는 세계가 미래에 올 것을 생각할 때에 문화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문화의 승리가 오며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문화의 가치가 계승된다.
제 2 부
칼빈주의의 정치적 견해
제 8 장 칼빈주의 와 정치학과 성경
칼빈의 정치사상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를 하였는지를 페어베언씨가 이렇게 지적하였다. 역사에 있어서 칼빈이 가장 높이 평가되는 주요한 주제는 입법자로서의 그의 성공에 기인한다 신학자로서 그는 개혁자의 추종 자 에 볼과 했지만 입법자로서는 칼빈이 선구자이었다. 그의 정치학설은 새로 개척된 원리들 위에 사회적의 확증 안에서 전개되었다. 확실히 그는 독창적으로 정치적 체계와 법률적 체계를 건설함으로써 후대의 민주주의 제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칼빈이 새로운 지반을 개척하여 정치적 원리를 선포한 것이 사실이지만 칼빈주의적 국가관으로서 완전하게 전개하지는 않았다. 이 작업은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칼빈주의자는 그의 모든 사상을 다 성경에서 뽑아 내온다고 주장하는것처럼 생각함은 잘못이다. 칼빈주의자가 성경을 정치학의 기초로 채용함은 독특한 처지이다 국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권위로서 저들은 성경에 호소하지 않고 대중의 의사나 개인의 정의감이나 혹은 인권에다가 호소한다 칼빈주의 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는 국가에 관하여 주장하여야 될 여러 가지 의견을 하나님의 뜻에 기준해서만 결정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주권자인 사실이 고백되어야 함과 같이 성경도 모드사람의 모든 일을 결정하는 법칙인 것이다. 성경을 무조건적으로 또 적극적인 법칙으로 채용하는 큰이유는 우리가 칼빈주의적 정치관에 대한 여러 부문을 연구할때에 점점 더 분명하여질 것이다.
제 9 장 국가의 기원과 기능
국가가 어떻게 생겼는가 ? 국가마다 다 꼭 같은 모양으로 기원하지 않았다. 이문제는 오히려 대답을 요한다. 국가는 서로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를 세우기로협약하였다.고한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곧 국가의 구성은 사회가 점점 복잡하게 되어 감에 따라서 생겼다 다시 말해서 본래 사람은 각자가 자기의 하고싶은 대로 행하였다. 칼빈주의자에 의라면 국가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으로 인하여 자연히 생겨졌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사회적 충동에서 국가가생겼다. 그러나 국가는 보통 사회 이상의 기구이므로 이 결합력을 가진 사회적 본능만이 국가의 기원이라고볼 수는 없다. 국가는 일정한 목적을 위하려 조직된 정부를 포함한 특수 사회이다. 독립된영토 안에 거주하는 단체가 자체의 총체적인 복리를 중진시키며 공동 목적을 e랄성하기 위하여 결속될때에는 그 단체가 정부의 기구 지배자 법률 등을 요하게 되며 이 법률을 시행하기 위하여 법원 경찰 육군 해군으 fdy하게 된다. 그러면 인류 사회 의 성원들로서 공동 이익의 추진과 그단체의 총체적인 복리 증진과 정의 수행을 위하여 정부를 조작하는 국가 구성의 운동도 역시 사함을 휘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처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위에말한바의 국가의 권한은 생활의 전반에 미치는 wjfefo적 권한이 아니고 확실히 제한된 권한이다. 그리고 타락후 국가는 이러한 문화적책무 외에 역시 사회 성원들 중에서 상호간이나 또는 국가 전체에 대하여 정의를 수행하게 하는 책무를 맡았다.
제 10 장 최상의 국가 형태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상 국가의 특성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죄악세상에는 결코 하나님이 정하신 세계적 국가란 세워질수가 없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이 죄악 세상에서 통일된 세계 나라이든지 아니면 세계 제국을 선호하지 않는다. 또한 칼빈주의는 군주 정치나 과두 정치나 민주정치나 혹은 기타 어떠한정치든지 어떤 한가지 정치 형태를 지정하여 선호하지 않는다. 성경이 선언하는 바대로 하나님은 오늘날 여러혀태의 정부를 통하여 다스리신다. 국가는 반드시 기독교 국가이어야될까 이것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첫째 이 문제는 글스도교적이라는 말의 용어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좌우된다. 매우함리적인 의미에서 국가란 전혀 그리스도교적 기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반은총에속하는 기관인되 이 기관에 의하여 하나님은 그 섭리로 죄를 견제하고 도덕적 세계 질서를 촉진시킨다. 둘째로 그리스도교적 이란 말으너 국가에 적용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교적이란 말이 국가와 관련되는 때에 그리스도가 교회의 통치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영역은 특별 은총이 아니라 일반 은총에 속하였으므로 중보자 인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에 직속 되지는 않는다 해도 창조주이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주권 하에는 복종하여야 된달.
제 11 장 정부의 형태
교회 형태에 있어 칼빈주의는 기계적 단일성을 지지하지 않는다. 진정한 칼비주의적 교회들이 다 그 공동 원리에 있어서 는 일치하나 그들의 30종이상이나 되는 신앙 고백서와 그들의 역사적 교회 조직에 있어서는 얼마나 그들이 서로 같지 않은 점들으 나타내는가 정치 활동의 일체 행동에 대한 객관적인 완전한 기준인 성경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채용함으로 주관주의와 이기적 개인주의를 위한 모든 변명을 막아 버리게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주의자들의 정치적 견해로서 중앙 정부에 대한 국민의 권리와 자유문제에중요한 관계르 f가지고 있다. 그견해는 지방 분권과 지방 자치라는 말에 포함된다 칼빈주의자가 옹호하는 정부 형태에 영향을 주는 종류에 한하여 말하였다. 그것들은 다른 것들에 비하여 볻라 중요한 것이다. 개인과 단체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또 다른 안전 보장의 원리들이 있으니 그것들은 정부 형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제 12 장 정부의 직무
어떠한 정부이든지 첫째로 중요한 책무는 정의를 수행함에 있다. 인류사회에서 법의 위엄을 수호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다. 정부로서 공의 실시를 위하여 제정한 법률은 보통으로 이렇게 분류될 수 있다. 곧 1 사법 개인과 단체가 가능한 관계를 취급하는 것 공법 개인과 정부와 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다. 혹은 다음과 같이 분류 할 수도 있으니 민법 형법 또다시 다른 관점에선 이렇게 분류한다 헌법 헌장에 포함된 법의 원리들을 취급하는 것 일반법 불 성문법 성문 법 이다. 정부가 그 원리 시행의 책무를 다하기 위하여서는 법을 제정하는 입법부와 법을 실시하는 행정부와 법대로 판결하는 사법부를 가져야 한다 정부는 그 나라의 권리와 영토를 침략하는 모든 외국 세력을 방어할 의무를 갖고 있다. 대외적으로 두 번째 중요한 의무가 국가가 국제적 일원으로서 여러 나라 들 사이의 관계에 생기는 국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협조하는 일이다. 칼빈주의가 바라는 것은 그런 국적 시책들이 국민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구제심을 파괴시키지 않도록 또는 사회나 교회나 개인들의 자선 기관의 기능을 마비 시키지 않도록 시행됨이다 칼빈주의자는 국가가 경제 공황을 당하였을 때에 개인 가정 교회 기타 기관들이 필요한 보조를 할수 없을 경우라면 정부가 임시 구제 대책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론의 내부적의의 와 역사상운동력에 있어서 프랑스의 낙관적 평등주의적 민주주의나 국가 사회주의나 공산 사회주의나 또 단순한 권력설 등은 칼빈주의와 비교할 때에 뒤떨어진다고 하였다. 이것이 진정으로 칼빈주의에 대한 매우 고귀한 찬사임에 틀림이 없다.
제 13 장 정부의 권위
하나님 일류 사회의 다른 단체들에게도 각기 필요한 권위를 맡겼는데 가정에선 부모에게 학교에선 선생에게 교회에선 교직자에게 사회의 여러 법인 단체에서 그 책임자들에게 맡겼다. 정부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이런 권위들에 대하여 공무원으로서 침범하면 안 된다. 국가의 지도자들의 권한은 항상 자체의 고유한 기능을 발동하는 데만 국한되어있다. 이렇게 간단한 역사적 고찰에서 칼빈주의가 본 통치자나 공무원의 권위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이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로 존속된다는 것
② 이 권위는 하나님이 결코 통치자와 공무원들에게 아주 양도해 버리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로 있을 뿐이라는 것.
③그들의 권위는 각기 맡은 행정권 안에서만 제한되었다는 것, 그것은 국민의 전체적인 삶 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 학교, 교회, 기타 사회 영역은 각각 하나님에게서 받은 영역이 있으니 거기에 국가의 권위가 미치거나 침해할 수 없다는 것.
④ 이 권위는 국민의 복리를 위하여 있다는 것.
⑤정부나 통치자나 관리들은 국민을 경우하여 선택되었으며, 그들은 국민의 동의를 얻어 가면서 통치해야 한다는 것. 즉 교회에서와 같이 국가에서도 국민이 감독권을 소유하였다는 것.
⑥국민이 하나님을 위하여 정부에게 정당한 존경. 복종. 봉사를 해야한다는 것. 즉 한 개인적 국민으로는 결코 행정적 권위를 받지 못하였고 다스릴 권리도 없으니 한 개인적 국민으로서 그들이 하여야 되고 또 어떤 경우에서는 할수도 없는 최선의 행위는 그들의 양심에 반대되는 일을 관리들이 요구 할때에는 언제나 소극적인 저항을 할수 있다는 것 등이다.
제 14 장 국민의 자유
국민은 정부에 대하여 어떤 일정한 일들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인생은 누구나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내적 갈망이 있다. 정부는 국민의 복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 만큼. 국민들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정부의 도움을 바랄 권리를 가졌다.
1.국민이 누릴 자유
우리는 국가로서 국민의 특권을 반드시 보장하고 안전하게 하여야 할 그 국민들의 특권을 네가지 항목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말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려는 모든 사람에게서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주장할수 있다.
둘째. 국민이 주장할수 있는 특권은 국내에 있는 그들의 특수 할동 영역에 관계된 것이다.
셋째. 국가의 임무는 국민의 ‘물질적 복리에 관계된 것이다. 국가의 임무는 국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선 인간이 각기 가족과 자신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일할 의무를 가지게 하셨다.
넷째. 국가가 국민들을 위하여 보증하지 않으면 안될 특수한 종류의 특권은 그들의 영적인 실재 에 관계된 것이다. 영적자유란 것은 곧 영혼의 자유이다. 즉 말의자유,언론자유, 출판자유, 신앙자유다. 한마디로 양심의 자유이다. 선택을 믿는자는 자기의 도덕적 소명이 이룩할 목표를 위하여 선택될 줄 안다 칼빈이 창설한 국민의 자유 의 아름다움은 그 것이 법과 질서의 노선으로 진행되다. 사실과 권위를 존경하는 주장을 지니고 있는 사실에 특히 주의할만하다.
제 15 장 사회 모든 영역의 주권
정부의 주권과 사회 여러 영역의 주권과의 관계는 무엇이냐 이상적으로 는 양자의 권위 사이에 본래적으로 충돌이란 없다. 간다히 말하자면 사회 모든 영역에 대한 정부의 책무는 ①여러 영역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방지하며 또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많은 책무를 자유롭게 수행할 조건들을 추진시켜 줄 것과
②개인과 약한 단체에 대하여 강한 세력이 주권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보호할 것
③국가의 유지를 위하려 정부는 백성에게서 필요한 인적 또는 재정적 의무를 요구할 수 있다.
제 16 장 교회와 국가의 관계
칼빈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삶의 모든 영역 안에서 인식되어야 하며 따라서 정부의 영역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 이에 의하여 인류가 지배받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본래 자연 안에 계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피상적으로 인간의 마음판에 새겨 두어서 그러기에 오늘날 인간이 범죄를 한 이후로 인간의 본성으로만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는 이 자연적 의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다 성경에 이미 계시된 하나님이 뜻에 의하여 교정과 지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수 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영원한 원리들은 교회와 국가를 위한 지침이 되는 규범인데 이 원리들이 두 영역인 국가와 교회의 공동 기초를 구성한다. 더욱이 칼빈주의 자는 사회 생활의 각 영역 자체의 영역 안에 관계된 사항에서 자주권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한 진리를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서로 조화하며 협력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두 영역은 다 하나님의 기관이다. 양자는 다 죄를 제지하려는 기관으로서 전자는 일반 은총영역에 속하고 후자는 특별 은총영역에 속한다 이 두 영역들이 다 적극적으로 사회의 도덕적 이상을 추진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로 전진케 하나니 첫째로 국가가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하여 중립적 태도를 취할 수가 없다 그런 태도를 취하면 국가는 실제로 무신론 국가가 되어 버려서 사회생활의 모든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국가는 결코 어떠한 형태로든지 국가 교회를 건설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로 국가는 신령한 일들이 아니고 세속적인일 들에 한하여 교회에 관계할 권리를 가졌다. 교회가 국가에 끼칠 기독교적 감화 운동은 다음 몇 가지 방면을 통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① 교회는 복음을 전할 때 에 정치적인 삶을 위시로 하여 인생 생활의 모든 방면에 관계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들을 명백히 가르칠 것
②그리스도인 과학자들과 그리스도교 단과대학 종합대학교는 그리스도교적 기반에 입각하여 국민 생활 관계의 성경 진리들을 해명하여 전개시킬 것
③그리스도교 출판물과 그리스도교 방송과 교회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들에 대한 일반 국민의 호의를 얻도록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제 17 장 국제주의
현대의 역사를 고찰하여 보면 국제 주의 정신이 다시 증진되고 있다. 국가들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상호 관련 성은 보다 유효한국제적 관계 조성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한다. 국제적으로 이렇게 느끼게 된 사실은 수차의 국제적 모든 회의와 평화회의를 개최하게 하였다. 이를 케면 1899년의 헤이그 평화의 1906년의 제 2제네바회의 1907년의 제2 그회의1920년의 국제연맹 또 현재 의 국제 연합 등이었다. 그러나 잘 조정되는 국제 관계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금일에 전체적으로 채택되었다 고 결론 해 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정도에 휠씬 미급되어있다. 사실은 국제법의 진보는 확실히 난항을 하고 있다. 최근에 국제 연합이 주는 실망은 그것이 진보하는 것보다 도리어 퇴보의 일로를 보여줌이다.
제18 장 국제주의와 국제 연합
칼빈주의에서는 근대 칼빈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국제주의에 대하여 언급할 것도 없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이다. 칼빈은 비록 종교전쟁에 대하여 많이 논이 하였지만 평화적 외교와 전쟁에 의한 외국 간섭의 권한 문제와 또 전쟁 문제등 국제 문제에 대하여 문헌으로 많이 증언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전쟁을 반대하는 인도주의적 또는 윤리적 운동으로써 평화를 추구하려는 국가들 사이의 조약체결이나 중재 재한 수의 제도를 설치하려는 제반 노력들은 얼마든지 칼빈의 문헌에서도 가치있는 사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땅에 거하게 하시고 인류가 만일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인류 사회에 크고 작은 단체들이 가자의 문화적 임무와 그 임무에 적합한 각자 영역의 중권도 잘 활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이렇게 믿는다. 곧 인류가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무죄 세계에서는 각 민족의 다양성과 전 인류의 통일성이 함께 정상적으로 발달되었을 것이
제 19 장 국제법
이러한 국제 연합은 중추적인 통치 기관이 필요로 하는 데 국제 법정으로 하여금 국가 연합의 업무를 관할키 위함이다 이같이 성경적인 법리학에 대하여 세가지로 답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 인간의 법에 최종적인 근거로서 수용할만한 것이 없다.
둘째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자들의 사상과 성경을 표준으로 믿는그들의 견해가 불신자에게는 용인될 수 없고 따라서 현세에서 적용될 수없다는 반대측 견해는 사실이 아니다
셋째로 실제에 있어서 국제법의 규준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주장하는 성겅적 표준에 대치될 만한 효과적인 대안이 없다.
국제법실시 문제에 관하여 말하자면 외국에 거주하는 어떤 나라 국민의 권리나 의무에 관한 법과 국가단위로 가질 각국의 상호 관계에 대한 법으로 분간하여 말할 수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개인적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는 모든 국가가 준수하기로 언약한 법에 의하여 결정되고 또 보호되어야 한다. 어떤 나라든지 다른나라와의 관계에서 주장할만한 권리들은 편의상다음 세 가지로 분류할수있다.
첫째로 각국의 자체 보존과 독립의 권리를 소유하였다. 어떤 나라든지 타국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타국들이 그 나라의 영토와 정당한 모든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둘째로 자아를 발전시킬 권리들을 소유하였다.
셋째로 국가의 존엄성을 주장한다.
위에 말한 국제적 관계들을 지휘하기 위하여 공약된 일반적 법규들은 국제 법정이 소유하고 있다. 이런 국제 법정을 소유한 국제 연합의 가치는 우리로서 잘 알 수 있다. 어떠한 국가 간에든지 맺어지는 협정들이 국제 정의의 일반적 표준과 일치함에 있어서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결국에 가서는 관계된 모든 국가의 형편은 점점 더 양호하여질 것이다.
제 20 장 전쟁사
전쟁의 기원은 거의 인류의 기원과 같이 오래다. 그러나 거의 같은 것이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명백히 말하면 그것은 죄악의 기원과 같이 오랜 것이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전쟁의 이유를 성립시킨 두 가지가 생겼다.
첫째로 이 세상에 반대되는 두 세력의 대립이다. 곧 의의 세력과 악의 세력, 하나님과 마귀의 대립니다.
둘째로 죄악이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생긴 전쟁의 원인은 인생 생활 그 자체를 부도덕하게 만드는 죄악의 부패성이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요 그 가운데서 현세적인 의무도 수행한다는 의식이 그들에게서는 잘 진전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평화적 방법이나 혹은 전쟁의 방법으로 국제적 문제들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과제 앞에서 그들의 태도는 냉정하다.
제 21 장 성경과 전쟁
구약의 윤리는 전쟁을 허용하였지만 신약의 윤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혼돈으로는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적 신앙에 의하면, 성경 전체를 통하여 시종 일관한 유일한 윤리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전이란 것은 평화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사람의 영적 관계에 직접 관련되는 것이다. 그가 행한 전쟁이 영호와의 전쟁이라고 할지라도 천국은 다윗과 같은 전쟁의 사람으로 합당하게 상징될 것이 아니라 평화의 왕에 의하여서만 적절하게 표징될 수 있다.
그러나 전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는 이 죄악 세상에서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정의가 확보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의를 무저항주의로만 대한다면 탐욕과 이기주의와 정욕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곧 성하여져서 생명, 자유, 질서 있는 사회의 행복을 얻기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력에 의한 정의의 질서 유지를 개인 국민에게 맡기지 않고 정부에 맡기셨다. 이 문제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인의 범죄를 법적 처형으로 제재할 뿐만 아니라,
적국의 침략을 막는 전쟁에 의하여 영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주권자들에게 무장을 하게 한
것은 자연적 공평의 원리에서 또는 직무상 성질에서 명령된 바이다. 또 이러한 전쟁이 정당
함은 여러 성경 구절들에서 성령이 증거하시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전쟁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정의로운 전쟁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일어난다.
1) 정의의 보존을 위하여 한 나라가 반드시 불의한 반역적 행동을 진압하여야 할 경우,
2)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한 할 수 없는 경우,
3) 박해를 당한 나라나 민족을 원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4) 불의한 침략자를 응징 조치로써 국가 연맹에 참가하는 경우이다.
전쟁 자체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함 여부는 우선 별개로 하더라도 전쟁의 실제적인 행위는 옳은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이 절대로 페기될 수가 없으며 이로 인해서 난관이
따를지언정 갈등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의 법을 따라 나가야 한다. 우리가 열 명의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서 수천 명의 인명을 죽게 할 수는 없을 수 있다. 포로자들이 인도적으로 대우를 받으며 비전투 요원들이 전쟁의 공격에서부터 보호와 안녕을 보장받도록 해 주어야 한다. 현존하는 헤이그나 제네바 협약들에 근거로 하는 전쟁의 규례들을 준수해야 한다. 전쟁이 지향하는 목표는 대적을의 멸족에 두기보다는 세상 가운데서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는 데 둔다. 인류는 전쟁 가운데도 보존되도록 해야 된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느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전쟁할 대에 도끼를 둘러 그곳의 나무를 작벌하지 말라고 지시 하셨다.
제22장 그리스도의 의무
“이는 너희의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밭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오직 과목이 아닌 줄로 아는 수목은 작벌하여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나라.”(신 20:19~20)
전쟁 방지의 억제력을 도출시키고 또 그리스도의 신앙을 고백하는 각국 지도자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적합한 국제법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핵위기를 제한하는 법들과 협약들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런 협약이 효율성을 갖기 위해서 전쟁 중에 일어나는 여러 범법 행위들을 조사할 수 있는 기관들이나 안전 수단이 필요로 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핵 전쟁의 위협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따아서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서 국제 관계를 누룩같이 발효시켜야 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인류 파멸에서 보존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꼭 기억할 점은 우리 소망은 인간의 위대함에 있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 가운데 있다는 점이다.
제 23 장 그리스도 교인 된 국민과 전쟁
전쟁에 대한 기독교인의 첫째 의무(사실상 가장 중대한 의무)는 전쟁이 생기기 전인 평화시의 행동에 관한 것이다.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확실히 신자의 의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서 가장 효과적인 평화주의의 성안에서 안주하고 있었다. 전쟁을 방비하는 가장 유력한 무기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복음에 있다.
첫째로 국민은 정부에 순종할 의무가 있으며 더욱이 하나님을 위하여 더 높은 위에 있는 권세를 복종하여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생각해야 된다.
둘째로 기억할 것은 국민에 대한 정부의 권위가 절대적이 아니고 일정한 제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정부는 가정, 교회 등 인류 사회에 속하는 어떠한 부문에서든지 합법적으로 구성돼 있는 것에는 무엇이나 간섭할 수 없다.
셋째로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정부의 의무요 개별적인 국민의 의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선전 포고는 분명히 정부의 권한에 속한 것이니, 이것을 위하여 정부가 검의 권세를 받았다.
중대한 사안이란 것은 정부로서 하나님이 분명하게 금하였던 말씀에 대하여 국가의 정권을 가지고 너무 지나치게 월권했다든지 그리고 정확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심사 숙고한 답변이 있어야 된다. 정부는 그 국민의 시민적인 양심을 존중해야 된다. 양심이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도덕적 의식으로서 그 생래적 도덕 법칙에 따라서 자신의 의사와 행위를 판단한다. 그렇다고 하여 양심 그 자체가 인간 행위 문제들을 결정하는 최후 호소의 법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후 호소의 법정인 양심이란 것은 항상 도덕 법칙 그 자체이니 인간의 양심은 스스로 양심 법칙에 제한되는 줄 아는 일이다. 양심이란 인생에 대한 최고 판단자인 하나님의 도덕적 법칙에 인생이 규제되어 선하고 바르게 행하려는 마음의 작용이다.
제 24 장 해방신학
해방 신학자들이 주장하기를 정치와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이해하는 “신학”이라는 것은 정치와 경제에 기인한 것이고, 지배하는 압도적인 억압을 극복할 수 있는 신학이 바로 정치 신학이며 또한 “해방 신학”이라는 점이다. 해방 신학자들이 강조하는 점은 신학이 추상적이거나, 객관적인 사유 추구가 아니라 가난한 자의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또한 억압받는 체험에서부터 자유를 향한 신학의 행동지침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신학 자체는 사회적, 정치적, 또한 경제적인 분석들을 통해서 보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바 사회 정의가 부의 분배로 오는 유물론적인 경제 윤리를 공통점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해방 신학자들의 상당한 수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사용하는 “사회 분석의 도구들”을 한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적이 해방신학이 지향하는 일치점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논의하지 못하는 것은 거기에도 매우 큰 차이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점들과 지역들과 대륙들을 제쳐놓고 서라도 각 나라 안에서도 신학의 차이점들이 많다. 폭력의 가능성을 수용하는 반면에 다른 신학자들은 결정적으로 비폭력적이다. 해방 신학은 전통적인 로마교 입장에서 많이 이탈했다. 전통적으로, 로마교도주의는 자연의 영역과 은혜의 영역으로 세계를 나누어 본다. 자연의 영역은 인간의 육체계, 이성계, 과학, 정치의 영역이 있는 “이 세상”을 의미한다. 은혜의 영역은 성령의 영역, 기도의 영역, 거룩의 영역, 교회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영역은 성경적인 가르침의 배타적인 핵심이며 또한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봉사의 영역이다. 다른 편에서 자연의 영역은 반 그리스도인과도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 영역의 원리들은 자연적인 이성으로도 찾을 수 있는 영역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든지, 반 그리스도 인들이든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이 피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중립적인 영역으로 설정할 수가 잇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많은 면에서 이 로마교계의 비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해 왔다. 교회 개혁은 하나님께서 삶의 전체에 대한 관여를 강조했다. 해방 신한은 전통적인 로마교회의 복음 범위의 협소화를 향한 비판 가운데서 발전하여 정치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재 강조를 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든지, 저런 방식으로든지 프로테스탄티즘과 병행하려는 추세임에는 틀림이 없다. 해방 신학은 주님의 말씀이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게다가 교회도 매우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해방신학의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과실들에 대해 정검이 필요하기에 해방 신학은 칼빈주의자가 전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신학의 핵심이 될 수 없다.
해방 신학의 두 번째 문제로는 이 세상의 사회적인 필요들 안에서 복음을 개념화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란 좌익이든지 우익이든지 복음의 본질에서 살펴서 분별하지 않고서는 바른 성경적인 대안이 될 수가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해방 신학에서 배격할 점은 복음을 수평적인 측면을 너무나 강조하려다가 보니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 추락시킴으로써 이 세상의 세계관인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추구하여 나간다는 점이고 또한 국가가 곧 모든 인간 문제의 해결의 기본적이고 또 최종적인 대안의 종착지로 보는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 25 장 정치적 소망
우리 세상은 마귀에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창조 세계를 치료와 소망의 징조로 보존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낙관주의에 빠져 들 수가 없다. 우리가 인류의 성향, 실패들과 결과들에 대하여 건전한 판단 자 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만물
가운데 선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한다는 약속에 힘입는 일이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즉 전반적인 인간 상태의 근본적인 변화을 요구하기보다는 진정한 변화는 우리의 삶에 정의와 평화의 진정한 열매를 그리고 우리 이웃들에게 좋은 결과을 가져오게 하는데 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미래 지향적으로 여기서 또 지금 성별된 삶의 열매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길은 주께서 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우리 자녀들을 일으키고 적적할 삶을 살아가며 정치적으로도 활동하며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모든 면에서 책임지는 삶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소망과 큰 기쁨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불안전한
사역들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에 우리가 믿는 바는 하나님이 부족한 우리들을 용인하고 또한 온전케 하신다는 것이다. 세계 자체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새롭게 되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의 도래하여 완성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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