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종교적 배경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이셨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하였고 그 최초의 교인들 역시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종교적 배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곧 유대인의 종교 그 자체이다.
유대인의 종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들은 세례 요한이 나타나기 400년 혹은 그 이전에 활동하였다. 그때 이후로 오늘날까지 유대인의 종교는 일어서지 못하였다. 구약의 전통적인 종교는 유대교로 발전(어떤 이들은 전락하였다고 말할 것이다)하였다.
유대교의 몇몇 중요한 제도들
성전 :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귀환한 유대인들이 건축한 간소한 성전(스룹바벨 성전)은 헤롯 대제(B.C. 40-4년)의 명령에 따라 지어진 웅장한 건물로 대체되었다. 헤롯의 성전은 B.C 19년에 착공하여 예수 당시까지도 준공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요2:20) A.D. 64년에 이르러 완공하였으나 불과 (2:20) A.D.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놀라게 한 (막13:1) 것이 바로 최고급의 화려한 색깔들을 가진 거대한 돌들과 대리석과 황금으로 지어진 복잡하고도 위압적인 이 성전의 건물들이었다. 여기서 제사장들과 성전 수종자들의 집례로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제사의식과 경배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안토이나 요새의 로마 수비대가 성전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낱낱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행 21:31이하).또 이방인의 뜰(이 뜰에서 이방인이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였다-행21:28-29: 엡2:14)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여움을 샀던 장사하는 자들(비둘기등 제물들을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성전세를 위한 환전상)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지붕이 가리워진 행각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무릇 자신의 뜻을 펴고자 하는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회당 :
성전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으나 각 지역사회는 그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제사의식이 거행되지 않았다. 회당은 예배와 율법연구의 지방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안식일에는 회중이 모여 남녀간에 자리를 따로 하여 앉아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을 듣고(눅 4:16이하) 또 기도식에 참예하였다. 그러나 회당은 예배처소 이상의 무엇이었다. 그것은 지역사회 학교요 공동체의 중심이요 또한 지역행정의 본부였다. 회당의 장로들은 그 지역사회의 행정당국자들이요 행정관들이요 공중도둑의 파수꾼들이었다.육법과 유전 :
이스라엘은 모세 이후로 율법을 항상 지녀왔다. 그러나 에스가 시대(B.C 5세기,선지자들의 율법에 대한 백성의 불순종이 초래한 직접적인 결과로 보았떤 바벨론 포로생활이 풀려 고국으로 귀환하던 시대)이후로는 율법의 연구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고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학자 백성"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 철저한 율법연구는 "유전"의 목록이 점차 비대해져가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유전들은 율법 못지 않는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데까지 나아갔다. 율법과 유전의 직업적인 연구생들이자 전문가들인 서기관들은 모든 경우들에 대한 규례들을 정하여 둘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금지된 행위에는 39가지의 형태가 있었는데 추수하는 일과 타작하는 일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는 것도 역시 금지사항에 해당되었다(눅 6:1-2).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행 1:12,3분의 2마일 정도)은 허영된 최대치였다. 애석하게도 유전의 세목에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서기관들은 때때로 율법 자체의 보다 더 중요한 부분과 관심사를 잊어버리곤 하였다(막 7:1-13,3:4-5,마23:23).유대교의 분파와 당과 운동들
바리새파 :
이들은 종교적인 순수주의자들로서 B.C. 2세기의 "하시딤" (하나님의 충성된 자들)에서 발전하여 정치적인 일들보다는 종교적인 일에 전념해 온 집단이었다. 그들의 최고 관심사와 기쁨은 율법(물론 유전도 포함하여)을 낱낱이 지키는 데에 있었다. 이 표준으로 판단할 때 그들은 모범적인 유대인들이었다(빌3:5-6). 이 목적으로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그들은 십일조(하나님께 드리는 10분의 1)을 드리지 아니한 음식일 경우 바리새인 아닌 자로 더불어 함께 식사할 수가 없었다.아마도 필연적으로 이같은 분리정책은 그들보다 못한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너보다 더 거룩하다"는 그들의 태도는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을 오늘날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사랑과 자비에 앞서 엄한 율법준수를 요구하고 메마른 율법주의자와 혼합된 이 오만한 태도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통신앙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범한 오류와 교만과 무정한 생활자세를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의 영향은 그들의 숫자에 비하여 미미한 것이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로 유대교가 발전해온 것은 바로 이들의 노선을 따라서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경건과 엄한 윤리표준.그리고 더 잘 알려진 가혹한 율법주의에 계속 강조점을 두어 왔다.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존경은 받았다.
사두개파 :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당시 또 하나의 주요 분파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정치적인 이점을 교활하게 이용하여 유력한 지위를 확보해 두었던 부요한 지주회(유대 최고 종교회의)에서 바리새파와 거의 대등한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었다(행23:6-10).대제사장들 중 상당수가 사두개파였거나 친사두개파였다. 그들의 종교적인 입장은 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이외의 어떤 계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멸과 부활, 천사와 귀신들을 믿는 신아과 같은 보다 최근의 관념들을 배격하였다.이점에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입장을 달리하였다(막 12:18,행23:8). 하나의 귀족적인 소수 공동체로서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지지를 별로 못받았다.엣세네파 :
상당히 그늘에 가리워져 있던 이 "분파"는 1947년 이래 사회사본의 발견과 더불어 극적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사해사본은 사해에 가까운 광야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던 한 은둔종파인 쿰란 사회의 도서관에서 나왔다. 비록 이 종파가 옛세네파였는지는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을지라도 분명히 유사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종파는 달리는 알려지지 아니한 "의의 선생"에 의해서 필시 B.C. 165년경에 창건되어 A.D. 68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유대 반란 사건 때에 파멸되었다.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포함한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다 그들의 원수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빛의 아들들"로서 "어두움의 아들과"의 최종적인 전투에서 마땅히 그들의 것이 될 승리와 통치권을 쟁취할 날을 바라보며 살았다.그 동안에 그들은 성경연구에 골몰하고,엄한 은둔 생활 훈련을 하며, 그들끼리는 서로 사랑하고, 밖에 있는 모든 자들은 철저히 미워하면서 그들 스스로를 지켜 나아갔다. 그들은 정성을 다하여 상세한 성경주석들을 펴내었고 구약의 모든 문구들과 구절들을 그들의 처지와 기대하는 것들에 적용하였다. 그들은 두 메시야 곧 아론의 (제사장적인) 메시야와 이스라엘의 (왕적인) 메시야-어쩌면 두 역할을 겸한 한 메시야-의 강림을 고대하였다. 쿰란 문서가 그 종파 자체에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예루살렘의 유대교와는 아주 거리가 먼 하나의 금욕적이면서도 묵시적인 유대교의 경향이 또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예루살렘의 유대교는 이 고립된 집단의 유대교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다. 1947년 이전 같았으면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유대인들"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려 했을 것이나 이제는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한 금욕주의자 공동체의 수도원이었던 사해 근처 쿰란(Qumran)의 폐허. 로마군의 침입 위협을 인하여 그들의 장서였던 사해 사본들이 동굴들에 숨겨졌는데 1947년에 극적으로 다시 발굴되었다.
열심당 :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로마의 통치를 최대로 이용하려 했고또 쿰란 사회가 하나님의 강권적으로 개입하여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리라는 꿈을 가졌던 반면에 많은 유대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구원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뒤에 와서 열심당으로 불리게 된 이 집단은 유대백성의 혁명군이요 자유의 투사들이었다. A.D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건을 초래한 대 반란의 불을 붙인 것이 바로 열심당이었다. 예수 당시에도 실패로 끝나긴 했으나 이미 산발적인 반란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행 5:36-37참조.필시 바라바도). 또 백성들도 반란을 일으킬 태세가 되어 있었다. 애국심에 불탄 열심당원들은 로마에 복종하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이라는 신앙에 호소하였다. 적어도 사도들 중에 하나는 이전의 열심당원이었다.묵시 문학 운동 :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포칼립스"(묵시) 로 알려진 문학형식이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B.C. 2세기 이후로 팔레스타인에서는 ㅁ많은 묵시문서들이 저작되었다. 그 문서들은 하나의 강력한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곧,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빛과 어두움은 서로 충돌하고 있어 도무지 화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 세계질서는 악의 세력의 지배하에 있으나 최후의 결전이 있게 될 것이며 그후에는 판도가 바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반대자들을 물리치시고 모든 악을 영원힌 멸하실 것이며 새롭고 복된 백성이 모든 압제에서 풀려나 영과 ㅇ중에 통치하게 될 것이다.이러한 메시지는 자주 특별한 환상들을 통해서 상징적인 숫자들과 세심한 날짜와 연한 및 시대의 계산과 함께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대개는 신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소망을 갖게 하는 메시지요 유일하신 참 하나님 곧 이스라엘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호소하는 승리적인 메시지였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묵시문서이다(하지만 요한계시록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오류없이 기록된 에녹,모세,엘리야,혹은 에스라와 같은 구약의 유명한 인물들에게 돌리고 있는 데 반하여 요한은 그 기록한 계시록에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 밖의 중요한 차이점은 유대의 묵시문학가들은 과거의 역사를 그것이 마치 예언이나 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요한은 온전히 미래에 집중하고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메시야에 관한 소망들 :
메시야에 관한 묵시문학의 엄청난 환상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마음에 품고 있던 여러가지 소망들 중 어느 한가지만을 붙들고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5-19). 다시 올 엘리야(말4:5-6).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에게 승리와 평화와 영광을 가져다줄 사명을 띤 위대한 왕이요 용사인 다윗의 자손 등과 같은 구약의 여러 메시야적 인물들이 일반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방인들도 이 소망에 참예할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소망을 배타적으로 자기만족만을 위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영적인 회복을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였고 로마에 대전투적인 승리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메시야"(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는 것은 결국 정치적인 독립에 대한 소망을 고무시킬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 자신에 대하여 "그리스도"라고 칭하게 하는 데에 신중을 기하셨던 것은 놀랄 일이 못된다. 그는 자기들이 바라고 소망하던 것에 다같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온전히 연합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간절히 기다렸을 그러한 백성에게 오셨다. 그러나 아무도 그 위로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하였다.흩어진 유대인들 :
이제까지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만을 생각해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곧 팔레스타인 밖으로 퍼져 나갔고 거기서도 역시 유대인들과 첫 대면을 하였다. 적어도 B.C. 6세기의 포로시대 이후로 유대인들은 중동지역과 지중해 동편의 여러 나라들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A.d.1세기경에는 애굽에만 백만명에 달하는 유대 교포들이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이 전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고 대부분의 주요 도시들에 회당 (아니면 적어도 기도처, 행16:13)을 가진 유대인 집단촌이 들어서 있었다. 이들은 바로 흩어진(나그네) 유대인들이었다(헬라어로는 "디아스포라") 때로는 이들이 헬라파 유대인들로 지칭되었는데 이것은 약간 부당한 명칭이다. 알렉산더 대제의 정복과 함께 지중해 세계를 휩쓸고 그보다 더 먼 지역에까지 퍼져간 헬라문화와 사상의 파장인 "헬레니즘"은 로마제국의 문화에서도 여전히 그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또 팔레스타인의 보다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떠나 있던 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아무래도 헬라의 생활양식을 더 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의 구별된 종교와 문화를 포기하여 유대인의 신분을 저버렸다기 보다는 헬라사상과 접하고 그것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고자 한 것이었다. 후대의 유대인 저작물들 중 상당수,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온 저잘물들(예:솔로몬의 지혜서나 필로의 저작물)은 헬라 철학의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철학의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식있는 유대인 아볼로(행18:24)는 그가 기독교로 돌아오기 이전에 분명히 이 학파에 속하여 있었을 것이다.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 :
유대인들이 부당하게 완고한 배타주의자들이라고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자주 있다. 사실 특히 흩어진 유대인들 중에는 이방인들에 대한 사명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방인들을 유대교에 입교시키기 위해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일이 있었다. 유대인의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교지원자는 먼저 할례와 세례를 받아야 했고 안식일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례와 같은 의식적인 법규들을 포함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지키기로 서약해야만 했다. 그는 사실상 자기 본래의 민족성을 버려야만 했다. 이같이 엄격한 단계들을 거쳐서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은 상당수에 달하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퇴폐적인 다신교와는 아주 대조적인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과 엄한 도덕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믿음과 사상에 자신을 일치시킬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개종의 절차를 밟는 과정 앞에서 멈추고 있었다. 상당수가 부자요 영향력 있는 관리들이었던 이 유대교 동조자들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혹은 "경건한 사람들"로 알려지고 있다(행 13:26,43,50,17:4).사마리아인 대제사장 아므람(Amram) : 그는 오늘날 생존하고 있는 사마리아인 소수 공동체의 지도자이다.
사마리아인들 :
사마리아인들은 B.C. 722년 사마리아가 함락된 이후 그곳에 새로 이주시킨 이방 민족들과 피가 섞인 북방 이스라엘 왕국의 살아 남은 백성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유다와 협력한 적이 결코 없었고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불화가 분명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세겜을 내려다 보는 그리심산 위에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건축한 것(요4:20)은 유대인들이 이 이단종교를 배척한 증거였다. B.C. 128년에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파괴한 것은 유대인의 왕 힐카누스였다. 하지만 유대인이 그리하였듯이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그들의 권위는 모세오경(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구약성경은 인정치 않았다. 그들의 모세오경은 유대인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많은 유대인들처럼 그들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강림을 고대하였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증오아 멸시는 어떤 근본적인 신앙의 차이에서 온 것보다는 역사적인 측명과 인종적인 측면에서 온 것이 더 많았다.헬라인과 로마인의 종교
헬라인의 전통적인 옛 종교는 인간들처럼 사랑하고 다투고 싸우는 남신과 여신들의 신전과 함께 실제로 로마의 유사한 다신교와 융합되어 있었다. 그것은 헬라와 로마 문화의 일부로 보존되었고 또 공적으로 장려되었다. 대부분의 헬라인과 로마인들은 여전히 그 옛신앙에 공식적으로 동의하고 그 의식들에 참예하였으나 마음은 이미 그것들에서 떠나 있었다.로마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이 신들이 지방 신들과 결합하여 때로는 땅을 지배하는 에베소의 다산의 여신과 헬라인의 아주 순결한 아데미(Artemis)여신이 동일시되는 것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로마의 다이아나 여신. 행 19:24이하참조) 루가오니아 지방의 쓰스와 허메(Zeus Hermes. 로마의 Jupiter와 Mercury,행 14:11이하 참조) 숭배는 필시 그곳 지방신들에 전통적인 헬라 신들의 이름을 붙인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새로운 종교사상들이 일어난 것은 동방에서였다. 그중 하나가 황제숭배였다. 이것이 도미티안(A.D. 81-96년)이 자신을 "주와 신"으로 칭할 것을 주장할 때까지는 로마 황제들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장려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시대 전체를 통해서 아첨하는 신하들에 의하여 동방에서 자유롭게 행하여졌다.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도 헤롯 대제는 아구스도(Augustus,헬라어는 "세바스토스","경배를 받을자")황제의 명예를 위하여 사마리아의 이름을 "세바스데"로 개칭하였고 또 그곳에 아구스도의 신전을 지었다.
보다 갱니적이고 감동적인 믿음을 원하는 자들은 신비종교들에 빠져들었다. 헬라의 신비적인 요소들-엘류시스의 신비나 오르퓨스의 신비-이 서방에 알려진지는 오래였으나 로마제국의 영토확장과 함께 애굽(이시스와 오시리스/세라피스)과 페르샤(미드라스)와 그 밖의 동방 여러 곳에 퍼져 있던 유사한 신비종교들이 차이가 있었다.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일정한 가입절차를 밟아서 입교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일제의식에 참예시키지 않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의식들은 자주 신(페르세폰, 오르퓨스,오시리스,그리고 그 밖의 신들)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신화에 중심을 두었고 모든 입교자들이 다 참예하는 연극을 통해서 그 신화가 재연되곤 하였다. 그들은 공식적인 국가의 종교가 지닌 냉냉한 지성주의와는 아주 다른 따뜻하고 감동적이며 개인적인 헌신의 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점성술과 복술, 마술,마귀숭배,그리고 그 밖의 신비적인 관습들 역시 동방종교의 매혹적인 요소들로서 종교에 어떤 실재성과 실제적인 효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신약의 서신서들이 저작될 때 쯤에는 뒤에 가서 "영지주의"로 총칭된(A.D. 2세기) 수많은 종파들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세부사항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으나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기본 사상을 함께나누고 있었다. 이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이 물질로 만물을 창조하실 수 없었고 또 그의 아들이 그 물질세계 안에서 육신의 몸을 입으실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사이의 전반에 걸쳐서 종속적인 존재들을 대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물질세계의 악을 함께 나누고 있었으나 가능한 신의 불꽃을 포함하고 있다. 사람이 구속받기 위해서는 하늘에 근원을 둔 지식(헬라어는 그노시스)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같은 견해들은 환상적인 신화들에 표현되어 있었고 또 신비종교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영지주의의 여러 종파들의 초보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바울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당시의 세상은 "범사에 종교성이 많았다"(행 17:22). 사람들은 헛된 신화가 아닌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신앙을 원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구하고 참되고 실제적이며 만족을 주는 종교로 인도하는 길을 간절히 찾는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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