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학파와 알미니안 학파
http://blog.naver.com/midas7000/120020060720 |
히브리서나 마태복음 25장에서의 "징계와 보상"의 문제를 진지하게 살펴보시면 두 학파가 양극단으로 치우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래 글이 길지만 찬찬히 살펴보시면 두가지 다 옳지만 두가지 학파의 주장을 보완하고 균형잡아 주는 것이 바로 "징계와 보상"의 문제입니다. 1. 두 주요 교리의 학파 이 점에서 우리는 두 주요 교리의 학파-칼빈주의 학파와 알미니안 학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칼빈주의 학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과 예정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 학파에 따르면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시고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더 이상 문제가 없으며, 일단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우리의 구원은 영원토록 안전하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요한복음 10장 28절부터 29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의 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들에 따르면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멸망할 수 없다. 의심할 바 없이 칼빈주의는 일단 우리가 구원받으면 우리가 영원토록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이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들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너무 지나쳐 나간 것이다. 우리가 구속받고 거듭났다는 것을 아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구속받고 거듭났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아이는 가장 어리석은 아이다. 그렇다. 우리는 거듭났지만 많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멸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히브리서 6장과 같은 말씀을 사용하여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늘에 속한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된 사람들이 떨어질 수 있으며, 회개할 기회가 없을 것이며,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불살라진 땅과 같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히브리서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고들을 포함하고 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나 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형벌, 즉 다시 멸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오용하고 있다. 그들은 이 말씀들을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멸망할 수 있다는 그들의 가르침을 지지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부분의 말씀을 그들의 가르침과 조화시킬 수 없으므로 여기에 언급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된 사람이 거짓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엉뚱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나 또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징계에 관한 성경 말씀을 조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국 안에서의 상과 징계의 문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국 안에서의 상과 징계에 대한 이 문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다리이다. 2. 은혜와 책임 칼빈주의자들은 절대적인 은혜의 문제를 강조하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거룩한 은혜는 인간의 책임을 위한 것이다. 오순절날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말했다.『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40). 베드로는 흠정역이 번역하는 바와 같이 『너희 자신을 구원하라』고 말하지 않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한다. 너희 자신을 구원하라는 말은 너희 자신이 이것을 하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원을 받으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하지만 당신이 그로 하여금 그것을 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우리의 동역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그녀의 어린아이에게 『너 스스로 먹어라.』고 말하지 않고 『받아먹으렴. 말썽부리지 말고 네 입을 다물지 말고 입을 벌려서 받아먹어. 잘 받아먹고 그것을 삼켜라.』고 말할 것이다. 구원이 절대적으로 은혜의 문제일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구원받기를 원해야 하며 기꺼이 주님을 믿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 기꺼이 믿는 것은 우리의 책임으로서 곧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동역하는 것이다. 은혜가 우리에게 미칠지라도 우리는 모두 기꺼이 주님을 믿어야 하며, 그분을 앙망해야 하며,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하며, 은혜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단지 재능만 갖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일할 수 없다. 우리의 재능에 더하여 우리는 주님에 의한 재능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재능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달란트를 사용해야 한다. 오직 우리가 달란트를 사용할 때 이익이 올 것이다. 이익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지만 이 은혜가 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달란트를 사용하고, 우리의 기능을 발휘하고 행사하는 것에 근거한다. 3. 히브리인들을 향한 경고들은 왕국 보상을 놓치고 하나님께 징계 당하는 것을 말함 우리가 본 대로 오는 왕국에서 상을 잃어버리는 것, 즉 장자권을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상을 잃고 손실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며, 여전히 『구원을 받으나 불을 통과하여 받은 것 같을 것이다』(고전 3:14-15, 헬). 이것은 이 책의 다섯 가지 모든 경고들에 기본 관념으로 주어졌으며 그 모든 경고들에 충만하다(2:3, 4:1-11, 6:8, 10:27, 29-31, 12:25). 이 경고들의 모든 소극적인 점들이 오는 왕국에서 상을 잃어버림을 당함과 하나님에 의해 징계받는 것에 관계되어 있는데 비해 모든 적극적인 점들은 보상과 왕국의 누림과 관계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 서신들도 모두 동일한 관념, 즉 왕국의 보상이나 또는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결론 맺고 있다. 오직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마태복음 5:20, 7:21-23, 16:24-27, 19:23-30, 24:46-51, 25:11-13, 21, 23, 26-30, 누가복음 12:42-48, 19:17, 19, 22-27, 로마서 14:10, 12, 고린도전서 3:8, 13-15, 4:5, 9:24-27, 고린도후서 5:10, 디모데후서 4:7-8, 히브리서 2:3, 4:1, 9, 11, 6:4-8, 10:26-31, 35-39, 12:16-17, 28-29, 계시록 2:7, 10-11, 17, 26-27, 3:4-5, 11-12, 20, 22:12에 있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합당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이 없이는 이러한 구절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잘못되거나 또는 칼빈 학파의 극단적인 객관성이나 알미니안 학파의 극단적인 주관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왕국의 보상을 보지 못했으며, 더욱이 그들은 왕국의 보상을 잃어버리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두 학파는 모두 이 구절들 안에 있는 모든 소극적인 요점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간주한다. 칼빈 학파가 영원한 구원 즉 어떤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그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이 모든 소극적인 요점들을 거짓 믿는이들의 멸망으로 간주하는데 비해 알미니안 학파는 어떤 구원받은 사람이 타락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믿으며 그 소극적인 요점들을 타락한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형벌에 적용한다. 그러나 완전한 성경의 계시는 이 소극적인 요점들이 왕국의 보상을 잃어버리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구원은 영원하며 일단 우리가 그것을 받으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잃지 않는다(요 10:28-29).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왕국의 보상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전 3:8, 14-15). 히브리서에 있는 모든 경고들은 영원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 보상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 믿는이들은 왕국을 받았지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하나님의 새 언약의 길로부터 물러난다면 그들은 왕국의 나타남 안에서 보상을 잃을 것이다. 이것이 머뭇거리는 히브리 믿는이들에 관한 저자의 주요 관심이었다.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게으른 종을 거짓 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당신의 자녀 중 하나가 게으를지 모르나 이것은 그가 거짓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왕국 보상의 문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게으른 종을 거짓 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 게으른 종은 타락해서 그의 구원을 잃어버린 참된 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이 그의 형상으로 그분을 표현하고 그의 다스림으로 그분을 대표하며 땅을 소유하는 단체의 사람을 갖는 것이었음을 보았다. 이것이 합당한 인간 생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며 그 안에는 세 방면의 장자권이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제사장들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표하는 왕들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하여 잃어버린 땅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장자권 안에 산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왕국의 실제 안에 있게 되는데 이는 왕국의 실제가 장자권, 즉 장자권 전체의 실제를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과 기꺼이 동역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장자권을 상으로 정하셨다. 만일 우리가 은혜를 취하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동역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장자권을 살아낼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늘날 왕국의 실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내는 실제는 왕국의 나타남 안에서 우리의 보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의 성취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온전케 됨이요 영화롭게 됨이요 오는 시대에서 우리의 혼을 얻음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높여지고 부활한 인성을 가지고 합당한 인간 생활을 할 것이다. 이것이 온 성경의 중요한 초점이며 성경은 그것에 대해 매우 일관성이 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오직 우리가 영으로 돌이키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모든 풍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생명의 법으로 하여금 우리를 침투하게 하고 우리를 적시게 하고 피의 형상을 본받게 함으로 우리를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이끌도록 허락함에 의해서이다. 히브리서 12장 29절은 『우리 하나님은 또한 소멸하는 불이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은 그분의 본성이다. 그분의 거룩한 본성과 부합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소멸하는 불이신 그분에 의해 소멸될 것이다. 만일 히브리 믿는이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일반적인(거룩하지 않은) 것이었던 유대교로 빗나간다면 그것은 그들을 거룩하지 않게 만들 것이며 소멸하는 불이신 거룩한 하나님은 그들을 소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실 뿐 아니라 또한 거룩하시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케 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의롭게 될 필요가 있다. 그의 거룩함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우리는 하늘에 속한 현재의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별되어야 하며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로마서가 하나님의 의를 인해 칭의의 문제를(롬 3:24) 강조하는데 비해(3:25-26)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해(12:14) 성별의 문제를 강조한다(2:11, 10:10, 14, 29, 13:12). 이 때문에 히브리 믿는이들은 그들 자신을 거룩하지 않은 유대교로부터 새 언약 아래서 아들 안에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신 거룩한 하나님께로 분별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들의 낡고 망령된 종교로 더럽힘으로써 소멸하는 불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소멸될 것이다. 그것은 「무서울」 것이다(10:31)! 바울이 「주의 두려우심(무서움)」을 매우 관심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후 5:11). 히브리서의 초점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이끄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행정을 범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행정을 범하는 것은 하나의 다스림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은 그분의 행정을 범하는 것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행정적인 경륜에 그분과 동역하지 않고 도리어 그분의 행정을 범한다면 우리를 징계하시리라는 것을 계시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적극적인 면에서 왕국의 보상을 잃어버리게 되고 소극적인 면에서 징계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0장과 12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취하고 달리고 통과해야 할 길과 경주와 길들을 본다. 이 장들에서 우리는 또한 징계와 보상과 왕국을 본다. 이 세 가지 것들은 이 책의 구성에 있어서 기본적인 관념의 중요한 세 방면이다. 신약의 어떤 책도 히브리서만큼 분명하게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을 계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책도 우리에게 지성소와 법궤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을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2절이 생명의 그 영의 법을 언급하고 있지만 히브리서는 로마서보다 더 철저하게 생명의 법을 다루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계시를 취하도록 우리에게 경고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취한다면 우리는 왕국의 나타남 안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행정적인 경륜을 범함으로 인하여 어떤 징계를 당할 것이다. 실체화시키는 감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나 또는 그것을 사용하기를 실패한 사람들은 이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지만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 메시지들에서 본대로 하늘에 속한 계시의 빛 비춤 아래 우리는 곧바른 길 위에서 경주를 달리는 데 심각하고 진지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달리는 길은 우리의 장래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장래의 운명에 대하여 염려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은혜를 얻어야 한다. 『주여, 당신의 은혜로 나는 나의 운명을 염려하지 않으며 나는 오직 당신의 경륜을 관심합니다. 당신은 나의 운명을 관심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경륜을 관심할 것입니다. 주여, 나는 나의 장래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당신의 경륜을 인하여 당신과 동역하기 원합니다. 나는 수 세기를 통하여 수행되지 않았던 당신의 경륜이 오늘날 성취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은 분명한 이상을 가지고 발전시킴으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가운데서 성취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을 추구하는 진지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지성소 안으로 인도하사 그들로 생명의 법을 체험케 하시어 표준 모형, 즉 그의 맏아들의 단체적인 재생산이 되기를 원하신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이 단체적인 재생산에 달려 있다. 이것이 완성되기 전에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가 표준 모형의 재생산을 가지시는 것은 우리 안에서의 생명의 법의 역사에 달려 있다. 우리가 본 대로 생명의 법은 바깥 마당이나 성소에 있지 않고 지성소 안의 증거궤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증거궤 안으로 뛰어들어야 하며 생명의 법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법이 우리의 영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의 긍휼과 은혜로 나는 여기에서 당신과 동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전진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여, 당신이 하실 수 있는 것과 당신이 좋아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나는 내 장래의 운명을 주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오늘날 당신의 회복의 경륜과 합당한 교회 생활의 회복을 주의합니다. 주여,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이 길 안으로 당신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을 인도하소서!』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주님의 회복이다. |
'[신앙·신학자료모음] > 신학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약성경의 종교적 배경 (0) | 2009.03.29 |
---|---|
신조 (0) | 2009.01.03 |
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 (0) | 2008.11.27 |
바울의신학 (0) | 2008.11.23 |
해석과 강해설교 (0) | 2008.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