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와 기독교:그 관계에 대한 신학적 관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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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기독교: 그 관계에 대한 신학적 관점
박정수 (성결대학교 교수 신약성서신학) 1. 들어가는 말
유대교와 기독교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라는 동일한 뿌리위에 자라난 나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두 종교는 고대의 다른 종교들과 비교할 때 독특한 자신들만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유일한 하나님 야웨에 대한 배타적 신앙, 예언자적 전통, 그리고 경전(Canon)을 갖는 종교였다. 뿐만 아니라 둘의 종교적 가치는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 공동체에 있어서의 정의와 사랑과 같은 삶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신들의 삶의 영원한 패러다임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기독교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삶을 내용으로 하는 구약성서와 함께 또 다른 경전을 갖는다. 신약성서가 그것이다. ‘신약’은 예수의 생애를 ‘구약’의 성취로 이해한 초기기독교의 해석과 삶이 담긴 기록물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히브리 성서와 함께 그것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집대성인 미쉬나와 탈무드를 가지고 있다. 하여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스라엘 종교라는 그들의 공통의 유산에 대한 각자의 해석과 실천이라는 틀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들의 초기의 형성기는 이렇게 매우 역동적으로 상호 연관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포로기 이후에 등장하는 귀환공동체가 이룩한 페르시아 시대의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를 포함해서,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와, 유대전쟁(기원후 66-70년) 이후에 본격화된 초기기독교와 랍비유대교의 ‘형성기’를 포괄한다. 본인은 이 글에서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재형성되는 이 거대한 용광로의 시기를 ‘고대유대교’의 형성과정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포로기 이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외적으로는 이민족과의 상호교류를 통하여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2. 유대교에 대한 용어의 정의
유대교(Judaism)는 어원적으로 ‘유대주의’(마카하 2:21, 8:1, 14:38 vIoudaismo,j)에서 유래했다. 이 ‘유대주의’(예후도트 twdwhy)는 그 어근이 보여주듯이 유다(hdwhy vIou,daj)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원래 지역적 명칭으로 유다의 통치에 관한 독특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 유다인(vIoudai/oj)은 그곳에 거주하는 거주민을 의미한다. 하여 ‘유대주의’의 형성과정에서 ‘유다’는 유대교 신앙의 주체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종교적으로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조상들의 전승에 대한 주도권 경쟁과 연관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정치적으로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인들과 팔레스타인에 잔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른바 ‘그 땅의 백성들’ #rah ma)과의 갈등관계와 밀접히 연관된다. 이 갈등에서 귀환 공동체는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단지 정치적인 권력의 획득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유산 전체에 대한 점유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종교의 유산은 이제 유다의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에 대한 신앙은 이제 바빌론에서 야웨신앙을 보존했던 귀환공동체의 한 씨족 ‘유다’의 신학과 삶의 형태에서 그 정통성이 부여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형성된 ‘유대교’(Judaism)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교에 대한 학문적 명칭에 대하여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는 역사적 변천과정에 따라 여러 가지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유대교에 대한 명칭은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우선 19세기 종교사학파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 발전된 유대교를 에스라-느헤미야에 의해 추진된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와 구분하여 ‘후기유대교’(Late Judaism)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이 표현은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는데,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는 그 이전의 예언자적 종교의 활력과 역동성을 상실한 ‘이물질’ 같은 것으로 여겼다. 이 포로기 이후의 ‘후기유대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바리새적 유대교’이고, 이 바리새주의야 말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종교의 본질보다 외연을 치장하는 위선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유대교의 밑그림은 물론 신약성경에 대한 ‘반유대주의’(Anti-Judaism)적 해석의 영향아래서 진행되었다. 적어도 19세기초반부터 2차 대전까지의 유대교 연구는 이러한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유대교 연구 자료는 거의 신약성서와 기독교적 자료를 원천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쿰란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들과 비문들의 연구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했고, 무엇보다도 이전에 사용되었던 유대교의 외경과 위경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게 됨으로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적으로 편향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 후 좀 더 중립적인 견해를 지향하는 학자들은 이 시기의 유대교를 또 다른 용어로 이른바 ‘Post-Biblical Judaism’이라고 쓰기도 한다. 이것은 이 시기를 ‘(구약)성경과 미쉬나’ 사이의 시기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하여 정경으로서의 히브리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시대이후, 그러니까 에스라 느헤미야의 귀환과 개혁시기 이후의 유대교를 지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시기의 유대교를 외적으로 상징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성전중심의 유대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기의 유대교를 “제 2 성전기의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성전재건(기원전 516년 )에서 파멸(기원후 66)까지 대략 550년간의 유대교를 지칭한다. 그러나 근래 들어와서 가장 보편적으로 이 시기의 유대교를 ‘초기유대교’(Early Judaism)라고 명명한다. 이것은 귀환공동체의 의해 최초로 형성된 저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가 제2성전의 재건과 헬레니즘이라는 범세계적인 문화의 혼합주의와의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정형화된 형태의 ‘유대교’가 탄생되는 이 시기를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포로기 이후 형성된 유대교의 명칭에 대한 이러한 모호성은 이 시기에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유대교의 역사적 상황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의 명칭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유대교-랍비유대교-근대유대교. 이 가운데서 그 변천사를 일반적인 연대기로 나눈다면, 고대 그리고 중세와 근대의 유대교(Ancient, Middle Age & Modern Judaism)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연대기적 구분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대교의 말기에 형성된 랍비유대교(Rabbinic Judaism)가 중세와 근대의 유대교의 근본 틀을 유지하며, 현대까지 정통 유대교로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일반적으로 초기유대교에서 랍비유대교의 형성기와 중세 이전의 유대교를 포괄하여 고대유대교(Ancient Judaism)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랍비유대교의 본격적인 시작을 어느 시점으로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점으로 남아있게 된다.
랍비유대교의 기원에 대하여 이제까지 알려졌던 것은 요한난 벤 자카이(Johanan ben Jakkai)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바리새파의 지도자로 알려졌던, 그는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의 함락 직전에 이 성을 빠져나와 야브네에서 종교와 학문 활동을 하면서, 이 곳을 유대교의 입법, 사법, 행정의 기능을 하는 산헤드린의 중심지로 세워나갔다. 그에 대한 많은 랍비문헌들이 전하는 전설들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90년 이 곳에서 토라,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로 구성된 39권의 구약성서, 즉 ‘타낙’(Tanak)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고대의 유대인의 삶과 신앙의 핵심이 되는 정경의 확정은 결코 사적인 차원에서 규정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의를 이끌어 가면서 탄생한 것이 ‘랍비 위원회’(Rabbinate)였다. 이 랍비위원회는 팔레스타인 중심으로 일어났던 유대교의 마지막 저항이었던 바 코흐바(Bar Kokhba)의 봉기(132-135년) 이후, 본토와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전체는 랍비들을 중심으로 한 제도적 협의체로 자리잡아갔다. 이른바 ‘랍비유대교’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랍비’들은 미쉬나의 집대성 시기인 약 200년경부터 팔레스타인의 탈무드(약 400년경 완성)에 이어 바빌론 탈무드가 완성된 500 년경에 이르기 까지, 유대교의 방대한 문헌 형성의 주체가 된다. 이것은 후기 고대시대의 유대교의 본질인 이른바 “책의 종교”가 랍비 유대교의 특징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세계에서 ‘랍비유대교’의 형성은 주후 1세기 말까지는 아직도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랍비 유대교의 중심에 서 있는 ‘타낙’의 해석에 결정적인 길을 연 미쉬나의 편찬시기를 랍비유대교 형성의 결정적인 단계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쉬나는 대략 기원전 50년 이후부터 행해진 랍비들의 재판 기록과 율법에 대한 해석을 담은 것인데, 학자들은 미쉬나가 기원후 약 200년경 당시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ha-Nasi = Patriarch)격이었던 랍비 유다(Rabbi Judah)가 셋포리스에서 편찬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유대전쟁으로 인한 성전의 파괴이후 미쉬나의 편집시기까지의 고대 유대교는 근대 이후까지 유대교의 골격을 이루게 된 시기로서, 랍비 유대교가 형성되는 ‘과도기’의 유대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유대전쟁 이후 유대교에 있어서 또 한 번의 대대적인 반로마 봉기가 일어났던 바 코흐바의 반란까지(C.E. 70-135)는 유대전쟁으로 인한 성전의 파괴가 유대교 전체의 구조에 대한 심각한 위기를 야기했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바로 이 과도기의 유대교의 성격에 대하여 최근에 많은 주목을 끌고 있다. 19세기 종교사학파의 관점은 초기유대교의 본질인 ‘종파화’된 유대교는 유대전쟁으로 인한 성전의 파괴와 함께, 바리새파의 주도권 하에서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유대교의 여러 종파가운데 바리새파를 제외한 모든 종파의 소멸과 바리새파의 전적인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반된 논의가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 유대전쟁 이전의 자료들과는 달리 이 시기의 역사적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로마의 역사가나 기독교 역사가들의 글을 단편적으로 재구성하여 추론된 가설의 역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기(C.E. 70-135년)를 유대전쟁 이후 바 코흐바 봉기로 더 이상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민족이 이른바 ‘후기 종파시대’로서 여러 종파들의 재형성기로 존재하였던 시기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아직 랍비유대교라는 정형적인 틀이 구축되기 이전의 유대교로서 이른바 ‘형성기의 유대교’(Formative Judaism)이라고 명해도 좋겠다. 이 ‘형성기의 유대교’는 무엇보다도 초기기독교의 형성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기에 기독교와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즉, 이 시기에 복음서가 기록되었고, 후기 바울서신과 그 밖의 신약성서가 기록되었으며, 고대 교부들의 저작은 모두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3. 초기유대교의 성격과 초기기독교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초기유대교의 성격을 구형했던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어떤 신학적 관점을 제공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 사건은 페르시아 시대가 지나고 헬레니즘 시대의 개막과 함께 일어났다. 헬레니즘 시대의 초기유대교는 헬레니즘의 문화의 범세계화에 노출되게 되었다. 유대교는 기원전 3세기 약 100여 년간의 평화의 시기를 지나서 헬레니즘의 문화적 개혁의 요구라는 중대한 위협 속에 처하게 되었다. 마카비서가 보도하고 있는 에피파네스의 칙령-“모든 자들은 자신의 규범을 포기하라”(마카비전서 1:41ff. cf. 마카비 4서 4,26)-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초기유대교는 비유대적인 외부의 힘의 강제에 대한 ‘저항적 의미’로 규정되기 시작한다. 하여 마카비후서 4,13에서는 “유대주의”(vIoudaismo,j)이 “헬레니즘”(`Hllhnismo,j)의 대립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저항의 단초는 마카비 가문의 봉기(기원전 167년)와 하스몬 가문을 주축으로 한 독립국가 형성(기원전 143년)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들은 포로기 이후 처음으로 외세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것을 넘어 자신의 힘으로 유다의 영토를 남으로는 이두매인들의 지역까지, 그리고 북으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복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복지의 주민들에게 물리적 강제를 통하여 ‘유대주의’를 따르게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행해졌던 이 시기 사마리아인과 이두메인들의 강제 할례는 ‘유대주의’가 ’비유대적인 것에 대한 저항의 힘으로 역류하여 그것을 ‘유대화’(ivoudai,zein)하는 동력으로까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이른바 민족적 ‘자긍심’은 그야말로 그 이후 유대교를 새로운 형태로 각인시킬 수 있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다시금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것은 단지 정치적인 갈등의 잔재가 아니라, 이스라엘 옛 유산을 계승했던 유대교 내부에 존재했던 ‘유대주의’와 ‘사마리아주의’의 대결과 반목의 뿌리를 내리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의 이 민족적 자긍심은 로마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가 시작된 기원전 63년 이후에도 지속되어왔으며, 그것은 유대전쟁(기원후 66-70년)을 통해서 매우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트라야누스의 헬레니즘적 강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제2차 유대인 봉기(기원후 115-117년)를 지나, 결정적으로 하드리아누스의 계속된 강요로 일어난 바 코흐바의 제 3차 유대인 봉기(기원후 132-135년)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영토를 가진 민족으로서 존립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우리가 초기기독교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때는, 적어도 그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초기유대교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유대교 내부의 종파운동 가운데 하나로 시작하였음을 전제로 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원전후 1세기의 유대교를 구조적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종파화” 현상이기 때문이다. 요세푸스가 언급했던 당시 유대교의 4개의 “종파들”(ai`re,seij 유대전쟁사 2,119-166; 유대고대사 18,11-25)의 길은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모두 자신들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토라연구와 실천을 통해 이스라엘의 유산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 유대교의 내적인 갈등의 대의명분은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라는 정통성의 문제로 요약된다. 요세푸스가 아직까지 기독교를 하나의 종파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후 사마리아를 통해 시리아까지 진출한 초기기독교 공동체도 유대교의 한 종파로 남아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믿는 사상을 “나사렛인들의 종파”(행 24:5)의 것으로 여겼다. 다만 ‘그 규모가 어떠했는가’만이 논쟁의 대상이 된다. 어쨌든 유대교는 기독교를 유대교 내부의 새로운 한 종파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은 유대교로부터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파”였다(행 28:22). 이들 역시 적어도 유대전쟁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유대교 밖의 사람들이었다는 의식은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헬레니즘의 세계화 속에서 초기유대교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는 이방인과 이방의 문화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누구이고, ‘이스라엘 됨’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관점의 스펙트럼이 존재하였지만, 궁극적으로 이시기의 유대교는 이스라엘 전통을 유일신에 대한 신앙과 토라의 준수로 수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교가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을 종교적 ․ 사회적 차원에서 새로운 틀을 형성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교 안의 프리즘에서 볼 때, 초기기독교가 갖는 의미는 ‘민족종교’와 ‘보편종교’간의 긴장을 보편종교로 이전하고자 하는 내적인 활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토라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은총의 종교’인 기독교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하여 기독교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기독교의 제의(祭儀)의 핵심에 서게 된다.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식인 할례와 성전의 속죄제의를 기독교에서는 세례와 성만찬이 대신하게 된다. 초기기독교의 이러한 일련의 발전은 유대교가 자신의 ‘거룩한 책’에 대한 척도(canon)를 마련한 것과 같이, 기독교는 “새 언약”(렘 31;31)에 대해 선포한 기록물들에 대한 척도를 마련하게 됨으로써 그 발전의 끝 지점에 오게 된다. 유대교 신앙의 가장 본질에 속하는 유일한 하나님 야웨 신앙에 이어, 종교적 상징과 그 제의의 변경, 그리고 다시 유대교적 삶의 초석이 되는 ‘거룩한 책’에 새로운 관점을 도입한 ‘새로운 책’을 첨가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을 유대교와 공유했던 기독교가 자신의 모태와도 같은 유대교에서 출생하게 된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역사적으로 이미 기틀을 마련한 유대종교로부터 독립한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유대교와 기독교 (II) - 초기유대교의 기틀 : 페르시아 시대 -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의 끝자락에서 유대교의 출현은 바빌론 포로로 인한 이스라엘의 국가체제의 완전한 멸망과 그것을 넘어선 회복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일어나게 되었다. 멸망은 정치적 차원과 동시에 종교적 차원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국가의 공식부문인 통치체계와 제의제도의 파멸을 의미했고, 비공식적으로는 가족과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삶의 방법(‘how to live’)의 혼돈을 의미했다. 한 사회의 멸망과 회복의 전환기에는 늘 그 역사적 공백을 향해 새로운 흐름들이 유입되고, 그것을 주도하는 사회적 그룹이 부각되게 된다. 포로기 이후의 종교사에서 이스라엘의 옛 전승은 새로운 형태와 내용으로 변형되고 있었다. 예언과 토라, 그리고 지혜라는 이스라엘의 전승의 주요 흐름은 이 시기에 저마다 새로운 ‘삶의 자리’를 가지고 이 ‘공백’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1. 포로기 이후 유다공동체의 성격
페르시아가 제국내의 각 민족의 종교의 독립성을 장려하는 정책은 초기의 대왕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포로들을 귀환시키는 정책은 제국의 서쪽 변방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요소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추진되었다. 여기에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귀한 공동체의 재건의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부에게는 민족주의적 열망으로 보이기가 쉬었을 것이다. 이것은 포로기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예언과 시너지 효과를 거두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의 이상으로 구체화되는 듯했다. 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추구하는 대열에 수차례에 걸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떤 독립된 국가의 건설이라는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고, 단지 페르시아의 지배하의 자치권만이 주어졌다. 그러기에 그것은 현대의 ‘시오니즘’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귀환민의 지도자 스룹바벨이 다윗 가문에 속하였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한 이상이 늘 다윗왕조의 회복이라는 국가적 회복에 대한 향수와 연결되기는 어렵지 않았다. 성전건축이야 말로 그러한 회복의 비전을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 학개와 스가랴(1-8장)의 예언은 그러한 회복의 비전을 성전과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상으로 대신했다. 그들이 꿈꾸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자신들만이 고대 이스라엘의 유산의 합법적 후계자라는 확신과, 유일신 야웨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다공동체의 건설이라는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로기 이후 유다공동체는 사회사적으로 포로기 이전의 왕정체제와는 다른 형태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제국 하에서 왕정은 허락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지배구조는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었을까?
알베르츠(R. Albertz)는 포로기 이후 유다공동체 사이에 존재했던 여러 집단 간의 정치적 관계를 기본적으로 페르시아에 충성하려는 관리들과 이집트의 세력을 얻어 페르시아로부터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민족주의적 집단과의 긴장관계로 서술하고 있다. 이 긴장관계에서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사역은 팔레스타인에서 친 페르시아 정책을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대인의 자치 기구를 마련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자치 기구는 페르시아식 지방 행정조직으로 귀환과 사회통합과정에서 만들어진 씨족 집단(tAba-tyb 스 2:59=느 7:61 cf. 느 4:7 tAxpvm)에 따라 구성되고 있다. 이것은 우선 평신도 계층에 속하는 족장들로서 이른바 ‘장로들의 회의’, 다음으로는 제사장과 레위인, 성전 직원들로 이루어진 ‘제사장 학교’ 집단, 마지막으로는 이 기구의 하부에 비상시적인 ‘회중의 모임’(lhq 스 10:1,12; 느 5:7,13)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포로기 이후의 유다공동체에서 사회의 핵심단위가 된 베이스 아보트(‘tAba-tyb’)는 하나의 가족단위인데, 바로 이 ‘씨족’으로서의 성격이 포로기 전후의 유다공동체의 사회사적 성격을 각인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유다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지파공동체의 ‘하나의’ 구성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신들의 ‘야웨신앙’에 기초하여 전체 이스라엘의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신앙고백적인 성격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후 초기유대교가 ‘종파화’된 성격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귀환공동체의 야웨신앙과 회복된 성전은 이후 초기유대교라는 이스라엘 종교의 새로운 형태를 결정짓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포로기 이전처럼 국가적 정체성으로 유지될 수 없었고, 오직 종교적 정체성으로서만 유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외세 치하의 독립종교로서의 길이야 말로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현실적인 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귀환한 유다공동체의 신학적 자기주장이야말로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되었으니, 그것이 초기유대교의 밑거름이 되었다.
2. 초기유대교의 틀
요컨대, 귀환이후의 ‘이스라엘의 회복’은 국가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종교적으로만 성취될 수 있었다. 성전의 재건이 그 중심에 있었다. 성전예배는 국가의 공식부문으로 이스라엘의 삶의 한 복판에 자리하게 되었다. 성전은 속죄가 이루어지고, 백성들의 부정(不淨)이 실제적으로 제거되어 이스라엘의 회복이 구현되는 거룩한 곳으로 확고히 서게 된다. 성전의 외연적 확장은 그것이 서있는 성도(聖都)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거룩한 땅’에까지 이른다. 귀환공동체는 야웨가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이스라엘 회복은 거룩한 땅의 회복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레 18:24-28 cf. 창 15:16 신 9:5). 성전의 지성소에서 이스라엘의 땅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것과 부정한 한 것과의 ‘분리’의 신학(제사문서)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주도한 제사장들은 성전제의를 통해 공식종교의 영역에서 귀환공동체의 야웨신앙을 유다공동체의 삶의 저변으로 확대함으로써, 초기유대교의 규범적인 틀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이 규범은 또 다른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에스라는 귀환공동체에서 ‘모세의 율법책’(토라)을 읽어 선포함으로써(느 8:2) 귀환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삶 전체를 규정할 ‘표준’(canon)을 세워나갔다. ‘참 이스라엘’의 삶은 이 표준을 따르는 삶이다. 율법은 이제 단지 ‘법과 규범’이 아니라, 종말의 질서로 살아가는 온 이스라엘의 유일한 삶의 형태이다. 그것이 ‘토라’이다. 이렇게 하여 토라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과정에서 성전과 함께 초기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틀로 자리매김 되었다. 물론 ‘모세의 율법’은 이미 포로기 이전에 성문화 되었지만, 이 ‘표준’은 토라의 정경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정경화 과정은 오경(Pentateuch)을 주축으로 이루어졌고, 성전재건이 이루어진 515년경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제사장과 평신도 지도자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율법의 서기관이며 제사장인 에스라”(스 7:21. cf. 7:11)는 그러한 계층적 상징성에 가장 잘 부합된다. 결국, 이 정경화 작업은 포로기 직후 ‘이스라엘의 회복’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국가적 공식부문의 또 다른 측면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초기유대교의 외면적 틀의 중요한 변화는 통치의 영역에서도 일어났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전통적으로 왕,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현자(賢者)들은 각자의 기능을 담당했다. 왕은 통치를, 예언자는 역사 속에 계시하는 하나님 계시의 전달을, 제사장은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그리고 현자는 그러한 계시의 실천적 적용을 담담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은 포로기 이후 초기유대교의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변형을 겪는다. 그것은 종교의 내적인 변화, 즉 전승의 변화이지만 외적으로는 그 전승의 전수자가 살았던 사회적 삶의 자리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초기유대교 외적형태는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였다. 여기에 초기유대교가 ‘제2성전 중심적’이라는 특징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들은 점점 성전업무를 중심적으로 맡게 되었고, 경제적 정치적 ‘관료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들은 야웨를 섬기는 기능에서 이제 백성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반면 예언자들은 점차 현실에서 유리되어, 예언 자체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에 매여 있지 않고 세계의 모든 통치자들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와 구원을 꿈꾸게 된다.
3. 초기유대교의 특징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초기유대교가 형성되는 이 시기, 그러니까 페르시아 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로 넘어가는 이 포로기 이후의 괄목할 만한 내면적 변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문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줄기차게 이어져 왔던 예언은 어떠한 변형을 겪게 되었던가? 둘째, 포로기 이후 유다공동체가 ‘종교적 회복’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하려 하였을까? 셋째, 그것은 초기유대교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1) 예언의 변화와 묵시문학의 등장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의 한 줄기는 예언에서 묵시로의 변화이다. 폰 라트(G. von Rad)는 묵시문학의 기원을 예언이 아니라, 지혜문학에서 찾는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묵시와 예언전승이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예언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야웨에 대한 고백전승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반면에, 묵시문학은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 이해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인식의지’는 지혜전통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핸슨(Paul D. Hanson)는 도리어 묵시문학에 지혜의 요소가-구체적으로는 기원전 3-2세기경에-첨가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승사적으로 초기묵시문학의 기원을 포로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자 했다. 알베르츠(R. Albertz)도 묵시와 예언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 예언이 실현되지 못한 것이 예언을 ‘종말론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직접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번성하게 된 묵시문학의 뿌리가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종말론적 예언과 묵시사상의 삶의 자리를 사회학적으로 동일시하거나 연속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전적으로 본문의 전승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인데, 주지하듯이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학자마다 매우 큰 편차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활동이 그치기 시작했다는 것과 전승사적으로 묵시라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 새로운 운동의 흐름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가이다. 이런 의미에서 코흐(K. Koch)의 통찰은 중요하다. 그는 포로기 이후 역사에서 예언 활동이 종말을 고하게 된 이유 중 하나를 페르시아 시대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활동은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 현실에 삶의 자리를 두고 있었다.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도 예언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에 집중되고 있을 만큼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이 독립적인 국가로 존속할 수 없었고, 더 나아가 하나의 독립 종교로의 길을 가게 됨으로, 예언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삶의 자리를 정치적인 현실에 둘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여 전통적으로 예언은 세계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사회적인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현존 질서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종교적 비전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현실을 지향하게 되었지만, 이제 예언은 ‘새로운’ 삶의 자리에서 그러한 정치적 현실과 멀어지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묵시는 정치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야웨의 주권에 대한 우주적인 상징을 통해서 현실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예언은 역사를 지향하지만, 묵시는 신화를 통해서 역사를 함축적 현실로 파악한다. 하여 묵시는 탈역사화 되지는 않지만, 역사를 넘어서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호간의 현상을 예언의 ‘메타화’(meta化) 현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예언이나 묵시가 모두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지만, 예언이 그것의 역사적 회복을 지향한다면, 묵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회복으로 함축된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묵시는 예언의 새로운 언어요, “새로운 어법으로서의 예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예언자들과 묵시가들의 기능은 차별화된다. 즉, 예언자들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의 ‘대언자’이었지만, 이제 묵시가는 역사를 넘어서는 신화적 상징에 대한 ‘해석자’들이다. 전통적인 예언자들의 기능은 “야웨가 말씀하셨다”라는 야웨의 신탁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묵시의 특징은 그것을 받는 자들에게 아직 닫혀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사 29:11). 묵시가의 기능은 오히려 그것을 ‘닫는’ 것으로까지 표현된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12:4). 이것으로 묵시가는 신적인 지혜를 가진 자로 규정된다. 고대에서 이스라엘 종교의 본질적 특징인 예언이 이와 같이 변형되고 있는 것은, 분명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그것과 초기유대교를 특징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2) 토라와 지혜의 만남
이스라엘 종교사의 내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또 다른 전승은 토라와 지혜이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성전 재건 이후 유다공동체의 목표는 귀환공동체의 야웨신앙을 ‘표준’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표준’은 이스라엘이 단지 공공부분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 구현해야 할 것이었다. 이것이 토라 연구이다. 토라의 연구는 이스라엘 땅에서의 성전예배가 가능하지 않았던 유배지에서, 그것에 대한 대안이 되는 종교적 실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토라의 연구가 성전예배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제2성전의 파멸이후에나 가능했지만, 회당을 중심으로 한 토라 연구는 포로기 이후 유대교적 삶을 구현하는 매우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수단이 되었다. 토라는 성전제의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성전제의가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정결을 구체화하는 삶의 규범이기도 했었다. 이제 토라는 이제 모세의 성문율법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조상들의 삶의 경험인 ‘학가다’와 그것을 준행하는 방법을 제시한 토라의 해석인 ‘할라카’를 포함하는 ‘율법의 가르침’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후로 이스라엘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초기유대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살아있는 실체’가 되었다.
이제 이러한 토라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삶의 방법’(‘how to live’)을 추구하는 지혜와 만나게 된다. 이것은 우선 율법서에서 나타난다: “너희는 [이것들을]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좀 더 후기에 속하는 구약의 시편들 가운데 지혜적인 언어와 사상을 담은 ‘율법시편’들(1장 119장)에서도 율법과 지혜가 연관되고 있다: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119:66). 이스라엘에서 지혜는 본질적으로 경험적인 사색을 통하여 한 개인이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추구하게 된다. 하여 지혜는 율법이나 예언과 같은 전통적인 하나님의 계시와는 다른 형태로 사회적 관계와 정치질서, 그리고 가정 등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관계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개인’의 부각,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한 질문, 인간의 궁극적 한계와 운명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아우르게 된다. 이렇게 지혜는 토라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유산을 전수하려는 모든 유대교적 삶과 연관된다. 기원전 2세기 초의 벤 시라의 지혜서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토라와 지혜의 합류된 전승의 최고봉을 보게 된다. 벤 시라는 그의 선조들과 같이 토라의 중심에 서 있는 ‘하나님 경외’를 지혜의 본질로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지혜를 갈망한다면 계명을 지키라. 주께서 그것을 네게 주셨다.”(벤 시라 1:26 cf. 1:16; 19:20; 21:11: 23:27) 말하자면 그는 기나긴 토라의 전통을 지혜자로서 수용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토라가 이스라엘의 삶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에 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지혜와 연관되었던 것이다.
3. ‘토라 경건’과 초기유대교적 삶의 형태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이렇게 토라의 실천에 집중되면서, ‘토라경건’을 중심으로 한 초기유대교적 신앙의 형태가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이제 이스라엘의 신앙은 성전예배이외에도 토라의 연구, 안식일의 준수, 기도와 주기적인 금식을 통하여 실천되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대교적 세계관과 신앙의 중심인 토라에 대한 실천과 연구는 이 모든 것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토라의 연구는 모든 유대인들의 삶에서 야웨를 체험하는 경건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시 119편):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f).
이 율법연구에 헌신된 사람들은 물론 제사장이다. 그러나 점차 지혜의 전수자였던 서기관들이 전문적으로 토라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이 토라와 지혜가 밀접하게 연관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로써 유대교에서 서기관이라는 제도화된 토라연구가들은 본격적인 활동과 기능을 하게 된다. 이들은 상류층의 지혜와 경건을 제도화된 영역에서 발전시킬 수 있을만한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시 119:90f). 그러나 그들은 상류층이라기보다는 중류층에 속한 자들로서 개인적인 ‘토라경건’을 통해 사회적인 하층민들의 경건과 융합함으로써 사회적인 통합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실천해야할 모든 개개의 유대인들에게 길과 방법을 제시하는 제도화된 기능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토라경건’이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에 서 있는 희생제사나 하나님의 선택과 계약의 영원성에 대한 신념을 대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존립했던 포로기 이전의 이른바 ‘공식부문’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유대교라는 새로운 종교적 공동체 의식 속에서 더욱 강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포로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스라엘 종교의 비공식 부문인 개인 경건이 더욱 활성화 되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인경건의 요소는 포로기 이후 지혜문학의 변화와 깊이 관련된다. 즉, 지혜가 제시하는 삶의 형태는 토라가 가르쳐주는 종교적이고 도덕적 요구, 즉 ‘하나님 경외’로 집약된다. 이것은 변화된 ‘세계에의 순응’이라는 개인이 처한 삶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삶의 집약이다. 이렇게 보면 개인적인 ‘토라경건’은 이스라엘 종교의 공식부문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를 더욱 포괄적으로 맺어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편 119편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토라 역시 개인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토라신앙’을 발전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정초하는 핵심이기 때문이었다: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시 119:149). 토라가 살아있는 실존으로 인식되고, 그것에 대한 열망과 경외심은 바로 그러한 ‘토라경건’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밤과 낮으로 그것을 묵상하며(997, 164. 147f절) 연구(45, 94절)하고 이해하고(79, 125, 152절) 배워야(7, 71, 73절) 하는 것이었다. 이제 개인적인 모든 관심과 삶의 길은 토라가 지시하는 삶의 길과 일치해야만 한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길)를 내게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119: 33. cf. 119: 27. 32-35).
4. 맺음말
그러므로 포로기를 통하여 확고하게 세워진 유일신 신앙, 성전제의, 그리고 ‘토라경건’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이룩된 초기유대교의 기초문법이었다. 이것은 페르시아 시대와 함께 열려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이상을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능했던, 그들의 새로운 종교를 구형해 내는 과정에서 맺혀진 열매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 종교의 내면적 변화는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초기유대교의 제사장적 신정(神政)통치로 요약된다. 이것은 정치적 현실로는 가능하지 않은 신정통치를 종교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형태라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을 이른바 ‘제사장적 신정통치’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적 기능이요 특징이었던 예언자와 왕의 긴장은 이러한 제사장적 ‘민족종교’ 안에서 해소되어간다. 예언은 묵시로, 야웨의 왕적 통치는 ‘제사장적 신정통치’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삶은 이제 성전과 ‘토라경건’ 중심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III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 : 세계화의 도전과 응전
유일신 신앙, 성전제의, 그리고 토라와 지혜의 길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이룩된 유대교의 기초문법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비전이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현가능한, 이른바 ‘종교적 회복’의 길에서 맺혀진 열매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실은 유대교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제 유대교는 이 틀에 기초하여 종교적으로는 고대 이스라엘 전승의 새로운 변형으로, 그리고 사회정치적으로는 종파적 형태로 세워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유대교의 형성은 역사라는 용광로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 용광로는 저 페르시아 시대에 형성된 유대교와 헬레니즘과의 만남의 장이었다. 우리는 이 운명적 조우(遭遇)를 문명의 세계사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역사상 최초로 동서양문명이 충돌하던 바로 그 시기, 그 거대한 판의 틈새에 위치한 유대교는 어쩔 수 없는 세계화의 물결에 휩싸이게 된다.
그 물결은 두 가지 양태로 유대교에 충격을 주었다. 하나는 ‘잔잔한 파도’였고, 다른 하나는 ‘거친’ 파도이었다. 알렉산더 대제의 죽음이후 이집트의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주전 3세기의 시작부터 약 100년은 평화의 시기였다. 이 시기 유대인들은 ‘강요되지 않은’ 세계화의 길을 가게 되었다. 지중해 연안의 무역의 증대와 이 지역의 공용어로 성장한 코이네를 매체로 한 광범위한 문화적 교류로 유대인들은 이제 순풍을 맞으며 스스로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로 흩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유대교적 삶의 가치와 규범을 전수하며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유대교와 헬레니즘을 연결시키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에게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내어주게 되었던 주전 2세기 시작부터 상황은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이제 헬레니즘 문화는 정치적인 힘으로 유대교를 향해 다가왔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법과 규범을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조차 포기해야 하는 강압적 요구를 받게 된 것이다(마카베우스전서 1:41ff). 시리아에서도 그곳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이교제의에 참여해야 했다(마카베우스후서 6:7f).
헬레니즘의 문화적 유입에 대한 유대교의 반응은 단순히 그 강도에 비례하는 반응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즉, 평화의 시대에는 유대교가 잘 보전되었고, 강요의 시대에는 유대교가 심하게 변형되었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유대교의 변형의 요인은 그렇데 단순하지가 않다. 이제 우리는 유대교가 어떻게 자신들의 종교와 삶 속에서 그 ‘잔잔한 파도’와 이어지는 ‘거친 파도’에 대하여서 응전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유대교가 이 과정에서 고대 이스라엘 전승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사회학적 집단으로서 그러한 전승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유대교의 종파의 특성을 통해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것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주로 마틴 행엘(M. Hengel)의 고전적 저작 『유대교와 헬레니즘』(Judentum und Hellenismus)이 제시하고 있는 광범위하고도 심도 깊은 역사적 자료를 참고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헬레니즘에 대한 유대교의 대응은 주로 사회적 상층계층이었던 종교엘리트에 의해 주도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사회 정치적 상황을 이 장에서 기술한 후, 다음 장에서 이스라엘의 전승들-지혜와 묵시-이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1. 헬레니즘의 ‘잔잔한’ 파도
이방인 통치하의 유대인들에게 헬레니즘 정치세력의 유입은 또 다른 이방 통치자의 등장에 불과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국제 정치적 판도의 변화가 이스라엘 종교와 민족적인 전통을 유지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이냐 일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새로운 헬레니즘 세력은 그러한 국제 정치적 변화 말고도 근본적으로 유대교적 삶에 깊이 영향을 줄 다른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중해와 페르시아 만을 넘나드는 판헬레니즘(pan-hellenism) 경제권의 활성화로 형성된 국제적 공간이었다. 팔레스타인은 그 지정학적 위치로 프톨레메우스 왕조의 통치하에서 기원전 3세기 초부터 페니키아와 이집트 그리고는 아랍권을 넘어 에게해와 소아시아까지 연결하는 국제적인 무역의 통로역할을 하였다. 트란스요르단 지역은 이 무역로의 주된 통로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 라기보다는 정확하게는 국제무역도시가 되었다. 이 판헬레니즘 도시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와 에베소, 그리고-300년 시리아 왕조의 창건자 셀류쿠스 1세에 의해 세워진-안티오키아는 트란스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의 해안을 통해서만 통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가 불과 22년 동안에 팔레스타인을 최소한 7번을 정벌했던 것이나, 프톨레메우스 2세가 팔레스타인 서안의 아코(Akko)를 거대한 항구도시로 만든 것, 그리고 주전 2세기 초 이집트와 시리아 왕국이 예루살렘에 대한 패권을 놓고 끊임없이 투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3세기는 근본적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다. 프톨레메우스 2세인 필라델푸스(기원전 285-246) 시대가 그 최대의 전성기였다. 페르시아 시대에 형성된 무역로를 통해 밀려오는 상품과 재화, 그리고 인력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에는 잔잔한 파도가 되어, 그것을 직접적으로 향유하게 될 상류층의 삶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었다.
M. 행엘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피정복지를 그리스식으로 통치하는 기술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관구(no,moi)의 군사관리(oivkono,moj)가 경제적 관료의 기능을 통합하여 실행하는 군사통치제도이다. 주전 1세기에 정착된 이 군사통치 체제는 바로 피정복지에서의 징세를 위한 것으로, 이제 국가권력은 세금관리인이었던 세리(telw/nai)에 의해 구현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에서는 국제무역과 세금관리체제를 통한 경제적 이권을 중심으로 새로운 특권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경제적 구조가 바로 예루살렘 귀족정치의 발판이 된다. 이를테면 프톨레메우스 3세인 유러게테스(기원전 246-221)때 토비아 가문의 요셉과 같은 경제 엘리트는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일반세금 징수자로서 등장한다. 이 가문은 향후 트랜스 요르단 지방의 절대적인 부를 지배하고, 국가적인 차원의 세금 대납까지도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세금대납체제는 로마시대까지 지속되었는데, 팔레스타인의 경제 엘리트들은 이러한 국제무역질서에 쉽게 편승할 수 있는 생활양식으로 자신을 개방하여 새로운 사회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면 이로 인한 거대한 국부의 해외유출로 대중들은 이미 유대전쟁(66-70년) 이전에 심각한 생존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유대전쟁 전후에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메시아 운동과 반로마 봉기는 그러한 사회경제적인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나 유대교에게 다가온 헬레니즘은 단지 정치경제체제로서가 아니라, 역사상 최초의 동서양 문명의 융합을 통하여 이룩된 거대한 헬레니즘 문화 자체였다. 그것을 소통하고 생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중해 연안의 일상어요, 국가공식어였던 코이네(koinh,)였다. 팔레스타인에서도 문학, 철학, 역사 등, 대부분 그리스어로 기록된 유대문헌들이 등장하게 된다. 유대인 역사가 유폴레모스, 키레네의 야손 등은 유대인의 역사를 그리스어로 기록했다. 티베리아의 유스투스나 예루살렘의 사제요 귀족의 한 사람이었던 요세푸스는 그들의 후예였던 것이다. 사회적 상류층에서는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하고, 히브리식 이름을 그리스어로 음역하기도 하였다(예, 오니아스, 야손, 토비아 등). 그리스어의 사용은 오늘날 한국에서 교육받은 계층이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대에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제한적이었음은 당연하다. 하여 팔레스타인의 귀족으로서 ‘헬라화’(e`llhni,zein)된다는 것의 척도는 무엇보다 그리스어를 옳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는 의미였고(아리스테아의 서신 §121), 상류층을 중심으로 그리스식 생활양식(lifestyle)을 갖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류층의 사회적 기풍은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더욱 활기를 갖게 되었지만, 팔레스타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그 극단적인 예를 기원전 175년 대제사장 야손이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학교인 김나지움을 세운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귀족의 자제들이 이곳에 입학하여 그리스 관리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고, 경제적 부와 사회적 특권계층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스 교육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전통에 기초해 새워졌던 ‘이스라엘적’ 신정주의의 패러다임은,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의 기틀이 세워지기 시작한지 불과 200여년 만에 새로운 ‘세계화’의 파도를 맞이하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 파도에 가장 먼저 반응했던 것은 물론 그 세계화를 가장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된 예루살렘과 같은 국제적인 도시의 상류층이었다. 이 상층사회의 ‘출렁임’을 근심하며 예루살렘의 현자 벤 시라는 당시의 젊은 지식인 엘리트에게 헬레니즘의 철학과 대화하면서 옛 조상의 지혜를 새롭게 해석해야만 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그러한 헬레니즘은 유입은 아직은 강요된 형태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기에 ‘잔잔한’ 파도였다.
페르시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잡은 강대국들의 통치방식은 역사적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피정복지 문화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유대교와 접촉한 초기 헬레니즘의 문화적 성격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그것은 로마가 이미 한니발을 물리치고 계속하여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와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기원전 197년), 자신의 패권을 확대해 나가며 세계사의 전면에 들어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우리는 향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의 모든 정치적 역학관계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서 ‘로마의 힘’을 고려해야만 한다. 로마인들은 헬레니즘의 후예임을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리스적 행정과 국가 조직뿐만 아니라 헬레니즘의 문화와 교육의 전통을 받아들였다. 하여 악티움(Actium)의 해전(기원전 31년)으로 비록 그리스적 군주들은 역사에서 종언을 고하였지만, 로마가 지배하면서부터 오히려 그 지역에서 헬레니즘 문화가 활성화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M. 행엘이 지적한대로 헬레니즘의 이상의 추구와 ‘야만인’에 대한 우월감이 오히려 헬레니즘 군주들의 정치권력이 역사에서 사라져가는 것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2. 헬레니즘의 ‘거친 파도’
1) 헬레니즘적 개혁과 유대교의 위기
팔레스타인에서의 헬레니즘의 이 ‘잔잔한 파도’는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년)인 에피파네스가 코엘레-시리아 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부터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다. 이미 팔레스타인에서 4차 시리아 전쟁이후 짙어진 전쟁의 먹구름은 그가 자기의 부친 안티오쿠스 3세가 누렸던 셀류쿠스 왕조의 부활을 꿈꾸며 이집트 원정에 나섰을 때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기원전 170-168년). 그러나 그의 야망은 결국은 로마에 의해 제재되고 말았다. 로마가 그의 힘을 코엘레-시리아와 페니키아에 한정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정치적 차원에서만 펼쳐진 것은 아니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그는 헬레니즘의 이상을 자신의 통치지역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아마 로마의 볼모 상태에서 풀려나 아테네에 정착하면서(기원전 188-175년) 이미 헬레니즘의 영향을 충분히 받았던 것 같다. 그의 이름 ‘에피파네스’(Epiphanes)가 보여주듯이 그는 자신을 ‘신의 현현’이라는 제의적 숭배와 연관시켜 올림피아의 제우스로 자처하게 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통일된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기위해 통치지역에서 무엇보다도 헬레니즘을 먼저 종교적으로 ‘강요’해 나갔다. 그는 이집트 원정이 시작되기 이전에 유대지역에서 헬레니즘을 ‘강요’하기 시작한다(164년). 마카베우스서는 그의 포고령을 이렇게 표현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관습을 버리고 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사역 마카베우스전서 1:41f). 이제 그가 다스리는 모든 곳에서 제우스는 숭배의 대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도 그리심 산에서도, 그의 치하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수호자 제우스의 이름아래 봉헌해야 했다(마카베우스후서 6:2). 이것은 유대인에게 이스라엘의 옛 전통을 포기하고 헬레니즘적 삶의 형태를 강요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되자 유대교의 내부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다시금 친 셀류쿠스적인 귀족들의 지배가 강화되었다. 이미 안티오쿠스 3세 때부터 이들과 친 프톨레메우스적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간의 대립은 격화되기 시작했었다. 하여 마카베우스후서 3장에는 이러한 대립이 오니아스와 성전의 경리 책임자 시몬사이에 벌어진 예루살렘의 ‘시장관리권’에 대한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카베우스서의 저자는 오니아스를 “조국의 수호자요 율법에 열심 있는 자”(마카베우스후서 4:2)로 묘사하는 반면, 시몬은 조국의 배신자로 서술(3:1-4:6)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관계는 당시의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 의존된 예루살렘의 권력의 대립관계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오니아스는 프톨레메우스 왕조의 편에 섰고, 시몬은 당시 셀류쿠스 4세의 편에 있었던 토비아 가문의 지지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은 헬레니즘적 성향이 강하여 안티오쿠스 4세에게 적극적인 헬레니즘적 개혁을 요청하였다. 하여 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마카베우스후서 4:7-10). 하여 예루살렘 ‘시장’에 대한 경제적 이권이 팔레스타인의 전통 부호요 경제적 실권자인 토비아 가문에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티오쿠스 4세의 헬레니즘 ‘강요’의 현실적인 이익은 예루살렘의 귀족들이 향유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마카베우스전서 1:11-14).
이러한 귀족층을 통해 이제 헬레니즘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도시의 문화적인 생활양식으로 확산되어 나갔다(마카베우스후서 4:10-17). 대사제 야손은 대담하게 예루살렘 성과 바로 아래에 그리스식 학교와 체육경기장을 건설하였다. 귀족 청년들은 그리스식 옷과 모자를 걸치고 다녔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그리스 시민권(poli,teuma)을 얻게 된다. 이것은 민족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헬레니즘에 의해 실현된 그리스의 도시국가적 삶을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것은 도시가 헬레니즘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었다. 제사장들은 체육관에서 벌어지는 ‘원반던지기와 레슬링’의 관전에 탐닉하느라 희생제의를 소홀히 했을 정도였다(마카베우스후서 2:14). 그러나 이러한 헬레니즘의 ‘강요’가 헬레니즘의 국제 상업도시로 자리매김 된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은 헬레니즘의 도시에서 쉽게 귀족층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힐 수 있었다. 상인들과 대토지 소유자들은 이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이것을 통해서 이익을 점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손의 헬레니즘 ‘강요’는 경제적 힘에 의해 제압당하고 만다.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 정벌을 위한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야손은 앞에서 말한 성전감독자 시몬의 형제였던 메넬라우스를 통해 안티오쿠스와 거래를 하고 있었으나, 더 많은 돈을 대가로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직을 메넬라우스에게 넘겨주었다(기원전 172-162년). 이것은 메넬라우스의 뒤에 토비아 가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전통적인 대제사장이 속한 사독계열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 대제사장직의 불법적 ‘찬탈’은 이후로도 예루살렘의 정치권력의 변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안티오쿠스 4세가 추진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원정은 결정적으로 로마의 개입에 의해 무산되고 만다(기원전 168년 폴리비우스 Hist. 29권 2,1-4). 이 사건은 그 역시 지중해 연안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로마의 힘 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 이집트를 제압한 로마의 힘의 경계지역인 유대지역에 자신 정치력을 집중해야 했다. 그는 먼저 예루살렘과 성전을 정벌하여 반란을 일으킨 야손을 제압하였다(기원전 168년 마카베우스전서 1:20-24; 마카베우스후서 5:11;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2:248-250). 또 그는 성전의 성벽을 허물고 그 외곽에 아크라(Akra)라는 요새를 세워, 이른바 “다윗의 도시”로 명하였다. 가장 유대교적 이름이 붙여졌으면서도 가장 헬레니즘적 폴리스가 거룩한 땅과 성전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마카베우스전서 1:29-35;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2,251). 그는 노골적으로 유대교적 전통을 허물고, 헬레니즘의 종교제의를 유대인들에게 ‘강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마카베우스전서 1:41-64; 2마카 6:1-11). 이제 헬레니즘의 ‘잔잔한 파도’는 끝이 나고, 본격적으로 헬레니즘이라는 세계화의 ‘거친’ 파도가 이스라엘의 신정주의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안티오쿠스 4세의 이러한 헬레니즘의 ‘강요’가 마카베우스서가 기록하는 것처럼 셀류쿠스가 통치하는 영역 전체에서 일어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유대지역에서 종교적인 차원에서 실행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마카베우스전서 1:41-51 cf. 단 11:36-39). 그것은 국내 정치적으로는 헬레니즘적 통치체제의 유입으로 이익을 얻게 될 귀족층에 의해 추진될 수 있는 하나의 헬레니즘적 ‘개혁’의 성격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2) 마카베우스 혁명과 하스몬 왕조의 독립(132-63)
이 세계화의 ‘거친 파도’는 한편으로는 헬레니즘에 대항하는 국내의 민족주의적 세력의 종교적 봉기를 자극하였다. 봉기의 양상은 상대적으로 헬레니즘 문화화가 더디게 진행된 지방의 보수적인 사제들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결국은 유대교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 중심에 마카베우스 가문이 있었다. 모데인 지역의 하스몬 가문의 족장 맛따디아는 안티오쿠스의 칙령을 따라 희생제물을 바치려는 유대인들을 영웅적으로 살해하고(마카베우스전서 2:23-25) 그 지역을 떠나 군사들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이 저항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율법에 헌신하는” 하시딤의 지원을 받으며(마카베우스전서 2:42; 마카베우스후서 14:6)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하여 맛띠디아의 아들 유다는 ‘마카베우스’(망치)라는 별명을 얻고 저항의 전면에 서게 되었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의 제사가 분향된 지 약 3년 후인 164년 그들은 성전을 재봉헌하게 되었다(마카베우스전서 4:36-59). 포로기 이후 외세의 지배를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이스라엘인들에게 이 저항은 분명 이스라엘의 역사에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이 종교적 자유를 얻기 위해 외세와 투쟁한 극적인 경험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종교적 저항운동은 점차로 정치적인 투쟁으로 치달았다. 그것은 유다 마카베우스는 이제 궁극적으로 이 혁명을 통해서 셀류쿠스 왕조의 지배로부터 항구적으로 벗어나는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정치적 역학관계가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이미 이 시기 로마가 세계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됨으로써 알렉산더 이후 유지되었던 지중해 연안의 패권은 새로운 지각변동을 경험해야 했다. 이 지각변동의 틈새에서 마카베우스 가문은 종교적 저항운동의 정치적인 성과를 이루었으니, 그것이 하스몬 왕조였다(기원전 142-63년). 이 성과가 팔레스타인에서 로마가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상대적으로 셀류쿠스 왕조가 약화된 시기와 맞물리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좌우간 유대교는 이방의 종교에 대항하여 승리하여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국가종교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제사장과 왕의 권력의 승계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 된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미 대제사장은 외세에 의해 정치적으로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야손(175-172년)의 뒤를 이어 메넬레우스(172-162)가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러한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었던 것이다. 하여 이제 알키무스가 다시 셀류쿠스 왕조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고(162년) 유다의 형제 요나단과 대결하여 죽자(159년 마카베우스전서 9:54-57), 대제사장직은 약 7년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159-152년). 그러나 셀류쿠스 왕조 내부에서는 마카베우스 혁명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내분의 상황에 처하게 되고, 결국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마카베우스전서 10:20). 그가 죽은 뒤 그의 형제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앉게 되었고, 시몬은 외세에 주는 세금을 중단하고, 자체의 화폐를 주조할 수 있게 되어(15:6), 이스라엘을 명실상부한 독립 유대국으로 세웠다(기원전 142년). “백 칠십년에 이스라엘은 이민족들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백성은 모든 문서와 계약서에 ‘유다인들의 총독이며 지도자인 시몬 대사제 제 일 년’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다”(마카베우스전서 13:41-42).
하스몬 왕조의 초석을 마련한 시몬을 이어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유대국가를 통치하였다(134-104). 그는 정복군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영토를 주변국까지 확대하였다. 명실상부한 왕조의 기틀이 놓인 셈이다. 기원전 129년에 그는 사마리아의 점령하고 세겜 성전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을 강제 할례시켰다(유대고대사 13.254-258).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리스토불루스 역시 이두래아를 점령하고 그곳 주민들을 할례시켜셔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살게 했다. 이 사건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교의 투쟁의 승리를 향유하고 있었던 당시 유대교의 특수한 성격을 그대로 각인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스몬 왕조의 성립으로 인한 정치적 독립은 민족적 자긍심을 한껏 자극할 수 있는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국가로서의 독립은 단지 80여 년간, 그러니까 로마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관철시키기 이전까지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남편 히르카누스가 죽은 후 시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과 결혼하고 그를 왕좌에 앉혔다(기원전 103-76년). 그가 죽은 후 알렉산드라가 여왕이 되어 통치하다가(76-67년) 알렉산더의 작은 아들 아리스토불로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기원전 67-63), 그는 결국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팔레스타인을 내어주고,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기원전 63년).
3. 종파화된 유대교
여기서 우리는 마카베우스 봉기와 하스몬 왕조의 형성으로 유대교 내부에 일어난 중요한 현상을 고찰해야 한다. 그것은 유대교의 ‘종파화’ 현상이다. 종파란 유대인의 신앙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제2성전기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현상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 다양성은 멀리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했던 귀환공동체 유다의 신앙과 팔레스타인에 남았던 토착 신앙인들에게 기원할 수 있는 사마리아의 신앙까지도 포괄할 만큼 넓었다. 포로기 이후 귀환공동체에 의해 확립된 유대교 신앙의 공통분모는 분명히 존재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마침내 이방인의 지배를 종식시킬 것이라는 신의 위대한 언약을 역사 내에서 일으킬 것이라는 소망이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마카베우스 봉기와 그 결과인 하스몬 왕조를 바로 그 ‘언약의 사건’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인가? 유대교 내부에서 종파의 가시적인 분화는 바로 이 관점에 대한 다양성에서 시작된다.
주지하듯이 요세푸스는 당시 유대교 내부에 존재하던 3~4개의 ‘종파’(ai`re,seij)를 언급했다(유대전쟁사 2,119-166; 유대고대사 13,171-173). 그런데 그는 유대고대사에서 에세네파, 사두개파, 바리세파를 언급하면서(13.171-173), 이 종파들을-쿰란문헌에서 아마도 ‘불의한 대제사장’으로 언급했던-요나단이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른 “그 당시”와 연관시키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내연은 이러하다. 유대교에서 포로기 이후 이방인의 지배는 정당화 되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대제사장의 현실통치로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방인의 지배 자체가 아니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이방인의 지배를 궁극적으로 종식시킬 때까지 유대교가 현실적으로 존속할 대제사장의 정통성의 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니아스 3세 이후 벌어지고 있었던 이방인의 대제사장직 임명의 문제는 유대교적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마카베우스 가문의 봉기를 지원했던 하시딤의 출현은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에 가시화된 종파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하시딤이 마카베우스 가문과 길을 달리하였던 것은 정치적 길을 택한 마카베우스 가문이 대제사장직까지 차지하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일 예루살렘의 불의한 대제사장의 등장을 에세네파의 출현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스몬 왕조의 독립은 결국 유대교적 신앙에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마카베우스를 그토록 찬양하고 있는 마카베우스서조차도 하스몬 왕조의 기틀을 놓았던 시몬의 지위를 “참된 예언자가 나올 때까지”로 제한하고 있었던 것은 매우 암시적이다(마카베우스전서 14:41). 만일 이것이 “모세와 같은 예언자”(신 18:15-20; 1QS 9,11)를 고대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과 연결 지을 수 있다면, 이것은 새롭게 부상한 마카베우스 가문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유대인은 혁명의 결과로 획득한 유대의 독립 국가를 환영하면서도, 영원한 다윗 왕조라는 유대교의 대망을 이 정치적 독립과 완전히 동일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신앙을 군주체제 보다는 대제사장의 전통에서 고수하려고 하였음에 틀림없다.
흥미 있는 것은 이들 하스몬 군주들에 대한 태도의 일면을 보여주는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요세푸스는 요한 히르카누스와 바리새인들 간의 이반 사건을 엘리아잘이 히르카누스를 공개석상에서 비난했다 이야기로 돌리고 있다(유대고대사 13.293-98). 이것을 역사적인 사료로 보기는 어렵지만, 이 왕궁의 한 에피소드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요컨대, 그 비판은 하스몬 군주들이 겸하고 있는 대제사장직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 얀네우스에 대한 백성들의 비난의 이유 역시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희생제사를 드리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유대고대사 13,372). 이 사건으로 얀네우스는 백성과 결탁한 바리새파에 대한 피의 숙청이 자행되었으나(13,380), 결국 권력을 유지함에 있어서 백성들과 바리새인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13,400-403). 물론 그 반대에 사두개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유대교는 언젠가 종식될 이방인의 통치의 시기까지 유효한 대제사장적 신정통치에 대한 다양한 신념과 계층이 분화된 경쟁구조로 채워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양성이 제2성전기 유대교의 본질을 각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면, 그것이 바로 종파화된 유대교였던 것이다.
그것은 요컨대, 이방인과 이방의 문화에 대해서 이스라엘인은 누구이고, 그들의 신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점 배후에는 사회학적 집단으로서 종파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궁극적으로 이시기의 유대교 내부에 존재하였던 그러한 종파들은 이스라엘 전통을 전적으로 유일신 신앙과 토라의 준수와 동일시하려는 공통의 터전에 서있었던 반면, 이방인들의 현실적인 통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은 유대교가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을 종교적이고 사회적 차원의 새로운 틀로 형성함으로써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IV.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의 성격 박정수 (성결대학교 교수 / 신약학)
포로기 이후 이른바 ‘제사장적 신정주의’의 패러다임 위에 구축된 유대교는 이제 헬레니즘의 “세계화”를 경험하게 됨으로, 그 기틀이 세워지기 시작한지 불과 200여년 만에 그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위기의 본질을 서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시기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가 진행되어, 이제까지 안정적이었던 개인과 집단의 삶에 문화적 충격이 가해지는 때이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개인은 공동체적 관계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고대 유대인의 사회가 경험한 그러한 위기는 그 민족공동체의 구성원 각자가 경험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하여 본인은 이 정체성의 위기를 분석하되 한편으로는 전승의 변화를 통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그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사회학적 그룹을 파악함으로써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의 성격과 그 본질을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대사회는 본질적으로 소수의 엘리트와 대다수의 하층민으로 구성되었다. 가족과 씨족공동체를 기초단위로 한 하층민들은 중앙의 엘리트들과 지속적인 사회경제적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었던 패트로니지(Patronage)로 결합되어 있었다. 유대교에서 저 헬레니즘의 세계화의 풍랑에 대한 역사적 대응은 앞서 살펴본 대로 사회적 상층부에 속하는 사회정치적 엘리트 계층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사회와 종교에서 독특한 기능을 수행했던 예언자들은 상․하층민들 모두에게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정체성 확립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들에게 헬레니즘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행하신 야웨의 행위는 이제 모든 민족의 역사 가운데에서도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민족사와 세계사’의 긴장의 중심에는 여전히 야웨의 구원행위가 있었고, 이것에 대한 고백과 순종의 삶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가 겪었던 정체성의 위기를 다음 세 가지의 요인으로 다루고자 한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이 겪었던 삶의 위기이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의 한계로 이것은 종교적 엘리트들의 문헌을 통해서 서술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의 지혜문헌을 다룰 것이다.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서술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상층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것임을 전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묵시문학 자료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셋째, 사마리아에 대한 유대교의 정체성의 문제이다. 유대교에서 사마리아의 문제는 ‘민족과 세계’의 긴장관계라는 관점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유대교의 사마리아 통합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1. 지혜와 이스라엘인의 삶
우리가 가장 먼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이다. 그것은 이시기 유대교가 헬레니즘과의 문화적 충돌 속에서 겪는 삶의 정체성의 위기를 가장 잘 반영하고 것이 지혜사상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지혜란 본질적으로 “관찰이나 사색,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지식을 통하여, 개인의 삶을 세계의 기초질서에 어떻게 순응할 것인가를 목표로 세계를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었다. 머어피(R. E. Murphy)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비를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통 속에서보다 지혜의 영역에서 훨씬 더 근본적으로 경험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에서 지혜는 ‘이스라엘인’으로서 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정체성의 문제와 씨름했던 일차적 자료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헬레니즘과 유대교가 만난 비교적 초기의 흔적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상류층 ‘지식인들’이 겪었던 삶의 정체성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구지 지식인들이 겪었던 위기를 논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삶 전반을 현실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규범인 ‘옛 지혜’에 대한 그들의 대응을 논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혜란 고대 세계에서 전적으로 지식인들과 상층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쟁기를 잡는 자들이 어떻게 지혜롭게 되겠는가?”(시락 38:25)라는 예루살렘의 지식인 베 시라의 견해는, 수공업이나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에게 지혜란 분명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대변한다(38:24-39:11). 고대세계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 filo,sofe)들은 분명히 사회적 상층계층이었다. 이스라엘의 지혜 현상도 고대 근동에서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전문가 계층에 의해서 전수되어왔다. 토라가 제사장에 의해, 야웨의 신탁이 예언자에 의해 전수되었듯이, 지혜의 말은 현자들에 의해 전수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러한 지혜의 계층화 현상은 철저하게 관철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헬레니즘 초기시기의 지혜전승에 과한 두 가지 저작을 다룸으로써 이 시대 지혜의 성격을 규정해야 한다. 우선 헬레니즘과 유대교가 만난 역사적 시기를 ‘초기’로 규정한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헬레니즘이 아직은 ‘강요’의 형태로 유대교에 다가오지 않은 평화의 시기, 즉 대략 기원전 300-200녕에 한정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좀 더 이른 전승에 속하는 전도서요, 또 다른 하나는 그 보다 더 늦은 시기에 속하는 벤 시라서이다. 양자는 모두 예루살렘의 지식인 계층의 정체성을 문제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논의에 매우 중요한 논거를 제공할 것이다.
1) 전도서: 전통적 삶의 위기
학자들은 전도서가 3세기 중반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시기 예루살렘의 귀족층 지식인에 속하였던 무명의 현자 “코헬렛”에 의해 기록되었다는데 중론을 모으고 있다. 전도서의 첫 번째 후기(12:9-11)를 기록한 편집자에 의하면, 코헬렛은 “백성들”에게 대중적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고 한다.(12:9) 이것은 그가 전문적인 지혜 교사를 양성하는 학교에 속한 교사는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 행엘은 코헬렛이 지혜교사로서 구약에서는 처음으로 전승되어온 지혜를 개인으로서 분석적이고 비평적 관점에서 자신의 삶의 경험과 융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 지혜학파의 전통적 지혜의 핵심인 인과율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아래를 보라) 그의 삶의 자리가 그곳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고 독립적일 때만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옛 지혜의 수집가(12:10)인 동시에 ‘창조적인’ 잠언지혜의 저작자(12:9)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에서 전도서를 주목해야 하는 것인가? 폰 라트는 “전도서처럼 뚜렷한 정신적인 개성을 지닌 잠언 수집물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 만큼 이스라엘의 지혜 전통에서 전도서는 낯선 이물질과 같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도서가 인간의 삶의 문제를 경험을 통해서 사색하고 있는 전통적 지혜의 방법론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 지혜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과 현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적 사색의 결과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 지혜인 잠언의 지혜는 이세상적이며, 자연적인 일종의 비계시적 성격을 갖는다. “누가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왔는가?”(잠 30:4) 경험과 이성이 이스라엘의 전통적 지혜의 방법론적 도구였다면, 이 두 가지는 이스라엘의 현인들에게 ‘행위-결과’라는 인과율(因果律)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여 지혜는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세계에 적응할 것인가라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설정하게 된다. 결국 이스라엘의 저 기나긴 지혜전승의 역사는 “하나님을 경외(hwhy tary)하는 것이 참다운 지혜”(욥 28:28 잠 1:7; 9:10; 14:26f; 시 111:10)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이스라엘의 지혜의 방법과 사색의 내용이 만들어 내는 최종적인 구조물은 바로 인간의 삶의 유의미성(有意味性)인 것이다. 본인이 이해하는 한 이것이 폰 라트가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그러나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이 그러한 이성적 방법론을 폐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지혜에서 사색할 수 없는 새로운 질문을 한다. ‘인간의 삶은 과연 유의미(有意味)한가?’ “헛되다”(lbh)는 외침은 전도서를 규정하는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약 30회나 사용될 만큼-중요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그가 이스라엘의 지혜가 구축해 놓은 최종적 구조물인 ‘하나님 경외’를 반성적으로 사유했던 구조였다. 그는 여전히 전통적 지혜의 방법인 개개의 경험적 관찰과 이성적 사색을 도구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 지혜가 지향하는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부인한다. 코헬렛은 욥의 사색-즉,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의 부당성-을 더욱 발전시킨다. 그에 의하면 이성에 의해 통찰된 세계는 ‘행위-보상’의 원리가 지탱될 수 없는 불합리한 세계이다. ‘의인이 버림받거나 그 자손이 걸식을 하지 않는다’(시 37:25 cf. 잠 11:18)라는 옛 지혜는 이제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고,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다”(8:14)는 현실의 불합리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 ‘땀 흘린 노동에는 반드시 그 대가가 따른다’(잠 14:23)는 경험적 확신도 허물어진다. 하여 구약에서는 오직 전도서에서만 5번 등장하는 어휘 !wrty(이익 1:3; 2:11. 13; 3:9; 5:15: 10:11)은 !wrty-hm(“이익이 무엇이냐?”)라는 수사적 표현과 함께 이제가지 생각할 수 없었던 ‘행위-결과’라는 경험적 합리성의 기초를 흔들어 놓는다.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3:9) 더 나아가 코헬렛은 지혜의 기능과 그 산물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1:16-18; 9:13-16). 이스라엘의 현자들의 ‘지혜-성공’이라는 인과론적 사슬이 이제는 더 이상 유의미한 삶의 구조로 경험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혜가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혜는 현실 속에서 삶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제공하지 않기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전통적 지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었다. 하여 지혜전통에서는 선조들의 이야기나 출애굽 사건과 광야의 이야기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지혜는 ‘율법과 예언’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를 인간의 삶 속에서 간접적으로 결합시키는 방식으로서 이스라엘의 삶의 모든 영역에 개입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세계를 향한 태도를 설정하게 되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 지혜의 관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지혜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전도서에서도 “하나님 경외”(3:14; 7:18; 8:12f)는 여전히 삶의 진지한 태도가 된다. 세계도 여전히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전도서에서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 의존된 세계의 ‘한 부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작 그 하나님은 ‘이해 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행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3:11). 어느 누구도 자기의 코앞에 다가와 있는 일조차 알지 못한다(9:1). 인간은 하나님을 다만 운명(hrqm)으로서 경험할 뿐이다(3:19; 9:2, 3). 이것이야 말로 미래를 알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이다(7:14). 폰 라트는 이점에서 코헬렛이 겪고 있는 전통과의 단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 이스라엘에서, 그러므로 지혜의 교사들에게서도 미래는 단적으로 인간이 야웨에게 과감하게 비워주어야 하는 야웨의 영지(領地)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코헬렛은 “다가올 모든 것은 헛되다”(11:8 lbh abv-lk)고 선언한다. 옛 현자들은 모든 사건은 ‘적합한 때’가 있고, 인간은 이를 알 수 있고 이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운명적 시간’으로 남는다. 인간은 그 너머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삶과 죽음의 때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때를 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삶의 양극단 전체로서만 경험 할 따름이다(3:2-8).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운명적 존재이다. 죽음의 운명 앞에 인간은 현자나 우매자가 다를 바 없으며, 짐승과도 다를 바가 없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3:19 cf. 9:2-3). 이것을 코헬렛의 회의주의라 부른다 해도, 그것은 어떤 무신론적 회의주의나, 인식론적인 회의주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코헬렛은 결코 사물과 대상의 통찰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부조리함(absurdity)을 “헛되다”고 절규함으로써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합리적 이성으로 구축된 옛 이스라엘의 세계전체를 이렇게 인간의 실존에 서서 반성적으로 사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사상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그가 전통적 지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철학적 사색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코헬렛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통해서였다. 본인은 이것을 그가 처한 사회적 삶의 자리를 통해서 해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현실 세계는 어떠한 사회였을까? 그는 어떤 부류의 지식인이었을까? 그는 어떠한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크뤼제만(F. Crüsemann)은 코헬렛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무의미와 부조리를 “자본주의의 견고한 틀 속에 있는 복지생활을 누리면서도 그것에 대하여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절망”과 비교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코헬렛의 선언은, 인간이 어떠한 실천을 해도 결국 세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학적 체념”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체념은 옛 이스라엘의 지혜가 대답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코헬렛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10:19) 그리고 노동에 대한 대가가 땀 흘린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 현실은 인과응보의 전통적 원리가 지탱될 수 없는 세계이다. 만일 그 대가가 전통적인 노동과 생산에 의한 합리적 보상이 아니라 화폐경제상의 돈의 교환에서 발생한 이익이라면, 코헬렛이 직면한 세계는 노동력을 통한 농업생산물(곡식, 채소)이 아니라, 수출용 상품(포도주와 기름)을 뒷받침 하는 화폐경제가 지배하는 사회일 가능성이 있다. 더 나아가 현재의 수고로 쌓은 재산이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은 후손에게 상속되는 현실도 불합리한 것이라고 본다.(2:18f) 지적인 재산으로 간주된 지혜의 축적도 마찬가지이다.(2:21f) 다른 한편, 현실에는 불의와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이 존재한다.(3:16; 4;1-3; 5:7a) 게다가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는”(5:7b) 이 현실은 층층이 쌓인 프톨레메우스 시대의 헬레니즘 제국의 통치체제를 반영한다. 이 국가체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적 세금체제를 유지하는 세금징수관(telw/nai)에 의해 유지된다고 할 수 있었다. 세금을 통해 국부는 심하게 유출되고, 그것으로 이익을 보는 거대한 자본이 출현함으로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현실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가 이스라엘에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는 바로 지파구조와 이것에 근거하고 있는 연대성의 윤리를 파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언에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혹은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식의 인간의 연대성(連帶性)을 주장하고 있다 해도, 이것은 옛 지혜전승이 주로 다루고 있는 ‘부모-자식’ 그리고 지파공동체 내에서의 ‘이웃’관계와 같은 전통적 인간관계의 구체적 규범과는 다른 형태의 추상적 관계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규범과 사고를 더 이상 현실세계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게 된 코헬렛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분명 이스라엘의 지식계층의 한 일원으로서 이스라엘의 전통적 규범을 이제까지는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헬렛은 이 지배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체제를 정당화 한다. “한 나라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왕이다. 왕이 있으므로 백성은 마음 놓고 농사를 짓는다.”(5:8)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세계의 정점에 있는 왕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왕의 명령에 복종하여라. 그것은 네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것이기 때문이다.”(8:2 cf. 8:4) 여기에서 코헬렛의 보수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는 현실을 현실대로 인정한다. 코헬렛의 이 현실주의는 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결정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세계와 시간 안에서 즐겁게 살아야 한다.’(3:12f; 5:18; 9:7f etc.) 향락은 이 세계 내에서 훌륭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코헬렛의 ‘타협적’ 현실주의의 태도는 결코 전통적인 지혜가 지향하고 있는 완성된 삶의 구조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삶의 의미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초, 즉 ‘세계 내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을 인간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행동 방식은 옛 이스라엘이 경험해 온 ‘임마누엘’이라는 ‘역사적’ 하나님 관념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였던 구원의 주는 이미 역사를 넘어선 우주적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코헬렛에게 이른바 ‘세계로부터 멀어진 하나님’ 관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사유였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코헬렛은 옛 현자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체험되었던 야웨(hwhy)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코헬렛은 하나님의 이름을 엘로힘(~yhla)으로, 그것도 대부분 관사를 동반한 ~yhlah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민족주의적인 범주를 넘어서서 이해하고 있다는 하나의 암시가 될 수 있다. 물론 옛 잠언의 지혜전통이 역사를 재료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그 지향하는바 “야웨 경외”는 야웨가 지배하는 세계질서는 불변하리라는 믿음에 굳건히 세워져 있었다. 하여 세계질서에 대한 순응은 야웨의 이름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코헬렛은 이 복종의 규범 자체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내용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약과 은총, 심판과 용서이라는 역사적, 인격적 관계로 이해한 것이었다면, 코헬렛은 그 내용을 차디찬 ‘계산적 사고’로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한 서원을 갚으라(5:3-4)는 신명기적 서원(22:21-23)을 언급하면서도 코헬렛은 야웨가 아니라 엘로힘(~yhla)에 대한 서원을 말하며, 더 나아가 서원을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서원을 하고도 지키지 못하는 것 보다는 낫다(5:4 bAj)는 권면으로 대치하고 있다. 여기서 언약관계를 기초로 한 죄의 개념은 스스로 한 말에 대한 경솔함의 죄라는 냉철한 사고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전통적 지혜의 권고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라”는 중용적 사고와 만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냉철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세계가 변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1:9; 3:15; 6:10 등)을 코헬렛은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벤 시라서: 토라와 이스라엘의 정체성
헬레니즘 시대 이스라엘의 지혜의 위기가 유대인 지식인들의 삶의 위기를 반영한다면, 그 위기에 대한 대응을 우리는 히브리 성서의 비정경 문헌에 속하는 ‘벤 시라’(Ben Sira)라는 지혜서에 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도서가 ‘집회서’ 불리는 것과 같이, 이 문헌은 주로 회중들이 모이는 공적인 장소에서 읽혔기 때문에 이미 3세기부터 라틴어로 ‘Ecclesiasticus’(집회서)라고도 불렸다. 이는 이 둘을 함께 ‘지혜의 책’으로 읽으려했던 영향사(Wirkungsgeschichte)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예수 시라”에 의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그는 “시라의 손자 예수”(50:27)인데, 이는 “벤 시라”(51:30), 즉 “예수 시라”이다. 이는 그리스어의 번역 서문에서 시라의 손자가 저자를 “나의 조부 예수”(1:7)라고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그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상류층에서 활동한 지혜교사였을 것이다. 하여 그는 젊은이들을 자신의 학교로 이렇게 초대하고 있다. “너희 배우지 못한 자들아 내게 와서 나의 배움의 집(vrdm tyb)에 거하라.”(51:23) 또한 그는 전문적인 지혜의 교사로서 서기관(rpeso gramma,teuj)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서기관의 지혜가 지혜를 더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적게 가진 자가 현자가 된다.”(38:24) 그러므로 벤 시라서에서 대제사장 시몬의 찬가(51장)가 매우 비중있게 언급된다하여 그를 제사장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벤 시라 시대에 전문적인 학교 교육 시스템이 존재하였을까? 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역사적으로 헬레니즘의 개혁이 강요된 안티오커스 IV세 이후에야 비로소 유대교적 전통을 가르치는 본격적인 학교가 출현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야손의 “극악한 행위”로 불리는 헬레니즘의 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그리스식 학교(김나지움)가 예루살렘에서 세워진 후에, 이스라엘에서는 이것에 대항하여 토라를 중심으로 한 공적인 교육체계가 정비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개혁의 ‘격랑’을 겪기 이전(아래 참조)의 벤 시라에게서 제도화된 학교 교사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의 서문은 기록 당시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의 손자는 “유에르게테스 왕 재위(evpi. tou/ Euverge,tou basile,wj) 제 38년에 이집트로 가서”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서문 27-30). 이 왕은 기원전 170년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통치했던 프톨레메우스 VII세 퓌스콘 유에르게테스(Physkon Euergetes)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리스어 번역이 132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이고, 처음 예수 시라에 의해 히브리어로 쓰인 시기는 증손자와 두 세대 간격을 생각하면 약 190년 전후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저작의 하한선으로는 안티오쿠스 IV세 에피파네스의 등장(기원전 175-164년)으로 인한 유대교의 정치적 격변에 대해 알지 못한 것으로 보아서 최소한 175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또한 70인역은 예수 시라가 “예루살렘 사람”(50:29 o` VIerosolumi,thj)이었다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벤 시라는 팔레스타인이 이집트의 프톨레메우스 왕조에서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지배로 바뀌는 역사적 전환기를 지나 약 180년경에 그 중심도시인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고, 두 세대 이후 약 120년 경 그의 무명의 손자에 의해 디아스포라 이집트(아마도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저작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앞서 언급한 상황에 벤 시라가 처하였다면, 그는 예루살렘의 한 지식인으로서 헬레니즘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변화의 힘을 경험하며 이스라엘인으로서의 삶의 정체성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점에서 그는 코헬렛과 비슷한 사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그는 분명 코헬렛과는 다른 점을 보여준다. 벤 시라는 코헬렛과 같이 이스라엘의 지혜를 다루지만, 코헬렛이 이스라엘의 전통지혜에 대하여 회의적이고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지혜를 좀 더 이스라엘의 전통 속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한다. 이점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폰 라트의 견해를 따를 수 있다. 벤 시라는 이스라엘의 전통과 연관하여 자신의 활동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나도 이와 같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포도 추수] 후 이삭을 줍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33:16) 벤 시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 지혜라는 옛 지혜 전승의 뿌리에 튼튼히 서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정작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 경외가 무엇인가?’였다. 옛 지혜에 의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잠언의 ‘지혜’가 관철되는 모든 행동의 규범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계약전통에 서있는 설화나 율법 혹은 예언과는 구분되는 또 구별되는 장르였다. 하여 그것은 ‘민족들’이 아닌 개인과 가족의 일상적 삶을 다룬다. 그러기에 잠언에서 “내 아들아!”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경외’라는 지혜문학적 ‘삶의 태도’는 야웨의 요구에 부응하라는 ‘율법과 예언’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에서 개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혜 교사들과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노인들의 교훈에 의존한 삶의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잠언이 일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벤 시라는 “지혜의 완성은 주를 경외하는 것이다”(1:16a)라는 잠언의 지혜전통(잠 1:7. 9. 19)에 서있으면서도, 궁극적으로 그의 지혜의 “가르침”(paidei,a)은 현자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성문화된 율법으로서의 토라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지혜의 근본은 주님을 두려워하는데 있으며, 율법을 행하는 것은 그 모든 지혜에 속한다.”(19:20) 또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지혜를 얻는 길이다(1:26; 6:37). 이렇게 벤 시라는 참 지혜인 ‘주를 경외함’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세히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10:19). 이것이 바로 그와 코헬렛과의 차이점인 것이다.
그러나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II.3.2) 지혜를 토라와 연관시킨 것은 벤 시라가 처음은 아니었다. 지혜의 언어와 사상을 표현하는 시편 가운데(시 119:66)과 ‘율법시편’(1장 119장)에서, 그리고 이른바 ‘신명기적 지혜’(신 4:6a)와 같은 언급들에서 율법과 지혜의 결합을 볼 수 있었다. 블렌킨솝(J. Blenkinsopp)는 구약 성서에서 지혜와 율법의 결합을 광범위한 이스라엘 전승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율법과 지혜라는 거대한 흐름은 결국 합류되었고, 그것이 랍비문헌과 초기기독교 신학으로 흘러나가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저 거대한 지혜와 율법의 전승사에서 벤 시라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하고 있다. 벤 시라는 이전의 작은 지류가 합쳐졌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명 거대한 강의 합류지점에 서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벤 시라 이전의 어떤 곳에서도 그와 같이 본격적으로 지혜와 율법의 전승을 통합하고 있는 문헌을 찾아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벤 시라가 처해있는 문화적 ․ 역사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벤 시라는 문화적으로 헬레니즘의 철학의 영향이 편만해지는 시대에 이 저작을 시작했다. 이 시기 아테네에서 제노의 활동으로 스토아의 철학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벤 시라는 여행을 통하여(34:9-14; 39:4) 헬레니즘의 스토아 지혜를 습득하고 있는 유대인의 지식인들,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나 바빌로니아에서 유대교 지혜의 전수자인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의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학문적 태도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취해있는’ 헬레니즘의 지혜는 예루살렘의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 대한 벤 시라의 견해는 단호했다. 우리는 그가 이른바 “민족적” 지혜의 우월성을 통하여 헬레니즘의 문화적 유입을 향유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귀족층 지식인들을 비판하며 계몽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의 태도를 유추할 수 있다. 그는 그릇된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네게 너무 높은 것을 구하지 말며, 네 앞에 감추어진 것을 탐구하지 말라. 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하여 생각하되, 감추어진 것을 찾으려 애쓰지 말라. 너보다 큰 것에 대해서 우울해 하지 말라. 이는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하나님이] 네게 보여주셨고, 인간들의 생각은 그들의 많은 악한 생각들이 미혹하기 때문이다.”(3:21-24) 행엘(M. Hengel)은 여기서 스멘트(R. Semend)의 견해를 받아들여 “인간들”을 그리스인들로 간주하여, 벤 시라가 그리스적 “지혜”에 대하여 자신의 “배움의 집”으로 오는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 젊은이들(3:17f)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이 당시 헬레니즘의 지혜는 진리의 여신 마아트(Maat)를 이어받은 이시스(Isis) 제의를 통하여 팔레스타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유대교의 여러 지혜학파는 이러한 ‘수입된’ 지혜를 통하여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지혜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 지혜는 이제 인격적인 하나님의 ‘귀염둥이’(잠 1-9장)로서가 아니라, 지혜의 활동과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일체를 이루는 우주의 보편적 원리로서 인간에게 도덕적 행위들을 요청한다. 그런 의미에서 벤 시라의 지혜 관념은 다시금 스토아의 로고스와 질서와 유비를 갖는다. 하여 우리는 벤 시라가 그러한 판헬레니즘적 지혜전승에 단지 배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벤 시라의 과제는 그러한 보편적 우주적 지혜가 이스라엘 민족 에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국제적 지혜의 컨텍스트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토라를 그러한 지혜전승과 통합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은 그 모든 지혜에 속한다”(19:20b)거나,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지혜를 얻는 길’(1:26; 6:37)이라는 선언에서 벤 시라의 사상적 진전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혜로 토라를 해석하는 벤 시라의 사상의 집약을 그의 ‘지혜의 찬가’(24장)에서 발견하게 된다. 24장은 그리스어 역본만 남아있는데, 벤 시라서는 이 부분을 핵심으로 하여 서문인 지혜의 찬가 1:1-10과 결어인 지혜를 추구하는 자신의 생애의 고백(51:13-30)으로 구성된 지혜서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 ‘지혜의 찬가’의 전반부는 지혜가 스스로를 찬양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24:3-22). “나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며, 안개와 같이 온 땅을 덮었다. 나는 가장 높은 곳에 거하였고 나의 보좌는 구름기둥 위에 서 있다(24:3-4).” 여기서도 잠언 1-9장에서 보이는 ‘지혜의 의인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으로서 자신의 피조성을 강조한다. “그(창조주)가 영원 전부터 태초로부터 나를 창조하셨고, 나는 영원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24:9). 그렇지만 벤 시라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 지혜를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관시키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높은 하늘 보좌에 거하던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안식처를 이스라엘에게서 찾는다. “그(창조자)가 말씀하시기를 ‘너는 야곱에게 네 장막을 치고, 너는 이스라엘에 너의 유산이 있으라’고 하셨다.”(24:8b) 지혜는 “거룩한 장막 안에서”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시온”에 살게 되었으며, “주의 유업이요 분깃인, 영광된 한 백성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24:10-12). 여기서 ‘보편적’ 지혜가 이스라엘 민족적 전통의 자리로 내려오게 됨으로 일종의 ‘신화와 역사’가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무엇보다도 본격적인 이 ‘지혜의 찬가’의 후반부에서 지혜와 율법의 관계(24:23-27)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지혜에 관한)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언약의 책이며, 야곱의 공동체를 위한 유산으로서 모세가 우리에게 명한 율법이다”(24:23). 또 “율법은 ··· 지혜를 넘치게 하며, ··· 교훈을 넘치게 한다”(24:24)는 언급은 이스라엘의 지혜의 근원을 율법전승에서 찾으려는 벤 시라의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율법 전통으로부터 지혜의 물줄기를 끌어대고 있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강에서 흘러나오는 운하와 같고, 거기서 나오는 물줄기 같이 정원으로 흘러들어간다”(24:30 kavgw. w`j diw/rux avpo. potamou/ kai. w`j u`dragwgo.j evxh/lqon eivj para,deison).
요컨대, 벤 시라는 헬레니즘 시대 예루살렘의 지식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스라엘 전통의 위기가 초래한 이스라엘인의 정체성의 문제를(전도서), ‘지혜와 율법’을 통합함으로써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토라가 ‘권위의 자리’에 앉게 된 당시의 유대교에서, 토라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삶의 규범을 세워가려는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http://cafe.daum.net/dm3179/22Ya/164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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