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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기쁨조미료25 2008. 12. 5. 20:13

제자훈련

제1단계 경건의 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생활의 모든 영역-곧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걸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특별히 하루 중에 일정한 시간을 따로 떼어 내어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뢰는 교제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과 만나는 이 시간이 결여된다면, 우리는 곧장 영적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종교적 분위기에는 익숙하나 실체감 없는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껍데기만의 형식주의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경건의 시간의 중요성

1.그리스도인 생활의 근원적 활력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과 신앙생활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우러나온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해져야 하고(딤후2:1), 이로써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말씀과 관련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하는 것 같이’하고, 봉사에 관련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할 수 있을 것이다(벧전4:11). 이러한 영적 권위와 능력은 오직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한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며, 그의 전 생활은 참으로 활기 있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변해 갈 것이다.


2.하나님을 알아가는 필수적 수단이다.

두 인격 사이에 ‘만남’이 없다면 서로에 대한 ‘앎’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과 자꾸 만남으로써 상대방의 인격에 동화되고 상대방을 점점 깊숙이 알아 가게 된다. 이와 똑같은 이치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더 깊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된다.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 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이웃과 세계에 대한 그 분의 궁극적인 계획이 무엇인지 배워 나갈 수 있다. 예수님도 은연 중에 함께 있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셨다.(요14:9)


3.경건 생활의 지속적 훈련이다.

‘경건’이란 말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하나님을 향한 태도라는 말이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며 믿는 자녀들의 아버지이시고,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올바로 섬기고 그 분을 예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 점에서 숙달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4:7)고 당부했다. 이러한 경건 생활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많은 훈련과 반복적인 실행을 통해 진척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에게 ’연습하라‘는 권면을 주는 것이다. 우리도 매일의 경건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른 태도로 섬기고, 찬양하고 예배하도록 훈련이 되어야 한다.


■실제적 준비와 계획

1.장소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기에 적합한 장소를 택하라. 조용하고 주위를 산만하게 만들지 않으며, 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정한 곳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택하신 경건의 시간 장소는?(막1:35)                                         


2.시간

경건의 시간은 홀로 갖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을 때가 좋다. 어떤 이는 늦은 밤이 좋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낮시간이 적합하다고 한다.

이 시간의 적합성은 개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주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30-60분 가량을 갖는 것이 통례이다. 경건의 시간은 그 규칙성과 지속섣ㅇ에 생명이 있다. 매일 적은 시간의 교제가, 띄엄띄엄 몇 시간씩 갖는 것보다 낫다.

다윗의 기도 시간은?(시5:3)                                    


3.성경

경건의 시간에 보는 성경은 즉흥적이어서는 안 되고 체계적이며 전반적인 계획표에 의거해야 한다. 이곳 저곳 아무렇게나 기분내키는 대로 읽어 치우지 말고, 사전에 계획을 세워 살펴 나가도록 한다. 읽어 나가면서 깨닫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노트가 준비되어야 하며, 한 말씀 한 말씀 곱씹고 자신의 생활에 투영시켜 보는 묵상의 과정도 빼놓을 수 없다.


4.기도

기도 역시 준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열거하지 말고 기도 카드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기도 제목과 말씀을 통해 깨달은 바, 남을 위한 중보의 기도 제목, 학교. 모임, 단체의 공식적 기도 제목 등 하루에 기도할 것들을 정해 놓고 기도에 임하도록 하라.


■당일의 순서

1.기다림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성령님의 조명이 있기를 간구한다.

시119:8                                                                  

눅24:32                                                                  


2.읽기

적당한 분량의 말씀을 2-3회 정독하고 본문의 강조점, 분위기, 반복되는 어구나 사상에 주의를 기울인다.

행17:11                                                                  


3.적기와 묵상

관찰, 해석에 있어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짤막하게 노트에 기록하고, 그 말씀 속에 자신을 투영해 본다.

시1:2                                                                    

수1:8                                                                    


묵상에 도움이 되는 질문들

  •하나님에 대해 새로이 깨달은 바

  •버려야 할 죄악

  •믿고 주장해야 할 약속

  •본보기

  •따라야 할 명령

예제) 눅5:1-11을 일고 이러한 질문의 예를 찾아보라.

  •하나님에 대해 새로이 깨달은 바

                                                                          

  •버려야 할 죄악

                                                                          

  •믿고 주장해야 할 약속

                                                                          

  •본보기

                                                                          

  •따라야 할 명령

                                                                          


4.기도하기

오늘 읽은 말씀이 자신의 생활에서 올바르게 적용되며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기로 기도한다.

히4:12                                                                    

그 날에 깨달은 말씀을 사모, 고백, 감사, 간구의 내용으로 확대시켜 기도한다.

그 날 깨달은 내용이 ‘사모’에 관계되면 사모하는 기도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고백’에 관계되면 회개의 내용이 많을 것이며, 어떤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꼈다면 ‘감사’의 내용이 대부분이 될 것이다. 꼭 위의 순서로 해야 한다는 법도 없고, 모든 요소가 한 날의 기도에 다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5.중보하기

또 자신뿐 아니라 남을 위해서-그들의 구원과 성장, 복음에 합당한 삶, 당면한 문제 해결 등-기도한다.

빌1:9-11                                                                    


6.의탁하기

하루의 삶을 완전히 맡기고, 하루에 일어날 일, 만날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뢰며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처리해 주시도록 간구한다.

골3:17                                                                      


■한 주간 과제

일주일간 경건의 시간을 가진 후, 아래의 보고서에 기록한다.

 

본   문

중 심 된  교 훈

기  도  제  목

 

 

 

 

 

 

 

 

 

 

 

 

 

 

 

 

 

 

 

 

 

 



제2단계 살아있는 경건의 시간

 

ZQT를 관통하는 5대 원리

QT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소위‘PRESS원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아래 다섯가지 QT순서의 영문 첫글자로 만든 것이다.

1.준비기도를 한다.(Pray for a moment)

QT는 사실 이 부분에서 성패가 크게 좌우된다. 왜냐하면 QT가 하늘보좌, 그 지성소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보시는 대로의 선, 악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할 때, QT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이다.

즉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자기 나름대로의 선악의 기준을 철저히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자기를 못박는 것이요, 제단에서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것과 같다. 이렇게 기도할 때 비로소(이미 열려진 지성소이지만) 오늘 내게 그 지성소 휘장이 또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입증된다.

지성소, 하늘보좌에 이르는 길은 오직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철저히 자기를 부인했을 때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순서에서는 비록 ‘잠깐’ 기도할지라도 ‘깊게’ 기도하는 것이 요구된다.


2.그날의 본문을 읽는다.(Read His Word)

준비기도를 통해 이미 열린 눈과 마음으로 본문을 2-3회 정성껏 읽으면 본문에서 어느새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두 번째 순서는 실상 ‘그날의 본문을 읽으라’가 아니라 ‘그분의 음성을 들으라’(Hear His Voice)고 해야 할 것이다. 본문을 두 세 번 읽을 때 다름과 같이 읽으면 더욱 효과적이다.

첫째, 처음 읽는 것처럼 읽으라. 친숙은 권태와 경멸을 일으킨다. 그래서 익숙한 본문은 자기 나름대로의 ‘낯설게 하기’를 시도해야 한다. 영어 본문으로 자세히 읽어보는 것도 그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둘째, 연애편지를 읽듯이 읽으라. 이러한 표현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다.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주를 신랑으로 하는 신부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연애편지를 읽는 집중력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조만간 이 시대의 정신적, 영적 거인들이 될 것이다.

셋째, 관찰질문(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등)을 던지며 읽는 것도 유익하다.

넷째, 문맥을 파악하며 읽으라. 이는 글의 맥락, 역사적, 신학적 맥을 고려하는 것이다. 큐티는 일방적 연구가 아닌 성령 안에서의 인격적인 대화임을 잊지 말라.


3.깨달은 말씀을 깊이 묵상한다.(Examine His Word)

이것은 본문읽기에 파악된 내용을 성령 안에서 더욱 깊이 구체적으로 깨달아가는 묵상을 의미한다. 이 과정이 잘되면 본문의 내용이 마치 내게 하시는 말씀처럼 마음에 와 닿거나 또는 화면처럼 영상화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이 발견되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 과정 역시 앞서의 본문 읽기에서 사용한 질문들(언제,어디서,누가,무엇을,어떻게,왜 등)을 계속 사용하며 대화식으로 본문을 묵상해 간다. 그러나 본문 읽기에서는 주로 내용파악을 위한 관찰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그 본문의 심층적 의미와 하나님의 성품이나 영적 원리 등을 파악하기 위한 해석질문으로 사용한다.

이 때에 ‘주님,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와 ‘주님, 왜 오늘 이 말씀을 제게 주십니까?’라는 두 질문은 이 과정 전체를 통해서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을 찾고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핵심적인 질문이 된다.


4.말씀의 결과를 가지고 다시 기도한다.(Say back to God)

앞의 과정을 통해서 듣게 된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을 잘 적용할 수 있도록 지혜와 인도 그리고 능력과 용기를 구하며, 오늘 하루를 전폭적으로 주께 맡겨드리는 기도이다. 물론 이 시간에 가족이나, 친구, 교회와 직장 동료 혹은 학우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도 유익하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는지를 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한 방법이다.


5.발견한 사실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Share with others what you have found)

말씀에 비친 자신의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가진다면 진솔한 QT나눔이 주는 공동체적 감동과 변화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c묵상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섯가지 조언

1.기도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과 자신의 틈을 예리하게 느낀다. 묵상은 영적 가난을 자각하는데서 출발한다. 출발점을 찾지 못하면 좋은 묵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2.철학자의 묵상은 오직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고 지성의 테두리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의 묵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발화되며 지성적 활동을 뛰어넘어 의지로 바뀐다.

3.묵상의 힘은 ‘이성작용’을 통해 생기지 않고 ‘신앙’을 통해 생긴다. 묵상할 때는 지성적으로 파악하기보다 확고한 신앙의 힘으로 거룩한 진리들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결국 지성의 작용이자 의지의 작용이면서도 거룩한 은총의 빛에 의해 초자연적인 수준까지 드높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4.말씀 묵상은 반드시 읽기와 암송을 곁들이는 것이 좋다. 말씀 묵상은 말씀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전부 혹은 비교적 많이 이해하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말씀은 입안에 있을 때는 어떤 느낌을 주는 말이로되 우리의 삶에 적용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뜻을 지니게 된다.

5.묵상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깨우는 것이요,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목소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도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기꺼이 우리의 지성, 감정, 의지를 빌려 드리는 것이다.

6.묵상은 하나님의 뜻과 활동에 자신을 위탁하도록 이끈다. 묵상은 자기를 포기하고 성령께 순종하도록 이끈다. 하나님의 뜻에 화합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묵상은 결국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추상적인 묵상으로 끝난다.

vQT와 관련한 궁금한 점 몇 가지...

    RQT할 때 묵상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현대인들은 묵상을 싫어합니다. 상상을 대신해주는 영상매체에 의존하는 것으로 자신이 해야 할 상상을 대치해 버립니다. TV나 영화가 그런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영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영상매체 시대에 진정한 영적 영상매체를 구축하는 방법이 바로 성경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 한 부분을 읽고나서 그 부분 중에서 두세 곳을 정하여 그 구절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가능하죠. 신학적 생각도 가능하겠고, 영적인 생각도 가능하겠구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쓰는 것입니다. 쓰지 않으면 생각의 50%는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쓰면 쓴 분량만큼의 생각이 더 나옵니다.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구요, 그 다음에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 쓰면 QT의 반은 놓치는 것입니다.


  R오늘 묵상한 말씀이 오늘 적용된다는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협지를 보면 제자가 스승한테 무공을 배우고 연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날 배웠다고 해서 반드시 그 무공을 그날 사용할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공이 쌓여 갑니다. 잘 단련해 놓으면 필요할 때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QT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바로 역사하실 가능성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날 배운 건 그날 사용해야 된다는 식으로 무리하게 적용하면 묵상이 힘들어지고, 너무 추상적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관적이고 동시에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어느 한 쪽만 강조할 때는 하나님의 섭리의 다양성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R적용을 한다고 하지만 말씀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고 준행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데요?

하나님 말씀을 우리의 영성으로 깨닫고, 우리의 삶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지 않을 때 양심은 무뎌지고 악해집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떠날 가능성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차원에서 쳐서 복종시키는 게 안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어릴 때부터 굉장한 상처를 받으면서 자란 사람이라든지, 매우 이기적인 가족 배경을 가진 사람은 잘 안됩니다. 또한 어떤 특수한 세상적인 것을 즐기거나 탐하는 가족배경에서 자란 사람들도 잘 안됩니다. 어릴 때부터 보고 경험하며 자라면서 아이속에 그 같은 경향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 개인 안에 후천적으로 형성되어온 세상적인 죄나 즐기는 습관이 말씀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에 대한 초월적인 태도를 가진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돈이나 명예에 대해 초월하는 태도를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돈과 명예를 초월하려는 경향보다는 돈과 명예에 대해 집착하고 애착하는 경향을 더 강하게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배경사와 같은 맥락에서 짚어보아야 할 또 하나의 배경은 민족성입니다. 우리 민족은 불교5백년, 유교5백년을 거치면서 불교적 영성과 유교적 영성이 머리속에 박혀 있습니다. 유교의 영향으로 우리에게 대표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위선’입니다. 남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죠.

사람들 앞에서 옷을 잘 입어야 하고 또 그것을 내보여야 하는 이 위선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나의 영성 앞에까지 위선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민족성 속의 고착된 습성도 말씀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데 장애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은 영성에 아주 확실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R이러한 죄된 경향을 어떻게 끊어버려야 할까요?

그래서 QT를 나누는 공동체가 필요한 겁니다.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중보기도해 주는 가운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능력 가운데 왜곡된 가족성과 민족성의 고리들을 풀어주시도록 의뢰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말씀보고 기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가운데서 큐티를 하게 되면 그런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죠. 혼자서는 이 같은 한계를 알면서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공동체 속에서 QT하면 극복됩니다. 공동체의 영성 속에서 개인의식 말고도 사회의식, 역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이런 과거의 흔적들이 하나님의 자비로 부서지고 회복됩니다.

 

 


제3단계 지속적인 경건의 시간

             ◈경건의 시간의 장애물

  효과적인 경건의 시간은 결국 한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와 비례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자라나는 일이듯이(골1:10) 경건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하는 것도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하면서 점점 나아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나아지기까지는 수많은 장애물을 때로는 극복하고 때로는 잘 피해나가야 한다. 무엇이 장애물로 등장하는가? 이 장애물들을 질문의 형식으로 표현해 보고 이에 따라 가능한 대응책을 마련해 보도록 하자.

  1.성경을 정하지 않고 이곳 저곳 대는대로 읽는다.

  비록 성경이 한 주제(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구원)에 집중하여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쓰여진 배경, 저자의 의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좀더 알고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미리 읽을 분량이나 책을 정해 놓고 그런 계획표에 따라 체계적으로 읽어 나가야 한다. 이 때, 이왕이면 시중에 나와 있는 QT교재나 성경읽기표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경건의 시간에 대한 말을 듣고 실행하기로 했지만 성경말씀이 너무 생소하고 어려워 포기했다.

  만일 당신이 처음으로 경건의 시간을 시도한다면, 직접 성경을 대하기보다는 보조자료를 사용할 것이다. 이러한 자료에는 이미 하루에 읽어야 할 분량이 정해져 있고 그에 따른 질문 및 해설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편리하다. 그러나 해설적인 보조 자료를 읽는 것이 당신 스스로 성경을 읽는 것과 대치되어서는 안 된다. 먼저 성경을 충분히 읽고 묵상한 후, 보조자료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3.본문의 의미가 난해하여 영적 교훈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가끔 지적인 의문은 경건의 시간의 부드러운 진행을 방해하며 계속 그런 구절이 던지는 문제에만 신경을 쓰게 만든다. 그러나 무디(D.L.Moody)의 “생선을 먹다가 가시가 나오면, 가시는 바르고 살만 먹으면 된다.”는 말처럼, 지적 난제를 일단 접어 두고 다른 부분들에서 충분히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 중에는 경건의 시간에 영어 성경 사전을 뒤적거리거나 원어 성경을 찾아보고 다른 번역판을 찾아보면서도 주님께 계속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그런 지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방해거리로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각각 자신의 정도에 따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간에 그런 자료들을 찾아봐도 시간적으로, 심리적으로 주님과의 교제가 방해되지 않는다면 그대로 좋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나중에 시간을 내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4.경건의 시간에 노트에 기록하기가 귀찮다.

  성경을 일고 깨달은 바를 노트에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경건의 시간 노트 정리를 해 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순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요약해서 노트에 적다보면 그 내용이 정리되고, 문득 깊은 뜻이 깨우쳐지기도 하며, 묵상자체에도 큰 도움을 준다. 또 그 날 말씀에서 깨달은 것을 기도할 때 구체적인 기도거리가 제공된다. 물론 기계적인 기록 행위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록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하려 들지 말며, 기록한다는 것 그 자체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5.매일의 적용점이 며칠 간 쌓이다 보니, 경건의 시간에 하나님 말씀 깨닫는 것이 오히려 짐이 된다.

  한 날의 적용은 한 가지로 한정하라. 그리고 그 다음 날에 주신 적용점이 있으면 그것에 집중하라. 감당하지 못할 적용점을 가지고 끙끙대는 것보다 하루에 하나씩 새롭게 생활해 나가는 것이 좋다.


   6.말씀을 읽을 때는 큰 깨달음과 감격이 있어 적용할 점을 적고 기도까지 하는데, 하루 생활을 하다가 보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그 날의 적용점을 의도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라. 가령 하루에 세 번(오전 11시, 오후2시,오후8시)을 정하여, 아침에 깨닫고 결심한 바를 그 순간 재음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꼭 시각은 정하지 않더라도 한두 번 이런 음미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점점 숙달되어, 가능하면 계속 말씀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7.처음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는 감격적이었는데 얼마 하다가 보니깐 강력한 깨달음이 없는 것 같다.

  경건의 시간이 늘 처음과 같은 감격을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때는 너무 감격해 그 말씀이 마음에 사무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흡사 사막을 걷는 것과 같이 무미건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건의 시간에 성경 읽기는 우리의 감격에 생명이 있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분별하고 그에 맞게 삶이 조정되느냐에 있는 것이다. 감격은 왔다가 사라지나 생활의 열매는 항상 필요하다. 따라서 성경 읽기는 인내심과 꾸준한 연구 자세가 동반되어야 하며, 이러한 꾸준성이 불발탄으로 끝나곤 하는 한두 번의 값싼 감격보다 낫다.


   8.경건의 시간 때 꼭 성경만 읽지 말고 책 같은 것을 읽으면 어떨지?

  가끔 경건한 글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이다. 대표적인 글로는 오스왈드 스미스, 허드슨 테일러의 묵상의 내용이 있다. 또 어떤 이는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마틴 로이드존스의 산상수룬 강해집을 조금씩 일고 기도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먼저 성경 본문을 읽고 자기 나름대로 묵상을 한 다음에 그러한 책을 읽는 것이 좋다.


   9.경건의 시간을 빼 먹으면 아침부터 우울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하루의 성패 여부를 경건의 시간의 유무와 관련시키는 것은 너무나 미신적이다. 경건의 시간을 하는 것은 공로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친구나 부부간의 교제가 상대방에 대한 공로가 아닌 것과 같다.

  “어떤 이유 때문에 당신의 조용한 시간을 빼 먹게 되었다고 해서 오늘은 실패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잘못이 당신에게 있거든 고백하고, 즉시 깨끗함을 얻은 뒤 그 날 하루에 있어야 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당신의 것으로 한 뒤 하루에 임하십시오. 만일 잘못이 당신에게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과 직접적으로 교통한 시간의 양에 따라 제한받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오”라고 충고하는 이도 있다. 만일 그 날 하루 중에나 자기 전에 잠깐이라도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그럴 때 갖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어쨓든 경건의 시간과 하나님의 축복 사이에 기계적인 연관을 짓는 것은 잘못이다.


   10.경건의 시간이 잘 되면 마음이 든든하다.

  이런 든든한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경건의 시간을 어떤 성취감과 관련시키기 시작하면 쓸데없는 죄의식과 그릇된 자기 만족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종종 두 가지 오류가 야기된다.

  첫째, 그는 자신이 경건의 시간을 잘했다는 것을 의뢰하고 하나님 자신을 의뢰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금식을 많이 한 사람이 자신의 금식한 것을 믿고 의뢰하는 것이나, 공부를 많이 했다 해서 자신의 지식을 의뢰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목표는 경건의 시간을 성공적으로 갖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다.

  둘째, 어떤 이가 경건이 시간을 충실히 가졌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그는 머지 않아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2).’하고 스스로 자기 의에 겨워했던 바리새인처럼 되고 말 것이다. 이런 그릇된 태도는 즉시 다른 그리스도인에 대한 판단의 자세로 나타나기 때문에 좋지 않다.


   11.어떤 날은 기분이 냉랭해 하나님과 교제할 의욕이 안 생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다. 냉랭한 기분이거나 그 전날의 어떤 일로 기분이 상해 있다고 해서 경건의 시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는 그에 대해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면 위선이 아니냐고 묻지만, 우리의 기분에 상관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노력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그 분의 임재 의식을 가질 수 없거나, 기도가 공허하고 무가치하게 여겨진다면 그렇다고 솔직히 고백하시오. 동시에 그 분의 약속(요14:16; 히13:5; 마28:20) 때문에 그 분이 바로 거기 계심을 믿는다고 말하시오. 또 당신 자신의 느낌에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안다고 말하시오.” 이상의 충고는 아주 적절하고 값진 것이다.

  때로 어떤 이들은 기분의 굴곡이 심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찬송가를 부르며 그 가사를 음미하거나, 지금까지 주님이 자신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가 얼마나 선했는지 돌이켜보며 감사와 찬양의 준비를 하기도 한다. 기분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그의 은혜와 임재하심)이 우리의 기분을 지배해야 한다.


   12.요즈음 생활이 워낙 바쁘다 보니까 도무지 틈이 안 생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생활이 바쁘고, 시험받는 것이 많고, 괴로운 일이 생길수록 주님과의 교제는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그 해결책이 주님께 있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실마리가 풀린다. 예수님도 전날 많이 피곤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미명에 일어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기 생활이 바빠지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식사를 포기해야 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역동적인 경건의 시간을 위하여

  •불규칙적인 경건의 시간

  •굳게 결심한 경건의 시간

  •연구 중심의 경건의 시간

  •사막과 같은 경건의 시간

  •헌신적인 경건의 시간


  우리가 경건의 시간의 각 시기를 어떻게 거쳐 가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따라 다르다. 각 시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이 없다.

  이러한 시기를 차례차례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 모든 시기를 거쳐 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삶에서 어떤 기간에는 성령의 역사가 ‘굳게 결심한 경건의 시간’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당신은 매일의 일상적인 일을 접어 두고 경건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훈련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떤 경우 성경 말씀에 대한 갈급함으로 인해, ‘연구 중심의 경건의 시간’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인생의 여정을 거치면서 주님에 대한 인식이 위험 수위에 이르러 마음이 메마른 것 같은 시기에 접어 들 수도 있다. 마치 사막에 있는 처럼 말이다. 다른 한편, 경건의 시간에서 기쁨이 솟아오르고 헌신의 마음이 달아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헌신적인 경건의 시간’에 다다른 후에 하나님과의 정서적 친밀감이 계속해서 점점 더 깊어졌던 경험이 나에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고 있을 때마다 마치 등에 고무줄이 매달려 있어서 뒤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을 때도 있다. 그 때, ‘불규칙적인 경건의 시간’을 갖게 된다.

  각 시기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 시계를 보면 시계추가 시계에 달려 있어서 바늘이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처럼, 경건이 시간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은 하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우리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록 힘을 준다.


  각 경건의 시간의 특성

 

불규칙한 QT

굳게 결심한 QT

연구중심의 QT

사막과같은 QT

헌신적인 QT

성경

대충 띄엄띄엄 읽기

규칙적인 일과

가장 큰 관심사

메마름

여유있는 묵상

기도

짧고 분주하며 기도제목 중심

중보기도, 감사

중보기도, 감사

공허, 의무감

귀기울이는 침묵, 중보기도, 예배

감정

상승과 하락

만족감

만족감

무덤덤, 좌절감

애타는 갈망, 만족감, 두려움과 기쁨, 따스함

빈도

어쩌다 한 번

규칙적

규칙적

간헐적

규칙적

위험

하나님 중심이 아님

율법주의, 자기만족

학문적, 기도 시간 부족

포기

거기에 머루고 싶어함

유익

안 하는 것보다 나음

발전적인 훈련

성경말씀안에서 성장

욕망에서 벗어남

하나님을 즐거워함


■한 주간 과제

일주일간 경건의 시간을 가진 후, 아래의 보고서에 기록한다.

 

본   문

중 심 된  교 훈

기  도  제  목

 

 

 

 

 

 

 

 

 

 

 

 

 

 

 

 

 

 

 

 

 



제4단계 골방 기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각도에서 기도 생활을 강조하고 여러 형태의 기도(철야 기도, 금식 기도, 공기도, 합심 기도, 통성 기도 등)를 이야기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기도 생활은 매일 말씀을 연구하며 ‘골방에서 아버지를 뵈옵는’(마6:6) 그 은밀한 사적 교제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기도 생활에 대한 우리의 강조가 매일 일정한 시간을 따로 떼어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 하고, 깊이 알고 사귀는 것에서 이탈한다면, 그 이외의 모든 기도 행위는 형식적 종교 놀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심히 왜곡시키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토록 중요한 사적 기도에 대해 식견도 갖고 또 실제로 매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매우 적은 수에 지나지 않는다.


             골방 기도를 못하는 이유

             1.기도의 본질에 대한 오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구해서 받는 것’이라는 요술적 매커니즘으로 간주한다. 그저 달라는 것-서낭당 앞 수북히 쌓인 돌무더기에 돌을 하나 던지면서 자기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간곡히 바라는 식의 마음-만으로는 참다운 기도가 될 수 없다. 모든 간구는 반드시 관계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상대방이 누구인지 아는 맥락 가운데서 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살 깊은 교제를 열망하지 않는 간구는 흔히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한 자아 중심적 기복(祈福)행위로 전락하기 쉽다.

  또 어떤 이는 당황하고 괴로울 때, 난관을 타개하고 극적인 응답의 관점에서 기도를 생각한다. 기도를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알기의 수단이다.

또 어떤 이는 ‘기도’하면 철야 기도나 금식 기도를 머리에 떠올리고, 평소에 쌓여 있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혹은 삶 가운데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절실히 요구되는) 특별한 비상책으로 생각한다. 이 점 역시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기도의 본질을 거론하는 것은 못 되며, 이런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매일 주님과의 관계를 키워간다는 근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인격적 관계는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서가 아니면 결코 자라나지 않는다.


               2.하나님 지식의 결여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면, 살아 계셔서 나의 말을 들으실 뿐 아니라 나와 사귈 수 있는 인격적인 분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한 사람의 은밀한 사적 기도는 하나의 부담이 된다. 예배 시에나 여러 사람들이 듣는 데에서는 유창하게 기도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혼자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서면 왠지 부자연스럽고, 쑥스럽고, 답답하고, 막막한 느낌밖에 찾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잘 모르면, 그것이 곧장 개인의 골방 기도에 반영된다.


               3.그릇된 기도의 본

  우리가 참된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모임 가운데에서 행해지는 기도의 양상이(사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모임을 통해 기도를 배우게 되는데) 옳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통성 기도에 자주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면 떠들썩한 분위기, 때로는 중언부언하는 것 같으면서도 열정적이고 달변으로 흘러나오는 음성들, 소위 마음이 뜨거워지는 순간적인 감동에 자극받아 크게 소리 내어 반응하는 일 등을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난 그리스도인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아버지께 기도’하기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이런 개인적인 기도 생활을 알지도 못하게 된다.

  또 예배 시에 길게 기도하는 것을 들으며 자라난 그리스도인은 그가 공기도를 맡았을 때 역시 꼭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된다. 신앙적 미사여구를 구사해가며 체면이 깍이지 않을 정도로 훌륭히 해 낸다. 그러나 이렇게 남을 의식하며 기도하기를 배운 사람이 골방에 들어가 오직 하나님 만을 의식하며 기도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기도를 통해 상대방에게 자신을 변명하거나, 상대방을 슬며시 추켜 세우는가 하면, 상대방의 잘못을 꼬집어 은근히 나무라기도 한다. 만일 이토록 철저하게 인간을 위한 인간을 향한 기도를 배운 사람이 있다면, 도대체 그가 어떻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목적하여 참된 기도를 할 수 있겠는가!


               4.체계적인 가르침의 부재

  마지막 이유로 개인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나 훈련 및 교육의 부재를 들 수 있겠다. 그렇게 기도가 강조된데 이상스럽게도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실제적인 가르침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 겸손히 머무를 수 있는지,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갖는 것이 무엇인지, 그에 따른 어려움과 해결책은 무엇인지 차근차근 배우고 가르치는 풍토가 오늘의 그리스도인 모임에 시급하다 하겠다.


             기도의 두 측면

             1.교제의 측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고 사귀며,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그 분의 뜻을 분별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바이다. 이것은 사실 기도의 한 측면이라기보다, 기도의 기초가 된다(렘14:7-9).


             2.간구의 측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급과 채워 주심을 기대하며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아뢰는 일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도하는 자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교제를 바탕에 두어야 한다(시37:4).

  물론 이 두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시27:4-5), 모든 기도의 바탕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교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즉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느냐?’ 이전에 ‘누구에게 기도하느냐?’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기도의 네가지 요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할 때, 우리의 골방 기도에는 적어도 네가지의 요소가 골고루 포함될 것이다. 그 네가지 요소는 사모(adoration), 고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및 간구(suppliacation)이다.

다음에 나타난 각 사람의 기도를 살펴보고 어떤 요소들이 주도적인지 정리 해 보라.

•다니엘의 기도

단9:4                                                               

단9:5-15                                                            

단9:16-19                                                           

•다윗의 기도

시103:1-2, 6-8                                                       

시103:3-5                                                            

•사도들의 기도

행4:24-26                                                            

행 4:27-30                                                           


             1.사모

다음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요소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찾아보라.

시18:1-2                                                             

시29:1-2                                                             

시33:1-3                                                             

시34:1-3                                                             

  사모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경외심 짙은 찬탄을 표현하고, 하나님이 모든 권세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라는 것을 시인하는 일이다. 사모에 관한 표현 세 가지 ①기분에 관계 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신체적 자세로써 사모한다. ②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어느 하나-그의 지혜, 능력, 거룩, 아름다움, 선하심 등-를 묵상하거나 깊이 상고한 뒤 그것을 말이나 찬양으로 드리는 것이다. ③타인의 힘을 빌어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시편의 기도나 찬송가 가사, 경건의 글 등을 읽음으로써이다.


             2.교제

시32:1,5                                                             

시51:1-3                                                             

렘14:20                                                              

  고백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낱낱이 아뢰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우리의 죄를 보는 일이다. 우리의 자기 중심성, 자기 의, 그릇된 동기와 내면적 허물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회개라고도 하고, 통회라고도 한다. 진정한 고백 행위에는 세가지 과정이 있다. ①하나님과 그 말씀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마음을 탐색하는 자기 성찰로써 시작한다. ②그 잘못한 바(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을 구체적이고 단호하게 말하는 자백의 과정이다. ③회개를 통해 그 잘못한 바를 용서받는 일이다. 이 때 용서받는 근거는 우리 자신의 기분이나 회개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와 신실함에 달려 있다(요일1:9)는 것을 알아야 한다.


             3.감사

시95:1-2                                                             

시100:4-5                                                            

시105:1-2                                                            

시106:1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나 남에게 베푸신 은택과 복을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사실 감사는 첫째 요소인 사모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단지 사모는 하나님 자신과 관련되고,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바와 관련된다. 우리에게 최소한 다섯 가지의 감사 내용이 있다. ①선하시고, 사랑이시고, 위대하시며, 진리이신 하나님 때문이다. ②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 때문이다. ③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치적, 경제적, 영적 속박에서 풀어 내어 구원을 주시기 때문이다. ④매일의 삶 가운데 의미를 부여하시고 크고 작은 일에서 우리르 도우시는 것 때문이다. 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들과 사귀고 만날 수 있게 된 것 때문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4.간구

시4:1                                                                

시7:1                                                                

시16:1                                                               

시31:1,2                                                              

  간구는 자신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시인한 채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서 긍휼 가운데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사 겸손히 아뢰는 일이다(히4:16 참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꺼림이 없는 한, 모든 것(빌4:6)을 기도로 구할 수 있다. 간구의 기도 가운데 특히 남과 남의 필요에대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 기도라고 한다.


간구의 기도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원리들

요15:7                                                              

요14:14                                                             

막11:24                                                             

눅11:5-10                                                           

막11:25                                                             


■한 주간 과제

일주일간 경건의 시간과 골방 기도를 가진 후 아래의 보고서에 기록한다.

 

경 건 의  시 간

시 간

골  방  기  도

 

 

 

 

 

 

 

 

 

 

 

 

 

 

 

 

 

 

 

 

 



제5단계 진정한 기도를 시작하라!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는가?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자기 아버지와 동등했을 텐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보내야 했는가? 그것이 실제로 그에게 필수적이었는가? 대답은 이중적이다.

  첫째로, 그는 단순히 하나님만은 아니었다. 그는 또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자기의 창조주에게 완전하게 그리고 계속적으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죄의 본질적인 속성은 의지하지 않으려 함이다. 내 자신의 일을 생각하면서, 내 자신의 방법으로 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죄이다. 결과적으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어 상처를 입게 된다. 만약에 내가 그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죄로부터 돌이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 필요가 있다. ‘기도가 얼마만큼 중요한가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기대하는가에 달려 있다’라고 토마스 스마일은 말했다. 사람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히 기뻐하며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더불어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또한 완전한 사람이었다. 만약에 그가 흠이 없고 그리고 죄가 없이 지낼 수 없었다면, 그는 결코 우리의 대속주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무흠한 어린 양으로서 그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방법으로 시험을 당하며 이 계속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단순하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했다(눅22:40).

예수님도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기도-은밀하며, 열심있으며, 믿음에 찬 기도-는 모든 개인의 신앙의 뿌리이다.’라고 윌리암 케리는 말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시작해야 하는가?

  자연적 인간의 속성은 기도로부터 본능적으로 멀어져 가려고 하는 것임을 하나님은 잘 아신다. 우리의 타락한 본능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자신을 숨기려고 한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11)’ 정확하게 바로 이점 때문에 우리는 절실하게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되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또는 우리가 어떠한 일에 실족했을 때, 성령은 기도하는 우리를 도우려 항상 우리 옆에 계신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기다리시는 마음을 심어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효과적이며 능력있는 기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유사한 것으로 ‘방언’이 있다. 물론 정확하게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심령과 하나님의 성령 사이에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초이성적인 현상이나 비이성적인 현상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의미있는 의사소통 또는 대화가 가능하기 위하여 반드시 문법적으로 정확한 문장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14:14)’ 그렇다면 그것은 의미없는 기도인가? 물론 아니다. 방언하는 사람은 자기 덕을 세우며,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중심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우리 중심의 외침을 아신다. 우리의 말이 어떻게 능변인가에 관계없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침묵-잠잠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침묵을 배워야 한다. 그 후에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 그리고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기도 안에서 그의 성령에 의하여 인도하는 것을, 그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지는 것을, 그의 뜻을 이해하는 것을 배워야 하낟. 왜냐하면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요일5:14). 특별히 우리는 성령께서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우리를 인도하며 그리고 위로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2.예배와 찬양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것은 자녀가 자기 아버지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찬양하기 위하여 가까이 가는 것이다. 성경본문, 특히 시편을 읽는 것은 우리가 예배 드리는데 힘을 제공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진정한 자녀로서 기도 안에서 우리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자연스러워질 수 있으며, 용감해질 수 있으며, 또한 기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롬8:15-17)’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써 우리는 그의 은혜의 보좌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3.감사-기도에 있어서 빠뜨리기 쉬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을 보지 못할 때, 또한 그의 놀라운 축복을 잊을 때, 기도를 하는 것은 지루하게 된다. 물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깨지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을 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와 친밀한 관계에서 그를 사랑하며 그를 찬양하는 영광의 기쁨을 누리게 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다...사랑은 표현될 때 성장하고 깊어진다. 우리가 사랑과 기쁨 안에서 자라지 못하는 것은 아마 우리가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찬양을 요구하며 또한 찬양은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역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 또는 하나님의 사랑과 동정, 또는 하나님의 슬픔을 알기 시작한다. 기도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생각대로 생각하는 것이며, 그로 하여금 우리의 몸을 그이 성령의 성전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찬양과 중보기도로 가득 찬 성전 말이다. 우리의 감정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돛을 올려, 예배와 감사와 기도의 항해를 시작할 때, 흐느적거리는 돛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성령의 바람을 우리가 자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에 관한 한 전문가나 숙련공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배우는 자녀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효과적인 기도의 중요한 특성들을 몇 가지 배우게 된다.


  1.겸손

  기도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우리의 겸손한 반응인 것이다. 그의 위대한 사랑 안에서, 그는 자기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다.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예(Yes)!’이다. 기도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며, 그의 절대 주권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며,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길은 완전하며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완강한 팔을 꺽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하시기를 설득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극도로 왜곡시키는 행위이다.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내기기를 원한다. 그는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의 무한한 사랑을 알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하여 반역함으로 그리고 그의 길이 아니라 우리의 길을 주장함으로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꺾으려 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은 무한하게 은혜로운, 온유하고, 부드러운 그리고 사랑-강하고, 순수하고, 거룩한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분명하게 사랑하신-의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또 우리가 그의 자녀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그의 완전한 뜻에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며 또한 가장 최선의 일인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나는 아무 것도 몰라’라고 말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만약에 내가 하나님의 모든 길과 일을 이해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나의 판단력의 한계보다 크신 분이 아니며 또한 내가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가끔 우리는 대화나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처럼 말할 때가 있다. 그로 하여금 자기의 존재를 우리에게 요청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긴다면, 우리는 그 때부터 우리의 삶 안에서 넘쳐흐르는 그의 사랑과 화평과 능력을 깊이 인식하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2.실재

  기도에 관한 영광스러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 그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자기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 여기에는 우리의 두려움과 실패, 우리의 기분과 감정, 우리의 사고와 근심-심지어 우리가 극도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까지 포함된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는 금욕주의적인 현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세 번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했다. 땀이 커다란 피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 비록 예수님은 완전하게 아버지의 뜻에 복종했지만, 십자가의 끔찍한 시련을 당해야 했다. 또 사도 바울의 투명한 솔직함을 보라. 그는 서신서 가운데서 특별히 자기의 연약함에 대하여 무려 22번씩이나 말했다. 그는 자기가 고린도에서 신경질적이었으며, 두려움 때문에 몸을 떨었다고 인정했다. 가끔 그는 심지어 삶 전체에 대하여 절망하기도 했다. 그이 모든 삶은, 그의 기도 생활을 포함하여, 이렇게 신선하게 실재적으로 영위되었던 것이다.

  당신의 최고의 비밀스러운 생각과 욕망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가 우리에게 찾는 모든 것은 솔직함과 정직이다. 우리가 그를 향하여 마음을 열 때, 그는 부드럽게 우리 삶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게 한다.


    3.동정

  우리는 가끔 기도의 실패 원인은 ‘믿음의 부족’이라고 생각할 수 잇다. 그것은 사실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우리가 기도에 실패하는 것은 동정 또는 공감력의 부족 때문이다. 동정심은 자연적으로 기도와 실제적인 도움으로 연결되어진다. ‘만약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동정심과 관심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기도하는 정도 이상으로 성장할 것이다. 실제로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능력의 한계 이상으로 그를 도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정의 의미는 ‘다른 사람과 함께 고통을 당함’이다. 그들의 고통과 문제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내가 그 사람을 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어떠한 모습일까? 하고 내가 상상할 수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참여는 보살핌으로, 이 보살핌은 사랑으로, 그리고 이 사랑은 중보 기도로 연결된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의 인격의 특성에 대하여 생각하며, 특히 그가 우리에게 준 약속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 주님게서 나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주심을 감사합니다. ... 주님의 은혜가 항상 나에게 넘치는 것을 감사합니다. ... 주님의 견고한 사랑이 끊이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 주님은 모든 일에 있어 절대 주권자이심을 감사합니다. ...’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긍정적인 기도이다. 공포, 불신앙, 근심, 분노, 열등감 등을 수반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상당히 방해한다.

  긍정적인 기도가 민감하게 사용되면 그것은 또한 복음 전도자 또는 치료자의 기도가 된다. 기도를 받는 자는 하나님께서 현재 믿음의 기도에 응답으로 무엇인가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도록 용기를 받게 된다.


   4.기대

  우리는 기도하면서 무엇을 구할 대, 응답을 기다리며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대하기 시작해야 한다. 가끔 영어 단어 ‘believe'는 함축된 의미가 약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이론적으로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believe'라는 단어는 두 색슨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있다(to be) 또는 ‘존재한다’(to exist)를 의미하는 ‘be'와 ’마치 있는 것처럼‘을 의미하는 ’liefan'이 합성 단어이다. 그래서 ‘믿는다’라는 동사의 의미는 ‘어떠한 일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이미 사실인 것처럼, 이미 성취된 것처럼 받아들인다’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5.인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기도만큼 우리가 부주의하고 나태하기 쉬운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기도를 무시하고 있다. 우리는 몇 마디의 익숙한 상투 어귀들을 입술로만 중얼거린다. 그러나 마음과 진심은 여러 가지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고 있다. 확실히 하나님은 우리의 삶 안에서 은혜에 의하여 즉 아무 값없이 일하신다. 감사한 것은 우리의 가치에 따라서 일하시지 아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우리의 우연한 기도까지 응답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그가 우리의 모든 존재가 그에게 집중되기까지 기다리신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끈질기게 졸라대는 과부와 밤에 찾아 온 친구의 이야기로 기도에 있어 인내의 원리를 강조하여 말씀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일에 그를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가 얼만큼 오직 그이 찬양과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를 그가 알아 보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는 것을 연기할 수 있는 것이다.


    6.연합

  신약성에는 개인적인 기도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연합으로 하는 기도가 강조되어 있다. 초대교회는 항상 함께 기도했다. 그들은 기도를 위하여 자신들을 헌신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믿음을 서로 자극하며, 서로가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을 확인하며, 영적 은사들을 서로 나누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지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믿고 함께 기대하는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 가능한 한 짧고 정성된 찬양과 기도가 장황한 오랜 기도보다 좋다. 장광설의 기도는 혹 성장의 기도인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그것은 공동체의 기도에 생명을 죽이는 것이 분명하다. 성령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민감하도록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라. 한 번에 한 가지의 주제에 대하여 기도할 때, 이러한 자세는 더욱 도움이 된다.


    7.용서

  이것도 효과적인 기도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그것을 회개하고, 그리고 그의 죄씻김을 구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성령이 확신케 할 때는 우리는 일어나는 일의 거의 95를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는 부분에 손을 댈 것이다. 그리하여 마귀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화평을 도둑질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한 주간 과제

일주일간 경건의 시간과 골방 기도를 가진 후 아래의 보고서에 기록한다.

 

경 건 의  시 간

시 간

골  방  기  도

 

 

 

 

 

 

 

 

 

 

 

 

 

 

 

 

 

 

 

 

 

 

 

 

제6단계 효과적인 중보기도

  중보기도란 하나님께 어떤 사람을 대신해 내가 대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며 우리를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잊지 않아야 한다.

  중보기도의 영어식 표현은 ‘intercession'이다. 이 단어의 뜻은 둘 사이에 내가 끼여들어 가는 것을 말한다. 즉 둘 사이에 서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중보기도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얻고자 권리를 가지고 간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권리를 가진 사람들의 간구하는 행위가 곧 「중보기도」인 것이다.


  중보기도자의 위치

             1.결렬된 곳(시106:23)

  중보기도자는 그 죄악을 자기 것인 양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심판하지 아니하시도록 그 결렬된 틈 사이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중보기도자는 하나님의 마음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중보기도자는 무너지고 결렬된 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중보기도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을 돌이키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긍휼로 바꾸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중보기도자에게 약하시다. 왜냐하면 중보기도자는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나 긍휼이 많으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심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용서하기를 기뻐하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이는 모두 중보기도자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신다.


             2.성벽 위(사62:6-9)

  중보기도자가 파수꾼 같이 성벽 위에 있다는 것은, 중보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은 성벽 위에 두시기 때문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중보기도자가 중보기도의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이요 영광이다.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미리 보게 하신다. 성벽 위에 있기 때문에 파수꾼이 미리 보고 또 멀리 보듯이, 중보기도자에게 먼저 보이신 후에 하나님은 행하기 시작하신다.


             3.영적 전쟁터(마12:29)

  중보기도자는 하나님과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결렬된 틈 안으로 들어가서 이들의 구원을 요청하고 긍휼을 구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는 것은, 이미 마귀로 하여금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 준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중보기도자는 마귀와 싸우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 한 가운데 있는 군인과 같다.

  중보기도자는 연약한 이들과 이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들을 장악하려고 하는 원수 마귀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다. 원수 마귀를 공격하는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이들을 장악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들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마귀는 이들의 죄에 대해 아무것도 물을 수 없다. 십자가 앞에서 다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듯이, 원수 마귀에게 나아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선언하면서, ‘사단아! 더 이상 그들의 삶을 장악하지 말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너는 더시앙 여기에서 권위를 행사하지 말라’고 선포해야 한다.


왜 중도 기도모임에 참석하지 않는가?

  중보 기도 모임의 목적은 성도들이 기도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 그리고 응답과 축복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이 중보 기도자가 되는데 그 초점이 있다. 기도회 참석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모임에 싫증을 느끼게 될 경우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는 사태에 이른다. 그러므로 중보 기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고 이에 따른 적절한 방법들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1)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기도 모임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기도할 때 우리는 부르짖을 때가 있고 잠잠할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자가 회개할 때나 간구할 때는 부르짖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응답받을 때는 고요하게 기도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훈련받지 못한 기도자의 경우, 때를 가리지 않고 마구 부르짖기만 함으로써 하나님과 상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구가 많다. 하나님은 듣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때로는 말씀하고 싶어하신다. 영적인 역동성이 느껴질 만큼 성령께서 임재하시면 조용한 기도라 할지라도 몸 전체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2)수사적인 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수사적인 기도란 자기 만족을 위한 수준으로 기도를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수사적인 기도의 특징은,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적인 면에서 기도를 건전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수사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건전’이라는 말을 정의해 버리는 경향이 잇다.

  우리는 응답받고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에 철학을 끌어들이고 아무리 미사여구를 사용해 수사적인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면 혼자만의 시 낭송이 되어 버린다. 이런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유려한 말, 정확한 발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역동적인 기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순수하고 하나님과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역동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진다.


             3)지루한 기도회는 기쁨과 즐거움이 없다.

  반명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기도회는 기도할수록 새 힘이 난다. 중보기도자는 기도 모임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찾으며 두르리되, 성령의 임재하심을 바라고 마음을 완전히 내려 놓아야 한다. 그때 주님은 기도에 응답하신다.


             4)개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보 기도자는 리더의 인도를 따르면 된다. 성령께서 리더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 질서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는 것이 모두의 할 일이다.


             5)단체 기도에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공동체 기도에 대한 훈련 부족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공동체 기도 모임에서는 마음을 합하여 기도함으로써 자신을 깨뜨릴 수 있다. 이로써 성도의 연합이 이루어지며 연약한 지체를 품을 수 잇는 마음과 심령이 된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가 만나지 못하고 가 보지도 못한 나라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다.


             6)기도해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회에 가서 기도해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 모임에서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형식적인 기도 모임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


             7)기도 모임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 모임이 잡담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 시간에 잡담하기 시작하면 영적인 면을 상실하게 된다. 기도 모임의 중요성과 목표를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에 일단 모임에 참석한 순간부터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게 하는 것이 좋다.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는 법

             1.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덮으라.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다. 예수의 보혈이 있는 곳에서 마귀는 역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을 구해야 하며, 모든 죄 값을 치르신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우리의 회개하는 심령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없인느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될 수 없다. 그 피를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으면 그 심령은 거룩해지고 그분을 환영하고 모셔 들일 때 성령님은 임재하신다. 보혈과 성령은 항상 동행하신다.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뿌려져야 한다. 그러나 입술로만 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는 모든 것들이 악한 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동반되어야 한다.


             2.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원수 마귀를 결박하라.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7-8)


            ▣원수 마귀를 대적하기 위한 중요한 원리

             1)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마귀 앞에서는 담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니라”(벧전5:6-9)


             2)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 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5-18)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3)성령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그분이 역사하시는 것을 말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인 동시에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 부으심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함께 하는 곳에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 기름 부으심이 임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임재가 있을 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잇는 곳에는 악한 영에 들린 자들이 두려워 떨기 시작한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이 찬양과 말씀과 기도 가운데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그 곳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만이 존재한다. 그 자유함으로 우리는 주님을 섬길 수도 있고 기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4)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시22:3)

  찬양에는 권세와 능력이 있다. 찬양은 사탄의 세력을 막아내는 위대한 능력이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은 그분과 함께 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는 찬양이다. 성령의 능력이 함께 흐르는 찬양이다. 이러한 찬양속에서 악한 영이 떠나가고 묶인 자가 놓임을 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 앞에서 준비 찬송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 찬송하는 중보자는 이미 그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찬양시간부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찬양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그때 중보 기도자의 마음에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5)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 17-2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무장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가 나가기를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임재하심으로 충만케 된 제자들이 기쁨의 찬양을 부르고 적을 향해 행진했을 때 마귀의 견고한 진이 산산이 부서지는 역사가 일어났음을 기억하라.


효과적인 중보기도를 위한 원칙들

  1.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히 그분을 예배하는 노래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 노래와 찬양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원수)를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대하20:22)

사람들의 행사에 대하여 기도로써 주 예수님과 협력할 때, 그분과 동일한 놀라운 사역에 참여하는 특권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2.아직 고백하지 않은 숨은 죄가 있는지 보여 주시도록 성령님께 시간을 드림으로써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정결한지를 점검하라.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그분 또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실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을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주님께 경배 드리고 기다리며, 그분의 얼굴을 구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작업을 행하실 것이다.


  3.성령님의 도우심과 조명하심이 없이는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롬8:26).

성령께서 말 그대로 당신을 주장시기를 구하고, 그분이 그렇게 하실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감사하라.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정결하고 굴복된, 그리고 영이 지배하는 삶을 통하여 기도하실 수 있을 때에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효과적인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 기도의 능력은 정결함에서 나온다. 성령님의 지시를 받고 기도할 때에도 실제로 기도를 능력있게 만드는 성령의 에너지를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하고 기도할 수도 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으리라”(시24:3-5).


  4.원수를 강력하게 대적한다.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이름으로 공격하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5.무엇을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부담감이나 욕망, 그리고 자신의 상상을 버린다.

이렇게 해야 할 필요성은 다음의 구절들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28:26)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사55:8)


  6.이제부터 갖게 될 놀라운 기도 시간에 대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는 놀라우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성품에 합당한 일만을 행하실 것이다.


  7.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를 갖고서 잠잠히 그 앞에 귀 기울이며 기다린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팍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시81:11-13)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시62:5)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미7:7)


  8.순종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주신 생각대로 행하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우리가 구할 때에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분명히 인도해 주실 것이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32:8)

하나님께서 현재의 초점에 대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모두 말씀하실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드린 후에 다음 주제로 넘어가야 한다. 특별히 그룹으로 기도할 때 주의하라. 그룹의 모든 사람이 기도의 방향에 대한 계시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각 사람이 그러한 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성령의 내적 증거로 서로 확인하면서 인도를 받은 지체들에게 협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정한 한 사람이 기도를 독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9.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기도의 방향을 인도하시거나 확신을 주시고자 할 때를 대비해, 가능한 한 성경을 펴놓고 기도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10.하나님께서 더 이상 기도할 제목을 주지 않으시며,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기도를 마친다.


제7단계 중보기도 실습

1.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지난 날과 오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가급적이면 밝고,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노래를 선택합니다. 적어도 2,3곡을 부르는데, 10분 정도 찬양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잡혀 있다면 진지한 곡을 불러도 좋습니다.


2.회개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지금 이 기도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지금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우리가 지은 죄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못한 것을 고백합시다.


3.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를 드립시다. 찬양이나, 감사 거리를 나눔, 기도 중 그날의 분위기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감사를 드립니다.


4.성경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말씀. 혹은 QT묵상한 것을 나눕니다. 이 시간은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에게, 또 공동체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모두가 다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누되, 인도자는 때로, 자신이나, 선배들 중에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서 미리 나눌 말씀을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5.성경의 교훈을 따라 기도합니다.

-말씀 나눔을 통해 깨달은 점,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와 위로 등의 내용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인도자가 오늘 우리가 함께 실천하거나, 회개, 감사할 제목을 제안한다면 더욱 좋습니다.


6.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먼저, 세계와 민족과 사회, 캠퍼스를 위해 기도합니다. 한번에 모두를 하기 보다는 일정한 순번을 정해서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이때 각종 보도 자료나, 선교 기도편지, 뉴스 소식, 신문의 기사 등을 인용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섬기는 사람들, 지체들 중 어렵고 힘든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 권면이 필요한 사람, 공동체의 행사, 비전 등을 위해 세세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7.이제는 자신을 위해 간구합니다.

-자신이 가진 기도 제목을 가지고 이제는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짝을 이루어서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기도 제목은 구체적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인도자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혹은 캠퍼스에 대한 비전을 주시도록,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길 수 있을지를 알려 주시도록 기도 제목을 제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8.오늘(한 주간)을 맡겨 드리는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한 주간)동안 함께 하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위해 하루를 성실히 보내도록 자신을 맡겨 드리는 감사가 있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한 주간)동안 매순간 함께 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기도 모임을 마치는 것은 어떨까요?


제8단계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영적전쟁(Spiritual Warfare)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두 세계관

고후4:18)                                                           

우리의 세계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세계에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병행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을 흔히 육의 세계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은 '영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쪽의 세계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독립적인 세계를 창조하셨다.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영적인 세계) 둘 다 중요하겠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순서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선이라는 이야기지 결코 보이는 세계는 절대로 중요하지 않고 오직 보이지 않는 세계만이 중요하다라는 말이 아님을 유의하라.


■영적전쟁(Spiritual Warfare)이란?

고후10:3-5)                                                          

보이는 세계에서의 싸움을 흔히 전쟁이라고 말한다. 영적전쟁이라고 말한다고 한다면 그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전쟁이라는 의미이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벌이는 전쟁을 '영적전쟁'이라고 말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전쟁, 이것을 '영적전쟁'이라고 한다.

  ▪'영적전쟁'은 어떤 싸움일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체대로 싸우지 아니한다라는 것이다. 육신의 방법으로 육신에 의해서 싸우지 아니한다라는 것이다. 영적전쟁은 보이는 방법으로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의 방법은 자신의 능력, 자신의 권세, 힘으로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세계에 의하여 되어진 일들을 고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상담이나 훈계, 또는 혹독한 절제나 훈련 등을 통하여 무엇인가 변화를 기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노력으로 될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할 것이 있다. 바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의하여 되어지는 일들은 이러한 육신의 것으로는 절대 변화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먼저 우리에게 선행되어져야 할 것은 이것이 육신에의한 단순한 일인지 아니면 영적인 요인에 의한 일인지 분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확한 공격이나 반응을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영적전쟁은 하나님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육체의 싸움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인 것이다.

    ▪영적전쟁의 대상은 누구일까?

'견고한 진'이라고 단어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문제가 일어난 현상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흔히 싸움의 대상을 잘못 판단하기 때문에 싸움의 전술이나 전략에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갈등이나 문제가 일어날 때, 우리가 먼저 해결하기를 원하는 부분은 바로 보이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해결은 진정한 해결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역은 '견고한 진'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견고한 진'은 무엇인가?

엡6:12)                                                            

혈과 육이 우리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대상이다. 이러한 것들이 보이는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보이는 세계를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나라, 지역, 개인이나 단체는 이러한 원리가 적용되며 이러한 것들에 의하여 움직여 가고 있다. 법과 법령을 바꾼다고 그 나라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전쟁의 기반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은 교회의 신분과 사명을 알때에 기반은 닦여지는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 신앙고백

(마16:13-19)                                                          

■그리스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은 신분을 말하며 보내심을 받은 자(그리스도)는 사명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 안에서 충분히 안정감을 가지고 계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 멸시와 천대와 조롱에 대해서도 흔들림이 없었던 것이다. 주님에게 있어 사역적인 성공, 인정, 명성, 지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 안에서 완전히 충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것들이 주님의 안정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신분과 사명

마16:16-18)                                                        

■교회의 신분

이 말씀속에 교회의 신분과 사명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반석위에 라고 말씀하셨다. 이 반석이라는 의미가 무얼까?

16절에 고백은 세상의 설교나 가르침이나 교훈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알게하신 고백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에게는 반석이 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그의 반석이 되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무리를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이 교회의 신분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신분은 주님을 향한 고백이 교회의 신분을 좌우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신분은 항상 관계성이 따른다.


■교회의 사명

교회는 교회의 신분만 가지고 있으면 부족하다.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 있다. 바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속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음부 : 사망을 말한다. 사단의 무리, 사단의 세력을 의미한다.

    ▪권세 : 'gate' 큰 대문을 말한다. 대문은 큰 성이나 왕국에 있는 그런 큰문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단의 왕국은 문의 의미가 있다. 문의 의미는 공격의 의미보다 수비의 의미이다. 따라서 사단의 왕국은 교회를 공격하는 자가 아니라 항상 수비하는 자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18절의 의미는 원수의 대문을 공격하여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사단의 왕국이 이기지 못하리라 라는 말은 교회는 사단의 왕국을 공격하는 사명이 있다라는 말이다.

사단의 왕국은 항상 문을 꼭꼭 닫고 있다. 교회로부터의 공격을 항상 막으려고 말이다. 종래 교회의 사고는 사단이 교회를 항상 공격하면 교회는 방어하는 모습으로 사고하고 있었지만 성경에서의 사고는 그렇지 않다. 교회는 오히려 사단의 왕국을 향하여 공격하는 자라는 사고이다.


▣우리는 어떻게 전쟁할 것인가?

마16:19)                                                            

‘천국열쇠'가 바로 그 권세이다. 매고 푸는 권세를 주셨다. 따라서 우리의 전쟁 방법은 매고 푸는 방법으로 전쟁하는 것이다. 무엇을 매어야 하나? 원수의 모든 권세를 묶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풀어야 하나? 원수에게 묶임 바 된 많은 사람들의 묶임을 푸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사단의 정체와 그가 하는 일의 특성

■사단의 정체

사14:12-17)                                                         

계명성이라는 말의 영문은 Morning Star이지만 칠십인 역에는 Lucifer라고 기록되있다. 원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존재이었는데 지금은 땅에 떨어져 찍혀 버린 존재라는 사실이다.

겔28:2)                                                              

여기서 두로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말씀을 자세히 보면 단순히 두로 왕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13~17절에서는 사단의 정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겔28:13-17)                                                         

찬양을 맡았던 루시퍼의 타락한 첫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겨루고자 한 교만이었다. 그에게 가장 심각한 죄는 바로 교만, 자기가 있어야 할 피조물의 자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그 교만이 그의 큰 죄이었다. 그리하여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땅으로 쫓겨난 자가 바로 사단이다.


■사단의 특징

    ▪교만 ;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교만하게 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것이 그의 본연 임무이기 때문이다.

    ▪속임, 거짓

요8:44)                                                              

    ▪살인하는 자

요8:44)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

요12:31, 14:30, 16:11)                                                 

    ▪유혹자

고후4:4)                                                             

    ▪참소자


■사탄이 사용하는 7가지 속임수

고도의 전략가인 사탄은 막무가내로 덤비지 않는다. 사탄은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최고의 지력을 다한 속임수와 최고의 교활한 속임수를 쓴다. 어부가 고기를 낚기 위해 숨겨진 낚시 바늘에 미끼를 걸어놓고, 포수가 부주의한 짐승을 잡으려고 덫을 숨겨 놓듯이 말이다. 사탄의 속임수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말고 나를 섬기라.

    ▪나와 나의 귀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나의 귀신들은 어디나 있다.

    ▪너의 장래를 점쳐 줄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보라

    ▪보라 내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하나님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전쟁할 때의 전략은 무엇인가?

마12:29)                                                             

우리의 전쟁 목표는 집에 있는 세간을 빼오는 것이다. 사단이 잡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환원하여 빼앗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전쟁목표이다. 사단의 멸망이 아닌 것이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으로 오실 때 그들을 모두 가두실 것이다. 우리는 사단의 세력에 빼앗긴 것들을 취하는 것이 목표이다.

가장 중요한 영적전쟁의 전략은 강한 자를 결박하는 전략이다. 강한 자를 어떻게 묶겠는가? 어떻게 매겠는가? 그것은 끊임없는 중보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묶고 매는 것이다. 중보기도자가 될 때 사단의 영향을 보게하신다. 중보기도자는 사단의 공격이 올 때 그들의 공격을 묶는 기도를 한다. 그 다음에는 예배를 통하여 온 땅이 하나님의 것임을, 온 땅가운데 찬양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노래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중보기도를 통하여 세계를, 역사를, 지도를 바꾸어 나가시는 분이시다. 그 나라와 개인과 도시와 가정과 그 어떤 영역이라도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들에 대해서 결박한다면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영역이 바뀌어 간다라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를 바꾸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중보기도자가 되어 In the Gap, In the Wall, In the Battle 자리에 서는 것이다. 먼저, 성벽위에 올라가서 갈라진 틈에 들어가서 그다음에는 전쟁터 한 가운데로 가는 것이다. 중보기도자의 자리에 있기 시작할 때 영적전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영적전쟁의 무기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

막16:17)                                                             

행3:6,16)                                                             

빌 2:9)                                                              

엡1:19-22)                                                           

    ▪하나님의 말씀.

엡6:17)                                                              

요일2:12-14)                                                         

이 말씀에는 세 세대가 있다. 자녀의 세대, 청년의 세대, 아비의 시대이다. 이것은 영적인 단계를 말하고 있다. 영적인 어린이(Spiritual Baby) 영적인 청년(Spiritual Youngman) 영적인 아비(Spiritual Father)의 단계를 말한다.

   -영적 어린이(Spiritual-baby)

14절에 아이를 말하기를 아버지를 알았음이라고 말한다. 영적 어린이는 지금 막 구원을 받아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 그런 단계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원자가 된 단계이다. 죄악에서 막 신생아로 태어난 아기와 같다. 영적 어린이는 나이와 무관한 관계를 가진다. 할아버지라도 예수를 늦게 영접하면 그는 그때부터 영적 어린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또 신앙의 연수와도 무관하다. 오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영적 어린이의 단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 현재 교회안에서 직분과도 무관하다. 혹 집사님이나 장로라고 해서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아니다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영적 어린아이의 단계에서 볼 때 그는 그저 받아먹는 단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입장이다.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다. 그저 응아하면서 주면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그런 단계이다. 영적 어린아이의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줄 모른다. 날카롭고 예리한 검인 하나님의 말씀은 오히려 어린아이에겐 쓸 줄을 모른다.

   -영적 청년(Spiritual youngman)

영적 청년은 어린아이의 티를 벗은 모습이다. 13, 14절에 말씀하시기를 '~ 악한자(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청년은 싸움하는 단계를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으로써 즉, 무기로써 사용할 줄 아는 단계라는 것이다. 청년에게 맡겨진 검은 자신을 해하는 위험한 도구가 아닌 사용할 줄 아는 무기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지적소에 적용하며 대응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악한자와 흉악한 자의 공격에 그는 승리하고 있는 자이다.

영적 성숙을 보이고 있다. 청년의 모습에서 14절에 첫째는 강하고, 둘째는 하나님이 말씀이 속에 거한다고 했다. 청년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속에 거하는 자가 청년이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 말씀에 지배되는 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항상 말씀이 말하는 것을 듣고 행하는 자가 청년이다. 이러한 자들은 항상 이기는 자이다. 패배가 없다.

마4:4,7,10)                                                           

-영적 아비(Spiritual father)

아비의 특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자이기 때문에 어떤 환경과 상황이 오더라도 그는 절대로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않는 자이다. 환경에 지배되는 자가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며 역사의 주인공으로 서 가는 자이다. 자신의 삶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다. 그의 성품과 삶속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이 배어있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며 사는 사람이다. 그에겐 환경이나 조건이나 상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전부인 사람이다.

고후1:9)                                                             

바울에겐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자신에게 다가온 엄청난 고난과 위협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합3:17-19)                                                           

환경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니다. 환경으로인해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다. 환경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말하는 자가 아니다. 영적 아비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으로 말하는 자이며 그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말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계12:11)                                                            

    ▪증거하는 말(선포하는 말)

(약4:7)                                                              

(요일5:14~15)                                                       

(눅4:31~36)                                                         

    ▪성령의 능력

마12:26)                                                             

마12:28)                                                             

■우리의 태도

    ▪마귀로 틈을 타게 하지 말라.

엡4:24~27)                                                          

고전1:8)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가장 큰 요인

      -교만                                     -불신앙

      -분열과 다툼                              -두려움

      -불만족 ;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       -재정사용의 오용

      -쓴 뿌리                                  -낙 심

      -정죄감, 죄책감, 죄의식                    -이성관계

      -게으름 ↔ 너무 바쁨 time management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1)당신의 적을 알라.

  2)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라.

  3)그리스도 안에서 강하라.

  4)성령으로 충만하라.

  5)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섬기는 일에 활동적으로 참여하라.

  6)당신의 잘못된 관계를 빨리 바로 잡아라

  7)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0-20)

  8)끊이지 말고 기도하라.

  9)즐거운 소리를 사용하라.

  10)영적 전쟁의 전략을 숙지하라.

 

 


제9단계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지혜의 발휘

  1968년 조셉 베일리는 복음주의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오늘날 기독 학생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관심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인도하심의 문제이다. 거룩은 다른 세대의 젊은이들의 열심있는 주제였을지 모른다. 또한 영혼을 얻는 것이 그들의 열정적 주제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을 복음화 시키려는 것이 그들의 주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주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다.”

  다시 러스 존스턴은 1971년에 복음주의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나는 여러 차례 사경회에서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사경회의 오후의 한 부분은 주제 연구를 위해서 할애되곤 했었다. ... 만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란 제목이 연구 주제 중 하나로 결정된다면, 다른 주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20항목이 된다 해도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거기에 참석할 것이다.”

  개리 프리슨은 1981년에 복음주의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인도하심의 주제에 대한 관심은  부단히 높아 간다. 그 주제에 관한 잡지 기사나 책들의 수요가 계속 증가한다. 사람들은 계속 인도하심에 대한 안내를 추구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염려의 근원을 따져 보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아 낼 것인지 불확실하고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면 어떤 귀추를 만날까 두려워하는데서 생겨남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인도하심에 대한 간절한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염려는 불행한쪽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지닌다. 염려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어느 형태로든지 염려거리를 가져다 주는 미끼에 의해 쉽게 유혹을 받는다. 그들은 이상한 영향력에 대하여 쉽게 상처를 받아 아주 어리석은 일들을 범하기 쉽다. 이는 그 전보다 인도하심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근육이 손상을 입으면 최초의 치료 단계는 손상된 근육을 풀어주는 것이다. 인도하심에 대한 염려도 같은 경우다. 가장 큰 염려를 하는 자들은 대개 극히 최소한의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


1.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려는 소원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표지이다.

  건전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한다. 중생을 통해서 그들은 순종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서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는 생각만해도 깊은 슬픔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양으로 살아가고 싶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이러한 소원은 더 강해진다. 자연히 그들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표지들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2.하나님의 뜻을 잘못 깨닫는데서 생겨나는 영적 파멸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한 신앙의 표지이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여행사에서 여행객을 위해 작성해 놓은 여행 일정표 같다는 것이다. 비행기나 기차나 버스나 배가 떠날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리 정해진 시간 계획 중 어느 하나만 실수해도 그 여행 일정은 파멸된다. 구쳐진 계획은 원래 세워진 계획과 비교할 때 고작해야 차선책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본래 궤도로 되돌릴 뜻이나 지혜가 없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다. 첫 번이 잘못되면 그 다음에는 표준 이하의 영적 생활만 주어질 따름이라는 식이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지는 않겠지만,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실수가 그로 하여금 이류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영위하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고를 내린다는 것이다.

  위에 묘사된 두려움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에 대한 불신앙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황충이 먹은 햇수대로 회복시킬 수 있으시며 또 그렇게 하신다(욜2:25). 성경은 수많은 성도들이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크고 심각한 실수를 범했음(야곱, 모세, 다윗, 베드로 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치료할 수 없는 이류 그리스도인들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다 각각 용서받았고, 회복되었다. 모든 참된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그러하다.

  3.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그릇된 개념은 해야 할 일에 대한 그릇된 결론에 이르게 한다.

  기본적인 오류는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큰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 원리는 너무 크게 기록되어 있어서 어떤 이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바른 원칙은 언제나 가장 고상한 목적, 즉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확장시키는 일을 위해 가장 지혜로운 방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단순히 좋은 것이 결코 가장 선한 것과 대립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물었듯이 어떠한 행동 경로를 택해야 죄의 때가 묻지 않느냐고 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것이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심정 속에서 우리의 이지를 사용하심으로써 능히 이를 분변하게 하실 수 있다. 또한 성경을 적용하고, 여러 가지 대안들을 비교하고, 사람의 충고를 달아보고, 우리 자신의 마음의 소원을 설명하고, 우리의 가능성들을 평가하게 하신다. 성경은 그것을 지혜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보배로운 은사들 중의 하나이다.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인격적 접촉이 있는가? 확실히 있다. 목회적인 일과 타문화권에서의 선교사역이나 어떤 다른 전문화된 사역 속에서 일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다른 어떤 일을 하는데서 직업적인 만족을 결코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사람이 어떤 일을 하도록 특별한 계획을 염두에 두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그 전문분야의 일에 흥미를 갖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으로 결혼하게 하실 뜻을 두고 계시면, 두 사람의 마음을 융합시키신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을 체험하려면 그것이 지혜의 판단과 서로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람을 인생의 파트너로 관심을 두거나, 자기의 능력을 초월하는 사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신적 소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시험거리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잘못된 양상들

  1.그리스도인의 마음에 파고들어 사로잡고 있는 반지성적이고 감정 우위의 단견적인 정신구조이다.

  2.놀랄만한 겸허함이다.신자들은 이상적인 행동 경로를 분변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행동 경로가 자기들에게 직접 계시되기를 기다린다.

  3.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혜로 무엇을 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는 거짓된 관념이다.

  4.그리스도인 각자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니 의미있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기대할 수 있다는 공상이다. -그 공상은 유치한 단계의 믿음이 그렇듯이 유치한 이기주의의 반영이다.

  5.성경에 직접계시와 관계된 인도하심의 이야기들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 이야기들은 훗날 인도하심에 대해서 해석할 때 글자 그대로 취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고, 인도하심은 통상 그런 식의 이야기들에서 취해질 수 있다는 식이다.

6.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비워 놓고 의식에 떠오르는 것을 신적 계시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인도하심을 구한다.

7.어떤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떤 조건을 내걸거나 그 상황들을 제시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바란다. 아니면 자기들의 내면적인 귀를 통해서 ‘예언’이나 꿈이나 환상이나 하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

8.어떤 성경 본문에 자기 나름의 의미를 넣어 억지로 읽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성경을 통해 왔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자기를 겸손히 찾는 자들에게 은혜로운 분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은 때때로 위에 언급한 모든 방식을 통해서 인도하셨다. 앞으로도 틀림없이 그렇게 인도하기도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들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그런 예외들을 가지고 법칙을 만드는 것은 곤란을 자초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성경적 접근 방식

1.질문을 던져보라. 나의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인가?

2.성경의 교훈을 주목하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요청과 율법이 정해 놓은 한계들과 의무들, 힘있는 행동에 대한 강조의 말씀(전8:10 ; 고전15:58), 지혜의 연습은 여러 가지 행동 방식들 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3.성경에 나오는 경건의 실제들을 따른다.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을 본 받으라.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더 나쁜 상황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4.지혜로써 최선의 행동 경로를 판단하라.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주신 지혜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 속에서 만나는 친구들이나 충고자들의 지혜를 활용하라. 영적으로 독불장군이 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생각이 들때엔, 자기의 그 생각을 점검해 보라.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이용하라.

5.자기의 길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자극을 주목하라. 특별한 염려와 마음의 불안은 변화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6.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의 마음을 지키는 ‘수비대’라고 바울이 표현했던 하나님의 평강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라.

7.환경 때문에 제한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라. 그러한 한계들이 바뀔 수 없는 것이 분명할 때 그 한계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라.

8.결정할 바른 시기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서 물러서 있을 각오를 하라. 하나님께서는 통상 한 번에 한 발짝씩 인도하신다.

9.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도록 지시하시고 그것을 좋아하게 하실 수 있음을 각오하라!

10.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게서 용서하시고 회복하신다. 하나님은 그대의 언약의 하나님이시오, 구제주시다. 그러므로 아무리 나쁘게 실족하여 넘어졌다 할지라도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의 대적이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7:8)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는 싶어하나 그 뜻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모든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주님은 나의 목자가 되신다. 그는 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이 얼마나 안심인가!


▣상상과 실제의 분별

  우리는 참된 인도하심의 모든 체험이란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는 공식적인 어투로 전달될 수 있다는, 낭만적인 공상을 환영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여 그러한 체험들은 개별적인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 한다고 여긴다. 그런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는 어떤 체험이 없으면 아직 인도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나 만일 기도 후에 마음속에 어떤 강압적인 눌림을 발견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심’이라고 들고 나서며, 그것에 대하여 거슬리게 말하는 사람들을 무시해 버린다. 이런 태도가 과연 옳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인도하심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서 어찌나 잘 자리를 잡고 있던지 최근의 어느 책은 그것을 ‘전통적인 관점’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성경은 인도하심을, 광범위한 정책적인 차원에서든지 특별한 경우를 내리는 차원에서든지 간에, 어떻게 살아갈까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백성 각자에게 약속된 언약적인 축복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내가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32: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시25:8,9).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가르침을 통해서 인도하신다.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또 다른 부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깨달을 지혜와 그 교훈을 상황에 따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킬 지혜를 주심으로써 인도하신다. 특별한 경우에 예외적으로 하실 수 있는 것을 먼저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겸손하고 유순하여 지혜를 받기에 충분하면 언제나 지혜는 주어질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은 우리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안내 지침이다. 성경 역사와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는 적극적인 방면에서든 소극적인 방면에서든 믿음과 충성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요구하시는지를 잘 예증하고 강조해 준다. 성경속의 멀마나 많은 교훈적인 대목이 그 점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지 모른다. 성경을 영감한 성령께서는 성경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에게 입증해 주신다. 또한 그 권위에 대해 의심할 수 없게 만들며, 우리가 일고 묵상하고 다른 사람이 성경을 강해하는 것을 듣거나 읽을 때에 그 성경 내용을 해석해 주신다. 해석이란 정확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곧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될지를 알게 해주신다는 뜻이다. 오직 인도하심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경으로부터 주어지는 현실인 것이다.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두가지

1)성경의 일반원리들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도하심의 원리들일 경우가 많다.

    군사작전을 수행할 때 장군은 야전 지휘관에게 목표를 설정해 주는 방식으로 그 날에 수행할 임무를 명령한다. 그런 다음에 그 목적을 이룰 수단과 방편의 문제는 그 지휘관에게 일임해 버린다. 하나님께서도 흔히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성경 원리들과 성경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을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보를 사용할 권한을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께ㅐ서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성숙시키는 과정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2)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권속으로 지켜야 하는 윤리인 성경의 도덕법은 피조물들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방안을 스스로 강구하도록 일임한다.

    우리가 어떠한 이익을 추구하며 우리가 어떠한 기호를 갖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경의 원리는 최선책 대신 차선책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즐겁헤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방식을 강구하지 못하게 하며, 지나틴 어떤 탐닉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늘에서 땅으로, 주신 자에게서 그 주신 은사 자체에게로 마음을 빼돌려 스스로 손해보지 않도록 한다. 이것이 자유권을 책임있게 사용하는 원리이다.


  반면에 우리들이 해야 할 최선의 일과 가장 거룩한 일을 분별하는 내면적 능력은 언제나 믿음과 회개와 헌신과, 성령에 의한 변화의 열매이다. 우리는 로마서 12장의 첫 부분 말씀에 익숙해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1-2) 그런데 우리는 그 뒷부분의 말씀을 덜 강조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어떤 주어진 각 상황에서 무엇을 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순결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내면적으로 새로워지는 일이 전혀 진척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변하는 것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죄에서 구원받으려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온유한 자를 공의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25:9)


             ▣참된 하나님의 인도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되 우리가 떠나지 말아야 하는 성경의 지도 노선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고, 우리가 노려야 하는 성경의 목표와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성경의 모델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는 방식을 채택하신다. 아울러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나쁜 본보기도 이해하도록 도우신다.

  기도를 통해서 인도하시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충고를 통해서도 인도하신다.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성경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까에 대한 지혜를 주시기도 한다. 영적 성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절한 바람을 주심으로써 인도하시기도 한다. 그 결과, 영적으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가 더욱 분명해지고, 장차 결정을 내리기 위한 지혜의 자원과 체험이 증가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즐거워하시도록 만드심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가장 선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그 뜻을 행하고 싶은 마음을 우리로 소유케 하신다.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다.(잠3:17)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뜻임을 알고도 행할 마음이 없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여 들이시는 그 모든 행동 경로를 우리가 기뻐하기를 원하신다. 처음에는 우리 마음이 썩 내키질 않고 사실 언뜻 보아 불유쾌한 것을 함축하고 있는 행동 노선들이라도 그것들을 기쁨으로 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제10단계 여유있는 삶 -그리스도인의 시간관리


그리스도인들이 시간과 돈의 ‘청지기 직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왔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도 돈의 경우와 똑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시간을 ‘쓴다(spend)'라고 말한다. 시간이란 물품 구입에 사용할 수 있는 국제적인 통화이다. 용역을 빌려 주는 것과 같이 시간을 사용하여 직접 돈을 벌어들일 수도 있다. 또한 시간은 지식을 습득하고 친구를 사귀고 쾌락을 즐기고 경험을 쌓는 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 모두 돈으로는 살 수 없지만 시간을 소비하여 살 수 있는 일들이다. 시간 사용의 기술에 따라 사람이 판가름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감사로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종인 만큼 시간도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 속한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그 분을 위해 사용하는 시간의 청지기들이다.


  ■시간의 구속(救贖)

시간의 청지기 개념은, 언뜻 보기에는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는 주제이다 신약에 이 얘기가 나오는 곳은 자매서신인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딱 두 군데뿐인 것 같다(엡5:16; 골4:5). 그러나 비록 단어 표현은 똑같다 해도 문맥과 생각의 흐름은 두 편지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시간을 구속하라’,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라’, ‘세월을 아끼라(한글개혁)’로 되어 있다. 그러나 주석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여기 사용된 단어는 일년, 일 주일, 하루, 한 시간 하는 식으로 시간의 지속을 뜻하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시간이나 기회를 뜻하는 ‘카이로스’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두 구절은 직접적으로 시간의 청지기 직분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은 아니다. 여기 이 단어는 금방 지나가 버릴 수 있는 어떤 중요한 시점 내지 특별한 기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 같다. 바로 그 기회를 붙잡아 더 늦기 전에 사들이라는 것이 명령의 내용이다. 여기 ‘구속하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는 단어는 원래 시장에서 뭔가를 산다는 의미로서 ‘기회를 사용하여 이익을 남긴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가장 본의에 가까울 것이다. 한 여자가 할인 상점에 들어가 파격적으로 싼 값에 나와 있는 물건을 얼른 집어서 산 다음, 의기 양양하게 들고서 또 다른 ‘괜찮은 물건’을 고르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이 구절에 담긴 의미를 아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 분의 나라를 앞당기는 일에서 마치 할인 기간을 놓치지 않듯 언제나 기회를 찾아내야 하고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15-20) 이 문맥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행실 및 걸음(즉 생활)과 상관이 있는 듯하며, 여유 시간이 있을 경우 그것을 방탕한 일에 사용하지 말고, 소위 말하는 ‘경건 연습’에 사용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노예 신분이었던 1세기에는 일하는 시간 외에 따로 여가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이 말씀이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시간을 술집에 가서 쓸데없이 허비할 것이 아니라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다른 스리스도인들을 찾아가 여간해서 흔지 않은 교제의 기회를 삼으라는 것이다. 아울러 바울은 우리의 모든 시간이 ‘범사에 ... 항상’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한 다음(20절), 계속해서 가정 생활과 여러 관계들 그리고 자신의 일과 상전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실제적인 교훈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엡5:21-6:9).

골로새서의 경우 바울은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자신의 복음 전파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 나서 이렇게 말을 잇는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4-6) 여기서 전도에 관한 이야기가 전체 문맥을 이루고 있다. 먼저 불신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얘기한 다음, 이어서 기회를 살려 복음을 증거해 영혼을 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렇듯이 이 문제 역시 성구 사전에서 ‘시간’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는 것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문제이다. 시간의 문제는 근면의 필요성 및 나태와 태만에 대한 금령의 관점에서 살펴보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달란트와 므나    

달랕트의 비유와 므나의 비유의 비유를 보면(마25:14-30; 눅19:12-26) 상당량의 자본과 ‘오랜’(마25:19)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그걸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이 등장한다. 그 사람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들은 것은 소유한 달란트의 양 때문이라기 보다는 달란트를 사용하여 이익을 남기라고 주신 시간 때문이다. 주어진 달란트와 므나가 무엇이든 -타고난 재능든 구원이든 그 어떤 것이든-설사 그 양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적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만일 그 주인이 바로 다음날 돌아왔다면, 아무도 이익을 남길 시간이 없었을 것이며 아무도 칭찬이나 책망을 들을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비유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 사용의 문제이다. 다른 점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시간에 대한 청지기의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만큼은 양쪽이 똑같다. 언젠가 우리도 자신의 청지기 직무에 대하여, 즉 시간과 기회를 어떻게 사용했으며, 주님의 근면한 종으로 살았는지 아니면 기분대로 일하며 규율 없이 살았는지 등을 그분께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이 두 비유의 취지라고 생각한다.


  ■돌아오는 주인

신약 성경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강조점은 주인이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제대로 살았는지 판가름이 나는 때는 예기치 못한 죽음의 순간일 수도 있지만 또한 주님의 재림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직장 생활의 모습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가? 여가 생활의 모습은 어떤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닐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4:45-51). 여기 나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청지기로서 분면히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인으로부터 재산을 위임받은 사람이다. 만일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주어진 권위와 기회를 악용하여 그들 몫으로 주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착복한다면, 그 주인이 예기치 않은 때에 돌아와 벌을 내릴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다가 그 분을 만나게 되도록 힘써야 한다. 여기 ‘발각된다’는 개념은 말썽꾸러기 어린아이가 선반에서 과자를 꺼내 먹다가 엄마가 집에 돌아오는 바람에 들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진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을 모두 다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여태껏 모르고 있던 주인에게 들켜 깜짝 놀라게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말씀 가운데 일하는 자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을 보아도, 하늘에는 우리가 결코 기만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아시는 상전이 계시다는 사실이 분명히 나와 있다. 사장이 볼 때는 열심히 일하다가 사장이 없을 때는 노닥거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눈가림이 통하지 않는다.


  ■게으른 자의 위험

잠언 앞 부분을 보면 게으른 자의 단점에 대한 준엄한 경구들이 여러군데 나오는데 그들이 대개는 남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게으른 자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미리 계획을 세울 줄 모른다.(잠20:4)

필요한 일이 무언지를 알면서도 늘 잠에 취해 있느라 도무지 진전이 없다.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안목과 상식이 부족하다. 한마디로 말래 준비되지 않은 종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가장 잘 사용하는 말은 “세월이 그렇게 빨리 지나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이다.


  2.일에 손을 댈 줄을 모른다.(잠13:4)

게으른 자도 자신의 필요를 알아차린다. 게으른 자도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하나님께 복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워낙 게으리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부지런한 사람은 성실하여 행동으로 옮기며 그리하여 풍족함을 얻는다.


  3.문제의 극복보다는 문제 자체에 더 신경을 쓴다.(잠15:19)

이런 한심한 사람은 문제 속에 너무나 푹 파둗힌 나머지 그냥 맥없이 주저 앉아 있을 줄밖에 모른다. 거리에 사자가 있을까봐 두려워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잠26:13)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그러고는 문제를 핑계 삼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도 문제에 부딪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문제의 극복에 있다. 실은 문제야말로 발전과 성숙의 기회이다. 문제를 해치우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며, 이 사람은 성실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게으른 자가 되고 만다.


  4.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며 파괴적인 영향을 준다.(잠18:9)

우리는 오늘날 대형 사고의 원인이 자동차나 비행기나 건물 따위의 날림 제작 혹은 부실 공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때로 교회의 직분이나 리더십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실이다. 책임 소홀이 교제의 붕괴를 가져오는 것이다. 교회는 비단 사단의 공격만이 아니라 어리석은 부주의와 게으름에 의해서도 붕괴될 수 있다.

어떻게든 일을 적게 하려 하면서 임기응변 식으로 옛날에 써먹던 프로그램을 가지고 그저 현상 유지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의 약점에 대한 면밀한 평가와 현재 상황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도록 마련된 프로그램이 있는가? 지도자들 중에는 분명한 방향을 설정하고 추진력의 개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일 등에는 관심이 없고, 윗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선임자들의 고된 노고의 열매로 내려온 명성만 누리려는 사람들도 있다. 리더쉽이 단순히 조직 업무로 전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그나마 조직 업무도 최소한도에 그치고 있다.

게으른 자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은 시간이 그 분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참으로 소중한 재산이라는 사실을 아예 생각조차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둠과 겨울이 오기 전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일어나 일하는 사람이 되자.


  ■삶의 대가

시간이란 가장 낮은 차원에서 봐도 생계 우지에 소용되는 그 어떤 것 못지않게 가치있는 것이다. 가장 높은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가 성령께 드리는 그 어떤 것 못지않게 가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돈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시간이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그분이 나에게 하루하루를 주신다.

시간이 이토록 귀중한 것이라면, 우리는 근무시간 동안 우리의 고용주 측에 시간의 가치를 그대로 제공하는 일에 철저히 신경을 써야만 한다. 자신의 시간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최대한 제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고용주의 돈을 훔칠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단 하루라도 반쯤 건성으로 일한다 해도 일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대가를 받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고용주의 돈을 훔치는 것과 똑같은 일이 된다.


  ■인스턴트 방법들

요즘은 빠르고 간편한 방법들이 유행하는 시대이다. 커피도 천천히 원두로 끓여 마시는 시대는 인스턴트 커피 믹스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할부 구입 방식은 돈을 내기도 전에 물건을 쓰면서 즐기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온갖 노력을 들여 ‘시간 절약’에 나서고 있다. 세탁기 광고들을 보면, 저마다 자기네 상품이 이전 세대 사람들이 하루 날을 잡아 세탁하며 참던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주부를 일에서 해방시켜 준다며 열을 올리고 있다. 훌륭한 시간의 청지기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급하게 ‘인스턴트’방식을 따라 살아도 되는 것일까? 물론 집안 일에 비능률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교육, 우정, 결혼, 자녀 양육, 그리스도인의 성화 같은 분야에서 성공하는데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관계

시간을 재면서 맺어 나갈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이다. 우정이란 이해와 사랑이 부족한 채로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 예수를 소개하는 일에 비효과적일 수 있다. 오히려 불신자들이 우리보다 나은 경우도 있다.

왠지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영혼으로서만 관심을 갖고 보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우정에는 대가가 따른다. 특히 때때로 관계가 일방적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상호 신뢰가 형성되기까지 그만큼 지불해야 할 대가가 커지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기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의 민감한 부분을 파악하는 능력이 전혀 없이 모든 관계에서 자신의 유익만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따뜻한 성품과 성실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흥미를 기울이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되, 그들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관계를 맺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영적인 교제

우리는 모두 늘어나는 책임의 끊임없는 압박 속에서 살고 있다. 학생이 스스로 얼마나 바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일단 졸업만 하고 나면 즉시 시간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서두르지 않으면서 경건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갖고 성경을 읽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심중의 기도로 응답하는 일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게다가 그 시기가 되면 연애와 결혼이 부정할 수 없는 중대사로 떠오르게 되며, 그로인해 시간은 점점 더 품귀 상품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다 주님께서 자녀의 축복을 주시게 되면 이른 아침 시간에도 갑작스레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설사 그런 일이 없다해도 으레 식전부터 시끄럽게 떠들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아이들이다. 경건의 시간을 지속하거나 아니면 조용한 것은 고사하고, 그저 시간을 낸다는 것 자체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어려워지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주일의 사용

조지 허버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인생에서 주일들을 모두 모아서 시간이라는 실에 한데 꿰어 보라. 영원히 영광스런 왕의 신부가 낄 아름다운 팔찌들로 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특징 중에 주일을 지키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주일은 매주의 첫날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날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한 자리에 모여 그분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날이다. 주님께 모든 날을 거룩하게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럼에도 하루를 특별한 날로 구별하여 그 분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럴만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날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우선 순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날이다. 이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첫 번 부활절을 기쁨으로 기념하여 모이는 매주 한 번씩 있는 축제의 날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경우 자신이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날에 대해, 매주 한 번씩 있는 기념의 날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안식일 율법에도 구속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므로 이 날은 우리가 그분께 가장 으뜸의 자리를 내어 드릴 수 있는 날이다. 우리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 주일을 잘 사용하고,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그날이 특별한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제11단계 여유있는 삶(2) 재정과 물질사용.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는 방법 가운데, 돈과 소유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또한 현세의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것만큼 확실한 시험 기준이 되는 것은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도처에 만연되어 있어서 누구나 빤히 알 수 밖에 없다. 세상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를 묻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물으신다. 세상의 관심은 받는데 있지만, 그리스도의 관심은 주는 데 있다. 세상의 관심은 양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관심은 동기에 있다. 사람들은 손에 쥔 것이 얼마인지를 묻지만, 성경은 남에게 나눠준 것이 얼마인지를 묻는다. 돈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얻는 수단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통로이다. 전자에게는 위안의 대상이지만, 후자에게는 헌신의 대상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돈과 소유에 대한 탣가 바뀌거나, 적어도 그에 대한 도전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16-21장은 ‘그리스도인의 물질 사용 헌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지침이나 생각을 유도하는 비유나 살아 잇는 실례 등이 풍부해서 돈 사용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들을 가득 전해 주고 있다.

■무엇을 위한 돈인가?

불의한 청기기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누가복음 16:1-9) 자기가 쫓겨날 것을 눈치챈 이 청지기는 아직 남아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나중에 생계를 이어갈 대책을 마련한다. 주님은 이 사람의 지혜와 앞날을 내다보는 자세를 칭찬하신다. 그는 현재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돈을 안정된 미래를 지키는 일에 사용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 세대의 아들로서 십계명 중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한 아주 부정직한 사람이다. 지금 여기 있는 돈은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우리를 영접할 친구들을 만드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불의의 재물’(곧 돈)을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약간 타산적인 표현을 쓰자면, 나중에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때 거기에 반드시 우리를 맞아줄 친구들이 있도록 해야만 한다. 소리가 울리고 우리가 하늘 문에 들어설 때 거기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무리-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로, 전에 나환자였던 사람들, 원주민들과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하늘 아래 모든 족속들-가 하늘 나라에 가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돈을 지혜롭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린 돈이 이 환영의 모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얼마나 비영적인 얘기인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9절 말씀의 의미이다. 여기 이 땅의 돈을 하늘의 은행에 송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사려 깊고 지혜롭게 그 돈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지만, 미리 돈부터 보내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물론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되고 여기 불의한 청지기가 한 것처럼 지혜롭고 현명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은 우리가 만일 돈 문제에서 신임을 못 얻는다면 누가 우리에게 하늘의 참된 부요를 맡길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누가는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지적하고 있다.(14절) 그리스도는 당신의 가르침을 비웃는 그들을 엄히 꾸짖으시면서, 사람 가운데서 높임을 받는 즉 재물과 부를 좇아가는 세상의 만연된 풍조는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이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 온 돈에 대한 태도나 우리 사회에서 성공의 척도로 공공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여러 가지 지취의 축적 등도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이 될 수 있다.

■가득 찬 주머니와 멀어 버린 눈

하늘의 처소로 영접받을 수 있도록 돈을 사용하라는 이 원리에 이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예화로 등장한다.(눅16:19-31) 이 예화가, 모든 악한 자본주의자들을 지옥에 가고 그 밑에서 짓밟혀 온 프롤레타리아는 천국에 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정치적인 의미의 비유가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쪽에는 믿음과 회개가 있었고, 한 쪽에는 없었다는 것이 공히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물질의 비교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 삶의 영원한 결과가 죽음의 순간에 가차없이 최종 판결이 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부자의 죄는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 동반된 사치와 연락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람은 가득찬 주머니를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했다. 그러나 향락에 눈이 멀어서 그 돈으로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이웃은 전혀 보지 못했다.

우리는 세상 저편에서 (그리고 국내의 일부 운이 나쁜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수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 수준을 계속 향상시키고 있는 경제 생활에 대해서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이런 태도는 세상의 모든 원주민들을 축복해 주십시오.-그리고 그들을 그냥 거기에 두십시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더 좋은 것이 뭔지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갖고 싶은 마음조차도 들 수 없다는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돈이란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누가복음 18:18-25을 보라. 부자 청년은 영적인 가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원한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켜왔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주님이 그를 사랑하사 당신을 쫓는 제자로 부르셨다고 말하고 있다. 단 조건이 있는데 우선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늘에서 보화가 있다고 하셨다. 여기 영적인 동기와 거룩한 삶을 갖추고, 그리스도로부터 친히 부르심까지 받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문제에서 그는 영적인 보화보다 물질적인 소유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만 근심하며 떠나고 만다. 이 사건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도 가진 것을 모두 남에게 주라고 명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동안 주님과 제자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겼던’(눅8:3) 요안나와 수산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의 후한 공궤를 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이 청년과 똑같은 도전에 부딪히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아마도 이 청년에게는 부가 반드시 버려야할 우상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만일 재물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따르지 못하게 만드는 우상이 된다면, 아무리 생활이 훌륭하다 해도 그것으로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부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이다.

신약성경은 하늘의 보화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여기 부자 청년도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누가복음12장에는 이 땅에 재산을 더 많이 쌓아 두기 위해 곳간을 새로 짓는 부자 농부가 등장한다. 성경은 이 ‘어리석은 부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눅12:21)자들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어느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과 함께 저녁을 드실 때에도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되 도로 청하여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면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정말 옛날부터 있었던 문제이다. 우리는 진정 초자연의 세계를 믿는 자들인가? 믿지 않는 자들인가? 우리는 과연 재산이 보존되고 보화가 저축되는 하늘 나라를 믿고 있는가, 믿지 않는가? 이 땅의 재물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은 이 부분에 대한 우리 믿음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 준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천국, 주 예수의 말씀을 믿는다면,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는 것이 안전하고 질 높은 투자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채무자가 아니시다. 언제나 분명한 것은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 비하면(그것은 재정적인 명으로만 따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 분께 드리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속에 이 사실이 아주 잘 요약되어 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이 말씀에 대해 어느 주석학자는 이런 글을 남겼다. “이런 보상은 그 분의 부요에서 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분의 부요에 걸맞게 즉 그 분이 보시기에 부요한 수준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십일조는 영적인 것인가?

하나님이 십일조를 요구하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말씀은 신약 성경에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풀어 나가는 데는 많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신명기 14:22-28의 흥미로운 말씀을 찾아보자.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의 십일조가 자기 자신과 레위 지파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모두를 위해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26절 말씀은 성전 안에서 심지어 독주까지 허용된 일종의 잔치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내는 십일조가 이런 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한 십일조의 일부가 정부 세금으로 들어갔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당시 신정 시대를 살았던 그들과는 달리 현대를 사는 우리는 세상 정부에 내는 세금을 그리스도인이 봉헌의 일부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십일조의 원리를 그대로 직접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접근으로 우리는 율법 아래 명한 것들은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삶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비율을 따져서 꼭 십분의 일만 주님께 드리는 것은 드림에 대한 신약의 접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신약에 드문드문 나오는 십일조에 관한 언급은 비판적인 색채가 강한 것 같다. 자기의(自己義)에 빠진 바리새인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나는 ...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2)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자시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하나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복음서에서의 또 다른 언급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나온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눅11:42).

종는 사유 재산이 전혀 없다. 종의 소유는 모두 주인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나의 모든 소유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십분의 일을 드렸으니 나머지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멋진 태도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바 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소유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그 분 앞에서 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똑같이 돈을 쓰며 즐거워할 수 있다. 돈을 써서 물건을 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이것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언제나 가장 싼 것을 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돈을 가장 절약하는 구입 방식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가장 비싼 물건을 사야 한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사치품은 대개 우리한테 필요없는 물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처구니 없는 방종이나 의복과 소유물에 대한 자만심을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나 혼자 흡족한 기분에 취해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가 좋은 기준이 될 것이다.

■청지기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훈련만 너무 내세우다 보면 인색하여 지갑을 열 때, 아까워하고 잔돈까지 일일이 세면서 두손을 펼줄 모르는 마음이 옹졸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하늘에 계신 주님의 놀라우신 부요와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고 후한 대접의 필요성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낭비와 허세에 빠져 남에게 베푼다는 미명하에 은근히 방종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수한 동기와 즐겁고 기쁜 마음을 주사, 우리로 남에게 줄 수 있고, 또 계속해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신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기” 때문이다.(행20:35)

청지기란 개념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그대로 보여 준다. 주님은 우리에게 집안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일정한 재산을 맡기셨다. 물론 집안 전체에는 우리 자신의 필요도 포함된다. 우리는 그 재산을 그 분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 이것은 그 분의 재산이며, 우리는 그 분배 방식에 대해 그 분 앞에 책임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에게 씀씀이가 헤프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인색하게 군다면 주인이 돌아오시는 날에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청치기 직무를 잘 수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금방 표시가 난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선한 청지기들이다. 이들은 맡겨진 재산을 사랑과 인정으로 즐겁고 기쁘게 사용한다. 이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상황을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집은 집 없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그들의 귀는 고민에 빠져 그 고민을 털어 놓을 사람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그들의 식탁은 언제나 추가로 두세 명의 사람을 더 앉힐 수 있고, 그들의 차는 언제나 가는 길에 몸이 불편하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일찍 교회로 출발하며 물론 돌아올 때도 사람들을 집에까지 다시 데려다 준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의 삶이다. 이런 사람들의 이웃들이 언제라도 그리스도인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과연 우연에 지나지 않을까?

■체계적인 드림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선은 기본적으로 일정 비율을 정해 놓고 드리다가 분명한 기회가 생길 때마다 따로 조금씩 더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비율을 정하라. 그리고 일정 액수를 정하라.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생각해서 드리라. 이것은 좋은 훈련이 될 수 있다. 자기 다니는 교회와 선교회, 그리고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개인에게도 어느 정도 드릴 수 있으며, 기타 사역을 위해서도 드릴 수 있다. 액수는 다달이 혹은 분기별로 혹은 해마다 달라질 수도 있다. 갑자기 긴박한 필요를 접하게 되면 추가로 ‘자원의 예물’을 더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물론 기기엔 그만한 대가가 요구될 것이다. 예컨태 오랫동안 원했던 물품의 구입을 연기해야 할 수도 있고, 고듭 살림을 일부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적게 드릴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많이 드릴까 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말에는 힘이 들어 있다. “최대한 벌라. 최대한 모으라. 최대한 주라.”우리에게 소유와 돈을 맡기시는 주인은 그것을 쌓아 두지 말고 사용하라 명하신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만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제12단계 행동하는 신앙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 행동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행동의 책

성경은 사람들 사이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무엇을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하나님은 행동을 하실 때 대개의 경우 사람들을 부르사 당신과 함께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행동하게 하신다. 당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힘없는 실패와 어찌할 수 없는 좌절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 그 백성을 절망의 상황에서 이끌어 내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며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사 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하게 하신다. 모세가 죽자 후계자로 훈련받은 또 다른 행동하는 사람 여호수아가 준비하고 있다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방 민족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대개는 홀로 하나이신 참되신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결과로 내려진 형벌이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을(드보라의 경우와 같이 여자들도 포함하여)세우신다. 처음에는 옷니엘, 에훗, 삼갈, 바락, 기도온, 입다, 삼손, 사무엘 같은 사사들을 다음에는 사울과 다윗 같은 왕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을 세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마지막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은 에스겔(22:30)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그 전에만 해도 백성들을 돌이켜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했던 요시야와 히스기야 같은 왕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구약은 자신의 전체를 아낌없이 드려 하나님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행동하는 사람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으 행하셨던”(행10:38) 예수님 자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행동하는 분이셨다. 그 분은 하나님이 동물의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하나님의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10:5-7)하신 것과 같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셨기에 기꺼이 고난 속으로 뛰어드셨다. 그 분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명하신 일을 다 이루기 위해 오셨다. 마침내는 그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을 뿐 아니라 또한 제자들에게도 행동의 필요성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바로 그 많은 비유의 핵심이 아닐까? 앞에서 이미 살펴본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를 보면 책망을 받은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인간의 필요와 고난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예비되어 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25:41-43). 내가 주렸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였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감옥에 같혔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였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벗었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였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지상 명령은 가서 행하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가서 무엇인가를 행하라. 제자를 삼고 그 제자4들 또한 가서 내가 너희에게 하라고 명했던 모든 일들을 행하도록 가르치라. 계속해서 제자들을 더 많이 삼아 그들 또한 가서 행하도록 가르치는 일이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행동개시’의 명령이었다. 따라서 신약의 4복음서 다음에 사도행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 예수를 위해 뭔가를 행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즉 늘 무엇을 행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우리 존재의 근거’ 운운하는 신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 의식의 깊은 내면에서 어쩌다 한 번씩 그것도 무력하게 움직이는 신이다. 인간사에 결정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려하고 굳이 개입할 일이 있더라도 대리자를 통해 언제 그랬는지 의아심이 들 정도로 간접적으로만 움직이는 신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창조하시며 행동하신다. 그분은 개입하시며 열방을 흔드신다. 그분이 산을 만지시면 온 산이 연기를 발한다. 그분은 산을 숫양처럼 뛰게 하시며 작은 산을 어린 양처럼 뛰게 하신다. 그분은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그분은 위대한 왕이시다. 이것은 반감을 느낄 수도 있는 극도의 신인동형적인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영광중에 살아 계신 분이요 승리 안에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분의 행동은 능하시고 상황에 적절하며 은혜로우시고 거스를 수 없으며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이루신다. 성경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다니엘과 에스겔과 요한과 마찬가지로) 땅에 엎드려서 언제나 “두려워 말라…”는 안위의 음성을 들을 수 밖에 없다. 두려움과 경외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때 저절로 생겨나는 반응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힘과 권능과 위력은 바울이 사용한 그 모든 최상급 단어들을 가지고도 제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이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우리도 몸을 움직여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즉각적인 도전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그 분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주님 저의 손을 취하사…저의 발을 취하사…저를 주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여 주옵소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행동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을 시작한다.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철의 독점을 통한 효율적인 무기 봉쇄와 막강한 병력이 있었다. 그들은 요소요소마다 군대를 배치하여 이스라엘 블레셋 요새의 감시를 받는 점령국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이 때 요나단은 병기 든 자 하나만 데리고 나가 분연히 어느 요새 하나를 공격한다. 결국 그것이 도와선이 되어 블레셋 군대는 전부 패주하게 된다. 요나단의 행동은 규모는 지극히 작은 것이었지만 대단히 용감한 행동이었다. 요나단은 대략 2Km 넓이의 땅 안에서 적군 스무 명을 죽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접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용맹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싸움이 시작되고 행동이 개시되어 결국 위대한 승리를 가져오게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세력을 갖추어 다시 돌아온다. 그들은 새로운 비밀 병기를 동원했는데, 그가 바로 몸집 좋고 입심 좋은 거인 골리앗이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사실 일 동안을 계곡 반대편에 앉아 멀뚱멀뚱이 거인을 쳐다보며 떨고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의 행동하는 사람, 다윗이 등장한다. 그는 무기라고는 하나도 들지 않고 실전 경험도 전혀 없었지만,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는 거인과 대결하여 그를 죽임으로 만인을 놀라게 한다. 그는 단 한 사람을 죽였지만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블레셋 군대 전체가 패하여 달아나게 된다.

요나단과 다윗은 둘 다 작은 전선 즉 현재의 자기 위치에서 행동을 시작했으나, 그것이 있었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있는 지역에서 전투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적군 전체를 상대로 하여 싸운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네 손 닿는 대로 주 위하여 일하라”는 한 찬송가 가사처럼 자신이 처한 그 곳에서 용기를 내어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의 행동의 결과로 전쟁이 전면적으로 확대되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똑 같이 무엇을 시작하고자 하는 열망이 필요하다. 공장에서 전도 그룹을 만드는 것도 좋고, 이웃집 주부들을 초대하여 커피를 대접하며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좋다. 사무실에서 토론을 벌이는 것도 좋고, 학생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거나 어린이 주일 학교를 시작하는 것도 좋다. 기독 단체의 지부를 설립하는 것도 좋고 전도용 도서실을 운영하는 것도 좋다. 영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회원이 여전히 대부눈 어린아이 사역을 할 때, 일본에서 성인들을 위한 성서 유니온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열여섯 살 난 미국인 소녀였다. 또 어느 일본인 교장 선생을 통하여 세 곳에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는 작은 그룹을 모은 다음 몇 가정이 회심하여 목사를 초빙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우리 또한 손과 발을 주님께 드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그 분을 위해 뭔가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행동을 회피하려는 우리

물론 성급하고 경솔한 행동을 조심스레 삼가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영적인 태도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곧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떠넘겨 버린다. 원수를 갚은 일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원수에게 사랑을 보이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께 떠넘겨 버린다. 하나님은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이미 분명한 규정을 주셨다. 우리는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고, 우리를 악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 새로운 지침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가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기 위해 특별한 환상을 받을 필요가 없다. ‘세상 끝날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선을 베풀기 위하여 따로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 실상은 일종의 불순종에 지나지 않는 가짜 ‘정적주의’가 있을 수 있다.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성경에 이미 명백히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어’하는 태도는 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행동을 피하려 한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증거로 굉장한 표적을 구하기도 한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삿6:14). 이런 명령을 받았을 때 기드온은 자기 집이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자기가 작은 자임을 구실로 내세운다. 그는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고 구한 대로 받고 나서,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는다. 기드온은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의 첫발을 내딛어 자기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부순다. 그 뒤로 기드온은 두 번이나 더 표징을 구한다. 우리 역시 행동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건만 모두가 하나같이 “보낼만한 자라를 보내소서”하며, 이것을 다은 사람에게 떠 넘기려고만 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를 행동으로 부르고 있다. 손과 발을 그 분께 드려 그 분은 섬기라 하고 있다.


주님의 손발과 마음, 갈보리에서 저를 위해 못박히셨으니

저도 지금 여기서 저의 손발과 마음을 제물로 드립니다.



1.나는 수동적인 구경꾼 유형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만조하고 있는가?

2.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주도적으로 나서서 시작한 일은 무엇인가?

3.지금 내가 주님을 위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외에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4.내 주위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5.한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더 이상의 시도를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

 

http://cafe.daum.net/dm3179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