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일반성도 뿐만 아니라 목회자
특히 관상을 하시는 분들이 읽어서 지난 날의 우리를 되돌아 보고 믿어지지 않는 부분을 정화하며,
하나님의 현존의 의미를 다시 정립하는 계기 도한 되었으면 합니다.
신학과 체험이라는 주제이긴 하지만 체험에 대하여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체험에 대하여 깊이있는 말씀을 읽고 터득하시길 바랍니다.
다시한번 "십자가의 고난의 주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부활로 그 증명을 보이셨다"는 영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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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십자가 신학

Roots That Refresh, Alister McGrath,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박규태 (서울: 좋은 씨앗, 2005), pp.107-144.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마르틴 루터가 했던 이 말을 처음 접했을 그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옥스퍼드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자마자 나(저자)는 곧바로 1978년에 캠브리지에 도착하여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 문헌들을 철저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더 젊은 시절,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에 익숙하였던 나는, 근대 종교사상의 토대가 되었던 두 원천, 곧 루터(Martin Luther)와 칼빈(Jean Calvin)을 더 깊이 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루터의 말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은 1979년 봄이었다. 책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 나는 쓰던 것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힘, 가능성 그리고 도전으로 가득 차 있던 루터의 선언은 전류가 흐르는 말처럼 보였다.

그 말은 또 한편 터무니없는 말처럼 보였다. 어떻게 단지 과거에 불과한 한 사건이 현재와 그런 연관성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또 하필 왜 이 사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어야만 하는가? 무슨 논리로 그 십자가에 이처럼 집중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이해시킬 수 있을까? 루터의 신학과 영성 안에서 그 초점이 어떻게 떠오르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통찰들이 압도하던 시대에 과연 십자가가 기독교 신학의 핵심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당시 내가 비록 영국 자유주의 신학 전통의 틀 속에 있긴 했지만, 나는 결국 루터의 접근법을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것으로, 오로지 교리사가(敎理史家)들과 종교개혁 초기의 신학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나 관심을 보일만한 것으로 여겨, 깨끗이 잊어버렸다. 루터가 선언한 그 말은 현대의 기독교 사상에서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필기를 계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 말은, 당시 나의 정체성을 구성했던 관대한 자유주의 신학에만 존재한다고 스스로 막연히 직감하면서도, 정작 딱 부러지게 집어낼 수 없었던 잘못된 무언가를 확실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내 생각이 발전해온 궤적(軌跡)을 뒤돌아보면 루터가 던진 짧은 한 마디는 바로 나의 자유주의가 무너져 내렸던 반석임이 증명되었다. '십자가 신학, 바로 그것을 통하여 루터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앙 무대를 차지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 신학은 현대에도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것임이 증명되었다.

이 주목할 만한 신학을 역사적인 정황과 함께 이야기해 보자. 1517년과 1519년은 종교개혁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로 간주된다. 1517년, 루터는 면죄부의 잘못을 지적한 95개조의 반박문으로 신학의 세계에 맹렬한 폭풍을 일으켰다. 1519년에 이르자 그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벌어진 토론에서 자신의 강력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약 유명한 인물이 되고 만다. 요한 엑크(Johann Eck)에 맞서 맹렬한 싸움을 벌이면서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고수하던 많은 전통 사상들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특별히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그가 불을 붙였던 그 토론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매개 역할을 했음이 증명되었다.

이와 반대로 1518년은 조용한 시기였다. 그러기에 자칫하면 그 해를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그 해 4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전통이던 공개 토론이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서 열리게 되면서, 루터는 그 토론회의 사회자로 초청받게 되었다. 거기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였고 그도 수도회의 수사들 중 하나였다. 바로 이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루터는 '십자가 신학' 을 내놓게 된다. 루터가 말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피조물 속에서 보이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그 누구든지 신학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고난과 십자가에서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뒷모습을 본 사람은 그 누구든지 신학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17루터에게,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이 담금질되는 도가니이다.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만물의 시금석이다'와 같은 말에서처럼,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말로 잇달아 십자가가 곧 핵심임을 설파하였다. 그는 이제는 유명해진 한가지의 구분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영광의 신학자'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아는 '십자가의 신학자' 사이의 구분이다.

 

십자가와 이성 비판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은 십자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성이 하는 역할에 대하여 한 가지를 비판한다. 기독교 영성과 신학은 이성이라는 자원에 의존할 수 없다. 루터가 천명한 '복음주의에 기초한 비합리주의'는 십자가야말로 인간 이성에 놓여진 한계를 폭로하는 것이라는 그의 옹골찬 주장으로부터 비롯된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십자가 속에 숨어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관념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어려운 개념이다. 그렇지만 일단 이를 이해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경험 속에 마치 수수께끼처럼 자리하고 있는 많은 측면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 개념에 접근하는 한 가지 길은 루터가 사용한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뒷모습' 이라는 관념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 33장 23절에서 따왔다. 당신은 그 구절의 정황을 기억할 것이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등 뒤로 보이는 그분의 모습을 힐끗, 그것도 직접 보지 못한 채, 바라보게 된다. 모세가 보았던 이는 실제로 하나님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루터는 주장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을 모세에게 드러내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진정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한 것으로 인식될 수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일단 우리가 십자가를 되새겨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의 경이로움을 깨닫기 시작한다. 바울의 말처럼, 바로 여기에서, 현명한 자의 지혜를 웃음거리로 만드시고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인간의 생각을 허망한 것으로 만드시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지극히 어리석고 연약한 광경 속에서 드러내심으로써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사실은 지극히 빈약한 것임을 보여주셨다. 이성은 말한다. 하나님이 이런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은 그 자신이 신학의 자원으로 얼마나 적절치 못한지를 보여준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상식에 자연스럽게 의존하려고 하는 우리의 경향에 하나님은 온유한 모습으로 의문을 제기하신다.

다시 말하거니와, 상식적으로 우리는 위대한 영광과 권능으로 충만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께서는 수치스럽고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십자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하셨음을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의 이성은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힘든 교훈 - 우리는 겸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나아가 우리가 바라는 모습대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 을 배우도록 요구받고 있다. 루터는 이 점을 상당히 날카롭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고난보다는 업적들을, 십자가보다는 영광을, 약함보다는 강함을, 어리석음보다는 지혜를 더 좋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바울이 '십자가를 대적하는 자들 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인 즉, 곧 그들은 십자가를 증오하고 업적들을 내세우기 좋아하며 그 업적에 따른 영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 신학'의 중심 주제는, 세상이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나아가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것들을 동일하게 낮게 평가하는 인간 내면의 경향이야말로 하나님의 뜻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이런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성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 하나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중세라는 시대에 대학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루터 역시, 비단 학문 영역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 이성의 중요성과가치를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장하기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도 이성에 의존한다면 잘못된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갈보리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순전히 이성에 의존하여 신학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이성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반드시 이 세계가 위대하고 장엄하며 영광스럽고 권능이 충만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들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그와 정반대로 비극, 슬픔, 절망 그리고 연약함 그 자체인 상황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길을 택하셨다. 그리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온유한 모습으로 이성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신다고 루터는 논증한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담아 이런저런 생각을 꾸며낼 것이 아니라, 실제 그분의 모습 그대로 계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해 우선적으로 힘써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십자가가 가지는 역할을 이해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낮추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은, 모름지기 신(神)이란 이래야만 한다는 우리의 말쑥한 선입견 아래에 놓여 있던 양탄자를 잡아당기시면서 우리로부터 주도권을 취해 가셨다. 어떤 부분에서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기 원하는 그 모습대로 기꺼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기꺼이 그 하나님께 응답하려는 마음이다. 이는 자신의 어떠한 신령한 모습들이 효과가 있음을 강조하기보다(이것들이 그 어디에서 나왔든지), 도리어 하나님께 기꺼이 복종하려는 마음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겸손의 한 양식(form)이다. 참 영성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응답인 것이다.

 

경험을 비판하는 십자가

 

십자가가 이성에 대한 하나의 비판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그 십자가는, 특별히 근대 서구 사상 속에서, 영성과 관련하여 종종 너무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던 또 하나의 인간 중심의 자원을 강력하게 공격한다. 개인의 경험이 계시와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다.' 루터는 신앙 문제들에 대한 지침으로 개인의 경험은 심각할 정도로 자주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하는 방식은 실제로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한 예를 들겠다. (이는 루터가 사용하지 않았던 예이다. ) 엄청나게 추운 어느 날 밤, 당신이 얼마 동안 집 밖에 있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선 한 친구의 집에 도착한다면, 친구는 이내 당신이 얼마나 추위에 떨고 있는지 알아채게 된다. 그는 당신에게, '뭔가 좀 몸을 녹일 수 있는 걸 마셔야 되겠구만' 이라 말하며 브랜디를 한 잔 건넨다. 그걸 마시고 몇 분이 흐른 뒤 당신은 몸이 좀 훈훈해지는 기분이다. 당신은 브랜디가 몸을 덥혀준다고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브랜디는 당신이 더 한기를 느끼도록 만든다. 알콜은 혈관을 확장시켜 몸이 열(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몸은 오히려 열을 잃고 있다. 당신은 몸이 덥혀지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당신은 점점 식어가는 것이다. 열은 당신의 몸에서 발산되고 있을 뿐이지, 그 몸 속에 흡수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느끼는 기분 때문에 당신은 심각한 오해에 빠져든 것이다. 지독하게 추운 어느 상황 속에서 만일 당신이 '몸 좀 녹이자'는 심산으로 알콜 음료를 마신다면, 정작 그로 말미암아 열손실이 일어나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외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다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겠지만, 정작 당신이 자신의 느낌만을 신뢰한다면 이런 외부의 시각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예(例)는 실제 영성과 관계가 있다. 즉 경험이야말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경험은 비판적 시각으로 검증될 필요가 있다. 당신은 자신의 몸이 덥혀지고 있다고 느꼈지만, 그 경험을 올바로 해석하였다면, 도리어 열이 몸을 떠나 밖으로 발산되면서 손실되고 있음을 실제로 느꼈으리라. 당신은 그런 느낌들이 평가되고 판단되는 기준점으로 바깥에서 주어지는 관점이 필요하다. 루터도 이와 관련된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 것도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경험한 사물이 반드시 그 사물의 실제 모습은 아닌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느낀 것들이 평가되고 판단될 수 있는 어떤 기준을 외부에서 제공해 주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루터의 접근법에서 영성의 중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바로 그 첫 금요일에 펼쳐진 광경, 곧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한 채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던 그 모습을 곰곰이 되씹어 보는 것이다. 십자가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뭔가 드라마와 같은 반전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그 참경(慘景)에 뛰어드셔서 당신의 아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사람들이 기대할 만 하였다. 그러나 그 길고 긴 하루가 다 저물도록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징조도 없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이 십자가 위에서 울려 퍼졌고, 심지어 예수님 자신조차도, 비록 잠깐이었지만, 하나님이 버리셨음을 처절하게 경험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시며 이 상황에 끼어들어 예수를 구하실 것을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처절한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셨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살아 움직이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생각하는 이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하였다. 곧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런 판단을 뒤엎어 버렸다. 하나님은, 바로 그 갈보리에서도 살아계시고 일하시는 분으로, 곧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주이심을 확증하시는 분으로 계시되었다. 그분이 바로 거기에 계심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였을 뿐, 사실 그분은 분명 거기에 계셨던 것이다. 인간의 경험은 바로 그 광경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하였지만, 도리어 부활은 하나님이 다만 당신을 감추셨을 뿐이지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셨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이 그 참혹한 광경 뒤에서 몰래 일하고 계셨음을 드러냈다. 루터가 보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경험이 내린 판단이 실제로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경험이 남긴 그릇된 인상들을 신뢰하기보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고, 심지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따라서 바로 이 자리에 계시는 그분을 경험이 발견할 수 없다면, 그 경험이 내린 판단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루터는 우리 인간의 경험을 그 첫 번째 금요일의 경험과 비슷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당황하고 놀라면서, 나아가 결국 그 안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거나 조용히 침묵만 지키신다고 자주 판단한다. 고난이 아주 좋은 본보기다 종종 우리는, 인간이 그토록 고통당하는데도 어떻게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계실 수 있다는 것인지 의아해 한다. 그와 너무나 똑같은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꿰뚫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부활절은 그 상황을 바꾸었고, 나아가 스스로 만든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살아 움직이시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던 것마저 뒤집었다.

그 첫 번째 금요일의 경험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빛에 비추어 볼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그 이상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방식을 분별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금요일이 제기하는 근본 의문은 이미 그 이전에 구약의 욥기에서 제기된 바 있다. 곧, 인간의 경험과 모순되는 상황 속에서도 진정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치 한 회오리 바람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처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살아 계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이 서 계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십자가 아래 자리잡은 삶, 곧 부활의 여명이 자아오는 것을 고대하면서 그 십자가 그림자 속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삶이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이제 확실하게 막을 내렸다고 무신론이 외쳐대던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습은 버림받고 상처투성이인 데다가 피 흘리며 죽어가는 하나님의 모습이지만, 바로 그 하나님이 몸소 십자가의 그림자를 걸어 지나가심으로써 인간의 고난에 새로운 의미와 영예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강할 때보다 연약할 때, 오만할 때보다 굴욕을 당하며 괴로워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다. 그 어떤 순간보다 암담하면서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삶의 영역들에서조차 하나님은 결코 배제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 스스로 진지하게 그 영역들에 몸을 담그셨던 것이다. 신앙과 삶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루터가 했던 다음의 유명한 말 속에서 멋지게 표현됐다. '아브라함은 눈을 감은 채 신앙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 속에 자신을 숨겼지만, 바로 그 그늘 속에서 영원한 빛을 발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몸소 이 길- 어두운 절망 가운데 버림받은 채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길 -을 택하사, 우리를 이 마지막 대적들로부터 구원하셨다. '그 첫 번째 금요일이후에, 인간은 소망속에서 고난을 감내하기 시작하였다(레옹 블로이[Leon Bloy).' '인간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어떠함을 아시면서, 그 고난으로 인해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우며 나아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몸소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루터는 그런 통찰들을 우리 자신의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일하심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고난이 그 적절한 예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경우들을 그 첫 번째 금요일에 비추어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 같은 생각과 두려움들이 그때에도 표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런 생각과 두려움들을 뒤집어 버렸으며, 이런 문제들에서 인간의 경험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의 현재 경험은 그 첫 번째 금요일의 것과 같아 보인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지도 아니하고 일하시지도 않는 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셨을 뿐 변함없이 거기에 서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루터가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신앙은 이 세상 속에, 나아가 우리 자신의 경험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일하고 계심을 아는 힘이다. 신앙은 겉에 나타난 모습과 경험이 낳은 그릇된 인상들의 뒷면을 바라본다. 신앙은 당신이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그곳에, 심지어 우리 경험에 거기 계시지 않는다고 여겨질 경우에도, 열린 마음으로 기꺼이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루터는 이 점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믿음의 흑암' (the darkness of faith)이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루터가 의심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의심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기초를 신앙에 두기보다 오히려 경험에 두는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신앙과 경험이 서로 그 발걸음을 맞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 정작 우리는 신앙보다도 경험을 신뢰하곤 한다. 그렇지만 루터가 지적하는 것처럼, 경험이 얼마나 믿고 따를 수 없는 안내자인지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 첫 번째 금요일에 경험을 신뢰했던 이들은 부활의 빛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였다. 루터가 보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믿는 것이 경험이나 이성을 압도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경우였다. 우리는 한정되고 적절치 못한 우리의 인식보다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약속들을 신뢰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거라는 우리의 확신을 무너뜨린다. 십자가는 이성과 경험을 향한 우리의 그릇된 신뢰를 산산조각 내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어떠한지 알게 한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떠하다는 것을 미리 결정하기보다, 패배를 자인하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십자가의 고난, 연약함 그리고 수욕(shame)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분에 대하여 갖고 있던 선입견들을 포기하도록 강력히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들을 산산이 부수시지만,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기꺼이 하나님을 배우게 된다. 우리가 갈보리에서 일하셨던 하나님을 알고 나아가 그 지식을 더 깊게 하려 한다면, 겸비함이야말로 꼭 필요한 덕목이다.

루터가 영성에 있어 경험의 역할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는 경험이 영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지는 않는다. 사실 루터는 자신이 신학자가 되는데 바탕이 되었던 한 경험이 있었음을 말한다. 그는 이 경험을 빈번하게 인용되는(그러면서도 매우 난해한)그의 말들 중 하나에서 짧게 묘사한다. '글을 읽고 사색하며 이해한 것이 아니라, 살고 죽고 심지어는 유죄판결을 받는 것으로 한 사람의 신학자는 만들어진다.'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도무지 그 뜻을 종잡을 수 없었다. 분명히 신학은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명쾌하게 밝히려고 노력하는 것, 뭐 그런 것이 아닌가? 루터는 대체 뭘 두고 한탄하였던 것일까?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나는 루터가 옳았다고 확신한다. 한 사람의 진정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한다는 것- 곧 하나님에 대한 사상들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 씨름한다는 것 -이다. 그러나 어떻게 일개 죄인이 감히 하나님을 올바르게 대하기를 소망할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진정한 신학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당신이 죄인임을 선고받았다는 자각을 경험해야만 한다고 루터는 단언한다. 당신은 틀림없이 어떤 통찰의 순간을 경험하였을 것이며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나아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죄인으로 선고하신 것이 얼마나 지당한지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극한에 이르렀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당신이 죄인으로 선고받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오직 이 순간부터 우리는 신약 성경의 중심 주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파멸이라는 운명으로부터 구해내실 수 있었는가 -를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나아가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이죄가 깊게 파 놓은 무시무시한 틈새를 완전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된 죄의 용서가 얼마나 기쁘고 경이로운 일인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루터는 1522년 1월 13일, 자신의 동지인 필립 멜란히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당시 비텐베르크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던 이른바 '선지자들'에게 멜란히톤이 이런 질문을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들은 영혼의 침체와 신이주신 출생 곧 거듭남을, 또 죽음과 지옥을 경험했는가? 영혼 속에 일어나는 몇 가지 흥분의 감정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대면할 때 동반되는 두려움을 대신할 수 없다. 이러한 근대의 선지자들에게 '인자(人子)의 표적은 사라져간다'고 루터는 쓰고 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사례를 현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랜들 니콜스(J. Randall Nichols)는 자신이 쓴 책 (회복케 하는 말씀) (The Restoring Word)에서 그리스의 코르퓨 섬(the Island of Corfu)을 방문하는 동안에 경험했던 일을 기록한 바 있다. "내가 이전에 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금요일에 코르퓨 섬의 한 교회에서, 주름이 그득한 채 비쩍 말라붙은 얼굴을 흘러내리는 눈물로 적시면서 그리스의 시골 아낙들이 부르던 찬송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그 아낙네들이 우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들의 그리스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와 같이 울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부활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하였다.' 니콜스가 우리의 마음속에 너무나 뚜렷하게 새겨질 정도로 말했던 그 핵심은 곧, 만일 우리가 그 첫 번째 금요일을 뒤덮었던 절망감과 무력감 속으로 던져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서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부활이 참이듯 죄의 용서도 참이다. 기독교 영성은 자신이 죄인으로 선고받은 자라는 자각에 기초를 두면서도 나아가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이 바뀐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정죄 받은 고통에 눈물 흘릴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죄의 용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겨우 몇몇 사람만이 신약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그들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루터는 주장하기를 진정한 신학자는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정죄 받은 자라는 의식(意識)을 경험한 사람이며, 아울러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있는 그 말씀이 자신에게 복된 소식임을 깨닫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는 어떤 것,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 버리는 어떤 것, 우리 자신과 연관을 맺고 있는 그 어떤 것으로 경험된다. 신약 성경을 다른 문학 작품과 다를 바가 없이 읽는 것은 쉽다. 하지만 루터는 오직 우리가 자신의 죄를, 또 그 죄가 암시하는 모든 것을 깨달을 때에야 우리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그 선언,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죄들을 용서하셨다는 말씀의 경이로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되새겨주고 있다.

이와 비슷한 주장이 루터가 로마서를 강해하던 기간(1515-1516) 중에도 나타나고 있다. 비록 부지런한 신학자라 할지라도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핵심을 완전히 놓칠 수 있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다.

 

많은 책을 읽은, 나아가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학자들이 곧 최고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다.‥‥ 최고의 그리스도인들이란, 학자들이 책 속에서 읽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유로운 생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시대에 많은 책을 씀으로 학자가 되면서도, 정작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터는 근대에 일어났던 대학과 폭발적인 학문 연구를 미리 내다보지 못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앞으로 발생할 문제를 예견하였다. '신학자'는 학문 연구에 종사하는 하나의 전문 직업인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이 직업인의 자격은 그가 펴낸 책에 따라 인증 받게 되었다. 하지만 루터가 보기에 신학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이 그 은혜를 경험하였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몫이었다.

루터가 신앙과 경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은 그의 영성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측면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의심의 본질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나아가 우리 개개인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과 역사하심을 발견하는 방식 같은 의문들을 깊이 생각하게 될 때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 이 십자가의 영성에는 또 하나의 측면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라틴어 용어인 'passio' 라는 말- 그 의미가 모호한데, '고난 또는 '…·의 영향(작용)을 받음'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삶 속에서 이 두 가지, 곧 신앙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먼저 루터가 인간의 고난에 부가하였던 새로운 가치와 장중함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고난과 영성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는 고난 없는 편안한 삶의 행로가 포함되어 있다고 외치는 이들을 철저히 부인하면서 십자가는 우뚝 서 있다. 예수의 부활을 둘러싸고 한참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던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존이 저 천국을 향해 올라가려고만 할 뿐,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삶의 현실과 어떤 접촉도 갖지 않으려 했던 위험한 모습이 실제로 존재하였다.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을 내세우면서, 바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그들을 향하여 신앙이 요구하고 있는 것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따르라는 외침은 그와 더불어 고난을 함께 하라는 부르짖음이기도 하다(막 8:31-38). 신자들이 자신의 실존에 삼게 된 모범은 바로 고난, 배척당함 그리고 죽음의 길을 지나 영생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최종 목적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길로 돌아 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도는 없다. 고난, 배척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드러내는 순수한 증거들이다.

이런 통찰들은 십자가 신학이 각각의 신자가 경험한 것과 관련을 맺으면서, 그 신학에 무게를 더해준다 고난, 겸비함 그리고 배척당함이야말로 신앙의 순전함을 보증하는 증명서(hallmark)다. 그것들은 신자들이 참 제자임을 보여주며, 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증한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인간의 고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나타내는 증표인 십자가로 세례 받는 것처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로 말미암아 빚어지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신 일이 실제로 그리고 진정으로 한 일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한 것이다.' 세례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끊임없이 죽고 사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의 길에 '넘겨지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그 손길에 '넘겨진' 이들이다. 신자 자신의 삶속에서 십자가가 담고 있는 원형(pattern)- 고난을 통하여 영광으로 나아간다 -을 깨달게 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 안에 서 있고 부활의 신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나아가 자신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풍성한 유업을 이어 받은 상속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십자가라는 본보기를 강조하면서 심각한 오해가 나타나게 된다. 다음 글을 곰곰이 살펴보라.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crucianus)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인(Christianus)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니, 그 까닭은 그가 자신의 주인인 예수그리스도를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칫 어떤 모방의 영성, 곧 예수라는 본보기를 인간이 닮아가는 영성을 가리킨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영성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글에서 그 견고한 기초를 찾아볼 수 있는, 너무나 중세의 냄새가 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루터가 말하려 했던 것은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그의 말의 핵심은 곧, 진정한 그리스토인이란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이 말이 능동이 아니라 수동의 의미임을 유념하라)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신앙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만드시는 수단일 뿐이다. 루터가 생각하였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의 뜻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체로서 일하심을 강조한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떠받치며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일 뿐이지, 우리 자신의 작품은 아닌 것이다." 루터가 강조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을 당하려고 몸부림치는 것도 아니요.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흉내 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모양으로 빚어 가시도록 해드리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루터는, 어쩌면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겐 놀라울 수도 있지만, 고난이 영성에서 갖고 있는 긍정할 만한측면들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하거나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데 고난이 필요함을 논증하는 곳에서, 루터는 영적인 방황과 고통 받는 자들의 고뇌를 직접적으로 토로한다. 다음 글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직접 건네는 말이다.

 

십자가의 신학자(곧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안에 모습을 감추신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라면, 고난, 십자가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중한 보배이며, 가장 거룩한 유물들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이 신학의 주(主) 되시는 분이 거룩한 당신의 살로 만지실 뿐 아니라, 거룩하고 신성한 자신의 의지로 품으심으로써 스스로 성별(聖別)하시고 복 주셨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이 유물들을 바로 여기에 두심으로써, 우리가 거기에 입 맞추고 추구하며 품을 수 있도록 하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보배들을 받을 만한 자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은 얼마나 큰 행운아이며 복 받은 사람들인가!

 

고난과 신앙은 한 몸이며 그 강도와 질(質)을 놓고 볼 때 서로 직접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루터가 자기 학대의 영성을 추구했던 인물이었음은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들이, 문자 그대로 또는 비유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고난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겨주신 것이 되게 하고, 결코 우리가 자신에게 지우는 고난이 되게 하지 말자. 어떤 고난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며 기여할지를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모름지기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고난이 자신에게 찾아올지, 그것이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 분별해야만 한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으나 이 인용문에서 'passio' 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의미, 곧 '고난과 '다른 이의 영향을 받다'는 뜻 사이에 긴밀한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라.) 고난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또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지워야 할 어떤 짐 같은 게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반드시 필요함을 깨닫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그 고난이 일어날 곳과 시간 그리고 그 본질을 맡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루터가 보기에 신자와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긴밀한 연합으로 결합되었으며, 신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고 그리스도는 신자의 삶을 함께 소유하신다. 신앙은 마치 혼인 계약과 같은 것이어서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함께 소유할 물건들을 정하게 된다. 우리가 가진 것들(죄와 사망)이 그의 것이 되고, 그가 가진 것(구원과 생명)이 우리의 것들이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신자의 생명 속으로 뚫고 들어와, 이처럼 '찬탄할 만한 거래' (commercium admirabile)를 만들어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풍성함의 특권은 그와 함께 고난당하는 것이며, 이는 그와 더불어 우리가 다시 일으켜지도록 한다. 즉 그리스도가 전에 밟고 지나갔던 길, 먼저는 심자가를 향하여 그 다음에는 영광을 향하여 걸어갔던 것과 같은 길을 우리가 걸어가게 하는 특권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신앙이 시험대에 오른다. 진정 영광이 십자가 너머 저편에 자리 잡고 있는가? 십자가는 삶의 종착점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출발점을 가리키는가? 십자가야말로 영광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출구이고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나아가 신자로 살아가는 우리 여정에 찾아온 고난과 고통 그리고 반대들은 소멸되어 새롭게 바뀔 것이라는 견고하고 줄기찬 확신을 갖고 사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첫 번째 금요일이 부활의 날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당장은 다소 어둡고 불투명한 안경을 쓴 것처럼 뚜렷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날이 이르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명명백백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길은 금욕주의자의 자기 부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기껏해야 인간 실존의 무익함에 자신의 몸을 내맡기는 한 방편이거나, 심지어 절망과 망상 정도로 그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이 우리의 실존에 암시하는 바를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십자가는 현실 감각과 목적의식을 갖게 된다. 이 길은 고난, 고통, 배척의 길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보다 앞서 그의 길을 걸어가신 뒤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을 만나기 위해 걷는 길이기도하다.

현대에 와서 이것이 영성과 관련하여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과 같은 저술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루터가 제시한 생각들은 억압당하고 가난하며 고난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면서 그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몰트만이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972)도 사실은, 루터의 말을 직접 인용한 것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이 억압받는 사람들,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말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따돌림을 당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십자가는 우리가 배척했던 그것을 하나님은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며, 우리가 내세우는 판단 척도들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루터가 이 점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던진 말을 읽어보자.

 

가난한 사람들과 고난당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이들이다. 바로 그들을 위하여 이 왕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강림하셨다. 따라서 그의 나라는 두려움, 슬픔 그리고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마치 천사들이 가난하고 깜짝 놀라며 두려워하던 목자들에게 말하였던 것처럼, 이제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선포하노니 '보라, 내가 너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하지만 이제 passio가 갖고 있는 이 두 번째 측면으로 화제를 돌려보자. 루터가 말하는 영성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주체가 되려는 생각과 성취 지향의 종교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터가 인간의 '일들' (works,행위 또는 공로)을 비판한 점은 너무나 쉽게 오해를 받고 있다. 우리는 이를 하이델베르크 토론의 21번 논제에서 등장하는 한 글귀로부터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루터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고난(을 받기)보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하는) 일들'을 더 좋아한다고 선언한다(좀 더 분명한 의미 전달을 위해 괄호부분을 역자가 첨가했다. - 역주).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이중 의미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영어 번역은 루터가 말하려 했던 바를 완전하게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루터가 비판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들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의 '행위들', '행동들' 또는 '노력들' ( '일들' [works]이라는 무덤덤한 말보다, 루터가 쓴 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이런 말들이 더 낫다) 이 전혀 신령한 열매들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시도록 그분께 길을 비켜드려야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의미인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루터는 이 점을 분명하게 천명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관련 선상에서그것을 주목하는 것이 올바른 것 같다. 복음서들이 증거 하는 수난 기사들은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고난들이 예수에 지워졌다는 사실 자체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 예수의 사역을 설명하는 기사들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주체가 되어 행동하신다. 그의 일하심을 말하는 동사들은 능동형이다. 그러나 그의 수난 기사에 들어서게 되면 마치 드라마와 같은 반전이 나타난다. 이제는 어떠한 일들이 예수께 이루어진다. 그에게 이루어질 일들을 말하는 동사들은 수동형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함으로써, 루터는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본보기가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빚어낸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문제에서 행동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신자는 그의 행동의 대상이 된다.

신앙의 평정(平靜)- 루터의 영성에서 매우 강력한 테마이다 -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으며, 나아가 그 일을 잘 마치셨음을 깨닫는 데 달려 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들을 받아들이면서, 그 일들 위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참 평화는 골칫거리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 평화는 그런 골칫거리 문제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힘이다.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그를 괴롭히는 사람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이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괴롭히고 못 살게 군다 할지라도, 기쁨과 평온 가운데 그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이 야말로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말 또는 겉모습이 아니라 생명과 진리로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에 응답해야만 한다'(루터). 십자가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의 원천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갖는 경험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신자의 존재 양식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아가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자연스러운 모범임을 확인시킨다. 이런 생각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더 깨어 있는 신자만이 감당하는, 칭찬할 만한 어떤 행위 양식이라는 관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실존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것이다. 신자를 십자가로부터 떼어 놓는 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 그것이 물질의 풍부함이든 아니면 영혼의 오만함이든 상관없이 -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가져야 할 활력과 순전함에 하나의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 심중(心中)의 믿음을 붙잡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루터). 십자가는, 그것에 반드시 수반되는 모든 것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부분으로 신자에게 지워진다. 나아가 신자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소명을 단단히 끌어안게 된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 아래에 서 있기 때문에 새삼 십자가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는 신자가 선택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신자의 신앙을 통하여 신자 개인에게 지워지는 것이다. 신자의 영혼이 자라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그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엉킨채 이어져 있고 그럼으로써 이미 완성된 신자가 완성되어 가는 것(becoming what he already is)임을 점점 더 깨eke는 것과 큰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이 실제로 그리고 진정으로 한 일은 우리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루터).

 

십자가 신학 : 오늘날

 

그렇다면 이런 영성은 현대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이 장(章)을 읽어오는 동안 독자들이 현대의 종교 상황과 연관지어 많은 내용들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현대의 영성과 관련된 세 가지 중요한 영역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나한테 유익한 게 뭐야?' 영성('what's-in-it-for-me?' spiritua- lity)에 천지(天地)가 뒤집어질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현대의 많은 영성 안식들은 너무나 인간 본위여서 인간의 정신건강과 완전성에 자신들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이점들을 강조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이 호소하는 내용은 자기중심이다. 이를테면 '이 영성을 따르시면 당신은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와 같은 말이 그 보기이다.

그러나 루터가 보기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져올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는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신자의 모습이 일치되어 가는 것이며 나아가 영광은 오직 고난을 통하여 올 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 영성이다. 그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커다란 매력이심을 알게 하고, 그와 지속적으로 연합시키는 의(義)를 상속받게 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은혜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던 일들을 향해 적절하고 올바르게 응답하게 한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자기만족만을 갈구하며 발버둥치고 있는 그 곳에서 루터의 영성은 심오한 도덕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둘째, 만일 루터의 말이 옳다면 이미 북미(北美)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건강과 부(富)'의 복음을 향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번영입니다) (God's Will is Prosperity)와 같이 파격적인 제목을 내세우면서 잇달아 출간되는 책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세속에 물든 사람들의 뿌리를 펼쳐 보일 뿐이다. 그들의 기본 주장은 이런 흐름을 따라간다. '당신은 그 일을 이루셨나요? 당신은 성공한 사람입니까? 범사가 잘 풀립니까? 당신이 품었던 삶의 야망들을 이루셨나요?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공하지 못했다면 곧 믿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당신이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은 건강과 부(富)로 되갚아 주십니다. 재산과 지위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신앙을 보여주는 특징인 겁니다.' 바로 이런 형태의 영성이 기독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해야만 하며 루터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여전히 살아 숨쉬는 자원을 제공하고 있다.

부와 건강이 곧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은,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는 가장 순수한 증거라고 주장했던 루터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순전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그림자 밑을 지나가지, 그 그림자를 피하지 않는다. 루터가 보기에 '건강과 부의 복음'이란 세속 기준들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 교활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십자가의 신학에 대하여 도통 아는 것이 없는 '영광의 신학'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이전에 루터가 썼던 것처럼 '인자(人子)의 표적은 사라져간다' 십자가 신학자라면 하나님을 믿는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의 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가 담고 있는 모든 고난과 수욕 -에 신자의 모습을 일치시키는 것임을 단호하게 주장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당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신앙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가 주셔야 할 모든 것을 - 오직 십자가의 수욕, 고난 그리고 고통(agony)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영광도 -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처럼 세상에 속한 것들과 물질만을 추구하면서, 실패나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당한 표시임을 암시하는 삶의 철학들을 마치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보증하는 자격증으로 여기는 태도와 맞서 싸우는 강력한 논거가 그들에게는 있다. 십자가는 이러한 것들을 반박하고, 이를 조장하는 사람들을 세속적인 대용품으로 기독교의 진정한 성공과 만족을 대체해버린 이들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루터의 접근법은 지나치게 자신의 경험을 지향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다루는 데 중요하다. 특별히 신앙이 유년기를 거치는 동안 아직 그 신앙이 자라지 못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경험한 것을 너무나 의지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기간 동안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하나님의 현존과 권능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처럼,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한 것은 다시 한 번 그분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그러나 늘 한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자각을 그리 자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광야로 접점 더 나아갈수록 뒤편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점점 더 멀어진다. 때때로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 나아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 계시지 않는다고 딱 잘라 결론을 내려 버린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잃든지, 아니면 그 모든 경험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낱 애처로운 남가일몽(南柯一夢)으로 남을 뿐이다.

십자가 신학은 이와 같이 지나치게 경험을 믿고 따르는 태도를 향하여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다. 우리가 보았듯이 루터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정작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사물의 모습이 그 사물의 실제 존재하는 모습과 거의 관련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금요일을 되새기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 현존하시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들을 만날 때 커다란 도움이 된다. 그것을 통해 상황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분별할 때 경험이라는 차원이 갖고 있는 심각한 한계들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들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루터가 던진 중대한 충고는 여전히 우리의 귀에 쟁쟁하게 울리며 도움이 된다. '안쪽을 그만들여다보고, 바깥으로 고개를 돌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바라보라.' 우리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

 

결론

 

루터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십자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성찰들로 이번 장을 마무리하면서, 루터가 제시한 많은 통찰들 가운데 몇 가지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기독교회의 사명이 시작된다. 아울러 기독교회는 바로 이 십자가로 되돌아가 사명을 재발견하고 되찾으며 그 사명을 다시 그의 소유로 삼아야만 한다. 이로써 연약함 속에서 완전하게 된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교회는 계속하여 정복하고 정복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몸 된 교회에 남겨 준 유산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수치, 버림받음 그리고 절망을 놀라움과 기쁨으로 바뀌게 하는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그 위에서 달려 죽은 사람이 신실하다는 것을 변호하는 어떤 도덕의 승리가 아니었다.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이 세상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흥미롭지만 지독히도 무미건조한 몇몇 생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런 생각들이 1세기의 유대인 종파들을 다룬 몇몇 학술서의 각주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당황스러운 사실, 곧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主)요 구원자이신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그의 생각들이 옳은 것이라고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아 영광으로 옳겨졌다는 사실을 말하며, 나아가 바로 그 그리스도가 계속하여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무장시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추진력을 제공하였음을 보여준다(마 28:20). 그리스도인이 갖고 있는 위대한 테마인 소망과 기쁨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십자가로 수렴된다. 기독교회가 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계속 남아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세상이 내린 유죄 평결(評決)을 뒤집으신 바로 그 하나님을 믿음을 통해, 앞을 향해 역사 속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한 언덕 위에 서 있는 하나의 봉화대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흘을 드러내는 표지로 우뚝서 있으면서 죄 가운데 신음하는 인생들을 불러 모으신다. 기독교회는 그런 십자가 아래에 모여 들어, 십자가의 수욕(羞辱)과 고난 속에 감춰졌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계시되었고 나아가 자신의 무력(無力)함과 연약함 속에서 도리어 강력하고 의미심장하게 호소하시는 하나님을 놀라워하면서 그분을 찬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참 지식이 우리의 것으로 주어진다. 나아가 그 지식은 신자와 교회의 실제 모습- 벌거벗고, 연약하며, 믿음의 자녀를 생산치 못하고, 죄악이 가득하며 나아가 어리석기 이를데 없는 모습 -이 어떠한지 드러낸다는 점에서 신자와 교회 양쪽에 깊은 상처를 안겨준다. 그러나 바로 이로써 우리는 도리어 나음을 얻으며, 나아가 다른 이를 치유하게 된다. 우리의 벌거벗음, 연약함, 무기력함, 죄로 가득찬 모습 그리고 어리석음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나음과 완전함을 얻게 하시고(계 3:17-19), 이 나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게 할 목적으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 신학은 소망의 신학이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 겉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고난, 그리스도인이 경험한 것과 모순되는 것들, 멸망의 위협, 겉보기에 연약해 보이고 어리석어보이는 기독교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억눌려 있는 자들에게 소망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하고, 바로 그 안에 실존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 나아가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열쇠가 놓여 있다. 십자가 신학은 기독교회들의 현재 상태에 절망하면서, 그 교회들이 발전은 고사하고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회의를 품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이 되는 신학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계속하여 존재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힘과 지혜에 의존하지 않는다. 전 세계에 있는 묘지들은 교회의 존재와 생명이 자신에게 의존한다고 믿었던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정작 그 무덤은 교회의 존재와 생명이 결국 의존하고 있는 단 한사람을 담아둘 수 없었다. 십자가에 대한 선포는 그 고유의 힘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죄를 초월한다. 십자가의 고난 속에 감추어졌던 바로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몸 된 교회의 연합함 속에 감추신 채, 그 연약함을 정복하고 그 모습을 바꾸신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의심과 근심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할 말이 많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이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어떤 자원들을 유익하게 선용할 수 있도록 하는지 살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