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정책으로서의 네비우스 방법
(Nevius Methods as a Mission Strategy in the Korea Mission Field)
박용규
(역사 신학)
서론
한국교회 선교를 위한 총체적인 선교전략(the overall strategy)으로 1890년 채택된 것이 소위 말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Nevius Methods)이다. 하비 칸(Harvey Conn)의 지적대로 이 선교정책은 성경적 보수주의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의 구체적인 본보기로 한국선교사역을 집약한 대표적인 선교방법이었다. Samuel A. Moffett과 J. E. Adams가 지적한대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는 “일관되고 확고부동한 그리고 거의 합심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893년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등 세 장로교 선교회가 장로교 공의회를 조직하고부터 1901년까지의 기간동안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국 현지 실정에 맞는 체계적인 선교정책으로 다듬어지는 기간이었다. 1895년 D. L. Gifford가 “Mission Policy"에서 지적한 것처럼, ”선교사역이 더 정규적인 조직체로 충실히 발전되기까지 선교회는 다른 지역에 임명된 지도자들과 더불어 네비우스 선교방법, 일반 교인들의 교육을 위한 성경반, 그리고 겨울 지도자반 사경회를 정책으로 신뢰했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대한 이와 같은 초기 선교사들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대한 비판을 줄기차게 제기했다. 적지 않은 비평들이 당시의 배경 속에서 고찰할 때 객관성을 상실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고찰하되 실제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사경회 운동과 주일학교 발전에 끼친 영향을 심도 있게 기술하려고 한다.
네비우스 방문과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채택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1829년 뉴욕에서 태어나 중국지푸에서 사역하고 있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선교사 존 리빙스톤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에게서 유래되었다. 초기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20대 젊은이들로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 뛰어난 잠재력이 있었지만 선교 경험이 없었다. 게일이 25세, 언더우드가 26세, 아펜젤러가 27세, 알렌 의사가 27세, 그리고 그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던 스크랜톤 선교사도 29세에 불과했다. 때문에 패기와 복음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지만 전혀 선교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처녀지와 같은 이 한반도에서 선교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었다. 이때에 한국에 와서 젊은 선교사들에게 선교방법에 대한 도전을 준 사람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네비우스 선교사였다.
중국 산뚱성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 선교사 부처는 1890년 6월에 서울을 방문해 2주 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선교경험에 기초하여 선교사역을 처음 시작하는 젊은 선교사들이 명심해야 할 중요한 선교원리를 제시했다. 사무엘 마펫의 고백대로 그의 서울 방문은 선교사들이 선교방법과 정책을 채택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네비우스의 서울 방문은 어떻게 한국선교를 해야할지 방황하는 젊은 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에 대한 일대 방향을 제시하는 매우 뜻 깊은 사건이었다. 때문에 2주 동안의 강의는 너무도 진지했다. 네비우스의 강의를 듣는 한국 선교사들의 자세는 마치 막 철들기 시작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인생의 방향을 제시받는 듯 너무도 진지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네비우스 선교사의 아내는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젊은이들이 마치 아버지를 둘러싸듯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그 주위에 옹기 종기 모여 많은 문제에 대해 그의 자문을 구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매일 저녁을 이런 식으로 보냈다. 그는 갓 개방된 이 나라의 현 상황과 요망사항을 주의 깊게 연구하였고 선교사들은 마음에 와 닿는 충고와 제언에 대해서는 즉각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비우스 박사의 강의를 들은 이들은 모두 북장로교 소속 열명 정도의 소수였지만 “그들 모두는 즉시, 네비우스 원리가 바르다는 전적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말한대로, 참석자들은 “기도하고 깊이 숙고한 후 우리는 대체로 ‘네비우스 원리’를 채택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제시한 원리들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방식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그 시점부터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북장로교 뿐만 아니라 전체 장로교 선교회의 중요한 선교정책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선교의 통일성과 후에 도착하는 선교사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1년 후, 1891년에 네비우스의 원리를 선교 현장에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일련의 “규범과 세칙”(Rules and By-laws")을 채택했다. 이 원리를 채택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울에 있는 미션스쿨 학생들의 부모들이 학비 일부를 부담하도록 하는 것과 방학 동안에는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정책을 변화시킨 일이었다. 한국에 새로 파송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은 누구나 도착한 후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관한 책을 한 부 받아 첫 해 말에는 언어에 대한 시험을 합격해야 함과 아울러 이 원리를 완전히 터득하게 되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언어 시험과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습득은 적어도 한국에 입국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고, 따라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선교 정책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핵심
지금까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이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nment), 자전(Self- Propagation)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시카고 대학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그의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곽안련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은 성경공부에 있었고 이것이 자립, 자치, 자전의 실현을 가져다 주었다고 지적하였다. 성경공부의 구체적인 연구와 삶속에서의 실천이 결국 자립, 자치, 자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비 칸 선교사 역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근간이 성경연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네비우스 방법의 중심은 자립이 아니며 자치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모든 기독교 사역의 기초로 강조한 것과 성경 공부 모임을 통한 훈련에 있다. 이것에 의해 성경은 연구되고 신자들의 마음에 적용되었다.”
처음부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신뢰하는 이들이었고, 이 때문에 그 토대 위에 선교정책을 구축했던 것이다. 한국선교 50년 주년을 맞는 1934년 희년 기념식에서 Hebert E. Blair가 지적한 것처럼 성경학교, 신학교, 선교정책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성경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성경은 강조되고 연구되는 유일한 교과서다. ... 역사적 칼빈주의의 배경을 지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서를 수납하며, 장로정치를 채용한 [한국]장로교인들은 구 프린스톤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치 않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중심이 있는 복음 이야기와 이에 대한 바울의 초자연적 해석을 선교사들이 가르쳤고, 한국교회는 서슴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곽안련 선교사가 그의 저서, <한국교회와 네비우스선교정책>에서 언급한 네비우스 선교정책 10가지 가운데 실제로 2항과 6항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중심 골격을 형성하는 조항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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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함.
⑥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한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조사는 성경연구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두 번째 항,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함”이 말해주듯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성경 중심의 선교정책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곽안전(Allen D. Clark)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그 중심되는 원칙은 성경공부를 장려하여 모든 교인으로 하여금 성경지식을 얻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해서든지 자신 있게 전도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각 지방의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배출된 지도자들은 각기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신자나 불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먼저 자신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권위 있는 성경의 토대위에 구축된 윤곽이 뚜렷한 신뢰할 수 있는 진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선교사가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경공부제도가 없었다면 네비우스 선교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자립, 자치, 자전은 성경공부를 실천했을 때 생기는 부차적인 결실이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강조하는 성경공부는 단순히 성경공부가 아니라 오늘날 소위 제자훈련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 6번째 항이 말해주듯이 모든 신자들은 그룹의 영수와 순회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일종의 신앙양육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조사들과 영수들은 선교사들로부터 사경회나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그들이 현장에서 와서 다시 그룹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던 것이다. 리더가 먼저 훈련을 받고 훈련 받은대로 현장에 가서 조원들을 모아 놓고 훈련시키는 오늘날의 제자훈련 공부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성경공부 방식이 모든 교회 현장에서 실천에 옮겨져 초기 한국교회에는 설교 보다 말씀 공부를 더 중시하였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채택된 후 모든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원리와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네비우스 정책이 구체적으로 현장에서 실천에 옮겨지면서 결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결실은 한국 선교가 처음부터 성경 중심의 교회로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틀을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이다. 1892년 처음으로 62명의 학습교인이 처음으로 체계적인 말씀 공부와 그 적용훈련을 받았던 것도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결실이었다. 1890년 이전에는 학습교인을 대상으로 한 공식적인 교육이 실시되지 않다 네비우스 원리를 채택한 후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실천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주일학교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주일학교와 사경회를 통해 구체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주일학교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였고, 주일학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가장 큰 실천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채택되던 1890년에 시작된 주일학교 사업은 곧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보완하는 질적 성장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아갔고, 그 수도 놀랍게 신장했다. 1897년 평양에만 5개의 주일학교가 운영되었고, 교재를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조직된 후 한 그 첫 사업이 주일학교 공과위원회를 조직한 것이다. 1907년 장감연합공회는 전국 주일학교 공과를 통일하고, 장감선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공과를 출판할 기금확보에 들어가는 한편 전국 주일학교 사업을 총괄할 총무를 세웠다. 1910년에 처음으로 세계 통일공과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1911년에는 주일학교 사업을 더 활성화하기 위해 장감연합공의회 하에 13인으로 구성된 종교교육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13년 4월 19일에는 서울 경복궁에서 세계주일학교대회 대표들을 포함 147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언더우드의 사회로 처음으로 주일학교대회가 열렸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주일학교 수가 급증함에 따라 주일학교는 곧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블레어 선교사의 노력에 힙입어 1920년에만 주일학교가 1만개에서 1만 4천개로 증가했다. 1920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 대회에서는 한국의 주일학교 사업의 발전을 위해 향후 3년동안 세계주일학교 지도자를 파견하여 해마다 6개월 동안 각처의 주일학교를 방문하여 지도하고 전국 각처에서 주일학교 대회를 개최하였다. 1921년 제 1회 전국주일학교 대회가 열렸고, 1925년 제 2회, 그리고 제 3회 대회가 1930년 평양에서 열렸다. 이와 같은 놀라운 주일학교의 성장 이면에는 블레어, 1920년부터 주일학교 총무로 일해온 J. H. Holdcroft(許大殿), 그리고 부총무로 일해온 정인과(鄭仁果)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시작된 성경중심의 주일학교는 장로교뿐만 아니라 감리교 안에도 견고하게 자리잡아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복음에 기초한 교회로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주었다. 그러나 주일학교는 한국교회와 한국선교에만 기여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주일학교 교육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일반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그들의 의식과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이다. 복음이 개인의 의식변화와 영적 각성을 촉발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줌으로써 민족과 사회 앞에서 부끄럼이 없는 민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 복음이 문화 변혁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사경회
주일학교 보다도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더 큰 결실은 사경회운동이었다. 롤랑 알렌(Roland Allen)이 지적한 것처럼 자급과 더불어 사경회 제도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이다. 1909년 Samuel A. Moffett은 한국 선교 25년을 회고하면서 “그[네비우스]로부터 우리 선교사역의 두개의 위대한 원리-사경회(the Bible training class system)와 자립-의 사상적 씨가 나왔다”며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사경회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였다.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곽안련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적으로 말해, 모든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위대한 성장의 가장 큰 비밀은 사경회제도였다고 믿고 있었다.” 사경회는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 발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경회를 통해 영수와 조사와 권사를 발굴할 수 있었다. 사무엘 마펫이 지적한대로, “사경회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처음으로 사역자 훈련을 받고 자질을 계발”하였으며, 매서인 전도자 조사 전도부인등이 발굴되어 사역에 임명된 것도 사경회를 통해서였다.
1890년 언더우드가 처음으로 서울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여 한국인 7명이 한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언더우드의 집 남서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열린 첫 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 출신이 세명이었고, 북부출신과 황해도 출신이 각각 두 사람이었다. 그 다음해는 사경회 참석자가 전해보다 배 이상이 늘어난 18명이었다. 1891년까지는 전국에서 선택된 이들을 대상으로 중앙의 한 지역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였으나 1892년부터는 여러 지역에서 사경회를 열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들을 훈련하는 기간도 대폭 조정되어 훈련생들을 1-2개월 동안 신학교육을 시키는 대신 2주 동안 전교인을 대상으로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 그때부터 전국 주요도시에서 사경회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사경회에 500명에서 1000명이 참석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평양, 선천, 그리고 재령에서는 1100명, 1300명, 그리고 (선천에서는) 1800명이 참석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1909년에는 이들 세개 선교부에서만 600개 이상의 사경회가 열렸으며, 총 41000명이 참석하였다. 그 해에 8개 선교부중 여섯 개 선교부에서 열린 사경회에 32000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숫자는 여섯 개 선교부의 전체 교인의 39%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경회에 참석자들이 쓴 1909년 한해 동안의 비용만도 2만 5천 달러가 넘었다.
1893년부터 1901년까지는 전교회가 사경회에 참석하다, 1901년 정규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좀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위한 상급반과 일반 교인들을 위한 하급반으로 분리되어 사경회가 실시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경회는 크게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사경회와 교회 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경회로 구분되어 실시되었다. 초창기 사경회는 대개 선교사들이 순회하면서 열흘동안이나 두 주일 동안씩 지도하고 가르쳤다.
일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상급반 사경회는 대개 모이기 편리한 큰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사경회가 마친 후에는 각기 교회로 돌아가서는 “교인들을 위하여 사경회를 열거나 성경반을 조직하여 배운 것을 가르치게 하였다.” 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한 사경회는 각 지방의 형편에 따라 보통 10일간씩 개최되어 올바른 성경지식을 심어주었고,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교회에 가서 가르치고 그대로 설교하였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경회는 평신도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개교회에서 봄이나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 사경회가 열려 낮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오후에는 전도하고 저녁에는 전도집회의 일환으로 부흥회가 열렸다. 주로 개교회 사경회는 한국인 목회자들이 담당했다. 이와 함께 각 지방에는 정원이나 2월 농한기를 이용해 15일에서 1개월동안 모든 교인들을 대상으로 단기간 성경학교가 개설되어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하였다.
년중 2주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사경회는 당시 90퍼센트가 농민들이었던 직업 분포상으로 볼 때도 매우 적절한 방식이었다. 추수를 거두고 난 후 겨울철은 농한기라 농부들에게는 시간을 내기가 용이했고, 봄철 농번기가 끝나고 전답(田畓)에서 제초작업을 한 직후인 7월에도 두 주 동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이 기간을 이용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특히 신정이나 구정이 시작되는 2주간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연휴 기간이었기 때문에 사경회 기간으로 가장 적합했다. 평양 대부흥운동 수년전부터 한국교회는 신년 초 두주를 사경회 기간으로 지켜오기 시작해 오랫동안 장감을 초월해 한국교회의 중요한 행사로 이어져왔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의 겨울 남자 사경회가 1907년 1월 2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되었던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1901년부터는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이 자비로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책과 소책자를 한국인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는 대신 소정의 금액을 받고 판매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것은 학교교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수업 비용의 일부는 학생이나 부모가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 후 입학을 허용했다. 1899년 설립된 평양숭실중학교의 경우 어느정도 선교회의 지원이 있었지만, 모든 학생들을 자립시킨다는 원칙 하에 “각 학생은 매일 한 나절 동안 노무과에서 일하고 그 대가로 양식을” 제공받았고, 모든 학생들은 방과후 “길 닦기, 새끼 꼬기와 신발 만들기, 문지기 일, 책제본하기, 인쇄소에서 일하기 등”과 같은 노무를 통해 자신들의 학비와 식비는 물론 “의복과 서적등도 학생이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왕복 여비는 물론 사경회 기간동안 체제비 일체를 본인들이 감당해야 했다. 1910년 곽안련 선교사가 인도한 서울의 한 사경회에는 14명이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들이 왕복 여행 비용과 체재비용을 부담하면서 강원도 동해안에서 200마일을 걸어왔고, 세 사람은 130마일을 그리고 80명이 평균 20마일을 걸어서 왔다.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며 매년 도처에서 이러한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먼 거리에서 오는 교인들은 종종 쌀자루를, 때로는 연료까지도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가지고 왔다. 각 지방 선교부에는 사경회 기간동안 참석자들이 빌려 쓸 수 있는 큰 가마솥이 예비되어 있었다.
보통 2주 혹은 1주간 계속되는 사경회 프로그램은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 세부분으로 나뉘어 오전에는 성경공부를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 그들을 저녁전도집회에 초청하고, 그리고 저녁에는 전도대상자들은 물론 원근 각처에서 모인 사경회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집회가 열렸다. 이것은 일종의 부흥회 성격을 지니고 있어 기성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새롭게 다질 수 있는 기회였고, 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보통 저녁집회는 보통 300명, 500명, 혹은 1000명 또는 그 이상 모인 가운데 지명도가 있는 부흥사가 인도했기 때문에 기성신자이든 처음 교회에 참석한 이들이든 일단 참석한 이들이라면 영적인 분위기에 압도되게 마련이었다. 더구나 참석자들 모두가 원근 각처에서 모인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사경회 저녁집회는 개 교회에서는 보기 힘든 영적 분위기를 자아냈던 것이다.
사경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훈련의 수단으로 뿌리내렸다. 그것은 황해도 재령선교부 창설자이며 전 선교사역에서 네비우스 원리를 가장 강력히 지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William B. Hunt 목사가 자신이 주관한 1909년 사경회를 언급하면서 말한 내용에 그대로 나타난다:
“젊은이나 늙은이 문맹자나 비 문맹자를 막론한 전 교회 모든 교인을 대상으로 한 사경회를 통해 조직적으로 큰 규모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 사경회의 교재는 성경이다. 일부 규모가 큰 사경회는 참석자들이 선교지 각 지역으로부터 모인다. 어떤 사경회는 지역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이는 특별한 집단의 구성원들만을 위한 사경회이다. 어떤 사경회에는 남자만 참석하고 또 일부 사경회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방 사경회의 대부분은 남성과 여성이 모두 구획을 갈라놓고 함께 배운다. 어떤 사경회에서는 선교사들만 가르치고 어떤 경우에는 선교사들과 조사들이 함께 가르치지만 전적으로 조사들이 사경회를 인도할 경우가 더 많다.”
2주 혹은 1주 동안 생업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경회 기간동안 집중적으로 배우는 훈련을 한국 교인들은 오랫동안 받아 온 것이다. 사경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배우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배려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난 것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권위가 그들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조사나 선교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일찍부터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었다.” 이와 같은 말씀에 대한 연구와 구체적인 실천의 훈련은 태동된지 얼마되지 않은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말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한편 말씀 가운데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힘을 제공해주었다.
“그러한 교육방법(사경회방법)은 평신도들과 영수, 조사, 선교사들 사이에 어떤 자연적인 공감대를 형성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연조가 짧은 선교지 교회가 하나로 뭉치고 연합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이교 사상의 한 가운데서 더욱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제도는 점증(漸增)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제도를 통해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데 숙련된 하나의 군대로 다듬어 졌다. 사경회가 미래 지도자들의 자질을 개발시키는 기회가 된다는 점도 이러한 사경회의 여러 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 사경회는 좋은 기회를 많이 제공하였다.”
한국교회가 선교 역사가 짧은 가운데서도 그토록 강한 결집력을 지니며 놀라운 결실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사경회 때문이었다. 평신도 지도자들의 영적 소양을 계발하여 장차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될 인물들을 발굴하는데도 사경회는 중요한 몫을 했다. 그것은 1934년 희년 기념식에서 Roberts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훈련을 위해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교사훈련” “성경통신과정” “여름성경학교”등을 실시하여 네비우스 원리를 주일학교와 교회 전체에 적용하도록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비록 네비우스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단체는 아니었지만, 한국에서의 주일학교연합회(The Korea Sunday School Association), 성서공회, 그리고 예슈셩교셔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면서 한국교회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해왔다.
교회에 등록하여 새신자가 되면 “그들은 주기도문, 십계명을 배우고, 특별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을 배우게 된다.” 사경회는 체계적인 말씀 교육만 아니라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말씀의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줌으로써 한국교회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사경회는 단순히 성경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교회 치리법, 주일학교 운영법, 교수법, 불교와 다른 종교, 위생문제, 안식교와 같은 타교단, 아동교육, 건강법, 그리고 기독교 문화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이것은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줘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경회는 단순히 말씀을 공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에 실천할 수 있도록 주일학교 금연 금주 청결 결혼관등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종교적 소양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의 엄격한 주일성수 개념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부터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한국의 첫 신자들은 주일성수하고, 주일에 두 세 번의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그리고 수요일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리고 함께 찬양할 것을 요청 받는다.” 때문에 학습과 세례문답의 자격 조건 가운데 주일성수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만약 교회 임직을 맡은 자나 입교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주일성수를 범했을 때는 권징조례에 의해 엄격히 권징에 처해졌다. 이와 같은 엄격한 주일성수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자신들이 그와 같은 본국 교회의 배경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파송을 받기 전부터 모국에서부터 수용되어왔던 주일성수 개념이었다.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학습 및 세례 문답은 물론 사경회를 통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엄격한 주일성수는 물론 술 담배를 금하고 정상적인 결혼관계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라는 사실을 강하게 주지시켰다. “조상숭배를 해서는 안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부모를 공경하라” “불법적인 결혼관계를 가지지 말라” “먼저 자신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라” “생업에 부지런하고 계명을 지키라” “악한 범죄를 모두 피하라”는 이와 같은 조건들은 어느 정도 신앙의 연륜을 쌓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조건이 아니라 세례 받기 전 세례 문답자들에게 요구하는 조건들이었다. 마펫은 교인을 오늘날의 학습교인에 해당하는 원입교인과 세례교인으로 대별하고 원입교인은 3개월의 훈련과정을 거치도록 하였고, 우상숭배 조상제사 금지, 성수주일, 부모효경, 축첩금지, 여자에 대한 처우개선, 음주, 거짓말, 도둑질, 잡기, 간음 등 악습관을 버릴 것 등 신자의 규범을 준수하는 이들에 한해 문답을 거쳐 세례를 베풀었다.
이외에도 술 취하거나 노름, 포도주와 아편을 만들거나 먹거나 파는 행위, 도박을 하거나 도박집을 개설하는 것도 금해야 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나 주류를 판매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지 못하며 첩이나 남편으로서 비정상적인 결혼관계를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안식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입교 후에 그러한 죄를 범하는 사람은 먼저 훈계를 받고 다음으로 직분정지를 당하며 그래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출교당한다. 권징은 미국교회들에서 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 장로나 목사의 경우 흡연은 징계 사유가 되었고, 실제로 흡연으로 인해 평양지방의 한 장로교 장로직이 정지되었다.
브라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자연히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엄격한 주일성수, 교리주의 신앙, 반자유주의 신앙관을 한국교회에 뿌리내려 주었다. 객관적인 말씀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태동시킬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엄격히 주일을 성수하게 만들며, 교리주의적인 보수신앙을 심어주어 말씀을 이질화시키는 어떠한 자유주의 도전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게 만들어 준다.
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 사경회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한국교회를 주목 받는 선교지로 올려 놓는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선교가 개시된지 불과 25년만에 한국선교지는 세계가 주목할 만큼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맺었던 것은 성경 중심의 선교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매년 세례를 받은 교인의 수도 1890년 약 40명에서 1900년에는 1,086명, 1910년에는 10,082명으로 급증하였다. 1886년에 9명이었던 세례교인의 숫자가 1900년에는 7,500명, 1910년에는 119,273명, 1920년에 144,062명, 1930년에는 194,678명, 그리고 1936년에 341,700명으로 급증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영향
선교초기 한국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한 원인에 대한 답은 분명 하나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수많은 초기 선교사들은 가장 근본 요인으로 성경중심의 선교정책에서 답을 찾고 있다. 물론 이 말이 한국교회 성장을 촉진시키는 다른 부차적인 요인들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라토렛이 지적한 것처럼 분명 한국선교의 놀라운 성장 이면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기독교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확산되었다. 이들 요인들은 선교사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 기독교의 본질, 그리고 모든 인종, 문화, 민족에 대한 기독교의 호소력, 라이벌 종교체계의 약점, 영적으로 굶주린 자들 그리고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한국의 정치적인 무력함으로 인한 공포감, 기독교야 말로 국내외 적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판단한 애국주의자들의 소망, 그리고 옛 문화의 붕괴와 무언가 더 좋고 더 안정된 것에 대한 갈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은혜였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한국의 국내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사상적 환경을 조성하시고 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확장될 수 있도록 선교사들과 한국인의 지도자들을 사용하셨다. 의심할 바 없이 전통적인 종교들, 한국인의 유순성, 리더쉽에 잘 따르는 한국인의 국민성, 평안함에 대한 한국인의 갈구, 국왕의 호의, 여성의 지위향상, 한국인의 애국심,참되고 신비한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갈망, 서양교육, 높은 문자해득률,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한국인의 종교심성도 한국교회 성장에 한 몫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요인들 보다도 가장 큰 요인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이었다.
대부흥운동이 한창 한국을 휩쓸고 있는 때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는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비결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기인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곽안련 선교사도 그의 시카고 대학 논문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날의 한국선교의 기적은 그 배후에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가장 큰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선교사들의 자질, “복음에 대한 열정,” 뚜렷한 복음주의 신앙, 민중과 왕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 모두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 요인들이었지만, 곽안련 선교사는 이것들이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며, 한국교회의 가장 큰 성장요인은 역시 1890년에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교회사가 라토렛 역시 <혁명시대의 기독교: 19세기와 20세기의 기독교사> 제 3권에서 한국교회성장과 네비우스 선교정책과의 연계성을 이렇게 간파한 적이 있다:
“신앙의 전파에 있어서 한국기독교인의 역동적인 참여는 한국개신교에서 상당히 두드러졌다. 여기에 대한 한가지 이유는 중국 주재 한 장로교 선교사가 서울을 방문한 동안 행한 제의에 의해 일찍이 채택한 한가지 선교정책[네비우스 선교정책]이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이웃의 불신영혼을 구원하고, 동료 한국 기독교인들 스스로 교회와 전도에 시간을 드려 지원하며, 한국인의 재정으로 한국지역 건축양식으로 교회건물을 세우고, 그리고 한국교회 스스로 자치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성경중심의 선교정책을 통해 처음부터 한국교회를 성경중심의 교회로 구축하면서도, 단순히 성경공부로 끝나지 않고 소위 사경회를 통해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모임 곧 부흥사경회로 연결되어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을 촉진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복음을 배우고,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고 그리고 그것을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도록 훈련시킴으로서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이와 같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감리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 감리교는 속회제도, 전도부인, 순회사경반등을 도입하여 실천에 옮겼는데, 이들 제도의 근간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정신과 큰 차이가 없었다. 감리교는 감리교 본연의 속회 제도를 도입하여 도시의 교인들을 몇 개의 속회로 나누어 각기 지도자를 하나씩 정하여 속회를 인도하게 하였다. 속장들은 매주일 자기들 속회의 형편을 담임목사나 선교사에게 보고하였다. 서울 지역 교회 뿐만 아니라 농촌교회에서도 속회를 조직하여 속장을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새신자들을 관리하도록 만들었다. 그와 함께 비록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지방전도사, 권사, 전도부인을 임명하여 교역자가 해야 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였다. 전도부인은 대개 도시를 중심으로 사역하였고, 부흥운동이 발흥하여 교세가 급성장하면서 농촌에까지 교회일을 돌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은 주로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의 가정을 일일이 심방하고 다니면서 여자들에게 한글도 가르치며 성경과 교리를 가르쳐서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주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감리교는 장로교의 사경회 제도와 유사한 순회 사경반을 조직하여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방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사경반을 조직하여 목사가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이들이 교회로 돌아가 교인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일종의 지도자 사경회였다. 지방교회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과정을 가르치고 그것을 졸업하고 장래 교역자가 되기를 원하면 신학반으로 보내 완전한 감리교 교역자로 교육시켰다.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사경반도 운영했다. 지방교회는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모이기 편리한 중심 도시에서 1주에서 2주 동안 사경회를 개최하여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사경회 때에 성경의 한권을 택하여 가르치거나 적당한 종교서적, 교회사 개관, 성경인물 전기, 감리교회의 규례, 때로는 음악이나 위생도 가르쳤다. 장로교의 사경회 제도를 그대로 본 딴 것으로 이 제도는 곧 감리교의 중요한 연중 행사로 정착되었다.
감리교에서 시행했던 초기 선교방법 가운데 교회의 권사와 설교자들을 위한 신학반(theological class)도 있었다. 지방교회의 지도자들인 이들은 누구나 이 신학반을 이수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1년에 2주동안 실시했으나 후에는 기간을 년 2개월로 늘렸다. 남자 지도자들을 위한 신학반 뿐만 아니라 전도부인들을 대상으로 한 신학반도 봄 가을 두 주일 동안씩 개최하였다. 농한기를 이용해 남녀지도자들이 신학반에 와서 성경, 설교법, 교회의 예식과 정치 등을 배웠다.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쳤고, 자립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개교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이와 같은 감리교 사경반 제도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채택한 장로교의 사경회 제도와 성격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었다.
맺는 말
지금까지 고찰한 것처럼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성경중심의 교회로 발돋음 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마련했다. 1939년 데이비스(J.M. Davis)가 말한대로, “한국교회는 거의 두 세대에 걸쳐 사용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산물”이라고 할 만큼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선교를 특징 지워주는 가장 중요한 선교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일관되게 이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과 또한 문제점들을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보완해 실제로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정책 보다도 더 진보된 선교원리를 도출하고 그것을 현장에 구현할 수 있었다. 신학교육, 사경회 제도, 주일학교, 전도,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중심 원리였고, 이것은 적어도 장로교 내에서는 철저하게 지켜져왔다.
사경회와 다른 신학훈련의 제도를 통해 평신도 지도자들을 육성하여 이들을 사역에 동참시켰다는 사실이다. 성경 중심의 평신도 지도자 육성은 독립정신을 앙양하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자립과 자전과 자치를 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제공해주었으며,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를 육성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형성해주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비판적으로 평하는 이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국에 신학의 빈곤, 정치중립주의, 세상과 교회의 이원론적 사고 등 부정적인 결과를 태동시켰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복음주의 신학자 가운데서도 한국교회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실시로 신학자와 학자 양성에 미흡하였으며, 수준 높은 신학교육을 실시하지 못했고, 교회의 일치에 부족하였다고 평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김영재 교수의 지적처럼 “후기의 선교사들이 설사 잘못한 것을 전부 일괄적으로 네비우스 정책의 소치로 돌림으로써 초기 한국의 선교와 교회 설립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네비우스 정책을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도 않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와 함께 초기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국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복음의 대 문화변혁의 사명을 소홀하게 만드는 동인이 되었다는 평가 역시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통시적이고 전반적으로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검토하고 내린 평가라고는 볼 수 없다. 초기 한국선교사들이 반지성주의, 반문화주의를 한국교회에 이식시켰다는 주장과는 달리 한국교회 선교 초기 한국의 기독교는 선교사들이나 한국교회나 복음 본래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선교 정책의 근간이지만, 그것이 의료 및 문서선교와 별도로 추진되지 않았다. 한국 북장로교의 경우,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미션스쿨들이 폐교될 때까지만 해도 선교비의 반을 미션스쿨 및 교육선교에 투자해왔다. 그만큼 “크리스챤을 위한 학교”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중요하게 여겼던 선교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은 한국인에게 개인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쳐 복음을 통한 문화변혁의 한 모델을 보여주었다. 이능화는 朝鮮基督敎 及 外交史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신교는 재래의 악습관을 개변시켰고 민족 정신을 개조시켰는데 그 주요한 것을 예거하면 음사(淫祀)의 폐기, 계급의 파제(破除), 여성의 지위향상, 근로정신, 혼상례(婚喪禮)의 종간(從簡), 민주주의 사상의 도입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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