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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기쁨조미료25 2008. 6. 7. 11:58
Proudly Canadian -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한국을 너무나 사랑한 가족 - Hall

 

복음전파를 위해, 사랑을 위해 한국 땅에 몸을 묻고

34살에 불과한 삶을 바친 윌리엄 제임스 홀

 

한국선교를 위해 사랑마저 포기하려 했던 열정의 여인 - 로제타

 

한국에서 태어난 첫 외국인 그리고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Another Cool Canadian - 셜우드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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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와 한국 고아들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가 케네디언 이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1860년 캐나다에서 출생했습니다.

다섯 형제 중 맏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심각하고 사려깊은 소년 이었습니다.

그는 농부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열일곱살 때  인근 마을에 목공 견습공으로 취직을 하였으나

2 년이 채 못되어 건강을 해치게 되어 허약한 몸으로

죽을 때를 기다리던 중.. 뜻밖에도 건강이 회복되어 살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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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살아난 그는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해야

가장 값있게 보낼 수 있을까?' 를 생각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미국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중

그의 인생을 바꿀 여자 로제타를 거기서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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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는 로제타의 미모와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프로포즈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윌리암 선교사는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제타도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한국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옵니다. 윌리암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어쩔줄을 몰라하다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 저 선교지를 바꿔 주시면 안되나요 ? "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 월 한국

땅에 오게 됩니다.

그들은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1892년 6월 21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습니다.

닥터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첫 아들 셜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해 메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현 서울 광성고등학교의 모교인 광성학당을 시작하면서 교육사역과

병원사역을 하면서 평양에 있는 조선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닥터 홀 선교사님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자신이 병에 감염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홀은 로제타와 아들 셜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됩니다. 한국에 온지 2년만에 그는 한국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홀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로제타 선교사는

수많은 위로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 그 중, 홀의 여동생이 보낸 편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 내 사랑하는 오빠가 발진디프스의 열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아마 어떤 실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니의 편지를 받고 우리의 희망을 사라졌어요 .... 언니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 ,

나는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어요 ... 우리는 모두 어머님을 제외하고 매우 건강하답니다. 어머니는 윌리암 제임스 오빠의

죽음을 매우 힘들게 받아들이고 계셔요 ...언니는 집으로 오려고 생각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사랑하는 어린 셜우드 홀를

보기를 원하고 있답니다. "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셜우드를 대리고 임신 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나게 되었고 얼마 후 윌리암 제임스 홀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셜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제임스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왔습니다. 조선에 오자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이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 딸을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하게 됩니다.
" 하나님 , 사랑하는 내 아들 셜우드 홀과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어린 셜우드를 키우면서 조선사랑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는 평양에 홀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또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후에 맹인학교를 확충하여 농아교육도 시작하였습니다.

박점동 이라는 한국 여자분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만들었으며,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에 경성여자 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 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가 세운 병원입니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 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 양화진 땅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셜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16세가 되면서는 선교사님의 연립주택을 지어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정들었던 박에스더라는 최초의 한국 여의사가 결핵으로 숨지게 되자 ,

큰 쇼크를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셜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어려움은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정부는

셜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고, 재판에서 징역 3년과 5000엔 벌금형언을 받았습니다.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 결국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셜우드 홀 부부의 선교는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쫓겨난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마지막 힘을 다해 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날 , 그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땅을 밟은 셜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 I still love Korea,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 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스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혀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을 위해 희생의 삶이 있는 선교사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민족이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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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양화진(한강변)에 닥터, 홀의 무덤 (현 외국인 묘지공원의 첫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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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1월 5일(월) 10시
부친의 묘를 찾은 셔우드 홀 부부

 

 


Edited by Y. 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