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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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16절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아모스 9장11절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하나님은 왜 그 집을 재건하고 싶으신 것일까?” 왜 모세의 장막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으셨을까? 사실 모세의 장막이야말로 지상에 세워진 천상의 처소 중 최초의 작품이 아닌가. 아니 그보다 더 웅장한 것으로 치자면, 하나님은 왜 솔로몬 성전을 그 웅장함 대로 복원하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왜 다윗의 장막을 재건하고 싶다고 말씀하실까? 그것은 “추억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그 장막 안에서 경험하셨고 그 보물 같은 추억들을 품고 계신 것이다. 다윗의 임시 처소는 모세의 장막이나 솔로몬 성전과 비교해 보면 장막으로서의 조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언약궤와 성물들을 햇빛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저 기둥 좀 세우고 그 위에 방수천 하나만 덮은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그 집을 다시 세우고 싶다구.”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것과 사람들을 감통케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다. 하나님께서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15:16)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하나님이 그 장막을 무너뜨리신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 장막은 스스로 무너졌다. 한편으로 다윗의 장막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붙드시는 것은 어떤 것도 무너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게께는 하나님이 건물에 감동을 받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간단한 임시 구조물에서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은 계속해서 도심에 합법적으로 교회당을 세우는 일에 세상의 허가를 얻으려고 애를 쓴다. 교회 건물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 진정한 예배에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궁정이 아닌 열정을 원하신다!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솔로몬이거대한 성전을 봉헌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얘기를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왕상9:6~8)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헤롯 성전의 웅장한 미관을 언급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언하셨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낭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눅21:6)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은 장막에 대해서는 결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반대로“네가 천막 기둥을 다시 세워줄까? 시간이 앗아가고 인간의 연약함이 허물어버린 것을 복구하도록 도와줄까? 나는 이 집을 보전 하고 싶구나. 여기서 가졌던 ‘인간과의 만남‘의 추억들이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구나.”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원하고 하나님은 인간과의 만남을 원하신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녀들과 만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휘장을 찢으시고’ 시간을 넘어 자녀들을 만나러 오시는 분이다.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되가져오자고 했을 때 그의 관심은 도금 상자에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언약궤 위에 있는 두 그룹의 펼친 날개사이에 머물던 파란 불꽃에 있었다. 다윗의 원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 불꽃이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 영광 또는 분명한 임재가 가는 곳에는 어디나 승리와 능력과 축복이 있었다. 친밀함은 ‘축복’을 가져오지만‘축복’을 구한다고 언제나 친밀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성경 상에서 독특한 표현으로 설명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삼상13:14) “내 마음에 합한”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마음을“닮은” 혹은“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닮은”사람이었다. 또 한편 다윗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좇는 사람이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결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그의 열정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두 번째 해석은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친밀한 영적 동행이다. 다윗의 장막과 솔로몬의 성전 그리고 모세의 장막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모세의 장막과 솔로몬 성전은 세군데 구분된 장소, 즉 바깥쪽과 성소와 지성소를 갖고 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다. 언약궤는 원래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식양을 지시받아 만든 것으로 금으로 씌운 나무 상자였다. 궤 덮개 위에는 금으로 만든 스랍(천사) 모양 둘이 날개를 펴고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 고정 되어 있었다. 스랍 사이에 있는 공간을 “시은좌(은혜의 보좌)”라고 불렀으며 이곳이 바로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의 파란 불꽃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또한 현현의 영광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언약궤와 은혜의 보좌,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파란 불꽃은 항상 두꺼운 휘장 뒤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휘장을 좋아하신 것이 아니다. 휘장이 필요하셨지만 좋아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휘장은 그분과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장벽이요 구분선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날까지 하나님이 휘장 뒤에 숨으신 것은 죄인들이 거룩하나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올 때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다윗 시대 이전까지 결여되었던 부분은 은총의 열쇠였을 것이다. 모든 성소들 중에서 다윗의 장막에만 휘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방문해서 그저 몇 시간 정도 함께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완전한 양육한 양육권을 갖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엡2:14) 하나님께서 왜 다른 성소들보다 다윗의 집을 선호하셨는지 몇 가지 단서를 얻게 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식양대로 장막을 세우고 장막 주변에 나무로 만든 기둥들을 세우고4.5미터 높이의 천으로 둘러쌌다. 반면에 다윗이 만든 장막 주변에는 아무런 장벽도 휘장도 없었다. 다윗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파란 불꽃으로부터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다윗의 장막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둘러싸고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예배자들이었다. 거의 36년 동안 일년365일 일주일 7일 하루 24시간 매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다윗 왕은 불면증에 시달려 한 밤중에라도 일어나면 언제나 성막으로부터 들려오는 암송과 찬양과 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윗 왕은 숙소 쪽에서 정면으로 대면하고 있는 언덕을 향해 서면 언약궤 주변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발이 촛불에 비춰져생기는 그림자들을 볼 수 있었다. 아미도 이 때 다윗은 다음과 같은 시편을 쓴 것 같다. 밤에 여호와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34:1~2)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92:1)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59:16) 낮과 밤으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서 춤추고 경배했다. 마치 하늘을 향해 들고 있는 손으로 열린 하늘을 붙잡고 있듯이 말이다. 다윗이 너무나 힘들어 보이는 때면 천사가 바로 옆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다윗은 예배자들의 편 팔과 춤추는 발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파란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다윗의 장막은 독특했다. 언약궤가 보관 되었던 다른 성소들에서는 예배자들이 휘장 뒤에 가려 있는 것을 예배해야 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었다. 단지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 번 휘장 뒤로 들어가는 일을 감행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의 장막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예배자이든지 여행자이든지 이방이든지 다 볼 수 있었다. 휘장이 걷힌 예배는 아무 방해가 없는 임재체험을 가능케 했다. 다윗의 장막을‘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으로 만든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다윗의 열망 때문이었다. 다윗은 말했다. ‘어떻게 해야 여호와의 언약궤를 내게로 가져 올 수 있을까?’(삼하6:9) 그는 이 한 가지 열심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다. 그러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던 첫 번째 시도는 재앙으로 끝났다. 다윗은‘거룩한 운반 작업’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만 했다. 마침내 다윗이 레인들과 예배자들과 함께 25km나 되는 먼 길을 도보로 이동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는‘드디어 해냈다’는 환희와 안도감 때문에 춤추며 기뻐했던 것 같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궤를 옮기는 순례 여정 어디쯤에선가 다윗은 하나님이 가치 있게 생각하시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기 시작 했다. 반면 그의 아내 미갈은 하나님의 신성보다 사람의 명성에 가치를 두었다. 그래서 태의 열매를 갖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 물론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다윗의 관계가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로 사람의 무대 위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만난다는 것이 어색할 때가 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친밀한 예배에 등을 돌린 열매 없는 교회들로 가득하다. 이 교회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보다 사람의 명성에 가치를 둔 현대판 미갈이다. 다윗의 좇은 것은 금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는 많은 양의 금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윗이 좇은 것은 궤 자체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른 궤들을 만들 수도 있었다. 다윗의 관심은 궤안에 있는 유물들도 아니었다. 그 유물들은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사람들에게 남긴 꿈같은 기억들이었다. 다윗은 그런 것에 매료된 것이 아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영광의 파란 불꽃을 찾고 있었다. 다윗의 삶은 마치‘어떻게 하면 그 파란 불꽃을 운반 할 수 있을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멋진 건물을 짓고 더 큰 규모의 성가대를 세우고 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더 웅장한 설교를 할 수 있다. 이전보다 더 탁월하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파란 불꽃’을 운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불꽃이 없는’교회들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듯이 그분께도 외면당할 것임을 그분은 알고 계신다. ‘불꽃’이 없다는 것은 불이 없다는 것이요, 결국 열매 없는 건물과 속빈 마음들뿐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외쳐야 한다. ‘여기 안에는 추워요. 그래서 모두가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금 예배의 불을 지핍시다!’어쨌든 다윗은 궤를 운반하는 도중 무엇이 아론의제사장직과 모세의 제사장적 의식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지 알았다. 어쨌든 한때 목동이었던 예배자 다윗은 두려움과 죽음을 무릅쓰고 휘장의 경계선 너머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영역 속으로 새롭게 다가섰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그의 개념이 모두 바뀌었다. 마침내 녹초가 된 레위인들이 다윗이 만든 임시 장막에 도착 했다. 그것은 언약궤를 위해 시온 산 위에 세우 것이었다. 다윗은 말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언젠가는 더 좋은 처소를 마련하고 싶지만은 지금 당장은 이곳에서 예배하려고 합니다.’ 제사장들은 지친 어깨 위에서 궤를 내려놓으며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레위인들이 하나둘씩 나가려고 하자, 다윗은 그들을 멈춰 세우고 말했다. ‘아니 아니요, 떠나면 안 됩니다.’‘아니라뇨? 다윗 왕이시여, 우리는 지금 언약궤를 어개에 메고 수십km를 걸어왔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수천 마리의 짐승을 준비하여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제 된 거 아닌가요? 게다가, 여기에는 휘장도 없고 지성소도 없잖습니까!’ 다윗은 말했다. ‘ 아니요. 내가 여러분 레위인들의 반찬를 재구성한 것은 실로에서처럼 여기서도 언약궤를 이렇게 방치해 두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에봇을 다시 입으시오, 비파와 수금을 다시 잡으시오. 몇 명은 가서 점심을 먹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를 위해 여기 남아있는 것입니까? 다윗 왕이시여, 우리의 연주를 듣기 원하십니까?’‘아니 아니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청중이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목 받기 원한다. 그러나 일단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시거나 그분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말한다. ‘오! 주님이 오셔서 기쁩니다. 가셔야 하겠지만.’ 그리고는 우리가 가 버린다. 우리는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그저 흥분하는 정도나 소름이 끼치는 정도로 만족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오! 주님이오셨군요.’한가지 질문을 하겠다. ‘주님이 그곳에 머무시겠는가?’ 우리 말고 주님이 과연 그곳에 머무실까? 흥분과 긴장감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 다윗은 일시적인 하나님의 임재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상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위지파의 예배자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그 다음, 당신들은 그 다음을 맡아 주시오.’ 나는 그 날이 오길 바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루24시간 그리고 일주일7일 내내 하나님을 예배하고 송축하는 날을 기다린다. 정말 극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전 세계에서 가장 사용율이 낮은 건물들이 바로 교회성전이다. 썩어질 세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도 24시간 편의점에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무리를 지어 가는데, 우리 교회들은 일주일에 두 시간도 채 영업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물품’에 대한 지원이 너무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짜여진 건물을 짓기 전에‘24시간7일’의 생활양식을 먼저 만들어 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기계화되고 말 것이다. 다윗의장막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이 된 것은 그곳에서 예배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단지 자녀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하신다. 마구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도 있다. 베들레헴에서나 아주사 거리에서처럼 말이다. 어떤 것으로든 가능하다. 다윗이 초라한 임시 장막을 보며‘언제가는 더 잘 만들고 싶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다윗의 장막이면 족하다. 다만 너의 가슴이 늘 뜨겁기를 바란다.!’ 우리는 아름다운 성전들을 세웠지만 그 안에는 거의 아무도 없다. 불꽃이 없으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 안에 현현의 영광이 없는 것은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다윗의 집을 재건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가? 왜냐면 이미 언급했던 대로 다윗의 장막에는 경계를 이루는 휘장도 벽도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갈망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길을 잃고 죽어가는 세상에 드러나길 원하신다. 다윗의 장막을 하나님이 재건하셔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손이 그들의 예배나 중보기도를 통해 하늘문을 붙잡고 있기에는 너무나 지쳐서 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이 배운 바를 재발견하기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추억 여행’에 벌써 싫증이 났는가? 벌써 자동차에 들어가서 에어콘을 켜 놓고 ‘여기에 얽힌 추억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난 재미가 하나도 없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나는 상상해 본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초라한 장막에 영광 중에 좌정하사 에덴동산 이후 처음으로 창조세계와의 어떤 구분 된 휘장이나 벽이 없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그분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하다. 당신의 얼굴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라. 그리고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여쭤보라. 대답을 듣는 순간 당신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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