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장년설교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기쁨조미료25 2008. 6. 11. 22:17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1-15 2008/06/11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창 35:1-15


두개의 설계도 위에 세워진 야곱의 집


그리스도인이 인식해야 할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이 땅에 세워야 할 하나님 나라의 설계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축자는 설계도를 보고서 지어야 할 건물의 모습을 앞서 상상하고 그 상상의 집을 현실에 옮기지만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설계도를 이 땅에 구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반 건축자와는 다릅니다. 주님은 위대한 건축자로서 그 나라를 온 우주에 건설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나라의 건설에 동참하도록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그 나라 건설의 현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세워야 할 집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모습, 바로 그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건축업자가 이층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1층을 건축할 때는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2층을 지으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준비한 목재들도 맞지 않았고, 설계도의 모양도 집의 틀과 어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집을 위한 설계도가 두 개였던 것입니다. 건축업자는 낡은 설계도는 버리고 새 설계도를 따라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일이 잘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두 개의 설계도를 가지고 생활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진 설계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만든 설계도입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는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 살다가 마음이 바뀌면 내 의지대로 만든 설계도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한 삶은 환란과 고난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같은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야곱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은 참으로 험난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장자의 권리를 얻기 위해서 형 에서와 싸워야 했고, 청소년기에는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아서, 형의 죽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가기 위해서 거의 724km나 떨어진 밧단 아람에 있는 삼촌의 집으로 도망해야 했으며, 장년이 되어서는 삼촌의 아들들과의 재산 분쟁, 그리고 분노에 찬 형 에서와의 얍복강에서의 조우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야곱은 인생에 있어서 산전, 수중 전, 공중전, 더 나아가 우주 전까지 경험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삶에서 보통의 것은 위기와 환란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고난으로 단련된 야곱도 세겜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성의 추장의 아들에 의해서 강간당하고(창34:2), 이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할례를 받아서 저항 할 수 없는 세겜에 살던 남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면서(창34:25-29), 가나안 원주민들의 공분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겜에 살고 있던 히위 족속들은 그 주변의 가나안과 브리스 족속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야곱의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의 사위와 손자들을 죽이고, 자신의 딸들을 종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여 야곱과 그의 가족들에게 철저한 복수를 다짐하며 그들을 멸망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야곱은 그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나와 내 집이 멸망당하게 되었다고 창 34:3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러면 야곱과 그의 가정을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간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야곱의 집을 위기로 몰고 간 원인들

야곱이 처한 위기는 표면적으로 볼 때, 부주의와 부적절한 처사로 강간을 당한 디나와 여동생이 당한 모욕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겜 백성을 무참히 살해한 레위와 시므온에게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진정한 위기의 원인은 그의 자녀인 딸인 디나와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야곱의 불순종에 있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듯이, 야곱이 벧엘이 아닌 세겜에 정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은 합당한 이유와 과정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야곱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 환경을 보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과 살았던 밧단 아람에서 세겜까지의 700km가 넘는 긴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긴 여행은 당시 어린 자녀들과 어린 새끼를 돌보는 가축들과 함께 한 여행이었고, 자녀와 가축들을 돌보아야 하는 야곱에게 이 여행은 피곤하고 고단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야곱의 이 여행은 거의 매일 이삿짐을 싸고 푸는 일이 반복되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여행은 머나 먼 거리만큼 많은 사람들과의 갈등들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성경은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야곱이 여행 중에 길르앗에서 삼촌 라반과 갈등(창31:24-55), 얍복 강에서 형 에서와의 갈등(창32:1-33:15)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야곱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고, 목적지인 벧엘로 가기 전에 그와 가족들이 쉴 수 있는 곳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목적지인 벧엘을 24km 앞두고 그들은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머물렀던 세겜 지역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세겜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곳으로 풍부한 물과 신선한 목초가 많은 곳이어서, 많은 가축과 긴 여행에 심신이 피곤에 찌든 야곱과 가족들이 쉬기에는 너무나도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여기서 잠시 머물다 하나님과 약속한 벧엘로 떠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그는 세겜 성 안에 머문 것이 아니라, 성 밖에서 장막을 치고 거주했습니다. 이곳에서 쉬고, 다시 여행을 할 힘을 얻게 되면 이제 이곳을 떠나 하나님과 약속한 벧엘로 갈 것을 야곱은 결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겜에 머물면 머물수록 그곳은 야곱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멸망 전의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보았을 때, 마치 하나님의 동산이었던 에덴을 떠올릴 만큼 매혹적이었던 것처럼(창13:10), 세겜은 야곱이 오랜 여행을 통하여 보아온 그 어떤 지역보다도 그들이 정착하며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야곱에게 있어서 세겜은 떠나야 할 정류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만 머물러야 하는 종착역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마치 변화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자신들에게 주어지 사명을 망각을 한 채, 그곳에 초막 세 개를 짓고 머물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처럼, 야곱도 세겜 이라는 곳에서 머물면 머물수록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이곳에서 10년이 넘는 동안을 정착하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떠나야 될 세겜을 떠나지 못한 야곱의 불순종은

이제 일회적인 행동이 아닌 습관적인 행동이 되어버립니다.

그는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들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일 백개를 주고 구입함으로서 아주 이곳에 머물려고 합니다(창33:19). 그 결과 떠나야 할 이곳에서 그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세겜에서 보내는 야곱의 시간들은 육신적으로는 안락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뜨거웠던 첫 사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습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야곱은 불순종 때문에  이제 하나님과의 약속은 잊어버린 채, 세겜의 좋은 자연적 환경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이라는 우상”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 이 우상들은 야곱의 눈을 가렸고, 그의 삶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축복권을 팔아버린 에서와 같은 삶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뚜껑이 없는 냄비에서 개구리를 삶기 위해서는 뜨거운 물에 넣지 않고, 그가 제일 좋아하는 물의 온도에 넣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온도를 높이면, 그 안락함에 젖어 있던 개구리가  하얀 배를 뒤집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이, 야곱의 신앙은 편안함과 안락함이라는 우상에 조금씩 젖어 그의 형 에서가 범한 어리석음을 그도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한 때 독수리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가던 그의 신앙은 편안함과 안락함이라는 우상에 빠져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편안과 안락함의 우상이 그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부분적인 순종을 통한 불순종으로 끌고 갔습니다. 계속되는 그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는 그의 삶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진 야곱은 순종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고, 미혹되어져 사단의 권세 아래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죄악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가 되어서 죄악 된 모습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겜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 야곱 시대에 큰 나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당 성소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큰 나무들은 사막의 강한 모래 바람에도 불구하고 왕처럼 늠름하게 버티며 자랐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큰 나무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제사를 드리는 미신적인 행위가 성행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큰 나무를 신적 존재로 생각하여, 오색 줄로 치장하고 그곳을 서낭당이라고 하여 마을을 평안과 번영을 빌었던 것처럼, 세겜에 살던 사람들에게도 이런 미신적인 행위가 있었으며, 마을의 큰 행사나 액운이 있을 때 세겜 성의 모든 주민들이 모여서 이곳에서 제의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세겜성에 살았던 야곱의 가족들도 이 같은 제의를 참관했을 것이며, 이런 죄악의 환경들은 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각종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야곱과 그의 가족들도 우상을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 줌도 않되는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리듯이, 야곱의 불순종이라는 작은 죄악은 이제 우상 숭배라는 죄악으로 그의 집안 전체를 삼키게 되었고, 모든 이들이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불순종을 마치 하나님을 위한 신앙처럼 합리화시킵니다.

야곱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편안과 유익함에 근거하여 자신이 만들어 낸 하나님만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왕좌에 하나님이 아닌 자아가 앉아 있게 된 야곱은 이제 자신의 불순종을 신앙적 행위로 합리화시킵니다. 그는 아마도 세겜이 신앙적으로 그의 할아버지였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은 장소이며,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제단이 있는 장소(창12:6-8)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전통에 근거해서 그는 세겜에서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단의 이름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이 제단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야곱은 세겜에서 벧엘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잊어버린 채, 과거에 브니엘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축복과 능력만 기억하며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예배는 하나님은 왕이시며, 자신은 그 분의 종으로서 드려진 예배와 달리, 자신이 왕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종이 되어 버린 주객이 전도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예배는 그와 하나님을 더욱 더 멀어지게 했으며, 그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형식적인 신앙인으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세겜의 세속적인 모습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흉내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세겜 성에 사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러 나갔다가 강간당한 야곱의 딸 디나의 행동과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세겜 성 주민을 학살한 그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

야곱의 가정을 파멸이라는 위기상황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하지 못한 일을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고난이 하게 됩니다. 모든 불순물을 녹여버리고 정결하게 하는 용광로의 불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온 집안의 멸망이라는 고난의 불은 지금까지 야곱과 그의 가족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평안함과 안락함으로 포장된 “자아‘”라는 우상을 섬기면서도,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모든 미혹에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모시게 되자, 야곱은 지금까지 잊고 살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고, 모든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이 아닌 바로 자신에게 있었음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리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촛대를 옮긴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야곱에게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가 35년 전 처음 하나님을 만난 벧엘로 와서 그분에게 예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에게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낚시를 가기 위해서는 낚시도구가 필요하고,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에게는 총이 필요하듯이, 부흥을 위하여 나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준비와 도구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야곱이 벧엘로 가기 전에 행한 35:2절에 기록된 그의 행동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든 것을 버려라!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우상들을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당하는 환란을 통하여 물과 불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우상들과 하나님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진 우상들을 모두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우상은 예배의 대상으로 신을 구체화시킨 상이나 조각품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부적을 가지고 있으며, 재앙과 저주가 사라진다고 믿는 것처럼, 야곱이 살았던 시대에는 각 가정마다 드라빔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가정과 개인의 복을 빌고, 재앙과 저주를 피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상 속에는 드라빔이라는 우상을 하나님과 동일 시 하고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믿는 마음이 숨겨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야곱의 집안도 예외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아내였던 라헬은 아버지 집에서 이 드라빔을 몰래 훔쳐왔고, 이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는 아내인 라헬의 이런 행동은 자녀들과 그 집안의 모든 가속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자신들을 위한 신을 구체화 시킨 조각상이나 물건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늘 몸에 지니기 위해서 귀고리 형태로 만들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뿌리부터 썩어져 들어가는 병이 나무를 병들게 하고 그 생명을 앗아가듯이, 야곱의 가정 곳곳에 퍼져 있는 우상들은 그의 가정을 영적으로 병들게 하고, 영적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상에 미혹되어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눈이 이제 환란을 통하여 영적 분별력을 얻어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된 야곱은 자신의 집안에 있는 우상들은 그들을 재앙과 저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재앙과 저주의 원인은 이런 우상들에게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우상들에 미혹되어져 얼마나 자신의 가정이 얼마나 병들고, 생명을 잃고 있는지를 알게 된 그는 자신의 집에서 귀에 걸려 있는 조그마한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도록 명령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부흥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우리 가운데 숨어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하는 우상들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린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비싸고 진귀한 음식을 먹었더라도, 다음 날 화장실에서 몸에서 소화된 배설된 것들을 아까워하고, 헤집어서 살펴보지 않고, 미련 없이 물을 내리듯이 하나님 외에 섬기는 모든 우상들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부흥을 경험하기 위하여 벧엘로 떠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라!

야곱은 외형적으로 우상을 그의 모든 집에서 제게 했다고 해도,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음을 세겜 사건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따라서 야곱은 이제 그의 가족들에게 외형적인 모든 우상을 버렸다면, 이제 그 우상을 숭배하게 한 그들 마음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자신”이라는 우상을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야곱이 죄악은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유익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세겜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매우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죄악들을 고백함으로서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명령합니다. 더러워진 손을 깨끗한 물과 비누로 씻을 때 비로소 깨끗하여지듯이, 죄악으로 더러워진 심령은 애통하는 눈물과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정결케 되어집니다.  아무리 죄악에 대한 애통함 때문에 흘린 눈물이 강과 바다를 이룬다고 해도, 죄악 된 행위를 버리고, 그 길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은 절대로 정결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야곱은 죄악에 대하여 애통하는 눈물과 함께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며 자신의 죄악들을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정결케 되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그들의 행위는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들을 꾸미지 않음으로서 철저하게 그들의 눈과 관심을 하나님께로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육신의 생존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의식주의 문제 보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소중함을 선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결은 환경이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설 때에 비로소 정말 죄가 무엇이며, 그런 죄악에 대하여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음을 깨닫고, 그분의 은혜를 날마다 갈망하는 것입니다.

  

의복을 바꾸라!

정결이 심령과 관계되어 있다면, 의복을 바꾸는 것은 바로 삶의 모습과 관계가 있습니다. 군인이 되면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군복을 입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케 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전에 “자신”이 중심인 죄 된 생활을 상징하는 죄악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중심이 된 은혜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따라서 야곱은 애통함과 회개를 통하여 자신을 정결했다면, 이제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생활 가운데서 맺으라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새 옷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삶 가운데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라는 삶의 열매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 가운데서 이런 열매가 맺어지는 것은 나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매일 매일 우리가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와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의 옷은 은혜의 옷으로, 성결의 옷으로 바뀌어간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드리지 않는 예배, 삶 가운데서 매일 매일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은 예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감격 없이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 매일 순종하는 삶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을 바탕으로 야곱은 그와 그의 가족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야곱의 결정은 너무나도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주변의 가나안 족속과 히위 족속 등 주변의 민족들이 세겜에서 죽은 사위와 손자, 그리고 종으로 잡혀있는 가족들에게 보복을 다짐하며,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가운데 지리적으로 익숙하고, 그들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세겜을 떠나 초행길이나 다름없는 벧엘로 떠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무모한 결정이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무모하고 불합리한 결정이라고 할지라도, 야곱은 세겜을 떠나 벧엘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죽음을 각오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버리지 않고 보호하심을 기록한 책입니다. 순종함으로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함으로 왕 앞으로 나아간 에스더, 기도하라는 삶에 순종했기 때문에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풀무불에 던져진 메드락, 사드락과 아벳느고, 말씀에 순종하여 31,700명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300명의 군사만 가지고 미디안의 커다란 군대 앞에 섰던 기드온 등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더 나아가 죽음을 각오하고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하셨음을 우리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순종하지 않을 때는 그 주변의 민족들을 두려워했지만,  야곱이 죽음을 각오하고 말씀에 순종의 걸음을 걸을 때, 창 35:5절은 그 사면 고을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 때문에 야곱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종은 심판을 축복으로, 자아와 욕심이라는 삶의 옷을 벗고, 은혜와 믿음이라는 옷을 바꾸어 입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무엘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 22)”


따라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미 마음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며, 예배자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야곱이 세겜에서 경험한 위기 가운데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무엇일까요?


멸망의 자리에서 축복과 생명의 자리로

죽음을 각오하고 벧엘로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야곱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의 백성들을 찾고 하나님은 찾으시며,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진실과 의로움이 회복된 야곱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브니엘에서 야곱에서 하셨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십니다.(35:10)

그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의 발목을 잡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이 그런 자신을 이겼고, 앞으로도 이길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가진 힘이 야곱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야곱을 그분의 자녀로 인정하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종종 걸음으로 걷는 아이가 뛰는 아버지를 절대로 잡을 수 없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붙잡혀 주듯이, 하나님도 야곱이 자신을 의지하고 찾으면 그를 만나주시고, 기꺼이 야곱에게 붙잡혀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인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죄악으로 인해 환란과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들에 대한 분노와 징계에 대한 손길을 거두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이긴 자의 모습으로 회개와 순종을 통하여 멸망의 자리를 축복의 자리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과

그를 통하여 세상의 존귀한 자들이 출생하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35:11)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들을 축복하시며, 그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존귀한 자들이 태어나서 그 가문을 명예롭게 하시겠다고 선언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야곱의 약속대로 먼저 그의 아들 중 요셉을 당시 초 강대국이였던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으며, 모세를 통하여 종노릇하던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라는 국가를 세우고, 왕이 되게 하셨으며, 왕국이 멸망한 후에도 다니엘을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의 총리도 세우셨고, 에스더는 왕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죄악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야곱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확실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집안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귀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졌습니다. 우리도 회개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지금은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드리는 믿음의 가문으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이삭에게 주신 비전의 계승자로서 야곱을 부르시며, 축복하십니다(35:12).

하나님은 야곱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물려받을 자격을 갖춘 이삭의 진정한 장자는 육체적인 장남인 에서가 아니라 차남인 야곱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포는 35년 전 그가 밭 죽 한 그릇에 형 인 에서의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서까지 그가 사모하였던 이삭의 맏아들로 야곱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야곱을 참된 이삭의 장자로 인정하심으로 그는 이제 할아버지인 아브라함과 아버지인 이삭의 비전과 그 기업을 물려받게 되었고,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진실과 의로움이 회복된 야곱을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그의 장자에 대한 비전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그 분만 의지하고, 회개하며 순종할 때 불가능한 꿈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런 불가능한 꿈의 열매들이 넘쳐 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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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여기 있습니다. / 블로그 / RUN / 2008.06.11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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