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족보의 구속사적 의미 (마1:1-17) 1.들어가면서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도래된 특별한 세계라고 선포함으로써 구약의 성경역사를 신약의 성경역사와 연결시킵니다. 이는 달리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마침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 세 사람의 관계를 구속사 진행의 계시적 도구인 언약적 측면에서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은혜 가운데 선택적으로 부르시고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은 그의 씨(후손)로 인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땅의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는데 집중됩니다(창12:2-3, 22:18). 한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인해 은혜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 언약은 이후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그의 실수와 연약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위와 무관하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호리의 오차도 없이 성취됩니다.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이 이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마침내 시내산에 이르러(출19장) 하나님과 새롭게 언약을 맺습니다(출24장). 이때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모세를 대표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민족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 이 언약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증합니다. 이때 출애굽기 저자는 이 언약식의 내용을 문서로 작성해 낭독한 사실을 소개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언약의 성격을 구두언약에서 진일보된 단계로 발전시킨 내용을 기록합니다(출24:7). 이는 시내산 언약의 중요성을 차별적으로 시사함과 동시에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는 것을 통해 시내산 언약의 구체적 내용인 일체의 율법의 구속력 하에 놓이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객관적이고 공적인 인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언약의 연대성 및 연속성으로 인해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이며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건 전개를 통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그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을 족장으로 해서 생육하고 번성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현을 통해 성취된 사실을 간략히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사항으로 제기된 '그의 씨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현이라는 사건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 언약은 이중 구조적인 성격을 따고 있는 바 실체를 향해 구속사를 지속적으로 운반해 가는 것을 통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본래적 성취가 실현됐음을 지금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는 것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 언약에서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언급은 다름 아닌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진 구원자로서의 대속적 사역의 핵심내용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표현 속에 잘 설명돼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란 다름 아닌 '주의 구원의 은혜의 해'(눅4:19)를 전파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해 세상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구속사적인 안목으로 잘 파악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씨)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인 사실을 지적합니다(갈3:16). 마태는 이후 족보의 기술을 통해 성경 독자들에게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시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자손 뿐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까요. 이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맺으신 다윗 언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구됩니다. 삼하7:11-17의 말씀입니다. 이 중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대목이 12-16절의 말씀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본 내용이 소위 다윗 언약의 핵심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언약 속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다윗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 자식으로 하여금 집(성전)을 건축케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셋째는 다윗의 위가 영원히 보전될 것에 대한 보증입니다. 이런 세 가지 약속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치하에서 성취를 봅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시내산 언약을 불순종하는 것을 통해 지속되지 못하고 마침내 남북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BC722), 남 유다는 바벨론에(BC587) 각각 멸망당하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됩니다. 다윗 언약은 솔로몬 통치하에서 성취의 영화와 실패의 몰락을 동시에 유발시킵니다. 이런 사실은 다윗 언약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이유로라도 실패나 파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민23:19).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하거나 후회하심이 없는 분입니다. 이는 결국 다윗 언약의 이중성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 통치체제 속에서 그 일차적 성취를 실현하게 되지만 이내 실패하는 것을 통해 영속적이고 본질적인 실체로서의 다윗의 아들로 말미암는 불멸의 나라를 세우실 것에 대한 암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원한 다윗의 나라는 급기야 분열 왕국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적(代言的)으로 선포하는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서 이스라엘과 성전의 회복(사44:28) 및 새 언약(렘23:5-6, 31:34, 겔36:26-28, 사9:6-7, 11:1-2)의 선포라는 형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에서만 발견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첩경을 예비하기 위해 육 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의 아비 제사장 사가랴의 예언을 통해서 다윗의 위로 오실 구원의 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기록합니다(눅1:69). 사가랴의 예언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려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가브리엘 천사의 고지(告知)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이런 사실이 확인됩니다. 눅1:31-33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位)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야 말로 다윗 언약에서 '아들'로 약속하신 언약의 당사자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 분으로 인해 세워질 나라는 영원해서 그 위가 결코 무너지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을 것에 대해 천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이며 동시에 다윗의 참 '아들'이심을 선포하면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한 신기원(新紀元)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서 기록한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족보의 기술은 구약적 배경을 갖는 히브리적 기록방식으로써 어떤 특정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특별히 종교적인 의미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종종 사용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시(開始)와 도래(到來)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창세기(창2:4, 5:1, 6:9, 10:1, 11:10, 11:27)나 대상(1-9장), 에스라, 느혜미야서 등등에서 접하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3:23-38)에서 구약언약의 실체이며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을 족보를 통해 그 진실성과 사실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주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의 족보를 기술합니다. 있을 수도 있는 예수님의 혈통의 순수성에 대한 유대인들의 시비를 사전에 일축(一蹴)하려는 의도에서 말입니다. 반면에 누가는 철저히 그의 복음서를 데오빌로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인해 예수님의 족보를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을 거쳐 아담과 하나님에게까지 소급시킴으로 예수님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의 구세주로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천하 인간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음을 적극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행4:12). 2.펼치면서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기원을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에 접속시키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로 인해 도래된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신적 기원에 기초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구약예언의 최종적 성취자이시며 동시에 진정한 다윗 왕의 실체로 오신 사실을 극명하게 밝히는 것을 통해 성경독자들을 포함 유대인들의 관심을 온전히 예수님의 탄생에 집중시키려는 고도의 계산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어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족보는 바로 이런 마태의 의도를 사실로 밝히려는 해설로서의 의미를 띱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시된 신정국가로서의 구약언약의 세 국면(局面) 말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표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계시했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 처음부터 모형적인 하나님 나라였기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통한의 역사, 그리고 결코 파기 될 수 없는 신실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 나라의 실체인 메시아 왕국의 도래, 곧 진정한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정적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2-6절상) 마태는 1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구약역사에 계시된 언약의 최종적 성취자로서 혈통적으로나 법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온 이스라엘이 그토록 대망해 오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인 사실을 단정(斷定)적으로 밝힘과 동시에 이를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족보를 제시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한 사람의 신분을 객관적이고 공적으로 증명하는 일에 족보를 중요한 근거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특별히 창세기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 계보가 족보를 통해 제시되고 있음이 이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합니다. 이토록 성경역사에 있어서 족보의 의미는 구속사적 특정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과 전환을 알리는 신호로도 사용되곤 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술하면서 이를 크게 세 등분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습니다(17절). 이런 사실은 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꿰뚫어보는 마태의 계시적 직관(直觀)이 섬세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셈입니다. 이미 1절 서두에서의 설명을 통해서도 마태가 얼마나 구약계시에 정통했으며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온 유대인과 나아가 이방인의 메시아로서 증거하고 있는지를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세 부분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이스라엘의 흥왕기(2-6절상),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이스라엘의 쇠퇴기(6절하-11절), 그리고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예수님까지 이스라엘의 회복기(12-16절)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를 삼등분으로 나누는 것을 통해 구속사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의 계시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 '하나님 나라의 몰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세상역사 속에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중심사상은 가나안 땅에 그의 후손들로 형성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국가로써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계획의 구체적 일환으로 먼 훗날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아브라함 언약을 갱신하는 의미에서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십니다(출19, 24정). 이때는 모세를 중심으로 전 이스라엘이 한 민족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언약의 당사자로 등장합니다. 이는 신약의 계시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주님의 몸을 표상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 언약은 시내산 언약으로 갱신되고 시내산 언약은 다윗 왕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 소위 다윗 언약(삼하7:11-17)으로 보다 구체화되고 확장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다윗과 솔로몬 통치하에서 명실상부한 신정적(神政的) 왕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런 사실의 실상을 왕상4:20-25의 내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25절을 보면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고 기술함으로써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이 다윗 언약을 통해 온전히 성취된 바, 신정왕국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그 영광스런 자태를 드러냈음을 확인시킵니다. 이런 사실은 후에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 의해 다시 한번 재확인됩니다. 미가 선지자는 말일(末日)에 대한 그의 예언에서(미4:1) 시온과 예루살렘의 종말론적 회복을 설명하는 가운데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고 기록합니다(4절). 미가는 이런 내용을 통해 솔로몬 치하에서의 왕적 통치의 성격이 바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동일한 표현을 반복해 기록하는 것을 통해 성경 독자들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하에서 정치, 종교, 군사, 경제, 사회 등 제반 분야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와 공법이 하수같이 넘침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현존과 통치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언약(창1:28, 2:16-17)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은 장구한 구속역사의 흐름 속에서 마침내 다윗 언약 안에서 구체적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사 경륜에 있어서 계시의 도구로 사용됐기에 신정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구현시키지 못하고 급기야는 솔로몬 통치 후기에 이르러 시내산 언약을 불순종하는 것으로 인해 남북으로 분열되는 비극을 맛보게 됩니다(왕상11-12장).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은 하나님 나라의 영화와 몰락을 동시에 경험한자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기록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몰락(6절하-11절)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이는 구약역사 속에서 계시된 구속언약의 총 주제인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진행돼 나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진 기록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 첫 시기로서 아브라함 때부터 다윗까지의 이스라엘의 구속역사 진행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흥왕기'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진행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택함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언약의 일차적 목적입니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형성시켜 모세를 지도자로 출애굽 사건을 전개시키는 것으로 인해 가시적 성취를 봅니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동일한 언약진행의 연장선상에서 시내산 언약으로 재 갱신되었고, 나아가 지금 다윗 언약으로 그 절정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 언약은 내용적 성격상 처음부터 이중 구조적으로 형성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그 왕권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에 대한 약속(삼하7:12-13)은 이후 솔로몬 통치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듯 했습니다. 아니 솔로몬 통치 초기역사 속에서 신정왕국으로써 통일 이스라엘은 가장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시행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실현시켰습니다. 제사장 나라로서의 직분과 기능을 한껏 발휘했습니다. 열왕기서 저자는 이스라엘이 당시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사실과(왕상4:21), 대내외적인 평화정착 및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가시적 상징인 성전과 궁궐의 건축, 그리고 특별히 왕상10장에 소개된 스바 여왕의 내방과 그녀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송축 드림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을 통해 제사장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다윗 언약이 솔로몬 치하에서 완전히 실현됐음을 시사하는 것을 통해 신정국가의 모습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있음을 증거 함에 다름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다윗 언약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영화와 권세가 이후 솔로몬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들이 다윗 언약의 실효성을 불신하거나 정당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작용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저자는 이런 사실들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언약의 이중성'이라는 독특한 구조에 기울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언약은 구속사 진행의 도구로 사용되는 바 표면적인 세상역사와 이면적이고 본질적인 구속사적 성격을 동시에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해서 항상 구조적으로 이중성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언약의 이중성을 모형과 실체의 상호관계성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여튼 다윗 언약은 솔로몬 대에 이르러 신정국가로써 하나님 나라 영화의 극치를 한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길지를 못합니다. 통치 후반에 이르러 그는 교만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많은 처첩과 각종 우상숭배를 용납함으로 시내산 언약을 정면으로 위배합니다. 이는 언약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언약적 심판을 내립니다. 여기서 '언약적 심판'이라 함은 아주 멸하는 심판이 아닌 책망과 교훈으로 주시는 징계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심판과 함께 항상 용서와 회복이 더불어 약속돼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의 성격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은혜적 성격을 처음부터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순종에 대한 징계와 심판은 교육적인 효과로 주어지는 바, 회개하고 돌이킬 때는 언제든지 용서를 통해 약속한 내용들을 궁극적으로 성취시키고야 마십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70년 후에 다시 고토(古土)로 귀환하는 은혜를 입게된 배경이 이렇게 언약적 심판의 일환으로 내려진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렇게 통일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범죄로 인해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뉩니다. 왕은 항상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머리로 존재합니다. 특별히 신정왕국을 표상하는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통해 항상 언약의 머리 역할을 감당하는 바, 왕의 불순종과 타락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연결됩니다. 아합왕 시대의 종교적 배경이 이를 전형적(典型的)으로 예시합니다. 따라서 왕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향하신 심판과 동일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왕과 연대해서 공동의 책임을 지게되는 셈이지요.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남북분열은 이렇게 왕을 머리로 해서 전 백성의 총체적인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결과가 빚어낸 비극적 사건인 셈입니다. 이후 분열왕국 시대에 두 나라 사이는 동족관계를 떠나 적대적 관계를 띠고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는 비극적 사태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그러나 남북의 분열로 하나님의 심판이 종식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남북분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깊이 인식하고 회개와 통회 자복으로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통해 불순종의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핍박하고 정죄하며 심판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회개치 않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강도를 더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저들을 심판하시는 일에 이방의 열국을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습니다. 마침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과 솔로몬 치하에서의 다윗 언약의 성취는 한시적인 표면적 언약성취로 일단락 됩니다. 지금 마태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삼등분으로 구분해서 두 번째 시기인 다윗부터 바벨론 이거(移去)까지를 나눈 배경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마태는 구약의 구속사에 아주 정통했습니다. 구약의 제반 언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총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는지에 대해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에 대해 밝히기를 원했습니다. 이후 이런 마태의 구속사적 안목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마1:22)라는 반복적인 표현 속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사실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시된 족보를 통해 밝히는 것을 통해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적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가 이제 다윗 언약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질로 실현된 사실을 강력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 언약의 또 다른 이면(裏面)이 여전히 미래지향적으로 남아 있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 신적 기원과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 인해 결코 중도에서 포기되거나 취소될 수 없음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에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분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를 시사하는 선지자들의 예언에로 독자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분열왕국 시대에 집중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문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들로써 왕에 대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경호원들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자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을 대신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저들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효력과 권위를 발휘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계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과 꿈과 선지자들의 대언을 통해 전달되곤 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다양한 모습과 표현으로 언급되고 있는 소위 메시아에 대한 대망사상의 고취는 이렇게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라는 기대와 소망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언약의 발전과 확장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 언약은 분열 이스라엘의 아픔과 외세에 의한 멸망의 비극적 탄식 속에서 본질적인 성취의 실체를 향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쇠퇴와 몰락은 그 자체 속에 철저한 자기성찰과 진정한 회개를 강력히 유발시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향한 회복과 소망을 지향하게 만듭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진전이 다윗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보증하는 새 언약(렙31:31-34, 겔36:26-27)을 출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12-16절)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는 마태의 구속사적 관점은 하나님 나라의 흥왕과 쇠퇴에 이어 마지막 제 삼기로 접어듭니다.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재건기(再建期)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회복기 말입니다. 마태는 이 시기를 특별히 '바벨론으로 이거(移去)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라고 한정합니다. 그리고 이들 세 시기의 각각의 기간을 열 네 대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중간에 몇몇의 왕들이 임의적으로 생략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8절에서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8:26), 요아스(왕하12;1) 그리고 아마샤(왕하14:1)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습니다. 11절에서는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등 세 사람이 빠졌습니다. 이것도 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생략이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저자는 족보를 기술함에 있어서 의도적이고 목적론적 측면에서 임의로 취사선택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함에 있어서 14대씩으로(제 삼기에서는 13대로 마감처리) 제한시켜서 다분히 의도성을 가지고 기록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는 다름 아닌 마태의 족보는 순전히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실 이렇게 족보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이 빠지기도 하고 몇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흔히 유대인들은 족보에서 중요치 않은 사람들은 기록에서 빠뜨렸으며 또한 기억하기 쉽도록 전체를 몇 부분으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마태의 족보기술의 주된 관심사는 역사적 사실성과 더불어 구속사적 목적성, 다시 말해 구약언약의 최종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시키고자 하는데 집중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기 직전과 직후의 기간에 문서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활발하게 전개시킵니다. 하나님의 전령사들로서 경계와 경고의 말씀을 담대히 운반합니다. 이스라엘의 위선과 거짓과 망령된 행실 등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회개를 촉구합니다. 필연적인 심판의 경고와 함께 회복의 소망의 메시지를 더불어 전합니다. 바로 이런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비록 남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날을 소망하면서 주의 자비로운 손길이 구체적으로 임하기만을 고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렘25:8-14, 29:10, 단9:1-2). 마침내 그 날이 도래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때가 차면 반드시 성취됩니다. 아무도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주권적 손길을 막을 자는 없습니다. 만유 보다 크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할 자는 없습니다. 성도의 소망과 위로가 바로 이런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됩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기에 말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이미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바사국의 고레스 왕을 통해 바벨론 제국을 정복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 유다 자들을 예루살렘 본토로 귀환시킵니다(사44:28, 45:1-4, 에1:1-3). 이렇게 해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및 느혜미야에 의해 세 차례의 유대인 포로귀환이 거족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을 가리켜 일찍이 야곱의 '남은 자'라는 구속사적 용어를 사용해 차별적으로 호칭합니다(사10:20-22, 46:3, 렘23:3).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 건 바로 이들 남은 자들을 선택적으로 은혜 가운데 부르셔서 당신의 구속사의 경륜을 이루시는 일에 언약의 당사자들로 삼으십니다. 이는 교회시대에도 동일한 원리로 작용합니다(롬11:4-5). 하나님의 손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도 당신의 남은 자들을 언약에 근거해서 신실히 보존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시는 가운데 마침내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혈통을 통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섭리적으로 주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이면적이고 본래적인 성취를 보게 됩니다. 새로운 신기원(新紀元)적 계시시대인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 가운데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마태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하고, 예수님에게서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이 최종적으로 성취된 사실을 족보를 통해 의도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배경이 이렇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옛 이스라엘은 회복됐습니다. 다윗 언약에 약속된 진정한 아들로서 다윗 왕의 위(位)는 예수님에게서 마침내 현실로 성취됐습니다. 예수님은 참 다윗 왕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진정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새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저들의 영원하신 구원자로 마침내 성육화(聖肉化)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성육신(聖肉身)사건이라고 부릅니다. 3.맺으면서 성경의 역사는 구속사입니다. 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언약적 구속사입니다.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방식으로 세상의 역사(인류역사)는 기원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역사의 성격을 세상역사와 구속사로 나누어 이중적으로 해석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방식으로 세상역사가 출발했기에 인류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언약적 구속사일 뿐입니다(창3:15-5:1-5, 눅2:1-7). 이런 의미에서 세상역사의 의미는 구속사의 진행과 성취와 종말론적 완성을 위한 현장과 무대의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류의 통치역사가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계21:1, 단2:31-35). 마태는 이런 성경의 전(全)구속사적 안목과 통찰력을 가지고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언약의 총체적 성취로 해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부동의 증거로 예수님의 족보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족보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의 경륜이 역사 속에서 성취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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