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중고청설교

<대강절 제1설교>

기쁨조미료25 2007. 12. 1. 14:54
 
<대강절 제1설교>
오신 예수님을 알고
오실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라!
-눅2:1~7-

오늘부터 대강절이 시작이 됩니다. 대강절이란 성탄절이 있기 전 4주간을 일컫는 절기이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을 지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 오신(초림) 예수님의 그 은혜를 기리는 것이며, 둘째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재림)를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저는 이번 대강절 기간에는 대강절과 관련된 설교들을 시리즈로 해볼까 합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성탄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하고자 하는 것은 요즘 시대의 청소년들에게 있어서의 성탄절은 <빼빼로 데이>나 <발렌타인 데이>만도 못한 시시껄렁한 데이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강절 기간 동안에 성탄절이 우리 청소년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데이 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한 날로 인식되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관계도 가장 복된 관계로 재정립되고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 줍니다. 즉 우리 주님은 사관, 오늘날로 말하면 여관이나 호텔이라고 할 수 있는 숙박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상황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왜 발생한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이 여관도 아니고, 민박집도 아니고 짐승들의 우릿간에서 태어나신 것에 대해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첫째로 살펴볼 요점입니다. 여기서 저는 초림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주로 살펴볼 것입니다. 둘째로 살펴볼 요점은 왜 그토록 많은 방들 중에서 주님이 거하실 방은 한 칸도 없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우리의 준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Ⅰ. 주님의 출생 장소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 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왕궁에서 태어나게 하실 수도 있었고, 부잣집에서 태어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설 좋은 여관에서 태어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태어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짐승들이 겨우 추위를 피하는 우릿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하나님의 큰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 높고 영화로우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장 비천한 자들도 태어나지 않을 마굿간에서 출생을 하심으로써 자신을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높이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이로써 주님이 지극히 겸손하신 분이심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나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자랑하고 뻐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생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막강한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 누구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멸시당하고 천대받는 이들도 주님은 왕자처럼 여기시고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품에 주저 없이 안기십시오. 또한 주를 섬길 때에 겸손함으로 자신이 주님의 사람임을 나타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의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관심은 부자들에게 있습니다. 세상의 관심은 권력자들에게 있습니다. 뉴스를 보십시오. 다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유명인들과 인기 있는 이들에 대한 소식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의 중심은 바로 그들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은 언제나 세상에서 변두리에 있었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으며, 어떤 부속물처럼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입니다.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입니다. 권력자들이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귀는 가난한 자들의 한숨 소리를 듣는 데에 예민합니다. 주님의 귀는 눌린 자들의 신음 소리를 듣는 일에 예민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언제나 주님은 그들의 소리에 항상 진지하게 귀 기울이셨습니다.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데에 당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주님께서 가장 관심을 기울여 보시는 사람들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눌린 자들이여, 그대들은 주님이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면서 돌보고 계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의 위로와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가장 신속하고 풍성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섬기는 이들이여,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약한 자들을 억압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뒤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멸시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셋째, 주님은 누구든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왕궁에서 태어나시고 거기 계시다면 아무나 그를 뵙지는 못할 것입니다. 몇몇 특권층들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나 힘없는 자들은 주님의 그림자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굿간에 계십니다. 즉 누구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에 계신 것입니다. 그 앞에 나아가는 데에 아무 제약이 없으신 분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아무도 막지 않습니다. 소란스럽고 철없는 아이들도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인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금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죄인도 병든 자도 누구도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기꺼이 초대하십니다. 오히려 우선권을 부여하십니다. 또한 주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밤중이나 새벽에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를 때 응답하기 위하여 잠자거나 졸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누구든지 주님을 부르십시오. 주님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언제든지 반갑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넷째,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누구든지 값없이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마굿간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에게 마굿간에서 출산할 수 있도록 허락할 때에 돈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허름한 곳입니다. 주님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주님은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돈을 내야 한다거나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돈을 내거나 어떤 대가를 지불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관심과 돌봄을 받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죄인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대속하시고, 다만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면 값없이 사죄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단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을 믿으면 값없이 구원하시고 영생과 천국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이 공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사55:1-3을 보십시오. 주님은 값없는 구원과 축복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모든 것을 값없이 받아 영원히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Ⅱ.그토록 많은 방들 중에서 왜 주님이 거하실 방이 없었을까?
이렇게 주님은 겸손하신 가난한 자들의 왕으로서, 누구든지 값없이 가까이 하고,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우리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는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이렇게 대접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주님을 홀대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자, 여러분! 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방 한 칸을 내주지 못했을까요?

첫째, 그들의 높아진 마음이 왕 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이 땅에는 그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볼 만큼 겸손한 자가 없었습니다. 왕들도 이미 동방의 박사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나심을 알게 되었지만 주님을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내어놓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겸손하게 오신 우리의 왕 되신 주님을 마굿간으로 내몰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은 주님이 왕 되심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높고 교만한 사람들은 지금도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내어놓지를 않습니다. 자기를 왕처럼 높이는 사람들은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고 자신이 왕 노릇합니다.

아마 우리들 중에는 주님께 순종을 하거나 복종을 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하고,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하며,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뜨거운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지극히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소유한 것을 무엇이든지 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기꺼이 시간을 드리는 일을 잘 하지 못하고, 주님께 몸을 드리거나 마음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일을 잘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한 사람과 같이 마음이 높고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겸손하다면 주님을 왕으로 섬길 것입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은 왕 되신 주님께 자신이 소유한 것을 무엇이든지 내어줄 것입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높고 교만하기 때문에 주님을 즐거이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지금 즐거이 순종하지 못하는 이들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해도 주님을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한 사람들처럼 주님을 제대로 영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교만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지금 지극히 높으신 주님을 기쁘고 즐겁게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지 않는다면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의 교만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을 높이고 순종하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왕 되신 주님을 부인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을 영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낮추어 겸손을 연습하십시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십시오. 즐거이 주님을 순종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리고 겸손을 연습하기 위해 무엇보다 사람 앞에 겸손하십시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람 앞에 마음을 높이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거지나 가난한 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경건하고 거룩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건 진짜 착각입니다. 당신의 겸손은 하나님이나 나보다 높은 사람 앞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약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당신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 앞에서 겸손을 연습하십시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선을 베풀어 겸손을 훈련하십시오. 지극히 비천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의 겸손을 훈련하십시오. 그런 훈련 속에서 왕으로 오실 주님을 진정한 왕으로 맞이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둘째, 부주의 하고 부패한 마음 때문에 주님을 모셔 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곧 해산을 할 임산부를 방에 들이지 아니하고 마굿간에 들여서 거기서 아이를 낳게 했다는 것이 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기에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을 전제로 해서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 때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호적을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때였기 때문에 방이 없어서 그랬을 수 있습니다. 모든 방들이 다 여행객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부득이 마굿간을 빌려 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하려고 해도 100%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집에 임산부가 찾아와서 아이를 낳으려고 하니 방 좀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 줄 방은 없고 화장실이나 다용도실, 창고가 있으니 거기서 애를 낳고 갈 테면 가라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어디 그럴 사람이 있으면 손을 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경은 왜 이런 말 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부주의함과 부패됨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저는 마굿간을 내어 준 여관 주인이 아주 사악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따뜻한 여관방에 자면서 임산부는 마굿간에서 아이를 낳게 한 여관 투숙객들이 파렴치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주의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부주의했습니다. 밀려드는 손님들을 안내하고 그들 시중을 드느라 바쁜 나머지 여관 주인은 마리아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하고 빈 방은 없고 마굿간밖에는 들어갈 데가 없으니 거기라도 좋으면 돈은 안 받을 테니 묵고 가라고 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관 주인이 베풀 수 있는 최선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부주의 했다는 것은 모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도 이런 부주의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습니다. 나 외의 사람들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매우 아프다고 해도 사람이 아픈 것은 늘 있는 일이니까, 내 가족이 아니니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하면서 무관심하게 흘려버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나도 어려우니까, 내가 도와줄 상황이 아니니까, 그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니니까 하면서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주의함과 무관심이 습관화가 되면 우리는 이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살게 되고, 나 외에는 생각지 않는 자기중심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다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갖고 살다보면 주님이 오신다 해도 그 주님을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부주의함이 계속되면 그것이 부패성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패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자신이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그것은 악함입니다. 그 악한 모습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지나친 레위인과 제사장을 보십시오. 그들이 왜 그리 악하게 행동합니까? 평소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봐도 부주의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늘 남의 일이고 그 사람의 일이니 그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결정적인 순간에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피하여 간 것입니다.

저는 이 시대의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깜짝 깜짝 놀랍니다. 북한의 동포들이 굶어 죽든 말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핵무기 만드는 북한 놈들한테 우리가 왜 식량을 지원해야 하느냐? 통일이 되면 그 지지리 가난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통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청소년들을 보면 그들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지극히 부주의하고, 부주의함을 지나서 악함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언젠가 용산역 앞을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데 노숙자들에게 밥을 해다 주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택시 운전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런 놈들은 다 실어다가 무인도에 던져버리든지 쓰레기 소각장에 넣어서 소각을 시켜버려야 해. 저런 놈들한테 밥 해다 주는 저 예수쟁이들 미친 짓하고 있는 거야. 밥을 줄 것들한테 줘야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주의함이나 무자비함은 사악함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주의에 빠지게 되면 곧 무자비하게 되고, 결국은 사악한 악마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살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자가 됩니다. 이런 모습으로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주의함을 두려워합시다. 무자비함을 두려워합시다. 우리가 사악해지는 것을 두려워합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날마다 변화시키고자 몸부림치고, 거룩한 주님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몸부림을 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냥 거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악하게 됩니다. 왜냐 하면 우리 안에는 부패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패성을 근절시키고 죽이는 길은 우리가 늘 깨어있는 것입니다. 깨어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들을 걸러내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시켜 가는 성화의 몸부림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깨어 있음이 없으면 우리도 주님을 마굿간에서 태어나도록 방치한 이들과 같이 다시 오실 주님을 배척함으로 만나지 못하는 불행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강절, 두 가지를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첫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가난한 자들의 왕이 되시기 위해, 누구라도 아무 조건 없이 가까이 나아와 구원받도록 지극히 낮아지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찬양하며, 그를 사랑하고 그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주님을 마굿간으로 밀쳐버린 교만과 부주의함과 부패함을 십자가 앞에 버리고 깨어있음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건하다 하면서도 주님을 마굿간에서 나시게 한 이해 못할 실수를 범하지 아니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