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선교및역사자료]/선교,역사 자료·그림·동영상

이슬람교와 이스라엘의 갈등

기쁨조미료25 2007. 12. 1. 12:10
이슬람교와 이스라엘의 갈등
 

이슬람교와 이스라엘에 대한 비교

이슬람교는, 7세기 초 마호메트가 아라비아반도 메카에서 유일신 알라의 예언자로서 세운 종교이고, 유대교·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일신교(一神敎)이다. 한국에서는 마호메트교·회교(回敎), 중국에서는 청진교(淸眞敎)·후이후이교[回回敎(회회교)]라고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성전(聖典)인 코란에, <나(알라)는 이슬람을 너희를 위한 종교로 승인했다>라고 나와 있다. 원래 아라비아어의 <이슬람>이란 <신의 의지나 명령에 절대귀의·복종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 뒤 이러한 귀의 방법을 제도화한 문화적·사회적 복합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또한 이슬람교도를 나타내는 <무슬림>도 원래는 <귀의한 자>를 의미했다.

이슬람교는 불교·그리스도교에 비길 만한 세계적 종교이다. 성지 메카를 중심으로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등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오늘날 세계 무슬림의 총수는 약 6억 3000만으로 추정된다.

이 이슬람교의 기원과 배경을 살펴보면, 먼저 자힐리야시대, 자힐리야란 이슬람성립 이전의 <무지(無知)>의 시대, 또는 그 시대의 생활양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남아라비아의 여러 왕국과 그 밖에 북아라비아의 나바테아왕국·팔미라왕국의 시대를 포함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슬람성립 전의 1세기 정도를 가리킨다.

이 시대는 아랍부족들 사이의 투쟁시대로서, 자기 부족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부족만이 인간에게 안전을 보장하고 부족만이 모든 것이었다. 이 시대에 후세의 모범이 된 시(詩)가 탄생했으며 시인이 활동했다.

카힌이라고 하는 샤먼이 사람들에게 신탁(神託)을 전하는 한편, 사막에서는 <진(Jinn;靈鬼)>이 사람에게 해를 가한다고 두려워하며, 자연석이나 신의 모습을 새긴 돌을 성석(聖石)과 신상(神像)으로 숭배했다.

그 가운데 신의 저택인 메카의 카바신전의 검은 돌은, 사각형의 칸막이가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으나, 신전(神殿) 안팎에는 많은 신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메카의 쿠라이시족뿐만 아니라, 헤자즈의 전지역에서도 순례자가 찾아왔고, 신성월(神聖月)에는 싸움을 중지하고 이곳을 순례하였다.

이때는 시장(市場)이 서고, 시인들이 모여서 재능을 겨루었다. 신 가운데 특히 알라트·우자·마나트의 세 여신이 유명했으며, 알라도 최고신으로 쿠라이시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당시 아랍의 종교는 다신교(多神敎)였고, 애니미즘적 성격을 강하게 띤 원초적인 것이었다.

아랍에 유대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70년 예루살렘신전이 파괴된 이후이다. 홍해 연안의 통상로(通商路)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유대교도,는 대부분 야스리브(후에 메디나)와 예멘 등에 정착하고 있었다. 북부 변경지방에는 그리스도교의 한 파인 단성론파(單性論派)와 네스토리우스파가 침투하고 있었고, 헤자즈지방이나 남부의 나지란시에는 다수의 그리스도교도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아랍인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다신교나 유대교·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부족의 현세적 번영에 이바지하는 덕(德)과 가치, 즉 <무루아(남자다움)>라는 것이었으며 또한 <다흐르(時)>라고 표현하는 운명관이었다. 당시 메카는 상업도시로 번영하고 있었으나, 그 뒤에는 빈곤과 악폐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에 쿠라이시족의 한사람으로서 마호메트가 태어났다. 전승에 의하면, 남아라비아의 힘야르왕국을 멸망시킨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장군 아브라하가 코끼리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메카를 공격한 <코끼리의 해>, 즉 570년이 마호메트가 태어난 해라고 한다.

마호메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25살 때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하고 안정된 생활 속에서 상업을 하는 한편, 메카의 히라산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을 했다. 610년, 40살 무렵 최초의 계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유일신 알라의 계시인지를 믿을 수 없어 고뇌하지만, 곧 예언자임을 자각하여 설교를 시작했다. 천지의 종말이 임박했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중지하고 알라에게 귀의하여, 다툼과 부정을 그만두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도우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메카사람들은 마호메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와 소수의 신도들을 박해하여, 622년 마호메트는 신도들과 함께 메카를 버리고 포교의 활로를 찾아 야스리브로 옮겨갔다. 이것을 헤지라(Hegira;聖遷)라고 한다.

메디나에서 마호메트는 대다수의 메디나주민과 메카에서 이주한 신도들의 지지를 얻어, 이슬람 신앙을 실천하는 독자적 공동체인 움마를 만들었다. 630년에는 종교지도자·정치가로서 메디나에 살던 유대교도를 몰아내고, 주변의 아랍 여러 부족들을 교화하여 메카를 정복했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을 때에는 아라비아반도의 거의 전지역이 이슬람교로 통일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호메트는 예언자로서 신의 계시를 전하고, 신의 계시를 성전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로서 그 가르침을 공동체 안에 심는 데 성공했다.


이슬람교의 교의와 실천은, 이슬람교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마호메트가 나타나기까지의 전사(前史)로 보고 있으며, 이슬람의 교리 및 실천 속에는 유대교·그리스도교와 공통된 내용이 많다.

교리 및 실천의 기본은 <육신(六信)과 오주(五柱;五行)>로 되어 있다. <육신>은 신·천사·성전·예언자·내세(來世)·예정(豫定) 등 6가지의 신앙개조(信仰箇條)를 말하며, <오주>란 신앙고백·예배·자카트(喜捨)·단식·순례 등 5가지의 주요 의무를 가리킨다.

먼저, 육신(六信) 중 신(알라)는, 코란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너희의 신은 유일하신 신(2:163)>이라고 하는 엄격한 일신교의 원리이다. 알라신은 절대 유일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며,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의 창조자이며 지배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신의 의지와 능력에 의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신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신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42:11)>는 뜻이다.

이것은 신이 동반자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본질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며, 피조물과의 비교를 거부하는 초월신(超越神)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과 피조물과의 격절성(隔絶性)이 강조되는 한편, 신은 또한 <각 사람의 목에 있는 혈관보다 가까이(50:16)>에 있으며, 인간의 말로 자신을 말하고, 인간처럼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노하기도 하고, 다시 생각하기도 하는 인격신이다.

신은 또한 악인을 벌하고, 믿음을 갖고 올바른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선한 보답을 하는 의로운 신이다. 또 한편으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17:25)> 자비의 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신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이 신의 유일성(타우히드)에 대한 문제, 즉 신의 초월성·내재성·인격성을 신의 본질·속성과 관련시켜 어떻게 통일적으로 이해하는가의 문제는 뒤에 신학적 논의의 최대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코란과 하디스(예언자의 언행에 대한 전승)에 있는 신의 의인적(擬人的) 표현을 긍정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입장(하슈위파 등)과, 그러한 표현을 모두 비유라고 해석하고, 피조물과 공통된 속성을 모두 부정하는 입장(무타질라파·철학자 등)을 양극단으로 본다면, 정통파는 의인적으로 표현되는 신의 속성을 긍정하면서 그 신의 속성을 신의 초월성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하려 한다(아슈아리파·마투리디파).

또 육신중 천사(말라크)는, 이슬람교는 천사를 신과 인간의 중간적인 초자연적 존재로 인정하고 있다. 천사들은 신의 명령에 따라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예언자 마호메트에게 신의 계시를 전하고 <성령>으로서 예수를 강화시키는 가브리엘, 나팔을 불어 천지의 종말을 고하는 이스라필, 만물의 질서와 생명을 감시하는 미카엘, 죽음을 관장하는 이스라엘의 네 천사 외에, 하늘의 보좌(寶座) 곁에서 항상 신을 찬송하는 천사, 사람의 선악을 기록하는 천사, 지옥을 지키는 천사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신의 명령을 배반하고 인간을 미혹하게 하는 사탄(또는 이블리스), 진(Jinn)이라 하는 영귀, 진 중에서도 특히 힘이 센 이프리트가 있다.

또 육신중 예언자(나비) 및 성전(聖典;키타브)은,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자신의 지혜나 이성만으로 절대적인 신 앞에서 안전하게 생활하고 또한 내세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의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캄캄한 밤에 홀로 남겨진 것과 같다.

그리하여 신은 인류의 조상 아담을 창조한 이래 계속 예언자들(사도들)을 각 공동체(움마)에 보내어 올바른 신앙과 행위규범을 전했다. 아담을 비롯하여 노아·아브라함·이삭·요셉·모세·다윗·솔로몬·요한·예수 외에, 살리흐·슈아이브 등 28명의 이름이 코란에 올라 있다.

전승에 의하면, 그 총수가 약 12만 4000명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이 예언자들 가운데 마지막 예언자가 마호메트이며, 특히 모세·다윗·예수·마호메트는 신으로부터 각기 천계서(天啓書)로 <율법> <시편> <복음서> 및 <코란>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계시 및 성전 내용은, 보편적 일신교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며, 코란은 앞의 성전들을 확증하고 보정(補正)하는 마지막 성전이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코란 이전의 여러 성전들은 왜곡되어 본래의 계시를 올바로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은 마지막으로 마호메트를 보내, 인간이 지켜야 할 신조(信條)와 법(法)을 완전하게 제시해주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전하도륵 했다는 것이다.

또 육법중 내세(아히라)는, 천지만물은 과거의 어느 순간 신에 의해 창조된 것처럼 영원하지는 않다. 곧 천지만물들은 종말의 때가 온다. 종말은 천변지이(天變地異)로 나타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초기의 계시에는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예언하는 내용이 많다.

모든 것이 멸망한 뒤에, 죽은 자들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 신 앞에서 생전의 신앙과 행위를 심판받는다. 신앙이 깊고 행위가 올바른 사람은 천국에서 평안한 생활을 보내고, 믿지 않고 불의를 행한 자는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이런 것들에 관한 코란의 기술(記述)은 구체적이고 사실적(寫實的)이다.

마지막 육법인 예정(카다르)은, 과거·현재·미래에 인간과 세계에 일어나는 일이나 인간의 모든 행위는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늘에 수호(守護)되어 있는 서판(書板, 56:78)>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코란에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최선의 보답을 주신다(53:31)>는 내용과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리키는 부분도 많다.

이 자유의지와 예정의 문제는 타우히드의 문제와 함께 여러 가지 해석을 낳은 신학적 논의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결국, 인간의 의지적 행위에 대한 신의 관여를 부정하는 자유의지론(카타리파·무타질라파)은 이단시되고, 인간 자신의 의지적 관여를 일체 부정하는 극단적인 예정설(자브리파)은 배격되었으며,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갖는 윤리적 책임과 조화된 형태의 예정설(아슈아리파·마투리디파)이 정통설로 받아들여졌다.


그 밖에, 아래 같은 것들을 정통신조로 인정하고 있다.

① 코란은 신의 말씀이며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② 믿는 자는 내세에 최대 지복(至福)으로서 신을 보게 된다.
③ 죽은 자는 무덤 속에서 문카르와 나키르 두 천사의 심문을 받는다.
④ 죄로 인하여 신앙이 증감(增減)되지 않는다.
⑤ 큰 죄를 범한 자를 위하여 사도들은 신과 인간을 중재할 수 있다.
⑥ 마호메트는 각성(覺醒)한 상태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천상비행(天上飛行)한다.
⑦ 성자(聖者)의 기적은 진실하다.
⑧ 예언자 다음으로 훌륭한 인간은 초대 정통칼리프인 아부 바크르, 2대 우마르, 3대 오트만, 4대 알리의 순이다.
⑨ 이맘(칼리프)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한다.
⑩ 죄인의 뒤를 따라서 예배해도 그 예배는 유효하다.
⑪ 성자가 예언자의 영역에 도달하거나, 인간이 신의 명령이나 금지가 소용없는 영역에 도달하는 경우는 없다.

다음으로 오주중 신앙고백(샤하다)은,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마호메트는 그 사도(예언자)이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앙의 길로 들어갈 때 고백하는 말이며, 예배나 그 밖의 경우에 무슬림이 항상 표명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표현이 코란에는 없지만, 이것은 무슬림이 되는 것과 무슬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명하는 일이다. 즉, 앞부분에서는 일신교의 원리를, 뒷부분에서는 마호메트가 신의 사도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마호메트를 통해 신이 계시한 말씀(코란)을 진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또 오주중 예배(살라트)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신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신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양하는 의례적 행위이다. 1일 5회씩(새벽·정오·오후·저녁·밤) 일정한 시각에 일정한 형식을 따라 행한다. 금요일 정오, 단식 직후의 제사(祭祀), 희생제(犧牲祭),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원제(祈願祭) 등을 지낼 때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본다.

또 오주중 자카트는, 희사(喜捨)나 시혜(施惠)를 뜻한다. 사다카가 자발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것인 데 대해, 자카트는 일정량 이상의 재산에 부과되는 종교세(宗敎稅)·구빈세(救貧稅)라고 할 수 있다. 금전·곡물·가축 등 종류에 따라 과세율이 정해져 있으며 가난한 사람, 나그네, 고아 등 곤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세속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무슬람 여러 나라들은 자카트를 개인의 발의(發意)에 맡기고 있다.

또 오주중 단식(사움)은, 이슬람력의 제 9월, 즉 라마단월에 행하는 단식을 말한다. 단식하는 사람은 새벽부터 해가 지기까지 일체의 음식을 끊고, 근신(謹身)해야 한다. 병이나 여행으로 단식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달에 똑같은 일수(日數) 만큼 단식을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베품으로써 보상(補償)할 수 있다. 단식기간은 인간 최대의 욕망인 식욕을 이기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환기시키는 때라고 한다.

오주중 마지막인 순례(하지)는, 이슬람력 제12월, 즉 두알히자월 7∼10일 사이 메카의 카바신전 및 메카 근교의 성역(聖域)을 순례하는 것을 말한다. 육체적 능력과 재산 능력이 있는 무슬림이 일생에 1번은 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상의 오주를 <이바다트>라고 하며, 이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봉사의무를 말한다. 이에 대해 일상생활의 인간관계, 예를 들어 혼인·상속·계약·매매·재판·형벌·성전(聖戰) 등을 규제하는 인간의 의무관계를 <무아말라트>라고 한다. 이바다트와 무아말라트가 이슬람법(샤리아)의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이슬람법학(피크)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란 이와 같은 생활규범 속에 표시되어 있는 신의 명령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일이다. 이런 뜻에서 이슬람교는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무슬림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일상과 다른 특별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자각적으로 올바르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슬람은 그것을 추상적인 도덕으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생활규범까지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 속에 현세의 복지(福祉)와 내세의 구원이 있다. 왜냐하면, 신이 그 말씀 속에 보여준 명령은 이슬람의 정의를 뜻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신에게 순종하며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슬람의 신앙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적 형태를 취하고, 나아가서 국가적 형태를 취하려고 한다. 이슬람의 이 실천적 성격은, 최초로 그리고 가장 고도로 발달한 학문이 신학이 아니고 법학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하고 알기 쉬우며 명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슬림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즉 <어떠한 행동이 신의 뜻에 적합한가>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규범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제일의 근거인 코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과정에서 코란학과 문법학, 나아가 고시학(古詩學)과 전승학(傳承學)이 생겼고, 이슬람법 해석의 방법론을 밝히는 법리론(法理論) 외에 신학(칼람)이 생겼다.

마호메트 이후의 이슬람교의 역사는, 정통 칼리프시대(632∼661)로 이어진다. 예언자 마호메트는 교우들에게 성전 코란과 공동체 및 무슬림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의 모범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 여러 부족들의 배교(背敎;리다)로 한때 붕괴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칼리프)>로 선발된 공동체의 지도자(이맘) 아부 바크르가 다시 통일했다.

2대 칼리프 우마르는 대정복(大征服)을 시작하여, 이슬람 세계를 아라비아반도의 동·서로 확대시켰다. 이 정복을 수행한 세력은 아랍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이슬람전사단이다.

그 뒤 3대 칼리프 오트만으로부터 4대 알리로 넘어가자 공동체는 다시 내란 위기에 직면했다. 이것은 알리와 옴미아드가(家)의 무아위야와의 지도권 다툼이었으며, 이에 깊이 관련된 파(派)가 하와리지파였다.

그들은 이슬람공동체의 윤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격파이며, 공동체의 급속한 확산에 의한 세속화를 종교적 위기로 보아, 무아위야 및 그와 타협한 알리의 행동을 비난하고, 이 두 파와 싸웠다.

661년 알리가 그들에 의해 암살되자 정통칼리프시대는 끝이 났으며, 이후 90년 간 공동체 지도권은 옴미아드가(옴미아드왕조)가 독점했다. 이러한 기존 이슬람체제(나중에 수니파)에 대하여, 공동체 지도권은 예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알리의 후손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시아파 그룹과 옴미아드왕조 체제를 비(非)이슬람적이라 하여 인정하지 않는 하와리지파는 함께 무력저항을 계속했다.

옴미아드왕조시대(661∼750)는, 반옴미아드왕조 움직임에 대하여 옴미아드왕조는, 신앙은 행위(죄)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무르지아파의 설을 근거로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탄압을 가했다.

이 옴미아드왕조시대에도 이슬람의 정복은 계속되었으나 정복에 의해 즉시 이슬람화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피정복민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이슬람의 <평화>와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옴미아드왕조 말기 이슬람의 지배영역은 서쪽으로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 북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옛 비잔틴제국령 및 에스파냐, 동쪽으로는 사산조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인더스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의 영역확대에도 불구하고 옴미아드왕조시대의 공동체는 평온하지 않았다. 정부의 세속적 성격과 아랍을 중시하는 정책이 비(非)아랍무슬림 및 경건한 신도들의 불만과 반발을 낳았으며, 이것이 시아파·하와리지파 등의 운동과 결부되었다. 또한 아랍의 부족대립이 이것과 얽혀 반정부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750년 옴미아드왕조는 붕괴되고 정권은 아바스왕조로 넘어갔다. 옴미아드왕조의 지도자들은 이슬람공동체를 확대하고, 그 공동체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 유지, 발전시켰지만 공동체를 이슬람적인 성격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무엇이 이슬람적인가에 대한 기준도 세우지 못했다.

아바스왕조시대(750∼1,258)는, 아바스왕조는 국가통일의 원리가 이슬람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때까지 민간 학자들 사이에서 정비되고 있던 이슬람법에서 국가통치의 기초를 구했다. 그리하여 쿠라이시족 출신의 칼리프가 다민족적 공동체를 하나의 법 아래 단일국가로 지배하는 정치형태를 실현했다.

그리고 교역의 발달과 함께 고대오리엔트·헬레니즘·그리스도교 및 인도·이란 문명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이슬람문명을 꽃피웠다. 그러나 1세기 뒤 칼리프의 실권은 약해졌으며, 각지에 독립·반(半)독립 왕조들이 나타났다.

특히 10세기 무렵, 이집트에서는 시아파 내 이스마일파의 파티마왕조가 칼리프를 칭했으며,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시아파 내 카르마트파가 지배했다. 에스파냐에서는 같은 수니파인 후(後)옴미아드왕조가 칼리프를 칭하면서 바그다드의 수니파 칼리프와 대립했다. 또한 10세기 중엽,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시아파 부와이왕조의 아미르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11세기 중엽, 동방에서 일어난 수니파의 셀주크왕조에 의해 칼리프의 권위는 회복되었으나, 실권은 술탄이 장악했다. 이와 같은 이슬람세계의 혼란과 분열을 한층 깊게 한 것은 11세기 말 시작된 십자군의 침공이었으며, 1,258년에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아바스왕조 칼리프가 멸망했다.

몽골군의 살육과 파괴는 이슬람세계에 타격을 주었으며, 아랍적인 고전이슬람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의 역사는 새로운 담당자에 의해 새롭게 전개되었다.

그것이 수피즘과 이슬람세계의 확대이다. 수피즘이란 이슬람신비주의를 뜻한다. 이슬람의 율법주의와 신학적 사변에 의한 신앙의 형식화에 반대하고 행위의 동기, 성전의 내적 의미를 강조하며, 9세기 무렵 발생한 것이다.

수피[神秘家(신비가)]에게 있어 타우히드(신의 유일성)라고 하는 것이, 다만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하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신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인간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일치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명상 속에서 자아의식을 무(無)로 하고, 자기와 신이라고 하는 이원적 대립을 초월한 극한상황에서 자기를 지배하는 신을 실감하는 것(파나)을 뜻한다. 이러한 사람을 성자(聖者;왈리)라고 하며, 수피들은 그 전형을 예언자 마호메트에게서 찾았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 이외의 일체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신에게만 사념(思念)을 집중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이슬람법은 이와 같은 수행을 의무로 규정짓고 있다. 이리하여 고전이슬람이 성법(聖法)의 준수를 통하여 신과 통교하는 공동체적 이슬람인 것에 비해, 수피즘은 각 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직접 신과 통교하는 개인형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수피즘은 소수 엘리트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곧 수행방법이 정비되고, 신플라톤주의와 인도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이론화되었다. 12 ∼13세기 사회적 혼란기에는 디크르(오로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을 신에게 집중시키는 일)에 의한 수행의 간이화와 신과 인간의 중개자인 성자에 대한 신앙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교단(타리카)의 형태로 이슬람세계 전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14세기 이후 소아시아에서 발칸반도로 세력을 확대한 오스만제국은 16세기 술레이만 1세 무렵, 남쪽으로 예멘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주변 아랍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여 통일국가를 만들고, 술탄은 칼리프를 칭하여 수니파 이슬람세계의 수호자로 등장했다.

16세기 초 오스만제국의 술탄 셀림 1세가 시리아를 정복했을 때, 13세기 초기의 수피사상가 이븐 알아라비의 묘를 건립한 것은 이 왕조의 수피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무렵 페르시아에서는 일한국·티무르왕조를 거쳐 이란민족을 통일하고 12이맘(시아파의 한 파)의 사파비왕조가 일어났다.

사파비왕조는 수니파의 오스만제국과 대립하면서 16∼17세기 아바스 1세 무렵 정치적·문화적 융성기를 맞이했다. 수니파 이슬람세계에서 이븐 루슈드 이후 소멸했던 그리스철학의 전통은, 수피즘과 융합한 페르시아의 시아사상 속에서 살아 있었고, 몰라 사드라를 정점으로 하는 사상가들 속에서 새롭게 전개되었다.

인도대륙에 이슬람문화가 발전한 것은 13세기 이후부터이다. 즉, 인더스강 상류의 북서변경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가즈니왕조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고르왕조 이후, 무슬림의 본격적인 인도침입이 개시되었다. 1,206년에는 고르왕조에 이어 델리술탄왕조(노예왕조)가 성립되었지만, 1,526년 무굴제국이 등장하여 무슬림의 전(全)인도적 지배를 확립하고, 이슬람화를 한층 더 진행시켰다.

무굴제국은 16세기 후반 악바르대제 때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했다. 이슬람이 동남아시아·중국·아프리카 등으로 전파되어 간 것도 이 무렵이다. 이로 인해 아랍무슬림이 활동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자 이슬람은 몽골인 정복자들을 개종시켰다. 그리고 터키인·이란인·인도인·말레이인·인도네시아인·중국인·아프리카인 속에서 존경받는 무슬림을 찾아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다.

이 발전과 이슬람화에 활력을 준 것은 수피적 이슬람과 수피교단의 성자 및 상인들이었다. 16 ∼17세기를 정점으로 한 발전의 시기가 지나고 이슬람세계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수피들은 체험을 중요시한 나머지 지식을 경시했으며, 이성(理性)에 의한 규제를 떠난 수피즘은 주술화되었다. <신에게로의 귀의(타와쿨)>가 적극적인 활동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무위(無爲)·무활동·현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해되었고, 무기력과 침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슬람교의 현상과 동향은, 침체된 이슬람공동체의 자세에 비판을 가하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18세기에 나타났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인도의 샤 왈리 알라와 아라비아반도의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이다.

샤 왈리 알라는 영국이 인도로 진출할 무렵,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의 각성에 자극을 받아 내부개혁을 통해 쇠퇴하는 무굴제국의 부흥을 도모했다. 이것은 중세적 이슬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나(예언자가 보여준 範例)와 수피즘을 순수한 형태로 결합한 이슬람이었으며, 그의 개혁사상은 후세에 전해져 정치적 운동으로 조직화되었다.

이에 대해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는, 이슬람공동체의 쇠퇴와 타락은 수피즘적 협잡물이 부가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여 그것을 제거하고, 코란과 수나의 순수한 원시이슬람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네지드에 있는 사우드 가문의 이븐 사우드와 동맹하여 그 주장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했으며 이로 인해 네지드지방을 지배하던 오스만제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랍의 투르크인 정부에 대한 반항은 중세이슬람의 근대이슬람으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와하브파의 운동은 오스만제국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운동 자체는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성립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와하브파가 가지고 있는 우상파괴적 개혁사상은 무슬림 속에 잠자고 있던 공동체의식을 불러일으켜 공동체현상에 눈을 돌리게 했다. 19세기 후반 이슬람공동체 전체가 서양의 침략 위기에 놓이게 되자 자말 웃딘 아프가니는 다음과 같은 것을 역설했다. ① 세계의 무슬림이 단결해서 <이슬람의 땅>을 방위해야 한다. ② 이슬람 땅을 방위하기 위해서는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자신을 강화하고 전통적 이슬람의 악폐를 고쳐야 한다. ③ 이렇게 해서 지난날의 통일적 이슬람국가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④ 이슬람은 근대문명과 모순되는 종교가 아니라 이성적 종교이다.

자말 웃딘 아프가니가 역설한 이 범이슬람주의의 꿈은, 제1차 세계대전 뒤 1,924년, 터키인 케말 파샤가 일으킨 혁명에 의해 칼리프제도가 폐지되면서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자말 웃딘 아프가니의 개혁사상은 내셔널리즘과 작용하여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 호교(護敎), 근대주의적 이슬람해석과 함께 그 뒤의 근대이슬람사상 및 개혁사상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이집트에서 그의 제자 무하마드압두는 전통적인 아즈하르대학을 개혁하고 이슬람법을 재해석하여, 자말 웃딘 아프가니의 사상을 살리려고 했다.

한편, 이와 같은 근대주의적 이슬람에 불만을 품은 민중은, 전통적인 울라마(學者)가 아니라, 원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는 무슬림 동포단(同胞團) 등의 행동주의를 지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이슬람공동체는 민족국가로 분열되어 각기 정치적 독립을 달성했는데,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이슬람의 모습은 다르다.

그 예로는 정교분리(政敎分離)와 세속화를 단행한 터키, <이슬람공화국>을 이슬람의 근대적 이념의 국가형태로 보는 파키스탄, 전통적 형태를 유지하는 왕제(王制)의 사우디아라비아, 1,979년 팔레비왕조를 넘어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이란의 이슬람공화국과 리비아를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이슬람공동체가 있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974년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한 뒤 국가적 차원에서의 이슬람을 부정하고 압도적 다수인 힌두교도와의 공존을 목표로 한 인도무슬림이다.

이슬람교도의 생활 및 풍습 중 식생활은, 무슬림의 식생활에는 종교상의 여러 가지 규제가 있다. 그 예로 술과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것이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금지들은 모두 코란의 규정에 따른 것이다(5:90∼91, 2:172∼173 등). 이 밖에도 무슬림은 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일정한 예법에 따라서 도살한 동물 이외의 고기를 먹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법적·역사적·위생학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여성은, 여성이 베일이나 차도르로 얼굴·몸을 가리는 풍습이나, 하렘(이슬람교의 처첩들이 거처하는 방)에 여성을 격리하는 것이 무슬림사회의 특징으로 전해져 왔다. 그것은 여성(및 남성)이 타인에게 자기의 몸을 내보이는 것을 금한 코란의 가르침(33:59 등)을 따르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남녀의 접촉과 신체의 노출로 인해 일어날지도 모르는 죄를 방지한다는 생각과 남성은 바깥일을 하고 여성은 집안일과 아이들을 양육한다는 분업관이 있다. 이 풍습은 여성해방운동과 더불어 변해 가고 있지만, 표면적으로 무슬림사회가 남성위주의 사회라는 것은 아직 변함이 없다.

혼인은, 이슬람교에서 혼인은 일종의 계약이다. 미리 대리인 사이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지불할 마흐르(혼인자금)의 액수와 지불방법 및 그밖의 조건을 결정한 뒤 이루어진다. 이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4명의 아내>는 고아의 구제에 관련된 계시(4:3)에 근거를 둔 것이며, 그 계시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상한이 4명이라고 해석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만일 아내를 공평하게 다룰 수 없음을 염려한다면 1명만을>이라는 조건을 제시한 코란구절을 엄격히 해석하여, 사실상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법제화하고 있는 나라가 많다. 이혼의 경우, 지금까지는 남성측의 일방적인 선언(타라크)이 일반적이었으나 최근에는 여성측의 입장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개혁되고 있다.

유산상속은, 코란(4:7∼12, 176)과 하디스에 기초하여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고아와 과부에게도 재산권을 인정하고, 여성에게는 남자의 1/2의 상속권을 인정하며 재산의 1/3을 유언에 의해 처분할 수 있는 것 외에, 상속받을 사람을 죽인 자나 이교도는 상속에서 제외하는 것 등이 특징이다. 오늘날까지는 상속에 의한 재산의 분할을 방지하기 위하여 와크프[慈善財産(자선재산)]로 희사하고 그 사용권한을 가족 전체가 인계받는 방법을 취해왔다.

도박이나 이자는, 내기를 하는 일이나 점을 치는 일은 코란이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2:219, 5:90). 또한 이자에 관해서도 금지하고 있다(2:275∼276). 옛날에는 매매나 그 밖의 형식으로 사실상 이자를 취하는 형태가 있었으나, 최근에는 예금자가 공동경영자로서 이익을 배당받는 <이슬람은행>의 형태가 모색되고 있다.

할례(割禮)는, 남녀 성기(性器)의 일부를 제거하는 할례는 옛날부터 널리 있어 온 관습이다. 오늘날에는 무슬림뿐만 아니라 유대교도나 그밖의 세계 여러 민속에서도 볼 수 있다. 유대교에서 할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을 상징하는 표(票)로서 중요시된다. 이슬람교의 성전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이슬람교도는 다만 아브라함할례의 전승을 따르는 것이다. 법적인 의무는 아니지만 무슬림의 상징으로서 7∼12살 무렵에 할례를 하며, 가족들은 성대하게 축하한다.

달력이나 제례·행사는, 이슬람교는 헤지라력이라고하는 독자적인 달력을 사용한다. 헤지라력은 완전한 음력이기 때문에 1년이 354일이다. 헤지라력에 의하여 산정(算定)되는 라마단월(제9월)의 단식이나 두알히자월(제12월)의 메카순례 및 그 밖의 행사는 태양력에 기초한 달력과 날짜가 조금씩 다르다. 이슬람교의 공식적인 축제로는 순례월(巡禮月)의 <희생제>와 <단식이 끝난 직후의 제사>가 있다. 이 축제는 모두 코란과 수나를 근거로 정해진 것이다. 이 밖에 예언자 마호메트와 성자들의 성탄제가 있다. 한편 시아파에는 무하라월(제1월) 10일(아슈라)에 거행하는 이맘 후세인의 수난제(受難祭)와, 같은 달 18일 가딜혼무(메카와 메디나의 중간에 있는 혼무연못)에서 이맘 알리의 이맘 지명(指名)을 기념하는 제전 등이 있다.

종교지도자는, 수니파 이슬람교에는 신과 인간을 중개하여 인간의 구원에 관여하는 성직자제도가 없다. 성직자에 해당하는 울라마가 있으나, 울라마는 의무규범(聖法)이나 교리에 관한 전문학자일 뿐 신과의 관계에서는 일반신도와 같다. 그러나 시아파에서는 이맘이 중개자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9세기 말 이맘이 최종적으로 몸을 숨기고 <숨은 이맘>, 즉 가이바 상태에 들어가자, 울라마는 그 대리로서 한층 정신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울라마들 사이에 아야툴라오즈마·아야툴라 등과 같은 위계적 서열이 뚜렷해지고 있다.

한국의 이슬람교는, 최초의 한국이슬람교도들은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 강제이주된 한국인들 중 극소수가 그곳에 정착한 무슬림과 접촉하면서 생겨났다. 광복 후 이들이 귀국하여 국내에 이슬람을 정착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본격적인 포교는 6·25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터키군에 의해 시작되었다. 1,955년 9월 한국이슬람협회를 창립했으며 최초의 이맘을 선출했다. 1,956년 <청진학원(淸眞學院)>을 개설하여 교육사업을 실시했고, 1,961년에는 문교부에 <한국이슬람교협회>라는 사회단체로 등록했으며, 1,965년 격월간지 《이슬람의 소리》를 창간하여 세계 267개 무슬림단체에 무료로 배포함으로써 한국이슬람의 국제적 활동의 기초를 마련했다. 1,966년 군소교단을 통합한 <범협의위원회>를 해체하고 새로이 <한국이슬람교중앙연합회>를 발족했으며, 1,967년 <재단법인 한국이슬람교>로 법인등록하고, 1,970년 서울특별시 용산구(龍山區) 한남동(漢南洞)에 이슬람성원인 모스크를 건립함으로써 한국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수 종교가 공존하고 있고, 같은 유일신앙인 기독교의 확산과 이슬람의 종교적 특성 때문에, 독자적인 한국이슬람교의 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스람교의 연표를 살펴보면,

AD 570 경 마호메트, 메카에서 출생
610 마호메트에게 최초의 계시 내림
614 마호메트, 메카에서 이슬람포교 시작
622 마호메트와 그 신도들, 메디나로 이주(헤지라).
움마(이슬람공동체) 성립
624 바드르의 싸움. 이슬람군, 메카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
625 우흐드의 싸움. 이슬람군 불리해짐
627 한다크의 싸움. 메카군, 메디나포위 실패
630 마호메트, 메카 정복
632 마호메트 사망. 아부 바크르, 초대 칼리프가

634 아부 바크르 사망. 우마르, 2대 칼리프가 됨.
본격적인 아랍군의 대정복 시작
636 야르무크의 싸움. 시리아 정복
642 네하반드의 싸움에서 페르시아군을 패배시킴.
이란 정복. 이집트 정복.
644 우마르 사망. 오트만, 3대 칼리프가 됨
656 오트만 암살. 알리, 4대 칼리프가 됨. 라크다
의 싸움. 제 1 차 내란 시작
657 시핀의 싸움. 하와리지파 형성
661 알리 암살. 무아위야, 칼리프가 됨. 옴미아
왕조 성립
680 무아위야 사망. 아들 야지드, 칼리프가 됨. 알리
의 아들 후세인 암살(카르발라사건)
684 이본 주바이르, 메카에서 칼리프라 칭하고 자
립. 제 2 차내란 시작
705 중앙아시아 정복 시작
711 이베리아반도 정복 시작(~714)
732 이슬람군, 투르푸아티에 싸움에서 프랑크군에게
패배
750 옴미아드왕조 멸망. 아바스왕조 성립
751 탈라스강 싸움에서 당(唐)나라 군대 격파 및 중앙
아시아 제압
756 이베리아반도에 후(後)옴미아드왕조 성립
767 법학자 아부 하니파 사망
786 하룬 알라시드의 치세 시작
789 모로코에 이드리스왕조 성립
795 법학자 말리크 빈 아나스 사망
800 튀니지에 아글라브왕조 성립
801 타히르왕조 성립. 법학자 샤피 사망.
827 칼리프 마문, 이단심문(異端審問) 시작
836 아바스왕조, 사마라로 수도를 옮김
855 전승학자·법학자 아마드 빈 한발 사망
867 이란에 사파르왕조 성립
868 이집트에 툴룬왕조 성립
874 이란에 사만왕조 성립. 시아 12이맘파 제 2 대
이맘 무하마드가 몸을 숨김
892 아바스왕조,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김
903 시아파의 카르마트파 반란
909 아글라브왕조 멸망. 북아프리카에 시아파의
파티마왕조 성립
932 이란에 시아파의 부와이왕조 성립
934 부와이왕조, 바그다드 입성
935 신학자 아슈아리 사망
969 파티마왕조, 이집트 정복
1037 철학자·의학자 이븐 시나 사망
1038 셀주크왕조 성립
1055 셀주크왕조 바그다드 입성, 부와이왕조
멸망시킴
1056 모로코에 무라비트왕조 성립
1099 제 1 회십자군, 예루살렘 공략
1111 신학자·신비사상가 가잘리 사망
1130 북아프리카에 무와히드왕조 성립
1169 살라딘, 파티마왕조를 넘어뜨리고 아이유브
왕조를 일으킴
1198 철학자 이븐 루슈드 사망
1240 신비사상가 이븐 알아라비 사망
1250 아이유브왕조 멸망. 맘루크왕조 성립
1258 몽골군, 바그다드 공략. 아바스왕조 멸망.
일한국 성립
1292 일한국, 이슬람교를 국교로 인정
1299 오스만왕조 성립
1370 티무르왕조 성립
1453 오스만제국, 콘스탄티노플 공략. 비잔틴제국
멸망
1501 이란에서 시아파 사파비왕조 성립,
12이맘파를 국교로 인정
1517 오스만제국, 이집트·시리아 병합. 맘루크왕조
멸망
1526 인도에 무굴왕조 성립
1583 동남아시아에 이슬람교 전파
1683 오스만제국, 빈 포위전(包圍戰) 실패
1736 이란에 아프샤르왕조 성립
1739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 아라비아에서
와하브파 운동을 일으킴
1779 이란에 카자르왕조 성립
1805 이집트에 메메트 알리왕조 성립
1848 이란에서 바브 반란. 바하이교 성립
1881 이집트에서 아라비 파샤 혁명 실패.
수단에서 마하디 반란
1923 터키공화국 성립
1924 터키공화국, 칼리프제도 폐지
1925 이란에 팔레비왕조 성립
1932 와하브파, 사우디아라비아왕국 성립
1947 인도와 파키스탄 분리, 독립
1952 이집트에서 자유장교단(自由將校團)혁명,
왕제가 끝남
1979 이란에서 이슬람혁명 발생

이상으로 이슬람교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이 이슬람교와 갈등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이스라엘국(Medinat Yisra'el)이고, 면적은 2만 770㎢ 이다. 인구는 617만 6533명(2003 년)이고, 북쪽은 레바논, 동쪽은 시리아·요르단·팔레스타인, 남서쪽은 이집트·팔레스타인과 접해 있다.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이스라엘의 자연·지지(地誌)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지형은 북쪽 레바논에서 남쪽 네게브사막에까지 이어지는 중앙구릉지대, 요르단강 서안의 평야, 구릉지대와 지중해 사이에 낀 해안평야, 남부의 네게브사막 4부분으로 구분된다.

① 중앙구릉지대 북부의 갈릴리지방은 지중해성 기후대에 속하며 토양이 비옥하여 올리브와 담배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아랍계 주민들이 이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나사렛이 중심도시이다. 요르단강 유역에서 북서쪽으로 흘러 지중해연안의 하이파 북방에 이르는 에메크협곡이 이 중앙구릉지대를 남북으로 분단한다. 이 지방은 고온다습하여 말라리아의 위험이 있는 습지대였으나 지금은 곡창지대로 바뀌었다. 에메크협곡 남부의 구릉지대는 고대유대와 이스라엘왕국의 중심지였으며 주요 도시는 예루살렘·람라 등이다.

② 요르단강 서안은 평야지대이다. 시리아와 레바논국경의 헤르몬산에서 발원하는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영내를 117㎞ 흐른 뒤 요르단 영내를 139㎞ 가로질러서 사해(死海)로 유입되기 때문에 수리권을 둘러싸고 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이 대립하고 있다. 이 평야의 북부는 농업지대이며, 이스라엘의 주요 수원인 갈릴리호수가 있는데, 수면이 해면보다 약 212m 낮다. 남부로 가면 땅은 거의 불모지이고 남단에는 수면이 해면보다 392m 낮은 염호인 사해가 있다. 사해에서는 소금·칼륨·브롬 등을 채취한다. 이 지역과 중앙구릉지대의 남부는 요르단강 서안지구로서, 제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정부는 이 지방을 유대사마리아라고 한다.

③ 지중해 연안의 평야부는 이스라엘의 심장부이다. 중요 항구인 하이파, 최대도시 텔아비브를 포함하며, 전국의 인구 60% 이상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공업지역이며 동시에 과수재배의 중심지이다.

④ 남부는 국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네게브사막이다. 연강수량은 북단에서 200㎜, 남단에 일라트에서는 25㎜이다. 이스라엘정부는 북부에서 물을 끌어들여 네게브사막을 개발하고 있다. 중심도시는 베에르셰바·디모나이며 디모나 교외에는 원자로를 포함한 핵관련시설이 있다. 항만도시 에일라트는 아카바만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로서 군사적·경제적·심리적 요지인데, 이란혁명 이전에는 이곳을 통해 이란원유를 수입했다. 그리고 파이프라인으로 하이파항에 보낸 다음 루마니아 등 동유럽 여러 나라로 재수출했다. 이집트의 아카바만 봉쇄령은 제3차 중동전쟁의 직접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은, 유대인의 조상 이스라엘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것은 BC 20세기 무렵이다. BC 11세기에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했으나, BC 10세기 전반에 이스라엘왕국과 유대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 두 나라가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각각 멸망된 뒤, BC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보호하에 유대왕국이 다시 수립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저항했기 때문에 탄압받고 AD 70년 유대인의 세계유랑이 시작되었다.

특히 유럽의 유대인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다. 19세기 후반에는 기독교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동화를 용인하지도 않았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라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배경은 19세기 유럽에서의 각 민족이 고유한 국가를 희구한 민족주의이다.

유대인이 건국을 희망한 땅은 당시 오스만제국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시온산은 그들 국가건설의 상징이었으므로 시온산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하고, 그 추진자를 <시오니스트>라고 했다. 유럽에서 유대인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시오니즘의 지지층은 확대되었고, 주로 동유럽에서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무인지대가 아니고, 팔레스타인인(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 등 아랍인)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그들의 반발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영국은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만제국 내의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원하고, 전후 아랍국가의 독립을 약속했다. 그리고 아랍측은 이 국가 가운데 팔레스타인도 포함시켜 수락하였다.

한편 영국은 시오니스트들에게 전쟁협력을 요구하고, 1,917년 밸푸어선언을 발표하고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 수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팔레스타인을 직접 지배했다.

1,930년대 나치스가 유럽에서 세력을 확대하자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이 증가했다. 특히 독일계 유대인은 자본과 기술을 팔레스타인에 가지고 왔기 때문에 유대인사회가 크게 성장했다. 이와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의 반발 또한 고조되었고 쌍방의 알력은 무력충돌로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나치스의 유대인대학살은 시오니스트들로 하여금 그들의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또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동정이 고조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에서는 무력충돌이 격해졌고, 영국에 대한 테러가 빈발했다.

이에 영국은 팔레스타인문제를 국제연합(UN)에 맡겼으며, 국제연합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지구와 유대지구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시오니스트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1,948년 유대국가 이스라엘의 성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랍측은 분할안을 거부하고 주변의 아랍 여러 국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입하여, 제1차 중동전쟁(1,948 ∼1,949년)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아랍 각국 군을 격파하고 분할안에 정해진 것 이상의 땅을 확보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지배지역에서 쫓겨났다. 반대로 아랍 여러 나라에서는 반유대감정이 격화하였고, 많은 유대인이 이주를 강요당했다. 이스라엘정부는 모든 유대인에게 이스라엘 이민권과 시민권을 획득할 권리를 부여하는 <귀환법>을 제정하고, 아랍 여러 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유대인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는 급증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시오니스트의 국가가 성립, 발전했다.

한편 아랍세계는 팔레스타인인의 권리회복을 요구하여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특히 1,967년의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압승하였다. 시리아에서는 골란고원을, 요르단에서는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이집트로부터는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빼앗았다.

그러나 1,973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이집트의 기습을 받고 큰 손해를 입었다. 또한 아랍산유국들온 미국의 이스라엘 긴급군사원조에 반발하여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수출을 금지시키고, 비우호국에 대한 수출량을 삭감하는 일련의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아랍원유에 의존도가 높았던 서방측 공업국들을 놀라게 했으나, 이스라엘이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랍측이 첫번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군의 연승 신화를 깼으며, 석유수출금지로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투가 수습되자 미국 닉슨행정부의 키신저 국무장관은 <스텝 바이 스텝> 방식의 평화에 대한 노력을 시도했다. 그리고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에서 아랍병력과 이스라엘 병력을 격리시키기 위한 <왕복외교>를 폈다. 키신저 외교의 뒤를 이은 것이 1,977년 등장한 카터행정부의 포괄적인 평화안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베긴내각이 강경책을 썼기 때문에 교섭은 난항을 거듭했다.

이 평화외교가 정체상태에 있는 가운데 1,977년 이집트의 사다트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이어 1,978년 9월에는 이스라엘·이집트·미국의 3국수뇌회담이 합의에 도달했다. 이것이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서 2부분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이스라엘·이집트 사이의 평화조약, 대사 교환, 시나이반도 반환 등이다.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위한 교섭 규정이다.

이 합의로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아랍국가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1,981년 사다트대통령이 암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1,982년 4월 시나이반도를 반환했다.

이스라엘의 정치는, 정체(政體)는 민주공화제이며 성문헌법은 없다. 귀환법·국적법·대통령법·재판관법·선거법 등 12종의 기본법이 헌법적 역할을 하고 있다. 크네세트라고 하는 정원 120명의 의회가 최고통치기관이다. 의원은 18세 이상의 선거권자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대해서 투표하게 되며, 득표율에 비례하여 의석을 분배하는 완전비례대표제이다. 이 제도하에서는 사표(死票)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정당이 난립하고 있다. 단독으로 크네세트의 과반수를 누린 정당은 없고 항상 연립내각이 정권을 담당한다.

1,949년 제1차 크네세트에서 1,977년까지는 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가 조직되었고, 그 이후에는 베긴수상이 이끄는 리쿠드당을 중심으로 내각이 조직되었다. 1,988년 11월 총선에서는 리쿠드당과 노동당이 모두 과반수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Y. 샤미르를 총리, S. 페레스를 부총리에 기용했다.

샤미르총리는 1,989년 팔레스타인인에게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하는 한편 이스라엘점령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자체선거를 실시하는 샤미르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해 3월 연립내각은 붕괴되었다.

이후 6월 리쿠드당을 중심으로 초강경 극우 정권이 탄생했다. 한편 1,989년부터 구소련으로부터 유대인의 이민이 급증, 1,990 ~ 1,993년까지 약 45만 명이 들어왔다. 1,991년 10월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에 참석하였다. 요르단강 서안 등의 점령지에 이주를 추진하던 중, 1,992년 총선거에서 승리한 노동당정권이 이를 재고하기로 하였다. 1,993년 9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점령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에서 팔레스타인 잠정자치를 실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10월 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무부장관, PLO의장 Y. 아라파트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5년 11월 라빈 총리가 유대인 과격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1,996년 5월 우파인 리푸드당의 B. 네타냐후 당수가 총리에 선출되었다. 8월 이주지 확대를 승인, 그 뒤 팔레스타인 주민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1,997년 헤브론 철수에 합의하였다.

교착상태에 있던 중동평화회담은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1,998년 10월 백악관에서 네타냐후와 아라파트가 영토-평화교환협정에 조인하게 되었다. 평화협정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 13.1%에서 추가철군하며, 팔레스타인 정치범 수백명을 단계적으로 석방하는 한편, 팔레스타인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지원 아래 요르단강 서안에서 테러대책을 강화하고 PLO창설헌장의 이스라엘 적대조항폐지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2,003년 1월 조기총선에서 샤론의 리쿠드당이 압승했으며, 2월에 샤론 총리를 중심으로 리쿠드당 38석, 극우파인 국민종교당 6석, 중도파인 시누이당 15석의 새로운 연정이 탄생했다. 그 뒤 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은 샤론 총리의 강경정책으로 표류를 거듭하다가, 그 해 5월 미국·러시아·유럽연합·유엔이 공동으로 유혈사태 종식을 위한 중동평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로드맵은 2,005년까지 3단계로 나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이 단계적으로 2차례의 정상회담을 거쳐 2,003년 5월 이·팔 당국이 모두 수용했다. 그 뒤 6월에는 미국의 G.W. 부시 대통령과 이·팔 지도자간 정상회담이 열려 폭력종식과 팔레스타인 독립국 추진에 합의했다.

6월에는 팔레스타인의 3대 무장단체가 한시적 휴전을 선언했으나, 이스라엘의 보안장벽 건설 강행과 팔레스타인의 자살공격이 이어지면서 로드맵은 좌초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 로드맵은 중동분쟁의 주요 중재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어서 앞으로 협상의 근간이 될 전망이다.

이스라엘의 외교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사는 미국은 최대 동맹국으로 전통적으로 대미의존정책을 추구해왔다. 이스라엘이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중동국가는 이집트·요르단·모로코지만 중동평화협상의 진전에 따라 대아랍권 외교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는 오슬로협정 이후 평화과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착촌건설 강행과 요르단강 서안 군대철수문제를 둘러싸고 양측간 폭탄테러와 보복시위가 번갈아 전개되면서 갈등을 빚었으나, 1,998년 10월 23일 역사적인 <영토·평화교환협정>에 조인했다.

1,967년 3차중동전 때 단교한 러시아와는 1,991년 10월 복교했다. 1,992년 중국·인도, 1,993년 베트남과 각각 수교했다. 바티칸과는 가톨릭 - 유대교 두 종교간의 오랜 반목으로 미수교상태로 있다가 1,994년 6월 수교에 합의했다.

2,003년 6월 G.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 총리, 팔레스타인 수반과의 3자회담에서 폭력종식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추진 등에 합의하고 중동평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해 9월에 이스라엘 내각은 잇따라 발생한 대이스라엘 폭탄테러에 대응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축출키로 결정함에 따라 로드맵은 좌초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이스라엘은 아랍 여러 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약 2만 명의 직업군인과 병역기간 중의 병사, 그리고 예비역 등으로 편성된다. 국민개병제로 18세가 되면 남자는 3년, 여자는 1년 9개월의 병역의무를 진다. 병역기간이 끝나면 예비역에 편입되고 남자는 54세까지, 여자는 24세까지 해마다 1개월씩 훈련을 받는다. 정규군은 16만 1500명(2002)이다. 그러나 예비역을 소집하면 짧은 기간 안에 43만을 동원할 수 있다. 100여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1,998년 5월말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탄두운반수단으로는 예리코Ⅰ, Ⅱ와 랜스 지대지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육군은 12만 명으로 3개 기갑사단, 4개 기계화보병여단, 3개 포병대대로 구성되며 3895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 해군은 6500명, 3척의 잠수함, 55척의 초계·연안전투함을 보유하며, 공군은 3만 5000명, 전투기 478대, AH-64아파치를 포함한 무장헬기 93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장비·훈련·사기·실전경험 등에서 중동 최강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정보기관 모사드는 아랍 여러 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처에서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산업·경제는, 시오니스트들은 고도의 기술을 활용하여 팔레스타인의 농업을 발전시켰다. 감귤류 등의 수출은 연간 3억 달러를 초과하며 그 가운데 약 75%가 유럽으로 수출되는데, 최대의 시장은 영국이다. 1,950년 외자도입촉진법을 제정한 뒤에는 미국계 기업을 비롯한 외국기업이 진출했다. 시멘트·광학유리 등의 산업이 발달했으며, 다이아몬드 연마산업의 규모는 이 부분에서 전통을 자랑하는 네덜란드·벨기에를 능가한다. 무기의 국산화를 추진하여 성공한 메르카바전차·가브리엘미사일·전투기 등이 유명하며 병기개발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수출을 장려한다. 노동자는 30만에 달하며, 수출 291억 8200만 달러, 수입 351억 6800만 달러(2002)이다. 농업과 공업 이외의 재원으로는 관광수입, 해외 유대인으로부터의 송금, 미국의 원조가 있다. 미국은 1975~1980년에 130억 달러를 원조했고, 연간 30억 달러(1994년 군사 18억 달러, 경제 12억 달러)를 무상으로 원조한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연간 1만 9500달러(2002)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제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그 하나가 이스라엘의 지역적 고립 때문이다. 즉 수출입상대국을 먼 곳에서 구하는 무역형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아랍 여러 나라가 이스라엘과 거래하는 회사와는 관계를 단절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주저하는 기업들도 많다. 그러나 이스라엘경제에 가장 큰 부담을 주는 것은 연간 90억 달러(2001)에 이르는 군사비 지출이다. 이 군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국민들은 세계 최고의 세금을 부담한다. 또한 미국 원조의 대부분은 무기 원조이다.

이스라엘의 사회·문화는, 건국 당시에는 유럽계 유대인 아슈케나짐이 다수였으나, 뒤에 중동의 유대인 세파르딤이 들어와 지금은 양쪽 모두 수적으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이스라엘 상류계층의 대부분이 아슈케나짐이기 때문에 세파르딤 사이에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 이스라엘 총인구 가운데 약 81.6%가 유대인이고, 나머지는 아랍인이다. 그러나 아랍인의 인구증가율은 유대인의 3배에 가까우며, 해마다 1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빠져 나간다. 이와 같은 인구구성의 변화는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의 성격을 위협하고 있다. 공용어는 헤브라이어와 아랍어이다. 5 ∼16세까지는 의무교육기간이며,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학과 하이파의 공과대학 등 7개 대학이 있다. 종교는 유대교가 주류를 이루며, 아랍인들 사이에는 이슬람교·그리스도교·드루즈교 등이 있다. 지중해연안 하이파에는 바하이교단 본부가 있다.

이스라엘과 한국과의 관계는, 1,962년 4월 수교에 합의하고 1,964년 8월 이스라엘의 주한 상주대사관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1,978년 4월부터 대사관이 폐쇄되어 주일 이스라엘대사가 겸임하다가, 1,992년 1월 주한이스라엘 대사관이 다시 개설되었다. 한국은 1,993년 12월 주이스라엘 한국대사관을 개설했다.

2,002년 대한수입액 5억 123만 달러, 대한수출액 3억 2,207만 달러이다. 2003년 교민수 28명, 체류자수 556명이다. 한국 단독수교국으로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다.

연표

BC 18~17세기경 족장(아브라함·이삭·야곱)시대
13 세기경 이집트가 지배. 모세의 인도로
노예생활하던 이집트로부터 탈출
11 세기경 고대 이스라엘의 히브리인 가나안
정착 이스라엘왕국 건설
1040 경 군주제 성립 초대왕 사울
1000 경 다윗왕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함
960 경 솔로몬 예루살렘에 제1성전 세움
928 경 이스라엘 유다 왕국·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
722 경 아시리아왕 사르곤 2세에게 이스라엘
왕국 멸망
586 유다 왕국 바빌로니아왕 느부갓네살에게
멸망. 예루살렘과 제1성전 파괴됨. 유대인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감(바빌론유수)
538~515경 스룹바벨의 인도로 바빌로니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제1차 귀환. 제2성전 재건
458 에스라의 인도로 제2차 귀환. 많은 유대
인들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330 유다 왕국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에게
다시 정복당함. 그리스가 지배
160 경 안티오코스 4세의 유대인 탄압에 대한
유다 마카베오 혁명으로 유대인 자율성
다시 회복
129 하스몬 왕조 때 유대인 독립
63 로마 예루살렘·시리아 점령. 유대인
로마의 지배 아래 놓임
37 헤롯왕 지배
BC 20 헤롯왕 성전 건축
AD 70 예루살렘 멸망과 제2성전 파괴됨. 유대인
전세계에 흩어짐(디아스포라)
73 마사다 요새의 함락으로 유대인 최후
항전에서 전멸
135 로마 유대지방에서 유대인 추방
210 랍비 유다 미시나(구전법 모음집) 완성
400 팔레스티나 탈무드 완성
500 바빌로니아 탈무드 완성
614 페르시아의 침입
1099 십자군의 통치. 예루살렘에 라틴왕국 건설
1187 사라센 예루살렘 점령
1290 영국 유대인 추방
1322 프랑스 유대인 추방
1350 유럽에 번진 흑사병의 책임을 물어
유대인 처형
1480 스페인 종교재판 후 추방 시작
1516 베네치아 최초의 게토(유대인 거리) 설치
1517 오스만제국 지배
1555 로마 교황 바오로 4세의 칙령에 의해
전유럽에 게토 설치
1564 슐란 아루크(유대법전) 편찬
1799 나폴레옹 팔레스타인 침입
1807 유대인 자치회의(산헤드린) 프랑스에서 개최
1860 예루살렘에 최초의 정착촌 건설
1862 M. 헤스 《로마와 예루살렘》
1870 로마의 게토 폐지
1881 러시아 유대인 대량 학살
1882 러시아에서 제1차 알리야(대규모 이민)
1896 T. 헤르츨 《유대국가》
1897 T. 헤르츨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온주의자회의 개최
1904 러시아·폴란드에서 제2차 대규모 이민
1909 최초의 키부츠 텔아비브에 건설
1917 영국 밸푸어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 보장 약속
1918 ~ 48 영국의 위임통치
1919 러시아에서 제3차 대규모 이민
1921 최초의 모샤브 창설
1924 이스라엘 공업협회 창설. 폴란드에서 제4차
대규모 이민
1925 예루살렘에 히브리대학 설립
1930 마파이(이스라엘 노동자당) 창당
1933 독일 유대인 대규모 귀환
1935 독일, 유대인 시민권 박탈
1937 영국 필 위원회 유대인·아랍국가들에 대해
영토 분할 제안
1939 ~ 45 제2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유대인 대학살
1940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 건설
1947 UN(국제연합)총회 팔레스타인 분할안 채택
1948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 이스라엘 건국 선포.
아랍 5개국 이스라엘 침공(제1차 중동전쟁)
1949 초대의회(크네셋) 의원 선출. 이집트·
시리아와 휴전협정 조인. 초대대통령
C. 와이즈만 선출. 초대총리 D. 벤 구리온
선출. UN 가입
1950 귀환법 제정
1956 이집트 수에즈 국유화선언. 제2차 중동전쟁
1957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 철수. 이집트와의
국경에 UN감시군 배치
1962 A. 아이히만 처형
1964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공식 창설
1967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동예루살렘 병합.
제2차 거국내각 구성
1968 제4회 PLO 민족평의회(PNC) 개최.
팔레스타인 민족헌장 채택
1969 PLO 의장에 Y. 아라파트 선출
1970 검은 구월 사건 발생
1973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 이집트와
정전협정 체결. 리쿠드당 결성
1974 이집트와 병력철수 협정 체결. 시리아와
골란고원에서 병력철수 협정 조인.
아랍국들 제7회 정상회의에서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일하고 정당한 대표로
결의. Y. 아라파트 UN총회에서 연설
1975 ECM(유럽 공동시장) 회원국이 됨
1976 엔테베 공항에서 인질구출 기습작전 성공
1977 리쿠드당 총선 승리. M.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이스라엘 방문
1978 제1차 레바논 침공. 캠프 데이비드 협정 조인
1979 이집트와 평화조약 체결
1980 이집트와 국교 수립
1981 베이루트의 PLO 본부를 포격하여 800여
명의 사상자를 냄. 이스라엘 공군기 이라크의
원자로 폭파

1982 이스라엘 시나이 반도로부터 철수 완료.
이스라엘 PLO에 속한 게릴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 침공. 제2차 레바논 전면침공
(2만 여명의 지상군과 탱크 투입)
1984 제3차 거국내각 구성 샤스당 창설
1985 레바논에서 전면 철수. 미국과 자유무역
지역협정 조인
1987 팔레스타인인의 봉기 시작
1988 우주통신위성 오페크 1호 발사. 요르단
요르단강 서안(웨스트 뱅크) 포기 선언.
PLO, 독립국가 선포
1989 이스라엘 4개조 평화안 제안. 구소련의
유대인 대규모 이민 시작
1991 이라크의 S. 후세인 걸프전 동안 지대지
미사일로 이스라엘을 공격.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마드리드에서 중동 평화회의 개최
1992 모스크바에서 다자간 회담 개최. 이스라엘은
이 회담에서 팔레스타인의 협상 대표성을
최초로 인정. 중국·인도와 외교 관계 수립.
노동당의 Y. 라빈이 이끄는 새 정부 출범
1993 미국과 러시아 입회하에 이스라엘·PLO 잠정
자치안 협정에 서명. 이스라엘과 교황청
기본동의안에 서명. I. 라빈 총리·S. 페레스
외무장관·PLO 의장 Y. 아라파트
노벨평화상 수상
1994 가자-예리코 협정 체결. 권한과 책임의
예비적인 이양에 관한 협정 체결
1995 웨스트 뱅크와 가자지구에 대한 잠정협정
체결. 라빈 총리 극우파 청년에게 피습 사망
1996 팔레스타인 자치의회와 자치정부 선거실시
집행의장으로 Y. 아라파트 당선.
제14대 크네셋 총선과 함께 최초의 수상직선
동시 실시 총선에서는 노동당이 승리하였으나
수상은 리쿠드당의 B. 네탄야후가 당선
1997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의
헤브론시 및 농촌지역에서의 이스라엘
철군에 관한 협정 조인
1998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와이밀스 정상회담에서
신평화협정에 서명. C. 와이즈만 대통령
재선 당선
1999 노동당 당수 E. 바라크 총리 취임
2000 리쿠드당 지도자 A. 샤론 이슬람교 성전인
알 아크사 사원 방문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
유혈 사태. 카차브 대통령 취임
2001 A. 샤론 총리 취임
2002 A. 샤론 총리의 집권 리쿠드당과 노동당의
연정이 20개월 만에 붕괴
2003 총선에서 리쿠드당이 압승. 국민동맹·
국민종교당·시누이당 등의 강경파와
연정 구성


성경이 곧 그들의 역사이며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의 나라 이스라엘, 오랫동안 망명생활 끝에도 약속의 땅을 잊지 않았던 유대인들. 요즘 팔레스타인과의 잦은 분쟁으로 위험에 빠져있지만,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은 마음의 고향이며 일생중 한번은 밟아보고 싶은 성스러운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