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신학자료모음]/전도자료·영상

월간/해와달:최용덕

기쁨조미료25 2007. 11. 17. 01:55

  

<통권 제305호>  2007년 11월

  

 

 

급히 엘리베이터를 나오다가 걸음을 멈췄습니다. 60대쯤 될까요? 내 곁을 스쳐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등산복 차림의 남자분의 손에 투명한 비닐에 싸인 꽃 한 다발이 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처 꽃가게에서 산 듯한 가을꽃…

오늘 모 인터넷 쇼핑몰에서 보내온 메일의 제목이 이랬습니다. 『시선 좀 끄는 남자!』가을 옷을 소개하는 내용이었지요.

그럴 지도 모릅니다. 멋진 옷, 화려한 장신구, 고가(高價)의 자동차라면 눈길을 끌 만도 합니다.

그런데 덜 떨어진 이 아낙, 꽃을 든 남자! 손만 보았던 그 남자 분 때문에 자꾸만 미소가 번집니다. 이 가을날에. 2007.10.10. ♣

 

                                                        <글: 조금엽 / 방송인.

인터넷 갈릴리마을 글방가족 >  

 

 

유빈이(12살)는 오늘 단짝 은옥이 생일파티에 갔다. 어젯밤부터 입고 갈 옷을 골라서 입어보고 핸드백을 챙겨두었다. (유빈이는 요즘 핸드백을 들고 다닌다. 핸드백 안에는 거울, 빗, 수첩 등 오만가지가 들어 있다.)

정수언 선생님이 작아서 물려주신 청색 쉐터에 하얀 티를 받쳐 입고는 매우 흡족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이거 딱 좋네. 별로 눈에 뜨이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산뜻하고 아~주 좋아!”

그래서 엄마가 물어보았다.

“아니 왜 눈에 확 뜨이게 예뻐야지, 남학생들도 왕창 온다면서… ㅎㅎㅎ”

그랬더니 참으로 생각이 깊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은옥이 생일이니까 은옥이가 돋보여야지! 내가 화려한 옷을 입고 가면 예의가 아니지.”

“아이고… 어쩌면 그렇게도 깊은 생각을? 나는 네가 이럴 때 정말 자랑스러워.”

“뭘 그걸 가지고 그래.”

그러더니 그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내가 원래 좀 그래. 우리 담임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고, 학원선생님도 그러시고, 교회 선생님들도 그래. 항상 예의 바르고 남을 먼저 생각한다고…”

에헤이~ 그런 말은 고마 안하는 게 좋은데… 지 자랑하는 거슨 안 좋은기라. 그래도 마, 자랑도 할 만 하믄 해야제. ㅎㅎㅎㅎ

활기차고, 예의바르고, 친구들과 잘 지내고, 유머도 있고, 선생님들을 도와드릴 줄 아는 유빈이가 너무 자랑스러워. 유빈아, 사랑해! 언제까지나 변치 말고 주님 사랑 안에서 고이고이 자라서 지금보다 더욱더 멋진 어른이 되어라. ♣

        

 

 

 * 여섯 살 때의 유빈이 *

 

말을 하다니!! *

 

 어떤 드라마에서

벙어리 역할을 하던 배우가

다른 드라마에 나오는 것을 보더니

손뼉을 딱 치면서

“어머나!! 이제 말을 하네! 아이구 잘 됐다! 그치 엄마?

 

 착한 딸

 

 밤에 잠들기 전 옛날이야기를 듣다가,

엄마 손을 꼭 잡으면서 유빈이,

“예전에 들었던 얘기도 또 들어야 하는 거지?”

 

  * 유빈이 여덟 살 때 *

 

싸운 아이는

 

유빈: 오늘 학교에서 난리가 났었어.

엄마: 아이고 저런! 왜?

유빈: 홍주(제일 친한 친구)가 싸워서 울고 소리를 꽥꽥 지르고…

엄마: 말리지 그랬어. 그런데 홍주랑 싸운 친구가 누군데?

유빈: 으응… 나야…

 

놀래서 죽을 뻔

 

유빈: 오늘 학교에서 놀래서 죽는 줄 알았어.

엄마: 아이고 저런! 왜?

유빈: 내 짝궁이 “나 좀 괴롭히지 마!

자꾸 그러면 죽어버릴 거야!”그러잖아?

엄마: 아이고, 저런 저런!

유빈: 그래서 “어떻게 죽을 건데?”하고 물었더니

“이렇게!”하면서 책상에다 머리를 쾅! 하고 박아버리는 거야.

정말 죽는 줄 알고 엄청나게 놀랬어!!

 

주부. 서울 노원구 인터넷 갈릴리마을 글방 가족

 

 

2년 전,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명분으로 교회의 남정네 7명을 부추겨서 「아버지학교」에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머뭇거리는 그들에게 담임목사인 나도 함께 들어가며 “나를 따르라!”했고, 교회에서는 아버지학교 등록금 중 절반을 지원하며 이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니, 마치 이라크 파병하는 무슨 평화유지군처럼 사뭇 비장한 분위기마저 감돌았습니다.

아버지학교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모이는, 그야말로 이 시대 아버지들의 모임인데, 강의와 또 다른 아버지들의 사례 간증을 통해, 그리고 매 주마다 내 주는 숙제와 그 숙제의 결과물들을 소그룹 안에서 발표도 하고, 솔직하게 나누는 시간들을 통해, 일그러진 아버지의 모습들을 스스로 발견하고, 참된 아버지상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하고 가정을 살리는 데 초점을 둔 5주간의 프로그램입니다.

처음 제가 했던 숙제는 <아버지께 편지쓰기>였습니다. ‘그까짓 편지쯤이야…’쉽게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 편지지를 펴 놓고 “아버지께…”라고 첫 문장을 썼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다음 쓸 말이 한마디도 생각이 나질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학교에서 요구하는 편지의 형식은, 아버지와 함께 즐거웠던 추억들을 담아서 쓰면서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것이었는데, 저는 아버지와 즐거웠던 추억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즐거웠던 추억이 하나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가라앉은 돼지뜨물통을 휘저어 놓은 듯, 갑자기 나의 기억 저 아래 묻혀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들이 마구 떠오르는 것입니다. 술 마시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버지, 밥상을 둘러메치는 아버지,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 마침내 어머니와 이혼해 버린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두려워 집 바깥 담장아래 앉아 아버지 잠들기를 기다리던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생각이 나자 저는 편지지를 구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저는 ‘아버지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하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도록 편지를 쓰지 못하고, 새벽 기도회 때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묻어 놓은 나의 분노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삼십년이 넘은 세월이 지났고, 이제는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 있는데, 왜 이제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들에 시달려야 하는지!

그러다가 ‘어차피 형식일 뿐이야. 의례적인 편지를 한 장 써 가면 되지. 숙제는 해야 하니까’하는 마음으로 다시 편지지 앞에 앉았습니다.

“아버지께…”

하지만 또 다시 막히는 편지지.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아버지와 함께 가진 추억이 이렇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생각나게 해 주세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저는 앞으로 목회를 못할 것 같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가 아스라이 기억의 저 편 속에 한 가지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제가 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극장을 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제목도 생각이 났습니다. 『월하의 공동묘지』(아버지는 어린애를 데리고 하필 왜 그렇게 무서운 영화를 보러 가셨는지!) 그리고 당시 영화 두 편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어서 또 하나는 무슨 중국 무술영화였는데, 두 개 다 매우 무서웠던 영화로 기억합니다.

그것이 무뚝뚝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유일한 기억이었습니다. 저는 이 기억을 편지에다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영화, 무서웠지만, 아버지가 옆에 계셔서 별것 아닌 것이 되었었노라고.

그렇게 쓰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제게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저희는 저지대에 상습 침수지역인 서울 상암동에 살았는데, 비가 무척 많이 쏟아지고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 깊은 밤, 어디선가 “뚝방이 터졌다아!!”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우리 자는 방의 지붕이 날아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흙탕물을 거의 반사적으로 아버지가 우리 두 남매를 몸으로 덮어서 당신 몸으로 받아내시던 장면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태풍이 온 것이고, 저희 집을 포함한 상암동 일대의 한 마을은 한강물이 범람하고 난지도 뚝방이 터져 물에 잠긴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떠오르자 편지를 쓰다가 울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살아오신 세월이 험하신 것이고, 아버지 역시 아버지로서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며 사셔야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신 것뿐입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모두들 살기 어려웠던 그 시대가 아버지로 하여금 좌절케 했고, 아버지는 술로 풀고자 하셨지만, 더욱 고통스러우셨던 것입니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있는 저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불쌍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한 페이지만 형식적으로 쓰고 말겠다는 편지지는 벌써 다섯 장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학교 편지쓰기 숙제를 해갔는데… 읽고 돌려주겠다더니 우리 조(組)의 조장은 그 편지를 아버지의 주소로 진짜 보내고 말았습니다. 아, 이런!

하지만,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정확히 이틀 후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애비야! 너 아버지께 무슨 편지를 썼니?”

“왜요?”

“네 아버지 그 편지 받고 우시더라.”

 

저는 그 길로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느 때부터인가 내가 장성하면서부터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대화의 자리에서도 남의 이야기처럼 듣고, 남의 이야기하듯 당신의 의사표현을 하시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저대로 대충 알아듣고 대충 허공에다 이야기 하면 그렇게 알아들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응?”

“편지 받으셨어요?”

“…응…”

그게 전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울컥해서 아버지를 껴안았습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를 너무 미워했어요.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워서…”

아버지도 조금씩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크고 두렵게 느껴졌던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제 품에는 작고 연약한 노인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내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뚝!”하고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밀려드는 환희, 기쁨…

 

저는 지금도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날 이후 세상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들이 조금 더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와의 대화도 열렸고,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쉬는 날에는 분주한 목회일정이지만, 가능하면 아버지 모시고 아버지 좋아하시는 소래포구에 가서 회도 먹고 바닷바람도 쐬려고 노력합니다.

 

지난 설날도, 그리고 이번 추석도 온 가족이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다시금 드는 생각은 『용서해야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

 

<목사. 경기 시흥 한가족교회. 인터넷 갈릴리마을 글방 가족>

 

 

남편은 몇 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나들이를 하는 정도이고 자신은 허리가 시원치 않아 70도 정도는 구부리고 사시는 할머니가 마을에 계십니다.

만약 영감님이 상태가 좋지 않아서 대소변을 받아냈더라면 어찌할 뻔했냐고, 그래도 이만 한 것이 감사하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참 좋은 분입니다.

옛날 같으면 상노인으로 대접받을 일흔이 넘은 분들이 이 마을에서는 중간치 밖에 안 되니 할머니보다 아주머니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지 모르지만, 암튼 이런 분들이 농사를 지으십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아침 산책을 다녀오는데 할머니께서 집 앞에 있는 밭에서 들깨 거둠을 위해 키가 넘게 자란 들깨 대를 낫으로 베고 계셨습니다.

아침인사를 몇 마디 건네고 바싹 마른 채 담벼락에 달려있는 수세미를 씨받이를 하겠다고 하나 얻어 돌아오는데, 허리도 성치 않은 할머니 혼자서 들깨를 베려면 얼마나 걸릴까, 차라리 건강한 내가 가서 도와 드리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씻으려다 말고 낫을 들고 그 밭으로 올라갔습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겠냐고, 죄송해서 몸 둘 바 모르겠다고 하시지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면서 들깨 대를 베는데 굵은 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것을 허리 아픈 분이 혼자 하시냐고 했더니, 어제 물리치료를 받고 와서 허리가 많이 좋아졌고, 쉬엄쉬엄 하면 그래도 할 만 하다고 하십니다.

자식들과 손주들 이야기를 비롯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다 보니 한 시간 남짓에 3/4정도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끝내버리면 영감님과 같이 일할 것이 없을 것 같아 이정도만 하겠다고 했더니, 아픈 허리 굽혔다 일어났다 하려면 하루 종일 걸릴 일을 목사님 덕분에 아침에 다 마쳤다고 입술이 마르도록 감사의 인사를 하십니다.

 

조금만 땀을 흘리고 수고하면 이렇게 좋은 일이 될 수 있는데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께서 감동주시는 대로 착한 일(?) 하나 했습니다.

오전에 심방을 갔는데 도중에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 전화가 와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잡니다.

좋은 식당에 따라 가서 맛있는 한방오리를 한 마리 시켜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침에 착한 일을 하나 했더니 하나님께서 몸보신시켜 주셨다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

 

 <목사. 대전 예안장로교회 인터넷 갈릴리마을 글방가족>

 

 ♠ 아래 글은 저희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고 1짜리 새 딸이 쓴 따끈따끈한 감동 수기입니다.

- 정성민 목사 -

 

 

 

“따르르릉, 따르르릉! 기상! 기상! 아침이다! 빰빠라빠바밤!”

오늘도 어김없이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알람시계를 잠에서 덜 깨어 비몽사몽인 채로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껐습니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씻고, 교복을 갈아입고, 밥을 먹고 학교 갈 준비를 마치면 아침 6시 45분입니다. 학교가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지만 아침 일찍 학교 가는 것을 즐기는 지라 언제나 저의 등교 시간은 이릅니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아직도 꿈나라에 있습니다.

하지만 전 왜 이렇게 싱글벙글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피곤함이 없진 않지만 왜 이렇게도 마음이 즐겁고 행복한 지. 그건 아마도 지금의 저에게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저는 행복할 여건 속에 살지를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부유했지만 안으로는 한없이 궁핍한 그런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고급스러운 옷과 장난감들로는 부모의 사랑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언제나 언성을 높이시며 크고 작은 부부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 마다 언제나 방 한구석 침대 모퉁이에 동생과 함께 머릴 손으로 감싸며 움츠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무섭기만 하였습니다. 두렵기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저는 겁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린 저에게 부모님의 불화(不和)에 내성이 생겼던 겁니다. 그런 저는 마음이 착하고 여린 남동생과는 달리 반항을 하고, 고집을 부리고, 친구를 때리는 등 못된 아이로 모습이 변해갔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고작 9살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정은 깨어졌고, 저와 남동생 그리고 엄마 이렇게 세 사람만 가정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엄마는 발버둥치며 저희와 살아가려고 밤낮으로 일하러 다니시며 가정을 꾸려나가셨지만, 그게 엄마에겐 큰 무리가 된 것 같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엄마께서는 시름시름 앓으시는 일이 많아지셨고, 누워계시는 날이 많아지셨습니다.

그 해 11월 병원에선 엄마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위암말기였습니다. “3개월 남았습니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엄마 곁에 함께 있었던 저는 담당 선생님께, “그럼 우리 엄마 죽어요? 왜요? 왜 우리 엄마가 죽는데요! 우리 엄만 나쁜 짓 안했단 말이에요! 우리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왜 죽어요! 제발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런 저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시던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얘야 나도 내가 가진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단다. 미안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너무나 미안하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제가 살리고 싶다고 해서 살고 죽이고 싶다고 해서 죽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느낌을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엄마에겐 죽음도 쉽게 허락되질 않았습니다. 엄마의 투병 생활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암은 위는 물론이고, 장, 간, 이자, 폐 등 모든 몸속의 장기에 전이되어 손을 쓸 수조차도 없었습니다. 독한 항암치료로 인해 밤낮으로 토하고, 뼛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통으로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셨습니다. 어린 자식들에게 자신이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계속 저희를 떼어 내려고만 하셨습니다.

“엄마라고 제대로 해 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 내가 무슨 염치가 있어요.”

이렇게 친척들에게 말씀하시며 우셨던 모습을 전 뒤에서 눈물을 삼키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희에게 정을 떼시려고 일부러 모질게 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 해 3월 4일, 유난히도 날씨가 짓궂던 그 날,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전에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려서인지, 아님 저희 남매끼리 홀로 살아가야 할 두려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는 눈물조차 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저와 동생 둘 만의 생활은 그리 만만치를 못했습니다.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12살, 9살 이 어린 두 아이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기본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유난히 잠이 많은 남매는 일찍 자건 늦게 자건 항상 늦잠을 자서 학교를 지각하기 일쑤였고, 잘못된 식습관으로 탈도 많이 나고, 학업은 늘 밑바닥을 헤맸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흘러 2003년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한 기회를 얻어 어학연수를 1년 동안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소년소녀 가장 세대에게 주는 특별한 기회였지만 1년의 어학연수가 저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없는 1년 동안 동생 학균이는 한 목사님 가정에 위탁되어 생활을 했었는데, 그것을 인연으로 저도 귀국 후에 목사님 가정에 위탁되어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는 보통 아이들과는 많이 다른 아이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댁 자녀 어느 아이도 자기주장을 고집 부려가며 내세우는 아이가 없었는데 유독 전 제 주장이 너무나도 강하고 막무가내라 여러 사람들에게 눈물과 상처를 줬습니다.

그런 저의 단점들을 목사님 사모님께서는 강점으로 다듬어 주셨습니다. 언제나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저를 위해 좋은 멘토들까지 붙여주시며 저를 위해 정성을 다해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 때는 어린 철부지였나 봅니다. 이런 사랑 속에서도 언제나 문제는 제가 일으켰습니다.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인 말투와 이기적인 행동들로 인해 동생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습니다. 전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어린 동생들에겐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갔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못남투성이인 저를 놓지 않으시고, 모난 네모를 둥글둥글한 동그라미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목사님과 사모님은 정말 많은 시간을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게 두세 달 정도의 시간을 거쳐 저의 마음을 안정시키신 다음엔 떨어진 성적을 다시 올리기 위해 선생님을 붙이는 등 또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첫 성적은 반에서 40명 중에 17등이었습니다.

정말 바닥을 헤매던 제가 다시 그만큼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다 목사님과 사모님 덕분이었습니다. 언제나 제가 기죽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제 위치를 찾게 되고, 그렇게 서서히 몸과 마음에 평화가 다시 찾길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웃기도 많이 웃고, 울기도 많이 우는 전형적인 또래 여학생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난 지 4년째입니다. 중간 중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제 뒤에 계시는 두 분으로 인해 잘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위탁이 끝난 상태지만 저희 남매는 여전히 목사님 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저를 친딸처럼 예뻐해 주시고, 지금도 여전히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 전보다 시간의 여유는 많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많은 대화를 나눠주십니다.

 

전 『방송국 PD』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을 화제로 두 분께서는 언제나 많은 조언을 해주십니다. 이것저것 인간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도리 같은 것들을 지적해 주시고, 세상을 보는 눈과 따뜻하게 사람을 볼 수 있도록 늘 조언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제가 PD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 또한 두 분의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노력하시고,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시는 두 분의 영향으로 저도 방송이라는 매개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고, 희망찬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PD라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든지 등교 시간은 이르고 하교 시간은 늦을 것입니다. 저 또한 하교 시간이 중학교 때보다 훨씬 늦어졌고, 더군다나 전 학교 독서실이 조용하다는 이유로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있다 보니 자연적으로 집에 늦게 오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볼 때면 한 편으로는 죄송하지만 한 편으로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도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고,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행복해.’

 

목사님 가정을 만나기 전에는 저는 이런 것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습니다. 이런 행복이 정상적인 가정의 또래 친구들에겐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제겐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걸 극복하려고 내색하지 않고, 강한 척 했지만 기다려 주는 사람 없는 어두컴컴한 집, 암흑 그 자체의 집으로 들어갈라치면 한없이 작아지고 비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전 행복합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부자라고 해서 꼭 행복하지는 않고, 가난뱅이라고 해서 꼭 불행하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족의 사랑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작은 것에 만족과 감사가 있다면 아무리 백만장자라고 할지라도 부럽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선 전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높은 성적이 아닌 중간 정도이지만 저에 대한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제가 들어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여 당당하게 제 일을 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제 모습을 두 분께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아직까지 다듬어 나가야 할 부분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한 눈 팔지 않고 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저는 반드시 제가 꿈꿔왔던 일이 실현될 것을 믿습니다. 물론 두 분이 제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기에 반드시 꿈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너무 많은 것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받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않은 제 자신이 어떻게 이 많은 사랑들을 받았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몸도 마음도 한 해 두 해 다르게 성장하는 제 모습을 볼 때면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함께 자라나는 마음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감사보답이라는 마음입니다.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기에 또 한 번 감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저이기에 보답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것이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이 세상에 저로 인해 한 줄기 희망의 빛줄기가 비쳐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제가 받았으니 당연히 저 또한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제 마음 속 깊은 곳의 사랑까지도 그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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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은 저희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딸이,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소년소녀 가장 수기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해 쓴 따끈따끈한 글입니다.(어제 밤에 적어 제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글을 읽고 있자니 눈가가 젖더군요. 여러분께서도 이 딸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정성민 목사/창신대학기독교교육원교수/

경남창원 여수룬교회/ 인터넷 갈릴리마을 글 가족>   

 

 

결혼기념일이나 아내의 생일, 그리고 특별한 날이 되면 좋은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그 일을 기념하고 아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이 일은 결혼 후, 거의 빠지지 않고 이어지는 행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가지를 더 요구하곤 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선물로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시들어 없어지는 꽃에 비싼 돈을 지출하는 것은 저의 맘에 그렇게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아온 저의 오랜 습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고, 때론 자기 생일에 스스로 꽃을 사다놓고 자축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 했던가요? 그런 모습을 보는 저의 마음이 편치 못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값싸고 조그만 꽃을 사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크기와 값에 관계없이 그 꽃을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차츰 저의 마음이 열리면서 이제는 비싼 값의 꽃도 사정없이 사 나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해 아내의 생일에는 한꺼번에 여러 종류의 꽃을 세 개나 사다가 방 안에 두었더니 아내가 뛸 듯이 좋아했습니다. 얼마 전엔 꽃가게를 지나다가 아내 생각이 나서 아름다운 꽃을 사다가 부엌에 두고 메모를 꽂아 놓았습니다. 그곳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나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꽃입니다.』

자기 일터에서 퇴근하고 돌아와 꽃과 메모지를 본 아내의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모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사랑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하고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나가본 사람들이 그곳에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느끼지도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 중에 아직도 많은 분들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정의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랑이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만들어지는 관계적인 애정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감정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순종이 먼저 요구되며, 그 후에 감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사랑은 상대를 인정하고 그의 요구를 먼저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가 포기되어야 합니다. 자아가 살아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던 습관대로 죄인의 사랑을 할 때가 많습니다. 즉 선택적인 사랑을 합니다. 상대의 요구가 어떠하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조금 생색을 내고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상대방의 어떤 요구에도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원하는 꽃을 즐거운 마음으로 선물하게 된 것은 저에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후략) ♣

 

                                  <미국 캘리포니아. 인터넷 갈릴리마을 글 가족>

 

성 안내는 훈련

 

사건 1

일주일에 한번 대학에 강의를 가는데 갈 때마다 느끼는 일.

학교입구에 수위실이 있다. 정문 수위실이다. 거기서 수위가 통행증을 검사한다. 차창에 통행증이 붙어있는지 어쩐지 살핀다.

그 수위는 그것만 살핀다. 명색이 학교에 강의를 하러오는 사람이건만 아랑곳없다. 어쩌다 증(證)이 안 붙어있는 차량을 몰고 갈라치면 고함을 지르며 증을 붙이라고 야단이다. 호랑이(?)같은 눈을 번뜩이며 증을 검사하고 증이 있으면 통과, 없으면 꼬치꼬치 따진다. 뭐하러 왔느냐고, 왜 왔느냐고… 그러면서 다음부턴 통행증 바로 붙이고 다니라고 꼭 한마딜 한다.

이번 학기 들어 계속 그랬다. 지난 주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자기 앞으로 다가가도 무표정한 얼굴- 어찌 보면 사납기까지 한 얼굴-에 잔뜩 힘을 넣고 역시나 통행증을 살피고 있었다.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할 말은 하되 성은 내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단단히 했다. 내가 차창을 열고 그분에게 한마디 했다. “아저씨, 좀 봅시다.”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온 그분께 내가 말했다. “우리 인사 좀 하고 지냅시다. 내가 무슨 죄짓고 온 사람도 아니고 명색이 학교에 강의를 하러 오는데, 정문에서 맨날 검사만 하고, 나는 맨날 수사당하는 피의자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학교를 찾아오는 이들께 서로 인사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닐까요. 그러면 한결 분위기가 나아질 것 같은데…”

그가 대답한다. “나갈 땐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는데…”

“그래요? 나갈 때 돈 받고 뒤통수에 대놓고 인사하면 뭐합니까. 앞에서 보면서 인사하는 게 더 중요하지요.”

그제서야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아,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말을 하면서도 우스웠다. 인사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되는데 인사를 왜 안하느냐고 따지는 궁상스런 내 몰골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초라했다.

 

사건 2.

엊저녁에 대변(「대동고변포」라고 하는 포구의 줄인 말)항에 회를 먹으러갔다. 아내가 전어를 먹고 싶다고 해서 갔다. 다른 데엔 아는 곳이 많은데 굳이 대변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즐비한 횟집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특별히 아는 집도, 검증이 된 집도 아니다. 셋이서 5만원짜리 모둠회를 시켰다.

조금 후에 회가 나왔다. 보는 순간 우리 모두는 입을 쩌억 벌렸다. 접시에 따악 깔리듯 한 줄을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전어를 한 줌 살짝 얹어놓았다.

명색이 그래도 횟동네에 사는 우리들이다. 수십 년 동안 회를 한두 번 먹어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건 아무래도 좀 너무한다 싶었다. 그래도 5만원짜리라면 큰 것에 해당하는데!

속에서 불끈 치솟는 게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 잘해야 한다. 이럴 때 넘어지면 안 된다.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러나 성을 내면 안 된다는 문장을 새기며 아줌마를 불렀다. 그리곤 조용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 회가 좀 너무한 거 같네요. 우리가 이 동네에 사는데 회를 한두 번 먹어본 것도 아닌데 5만원짜리 회를 이렇게 내면 안 되지요.”

“저는 주방에서 나오는 대로 가져왔습니다.”

“주인에게 얘기하세요. 회를 더 내어오라고.”

그 말만 했다. 거기까지만 했다. 잠시 후에 회가 조금 더 올라왔다.

 

돌아오는 길, 아내에게 얘기했다. 할 얘기는 해야 한다고, 그러나 결코 성을 내서는 안 된다고. 마땅히 할 얘기를 못하면 바보고, 아무리 마땅히 할 얘기지만 성을 내면서 하면 그건 실패라고.

 

닐 앤더슨의 말이 생각난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알지 못한다고… 단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의 행동을 보고 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감정 나는 대로 화내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탄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사탄이 듣지 못하도록 마음과 생각, 그리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의식하지 않으면 넘어지고 마는, 하루에도 열두 번 더 실패하고 실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또 새롭게 다지고 결단하고 시도하는 사람, 끊임없는 도전을 하는 사람, 그 이름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조용히 새겨본다..

 

 

정신 의학자 스캇 펙 박사는 그의 책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아기와 목욕물」을 얘기한다.

 

“많은 과학자들은 아기와 목욕물을 함께 버리려 한다. 그들은 종교를 믿지 않으려 한다. 특히 정신의학자들은 종교 때문에 먹고산다는 농담까지 한다. 건전치 못한 종교 때문에 우매한 백성들의 정신적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건전한 종교는 사람을 살리고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건전치 못한 종교, 그리고 종교라는 이름 옆에 붙어있는 맑지 못한 물들, 그 종교가 목욕한 물들 때문에 적지 않은 정신의학자들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종교를 버리려한다.

기독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는 좋지만 기독교가 목욕한 물이 너무 더러워서 많은 과학자들은 그 더러워진 물 때문에 하나님마저 버리려한다.”

 

안타까운 절규다. 믿는 사람들이 믿음을 온전히 지키려면 아직도 가야할 길이 너무 멀다는 말이다. 믿음 있는 사람들의 영이 건강해지려면 아직도 해결해야만 할 과제가 너무 많다는 말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스캇 펙은 우리가 아직 더 가야할 길을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가슴이 뜨끔 한다. 쓰리다 못해 저리기도 한다.

그렇다. 우린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 「아기」는 무엇이며 「목욕물」은 무언지 굳이 조조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젠 안다.

그렇고 말고… 우리 역시 얼마나 많은 에러를 범해왔는데…

 

기독교가 목욕한 물… 굳이 십자군 전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굳이 노예선과 함께 들여온 파워 이밴겔리즘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일상에서 믿는 사람들이,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목욕한 냄새나는 물들이 어떠함을 우린 안다.

어릴 때엔, 밥 먹기 전에 성경 한 구절 외우지 않으면 밥을 안 주는 기합을 받았고, 학생 때는, 아무리 교회일 열심히 해도 술 담배 하고 있으면 교회 안에선 큰 죄인이었다.

커서는, 새벽기도 나오지 않으면 교회에서 직분을 주지 않겠다는 엄포를 받기도 했다.

사회에 나와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안 다니는 사람들보다 더 무섭고 잔인함에 놀랐다. 용서를 외치지지만 실상은 용서할 줄 모르고, 사랑을 말하지만 실상은 사랑을 줄 줄 모르는 크리스천들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예배당이 성경이 말하는 성전(聖殿)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배당의 성전화, 우상화가 경쟁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음에 한숨을 쉰다.

우린 그렇게 살았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그런 목욕물 속에서 목욕을 해왔다. 그래서 그 모습이 또한 내 모습이며, 나 역시 그렇게 틀이 잡혀감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랬다. 자칫하면 우리마저도 아기와 목욕물을 함께 버리려했다. 아기는 건져내고 목욕물만 버려야 하는데, 홧김에 알면서도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려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스캇 펙의 말처럼,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다.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만만치 않다.

 

문득,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 길 위에는 풀이 더 있고 아직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신앙의 여정. 그 길고긴 길, 멀고도 험한 길. 아직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길을 가야하는 우리.

 

모세가 생각난다, 여호수아가 생각난다. 모세는 광야까지 가보았기에 광야까지만 인도할 수 있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들어가 보았기에 가나안까지 인도할 수 있었다.

광야가 아닌 가나안, 그곳까지 들어가고 싶다. 아직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프다. 아직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은 길을 걸어가고프다.

그래서, 아직도 가야할 길에는, 불뱀과 전갈만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물 샘 열 둘과 종려나무 칠십 주 또한 있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싶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는, 만나와 메추라기, 그 광야식(食), 응급식, 비상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젖과 꿀, 가나안 소산의 아름다운 곡식과 열매들 또한 풍성한 것임을 알려주고 싶다.

그 마음으로, 그 믿음으로 오늘도 길을 간다. 아직까지 가지 않았던 길을 간다. 아직도 가야할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오늘도 걷기를 쉬지 않는다. ♣

 

<한의사. 부산 김양규한의원 인터넷 갈릴리마을 글 가족>

  

 

 답답한 일이 있을 때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합니다. 믿고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으면, 구하면 주신다는 성경 말씀이 헷갈리고 실망이 됩니다.

기도의 응답에 대해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저의 견해가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기도에서 주의해야할 한 측면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나의 필요를 구하는 것」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병이 들어 하나님께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드렸을 때, 저는 기도의 결과로 그 병이 반드시 낫게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저의 경험에는 기도한 내용이 바로 이루어지는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도 체험적 신앙의 큰 버팀목이 되는 기도의 응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즉각적인 응답을 많이 경험한 교우들과 교제할 때면 늘 기가 죽고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기도하면서 얻는 「응답」의 대부분은, 고통과 두려움이나 갈등 가운데서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이며 「자유함」이었답니다.

하나님은 왜 제가 구한 것을 다 주시지 않을까? 섭섭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제가 구한 것 자체를 주시지 않으셨지만 제가 구한 것과 비교되지 않는 「더 좋은 것」을 주셨다는 것을 뒤에야 깨닫게 됩니다. 어떨 때는 제가 무엇을 구해야하는 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기도는 각자의 하나님과의 대화방식이 아닐까요? 연인들 사이나 부부들의 대화 방식이 각각 다르듯이, 각자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며, 각자의 고유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의 응답에 관해 많이 고민하며 삽니다. 비슷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 7:7-11

 

●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누가 11:9-13

 

<보태는 글>

저에겐, 딸이 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 일입니다. 큰 아이는 언제나 “아빠 오늘 12시에 학원으로 데리러 오세요”라고 말합니다. 아빠의 사정은 물어보지도 않고!

반면에 둘째는, 아빠가 데리러 가지 않으면 집에 올 수 없는 상황인데도 언제나 “아빠, 오늘 데리러 올 수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두 딸이 구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저는 그 아이들을 데리러 가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답니다.

아비에 대한 믿음도, 그리고 구하는 방법도 다르지만, 아이들의 요구들을 들어주는 것은 늘 아비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

 

<의사. 대구 장재국신경정신과의원. 인터넷 갈릴리마을 글방 가족>

 

 

폴 레이더(Paul Rader)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소년이 길가의 담장 구멍에 얼굴을 대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때때로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저 애는 왜 저렇게 난리인가?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이는 그 구멍을 통해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야구 경기를 보면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안타를 칠 때마다 펄쩍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행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던 그 아이는 행인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과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에 대해 반응하면서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미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미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에게 반응하는 것은 완전히 정상적인 것이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에 대해 열광하는 것을 보고 비웃는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에게 보이는데, 세상의 비웃음이 뭐 그리 큰 문제인가?

나는 세상의 따돌림 앞에서 눈물을 짜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

 

<- 「세상과 충돌하라」/ 규장 추천 : 김경화>

 

할머니 기술자

 

대전 시내 대전역 근처 어느 공구상 가게에다 산지기집 분무기(20리터짜리, 등에 지는 분무기) 수리를 맡겼습니다. 스테인리스스틸 제품인데, 올봄까지도 잘 썼는데 갑자기 잘 안 됩니다.

“다 고치면, 연락을 드릴께요.”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전화번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두 주가 넘도록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오후, 대전 집에 나가는 길에 시내로 가서 그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주인 말인 즉, 연락을 깜빡 잊었다면서, 이미 잘 살펴보았는데, 수리비가 새로 사는 것보다 더 많이 나와서 안 고쳤답니다.

아니, 어디가 어떻게 고장이 났기에 수리비가 더 많이 들어? 그런 스테인리스 분무기는 3만원 남짓 합니다.

하는 수 없이 고장 난 분무기를 도로 받아 들고 가게를 나왔습니다.

시내 나온 김에 가을 김장용 배추와 무 씨앗을 사려고 종묘상에 들리는 길에 또 다른 분무기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서 “여기서 수리도 합니까?”하니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그 거리는 공구상과 농기계 판매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또 다른 가게에 들러 분무기 수리 여부를 물으니 똑 같이 고개를 흔듭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어기 골목 뒤로 가면 조양상사라고 있어유. 거기 가 보시지유”합니다.

분무기를 들고 털레털레 그 조양상사라는 가게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분이 가리키는 뒷골목으로 가서 이리저리 기웃거려보았으나 <조양상사>라는 간판은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뒷골목은, 정말 허름하고 초라한 골목이었습니다.

그 때 한약재 가게 앞에 나와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분무기 고칠라구요?”하고 묻더니 “저어기로 가보시유”하고 가리킵니다. 가리키는 대로 대전역 옆 중앙시장 쪽으로 몇 걸음 옮기는 도중에 또 다른 아주머니가 마찬가지로 분무기 고치려고 그러냐며 묻더니 좀 더 가라고 합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아니, 이곳 상인들끼리 아무리 정이 많아도 그렇지, 이렇게 서로 손님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다니…’

그런데 문제는, 시장 쪽을 아무리 둘러봐도 <조양상사>라는 간판은 보이질 않습니다. 분명히 이쪽으로 가랬는데?

한 열 발자국쯤 더 가자 꽤 연세가 들어 보이는 한 할머니가 “왜요? 분무기 고칠라고요?”하고 묻습니다. 그렇노라고 하자 “이리로 오슈”하며 앞장을 서십니다.

그러더니 정말 한 허름하고 초라한 낡은 구멍가게로 인도합니다. 어른 키보다 조금 높은 나지막한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가진 그 가게는, 영화에서나 본 1950년대 전쟁터 뒷골목의 구멍가게와 아주 흡사합니다. 보아하니, 각종 채소 씨앗도 팔고, 한약재도 팝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할머니가 거기서 손에 펜치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곤 “이리 줘 봐유”하며 분무기를 달랍니다.

헉! 아니, 전문 수리점 <조양상사> 가게로 가야 하는데 이런 구멍가게 할머니가 왜 분무기를 고쳐주겠다고 빼앗아 가?

너무 황당하여 분무기를 들고 도로 나오려다가 푸훗 웃음을 터뜨렸습니다(물론 속으로 말입니다). 머리 높이 난간에 문자 그대로 손바닥만 한 흰색 팻말이 달렸는데, 거기 <조양상사>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간판도 아니고, 그냥 편지봉투 크기의 팻말입니다. 게다가 한 모퉁이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ㅎㅎㅎㅎㅎㅎ 기가 차서!

게다가 분무기를 고쳐주겠다고 펜치를 들고 덤벼든 분은 6-70대의 할머니입니다. 이렇게 황당한 일이… 그 할머니는 손에 힘이 없어서인지 분무기의 금속 핀을 빼는 것도 제대로 못하시고 펜치 잡는 솜씨도 영 서툴기 짝이 없습니다.

이거 맡겨도 되는 거야? 내가 도와 드려야 할 판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추측컨대, 원래 수리 기술자가 있는데 어딜 간 모양입니다.

“저… 맡겨놓고 갈까요?”

이미 큰 공구상에서 ‘수리비가 더 많이 나온다’는 판정을 받은 분무기인지라 그렇게 그 자리에서 후딱 고쳐질 것 같지도 않은데다가 펜치도 겨우 잡는 할머니께서 고치실 것 같지는 더더욱 않습니다. 맡겨놓으면 나중에 전문기술자가 와서 고쳐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아니유, 잠깐만 계셔 보셔유”합니다.

어!!! 그런데 이거 뭐야? 갑자기 할머니의 손길이 재빨라지더니, 뭘 어떻게 했기에, 분무기가 낱낱이 분해가 됩니다.

 

한 20분 정도, 경이로운 눈길로 그 옆에 서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분무기 부속 곳곳을 다 분해해서 그 안에 막힌 각종 찌꺼기와 비닐 조각을 파내고 분무기 안의 피스톤 고무 패킹을 새로 갈고, 그래도 작동이 안 되자,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아이구! 저거이 나갔구만!”하시더니, 분무기를 엎어놓고는 아랫도리의 큰 나사를 풀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그 손길이 서툴기 짝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몇 번이고 “제가 도와드릴까요?”하고 나섰을까? 하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흔드시더니 기어이 완전분해를 하십니다. 분무기가 그렇게 낱낱이 분해가 될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보슈, 여기에 금이 갔지유?”

할머니가 건네주는 금속제 피스톤 관을 보니 실금이 가 있습니다. 이렇게 공기가 새니 그 안의 물이 세차게 나올 수가 없지.

 

할머니는 그 초라한 구멍가게 안으로 들락거리며 부품들을 꺼내 와서 새로 조립을 하는데, 도대체 그 구멍가게 안에 부속이 없는 게 없어 보입니다. 그야말로 사람 하나 겨우 들락거릴 수 있는 구멍가게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하하하하! 이 할머니께서 마침내 분무기 수리를 마치셨습니다. 그것도, 이틀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단 30분 만에 말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경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실은 말입니다. 저어기 앞쪽 큰길 가, 횡단보도 바로 옆에 있는 큰 가게에다 이것 수리를 맡겼는데, 수리비가 새로 사는 것보다 더 나온다기에 그냥 들고 나왔는데…”하고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니, 어떻게 이렇게 아주머니께서 잘 고치세요? 게다가 아주 금방 고치셨네요”하니, 그 칭찬에 할머니께서도 기분이 좋으신지 어깨를 으쓱거리십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뭘유… 다 어깨 너머로 보고 흉내만 낸 거지유! 실은, 우리 서방이 이거 고치는 기술자인데, 지금 지방에 출장을 가서… 그러니 어쩌나유, 나라도 나서야재. 아,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 읊는대잖아유. 우리 서방이 하는 거 옆에서 보다가 좀 배운 거재.”

푸하하하하하핫! 그럼 그렇지, 진짜 기술자는 우리 할머니 <서방>님이셨구나! 어쩐지, 펜치 잡는 솜씨가 영 서투시더라!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이렇게 분무기를 잘 고치셨는데!!

 

수리비가 1만 5천원이 나왔습니다. 새로 사면 3만원 넘게 줘야 하는데, 절반 가격에 수리를 했으니 그것도 기분이 좋고, 또 난생 처음 목격한 할머니 기술자에게 봉사를 받았으니 그것도 아주 기분 좋은 커다란 선물입니다.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편지봉투 크기의 조양상사 간판(?)도 그렇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펜치를 들고 나오신 할머니 모습도 그렇고… 그래도 날렵하신 손길로 분무기를 완전 분해 해놓고 두드리고 닦고 부속을 이리저리 갈아대시던 모습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도 자꾸 실실 웃음이 나옵니다.

조양상사 할머니! 당신을, 분무기 수리 전문 1급 기술자로 임명합니다. 화이팅!

    

 

유치원에 다녀온 대한이를 아빠가 데리고 GS마트 실내놀이터에 가서 둘이서 정말 신나게 놀고 같이 짜장면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빠 옆자리에 탄 대한이가 심각하게 말합니다.

“아빠, 김주연이가 제 이름을 안 불러주고 자꾸만 ‘쟤’라고 해요. 「최대한」이렇게 이름을 안 불러줘요.” 거의 울먹일 듯한 음성과 얼굴입니다.

아빠, 운전을 하면서 일부러 언성을 좀 높여서 아들 편을 듭니다. “아니, 그래? 김주연이가 우리 아들 이름을 안 부르고 ‘얘, 쟤’한다고? 아니, 왜 이름을 안 불러 줘? 그러면 안 되지! 이름이 있는데!”

추측에, 같은 남자 애들끼리 기 싸움 중이거나, 대한이를 따돌리는 애가 있나 봅니다.

그런데 대한이가 코를 훌쩍거리며 울먹거리면서 이럽니다. “아빠, 김주연이가 자꾸만 제 이름을 안 불러 줘요. 그래서 이렇게 제가 감기가 걸렸잖아요.”

뭔가 좀 이상합니다. 같은 남자 애가 자기 이름을 안 부르고 ‘얘, 쟤’했다고 감기가 걸려? 그래서 곧 수사에 들어갑니다.

아빠, “김주연이라는 아이는, 남자야, 여자야?” (속으로, 남자겠지…)

대한이, “여자요.”

아빠, “헉! 여자야?”

아빠는 순간, 푸흐흐흐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정말 억지로 참았습니다.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 것입니다.

“대한아, 주연이가 예뻐?”

“네. 예뻐요.”

“김주연이가 좋아?”

“… 네, 좋아요.”

예! 감이 확실히 왔습니다. 우리 늦둥이 아들, 짝사랑에 빠졌습니다.

김주연이를 좋아하는데, 그 여자아이가 자기에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예 이름도 안 불러주고 “쟤, 얘”하기까지 합니다.

그 짝사랑의 열병이 얼마나 컸으면, 그 여자 아이가 자기 이름을 안 불러줘서 속이 상해서 「감기」까지 걸렸을까요? (감기 걸린 것까지 그 아이 탓으로 돌리고 싶었을까요?)

 

좀 오버를 해가며 한 바탕 그 <못된> 아이를 나무라주고는 아들을 한참 위로해 주었습니다.

 

여자한테 거절당한 아픔으로 말하자면… 아빠가 그 심정을 좀 (200%) 알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첫사랑 영미한테 절교 당하고 6개월 동안 죽다 살아났습니다. 푸하하하하핫! 아이고,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눈에 뵈는 게 없었지요.

아이고, 늦둥이 우리 아들, 큰다고 애 쓴다.

 

 

지난 호에 이어 계속

지난 명절에, 아직도 비기독교인이자 무신론자이신 집안 어른 한 분이 저에게 광신적인 기독교인 전도자들을 비난하면서 “특히 전철역 같은 데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면 제일 화가 난다”고 하시며, “아니,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가고,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게 말이 되냐! 난 그게 너무 기분이 나뻐!”하며 소리치셨습니다.

그럴 때 논쟁을 하면 안 되기에 흥분을 피한 채 미소 띤 얼굴로 제가 그랬습니다. “저도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방식의 선교에는 의아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릴 들었더라도 너무 화를 내진 마세요.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과 같은 게 아니니까요.”

그러자 눈이 휘둥그레지시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기독교를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산 사람들이 나중에 죽어서 가는 곳이지만, 기독교의 천국은,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을 「천국」이라고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 말로 「천국」이라고 번역을 해서 그렇지, 사실은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게 더 맞다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도, 윤리적으로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이 벌을 받아 가는 곳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이들이 속해 있는 통치권 아래를 일컫는 말로,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지옥」이라고 옮겨서 그렇지, 그 개념이나 의미는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그 지옥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이, 일반적으로 우리 국민들이 이해하는 천국(천당, 극락)이나 지옥과 그 근본 개념이 다르다는 제 설명에 그분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럼 왜 꼭 예수를 믿어야 그 천국엘 갈 수 있다는 게냐?”

네, 상대방이 그렇게 나오면 이제 기독교의 복음을 소개할 때가 된 것입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거니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을 가느냐, 지옥을 가느냐』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에 따라 보상으로 가는 사후(死後)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곳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생전에 도덕적 윤리적으로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곳을 누가 통치자로서 다스리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사람이 선행이나 수양 등, 자기 의로움을 쌓아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곳이라면, 천국에 이르는 수많은 길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을 가느냐 안 가느냐 하는 것은, 내가 영원히 속하여 살 <나라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의 통치권 아래에 속하여, 그 통치권의 다스림을 받으면 살 것인가에 대한 선택, 즉 국적(國籍) 선택의 문제입니다.

 

50여 년 전 한국전쟁이 끝나기 직전, 남북 간의 포로교환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단지 남한 군인은 남쪽으로, 북한 군인은 북쪽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양쪽 모든 군인들에게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즉 “당신이 앞으로 속하여 살아갈 나라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포로로 잡힌 북한군 17만 명 가운데 4만 8천 명은 북으로 가지 않고 남쪽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북한군의 점령하에서 강제 징집된 젊은이들이었습니만, 어쨌든 그들은 김일성이라는 통치자의 수족이 되어 총부리를 남쪽의 동포들을 향해 겨눈 채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겼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포로 교환 때, 동료 친공(親共) 포로들의 수많은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통치자로 세운 남쪽 나라를 자신의 나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 한국은, 그들이 지난 날, 윤리적 도덕적으로 얼마나 수준 있는 삶을 살았느냐로 수용여부를 판가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원수가 되어 총부리를 겨누었던 그 큰 죄조차도 남쪽을 선택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비록 하나님을 안 믿었지만, 너무나 착하게 산 사람들이 왜 천국에 갈 수 없느냐!”며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자칭 기독교인 가운데도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천국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탈북(脫北)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남쪽나라로 넘어오는 생계형 탈출이어서 귀순(歸順)이라는 용어를 그들에게 쓰기가 적절치 않지만, 과거엔 미그 기를 몰고 내려온 이웅평씨처럼, 자기가 속한 그 정권을 버리고 남쪽으로 귀순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 귀순(歸順): 적이었던 사람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돌아서서 복종하거나 순종함.

이처럼 과거 북에서 남쪽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던 북한 군인이 북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넘어와 살고 싶어 할 때 “나는 북에서 정직하고 착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증명해 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남한에서도 착하게 살겠습니다”하는 것으로 귀순이 승인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나는 북에 있을 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평균점수는 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왜 남한 국민이 될 수 없단 말이냐! 이런 법은 없다!”고 아무리 항변을 한들, 지난날의 선행 여부로 남한의 국적을 취득할 수는 없습니다. 결단코!

오직“앞으로는 대한민국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전폭적으로 이 나라와 통치권을 존중하고, 이 나라의 통치권의 주체와 객체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하며 살겠습니다”라는 분명한 선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귀순(歸順)입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던 나라의 백성에서 이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백성으로, 그 국적을 바꾸는 일입니다.

내가 속해서 살아갈 나라를 선택하는 포로교환 현장에서, 혹은 귀화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를 가지고 덤비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천국)를 선택하느냐, 다른 나라(지옥)를 선택하느냐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나는 법 없이도 살만큼 착하게 살았습니다”하는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분을 주(主, Lord)로 섬기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입니다. 창조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사람에게는 이 같은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이브의 죄는, 도둑질하고 강도짓 하고 간음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역하고 사탄(악마)의 다스림을 선택했다는 그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사람들에게 주어진 열 가지 핵심 계명 중에 첫 번째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0:3)

중요한 고비 고비마다 이런 요청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성실하게 섬기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 않으면, 여러분의 조상이 섬기던 신이든 형제 여러분이 사는 땅의 신이든, 여러분이 섬길 신을 오늘 선택하십시오.”(여호수아 24:14-15)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본인들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선교(전도)는 다름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던 자리에서 돌이켜, 다시 그분의 백성으로 복귀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지금부터 영원히 그분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느냐?”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다시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로 복귀하기 위한 핵심적인 절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귀순이나 귀화를 할 때는 각 나라마다 그 절차가 다 다릅니다. 내가 국민이 되기를 원하는 그 나라가 정한 법과 절차를 따라야만 그 나라의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 나라 국민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법과 절차가 있습니다.

 

첫째가 회개(悔改)입니다.

회개란, 그 죄에서 돌이키고, 다시는 그 죄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한 회개는, 단지 지난 날 거짓말하고 속이고 음란죄를 저지른 그런 도덕적 잘못(sin)을 뉘우치는 회개가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심각한 죄(Sin)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분의 원수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죄, 그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죄에 대한 죄 값이 치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보응(報應)이 뒤따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이며 공의(公義)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노력이나 수행, 선행 따위로는 결코 이 죄 값을 치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죄의 값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6:23).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 죄 값은 치러져야 했습니다.

죽음으로써만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는 내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대신 희생제물로 죽어서 그 값을 치러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가운데는 아무도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로마서 3:23). 이것이 가장 커다란 숙제였습니다.

 

한편,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 스스로 되돌아갈 수 있는 통로가 막혀버렸습니다. 마치 무장 탈레반에 억류된 우리나라 국민들 스스로는 그 통치하에서 벗어날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무장 탈레반에 납치된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 한국 정부에서는 특사를 파견하여야 했습니다. (계속) ♣

 

 

    ♠ 깊어가는 가을

<해와달> 편집/행정 사무실이 있는 어부동에도 본격적인 가을이 왔습니다. 9월 한 달이 알밤 파티의 달이라면, 10월은 감과 고구마의 달입니다.

틈틈이 감을 따다가 깎아서 줄에 묶어 바람이 잘 통하는 처마 밑에다 쭈욱 걸고 있습니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곶감은, 감이 지닌 영양분의 손실 없이 겨울 뿐만 아니라 1년 내내 감을 먹을 수 있는 절묘한 방법입니다. 곶감으로 만들 때는 깎은 감끼리 서로 닿지 않도록 해야 하기에 감 꼭지를 남겨서 그곳을 실로 묶어야 합니다. 예전 산골생활 초보시절엔 그걸 몰라서 감을 다 깎아서 철사 줄로 가운데를 쭈욱 꿰어서 처마 밑에 걸어놓았다가 곶감 만드는 데 실패하고 말았지요. 산지기집 가까이에 도회지 사시는 분의 별장이 하나 있는데 어제 보니 그 집에도 감을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빨리 조언을 드려야겠습니다. ^^

이제 고구마도 캐야 하는데, 올 여름 내내 새 성가집 편집에 매달리느라 잡초로 뒤덮인 고구마 밭을 전혀 돌보지 못한 탓에 좋은 수확은 기대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밤고구마 한 줄 호박고구마 한 줄, 이렇게 30미터짜리 두 줄을 심었는데, 우리 먹을 만큼만이라도 나오면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보아하니 올해는 기대를 않는 것이…

 

      ♠ 감사합니다

지난 9월 한 달 동안에도 정기구독료와 후원금으로 이 <해와달> 사역에 동역하여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덕분에 32쪽짜리 <해와달>을 3만 5천부 제작하여 이웃들과 나누었고, 기본적인 문서사역 경비를 제외한 남은 금액(356만원)으로는, 엄마 혼자 생계를 꾸려나가는 모자가정 네 곳과 소년가장 셋, 중증장애인 가장 셋 등, 참으로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우리 어려운 이웃들(30군데)에게 정성껏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필요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지만, 그분들이 용기를 내어 이 땅을 살아가시는 데 큰 보탬이 되셨기를 간절히 빕니다.

 

    ♠ 새 성가 악보집

 600곡짜리 큰 악보의 청장년용 <찬미예수>가 발행되었습니다. 시중 기독교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악보를 그리고 책을 편집하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이번 호에도 귀한 글을 허락하여 주신 글쓴이들과 출판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모두 12월에…

 

 

해와달 2007. 9월 살림 보고

 

<총수입> 10,560,109

· 구독료 및 후원금: 9,960,209

· 지정 구제 헌금: 600,000

 

<총지출> 10,625,349

** 해와달 문서 사역비: 3,103,510

·2007. 10월호 인쇄비 :1,552,000

·10월호 발송비:1,025,150

·출력비:22.000

·사무행정비:366.360  (전화요금: 77,860 / 인터넷 사용료: 28,000 운송비: 59,200 /

                                     서버사용료: 100,000 / 웹하드: 1,980 / 비품: 29,320

                                     (문구, 발송용 테이프, 포장지) /

                                     서버컴퓨터 교체구입비 추가: 70,000 )

·원고료(12월호): 135,000

 

 ** 사무실 및 스탭 숙소: 1,365,199

* 사무실 및 스탭 숙소 임대료: 550,000

* 주부식비: 291,990

* 전기요금: 109,110

* 설교 테입: 10,000

* 연료(예초기): 18,000

* 스카이라이프: 24,175

* 사료 2포: 25,000

* 문화비: 14,000

* 트럭유지: 180,000

* 비품구입비: 117,924 (TV 할부, 주전자, 의약품, 선물용 상자 등)

* 꽃, 씨앗, 농약: 25,000

 

**   스탭들 사례: 2,600,000(추석 상여금 400,000 포함)

**  이웃들과 나눔: 3,556,640

 

* 30만원: 모자 가정 제영이네(지정), 엘림외국인선교회(류웅규/지정 20 포함)

* 20만원: 김O순선교사(C국), 수선화님 가정

* 10만원: 현 선교사(인니), 문성 선교사(파푸아뉴기니), 손에스더 선교사(니제르)/                             모자가정: 예찬이네, 소년가장: 수영이, 관은이, 현지/

                   심장병어린이: 태민이/ 중증장애 가장: 임춘희, 이충묵, 이용갑/

                  투석 사역자:양영일/ 복지시설: 의성 믿음의집(이영락)/

                  오지선교 바울의집(박희준)/ 미자립농어촌교회: 조탄은혜교회, 어부동교회/                             미자립 교회 교역자 가정: 박종훈, 진재수, 오필록, 정세돈, 권광은/

                   산지기집 벌초 봉사자들 선물

* 80,000원: 어부동 인근 극빈 독거노인 3분 지원

* 176,640: 예초기 선물(전 행정간사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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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 편집 : 최용덕

* 행정 : 김민희

* 어린이공부방 사역: 이성희

* 발행인 : 최용덕

* 발행일 : 2007.11.1.

* 인쇄 : 세진인쇄-강성덕

*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충북라 1024,1996.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