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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기쁨조미료25 2007. 11. 6. 02:58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김요셉 지음

두란노 / 2006년 10월 / 280쪽 / 11,000원

 

 

1부. 나는 어떻게 교사가 되었는가 : 조건 없는 사랑의 통로

 

나는 아직도 칼 파워스 상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촉촉한 눈가를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을 만큼 아버지의 집안은 가난했다. 철도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서울로 가는 날 6.25 동란이 터졌고, 아버지는 미군부대가 있었던 수원으로 다시 내려와야 했다. 한 미군이 뭐라고 손짓발짓을 했는데 용케도 아버지는 그것이 나무 해 오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논두렁의 말뚝을 뽑아갔다. 그것을 기특하게 여긴 미군이 하우스보이로 취직을 시켜 주었고, 성실한 아버지는 미군들의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전세에 밀려 미군과 함께 경산까지 내려갔을 때, 그곳에서 칼 파워스 상사는 아버지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던 것이다. “빌리 김, 미국에 가서 공부하지 않을래?” 아버지는 처음에 그의 말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부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칼 파워스 상사는 아팔레치아 산맥의 한 탄광촌에서 태어났고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한국 전쟁이 터져서, 가난 때문에 군에 지원했던 것이었다.

 

칼 파워스 상사는 아버지를 미국의 유명 기독교 사립 고등학교인 밥 존스 고등학교에 입학시켰고 자신은 돈을 빨리 벌려고 사립대를 포기하고 2년제 교대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공부를 끝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간 뒤에야 칼 파워스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아이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학교를 은퇴한 지금까지도 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 산골에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값없이 은혜를 나눠주는 통로는 교육이었다. 칼 파워스의 삶을 쏟아 부은 교육, 그것은 우리 집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누구든 아버지 김장환 목사님처럼 유명한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칼 파워스 상사가 될 수는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미국인 엄마의 손을 붙잡고 학교에 간 첫날, 나는 스타덤에 올랐다. 아이들은 동물원의 사자나 원숭이가 나타난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놀림을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온돌방에 엎어져서 잤다. 그렇게라도 하면 코가 납작해질 것 같아서였다. 머리카락이 까매지고, 눈동자가 까매질 수 있다면, 피부가 노랗게 될 수 있다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이제부터는 도시락을 싸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나는 엄마와 함께 수원영동시장에 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양은 도시락을 사고 보니 마치 내일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엄마는 양은 도시락을 신문지로 싸서 내 가방에 넣어 주셨다. 드디어 점심시간, 모두가 들떠 있었다. 함께 모여서 도시락을 열어 보기로 했다. 콩자반과 단무지, 김칫국물에 물든 꽁보리밥, 가뭄에 콩 나듯 멸치와 계란프라이가 등장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도시락을 들 때 조금 가볍다는 느낌들었다. 기뻤다. 김밥인 게 분명했다. 내가 뚜껑을 열자마자 친구들이 일제히 말했다. “어! 저건 뭐야? 역시! 양코쟁이는 먹는 것도 달라!” 내 양은 도시락에 얌전히 담겨 있는 것은 햄앤에그 샌드위치였다. 아이들의 눈총이 화살처럼 꼭꼭 박혔다. 창피해서 도저히 교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교실을 뛰쳐나갔다. 뒷산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엄마를 보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엄마는 나를 가만히 안아 주셨지만, 나는 엄마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엄마, 친구들이 그럴 줄 알았으면서 나 샌드위치 싸 준 거지? 내가 놀림 받을 거 알면서 한국 학교에 보낸 거지? 엄마 왜 한국에 있어? 엄마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한국 사람이랑 결혼했어? 우리 미국에 가서 살면 안돼?” 내 원망 섞인 하소연을 잠잠히 들어주시던 어머니는 날 꼭 껴안아 주시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Because of Jesus! 예수님 때문에!” 엄마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의 살갗이 벗겨지는 듯 아팠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 미시건으로 여행을 떠났다. 미시건에 있는 한 크리스천 스쿨에 입학했다. 처음 보는 미국인 학교 정문이 점점 가까워지자 가슴이 콩닥콩닥 튀었다. 4학년 교실에 배정되었다. 부모님을 뒤로하고 교실에 들어서니 또다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첫 시간은 스펠링 수업 시간이었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난 들을 줄만 알지 스펠링은 모르는데, 어떡하지!” 선생님이 물어보는데 내가 아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점점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그만 숨어 버리고만 싶었다. ‘어떻게 하지? 하필이면 스펠링 수업이 첫 시간일 게 뭐람! 앞으로 창피해서 학교를 어떻게 다니지? 정말 어떻게 해’ 고개점점 수그러졌다. ‘어쩌면 전학 왔다고 선생님이 봐 주시지 않을까?’ “김요셉! 앞으로 나와 봐!” 내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봐 주기는커녕 칠판 앞으로 불러내시다니!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내리깐 채 칠판 앞에 섰다. 선생님은 단어 카드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 오셨다. 바지에 오줌을 싸기 직전이었다. “너희들, 이야기했지? 한국에서 온다는 선교사님 자녀 말이야. 얘가 바로 그 요셉이야. 요셉이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우리와 다른 말을 배우며 자라나서 한국어를 아주 잘한단다. 요셉아, 선생님 이름을 한국말로 써 줄래?” “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한국어로 쓰라고? 영어가 아니고? 그것도 달랑 이름 하나를?’ “선생이름은 샤프야!” 나는 칠판에 선생님의 이름을 한글로 또박또박 적었다. “샤 프” 까짓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내 이름도 한국말로 써 줘! 내 이름은 탐이야!” “나도, 나도! 나는 메리야!” “나는 수잔!” 이름을 적을 때마다 아이들은 감탄사를 내뿜으며 박수를 쳤다. 근심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기쁨과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내게로 몰려들어 자신의 이름도 한국말로 써 달라고 했다. 소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날 수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그때는 고등학교도 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수원의 신흥 명문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미션스쿨인 유신고등학교를 지원하기로 했다. 입학원서를 내러 온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모집 정원은 7백 명인데, 자그마치 2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응시것이다. 순간 아찔해졌다. 드디어 입학시험 당일, 시험지가 배부되었다. “시험지 뒤집어!” 선생님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이 문제 푸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마치고 시험 문제를 풀어 내려갔다. 다음 시험 시간에도 마찬가지로 5분 정도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시간까지 기도를 한 뒤 시험을 봤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나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내 이름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내 이름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처음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런데! 맨 처음에서 두 번째에 흔하지도 않은 내 이름 석 자가 똑똑히 적혀 있었다. 2등이었다. 4문제만 틀려 2등으로 합격한 것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벌판 가운데 우뚝 선 고등학교에 들어섰다. 신설 학교라 그런지 선생님들의 열의가 대단했다. 학교는 성적우수한 아이들을 따로 모아 강훈련을 시켰다. 일명 명문대 진학반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전체 2등으로 입학한 나는 자연히 우등반에 배정됐다. 우등반 아이들은 중학교 때 친구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제 갓 입학한 학생들답지 않게 공부를 알아서 척척 해 나갔다. 친구들과 친해지려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우등반은 정말 재미없는 반이었다.

 

2학년이 되었다. 학교의 입시반, 우등반 프로그램이 없어졌다. 학부모들의 원성과 나라의 평준화 교육 제도 때문이었다. 신이 났다. 우등반에 들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사라졌으니까, 또 재미없게 악착같이 공부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았다.

 

3학년이 되니까 취업반이 생겼다. 학교 편에서 보면 진학을 포기한 아이들을 취업반으로 빼서 학교 전체 진학률이 조금이나마 오르니 좋고, 학생 편에서 보면 하루라도 빨리 자기 길을 찾게 해 주니 좋았다. 우리들은 그 반을 돌반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돌반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오후 2시면 수업이 모두 끝난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그 반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딱 꼬집어서 말하면 ‘공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당장 선생님을 찾아가 말씀드렸다. “부모님과 얘기가 다 됐어요. 전 대학은 미국으로 가기로 돼 있거든요. 저는 입시를 치르지 않으니까 그냥 취업반으로 보내 주세요.” 선생님의 허락 하에 나는 당당히 돌반에 입성했다.

 

돌반에서의 생활은 아주 짜릿했다. 돌반에는 공부도 못하고, 별 볼 일 없는 문제 아이들 투성이었지만 그곳에는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라는 인간적인 의리가 있었다. 나는 거기서 깊은 사랑이 싹트는 진정한 공동체를 체험했다. 평생을 같이한 친구를 만난 것도 돌반에서였다. 만약 내가 돌반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나도 성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관계를 쉽게 생각했을 것이다. 진정한 앎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상호 협동과 타인에 대한 배려는 공동체에서 길러지기 때문이다.

 

2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 기도

 

아버지가 학교 건립을 위해 마련해 주신 돈은 30억 원이었다. 땅을 판 돈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십일조 먼저 드리고 시작해야지.” 전체 건축 예산의 절반이나 모자라서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던 때라 기분이 좀 상했지만 나는 꼼짝없이 십일조 3억 원을 드렸다. 솔직히 강제로 떼인 기분이었다.

십일조를 하고 한 달쯤 지났을까. 갑자기 한국전력 직원 몇 명이 찾아와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고압선을 지중화하려면 땅이 필요한데 저 산 위의 땅을 저희 측에 팔면, 철탑도 없애고 고압선도 지중화시키고 진입로도 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그 제안 덕분에 우리의 골칫거리였던 서너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계산해 보니 약 30억 원 정도의 효과를 본 셈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십일조였는데 하나님은 그것의 10배인 30억 원으로 되돌려 주셨다.

 

선생님 모집 공고를 냈다. 전국의 교대에서 선생님들이 몰려들었다. 선생님들을 뽑을 때의 기준은 단 하나였다. “하나님께 교사로서의 소명을 받았는가?” 개교 준비를 하면서 선생님들과 나의 고민은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정말 기독교 교육다운 교육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도 개교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목사님, 어쩌죠? 마무리 공사를 하는데 2~3일은 더 걸린다는데요.” 겨우 몇일 때문에 한 학기를 미룰 수가 없어서 선생님들과 상의한 끝에 서울 구로동에 있는 기도원에서 전교생이 함께 수련회를 하기로 했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재미있고 화려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달콤한 음식을 먹였다. ‘말씀이나 기도는 어른이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애들은 그냥 잘 놀면 되지.’ 그런데 여름성경학교 마지막 날 인형극을 하던 중에 여전도사님이 갑자기 아이들에게 회개 기도를 강력하게 요청하면서 통성기도를 30분이나 시키는 게 아닌가. 그 전도사님의 갑작스러운 진행에도 놀랐지만, 나의 가슴을 더 먹먹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이들의 기도 소리였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 저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저의 약함을 고백합니다. 저는 보잘것없지만, 주님이 쓰시겠다 하실 때 어린 나귀처럼 언제나 예수님께 순종하기를 원해요.” 아이들에 대한 나의 판단은 착각이었다. 아이들은 기도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어리석게 보고 과소평가한 미련함을 회개했다. 그 일을 계기로 혹시 어른들의 어떤 기준이나 교육 태도가 아이들의 영적 체험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듯 예기치 않게 우리 학교는 기도 속에서 출발했다.

 

개교를 하면서, 학교가 소송에 휘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우리 학교는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교직원으로 뽑지 않는다. 그런데 선생님 한 분이 이혼하신 사실을 감춘 것이 들통 난 것이다. 내가 그 선생님을 만나 학교 측의 입장을 전달했는데 그분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소송을 걸었다. 인권과 종교적 특수성의 대립이라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게다가 전례가 없는 사건이기도 했다.

재판이 열리는 날, 상대편 변호사의 변론은 아주 명쾌했다. 한순간 우리 학교는 몰인정하고 배타적이며 종교만을 강요하는 이기적 집단처럼 돼 버렸다. ‘우리가 지겠구나’ 싶었다. 우리 측 변호사는 우리 학교가 사립학교이므로 설립 이념에 따라 학교 행정을 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식은땀이 다 났다. 드디어 판사의 마지막 판결만 남았다. 판사는 카랑카랑하지만 엄숙한 어조로 판결문을 읽었다. “이 사건은... 불평등 고용이냐 학교의 특수성이냐에 관한 사안으로서, 이 학교는 기독교 학교이기에 성경적 가치로 행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교의 결정 사항은 적어도 이 학교 내에서는 적법한 것으로 인정한다. 탕탕탕!”

 

개교한 지 4년이 될 무렵, 학교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1999년 여름, 나는 서울외국인학교 기독교사대회에 참했다. 대회가 끝나자, 나를 만나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섰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에서 온 외국인학교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거두절미하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한국 선교사 자녀를 위한 한국인 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그럼, 당장 우리 아이들은?’ 하지만 돌덩이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교사회의 시간에 지나가듯 한마디 던졌다. “우리 학교에서 MK(Mission Kids)를 위한 교사 선교사를 보내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선생님들의 반응은 나와 너무 달랐다. “와! 드디어 기도에 응답하셨네요. 우리 학교가 선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학교 설립 초기부터 무려 5년 동안이나 기도해 왔거든요!”

 

너무 인간적인 생각만 앞섰던 내 모습이 민망했다. 결국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앞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순종하기는 싫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싫어도 순종할 수밖에. 선생님들과 함께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교사를 십일조 하는 것 어때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곧바로 MK 선교사를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그날 바로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네, 최형석입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 선생님은 안 되는데, 설마 선교사 지원하려고?’ 최형석 선생님은 초등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남자 선생님이었고 두고 볼수록 알맹이가 꽉 찬 열매 같았다. 어떤 일을 맡겨도 늘 활기차게 빈틈없이 해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기도가 우선이었다. ‘흠, 아무리 봐도 교장감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점찍어 둔 선생님이 바로 최형석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난데없이 쳐들어와 선교사로 보내 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목사님, 저어, 제 꿈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 전하며 살다 죽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습니다. 그건 저의 소원이 아니라 서원이었습니다.” 서원이라는데 목사가 말릴 수는 없지 않은가. 거의 울며 겨자 먹기의 심정으로 최 선생님 가족을 알바니아 MK 선교사로 파송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몰랐다. 그가 한 알의 밀알이 될 줄은…….

 

최 선생님은 새천년 6월 알바니아로 들어갔다. 그때는 코소보 사태로 알바니아 선교사들이 다 쫓겨 나오던 무렵이다. 위험한 만큼 한국 선교사들의 자녀 교육이 시급한 상황이기도 했다. 물도 전기도 정해진 시간에만 사용할 수 있고, 난방 시설도 없는 척박한 땅 알바니아. 최 선생님은 그곳에 학교 세우는 작업을 혼자 해야 했다. 말이 학교지 사실은 2층짜리 가정집이었다. 1층은 최 선생님 집으로, 2층은 학교로 꾸몄다. 이름은 ‘한알학교’. 성경 말씀과 한국, 알바니아의 첫 글자를 딴 이름이었다.

 

한알학교는 ‘방과 후 학교’였다. 선교사 자녀들은 국제학교에서 수업을 받지만 수업은 영어로만 진행되기 때문에 영어를 잘 못하는 우리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알학교 수업은 국어, 수학은 물론 미술, 음악, 체육에 이르는 특별 활동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겨울에는 4시만 돼도 캄캄해서 호롱불을 써야 할 만큼 상황은 열악했다. 하지만 현지 선교사들과 아이들의 표정이 살아나는 걸 보면 힘든 줄도 모른다고 했다.

 

최 선생님 부부는 알바니아에서 만 2년을 꽉 차게 사역하고 돌아왔다. 그 뒤에 3, 4개월이 지났을까, 최형석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병원에 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초점이 잘 안 맞고 혀가 좀 안 돌아가서요.” 대학병원 종합검사로도 뚜렷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그 다음 달에 MRI를 찍었는데, 결과는 뜻밖에 악성뇌종양. 종양이 너무 많이 자라서 수술도 할 수 없으며, 남은 치료는 약물과 방사선뿐이라고, 길어야 6~8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께 기적을 구하는 일뿐이었다. 기적을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기도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학교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 학교에는 ‘하잠멈(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하는 기도)’이 선포되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하잠멈’을 알리는 음악만 울리면 누구나 그 자리에 멈춰서 기도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와 상관없이 최 선생님은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소화 기능도 멈추었고, 걷는 것은 물론 말하는 기능도 잃어 갔다.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이 최 선생님을 치유해 주실 줄 알았다. 기적을 베푸실 줄 알았다. 지도자인 내가 미천했을지라도 우리 학교 아이들과 교인들의 기도에는 응답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국 그를 데려가셨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일들을 거치면서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나였다. 그렇게도 기도를 하찮게 여기던 내가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 묵상은 좋아해도 기도는 늘 뒷전으로 미루던 나란 사람을, 새벽기도회가 하기 싫어서 교회 개척을 서둘렀던 나란 사람을, 최 선생님의 삶이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3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 안에 심으신 작은 씨앗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장학생과 다름없었던 나, 우등반과 돌반을 두루 경험하면서 체득한 관계 중심적 가치관, 이런 것들이 나의 교육관을 만들어 갔다. 그것은 장애 학생과 일반 학생의 통합 교육으로 나타났다. 통합 교육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설 면에서도 그렇고 인력 활용 면에서도 그렇다.

반마다 담임선생님 한 분과 특수 교사 한 분을 함께 세웠다. 특수 교사란 명칭도 없애고 대신 통합 교육 지원실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부른다. 처음 통합 수업을 할 때 지원실 선생님들이 새로운 아이들과 반드시 함께하는 놀이가 있다. 바로 난파선 놀이다. 배가 난파했다. 배가 다 가라앉기까지는 10분밖에는 남지 않았다. 친구들을 두 팀으로 나눈다. 각 팀에는 시각 장애인신체 장애인이 한 명씩 있다. 놀이를 시작하면 아이들은 분주진다. 과연 누구를 먼저 구출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해야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 누구도 이 게임의 정답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누구를 제일 먼저 구해야 할지 알고 있다. “여러분, 잘했어요. 우리는 지금 한 배를 탔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거예요.”

 

흔히들 일반 학생이 장애 학생을 도와준다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장애 학생이 일반 학생의 성숙을 돕고 있다. 장애 학생은 어떤 훈계도 없이 그 존재 자체로 아이들을 돕는다.

 

일반 학생들의 자존을 꺾고, 고집스러움을 꺾는다. 언제나 자신이 아이처럼 되고자 하는 유치함을 버리게 한다. 그 대신 학생들이 얻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통합 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

 

“이 녀석들이 이 정도는 아닌데, 아주 엉망인데요!” 올 봄에 교생 선생님과 함께 쪽지 시험지를 채점하던 최병준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협동 학습을 하지 않아서 그래요!” 그 다음 시간, 최 선생님은 협동 학습을 직접 보여 주었다. “자, 여기 문제지 하나, 연필 하나 줄 테니까 한 명은 연필로 풀고 다른 한 명은 눈으로 풀어 봐.” 한 아이가 다 풀면 그 다음에는 역할을 바꾸었다. 선생님은 수학 짝을 만들어 주고 자료를 모자라게 준다. 관심과 집중도를 높이는 협동 방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수업 후에 모두 엎드리게 한 다음 물었다. “자기 짝이 이 단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렇게 해서 손을 든 아이는 짝을 데리고 나머지 공부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쪽지 시험을 봤다. 최 선생님도, 교생 선생님도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난번에 비해 성적이 월등히 좋아졌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개교 초기부터 케리건 박사의 협동 학습법을 시행오고 있다. 자발성과 적극성. 이것이 협동 학습이 갖는 최대 장점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지적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협동 학습을 하는 이유가 학습 효과가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협동 학습 과정 자체가 공동체 교육이기 때문이다. ‘나만 잘하면 된다.’ ‘내가 잘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눌러야 한다.’ 이런 식의 경쟁 관계 대신, ‘함께하기 때문에 더 나은 우리가 된다.’ 아이들은 협동 학습을 통해 공동체를 알아 간다. 공동체가 세워지려면 자신의 희생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인근 중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우리 졸업생들 칭찬을 자주 듣는다. 우리 학교 졸업생들은 뭔가 좀 다르다는 것이다. 의사소통 능력, 문제 해결 능력, 협동심 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참 기쁘고 자랑스럽다. ‘잘 가고 있구나’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하고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한다.

 

예비 학부모들은 흔히 농담 삼아 우리 학교에 입학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다. 1년 동안 진행되는 입학 준비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나서야 비로소 입학 허가 조건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3월에 있는 입학설명회에는 아버지가 꼭 참석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아빠를 교육 현장에 끌어들일까?’ 이 궁리 끝에 나온 것이 ‘아빠캠프’이다. 아빠캠프가 시작되면 여자들은 출입 금지다. 엄마 없이 아빠와 단둘이 있어 보는 것이 처음이라는 아이도 있었다. 아버지들은 대개 캠프 첫 시간부터 진땀을 뺀다. 친한 친구 이름 알아맞히기 게임 때문이다. 캠프가 진행될수록 아빠들은 깨닫는다. 자식들에게 얼마나 무심한 아빠였는지.

 

아빠캠프의 클라이맥스는 ‘모의장례식’이다. 그 날 저녁에도 어김없이 유서를 읽는 시간이 돌아왔다. 중국에서 날아온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그 유서를 들으며 다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아,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네 모습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단다.

수많은 날들을 하늘을 원망하고,

운명을 저주하며 보냈지.

너를 무척 사랑하면서도

괴로움을 감당할 길이 없어

아빠는 너를 엄마에게 떠맡기고

바쁘다는 핑계로 밖으로만 돌았다.

......

그런데 이제 내 마음은

너와 하나가 된 것 같다.

이전에 소홀했던 아빠를 용서하고

지금의 내 마음만을 기억해 주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너를 얼마나 기뻐하는지......

하나님, 우리 아들보다 하루만,

단 하루만 더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빠캠프는 해가 거듭될수록 잘 익은 과일처럼 무르익었다. 졸업생들이 가장 인상 깊어하는 것도 아빠캠프다.

 

4부. 왜 가르치는가 : 안식하기 위해서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요셉아, 3학년이 되니 용돈 필요하지?” 용돈을 주시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평창 제과 공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초등 3학년인 내게 아이스케키 통을 턱 걸어 주었다. “이제부터 네 용돈은 네가 벌어라.” 아버지는 그 한마디를 던지시고는 잰 걸음으로 사라지셨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아이스케키여!”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소리가 목구멍 바깥으로 나오질 않았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렇게 무작정 걷다가 우연히 큰 병원 앞에 다다랐다. 간호사 한 사람이 잠깐 나왔다가 나를 한참 보더니 신기한 듯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내 부탁에 그 누나는 병원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서 자기 일인 양 아이스케키를 사 달라고 부탁했다. 삽시간에 아이스케키는 동이 났다. 처음 아이스케키 통을 받았을 때의 답답함은 간데온데없었다. 통 하나를 다 비우고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시작해서 4, 5, 6학년 때까지 여름방학 내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해서 용돈을 벌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신문 배달을 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나는 일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자랐다. 일을 시작한 뒤로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고 손을 내민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참 몰인정해 보였던 아버지.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아버지의 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노력의 대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셨다.

 

집안의 배경이 이렇다보니 나는 안 쉬는 척하면서 쉬었다. 안식할 필요가 있었지만 쉴 수가 없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학교 교목으로, 주일에는 원천침례교회의 목사로 일하면서 안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는 몰랐다. 낮 동안 내가 세미나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을 때 아내는 집에서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며 울고 있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우리는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싸웠다.

나는 일인 다역을 감당하느라 몸과 영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다. 오히려 자꾸 날카로워지는 아내를 피해서 밖으로만 돌았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우리끼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교인들 앞에서 고백했다. “저는 여러분의 리더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공동체리더인 나보다 더 성숙했다. 나를 내치기는커녕 오히려 안식년가질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교회 담임 목사직, 학교의 교목 등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났다. 뭔가 새로운 일에 대한 성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안식년을 떠나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함께 식사하고, 다 같이 성경을 읽고 한국의 교우들에게 받아 온 기도 카드를 놓고 기도하거나 근처 공립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읽는 게 전부였다.

 

그 무렵 나는 마르바 던의 『안식』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을 몇 번이나 탐독하면서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쉼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성공의 봉우리에 서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 말했지만,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일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거의 마약 중독자처럼 일에 지배를 받았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피조물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아니라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죄였다.

이때부터 우리 가족만의 안식이 생겼다. 토요일 저녁이 되면 촛불을 켜는 것으로 안식일을 맞이한다. 그리고 아주 맛있는 만찬을 먹는다. 만찬이 끝날 때부터 주일 저녁 식사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안식일 촛불을 끌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일독자나 다름없었던 내게는 그것이 훈련이었다. 회복의 시간이었다.

 

나는 학교도 안식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 학교만의 특별한 쉬는 시간이다. 우리 학교는 50분 수업하고 10분 쉬는 게 아니라, 40분 수업하고 계속해서 다른 과목을 40분 연달아 수업을 한 후에 30분을 쉬게끔 시간을 편성하여, 공부할 때는 확실하게 공부하고 쉴 때는 확실하게 쉬게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들은 마음 놓고 쉴 수 있다. 바깥놀이도 할 수 있고 도서관에서 책을 볼 수도 있고 친구들과 짧은 게임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수업시간 동안 긴장했던 것을 풀어내고 나면 그 다음 수업도 늘 첫 시간처럼 새롭맞을 수 있다. 처음에는 오해가 있어서 반발이 많았지만, 이제는 우리 학교의 독특한 시간 편성으로 자리를 잡았다.

 

5부. 자녀를 제자 삼는 부모를 위한 7가지 티칭 포인트

 

1. 가정이 교육의 출발이다

미국은 크리스마스 휴가가 보통 2, 3주가 된다. 미국 유학생들그 무렵이 제일 외롭다. 놀아 줄 사람도 없고 놀러 갈 데도 없다. 나도 그때가 제일 외로웠다. 그런데 남동생이 미국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부모님이 미국으로 건너오셨던 것이다. 자녀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때 우리 3남매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연말연시가 아버지가 가장 바쁜 때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실 수 있었을까. 나중에 교회 중직들이 아버지께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교회가 잘못되면 다른 목회자를 구하면 되지만, 내 자녀들이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져 줄 사람이 없소.”

 

지금 생각해 봐도 아버지의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는 나도 쉽게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정에 대한 우선순위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버지의 자리가 1차적인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았다면,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다른 것은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2.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라

하나님은 부모에게 귀한 자녀를 주셨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완벽한 자녀들을 원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의 기대치에 부흥하는 것이 축복은 아니다. 한국적 정서 속에서 자식은 아버지의 소유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녀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자녀를 하나님께 다시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내게 다시 바치면 다시 돌려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아기가 내 몸 안에, 우리 집 안에 들어온 이유는 떠나기 위해이다. 아이가 들어서는 순간 기도해야 한다. 아이들이 잘 떠나가게 해 달라고.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기에, 자녀를 하나님께 다시 드리지 못했기에 너무나 많은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아니라 욕심의 가정이 되고 있다. 욕심을 버려야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부모는 밤마다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기도해야 한다.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3. 살아있는 신앙 교육을 하라

나는 이런 설교를 감동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예수는 그 지혜그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 말씀을 보라. 예수님도 4가지 영역에서 자라나셨다. 키는 신체적, 지혜는 인지적, 사람은 사회적, 하나님은 영적을 말한다. 성경적 근거도 있고 아주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영역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것을 안다면 이분법을 깨뜨려야 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기독교의 세계관, 그 세계관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이다. 어른들부터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는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컵에 담기면 물이고 대야에 담기면 물이 아닌 게 아니듯, 신앙과 그 신앙에 근거한 교육은 연속선상에 있다.

 

4. 신앙의 갈등을 충분히 겪게 하라

“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까요?” “왜 생명을 버리면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 학교 최 선생님은 왜 34살에 뇌종양으로 돌아가셨을까요?” “성부, 성자, 성령? 셋이면서 하나라고?”

 

아이들은 자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도덕적 교훈대로, 이미 알고 있는 정답대로 살아가도록 기독교는 사람을 로봇과 같은 존재로 만들기 쉽다. “삼위일체가 뭐야?” 아이들이 물었을 때 “물이 수증기도 되고, 얼음도 되는 것처럼, 형체는 다르지만 하나라는 거야.” “나는 너희들의 아빠지만, 엄마의 남편이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이기도 하잖아. 이렇하나지만 역할이 다르잖아.” 하지만 두 가지 다 삼위일체의 올바설명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세상의 이치로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라고 하셨다. 타락한 인간의 인지로는 수용하지 못할 하나님의 인지있다. 그래서 패러독스에 직면했을 때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낫다. “얘들아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나도 알싶어.” 아이들의 신앙적 고민을 너무 쉽게 해결해 주면 안 된다. 질문을 무마시키지 말고,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들 스스로 신앙 갈등을 겪도록 해야 한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알 수 없다. 앎에 대한 작은 힘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통로가 되었다면,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앎이 더 넓어질 것이다.

 

5. 여섯 살 이전에 교육하라

우리 집은 아이들이 넷이다. 첫째와 둘째는 자기 할 일을 하면제법 조용하게 지낼 줄도 안다. 하지만 셋째랑 넷째가 붙어 있으언제나 집은 북새통이다. 어느 날은 그 둘이 붙어 있는데도 너조용했다. 신경이 쓰여서 아이들을 찾아봤더니 둘이 함께 화장실에 있는 게 아닌가. 뭘 하는지 궁금했다. ‘둘이 목욕을 하나? 아님, 혹시 같이 일을 보나?’ “이제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세례를 주노라.” 아이들은 일명 침례 놀이 중이었다. 셋째가 목사님을, 넷째가 성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누가 목사 아들 딸 아니랄까 봐!’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거실로 나왔다.

아이들의 놀이는 아이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기독교 교육을 하면 할수록 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세상의 풍속, 유혹, 죄악들을 접하기 전, 그러니까 3, 4세부터 하나님으로 물들여 주어야 한다. 이러한 세계관이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 줄 것이다.

 

6. 자녀를 향한 계획을 갖고 있으라

나는 혼혈아로서 한국인 초등학교에 다니는 것이 늘 힘들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요셉아, 너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대학교 때부터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거야. 알았지? 너는 외국인처럼 생겼지만 네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한국인 교육을 받기 위해서야. 그렇게 알고 있으렴.”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 아버지가 내가 힘든 것을 몰라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힘이 난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께 나를 위탁받은 자로서 되는 대로, 그럭저럭 나를 키우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계획을 갖고 나를 훈련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알려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로서 교육의 주권을 회복하는 자세이다. 틀려도 좋니까 확신을 가지고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부모는 아이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시켜 드려야 할 책임을 맡은 자들이다.

 

7. 훈육의 아픔을 충분히 견뎌라

가정의 부모, 교회의 목회자, 학교의 선생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이다. 하나님의 권위에 부모가 함부로 자녀의 손을 들어줄 때, 훈육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린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를 얻고 열을 잃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가지를 더 깊이 잘라낸다. 우리 하나님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깊이 절단하신다. 우리의 깊숙이 있는 죄의 부분을 도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부모는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아이들을 훈육할 뿐이다. 부모가 훈육할 수 있는 짧은 기간 동안에 훈육의 과정에 잘 적응해서 결국은 장기적인 훈육을 이해하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아이들로 키워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픔을 감사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진정한 거룩의 과정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출처 : 도형분석상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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