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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부르심과 회심

기쁨조미료25 2009. 6. 15. 12:17

 

바울의 부르심과 회심

 

 

바울로 하여금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한 계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한 부르심과 그의 회심(conversion)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그가 적어도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는 메시지를 들어 알고 있었고, 그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어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셔서 모든 사람들의 "(the Lord)"로 세우셨다는 이야기나, 그를 통해 구원의 길로 알고 있던 모세의 율법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어 알고 있었다. 이런 내용을 잘 몰랐다면 그가 그토록 철저한 박해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그가 돌아서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단지 흔히 이야기하는대로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서 깊은 충격은 받고 있었으리라고 말할 수는 있다.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7: 54-60). 하여간 율법을 최고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던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매우 위험한 이단자들로 보였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근절해버려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루살렘에서는 물론이고 멀리 다메섹까지 가서 그들을 색출하여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때가 되었다. 그는 그리로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과 함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9: 4-5; 22: 6-11; 26: 12-18)는 말씀 앞에 그는 굴복하고만 것이다. 그의 앞에 놓인 두 길, 즉 율법과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이에서 그는 택일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전하는 편에 서게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 체험은 그로 하여금 참 선교사로서의 고난의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참고 걸을 수 있게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체험 사건은 단순히 그의 개인의 회심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받는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를 핍박하던 그가 이제 사도가 된 것이다(고전 15: 8-9). 그의 고백에 따르면 아나니아의 입을 통하여 그는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다.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22: 14-15).

 

그리고 그는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앞에서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택한 그릇( 9: 15)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후 기도하는 중에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22: 21)는 말씀을 직접 듣고 스스로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 16). 이때부터 그는 한가지 결심 곧 그리스도만을 알고 그를 전하기 위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결심대로 그 일생을 살았다.

 

이제 그의 회심과 부르심이 가지는 몇가지 특징적인 면모를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1)회심 이전의 바울은 헌신적이고 열렬한 유대인이었다. 2)그의 회심 체험은 그의 삶의 방식과 세계관에 일대 변혁을 가져다주었다. 3)그의 체험은 본질적으로 신비한 체험이었고 그 체험을 통해서 그는 하나의 꿈(a vision)을 가지게 되었다. 4)그가 이 체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자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 등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A. 바울의 회심의 사건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있는 사울은 예수가 바로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2:25-28; 16:8-11 (참고 눅24:27).)

 

선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하였으며, 더욱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 즉 메시야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삼일만에 다시 부활케 하셨다 하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말에 분노하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한다하고 특히 스데반을 신문할 때 증인으로 섰고, 돌에 맞을 때에는 그가 사형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7:55-58, 8:1.) 주장하였으며, 또한 다메섹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넣기 위해 산헤드린에서 발급한 정식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강한빛을 보매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 이때 그는 눈을 뜰수 없었으며 홀연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나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하셨다. 동행인들은 그소리만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였다.( 9:6-9)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야를 만나 아나니야의 인도에 따라 시력을 회복하였으며, 그에게 세례받고 모든 사람 앞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보고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증인이 될 것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바울의 다메섹 도사에서 회심의 사건은 사도행전에 삼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회심의 표현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9 7절에는 동행인이 소리는 들었으나 보지는 못하고, 사도행전 22 9절에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고, 사도행전 26 13절과 14절에는 밝은 빛이 내려와 함께 가던 사람들은 두루 비추었다 하였다. 문제는 표현하는 글에 뜻있는 것은 아닌 줄로 안다.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전서 15 8절에 "맨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자였던 사울은 그를 복음전하는 사도로 부르시는 소명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B. 회심의 신학적 의의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의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기록과 바울 자신이 쓴 서신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전설적이고 객관적인데 비해, 바울 자신이 쓴 서신( 1:15-16; 고전9:1-2; 고후4:5-6.)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실상 바울의 회개의 계기는 바로 바울 자신의 주관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이방에 복음을 전파할 주의 사도로 쓰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였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22:21; 고전15:8-10; 3:7; 1:1; 1:1; 딤후1:1.)

 

그리고 바울의 신앙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기의 잘못된 신앙관을 깨닫고 회심한후 그의 신앙은 180도로 변한 철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믿었다.( 3:7-9)

 

바울은 회심 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율법적인 신앙관을 바꾸어 복음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됨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을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하셨다고 하였다.( 1:15-16) 하나님은 바울의 전 생애를 영광가운데 인도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자기의 성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 했다.( 3:7-9) 바울의 이같은 확실한 신앙은 마침내 자신을 이방인들을 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불같은 사명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1:25)(딤후 1:9-11)

 

 

C. 부활에 대한 바울의 확신

 

바울 자신도 회심 이전에는 일반 유대인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유포한 한낱 유언비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 들이야말로 기존 유대 종교를 혼란시키는 이단자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다는 확증을 얻게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 1-11절에 보면 그가 극적인 내적 각성을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가 전환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요 또한 바울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전경연, [신학성서 신학서설]. 서울:사상계사. 1955, p.132.)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에서 여러번 언급하고 ( 고전15:1-21; 1:4; 고후5:15; 3:10-11; 6:5-10.) 있으며, 고린도후서 51절에서 21절에는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을 다루고 있고 기독론의 기초가 되어 있다. 예수 부활의 사상이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만큼 '핵심적인 것' 이었는지는 데살로니가 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다.( 6:47:4; 고전6:14; 고후13:4; 1:12:20; 고전15:21-22; 1:20; 3:10-11; 3:1-3; 살전1:105:10; 딤전2:5-6; 딤후2:8; 2:14.)

 

바울은 부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단호하게 선언한 것은 고린도전서 15 15절에서 19절에 잘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도 신학적인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얻은 최대의 사건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그의 모든 생활의 초점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 안에서의 삶에 맞추었다.( 2:19-20; 고후5:13-15; 1:20-213:7-9,10-14.)

 

 

 

바울의 회개 이야기의 해석사

 

 

 

 

1. 심리학적인 해석

 

 

 

바울의 회개 이야기를 해석할 때, 우리가 "원숭이 엉덩이는 백두산"이라는 식의 해석을 해 왔다. 회개(회심)는 심리적인 현상이다. 그러면 이러한 심리적인 현상의 원인은 무엇인가? 심리학(예전에는 철학의 한 분야로 있었다.)이라는 학문이 독립적인 하나의 학문이 된 것은 19세기 말의 분트에 의해서이다. 그는 실험심리학 교실을 처음으로 개설한 사람이다.(1879) 이것은 실험을 통해서 심리학을 한다는 방법론을 개설한 것이다. 이로 인해 심리학이 하나의 독립된 과목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점점더 신학에도 심리학적인 해석이 가해지게 되었다. 그러면 바울의 회개가 일어난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해서일까? 합리적인 방법으로 심리학적으로 보면 초자연적인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전에 바울의 마음속에 어떠한 마음이 있었길래 이러한 심리적인 변화들이 일어났을까? 이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해 보도록 하자.

바울의 마음속에 두 요인이 있다면 심리학적인 해석은 주로 부정적인 요인을 찾는다. 그러면 부정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가책으로서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오는 양심의 가책이다. 또 이외에는 긍정적인 요인도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기독교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 때문에 바울이 회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 좋은 인상은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는 신앙에의 열정이다. 그리고 경건하고 윤리적으로 착실한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인상일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요인이든지, 부정적인 요인이든지 이에 대해서는 뚜렷한 증명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성서를 바탕으로 한 지금까지의 해석은 성서를 잘못 주석한 것에 대한 결과이다. 긍정적인 요인이든지 부정적인 요인이든지 바울속에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심리현상은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한 세기 이상 주류를 이루었다.

 

 

 

2. 체질적 해석 방법

 

 

 

바울의 회개는 체질적인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갑자기 변한 것은 육체적이나 심리적으로 연약하고, 부드러우며 감수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그만 것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이렇게 변했다는 것이다.

 

 

 

3. 환경론에서 해석하는 방법

 

 

 

"여자는 분위기다"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 이런 방법으로 바울에 대해서도 해석을 하는 방법이다. 바울이 변하게 된 것은 분위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분위기는 다메섹 주변의 아름다운 분위기이다. 또 이와는 달리 황량한 분위기를 생각할 수도 있다.

 

 

 

4. W.G.Kummel(큄멜)의 해석 방법

 

 

 

이러한 심리학적인 해석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을 하면서 1928년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W.G.Kummel(큄멜)이다. 그는 자기의 논문에서 지금까지의 해석 방법들은 모두 틀렸다는 파산선고를 한다. 모두가 공상(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파산 선고를 내리고 큄멜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조그마한 오두막집 하나를 세운 것과 같았다. 심리학적인 해석에서는 바울이 회개를 한 심리학적인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큄멜은 바울이 회개를 했다는 것은 초대 기독자들의 선포(예수가 부활하였다. 예수가 메시야였다.)가 옳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는 물음이 바뀐 것이다.(심리학에서는 원인이 되는 심리현상을 물었으나, 큄멜은 바울의 회개가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 것이다.)

 

 

 

5. 종교사학적인 해석의 방법

 

 

 

이제는 새로운 것을 묻기 시작한다. 바울이 예수가 메시야이고, 예수가 옳다고 깨달은 것은 바울의 마음속에 부활사상이나 메시야 사상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접착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예수의 선포가 진리라고 받아들이려면 바울의 마음속에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접착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유대적인 전통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고, 헬레니즘 문화권 속에 살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가지의 답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유대쪽을 살펴보자. 바울은 유대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구약성서의 전통과 묵시 문학적인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메시야에 대한 사상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바울이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헬레니즘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고 보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상적인 계보나, 사상적인 접착점을 찾으려고 하는 방법을 종교사학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바울 복음에 나타난 '계시' '전승'의 관계에 관한 연구

- 1:12; 고전 5:3의 해석의 문제를 중심으로 -

 

 

1. 바울 복음의 '계시' '전승'

 

1)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의 복음을 받았다( 1:12).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복음을 전수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사람의 뜻과 기호에 맞추기 위해 인간적인 복음으로 왜곡시켰다고 하는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항한다. 그렇다면 바울에게서 계시로서의 복음은 무엇이고 전승으로서의 복음은 무엇이며, 이 둘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과연 이 두 주장 사이에는 상반된 모순이 있는 것일까?

 

2) 이 두 주장의 상반된 모순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바울의 기독론의 바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데 그 중요성이 크다.

 

2. 제시된 해결책

 

1) J. T. Sanders

a. Sanders는 갈12장과 고전15장의 두 바울의 진술들 사이에는 완전한 모순이 존재함을 의미한다고 보았다.즉 그에게 있어서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는 완전히 다른 논리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b.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처럼 실질적인 모순은 없다.그의 논문은 아주 독단적이다.

 

 

 

2) R. Bultman

a. Bultman에 따르면 갈라디아서 1장은 진정한 것이고 고전 15장은 사도의 조리에 맞지 않는 진술이다.

b. '전승'에 대해서 Bultman은 비역사성의 이론으로 반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케뤼그마의 역사성에 관한 질문자체를 비신화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케뤼그마가 주는 신앙적 이해에 유념할 것을 주장하였다.

c. 그러나 초대교회가 부활이전의 역사적 예수를 회고할 때 단지 케리그마가 주는 신앙으로만 파악하였고 그 당시의 사건들을 신앙으로 각색하였다는 추측은 근거가 없다.

 

 

 

3) K. Wegenast, W. Baird, Seyoon Kim, H. Schlier, etc.

a. 이들에 따르면 갈1:12은 복음의 본질을 지칭하고 고전 15:3은 복음의 형식을 지칭한다.

b. 이들 입장의 세부적 내용은 다르지만 공통되는 기본주장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십자가에 못밖힌 예수가 부활하고 승귀된 주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반면( 1:12, 16), 고전 15:3의 전승은 복음의 이 본질을 형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c. 이들의 올바른 견해에서 발견되는 것은 갈 1:12과 고전 15:3이 다루는 주제와 관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것들 사이의 실질적인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갈1장의 바울의 관심사는 적대자들에 대항하는 그의 복음의 기원과 본질이었으며, 고전 15:3에서는 그가 그들에게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사용한 문구들을 상기시키고, 모든 사도들의 공통의 케뤼그마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3. 문제 해결을 위한 절차 및 자료

 

 

 

1) 1:11-12의 원어 분석을 통하여 정확한 뜻을 찾아낸다.

 

 

2) 이와 더불어 '받다'이라는 단어를 함께 쓰면서 갈라디아서와의 불일치성을 보이는 듯한 고전 15장과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모순없음을 증명하고 '계시' '전승'의 관계성을 증명한다.

 

 

3) 이를 위하여 헬라어 원어성경과 주석을 사용하며, 앞의 2-(3)의 견해를 가진 학자들의 책을 참고한다.

 

 

 

4. 나의 해결책 및 논거

 

 

 

1) 1:11-12의 해석: (11) 그런데 형제 여러분, 나는 내가 선포한 복음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릴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전해받지도 않았고 또한 나는 가르침을 받아 그것을 알게 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12)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해서입니다.

a. (according to man)이라는 어구는 그의 복음의 내용적 성질을 나타내는 어구가 아니고 그것의 생성방법을 가리키는 어구로 보아야 한다.

b. 이중적 부정문의 형태인 ' - '를 통해 사람에 의함이 아님이 더욱 명백해진다. 전자(받은 것)는 특수화의 경우이고 후자(배운 것)는 단지 특수화의 한 요점을 첨가한 것이다.

 

2) 바울의 이 주장은 고전 15:3절과 비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받다)이라는 동사는 전승과정을 표현하는데 쓰이는 하나의 전문용어로서 갈 1:11, 12는 이를 부정하고(<1>-b), 고전 15:3은 긍정하기 때문이다.

a. 고전 15:3-5에 담긴 내용은 바울과 초대교회의 원사도들이 다같이 전파한 복음의 구체적 내용이다. 즉 바울이 전해받아서 전해준 '복음'은 초대교회에서 교리문답이나 교육 또는 선교를 위해서 복음의 내용에 관해 일정하게 만들어진 공식구(公式句)이다.

b. 1:11, 12의 복음은 구원의 소식으로서의 공식화된 복음의 말씀의 본질적 핵심, 즉 그것의 진리성을 뜻하는 것이다(<1>-a).

c. 결국 바울은 복음에 관한 문구들을 전승을 통해서 받았으나 그것이 진리임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 배움으로써가 아닌 그리스도의 계시로 가능했던 것이다. 즉 그가 이 복음을 아는 데에는 지상의 어떤 증인도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만이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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