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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했나?

기쁨조미료25 2009. 4. 24. 15:50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했나?

 

 

송영목 교수 / 고신대 대학교회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가는 그가 사용한 약 20개의 은유와 관련 용어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의 서신 기록 목적이 ‘교회’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문제에 답하고 있음을 안다. 비록 ‘교회’를 가리키는 헬라어 ‘kyriak’는 신약 성경에 등장하지 않지만, 아프리칸스 ‘kerk’와 영어 ‘church’와 독일어 ‘kirke’는 바로 이 헬라어에서 나온 명사이다.

 

바울의 교회론은 3위적 관점 (from a Trinitarian point of view)에서 논의된다: (a)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성부의 구원 사역과 불가분리적이다. (b)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에 기초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교회 구성원의 기준이며, 주권적인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기에, 바울의 교회론은 기독론과 날카롭게 나눌 수 없다. 그리고 (c) 성령은 종말론적 은사로서 교회에게 부어져 있다(Roberts, 1988:270).

 

 

1. 바울의 하나님 나라 이해

 

바울의 교회론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복음서의 경우처럼 지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주로 ‘의-칭의, 구원, 화해, 평강’으로 완전히 대체시키지 않는다(롬 14:17; 고전 4:20; 6:9-10; 15:24, 50; 갈 5:21; 엡 5:5; 골 1:13; 4:11; 살전 2:12; 살후 1:4-5; 딤후4:1, 18).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바울의 독자들이었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자들에게는 훨씬 덜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헬라인들에게 글을 쓸 때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예수님만큼은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그레코-로마 세계에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가능한 요인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활동하신 팔레스틴의 농촌보다는 바울이 주로 활동한 그레코-로마의 도시라는 배경에서 ‘나라-왕권’이라는 용어는 더욱 민감했을 수도 있기에, ‘천국’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자제함으로써 바울은 스스로 ‘정치적 선동갗라는 오해를 피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천국에 관한 가르침과 바울의 천국 개념에는 간과할 수 없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천국이 예수님과 바울의 복음의 핵심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바울 서신서에 ‘하나님 나라’를 포함하는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바울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2) 예수님처럼 바울도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이며(롬 14:17; 고전 4:20), 미래에 완성되고 유업으로 물려줄 것(고전 6:9-10; 15:24, 50)이라고 본다.

 

(3) 바울이 천국을 언급할 때 주제상으로 예수님의 천국 말씀과 병행을 이룬다. 예를 들면,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권능 및 성령님과 결부시키는 것(고전 4:20; 롬 14:17)은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의 모든 원수를 굴복당할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고전 15:24)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 및 축귀에 관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가르침을 생각나게 한다(마 12:28; 눅 11:20).

 

또한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율법 준수(즉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롬 14:17; 고전 6:9-10)가 아니라, 의와 결부시키는 것은 마 5:20절을 비롯한 많은 산상설교의 구절과 유사하다. 롬 14:17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묘사하는 것은, 마 10:7절과 13절, 눅 10:5-6절의 선교 강화에서 ‘평강’과 하나님 나라가 결부되어 있는 것과 유사하며, ‘희락’은 여러 비유들의 중심 주제이며(마 13:44; 눅 15:6, 9), ‘성령’은 복음서에서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현존-권능으로 여겨진다(마 12:28; 막 3:28-30).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로 초대받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 받으며 일한다는 묘사(골 4:11; 살전 2:12; 살후 1:4-5)는 제자도에 관한 공관복음서의 묘사(마 4:18-22/ 막 1:16-20; 마 9:13/막 2:17/ 눅 5:32; 마 5:10-11/ 눅 6:22)를 상기시킨다.

 

(4)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에 이미 알고 있는 전승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전승 지표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10);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바울은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독자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전승된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분명한 방식으로 상세히 설명하기도 한다.

 

(5)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 바울이 천국과 관련하여 ‘의’를 강조하는 것은 두 번(롬 14:17; 고전 6:9-10)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인 마 5:20절과 6:33절에도 나타나는 주제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고전 6:9-10절과 갈 5:19-21절 그리고 엡 5: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에 관하여 말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마 5:20절 등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씀한다. 이것은 표현의 차이이지 사상의 차이는 아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한다(신 4:1; 6:18; 16:20; 참고. 데이비드 웬햄, 2002:113-123; 메이천, 1988:206-207).

 

 

2. 교회에 대한 다양한 은유와 관련 단어 및 에클레시아

 

바울의 교회론은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다. 행 20장에서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설교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에베소교회는 ‘양 떼’이며, 장로들은 ‘감독자’로서 하나님이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행 20:28).

 

바울 서신에서 바울은 다양한 은유로 교회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 엡 1:23; 골 1:18), 하나님의 성전(롬 8:15; 갈 4:9; 엡 3:14-15 성전의 중요성을 위해서 고든 피, 2001:43을 보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양자된 자녀들(롬 8:14-17; 갈 4:1-7),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롬 8:15; 갈 4:9; 엡 3:14-1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많은 형제들 중의 ‘맏아들’로 계시고 모두가 하나님의 ‘상속자들’인(롬 8:17, 29) ‘하나님의 집’(딤전 3:15; 히 3:1-6),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26), 새 예루살렘(히 12:22),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2-3), 감람나무(롬 11:13-24), 하나님의 밭(고전 3:9), 하나님의 건물(고전 3:9), 그리스도의 신(엡 5:22-31),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엡 2:19), 땅의 외국인과 나그네(히 11:13), 그리스도의 사신(고후 5:18-21), 아브라함의 아들들(갈 3:29; 롬 4:16), 남은 자(롬 9:27; 11:5-7),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5-16), 하나님의 택하신 자(롬 8:33), 그리스도 예수님 안의 신실한 자들(엡 1:1),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새 사람(골 3:10), 하나님, 그리스도, 의의 종(롬 6:18, 22), 그리고 그리스도인들(행 12:26). 이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용어는 신약에 114회, 바울 서신에 64회 등장하는 ‘에클레시아’이다(참고. Roberts, 1988:269).

 

‘에클레시아’는 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2회 등장하는데, 바울 서신에는 '딤후'와 '딛'에만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고전후’와 ‘엡’에서는 이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헬라 세계에서 이 용어는 도시 국가의 시민의 모임이라는 정치적인 의미를 띤다(예. 행 19:32, 39, 41). 하지만 신약에서는, LXX에서처럼, 교회를 가리킬 때 ‘에클레시아’가 정치적인 색채를 띠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이 작용하는 백성들의 모임이라는 종교적인 색채만 띤다(the assembly of the Lord, qehal Jahweh, ekklēsia kyriou 수 8:35; 삿 20:2; 21:5, 8; 시 22:22, 25; 149:1; 욜 2:16).

 

바로 이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게 출애굽과 언약이 주어졌다. 바울은 이런 구약적 용례를 알고, 신약의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에클레시아를 계승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새 언약 백성이요, 종말론적인 새 이스라엘임을 밝힌다(고전 10:32; 참고. 미 4:1-3 [말일에]; 롬 10:13).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엡 1:3) 이 종말론적인 언약 공동체 안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선물로 주어졌다(고전 12-14; 참고. Roberts, 1988:295).

 

 

3. 교회의 다양한 형태

 

바울은 지역적인 신자들의 모임들을 교회로 생각했다. 대개 이런 교회는 가정 교회의 형태를 띠었다(롬 16:5; 고전 16:19; 고후 8:18; 11:8, 28; 12:13; 골 4:15; 몬 2). 바울은 특정한 지역의 교회를 언급하기도 한다: 겐그레아 교회(롬 16:1), 고린도 교회(고전 1:2; 고후 1:1), 라오디게아 교회(골 4:16), 데살로니가 교회(살전 1:1; 살후 1:1) 등. 바울은 더 넓은 지역 교회도 언급한다:

 

유대의 교회들(갈 1:22; 살전 2:14), 갈라디아교회들(갈 1:2; 고전 16:1), 아시아의 교회들(고전 16:19), 마게도니아 교회들(고후 8:1) 등. 더 나아가 바울은 성도의 모임들이 다시 세계 전체의 한 교회를 이루는 것으로 보는데(고전 10:32; 11:22; 12:28),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며(롬 12:4-5; 고전 12:12-27; 엡 1:22; 4:4; 골 1:18, 24)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엡 5:25-27; 31-32).

 

이 한 몸 안에 다양한 직분과 은사가 있다(롬 12:4-5; 고전 1:13; 12:12 이하 엡 4:15-16, 25; 골 3:14-15). 그리고 바울은 교회를 하늘과 땅에서 구주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장차 연합될 신실한 그리스도의 전체 수(불가견적 교회)로 보았다(엡 1:22; 3:10, 21; 5:23-25, 27, 32; 골 1:18, 24).

 

교회 앞에 ‘하나님의’(고전 1:2; 10:32; 11:22; 15:9; 고후 1:1; 갈 1:13; 딤전 3:5, 15), ‘그리스도의’(롬 16:16), ‘그리스도 안에 있는’(갈 1:22)과 같은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바울은 특별히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하는 몸으로(엡 1:22-23; 2:16; 4:4, 12, 16; 5:30; 골 1:18, 24; 2:19; 3:15),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설명한다(엡 5:22-23).

 

히브리서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집(히 3:6)이요, 안식을 앞두고 있는 나그네 길을 걷는 하나님의 백성이요(히 3:7-4:13; 11:19, 13; 13:14), 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형제들이다(히 2:17). 또한 히 12:22-24절은 교회가 하늘의 예루살렘성과 시온 산에 이른 자로 설명한다. 교회가 이른 곳은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은 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온전케 된 영들이 있는 곳이다.

 

 

4. 교회의 특징, 직분 그리고 사명

 

교회는 정적인 개체(a static entity)가 아니다. 대신 교회는 세움과 성장을 경험하는 역동적인 유기체이다. 교회는 영적 아이의 수준에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며 서로 사랑 안에서 자라나야 했다(고전 3:1; 갈 4:3; 엡 3:18-19; 4:3-6, 13-15; 골 2:2). 이렇게 자라나고 연합되기 위해서 사랑으로 여러 은사들이 활용되어야 한다(고전 12-14). 교회는 물질과 기도로 선교에 협력해야 한다(롬 1:8; 고전 4:16; 11:1; 빌1:5, 14, 27; 살전 1:6).

 

그리고 교회는 장로를 세워서 치리해야 했다. 장로의 자격은 딤전 3:2-7절과 딛 1:6-9절에 나타난다. 장로의 뿌리는 구약에 둔다(출 3:16, 18; 4:29; 17:5-6; 18:13-27; 19:7; 24:1; 레 4:15; 9:1-2; 민 11:14-25; 신 5:23; 22:15-17; 27:1; 수 7:6; 8:33; 삿 21:16; 왕상 8:1-3; 대상 21:16; 시 107:32; 겔 8:1 등; 참고. 행 14:23; 22:5). 집사의 자격은 딤전 3:8-12절에 나타난다(참고. 행 6:1-7). 바울에 의하면 장로와 집사의 자격 요건 중 영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참고. 레이먼드, 2003:606-620).

 

참고로, 교회의 직분은 초대교회가 정규적으로 모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추구함에 따라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예수님의 재림이 곧 바로 발생하지 않자 직분은 교회에 본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직분이 감독, 장로, 집사 등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직분에 대한 신학적인 다양한 해석이 가미되어 때로는 그 의미가 왜곡되기도 했다. 먼저 최초의 직분이라 할 수 있는 사도에 대해 살펴보자. 사도라는 말은 히브리어 shaliach에서 나온 말인데 사자, 대리, 전권대리인이란 뜻이다(마 10:40).

 

예수님은 성부의 사자(사도)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히 3:1), 12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도이다. 물론 사도이신 주님의 사역은 12제자와는 결정적인 차이를 가지는데 예수님만 계시의 주체이시며 대속적인 희생을 드리신 분이시고 사단을 부활로 이기신 분이시다.

 

사도는 신적 기원을 가진다. 바울의 경우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에 자신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을 갈라디아서 서두부터 강력히 주장한다(갈 1:1). 12제자는 파송의 주체이신 예수님만 증거해야 했다. 간접적으로는 12제자가 성부의 사도이기도 하다. 하여튼 12제자는 예수님에게서 전권을 부여받아 천국 복음을 전했던 목회자들이었다. 그리고 교회의 기초 역할을 했다(마 16:18).

 

12란 숫자는 계시사적으로 구약 이스라엘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는 12라는 숫자로 대표된다. 사도는 예수님의 권세뿐 아니라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섬김의 삶도 계승한다(막 10:43). 비록 이런 사도직의 정신은 신약 교회 전체에 적용되지만 사도직 자체는 12제자에게만 일시적으로 적용된다.

 

여기서 일종의 유비를 찾아 낼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의 목사라는 직분은 사도의 직분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의 봉사자요 교회의 선생으로 구별하여 세운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다른 교회 직분들이 그 정신에 있어서 목사직과 유사하게 교회를 섬기고 세우는 역할을 한다고 할지라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만인제사장설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마치 목사직의 독특성이나 영적 권위조차 무시되어도 좋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이 없다면 넓게는 공예배에서 좁게는 성례식에서 질서가 파괴되어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은 정당하게 우리의 예배를 받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의 구별됨이 모든 교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목사직에는 더 분명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이외에 감독, 집사, 선지자, 장로와 같은 여러 직분이 신약에 등장하지만 위계질서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 기능이 다르다고 한다 (상세한 것은 케빈 길레스. 1999. ‘신약 성경의 교회론’. 기독교문서선교회 이승구. 1996. ‘교회란 무엇인가?’ 여수룬을 보라).

 

 

5. 바울의 세례와 성찬 이해

 

세례와 성찬은 바울이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전해 받아 이방 선교지역에 있던 교회들에게 전해 준 주님께서 제정하신 교회의 두 성례이다.

 

(1) 세례

 

초대교회에서도 물세례는 계속 시행되었다(행 2:38). 행 19:1-7절에 보면,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에베소의 제자 12명을 만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베풀자 성령이 임했다. 행 22:16절에 의하면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즉시 세례를 받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세례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 안엷 있는 상태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죽음과 부활은 그들의 영적인 체험의 일부가 된다(롬 6:3; 고전 6:11; 12:13; 갈 3:27 이하).

 

고전 10:1-11절에 의하면, 구약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것 (혹은 하늘의 만나와 반석의 물에 참예함)이 그 죄악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에게도 세례(와 성찬)는 자신의 불충성과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해 주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세례는 옛 사람과 새 생명-새 사람을 구분하는 분수령이 된다.

 

세례 받은 성도가 계속해서 죄 속에 거한다면 해방된 노예가 다시 이전의 주인에게 예속되는 것이다 (롬 6). 세례를 언급하면서 바울은 새 생명의 원천인 성령에 의해 이전의 죄악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엡 5:25; 골 2:12).

 

(2) 성찬

 

바울은 고전 11장에서만 성찬에 대해서 언급한다. 하지만 세례처럼 성찬을 통하여서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공동체 사상이 강조된다. 고전 10:16절과 고전 11장에서 바울은 성찬의 수직적-수평적 친교에 강조점을 둔다. 세례를 통해서 개인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참예하듯이,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연합하게 된다.

 

바울은 고전 11:25절에서 ‘잔’은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상징한다고 말씀한다. 옛 언약 백성은 짐승의 피를 흘리고, 짐승을 불태워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용서받았다. 하지만 옛 언약 백성이 제사장을 통해서 짐승을 바치는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린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십자가에 내 놓으심으로써 영원토록 유효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새 언약 백성의 죄를 사하셨다(히 9:23-28).

 

옛 언약이 약속한 것을 새 언약이 성취한 것이다. 성찬을 통하여 우리는 과거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돌아본다. 동시에 성찬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배설하실 신랑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내다본다(고전 11:26). 고전 11:29-30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주님의 몸을 분변하지 못하고 즉 주님의 대속을 바로 믿지 못하고 먹고 마신다면, 자신의 죄 즉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 시행된 성찬은 고린도 교회 안에 약한 자와, 병든 자, 잠자는 자가 많이 발생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잠자는 자’라고 말함으로써 이 벌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그런 종류의 심판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2세기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AD 150년경의 저스틴 마터에 의해 확정된 최초의 예배 순서에 의하면, 먼저 회중이 모이기까지 먼저 모인 사람은 신구약 성경을 계속 읽고, 다 모이면 설교를 했다. 그리고 공동기도를 한 후, 떡과 포도주를 가져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만찬 시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을 상기시킨 후 나누어 먹고 마셨다.

 

집사들은 남은 포도주와 떡을 모아다가 예배에 불참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헌금을 했다. 이처럼 2세기 교회의 예배는 성찬과 말씀이 공존했고, 예배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과 가난한 이웃까지도 돌보는 구제의 요소도 포함했다 (참고. 브루스, 1992:304-310).

 

 

6. 크리스천의 세례적 신분 (Baptismal identity of Christian)

 

2005년 7월 5-7일, 서울교회당에서 열린 제 6회 ‘세계 개혁신학회’(IRTI: The International Reformed Theological Institute)에는 남아공 (남아공 개혁교단과 화란개혁교단 학자들을 중심으로), 미국, 화란, 영국, 호주, 인도네시아, 콩고를 비롯한 총 18개국에서 약 50명의 외국 개혁주의 신학자 및 목회자와 한국에서는 약 10명의 신학자가 참석했다.

 

주제는 ‘크리스천의 정체성’(Christian identity)이었다. 사회-정치적 상황 종교적 상황, 그리고 문화적 상황 안에서의 성도의 정체성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여기서는 발표된 글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세례적 정체성’(Christian identity as baptismal identity)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네덜란드 태생으로 호주에서 활동 중인 Christiaan Mostert교수의 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성도의 정체성은 특별히 관계 속에서 즉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규명함으로써 알 수 있다. 궁극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에 매우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찬은 물론, 특별히 세례(baptism)는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확증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세례적 정체성은 성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한 가지 방식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의 신앙은 세례 없이는 완전해 진다고 할 수 없다. 세례적 정체성의 몇 가지 차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기독론적 차원: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떨어진 어떤 정체성도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여 우리 죄악이 장사 지낸바 되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예수님께서 수행하신 결과이다. 세례는 삼위일체적이다.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우리에게 행하시는 새로운 신분을 확증하는 의식이다.

 

(2) 성령론적 차원: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삼으시고, 더불어 성령을 주신다. 이 말은 성도가 비로소 성령을 세례 시에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세례에 합당한 고백을 성령을 통해서 할 수 있음을 확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례를 받은 후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3) 교회론적 차원:

 

세례는 한 개인을 교회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가입하게 한다. 성경은 무교회주의가 아니라, 가시적인 지역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가르치는데, 지속적인 신앙생활은 공동체적으로 가능하다. 세례를 받은 후, 성찬에 참여하고, 사도의 가르침과 성도의 교제와 기도 등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공동체로서의 교회적인 삶을 추구한다.

 

(4) 종말론적 차원: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미 죄에 대해 죽고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 하지만 세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악된 요소가 남아 있는 종말론적인 긴장 관계에 처해 있다. 여기서도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을 본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현재적으로 우리의 육체적인 죽음도 내다본다는 점이다.

 

환언하면, 세례는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과 의에 대해 사는 것이기에,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과거적인 의미와 더불어서 불특정한 미래적인 종말론적인 특성도 가진다. 즉 우리가 장차 죽고 영원한 부활 생명을 입을 미래적인 종말론적인 특성도 세례적 신분에서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미 죽고 산) 세례로부터 (from our baptism) 살 뿐 아니라, (앞으로 죽고 살) 세례를 향하여(towards our baptism) 산다. 그러므로 세례적 정체성은 현재 늘 우리와 함께 한다(The baptismal identity is with us every day).

 

우리의 신분을 결정지은 그리스도의 세례받으심(십자가 사건)은 현재의 우리의 세례적 신분뿐 아니라, 미래적인 우리의 신분도 이미 결정지어 버렸다. 이것이 가능함은 예수님의 전교회적, 만유적 인격 때문이기도 하고,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이 세례를 받는 것을 보는 것은 물론, 주일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세례적 신분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성찬적 신분(eucharistic identity)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5) 윤리적 차원:

 

세례를 받는 것은 새로운 윤리적 삶을 명령받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적 신분의 자연스러운 실천과 관련된다. 새로운 삶 즉 성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신분은 무의미하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 제자,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듦으로써, 구체적인 사회-문화-정치적인 이슈나 체제 속에서 세례적 신분에 걸 맞는 윤리적 삶을 표출하도록 명령한다.

 

세례적 신분은 성도의 신분을 다양하게 설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다. 사실 성도의 신분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는데, 다른 종교인과 구별되는 신분은 물론이거니와, 빛, 소금, 양, 신부, 혹은 아내와 같은 은유와 상징으로도 종종 나타난다. 이 사실은 우리가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정체성은 전인적이며 매우 풍성함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정체성이 의미가 있으려면, 이것을 깨닫고 삶으로 실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신분(identity)은 예수님과의 동일시(identification) 즉 주님을 닮아 감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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