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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쁨조미료25 2009. 4. 24. 15:01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쉬운 듯 하면서 설명을 하라고 하면 상당히 어려운 말이 된다.
전자의 [믿음]과 후자의 [믿음]은 같은 의미일까?
본문에는 두개의 전치사, “에크”와 “에이스”가 언급되어 있다.
“에크”는 대개의 경우 출발(from)을 말하며, “에이스”는 방향(to)을 가르키므로 본문은 믿음에서(으로부터) 믿음으로(에)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과연 출발이 되는 전자의 믿음은 무엇이며, 방향이 되는 후자의 믿음은 무엇일까?

이 두 믿음에 대해서 많은 학설과 견해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믿음에서 신약의 믿음으로 (A. Clarke)
(2) 낮은 믿음에서 높은 믿음으로 (마틴 루터)
(3) 수동적인 믿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눙동적인 믿음으로 (캘빈)
(4) 고백하는 믿음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실천적인 순종의 믿음으로 (어거스틴)
(5)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의 믿음으로 (칼 바르트)
(6)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E. F. Harrison)
(7) 전자와 후자의 믿음의 뜻은 동일하며 강조적인 어법이다. 즉 하나님의 의에 응답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라는 뜻이다.

많은 견해와 학설이 다 일리가 있으며 그 나름대로 논리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2)번의 캘빈의 견해와 (4)번의 어거스틴의 견해와 (7)번의 견해가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주석성경을 찾아보면, 톰슨주석성경은 (2)번과 (4)번을 유력한 견해로 소개하고 있으며, 아가폐성경주석은 (7)번을 유력한 견해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루터의 견해도 캘빈과 어거스틴과 표현적인 차이는 있지만 그 개념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의 믿음을 초기 단계의 믿음으로 보고 후자의 믿음을 성숙된 믿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해석은 전자의 믿음과 후자의 믿음이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7)번의 견해는 전자와 후자의 믿음을 동일한 것으로 보며, “오직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강조적인 문학적인 기법으로 보는 것이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케제만(E. Keseman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표현이 셈어적이며 수사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악에서 악으로’ (렘9:3), ‘죽음에서 죽음으로’(고후2:16),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3:18)등에서 드러난다. 이 어법은 위치상 주어는 될 수 없고 또한 사실상 동사와 연결될 수도 없다. 이것은 논리상 앞의 말들과 다만 간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 의미에서 깨뜨려지지 않는 연속성을 드러낸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새로운 세계의 차원’을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복음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오직 믿음의 영역에서만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동번역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표준새번역은 개역성경과 같이 성경을 그대로 직역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 영어성경은 다음과 같다.
KJV 영어성경: from faith to faith
NIV 영어성경: by faith from first to last
RSV 영어성경: through faith for faith

어쨌든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빌립보서3:9에서 잘 나타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의로운 자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인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이스만(A. Deissmann)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소를 당한 인간에 대한 법정고소가 취하된다. 그는 정죄가 아니라 자유로 판정된다. 이러한 무죄석방이 바울의 이신칭의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칭의란 죄가 없는 자의 무죄석방이 아니라, 죄가 있으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마틴루터는 “기독교인이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다이스만은 “우리는 칭의에 관한 바울의 사상에서 현재적 소유의 의식과 미래의 충분한 소유의 기대 사이에 역동적 긴장을 본다”라고 말하였는데, 의롭다는 무죄선언은 현재적이 된다. 물론 그 궁극적인 칭의에 대한 소유는 미래의 영역에 놓여진다.

“기록된 바”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바울은 하박국2:4을 인용하고 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는 정직하지 못하도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약의 하박국 구절은 바울을 통하여 로마서 1장17절에 인용되어지며, 갈3:11과 히10:38에도 인용되어진다.

바울은 에베소서 2:8을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바울은 시대적이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박국 예언자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와 함께 하였던 성령의 감동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성령께서 주셨던 그 감동이 바울의 영적지각을 통하여 로마서1장 17절을 기록하게 하였고, 그 성령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틴루터와 웨슬레가 그 말씀을 들었을 때에 뜨거운 회심과 감동을 주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이다.

하박국이란 히브리어 이름이 “껴안다”(하박크)라는 뜻임이 결코 지나칠 우연은 아닌 것 같다.

 

http://cafe.daum.net/ag94/5PlK/39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