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다원주의의 종교 철학적 논의 방식과 그 문제점
- John Hick의 종교 철학적 논의와 기독교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조직신학)
한국기독교철학회
2001년 추계학술발표
다양한 입장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제시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과정 신학의 관점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1 다른 종교들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거룩한 삶을 바라보면서,2 좀더 구체적으로는 힌두교와 기독교의 대화의 관점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말하기도 하고,3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기도 하고,4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대화의 관점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기도 하며,5 좀더 나아가 세계의 많은 종교들 사이의 새로운 통일성을 생각하면서 “통일적 다원주의”(unitive pluralism)를 말하는 이들도 있고,6 그에 반대하면서 다원성(plurality)과 대화(dialogue), 그리고 연대(togetherness)를 강조하되 모든 종교의 통일성(unity)을 말하는 것에는 반대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는 이들도 있다.7 힉의 이른 바 “신학적 루비콘 강을 건넌”8 이들의 입장도 역시 다양하므로, 그들의 주장을 정확히 알고 그에 대해 바른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들의 다양한 주장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나는 이 소 논문에서 이들 가운데서 근자에 가장 영향력 있는 힉의 종교 다원주의 주장에 집중하고자 한다.9 먼저 그의 사상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I), 그의 종교 철학적 논의의 특성들을 이끌어낸 후(II), 이런 철학적 전제에 의하면 기독교가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살펴보고, 종교 다원주의 주장 안에 있는 기독교는 그 철학적 전제로 인해 어떤 변형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를, 그리고 사실 힉은 적극적으로 그런 변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그리고 이 점은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 안에 있는 기독교’ 또는 ‘종교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기독교’ 또는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세계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기독교의 형태’(a form of Christianity which can be part of the religiously plural world of today and tomorrow)는10 그것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전제로 인하여 전통적, 성경적 기독교와는 다른 기독교일 수밖에 없는데(III), 이렇게 다원주의적으로 변화된 기독교와 성경적 기독교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태도들의 모델들을 제시해 보고(IV), 결국 힉의 종교 다원주의 사상에 직면한 우리의 선택은 기독교를 종교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있도록 변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 성경적 기독교를 유지하고 신뢰할 것인가 하는 것이 될 것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I. 힉(John Hick) 사상의 변천 과정
힉은 자신이 상당히 복음주의적 신앙에서 사상적 순례를 시작하였음을 자주 밝히고 있다. 이는 특히 복음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논의하거나 말할 때 그가 채용하는 논의의 방식이다.11 그는 자신이 말하는 대로 성공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고 성공회에서 자라났으나, 그가 18세 때인 헐(Hull) 대학교의 University College의 법대 신입생일 때 신약 성경의 예수께로 복음주의적 변개를 할 때까지는 기독교적인 모든 것은 “전혀 생명력이 없고 흥미도 없는 것으로” 여겼었다.12 그는 기독학생회(IVF)에 속하여 복음주의의 모든 것과 함께 “특정주의적 근본주의적 지성 꾸러미”(the particular fundamentalist intellectual package)을 받아들였었다고 한다.13 그러므로 그의 사상 형성기에 영향을 미친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우리는 영국적 복음주의적 신앙 운동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의 여러 요인들, 즉 2차 세계 대전 중의 경험, 신학교에 가기 전에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옮긴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받은 칸트 사상의 영향, 그 후 옥스퍼드 대학교의 오리엘 대학(Oriel College)에서 프라이스(H. H. Price) 교수 지도하에 “신앙과 믿음”(Faith and Belief)이라는 제목의 박사 학위 논문(D. Phil. dissertation)을 쓰는 과정,14 그리고 후에 신학부의 우드 교수(H. G. Wood Professor)로 있던 버밍햄에서 수많은 여러 다른 종교 사람들과의 교제 가운데서, 특히 “하나의 인류를 위한 모든 신앙들”(All Faiths for one Race)의 설립 위원과 초대 의장으로서의 경험에 근거하여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켜 나아갔다.15
물론 그는 옥스포드에서 박사 학위를 한 후 캠브리쥐의 Westminster College에서 장로교 신학 과정을 하고 (나중에 회중파 교단과 연합하여 연합 개혁 교회(the United Reformed Church)가 된) 영국 장로 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England)의 목사로 임직하고 3년 동안 목회도 하고, 미국 코넬 대학교 철학부의 청빙을 받아 종교 철학의 가르치는 조교수로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이 때만해도 도날드 베일리의 역설적 기독론이 칼시돈 정통주의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할 정도로 보수적이었다고 한다.16 그 뒤에 그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한 동안 가르치고, 영국에 돌아가 캠브리쥐 대학교에서 가르친 후 버밍햄 대학교 신학부의 우드 교수(H. G. Wood Professor)로 취임하였다. 그후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클래어몬트 신학대학원(Claremont Graduate School)에서 가르치다 은퇴하여 버밍햄 대학교의 인문학 고등 연구소(the Institute for Advanced Research in the Humanities)의 연구원으로 있었다(1998년).
힉은 1970년대, 특히 1977년 몇몇 동료들과 함께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신화(The Myth of God Incarnate)라는 책을 내어서17 영국의 신학계를 놀라게 하고 도전을 주었다.18 이 책에서 힉과 그의 동료들이 강조했던 바는 결국 전통적 성육신 사상은 결국 4, 5 세기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인물 안에서 역사하신 것을 표현하는 그 시대적 방식이었지,19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이해 가능한 진술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 힉과 그의 동료들의 생각은 기독교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현대인들에게 받아 들여 지지 않는 형태의 기독교적 진술을 재해석하여 제시하자는 것이고, 이것은 그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기독교의 형태를 바꾸자는 시도로 이해되었다.
성육신 문제를 제기하면서 힉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개념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에서 보다 일반적인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소위 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Copernican Revolution)을 경험하며 요청했다. 그는 1973년부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중심에 계신 분은 신이시고, 우리 자신의 종교를 포함한 ...... 모든 종교들은 그를 섬기며 그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이다”.20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도 말한다: “종교적 우주의 중심은 그리스도나 어떤 종교가 아니라, 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신이 바로 빛과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며, 모든 종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21 그는 이런 접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보는 기독교를 탈피하여 자신이 제시하는 기독론과 잘 조화할 수 있는 신론과 그런 접근법의 기독교와 신학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힉이 생각하는 신은 그가 속한 전통이었던 기독교적 신 개념에 가까운 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신을 인격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신을 비인격적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특별한 신의 존재를 말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깊이 의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 이후로 그는 신중심의 모델(God-centered model)에서 실재 중심(Reality Centered) 또는 구원 중심의 모델(salvation-centered model)로 나아간다.22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그의 신중심의 모델을 좀더 철저화하면서 자신의 신중심의 모델에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사상을 좀더 정교하게 표현해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신에 대한 생각은 이전에 신 중심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발전적으로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칸트의 현상계와 예지계의 구별을 원용하여 현상적 신들과 예지적 신을 구별하고, 예지적 신에 해당하는 것을 실재(Reality or the Real),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또는 궁극적인 것(the Ultimate)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힉은 이렇게 말한다: “많은 이들은 무한히 큰 초월적 실재(a limitlessly greater transcendent Reality)와의 연관 가운데서 삶을 경험한다. 그것을 우리의 현존재를 넘어선 실재의 방향으로 인식하든지, 아니면 감취어진 심연 안의 방향으로 인식하든지 말이다.”23 이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힉의 묘사는 다음과 같다:
궁극적인 것은 그 자체 이외의 것을 초월하면서, 그 자체는 그 자체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초월되지 않는 추상적 실재이다. 이렇게 이해된 궁극적인 것은 우주와는 그 근원 또는 그것의 창조자로, 우주의 의식적인 부분인 우리네 인간들과는 우리 존재의 원천과 그 존재의 가치 또는 의미의 원천으로 연관된다.24
이런 궁극적 것, 즉 힉적인 신[초월적 실재]과 관련해서 각각의 문화들 가운데서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다양한 신의 표상들이 있게 된다고 한다.25 그 다양한 현상적 신들이 기독교의 하나님, 이슬람교의 알라, 유대교의 하나님, 힌두교의 브라만, 불교의 부처[佛] 등등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이 궁극적 실재의 진정한 표현(authentic manifestations of the Real)이라는 말이다.26 그러므로, 힉에 의하면, 이 각각의 종교에 속한 이들은 “서로 다른 인간적 개념의 ‘렌즈들’을 통하여 신/거룩한 것/궁극적인 실재를 보며, 그에 상응하는 서로 다른 종교적 경험들의 형태들 속에서 각기 다른 영적 실천들을 통해 그들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 모든 종교들은 모두가 모든 것의 종국적 근거와 원천인 궁극적 존재, 즉 실재에 대한 참된 인간적 의식과 반응인 것처럼 보인다.”27
그러나 우리는 실재하는 대로의 신은 결코 의식할 수 없고, 오직 “우리 자신들의 전통의 개념적 렌즈를 통해서 생각되고 경험된” 신, 즉 현상적 신들만을 의식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개념과 관련해서 힉은 자주 토마스 아퀴나스의 “알려진 것은 인식자의 방식을 따라서 인식자 안에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이용해서 설명해 보려고 시도한다.28 (그러나 그의 의도에 아퀴나스가 반대하리라는 것은 상당히 자명해 보인다). 힉은 그 궁극적 실재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실재 자체(the Real a se) 에게 그것이 인격적이라거나 비인격적이라는, 또는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거나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또 본질이라거나 과정이라는, 심지어 하나라거나 많다고 하는 그 어떤 본질적인 속성들도 부여할 수 없다.”29 단지 우리의 신 경험에서 인간적으로 생각되고 경험된 것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힉은 자신이 신중심의 모델로 생각하던 시기에 가지고 있던 한 가지 난점, 즉 어떤 종교에서는 신이 인격적으로 진술되고 또 어떤 종교에서는 신이 비인격적으로 진술되는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실재 자체에는 인격적/비인격적 개념이 도무지 적용될 수도 없지만,30 그 실재는 현상계에서는 인격적으로 생각되거나 경험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 의해서는 비인격적으로 생각되거나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이다.31 그리고 그 궁극적 실재에 대해 어떤 개념을 적용하여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화적(mythical)인 것이라고 한다. 이 때 자신이 사용하는 ‘신화’라는 말의 개념에 대해서 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신화라는 말을 문자적으로는 참되지 않지만 그 주제에 대하여 성향적 태도를 유발하는 경향이 있는 이야기나 진술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신화의 진리성은 실천적인 진리이다. 즉, 참된 신화는 우리가 신화적인 방식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실재와 우리를 바르게 관련시키는 것이다.32
이런 신화 이해는 40년대의 불트만의 신화 개념과 유사하며, 힉과 함께 작업하는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화 개념이다.33 따라서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것이 이런 의미에서 신화적이며, 기독교의 상당한 주장이 다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진술들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힉은 궁극적 실재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각각의 관점은 진실하며 타당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각각으로서는 신이라는 큰 실재를 온전하게 서술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각각의 개념과 이해는 전체의 한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각각의 진술은 결국 상대적일 뿐이고, 궁극적 실재에 대해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의 논리보다는 ‘둘 다’(both-and)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한다.34
이 구원 중심의 모델을 취한 시기에는 종교들을 구원/해방/깨달음[覺]/성취의 척도로 잰다는 것을 이시기의 두 번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힉에 의하면 이 구원/해방/깨달음[覺]/성취는 개인이 전적인 자기 중심과 자기 관심으로부터 신 중심으로 변화하는 것이다.35 그러므로 힉에 의하면 모든 인간 해방의 주장이 다 종교적인 것으로, 궁극적 실재와 관련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서, 여성 해방 운동도 중요한 종교적 운동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힉은 여성이 자아를 가져야만 한다는 여성해방 운동의 주장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현대의 여성 해방 운동이 인간 해방의 큰 운동 중 하나로서 오늘날 우리의 세상에서 구원적 변화의 선두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36 이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모든 인간 해방 운동을 설명하는 그의 종교 신학(theology of religions)의 중심 주제가 소위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II. 힉 사상의 종교 철학적 논의의 특성들
힉의 종교 다원주의는 과연 어떤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힉이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철학 수업을 하면서 영향을 받은 칸트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힉은 자신이 칸티안(Kantian)임을 공언한다. 그의 윤리 중심적 태도도 이를 확증해 준다고 할 수 있고, 특히 그가 현상계와 예지계에 대한 칸트의 구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종교, 특히 신의 문제에도 적용하여 신 자체는 알 수 없고, 그 어떤 개념도 신 자체에게는 적용할 수 없으나, 그 신 자체(예지계의 신)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은 칸트의 사상의 자유로운 원용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울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의 다양한 신 개념들을 예지적 실재에 대한 현상적 반응들로 이해하는 것이다.37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1) 힉이 칸트를 원용하면서 말하는 것과 (2) 칸트 자신의 생각이다. 현상계와 예지계의 구분은 분명히 칸트에게서 온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근본적으로 신은 예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신의 현존은 자유, 영혼의 불멸성과 함께 실천 이성의 요청(postulation)으로 경험 세계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들에 대한 이해를 인식이나 지식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라고 부른다.38 물론 칸트에게는 신에 대한 인식(eine Erkenntnis Gottes)이 확실히 존재하기는 하되, 오직 실천적 관계에서만 존재한다.39 강영안 교수가 잘 정리하고 있는 대로, 칸트에 의하면,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거나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실천 이성의 요청으로 인해 우리는 신을 세계의 창조자요, 주인이며, 통치자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신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모두 질서 있게 통치할 뿐 아니라 덕과 상응하는 행복을 누구나 누릴 수 있게 하도록 세계를 통치한다. 실천 이성의 요청은 신의 활동을 세계의 원인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40
그러므로 칸트가 이성적인 믿음을 통해 인식하는 하나님은 전능하고, 전지하며,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칸트에 의하면 “자연의 최상 원인은, 최고선을 위해 그것을 우리가 전제하는 한에서 지성과 의지에 의해 자연의 원인인 존재자, 즉 하나님이다”.41 칸트가 생각하는 실천 이성에 의해서 요청된 신은 지성과 의지를 지닌 인격적인 존재이고, 온 세상을 현세와 내세에 이르기까지 다스리며 판단하는 전능하신 판단자이다. 그런데 힉은 이런 신 개념도 신 자체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신에 대한 현세적 파악의 하나일 뿐이라고 여길 것이다. 힉은 칸트의 신 개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렇게 칸트와 힉의 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 후에는 칸트가 과연 힉이 시사하는 것과 같이 신 자체와 현상계에 있는 신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려는 지도 또 하나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아마도 그의 사상에 근거해 힉이 제시한 이런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들이 비전문가들에게서보다는 칸트 전공자들 가운데서 더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힉에 대한 종국적 철학적 비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와 칸트 이후의 모든 철학의 목표가 칸트의 사유를 넘어 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면, 힉과 그에게 동감적인 이들은 자신들이 말하려는 바는 칸트를 항상 그대로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칸트의 기본적인 사유에 근거해서 우리 시대의 복잡한 문제인 종교의 문제, 특히 종교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힉은 칸트 사상의 창조적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칸트의 사상과 구체적인 면에서 다른 점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칸티안(Kantia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의 공통적인 사유 방식으로 칸트의 경우에 있어서는 도덕성, 힉의 경우에 있어서는 인간의 해방을 중심으로 종교를 이해해 보려고 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 종교, 즉 이성적 기독교가 참된 종교인 것은 그것이 도덕성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은 것들 가운데 인간 해방에 기여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구원적 변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환원주의(reductionism)가 그들의 철학적 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힉의 종교 철학적 논의의 두 번째 특성으로 언급될 수 있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구원적 변화를 강조하는 힉의 입장은 윤리와 도덕성을 강조하던 칸트의 입장과 가깝게 갈 수도 있으니, 힉은 이 세상에 종교라고 이름하는 모든 것을 다 옳고 바른 것으로 수납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 것들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힉은, 예를 들어서 어떤 외진 곳에 사는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 어린 아기 희생 제사가 일어난다고 할 때 그들을 정죄할 수 없으니 자신은 그 부족에게 있어서 그런 희생 제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필립스의 입장과는42 다르게, 이런 인신 제사를 하는 종교를 긍정적으로 수납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힉 입장의 철저한 환원주의적 특성이 잘 나타나는 것이다.43
힉은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한 것이라는 주장도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경험적 자료(experimental data available to everyone)에 근거해서 나타나야 하고, 그런 자료는 그 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더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는데,44 이런 주장에도 그의 환원주의적 사유가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종교의 등급을 매길 수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면서 두 가지 기준, 즉 각각의 종교들의 “신념들에 적용된 이성과 그 신념들이 역사적 작용에 적용된 양심 또는 도덕 판단”을 제시하는데,45 이 둘이 결국은 다 윤리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되니, 첫 기준으로 말하는 복잡한 종교 경험에 적용된 이성도 인간 실존을 자기 중심에서 실재 중심으로 바꾸는 일에 있어서 효과적인가 하는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46 물론 힉은 이것이 종교의 독특한 측면을 보여 준다고 말하고 강조하나, 많은 이들은 여기서도 윤리적 측면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힉은 결국 윤리적인 측면을 떠나서는 종교들을 비교하여 등급을 매길 수 없고, 그런 등급 매김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사가 끝나봐야 가능하다고(그의 유명한 “종말론적 검증”이 여기서 나타난다!) 하는 것이다. 물론 각 종교는 그 나름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47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 모든 전통들 안의 성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종교는 다 자아로부터 실재에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서 동등하게 생산적이다.”48 이렇게 그는 아주 윤리적이지 않은 종교, 그리하여 그가 말하는 성인(聖人)적인 이들을 전혀 내지 못하는 종교들을 제외하고서는 세상의 큰 종교들이 다 같은 정도로 구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힉의 종교 철학적 논의의 특징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모든 종교가 결국은 다 같은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개연성에 근거한 논의를 말할 수 있다. 힉에 의하면, 우리는 신을 있는 그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양한 종교적 경험들 배후에 어떤 실재가 있다고 믿는 것이 개연성이 있으며, 그 실재는 비록 서로 다르고 갈등하는 식으로 경험된다고 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라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고 한다.49 이렇게 개연성에 근거한 힉의 논의의 핵심은 결국 이 세상의 각각의 종교가 말하려 하는 바가 본질적으로는 다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힉은 (1) 모든 제대로 된 종교는 궁극적으로 같은 궁극적 실재(the Real)에 대한 표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2) 모든 종교가 힉이 말하는 구원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결국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힉이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각각의 (종교) 전통들은, 결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삶의 목적인 구원적 변혁의 참된 배경임을 나타내 보여 준다”는 것이다.50 그리고 이것이 힉 자신의 거대 담론(meta-narrative)이 되는 셈이다. 그는 카슨이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다른 배타주의적 주장들이 결국은 상대적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다원주의적 주장을 거대 담론으로 제시하는 것이다.51
그러나 그것은 결국 각 종교들 사이의 차이점을 경시하게 하는 문제를 낳는다. 이에 대해서 캐뜨린 태너는 식민주의적 논의(colonialist discourse)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모든 종교에 공통성이 있다는 다원주의의 일반화는 진정한 대화를 하는데 장애가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반화는 결과를 미리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성은 대화 과정 가운데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수립되어야 하는 것인데, 다원주의자들은 대화의 전제로 삼기 위해 미리 설정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다원주의자들은 이러한 공통성에 대해서 다른 종교인들이 가질 수 있는 입장에는 귀 기울지 않는다. 더욱이 ...... 공통성에 대한 다원주의의 강조는 세계 종교들간의 차이점을 경시한다.52
차이점이 많은 문제들을 정면으로 직면하지 않으면 참된 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인데도 힉을 포함한 다원주의자들은 그 점보다는 공통점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여러 종교들 간의 비슷한 것을 같은 것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이다.53 맥그라뜨는 이에 대해서 그러다 보면 쉽게 조화를 찾기 위해서 고의로 차이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지적을 한다.54 그래서 결국 이런 접근은 “세계 종교들이 종교적 사상만큼이나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차이를 보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지극히 명백한 사실을 그럴싸하게 얼버무리는 것이다”고 구체적으로 비판한다.55 맥그라뜨는 이렇게 비판하기도 한다: “사실 종교 다원주의는 종교들의 고유성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하므로 잠재적으로 극심한 억압적 성격을 띠고 있다. 모든 종교들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초월적 실재를 표현하고 있다는 신념은 기껏해야 허울뿐이며, 최악의 경우 억압적이다”.56 종교 다원주의가 다른 종교들의 차이보다는 공통성을 너무 강조하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른 종교에 속한 이들도 비슷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어서, 불교 사상가들도 도교와 유교와 불교가 같은 산을 오르는 다른 길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다.57 그리고 다원주의자들의 이런 일반화하려는 논의에 대해서 최후에는 “종교가 무신론보다 더 타당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기도 한다.58 물론 힉 자신은 자신이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했다고 여길 것이다. 왜냐 하면 그가 관심하며 함께 비교해 보려고 하는 것은 유신론적 전통들과 함께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의 비유신론적 전통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모택동주의, 인도주의(humanism) 등의 비종교적 신앙들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자주 말해왔기 때문이다.59 이 모든 문제는 어쩌면 힉이 그 자신이 말하는 대로 여러 종교들과 신앙들을 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종교 다원주의적으로 바꾸었다기 보다는, 또한 다른 곳에서 그 자신이 말하듯이 “의미 있는 신정론은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의 궁극적 구원을 확언해야만 한다고 결론 내린” 것으로부터60 나온 생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이런 결론을 가지고 버밍햄으로 옮겨 다양한 종교인들과의 실제적 접촉을 시작하는 것이다.61 그러므로 여러 종교들의 유효성에 대한 관찰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나왔다고 여겨지기보다는 그의 보편 구원론적인 전제가 그의 종교 다원주의를 낳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넷째로, 힉의 종교 철학적 논의는 오늘날의 다른 많은 이들과 함께, 명제적 진리 개념을 부인하는 인격적 진리 개념에 근거한 논의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힉도 종교적 진리는 그 종교적 신념들을 만족스럽게 충용하는 사람들 안에서만 그 위치를 가진 것이고, 따라서 신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준다는 의미에서만 참되다고 한다.62 그런 입장에서 힉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나는 신학을 인간의 창작물이라고 본다. 나는 히브리어로든, 헬라어로든, 영어로든 또는 어떤 다른 언어로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제들을 계시하신다고 믿지 않는다.”63 이 점에서 힉과 비슷한 입장을 지닌 스미뜨도 종교적 진리에는 진위(眞僞)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64 스미뜨는 다른 곳에서 모든 교리는 인간 사상의 산물이므로 “우리의 지성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절대화하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까지 말한다.65 그리하여 그는 아주 강하게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가 참되고 종국적이고 구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구성하셨다고 상상하는 것은 ..... 우상 숭배이다”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66 따라서 우리가 후에 논한 성육신에 대해서도 힉은 이것이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아니고, 또 신약 성경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성육신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이는 단지 “하늘 아버지를 자신에게 실재적이게 해주신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67 힉은 초기부터 이런 생각을 표현해 왔었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문자적으로 참된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왕에게 돌려지는 신적 아들 됨의 개념의 기능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신화적 개념을 예수께 돌리는 것이다.”68 그러므로 이런 신화적이고, 비유적인 의미에서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힉의 종교 철학적 논의의 특성들을 정리해 보았다 철학자들과 종교철학자들은 이 하나 하나의 요소들의 큰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힉의 종교 다원주의 사상의 보다 근본적 문제점은 그가 자신의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성격을 바꾼다는 것이다.69 이에 대해서는 모든 종교가 각기 나름의 주장을 할 수 있겠으나 기독교 전통과 관련해 있은 우리들로서 그가 종교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서 그가 기독교를 어떻게 변경시키고 있는 지를 논의해 보기로 하자.
III. 힉의 기독교와 그 특성들
힉이 말하는 기독교, 그의 다원주의 사상 안에 있는 기독교, 또는 그의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기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지를 다음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예수에 대한 이해
기본적으로 힉의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신인(the God-man)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힉은 처음부터 그런 개념은 정합성을 가지지 못한 자기 모순적 개념이라고 천명해 왔다.70 그는 자기 중심으로부터 온전히 실재 중심으로의 전환을 이룬 분이며, 다른 이들의 이 전환을 자신과 관련하여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다. 힉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결코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적어도 이것은 아직까지 증명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 그리고 그를 통하여 세상에서 행동하실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신적 영감에 개방적이고, 신적인 영에 반응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였다는 뜻에서 이것은 강력한 은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믿기에는 이것이 참된 기독교적 성육신 교리이다.71
이처럼 힉은 성육신 교리에 대한 개념을 전통적인 개념으로부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힉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의식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았다고 한다.72 힉은 이렇게까지도 말한다: “실로 예수는 아마 그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개념을 신성 모독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을 것이다!”73 힉은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속성들을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칼빈주의 신학이 말하는 밖에서(extra-Calvinisticum)을 생각하지 않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 2:9)라고 말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적 삶 속에서 표현될 수 있을 만큼의 무한한 신적 도덕성들을 구현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74 그리고 예수는 그저 “신의 실재를 강력하고도 넘칠 정도로 의식하고” 있었고, “그의 영은 하나님께 대해서 열려 있었고, 그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속적인 반응”이었다고 말한다.75 그래서 그가 “손을 대면 병든 자가 고침을 얻었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그의 면전에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고 한다.76 힉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이 사람은 자신의 역할을 세상에 올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을 선포하는 마지막 선지자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로마의 황제들, 애굽의 왕들, 그리고 위대한 철학자들과 종교적 인물들은 때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으며, '신적'이라는 말이 당시에 지니고 있던 폭넓은 의미에서 '신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77
따라서 힉은 성육신이라는 용어를 유지한다고 해도 이를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신화적으로 또는 비유적(은유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78 힉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성육신 개념에 대해 문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단지 그것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79 이런 비유적 성육신 개념에 근거해서 그는 성육신의 의미를 매우 확대한다. 그리하여 힉은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그리고 이런 은유적 의미로,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한,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 안에서 ‘성육신 하셨다’, 구현되셨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든지 몸이나 마음이 병든 사람들, 연약해서 억압받는 사람들, 난민들, 나약한 아이들, 착취를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별하여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으로 행한다면, 언제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에 성육신 하게 된다.80
그러므로 이런 변용된 성육신 개념에 의하면, 우리가 진정 사랑에서 어떤 행동을 하면 그곳에 성육신이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가 무사(無私)한 사랑 가운데서 행할 때마다 아가페가 인간의 삶 가운데서 성육신 하는 것이다”.81 따라서 힉에 의하면 성육신은 예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예수에게서는 그 사랑의 성육신이 놀랍고 획기적일 정도로 일어났고, 그의 실제 역사적 영향력은 그 정도에 있어서 독특한(unique) 것이라고 말하지만 말이다.82 이렇게 자신이 새롭게 구성한 성육신 개념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자유롭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행동하시고 그들의 행위들 안에 ‘성육신 하시게’(incarrnate)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은유는 강력하면서도 이해하기가 쉽다”.83 그리고 그가 다시 구성한 예수의 가르침, 특히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의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있을 필요성이나 하나님으로 하여금 용서하도록 하기 위한 속죄적 죽음의 필요성에 대한 시사가 없다”는 것이다.84 따라서 힉에 의하면 예수는 중보자가 아닐 뿐만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중보자가 있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다.85
2. 신 개념의 변화
성육신 개념의 변화로부터 힉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신 개념의 변화가 나타난다. 위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과 연관해서 말한다면 힉의 기독교의 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께서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하므로 결국 그는 삼위일체론을 포기하는 입장에서 기독교의 신론을 새롭게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힉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는 이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교회의 창작물로서, 예수 자신은 아마도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여겼을 교리”라고 한다.86 따라서 힉의 새로운 예수 이해에 따라 나온 새로운 신 개념에서 “세 위격들은 한 하나님이 인간과 관련하여 행동하심으로써 경험되어지는 세 가지 방법들 - 창조주로서, 변혁자나 구속주로서, 그리고 내적인 영(inner spirit)으로서이다.”87 이 문장 자체는 양태론에 가까운 이해를 제시하나, 엄격하게 힉 자신의 생각을 따지면 그는 삼위일체론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즉, 그는 양태론적 이단 개념에도 못 미치는 신 개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힉의 기독교의 신은 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신에 대한 비인격적 표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격성과 비인격성의 피안에 있는 신으로 나타난다. 우리네 기독교인들은 신을 인격적인 분으로 말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신이나 불교도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다 같은 것이라는 시사를 주는 것이다.
3. 구원 개념의 변화
힉의 기독교에서는 구원 개념도 자아 중심에서 신 중심에로의 변화를 이루는 것으로 재정의(re-define)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죄용서 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긍정적인 인격적 관계성 가운데서 삶을 살다가, 죽어도 그의 존재의 중심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고 의식적으로 복락을 누리고 있다가,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의 극치에 참여하는 의미의 구원은 신 중심으로의 전환을 이룬 삶을 신화적으로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서 밖에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이미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힉이 재구성한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 속죄적 죽음의 필요성이 가르쳐 지지 않는 것이다.88 또한 힉에 의하면, 용서가 희생 제사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힉이 생각하는 구원 개념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힉은 전통적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용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며 비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런 이해[은유적 성육신 이해와 이로부터 나온 신론]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는 지에 대한 이론이라는 의미에서의 그 어떠한 구속 교리(atonement doctrine)도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어떠한 중재자나 속죄 제물이 없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며, 구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것을 기대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89
사실 힉은 그의 사상의 초기부터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977년의 논문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만일에 예수께서 참으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고, 그의 죽음으로만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즉, 믿음]으로만 그 구원을 충용할 수 있다면, 영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기독교 신앙이 된다. 그것은 인류 중의 대다수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90
그러므로 전통적인 기독교는 옳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힉은 상당히 초기부터도 대다수의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진전시켜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결국 구원 개념의 심각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힉의 구원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구원은 ...... 현세에서 시작되는 본성적인 ‘자아 중심’으로부터 ‘신/궁극적 존재/실재-중심’으로 새롭게 방향을 전환하는 인간적 변혁이다.”91 그러므로 힉에 의하면 인간이 자기 중심의 이기성에서 벗어나서 이타적인 삶을 살면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그는 그가 누구든지 이 구원적 변화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힉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여성 해방 운동이 “이 세상에서의 구원적 변화의 선두에 서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92 그리고 힉은 이렇게 현세에서 일어나는 것은 구원적 과정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원적 과정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넘어서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시사적인 말을 던진다.93 그러나 그 때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 지는 별로 논의하지 않는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이는 “이때 그는 (1) 이 세상에서 구원적 과정을 시작한 이들이 이 사후의 과정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2) 모든 이들이 사후에는 구원 과정 안에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인지? (3) 아니면 사후에도 각자의 선택에 따라 그 최종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인가가 모호하다”고 하면서 “힉은 (3)번째 대안을 생각하는 듯하다”는 역주를 달고 있다.94 이는 피녹의 사후 기회설에 대해서 힉이 하고 있는 말에 비추어 볼 때 개연성 있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현세에서 시작되어 현세를 넘어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는 신적인 창조적 과정”의 한 부분인 것이다.95
4. 선교 개념의 변화
따라서 힉의 입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 자신이 의미하는 의미에서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제시하고 자신의 소망을 나누는 것은 정당성이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힉에 의하면, “다른 영적 지도자들과 다른 계시적 역사들이 다른 종교적 전통들 내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리고 동일한 정도로 가능하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 때문이며,96 또한 “어떠한 종교적 전통을 가졌든지, 또는 아무런 종교적 전통을 갖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과정[구원/깨닮음/해방의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97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개종을 권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필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의 전통에 충실해서 자기-중심으로부터 실재 중심에로의 변화를 이룬 사람답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그런 전환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서로 다른 신앙간의 의미 있는 대화를 진전시켜서 서로의 형태를 바꾸어 가는 것이 된다.
IV. 힉의 기독교와 전통적 성경적 기독교의 관계를 보는 태도
이렇게 힉의 기독교를 살펴 본 뒤에는 그의 기독교와 전통적 성경적 기독교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의 최후의 과제로 남게 된다. 그 둘이 서로 대립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앞의 논의로 분명해졌을 것이다. 문제는 이 대립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힉과 그를 따르는 이들도 이 대립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대립이 기독교가 성숙해 가는 것으로, 시대적 정황 속에서 타당한 기독교적 진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98 힉은 이미 1977년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신화에 실린 다른 논문의 저자들과 함께 신약 성경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으며, 4-5세기의 교부들도 칼시돈 정의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로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자신들이 예수에게서 발견하고 파악한 바를 그렇게 그 시대의 표현이라는 옷을 입혀 진술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20세기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나름으로 그 예수 안에서 우리가 발견한 바를 진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들은 신약의 저자들과 칼시돈 교부들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같은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결과는 칼시돈적 진술의 문자적 의미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그렇게 성경의 기독교를 이 시대에 적응시켜 말한 것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신화/은유”이고,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모든 다른 종교와 종교인들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며, 예수를 존경하는 영적 지도자요, 영감이시오, 모델인 분으로 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힉의 기독교와 전통적 성경적 기독교의 대립을 인정하면서 기본적으로 그렇게 변화된 현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제시해 보려는 노력을 높이 사면서 그러나 힉은 너무 지나치게 나아갔다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있다. 아마 힉 사상에 대한 가장 많은 비판자들이 이런 입장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의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다고 할 수 있다. 힉의 종교 다원주의를 비판하면서 내포주의를 주장하는 클락 피녹이나 죤 샌더스 같은 이들이 이 안에 있는가 하면,99 바르트와 그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바르트주의적 배타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도 이런 입장에 서서 힉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힉이 시도하는 어느 정도의 변화의 시도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시대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기독교는 자체의 변형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 힉은 왜 그들이 더 나아가지 아니하고 중도에 멈추어 서는지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것이다.100 그러면서 힉은 우리는 “조만간 이 다리를 통해 건너편으로 가야한다”고 말한다.101)
마지막으로, 힉의 기독교와 전통적 성경적 기독교의 대립을 참된 대립, 헤겔적인 지양이나, 변증법적 신학적인 역설 제시로 극복할 수 없는 대립으로 제시하는 이들이 있다.102 이런 입장의 배타주의자들은 힉의 종교 다원주의가 결국 기독교에 대립하는 사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카슨 같은 이는 “힉이 제안하는 예수는 신약의 예수와는 너무나도 다르므로 조만 간에 힉이 왜 신약을 인용하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이 나오게끔 된다”고 말할 정도이다.103 사실 힉 자신도 고전적인 교리들, 전통적인 성육신 이해, 양성론 이해, 삼위일체 이해, 구속에 대한 이해, 특히 성경 무오성 교리 등은 “지성의 희생”이라고 여기면서, 우리들에게 우리가 그런 것을 믿는 것은 자유지만 “그와 같은 지성의 희생을 (우리들의) 학생들에게까지 강요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104
이런 배타주의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이 있다. 첫째 오해는 이들은 전혀 변혁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오해이다. 둘째 오해는 이런 이들은 입장만 달라서 이론적으로 대립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투쟁적이라는 오해이다. 셋째로, 이런 배타주의만이 배타적이고 독단적이라는 오해이다. 이 세 가지가 다 오해인 것은 사실이나, 이런 입장을 지닌 이들이 때때로 (때로는 너무 자주!) 실제로 그런 실수를 범함으로 그런 생각이 고정화되었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배타주의자들이 참으로 성경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항상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전통과 삶과 심지어 교리도 변혁시켜 왔음을 생각하고, 입장이 달라도 인간적으로는 잘 해주는 것이 가능했고, 주장되어졌으며,105 이것이 진리 주장인양 이 주장을 하는 이들이 진리에 관해서 주장을 할 것이며, 실제적으로 종교 다원주의자들 자신의 이론적 비관용과 독단적 주장을 생각하면106 이상의 오해가 진정한 오해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입장을 논의할 때 일단은 그 이론의 최상의 형태를 가지고 논의하고서야 다른 모든 요인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남는 문제는 힉의 기독교와 전통적 성경적 기독교의 대립적 관계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문제 삼는 문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힉의 윤리적 도전을 인용함으로 이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기독교가 정말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세워진 유일한 종교이며, 따라서 우리만이 완전한 진리를 안다면, 그리고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필적할 수 없는 완전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하고 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신념-체계가 인간 생활에서 관찰될 수 있는 사실들과 과연 잘 들어맞는가?107
만약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즉 삼위일체의 제2위)시라면,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와 그에게 나아감을 구현함으로써, 그리고 필적할 수 없는 은혜의 방편들의 은택을 입음으로써, 기독교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세워진 유일한 종교라고 한다면, 이 모든 것은 기독교적 삶의 질에 있어서 적어도 몇 가지 가시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야만 하지 않겠는가? ...... 확실히 바울이 갈라디아 5:22-23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의 평균 수준은 기독교적 구원의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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