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신약 · 구약

빌레몬서 1장 강해

기쁨조미료25 2008. 7. 22. 11:13
빌레몬서 1장 강해
2006.01.11 09:57
http://tong.nate.com/roiland/10505017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몬1-7)

 

 우리는 먼저 오네시모를 말하기 전에 바울과 골로새교회의 빌레몬과 빌레몬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주후1세기의 기독교 초기에 3차레의 전도여행을 하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사도행전 18:23에서 부터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사도행전 28장 30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의 돈으로 셋집을 얻어서 거기에서 유하면 사람들의 방문도 받는등 비교적 자유롭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바울은 로마에서 두 번 투옥되었다.그러므로 때는 약 주후 60년에서 62년 사이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골로새지역을 가서 어떻게 전도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습니다.그러나 19:1에보면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가서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윗 지방을 바로 골로새지역을 포함한 기타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에베소를 가려면 골로새지역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따라서 바울은 에베소를 가기 전에 조그만 지역도시인 골로새지방에 들러서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골로새서 1:7과 빌레몬서에 의하여 보면  골로새 지역에서 바울은 충성스런 일꾼 두 사람을 만납니다.하나님께서  복음의 열매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한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가 탁월했던 에바브라라는 사람이며 또 한 사람은 바로 빌레몬이라는 사람입니다.빌레몬이라는 사람은 비교적으로 부유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빌레몬과 가족들은 바울의 복음에 은혜를 받고 자신의 집을 골로새교회의 개척교회로 내놓았습니다.


빌레몬서 2절에 보면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또한 교우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던 사람입니다.4-7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교우들을 사랑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초점이 되는 오네시모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 빌레몬의 집에 살고 있는 노예이며 종이었던 사람입니다.오네시모는 이 빌레몬의 집에서 살다가 바울이 있는 로마로 도망을 쳤습니다.그래서 바울은 헌신적인 일꾼인 빌레몬에게 편지하기를 이 오네시모가 이제는 변화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으니 그를 받아주고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이 애정 어린 부탁의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인 것입니다.


 

 1-2 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1절에서 3절까지는 바울의 문안인사입니다.1절에서 7절까지의 본문이 바로 이 편지의 서론 부분을 형성합니다.


‘예수를 위해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절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갇힌자 된 나’라고 말한다.또 4장 1절에도 ‘주안에서 갇힌 내가’라고 말합니다.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옥중 체험은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그는 지금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2절에 보면 빌레몬과 함께 여러 사람의 이름이 함께 등장합니다.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압비야는 누구인가? 그는 아마도 빌레몬의 아내였음이 분명합니다.아킵보는 누구였을까요? 이는 틀림없이 빌레몬의 아들이었을 것입니다.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다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아킵보를 가리켜서 바울은 군사 아킵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16절이하를 보면 골로새에서 멀지 않은 라오디게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전도자가 아킵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16,17절)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아킵보가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전도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빌레몬서에서는 아킵보를 가리켜서 군사라고 호칭합니다.즉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 아킵보에게 편지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한 군사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다시말하면 이 편지는 빌레몬의집안 식구들에게 띄어진 서신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한다.이 말씀을 통해서 골로새 교회의 예배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드려졌던 것을 알수 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들은 가정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그들에게는 크고 화려한 건물이없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의 성도간의 교제로 가족적인 우애와 사랑이 피부에서 피부로 전달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마가의 집이 있었습니다.빌립보에는 루디아의 집이 있었습니다.에베소에는 아불라쿠브의 집이 있었습니다.라오디게아에는 늠바의 집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때 자기의 집을 예배의 처서로 내놓을 만큼 하나님앞에 헌신적이었습니다.그들은 건물이없어도 이 작은 집을 통해서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며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려는 꿈과 열망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집을 개방했던 일 세기의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이 빌레몬이었습니다.그의 집은 골로새 성도들의 신앙의 요람지였습니다.

 

이 빌레몬의 가족은 얼마나 아름다운 가족들인가?

주님앞에 사랑받는 주님의 일꾼이었던 빌레몬!

그의 아내는 본문에서 자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자매 압비아는 주안에서 거듭난 신실한 성도이며 내조자였습니다.그의 아들은 복음을 위한 군사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전사였습니다.자기의 집은 교회였습니다.그리고 빌레몬 자신은 이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습니다.얼마나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가정인가?

얼마나 아름다운 집인가?

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가정! 초대교회의 이런 헌신된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복음은 세계를 향해서 전파되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중국의 가정들이 빌레몬 가정과 같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3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축원을 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호의를 입을 때 쓰는 말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만이 평강의 비밀을 압니다.바울은 이 인사법을 많이 사용합니다.그런데 바운은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의 순서를 한번도 뒤바꾼적이 없습니다,그는 언제나 은혜를 먼저 말합니다.그리고 그 다음에 평강을 말합니다.은혜없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은혜를 입어야 그 다음 구원받은 평강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4절부터 7절까지는 빌레몬을 위한 바울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4절)

바울은 기도하면서 빌레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그의 기도는 첫째로 하나님을 행한 감사로 시작합니다.그 다음 두 번째로는 빌레몬을 위해 즉 남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시작합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개인적인 소원을 말합니다.

 

여러분 !

여기 기도의 뚜렷한 세가지 순서를 보십시오.

바운은 기도를 먼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합니다.그 다음으로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가 그의 가치관의 우선순위입니다.

그가 사는 목적이 첫째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그 다음이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지금 감옥에 있지만 어디에 있으나 그대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때 그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런 고백를 하게 만든 빌레몬은 어떤 사람입니까 ?

빌레몬은 부자였습니다.그는 종을 두고 있었고 그의 집을 예배의 처소로 제공할때에 그집은 다른 집보다 넓어서 예배를 들기에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골로새에서 멀지 않은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했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때 아마도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골로새에 살고 있던 이 빌레몬은 에베소까지 찾아와서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가능서잉 많습니다.골로새서 2장 1절을 보면 바울이 고로새를 방문한 일이 없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빌레몬 자신이 친히 에베소까지 와서 바울 사도에게 복음을 듣고 돌아가서 아마고 골로새 교회를 설립한 주동적인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빌레몬을 생각하며 기도하면서 두 가지를 특별히 감사했습니다.

 1.사랑의 사람 이였습니다.(5절)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5절)

 예수님과 모든 성도 대한 빌레몬의 사랑의 소문이 로마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 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빌레몬의 사랑은 아가페(άγαπή)의 사랑입니다. 빌레몬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모든 성도를 사랑하였습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헌신된 자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자기의 이해관계를 떠나 몸과 마음을 다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

 

 아가페의 사랑입니까 ? 나의 이해관계를 떠난 참 사랑입니까 ?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헌신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


 빌레몬은 예수님만 사랑한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대해서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했습니다.

 옆자리에,앞자리에,뒤자리에 어떤분이 앉아 계시는가 한번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입니까 ?  아니면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

 아무관심이 없는 사람입니까 ?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하되 이해 관계을 떠난 아가페의 사랑을 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우리는,저와 여러분들은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 본을 보이셨고 십자가에 죽기 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오늘도 우리는 이 사랑안에서 사랑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5-7절)

이 말씀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덕,지식,절제,인내,경건,형제우애후에 마지막으로 사랑으로 끝이 납니다.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이라는 큰 교훈을 배우기 위해서 올라가는 삶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들이 이혼을 많이 하게됩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교회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요구하는 것은 많지만 헌신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를 버린 순수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은 이런 아름다운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제자도의 바로미터입니다.나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러나 내게 어려움과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그리스도인들의 제자도에 대한 시험(test)이다.빌레몬의 사랑은 이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자기의 재산을 축낸,그리고 노예로써 자기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던이 오네시모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2. 빌레몬은 믿음의 사람입니다.(5-6)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바울이 들은 빌레몬의 믿음도 예수님과 모든 성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빌레몬은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확신할 뿐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믿고 신뢰하고 인정하고 더 나아가 믿음의 교제를 하는 헌신된 사람이였습니다. 빌레몬은 살아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살아있는 믿음은 주님과 교제하는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성도 서로 서로 교제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κοινωνϊα) 는 서로 사귀는 정도의 친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말합니다. 성도 서로 서로 간에 물질적으로나,신앙적으로 나누고,협력하고,도와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빌레몬은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성도과 믿음의 교제를 하는 소문이 바울에게 까지 드렸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닌것처럼  내게 있는 것으로 나누어 주고 협력하고,도와주는 믿음의 교제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이해관계를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힘쓰는 헌신된 자에게 믿음의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는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이 믿음의 교제가 선을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믿음의 교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헌신하는 성도들에게는 우리 모두에게 선을 알게하고 그리스도에게 까지 이르게하는 믿음의 교제가 있을 줄 믿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빌레몬의 헌신적인 사랑과 믿음으로 인하여 환란을 당하던 성도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고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고 마음의 평안(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도들만이 아니라 로마감옥에 있는 바울도 빌레몬의 헌신된 사랑을 인하여 기쁨과 위로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의 사랑으로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헌신된 성도을 인하여 목회자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기억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헌신된 성도는 예수님과 모든 성도에 대한 자기의 이해관계를 떠나 몸과 마음을 다하여 힘쓰는 사랑이 있고 이 사랑안에서 믿음으로 교제하여 선을 알게하고 사랑과 믿음을 그리스도에게 까지 도달하도록 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8절)

“많은 담력을 가지고 마땅히 명할 수 있으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용서하는 일에 대하여서는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목회자인 나 바울의 입장에서 마땅히 명령할 수도 있지만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입니다.어떤 권위를 가지고 명령과 일방적인 지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빌레몬을 대하면서 사랑의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졌던 지도력의 비결입니다.그는 모든 사람을 권위보다 인격과 사랑으로 대했습니다.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간관계가 깨지는 원인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자신과 비교해서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는데 있습니다. 그 사람을 나와 똑같은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나,환경이나,학벌이나,사회적 위치나 경력 등을 자신의 잣대로 재보고 나서 미음 깊은 곳에 이미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1년 이상 인간관계를 지속하지 못합니다.처음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할 정도로 호감을 갖게 하다가 나중에는 실망을 줍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친구 ,가족,직장동료,이웃사람들을 통하여 행복을 얻기 원하십니까.

먼저 여러분 속에 비교의 계단에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어떤 사람이든 나와 똑같은 인격을 가진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보시기 바랍니다.중요한 것은 어떤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9절에는

“----------------나이 많은 나 바울은 --------“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바울의 나이는 벌써 고령에 접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때 바울의 나이는 약 55세전후였던 것 같고 그때에는 55세 정도가 되면 나이가 많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9절에 나탄난 바울의 눈물겨운 겸손한 호소는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주님을 위하여 고생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와 호소하는 이 늙은이의 부탁을 좀 들어 주시오.”

도망친 노예,그러나 예수를 믿고 변화된 한 노예 오네시모를 위한 이 간곡하고 눈물겨운 겸손한 바울의 호소속에 우리는 사도바울의 뜨거운 사랑에 접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낳은 다음에 혼자 잘 자라겠지 하고 그대로 방치해버리는 비정한 어머니의 모습과 다를 것이없습니다.

어린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다시말하면 끝까지 그 영혼의 신앙을 돌보지 않는 전도가 바로 책임없는 전도입니다.

바울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그러나 한 구데에서 전도를 하고 떠난 다음에 그는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가 바로 바울서신이 되었고 주님재림하실 때까지 오고오는 모든 성도들이 읽을 성경이 되었습니다.

 

바울처럼 참 전도란  자기가 갈 수 없으면 누군가를 대신 보내어 그 사람의 신앙을 끝까지 돌봅니다.그들이 장성하여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증인의 자리에 설 때까지 그 믿음의 상태를 돌보는 전도! 이것이 바로 책임있는 선교입니다.육신의 자녀에 대하여 부모가 느끼는 책임감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는 관심과 애정으로 그가 전도한 영혼들을 바울은 돌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기록하기를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말합니다.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도하여 스스로 설립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고백하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라고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말합니다.다시말하면 한 영혼을 돌보는 일이 마치 해산하는 수고와 같다는 말입니다.

 

살전2장 3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불과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데살로니가 지방에서 전도했습니다.그리고 그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의 신앙을 양육하면서 바울은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그 다음 8절의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바울은 목숨까지 주기를 원하였습니다.이것이 그가 전도한 사람에 대하여 가진 심정과 태도였습니다.


 1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진정한 사랑은 충고와 책망도 포함된다.내가 전도한 사람의 신앙이 잘못 되려고 할때 야단도 치고,책망도 하는 것이 사랑이다.진정한 사랑은 책망을 수반한다.그래서 바울은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결혼하고 나서 낳은 자식이 몇 명입니까?

몇 명이나 기르고 있습니까?


살전 2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본문 10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향해서 이렇게 부릅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다시 말하면 옥중에서 전도하여 신앙인이 된 오네시모를 그가 믿음의 아들로 삼앗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바울은 문자 그대로 심혈을 기울여 오네시모의 신앙의 성장을 도왔을 것이다.이때부터 오네시모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바울의 처소를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네시모의 변화를 말하기 전에 몇 가지 의문점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라오디게아 동남쪽 소아시아의 작은 도시인 골로새에 살고 있던 마음씨 좋고 인정 많은 그리스도인 빌레몬의 가정에서 일하던 한 노예가 탈출하였습니다.주인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황금에 눈이 어두어져서 주인의 재산의 일부를 훔쳐 가지고 달아났습니다.사실 그는 주이느이 남다른 사랑을 배신하기가 조금은 미안했을 것입니다.그러나 그에게는 나도 돈을 가지고 자유인이 되어 마음대로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유혹이 있었습니다.이 노예의 이름은 ‘오네시모’라고 합니다.

 

그는 본래 부리지아 사람입니다.아마도 그는 로마의 군대가 정복지에서 젊은이들을 노예로 잡아다가 팔 때에 노예시장에서 팔려 골로새까지 오게 되었을 것입니다.그는 본래 총명하고 재간이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골로새를 떠나서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젊은 나이였고 또한 혈기가 왕성한 이 청년은 로마의 상점과 화려한 주점들과 현란한 문명의 밀림을 상상하면서 설레이는 여정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난생 처음 원하는대로 돈을 쓸수가 있었습니다.마시고 취하고 즐기면서 집시처럼 떠돌아 다니던 어느날 드디어 그는 인구 1억 2천만의 나라 수도권만에만 백 오십만의 인구가 밀집해 살고 있는 로마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밤이없는 로마의 홍등가에서 그는 얼마 동안 환락에 빠져 살았을 것입니다.그러는 동안에 점차 그의 주머니에 있던 돈도 비어가기 시작했습니다.유랑하던 노예 오네시모에게 인생 일대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바울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것입니다.


 오네시모 그는 노예였습니다.당시사회에서의 노예나 종들은 사람이라기 보다 물건취급을 받았었습니다. 노예가 되는 경우는 다음의 경우중 하나입니다. 즉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되어 잡혀왔거나 아니면 빚을 갚지 못하여 몸으로 대신 팔려오든지 아니면 아버지가 노예였기에 노예가 되는 경우들입니다.

 어떤 경우든 종들은 재산의 일부로 취급되었으며 사람으로서의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주인은 재판관에게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체벌을 가할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인생은 이렇게 비참했습니다.노예로서 인생을 마쳐야하는 운명입니다.아무런 희망도 꿈도 가질 수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저 일하고 먹고 자는 것뿐입니다.그의 앞에 있는 것은 캄캄한 어둠뿐입니다.결혼도 주인이 허락해야 할 수 있습니다.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소유입니다.이런 신분의 오네시모가 도망하여 바울을 만나 변화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우연히 바울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계획적으로 바울을 만났다고 확신합니다.


 이유는 오네시모가 도망하였다면 문화 사회도 언어도 완전히 다른 로마까지 그토록 멀리 갈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더욱이 로마에서는 노예의 제도가 엄격해서 잡히면 즉시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나라이며 당시에 가장 강대국으로 용맹을 떨치는 나라였습니다.여러분의 성경 뒤에 혹 지도가 있으면 지도를 보십시오.골로새에서 로마까지 가려면 최소한 2000㎞이상 되는 거리입니다.교통사정을 감안할 때 적어도 몇 달을 걸려야 갈 수 있는 거리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피해서 국경과 국경을 통과해야 합니다.아무리 도망해도 로마까지 간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 오네시모가 로마로 도망하였다해도 우연히 바울을 만나는 경우는 희박하다는 것입니다.바울은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로마옥중에 호송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몸입니다.로마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무서운 감옥입니다.비록 바울에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해도 그것은 죄수인 바울을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감옥 안에서의 일입니다.감옥으로 찾아가지 않고는 바울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그렇다면  잡히면 당장 죽음을 면치 못하는 오네시모가 로마의 수비대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감옥으로 들어가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바울을 만났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그것은 마치 새가 사냥꾼의 품으로 날아드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아무리 목숨이 열 개가 있어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물론 오네시모도 감옥에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해 볼 수 있지만 그가 만약 감옥에 있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어야 합니다.그의 신원을 조사해 보면 금방 탄로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골로새서에 있는 바울의 편지 내용입니다.골4:12에는 골로새교회에서 바울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온 에바브라에 대하여 말하기를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라고 말했습니다.너희라는 「휘몬」이란 단어의 헬라어는 골로새교인들을 가르킵니다.그런데 이와 똑같은 단어와 내용으로 역시 오네시모를 말합니다.4:9절을 보십시다.“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방문하러 로마로 온 에바브라와 같은 의미의 내용으로 골로새 교우들에게 부탁했다는 것입니다.또한 골로새서나 빌레몬서 어디에도 오네시모를 책망하거나 그가 도망했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오히려 그를 칭찬하며 따뜻하게 맞아 줄 것을 누누이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오네시모의 고나계는 이렇게 각별하고도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바울은 오네시모의영적인 아버지가 되어 정성을 다해서 그에게 영적인 양육을 베풀었다.


11절에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이 말은 참으로 흥미있는 뜻을 가지고 있다.오네시모라는 말의 뜻은 “유익하다”라는 뜻입니다.이 유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오네시모가 전에는 무익하였다고 바울은 말합니다.이름은 유익하지만 실제로는 무익한 사람 오네시모는 이름 값을 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므로 유익한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오네시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함으로”이 말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을 담아서 읽는다면 이런 뜻이 됩니다.“전에는 이름은 유익이었지만 실제로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그 이름의 뜻대로 유익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오네시모가 진짜 오네시모가 되었기 때문에) 저를 돌려 보냅니다.


여러분,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났을때 비로소 우리는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우리는 모두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무익했었습니다.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유익한 존재,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존재,주님앞에 오네시모(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우리는 다 주님의 오네시모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에게 해를 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저런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하며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그 사람은 로마의 앞잡이로서 지독하게 세금을 거둬들이던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로마정부에게는 유익할지 몰라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는 그는 전혀 무익한 사람입니다.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주님의 말씀으로 그는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그는 자신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선포했습니다.더 많은 세금을 착취한 사람에게는 4배나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이제 그는 주님을 만난 후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오로지 자기자신만 알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생각할 줄 아는 꼭 필요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가정에서 자녀들에게,남편이나 아내에게,꼭 필요한 사람입니까.

어떤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심지어 차라리 우리 아버지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가정도 있습니다.부모는 자녀에게 너를 차라리 나지 않았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는 불행한 가정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는 어떻습니까.최근에는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한참 일할 나이에 15년 20년 직장에 젊음을 바치고도 권고사직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이제는 필요 없으니 나가 달라는 것입니다.이렇게 냉정한 것이 우리 사회입니다.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다.주님의 말씀과 같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디에서나 없어서는 안될 소금이 되십시다.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다.오네시모를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를 변화시키실  줄로 믿습니다.


전에는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남으로 주인의 가슴에,가산에 상처를 입힌 자였습니다.하나님 일에는 상관이없는 자였습니다.그러나 그는 이제 바울에게 충성스러운 복음의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또 자기의 옛주인인 빌레몬을 향해서도 새로운 마음으로 복종하려는 진실한 종이 되었습니다.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앞에 쓰임받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이 12절의 말씀이 시사해주는 것처럼 오네시모는 바울 사도의 심복이 되었습니다.또한 13절의 말씀이 보여 주는 것처럼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바울을 아버지처럼 섬기며 바울의 손과 발의 역할을 감당하는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이 말씀에서 바울은 “내 심정같아서는 오네시모를 내 곁에 두고 싶습니다.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합니다.

그런던 어느날 벌써부터 언젠가는 오리라고 각오했던 그날이 찾아왔습니다.이 날은 바울과 오네시모가 헤어져야 하는 이별의 날입니다.골로새로부터 온 골로새 교회의 일꾼인 두기도라는 사람이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바울은 두기고 관에 오네시모를 함께 딸려서 그의 옛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골로새 4장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언제까지나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두고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그러나 오네시모의 장래를 두고 생각할때에 아직 오네시모에게는 바로 잡지 못한 과거가 있었다.물몬 그는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했을때에 주인의 돈을 훔치고 달아난 죄를 회개할였을 것이다.그러나 이 회개가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고 앞으로 오네시모가 하나님이 쓰실수 있는 사람이 되기위해서는 과거룰 바로잡는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이 사실은 오네시모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그 당시의 풍속대로 하자면 도망친 노예들이 주님에게 붙잡히게 되면 주님에게 맞아 죽는 일이 흔했다.혹은 불구의 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야생동물의 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오네시모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바로 잡아 하나님과 사람앞에 회개의 열매를 맺고 싶었을것이다..속건제의 제사를 말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서 두기고 편에 오네시모의 옛주인이요,바울의 복음의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말할 수없이 부드럽고,간절하고,눈물겨운  호소를 담은 서신을 보냅니다.이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성경 원문에 보면 모두 334단어로 된 짤막한 편지입니다.이 편지는 불과 25절밖에 되지 않습니다.그리고 1장 밖에 되지 않은 서신입니다.

그러나 이 짤막한 서신속에 실로 바울신학의 바탕을 이루는 구속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윤리적인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결단에 대한 교훈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중간에 서서 화해를 중재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십시오.이는 다름어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해의 십자가를 지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케하는데 충분합니다.

 

14절을 보면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사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은 것이었습니다.물론 목회자인 바울의 입장에서는 얼마후 골로새로 갈 두기고에게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을 것이니 그리 알라고도 명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선한 일이 억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빌레몬이 자의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도대체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바울이 자신의 곁에 두고 함께 있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무엇이 위대한 사도인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하는 것입니다.그는 명예도,권세도,물질도,지식도 없는 평범한 사람보다도 더 보잘것 없는 도망한 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했을까요?

 물론 바울이 오네시모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저는 성경을 근거로 신앙과 인격적인 면에서 몇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심복이라는 의미는 신약성서에 단 한번 쓰인 단어입니다.오직 오네시모에게만 심복이라고 했습니다.바울에게는 디모데,두기고,디도,에바브라등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다른 누구에게도 이와 같은 단어로서 말한 적은 없습니다.

 

 먼저 심복이란 뜻은 바울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어떤 말이든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오네시모는 자신의 영적인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이 원리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여러분은 영적인 지도자인 제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물론 이 교회를 섬기지 않는다면 순종할 이유가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사랑의 교회라는 공동체로 불러주시고 은사를 부어 지도자로 세운 것을 인정한다면 모든 가르침과 목회적 권면에 순종해야하는 것입니다.

 

 둘째 심복이란 말은 바울을 닮은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인격과 신앙을 닮은 바울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바울의 제자란 결국 누구의 제자입니까.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바울의 동역자이며 제자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제자훈련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유능한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다.바울 곁에서 바울을 돕다보니 오네시모는 바울을 닮은 일꾼이 되었습니다.

 

  셋째 심복이라는 의미는 무엇보다 오네시모가 복음의 심부름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제 감옥에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바울을 대신할 전도자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오네시모는 바울의 곁에서 머무는 동안 그에게서 복음을 듣고 배우고 깨달았습니다.오네시모는 이제 바울이 어디를 보내든지 복음을 전할수 있는 자격과 지식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할 수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상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습니까.병원에서 약을 기다리는 동안에,기차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이웃집을 방문했을 때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선생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그 분은 십자가에서 선생님을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그 분을 믿을 때 죄에서 용서함 받고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그 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복음은 전하는 것이지 설득하거나 교육시키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도 누구나 쉽게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네째 오네시모는 신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사랑했던 것입니다.골로새서 4:9을 보십시다.바울이 오네시모를 향해서 뭐라고 합니까.“그는 신실하다”라고 했습니다.신실하다라는 말은 충성스럽다.성실하다라는 말과 같습니다.다시 말하자면 그는 크든 작든 어떤 일이든지 맡은 일에 책임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어떻습니까.이런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어떤 일을 할 때 대개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는 시작은 거창하게 하는 사람입니다.무슨 큰일을 낼 것 만 같습니다.굉장한 일을 벌일 것만 같습니다.그런데 중간 쯤 가서는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막상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가고 없습니다.그 일을 마칠 인내력이 없습니다.시작을 좋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적당히 끝내는 사람입니다.꾸중듣지 않을 정도로 일을 마칩니다.그렇다고 칭찬들을 만큼 하는 것도 아닙니다.눈치껏 알아서 대충해버립니다.그래서 늘 아리송합니다.열심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하는 것 같기도한 인상을 줍니다.

 

 세 번째는 어떤 일이든 열심을 다해서 그 일을 끝내는 사람입니다.일을 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인내와 끈기가 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완수 합니다.완벽하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선을 다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할 때 어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네시모는 이런 인격을 가졌습니다.성실한 사람은 분명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여러분 모두 신실한 인격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다섯째 오네시모는 어려움을 함께 할 줄 아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진정한 친구를 알려면 어려움을 당해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정말 좋은 친구는  고난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친구일 것입니다.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아무 보상도 없는 뒷바라지를 하며 바울을 섬기며 차가운 감옥속에서 격는 외로움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가 한없이 고마웠던 것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었습니다.그의 모든 재산이 하루 아침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그의 자녀도 죽고 말았습니다.급기야 그의 온몸에는 부스럼이 돋았습니다.가려움의 고통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어려움 속에서 함께 할 줄로 알았던 그의 아내가 그를 버리고 떠났습니다.그의 친구들도 그를 이해하기보다 책망하며 나무랐습니다.  풍악 속에서 찬치를 벌일 때 축배의 잔을 함께 들던 친구들은 이제 그를 외면해 버렸습니다.진정 그를 이해하고 그 어려움을 함께 혜쳐나갈 사람이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여러분 곁에는 누가 있습니까.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함깨해 줄 어떤 친구가 있습니까.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여러분을 도와줄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바울이 어쩌면 이 감옥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그날까지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은 것은 그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섬기는 인격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서로에게 이런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부부간에도,친구간에도 이렇게 진정으로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봉사의 원칙은 억지가 아니라 자의에 으한 봉사라는 것이다.억지로 하는 헌금,억지로 하는 봉사,억지로 하는 전도,억지로 하는 구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15절을 보십시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기로 작정하면서 빌레몬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권고 하고 있습니다.사실 주인인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다른 주인들같이 악으로 대한 것도 아닌데 한 마디 말도 없이 도망하여 소식이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오네시모를 좋게 보아줄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빌레몬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잠시 네곁을 떠난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나를 만나서 더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오래토록 너의 곁에 머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이다.그러니 그를 나무라지 마라 ”.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불신자들은 모든 일들을 이성과 상식의 현실의 잣대로만 바라봅니다.그러나 믿음이 있는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케네디라는 목사님이 시무 하는 교회에서 큰 화재가 났습니다.그 때 이웃사람들은 이제 교회는 망했다며 목사님을 위로 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그 때 목사님은 오히려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도 마침 교회를 수리할 생각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예 다시 지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아무 걱정 마십시오”결국 모든 성도들이 힘을 합하여 이전 보다 훨씬 큰 새 교회를 지었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결코 현실의 눈만으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과정에는 혹 어려움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축복의 그릇을 준비시키는 과정일 뿐입니다.

 

16절을 보십시다

 바울이 가장 하고 싶었던 부탁입니다.“이제 그를 대하되 종으로 대하지 마라.나도 지금 오네시모를 종으로 대하지 않고 있다.전에는 종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같은 한 형제로 대하고 있다.내가 그러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이제 종이 아니니 사랑 받는 형제로 여겨다오”.참으로 아름다운 부탁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여기에 있습니다.“처음보다는 나중이 좋은 것”“시작보다 끝이 좋은 것”이 기독교 입니다.시작은 노예이며 종이었지만 나중은 사랑 받는 형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가 그렇습니다.창세기의 시작은 에덴동산의 추방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계시록의 마지막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으로 마칩니다.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이런 것을 느낍니다.그렇게 권세있고, 인격적이고,존경받던 사람이 끝에 가서는 불명에로 마치는 경우들입니다.시작도 과정도 좋았지만 끝이 복되지 않아서 브끄러움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의 시작은 갈 곳없는 떠돌이 나그네 였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야곱의 시작은 빈털털이 도망자 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그 아들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요셉의 시작은 형들에게 배신당하여 이웃나라로 팔려간 종이었습니다.그러나 마지막은 최대강국인 애굽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다윗의 시작은 단지 양을 치는 조그만 목동이었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왕이 되었습니다.베드로의 시작은 가난한 초라하고 어부였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초대교회의 기독교 역사를 만드는 위대한 산파의 역할을 하였습니다.바울의 시작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조롱거리였습니다.모두가 그를 미워했고 믿지 않았습니다.그래서 그는 다소라는 곳에 숨어서 낙심했었습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성경을 13권이나 썼으며 기독교회사의 가장 핵심인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작은 어떻습니까.어떤 과정에 있습니까.그러나 시작이 어떻든 과정이 어떻든 우리의 마지막은 이렇게 승리로 마칠 것입니다.영광으로 마칠 것입니다.축복으로 마칠 것입니다.


우리의 시작이 골고다 언덕과 같아도 그 언덕 넘어 에는 눈부신 부활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영원한 축복의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러나 세상 불신자들은 잠깐 있다 가는 이 땅에서 날마다 산해진미를 먹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마지막에는 심판의 영원한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의 과정도 축복하시지만 마지막에는 더 많은 축복과 영광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장례식 예배가 거행되고 있었습니다.목사님은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청중을 향해서 말했습니다.“여기 누워 있는 이 사람은 세상에서 죄를 많이 진 사람입니다.아마 이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자 모두 한 사람씩 나와서 이 사람의 얼굴을 봅시다”관을 열자 그 속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시체 대신 커다란 거울이 있었습니다.결국 사람들은 관 속에 비친 죄인인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목사님은 청중을 향해서 외쳤습니다.“여기 관 속에 죽어야 할 죄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롬3:23에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우리도 과거에는 오네시모와 같이 노예였습니다.세상의 법에 매인 노예가 아닙니다.죄와 율법으로 매인 사단의 종이며 죄의 노예였습니다.그래서 사단이 시키는 대로 세상에서 범죄하며 살았었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몸 값을 사단에게 주셨습니다.사단이 요구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값은 돈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피였습니다.주님은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온 몸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주님께서 생명을 주고 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맺어진 오네시모와 바울과 같은 한 형제입니다.

 그리스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을 가져야합니다.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사람이 됩시다.어려움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인격을 가진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미래를 바라봅시다.우리는 자꾸 보이는 현재의 환경과 현실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곤 합니다.

만일 어떤 큰 나라의 왕자와 결혼을 약속한 가난한 시골 처녀가 지금 당장 가난하다며 나는 불행하다고 비관하며 슬퍼한다면 여러분은 그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그녀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까?

 오늘 여러분의 환경은 어떻습니까..혼자 넘어가기 힘겨운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아무리 계산하고 따져봐도 풀리지 않는 문제로 답답해 하지는 않습니까.


 이제 그 문제를 나의 이성과 경험과 현실의 안경를 벗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혜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이제 주님의 선하신 인도에 맡기시고 지금 부터 그 문제로 부터 자유하십시요.우리의 현재가 비록 힘들지라도 우리리 미래는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시작과 과정은 힘들어도 우리의 마지막은 축복으로 마칠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http://tong.nate.com/roiland 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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